* 풀칠 하는 남자
저희집은 낡고 오래된 주택입니다.
방풍도 방한도 방음도 되지않는 그런집이지요.
그런데 막상 도배를 하려고 보니 짐을 다 들어내는 것도 문제고
맡기려고 하니 인건비도 만만찮았습니다.
그러다 문득 한지를 생각해냈습니다.
한지로 도배를 하면 인건비도 줄이고 시간 날 때 마다 붙여나가면 되니까요.
도배지에 비해 한지가 많이 비쌌지만 그래도 짬짬이 바를 수 있고,
사람을 쓰지 않아도 되니 부담이 없었습니다.
남편은 틈나는데로 이방 저방 한지도배를 했습니다.
35년이나 된 낡은 집의 오래된 방이었지만
작은 녹차 이파리가 들어있는 흰색 한지를 붙이니 그런대로 운치가 있었습니다.
벽이 깨끗해지니까 페인트칠이 벗겨진 문짝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페인트칠을 하는 것보다 한지를 붙이는 게 좋겠지?'
제가 풀을 직접 쑤어주었습니다.
남편은 나무 문에 풀칠을 하고 그 위에 한지를 붙였습니다.
창문에는 나뭇잎이 들어있는 분홍색 한지를, 문틀에는 나무색 한지를 붙였습니다.
남편은 손가락 지문이 닳도록 정성들여 풀칠을 하고 한지를 붙여나갔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런 문이 태어났습니다.
그 후, 남편은 틈 날 때마다 집안에 있는 오래된 물건에다 풀칠을 했습니다.
15년 된 농, 긴 다리를 잘라서 좌탁이 된 식탁, 오래되어 버려야 할 화장대, 심지어 전기계량기박스까지 한지옷을 입혔습니다.
(한지를 붙인 15년 된 장농)
남편이 풀칠을 시작한지 3년이 지났습니다.
"한지는 여자 같아서 부드럽게 잘 다루어야 한다."
한지랑 친하더니 이런말도 하더군요.
요즘 우리는 길을 걷다가 버려진 물건(나무로 된)을 보면
"저거 한지 붙여도 되겠다." 라는 말을 잘합니다.
정말 세상엔 버릴 게 없습니다.
며칠 전, 막내 시누이가 한지공예 재료들을 싣고 왔습니다.
예전에 구입한 재료들인데 만들지 못하고 그냥 둔거라며.
그동안 재활용에만 한지를 붙이던 남편은 한지공예 재료을 보더니
물 만난 고기처럼 눈이 빛났습니다.
골격 틀을 맞추어 고정시키고- (글의 뼈대 만들기)
그 위에 붙일 검은 색 한지를 재단한 다음 (구성 짜기)
풀칠을 하며 주름기법을 사용했습니다.(문장 만들기)
다음엔 탈색-색한지를 탈색하니까 古가구처럼 바뀌더군요.(반전)
마감제를 바르며 마무리를 했지요. (결론 내기)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저는 글쓰기 기법을 생각했습니다.
팔각탁자와 연필꽂이
연필꽂이가 된 대통밥 그릇
남편은 올해 초, 다니던 직장이 폐쇄되어 한동안 휴직상태였습니다.
슬슬 우울증 증세를 보이더군요. 지켜보는 제가 다 힘들 정도로.
다행히 남편은 다시 풀칠을 시작했습니다.
아이들 방(2층)의 창문과 방문에 한지를 붙이며 한여름의 더위와 우울증을 조용히 보냈지요.
(지금은 복직되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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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풀칠은 우리가정의 행복이 도망가지않게 해주었습니다.
돌아보면 그동안 휴직을 했기에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고,
열심히 풀칠을 했기에 남편의 한지 실력이 늘었던 것 같습니다.
"열심히 노력하고 애쓰면 신은 능력을 선물로 준다"
정말 맞는 말입니다.
이제는 마음놓고 제 일을 해도 될 것 같습니다. (*)
첫댓글 와! 풀칠하는 남자, 멋져요. 작품은 더 멋지네요!!! 선배님 속에서 멋진 작품 나올 것 같은 예감, 팍팍 듭니다. ^^
에공, 그러니까 선배님 말씀은 <노력하고 애쓰면 신은 능력을 선물로 준다>신데 저는 능력자 주변을 얼쩡거려볼까나,하는 빠른 길만 찾고 있습니다.^^*ㅎㅎㅎ
보물창고같았던 소산선생님댁~* ^ ^
와! 한지 공예가가 보고 울고 가겠어요^^ 역시 같이 사는 사람은 닮는 모양입니다. 우리집도 주택이라 저도 지난번에 선배님 집 가서 보고 한 번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은 했는데 엄두가 안나서 ... 두 분 정말 예쁘게 사시는 것 같아요^^
바로 이걸 동화로! 장인 수준이네요~
선배님의 삶이 동화네요. 언제 한 번 선배집 구경가야 하는데...
도배를 하면서 글쓰기를 생각하시다니... 소산 선배님처럼 모든 일을 그렇게 생각하면 좋은 동화가 술술 써질 것 같습니다.
어? 정말 소산 선배님 얘기인가요? 방 꾸밈을 보니 맞긴 맞는데...선배님 뿐만 아니라 남편 되시는 분도 정말 멋있고 대단하시네요..^^*
멋진 작품들입니다. 두 분의 모습이 아름다워요~~ 저도 선배님 집 구경 꼭 하고 싶습니다 ^^
집이 한 편의 동화 같습니다. 두 분 삶도 정말 아름답구요. 참, 소산 선배님께서 주신 <그림공부>책은 재은이가 잘 가지고 놀고 있답니다. 감사합니다. 인사가 넘 늦었죠? ^*^
정말 대단하시네요. 부럽습니다.
우리 집 화장실 문도 벗겨지기 시작했는데, 남편 데려다 모니터 속 소산님 집 구경시켜줘야 겠어요. 보고만 있기 아까울 정도, 투 잡 하셔도 될 거 같아요!
댓글 많이 달아주셨네요. ^^* 몸도 마음도 글도 행동도 동화처럼 사는게 제 꿈인데 제 이름처럼 늘 미숙합니다. 그래도 더 노력하면 될 거라 믿으며 더 열심히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소산님, 풀칠과 창작과정은 석사 논문 제목이네요 "동화 창작 기법으로서 한지공예의 효과". 하지만 이런 것보다 가족들을 하나로 묶어준 좋은 친구가 되어준 한지 공예가 바로 삶에 기븜을 준 주인공이네요~~동화로 잘 만들어 보세요! 좋은 결과가 생길겁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할 지, 무엇을 하며 살아야할 지, 글나라에선 그 길을 열어주시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
정말 멋집니다...두 분 사시는 모습이 다른 부부들에게 귀감이 되는 듯합니다...
와! 풀칠하시는 소산님 부군, 멋지십니다. 두 분 사시는 모습이 마냥 부럽습니다.
아! 최선생님이시군요.반갑습니다.^^* 선생님내외분은 더 멋지시던걸요?
선배님 이거 동환데. 한지만 바르는 게 아니라 행복을 바르는 풀칠이네요. 한지처럼 질기고 푸근하고 곱고 따듯한 동화 한편 기다립니다.
그처럼 자상하신 낭군님과 사시는 소산님, 행복의 열매를 수확하시면 되겠네요. 참으로 부러운 정경입니다.
좋은 글과 사진 잘 보았습니다. 마음결이 아름답습니다. 옛말 중 '입에 풀칠도 못하겠다.' '입에 거미줄 치랴' 등 재미있는 말이 생각나네요. 풀칠한 한지를 햇살아래서 튕기면 탱^^ 소리가 난답니다. 탱^^ 소리나는 부부입니다.
부부는 닮는다지요? 사진속 풍경과 함께 잔잔함이 흐릅니다.
우와! 멋지십니다. 기법을 전수받아서 실생활에 적용해야 겠습니다.
솜씨가 보통이 아니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