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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홍준대표님의 카톡에서]
🏡 지리산 무아정을 아시나요? -
기적이다!!!
지리산에 가면 누구나 주인이 될 수 있는 집이 있다.
하룻밤은 물론 닷새까지는 침식이 무료로 제공된다.
더 묵고 싶다면 닷새가 지나 아랫마을에 내려가 하루를 보내고
다시 찾으면 그만이다.
그것도 진정 필요한 이들이 이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한 방편이다.
주인은 있으되 주인 행세를 하지 않는다.
밥해주고 이부자리 챙겨주고 술이나 차를 따라주니 자신 왈
남자기생이라 부른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단 말인가? 사람들은 으레 의아해할 수밖에 없다. 청학동 박단골 상투머리에 자리잡은 그야말로 모두가 주인인 '주인없는 집' 무아정(無我亭)이다.
절 같은 한옥 건물 두 채엔 6개의 방이 있어 비좁게는 40명까지 하룻밤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이다.
마루에 앉으니 겹겹으로 중첩된 지리산 자락의 골골들이 사열을 받듯 도열해 있다.
지리산과 결혼했다는 짧은 승려 머리의 50대 후반 주인은 저녁이 되자 밥을 안치고 반찬을 만드느라 바쁘다.
무아정을 찾은 한 여성이 도우려 하지만 한사코 뿌리치며 편안히 쉬라고 말한다.
밥을 짓는 사이 방문객들은 이방 저방을 둘러본다.
가지런하고 깨끗하게 정돈된 품이 도저히 남성의 손길이라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빨아서 차곡차곡 개켜놓은 타월과 황토와 감물을 들인 면 이부자리는 어느 특급호텔 못지않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방 한쪽에 놓여진 발재봉틀로 그것들을 손수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방바닥은 무명천을 바르고 콩댐을 해 어린 시절 고향 안방에 누운 기분이다.
밥이 다됐다는 소리에 방문객들은 통나무로 만든 밥상이자 찻상에 빙 둘러앉았다.
구수한 된장과 산나물들로 그득하다.
누군가가 가져온 삼겹살을 구워 싸먹으니 금세 게눈 감추듯한다.
소주 한 잔씩이 돌아가고 술기운이 오르자 무아정 주인이 산에서 나는 각종 열매와 약초로 담근 술을 내놓는다.
질문이 쏟아졌다.
왜 이런 곳에 혼자 사느냐 돈을 받지 왜 그러냐? 등등.
세상사람들의 눈높이론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한 두가지가 아닌 게다.
아무 말 없이 빙그레 웃던 그가 음악 하나를 틀어준다.
무아정에 인연 따라 왔거든 무거운 마음의 짐일랑 내려놓고 가라 한다. 대금산조에 실린 장사익의 노래가 흘러 나온다.
"모래알 같이 많은 사람 하필이면 왜 당신이었나 미워서도 아니고 좋아서도 아니다.
너무나 벅찬 당신이기에 말없이
돌아서서 조용히 가련다.
별같이 많은 사람
하필이면 왜 당신이었나
잘생겨서 아니고
못나서도 아니다.
너무나 높이 뜬 당신이기에
고개 숙여 걸으며 두 눈을 감는다." (뜨거운 침묵)
그가 덩실덩실 어깨춤을 춘다.
객들도 한데 어우러진다. 금방 방 안이 춤판으로 변했다. 내가 없으니(無我) 모두가 하나 됐다.
이내 열띤 토론이 벌어지는가 했더니, 누군가가 소리 한가락을 뽑아댄다. 대금과 장구가 장단을 맞춘다.
그는 다만 지극정성으로 '사람들 마음의 발'을 닦을 뿐이다.
그가 바라는 것은 단 한가지. 그저 좋은 마음들을 듬뿍 담아 가지고 각자 처소에 돌아가 그 마음을 나누기만 하면 된다.
극진히 대접받은 자만 남을 대접할 수 있는 법. 방문객이 없을 땐 그는 빨고 닦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무아정 호텔'의 청소부이자 관리원이 된다.
한 사람이라도 오면 그는 바로 일을 멈추고 서비스 맨으로 돌아간다.
행여 일을 하고 있으면 불편해할까 봐서? 덕분에 쉰다는 생각에 오는 손님이 반갑다.
인연 따라 알고 찾아온 이들을 정성 다해 모시는 일이 그에게는 삶의 존재 이유다.
이세상 태어나 남에게 뭔가 해줄 수 있다는 자체가 축복이자 행복이라는 것을 알아버렸다.
그는 베트남전에 참전 총탄을 맞아 상흔을 지닌 상이용사다.
한땐 금융기관에 근무하기도 했다. 생사를 넘나들었고 돈도 벌어본 셈이다.
나이 마흔을 넘기면서 많은 것을 가지려는 욕망이 부질없어 보였다.
세상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가지지 않아도 살 수 있다는 확신이 섰다. 무엇이 제대로 살아가는 삶인가 고민했다.
직장 생활 중에도 주말엔 늘 산행을 즐겼던 그는 어느 해 이곳 무아정 터를 알게 되었고, 매년 12월 말이면 열차를 타고 지리산에 내려와 새해를 맞으며 인생 후반기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 궁리했다.
지리산 골짜기를 다비장 (불교식 화장) 으로 삼는다는 각오로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무아정을 지었다.
이제 지리산 생활 9년째를 넘겼다.
모르는 사람들의 방문을 받는다는 것은 보통 사람들에겐 피곤한 일이다.
그도 예외는 아닐 듯 싶은데, 사람을 만나면 기를 받아 힘이 솟는단다.
사람 오는 것이 피곤했다면 분명 그는 벌써 무아정을 떠났을 것이다.
침식 준비만 해도 일해주는 사람 두세 명이 족히 있어도 간단한 일이
아니기에 그렇다.
그에게서 삶의 도(道)는 사람들을 통해 즐거움을 얻는 것이다.
황토물과 감물을 들인 면이불 9채를 만든 이유이기도 하다.
가끔 누군가가 과음으로 이불에 술을 토해도 그는 덕분에 이불 한번 더 빨아보는 기쁨이 있다고 말한다.
뺨을 때려도 밥해줄 수 있는 마음,
미안해 하지 않게 마음을 쉴 수 있게 해주는 것이 그에겐 모두가 도의 세계다.
사람 속에서 사람을 느끼는 것, 같이 어울리면서 똑같은 마음을 느낄 때도 그것은 도다.
성경과 불경의 가르침이 따로 없다.
크리스마스 땐 대형트리가 장식되고
부처님 오신 날에는 연등이 내걸린다.
여름철 방문객이 많을 땐 방을 손님께 내주고그는 이불 하나 달랑 가지고 텐트를 치고 잔다.
행복찾기는 당구의 스리쿠션과 같은 것. 나의 행복 나의 천당만 따지기보다 그는 차라리 사람들의 기생이기를 원한다.
무아정에서 사람들이 무언가 느끼고 가면 마음의 변화가 생기고 작지만 그러면서 세상은 변화된다는 얘기다.
방 안과 건물 주변엔 주판 풍로 숯불다리미 등 1960~70년대 흔히 보았던 생활용품들이 정돈되어 있다. 과거의 물건들이 사람들에게 마음의 평안을 주고 자신을 되돌아보게 해주는 매개체로 더할 나위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무아정을 찾은 사람은 4000명이 넘는다.
그렇다고 쌀독이 바닥난 적은 없다.
신기하게 쌀이 떨어질 만하면 다시 채워졌다.
생활비는 상이군인 연금으로 충당한다.
국가만 있다면 돈 끊길 일이 없으니 무아정에 국기를 게양해 놓은 연유다.
100만원도 안 되는 돈이지만
국민세금으로 충당되는 것이니 나누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다.
결국 무아정 방문자들은 자신들이 낸 세금을 되돌려받는 것이니 굳이 미안해 할 필요가 없단다.
무아정이 종종 사회복지를 공부하는 학생이나 사관생도들의 단골 교육장이 되는 사연이다.
신부 수녀 목사 스님 등 종교인은 물론 예술인들도 단골이 많다.
무아정은 집을 비워도 문을 잠그는 법이 없다. 누구나 주인이 되어 밥을 먹고 자고 가면 그만이다.
수석 등 손이 탈 만한 물건들도 그대로 방치되고 있다.
누군가 가져가면 그만이지만 분실사고는 드물다.
갖고싶어하는 물건은 이들에게
그자리에서 줘 버린다.
무아정은 그런 과정을 통해 물욕에서 자유로워지는 법을 가르친다.
주변에서 무아정을 돕겠다고 번번이 나서지만 그때마다 성철 스님의 경구 하나를 내뱉는다.
자기를 속이지 않는것(不欺自心)이 그를 도와주는 일이라고. 무아정에서 이뤄지는 모든 일은 결국 그가 그를 위한 공양 의식이다.
자신이 언론에 공개되는 것을 극구 사양하는 근본 이유이기도 하다.
단순한 호의와 호기심이 무아정을 변질시켜서는 안된다는 생각에서다.
이른 시간 무아정을 나서는데 그가 말을 던진다.
"이제 별장 하나 장만하고 든든한 관리인도 뒀으니 마음이 곤궁할 땐 언제라도 내려오라고."
별장 구입자금으로 준비한 돈이 있다면 좋은 곳에 기부하란다.
시뻘건 일출이 지리산 자락을 불사르고 있다.
무아정도 함께 불탄다.
내가 없는 무아의 세계다.
<지리산 청학동 무아정 찾아가는 길>
하동에서 하동역쪽으로 직진을 하신 후,하동역을 지나 직진을 300~400m 하시면 갈림길이 나옵니다.
그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가십시오. 이정표에 '청학동'이라고 씌어져 있습니다.
지도상으론 진주방향이 아닌 하동호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그곳에서 계속 직진을 하십시오.
한참을 들어가야 합니다. 그럼 하동호를 지나 마을이 나옵니다.
그곳에서 또 왼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노면에 '청학동' 이정표가 써 있으니 그쪽으로 따라 가시면 됩니다.
좌회전을 하신 후 또 직진을 하십시오.
한참을 들어가시면 또 저수지 하나가 나오고 그곳에서 더 들어가시면 두갈래의 길이 나옵니다.
그곳에 한복을 입은 아저씨가 고추장을 담그는 광고판이 나옵니다.
그 광고판을 지나면 두 갈래의 길이 나옵니다.
무슨댐(청학동 도인촌)과 '삼성궁'으로 이정표가 써있습니다.
삼성궁쪽으로 가십시오. 거기서 한 100~200m 내려가면 식당이 있고,
오른쪽으로 좁고 가파른 길이 나옵니다.
그 길로 올라가셔서 꼭대기 집이 무아정입니다.
꼭대기에 두 집이 있는데 왼쪽에 있는 곳이 무아정입니다.
주소 : 경남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 청학동 '무아정'
연락처 : <NAME SPACE PREFIX 055-884-7780
<무아정을 오기 전에 미리 알아둘 것들>
- 술을 마신 채 무아정을 찾아가면 곤란, 술은 그곳에 와서 흥겹게 마시면 된다.
밥은 용아저씨가 해 주신다. 정말이다. 그러나 설거지와 방 청소는 스스로 한다.
- 유무형의 소중한 것들을 얻었다면 자신도 유무형의 소중한 것을 하나쯤 남기고 오면 더욱 좋다.
그러나 반듯이 그래야 하는 건 아니다.
- 닷새 이상 연속해서 묵을 순 없다. 더 묵고 싶으면 하룻밤 다른데서 외박하고 다시 오면 된다.
가끔 단체 방문객들이 많아 빈방이 없을 수도 있어 미리 전화연락을 하고 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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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에서 성명서가 나왔습니다 ㅡ
*코로나19 재확산에 즈음하여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성명서
코로나19 감염사태는 멈추어 서서 돌아보고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라는 하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가 멈추어 선 동안에도
욕망의 걸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돌아보는 일에 게을렀습니다.
삶의 대전환을 요구하는 거대한 문명사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돌이켜 사는 길을 찾지 않았습니다.
결국 복음을 전파해야 할 교회는
도리어 코로나19의 슈퍼전파자가 되어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게 되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만일 소금이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밖에 버려져 다만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는 말씀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교회를 향한 분노와 아우성 속에서 하늘의 음성을 듣습니다,
‘너희가 결코 세상보다 이타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합리적이지도 윤리적이지도 않다.’는
준엄한 꾸짖음을 듣습니다.
참담하고 부끄럽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송하고 세상 앞에 미안합니다.
회개로 무릎을 꿇고 참회로 엎드립니다.
극우적 정치이념과 근본주의적 믿음이 결합한
‘전광훈 현상’은 한국교회의 민낯이었습니다.
분단체제에서 화해의 가교가 되어야 할 교회가
대결과 증오를 부추겼습니다.
극단적 혐오와 막말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전광훈 현상’은 이 엄중한 시기에
국가적 방역체계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었습니다.
사랑제일교회 발 확진자만 800백 명이 넘어섰음에도
‘바이러스 테러다.’, ‘확진자 조작이다.’는 등의
가짜 뉴스를 유포하고,
병원을 탈출하는 등 일반적 상식과 규범마저 무너뜨렸습니다.
한국교회는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한국교회는 즉각 전광훈목사와의 관계절연을 선언하고,
그를 교계에서 추방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전광훈 현상을 배태하고 비호하거나
또는 방관해온 그동안의 한국교회의 잘못을 통렬하게
참회해야 합니다.
지금의 코로나 상황은 우리에게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습니다.
교회에 대해서, 예배에 대해서,
믿음에 대해서 숱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해야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교회는
세상 가운데에, 생명을 살리신 그리스도의 몸으로 존재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럼에도 종교의 자유, 헌법상의 자유를 내세우며
대면 예배를 비대면 예배로 전환하라는 방역당국의 요청을 거부하고 나서는 목사와 교회들이 있습니다.
나의 종교적 자유가 남을 위험에 빠트릴 자유까지
포함하는 것은 아닙니다.
헌법과 법을 논하기 이전에,
교회는 세상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십자가를 짐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어야 할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교회가 세상에 십자가를 지워주는 꼴이 되었습니다.
자기주장을 위해 세상의 희생에
무관심할 때,
이미 그것은 교회도 아니고 신앙도 아닙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교회는 집단이기주의,
거짓우월감과 자가당착,편견과 혐오를 전파하는
집단이 되었습니다.
생명의 하나님은 코로나19를 통해
생명의 존엄을 위협하는 개인과 집단과 문명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가 그 심판의 대상이 아닌지 두려운 마음으로 성찰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한국의 근대화와 민주화에 기여한
소중한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 구석구석, 섬기고 봉사하는 현장에는 교회가 있었습니다.
국가적 위기 때마다 힘을 보탠
아름다운 전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 전통의 깃발은 찢겨졌고 땅에 버려져
밟히고 있습니다.
그 깃발은 우리로 인해 빛을 잃었습니다.
우리는 온전한 참회 가운데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되어 세상의 아픔을 보듬고 섬겨야 합니다.
분단과 대결의 상처를 가슴에 품고
평화를 여는 거름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을 몸으로 살고, 삶으로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는 2020년의 한국교회의 부끄러움과 수치를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은 실패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실패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이 땅 위에 생명을 살리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
다시 일어설 것입니다.
기장교회는 물론 깨어있는 신앙의 형제 교회들과
손을 마주 잡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코로나 재확산의 위기 앞에서 모든 교회들이
방역에 앞장서 협력함으로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는 데
온 힘을 다할 것을 다짐합니다.
이 다짐을 실행하는 기장교단의 모든 교회와
또한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고 코로나19방역을 위해 애쓰는 수많은 사람들과 사회경제적 피해자들에게 하늘의 위로가 가득하기를
두 손 모아 기원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 14, 16)
2020. 8. 24.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 육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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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판 오분전
<개판5분 전> 이라면 흔히 알기로는
무질서한 난장판을 연상하게 됩니다.
유래는 이렇습니다.
6,25 전쟁 때, 부산에 피난민들에게 무료급식을 하는데
"개판오분전 이요 ~!"
이렇게 외치며 배식 시간을 사람들에게 알려 줬다고 합니다.
이때 사람들이 급식을 받기 위해 몰려들어 아수라장이 되어 그때의 상황을 '개판오분전' 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정확히는
- 개(열 개開) 판(널빤지 판 板) 을 써서 밥뚜껑인 판이 열리기 5분 전이라는 의미로 쓰였답니다.
배고픈 굶주림엔 너나할 것 없이 아귀(餓鬼) 아수라(阿修羅) 같이 난장판이 된다는 뜻입니다.
작금(昨今)의 시대적 개판오분전은?
굶주린 개가 판치는 개판이 맞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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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대가 전해주는 메시지
-샘터교회 안중덕 목사-
1. 마스크를 착용하라는 것은
'잠잠하라'는 뜻입니다.
막말과 거짓말을 하지 말며 불필요한 말을 줄이고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는 말입니다.
입을 다물면 사랑스러운 것들이 시선에 머물고 아름다운 소리와 세미한 속삭임이 들려올 것입니다.
2. 손을 자주 씻으라는 것은
'마음을 깨끗이 닦으라'는 뜻입니다.
악한 행실과 죄에서 돌이켜 회개하고 성결하라는 말입니다.
안과 밖이 깨끗하면 자신도 살고 남도 살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마음의 거울을 닦으면 자신이 보이고, 마음의 창을 닦으면 이웃도 보일 것입니다.
3. 사람과 거리를 두라는 것은
'자연을 가까이 하라'는 뜻입니다.
사람끼리 모여 살면서 서로 다투고 상처를 주지 말라는 말입니다.
공기와 물과 자연의 생태계를 돌보며 조화롭게 살라는 말입니다.
자연을 가까이 하면 마음이 넉넉하여 모든 것들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4. 대면 예배를 하지 말라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뜻입니다.
위안을 얻거나 사람에게 보이려고 예배당을 가지말고 천지에 계신 하나님을 예배하라는 말입니다.
어디서나 고요하게 하나님을 대면하면 그의 나라와 그의 뜻에 가까이 이르게 될 것입니다.
5. 집합을 하지 말라는 것은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하라'는 뜻입니다.
모여서 선동하거나 힘자랑하지 말고 사람이 그리운 이들의 벗이 되라는 말입니다.
우는 이들과 함께 울고 무거운 짐을 홀로 진 이들과 나누어진다면 세상은 사랑으로 포근해질 것입니다.
마음닿기는 종교가 기독교는 아닙니다.
종교의 좋고 나쁨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단지 종교라는 이름하에 서로를 비방하고, 다름에 맹렬한 비난을 하도록 만들며 자신이 믿고 있는 종교만이 유일한 종교라고 칭하는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위 글은 샘터교회 안중덕 목사가 쓴 글로 이글이 문재인 대통령의 페이스북에 올려진 글로 화재가 되고 있더군요.
읽어보니 안중덕 목사님의 글솜씨가 정말 예술입니다.
글안에서 현재 돌아가는 사회의 심각함과 종교에 대한 진정한 성찰이 느껴지기에 공유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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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한 도시에 사는 죄
이 지구상에서 가장 ‘사회적’ 생물은 개미라고 한다.
퓰리처상을 받은 책 '개미세계의 여행'을 보면,
앞으로의 지구는 사람이 아니라 개미가 지배할 것이라는
다소 생뚱맞은 주장을 펼친다.
그 근거는 개미들의 희생정신과 분업 능력이 인간보다 더 뛰어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개미는 굶주린 동료를 절대 그냥 놔두는 법이 없다.
그 비결이 무엇일까?
개미는 위를 두 개나 가지고 있다.
하나는 자신을 위한 ‘개인적 위’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위’다.
굶주린 동료가 배고픔을 호소하면 두 번째 위에 비축해 두었던 양분을 토해내 먹이는 것이다.
한문으로 개미 ‘의蟻’자는 벌레 ‘충虫’자에 의로울 ‘의義’자를 합한 것이다.
우리 인간의 위도 개미처럼 두 개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랬다면 인류는 굶주림의 고통을 몰랐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딱 하나의
위만 주셨다.
그래서일까?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은 굶주림의 고통이 닥쳐올 때 닭보다 더 무자비한 행위도 서슴지 않곤 한다.
하지만, 그 보다 더 놀라운 일은 위가 한 개 뿐인 인간들이 때로는
위를 두 개나 가진 개미들보다 더 이웃의 아픔을 자기 일처럼 감싸 왔다는 사실이다.
1935년 어느 추운 겨울밤이었다.
뉴욕 빈민가의 야간 법정을 맡고 있던 피오렐로 라과디아(Fiorello La Guardia) 판사 앞에
누더기 옷을 걸친 노파가 끌려 왔다.
빵 한 덩어리를 훔친 죄였다.
노파는 울면서 선처를 호소했다.
사위란 놈은 딸을 버리고 도망갔고,
딸은 아파 누워 있는데,
손녀들이 굶주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빵 가게 주인은 비정했다.
고소 취하를 권면하는 라과디아 판사의 청을 물리치고
‘법대로’ 처리해 달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라과디아 재판장이
노파를 향해 이렇게 선고한다.
“할머니, 법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어요.
벌은 받아야 합니다.
벌금 10달러를 내시거나 아니면 열흘 간 감옥에 계십시오.”
선고를 내리고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갑자기 모자를 벗더니 자기 주머니에서
10달러를 꺼내 거기에 넣는 것이 아닌가.
그는 이어서 이렇게 최종 판결을 내린다.
“여러분, 여기 벌금 10달러가 있습니다.
할머니는 벌금을 완납했습니다.
나는 오늘 굶주린 손녀들에게 빵 한 조각을 먹이기 위해
도둑질을 해야 하는 이 비정한 도시에 살고 있는 죄를 물어 이 법정에 앉아 있는
모든 사람에게 50센트의 벌금형을 선고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자를 법정 경찰에게 넘겼다.
그렇게 모인 돈이 자그마치 57달러 50센트였습니다.
대공황의 불황 속에서는 결코 작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판사는 그중에서 벌금 10달러를 뺀 47달러 50센트를 할머니의 손에 쥐어주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뉴욕타임스는 이 훈훈한 이야기를
이렇게 보도했다.
《'빵을 훔쳐 손녀들을 먹이려 한 노파에게 47달러 50센트의 벌금이 전해지다!'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된 빵 가게 주인과 법정에 있다가 갑자기 죄인이 되어 버린 방청객,
그리고 뉴욕 경찰들까지 벌금을 물어야 했다.》
현재 뉴욕 시에는 공항이 두 개 있다.
하나는 J.F.K. 공항이고
다른 하나는 라과디아 공항이다.
전자는 케네디 대통령의 이름을 딴 공항이고,
후자는 바로 피오렐로 라과디아 재판장의 이름을 딴 것이다.
그는 이후 뉴욕 시장을 세 번이나 역임하면서
맨해튼을 오늘날 맨해튼으로 만든 장본인이다.
그리고 라과디아 공항에는 그곳 주차장의 특이한 주차위치 표시에 담긴 일화(逸話)가 있다.
그곳 주차장 바닥에는 ‘Judges(법관)'
그 옆에는 ’Handicapped(장애인)' 'Senators(상원의원)'라는 주차표시가 나란히 있다.
아무리 법관이 존경받는다는 사법국가 미국이라지만,
그 미국에서도 다른 지역에서는 좀처럼 만나보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어째서 장애인이나 상원의원보다 법관의 주차위치가 더 좋은 곳으로 지정되었을까?
그것은 한 법률가의 따뜻한 마음씨에서 우러나온 인간애의 표현으로 받아들이고 훈훈했던
즉결법정을 회상하기 위해 공항 주차장의 가장 좋은 위치에 법관들을 위한 자리를 따로 마련해 놓았다고 한다.
-장윤제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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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초등학교 글짓기 대회에서 1등을 한 구로초등학교 3학년
용욱이 의 글입니다.
회개의 눈물로 감상하세요
신자'가 아니어도 감동이
밀려오는 글입니다.
http://m.cafe.daum.net/wjsqnrxhdydlf/OGlS/50?listURI=%2Fwjsqnrxhdydlf%2FOGlS%3FboardType%3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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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스베가스 벨라지오 호텔이 코로나로 힘든 세계 모든 분들을 위해
평소 엄청 비싼 태양의 서커스 "O,SHOW”를 무료로 오픈 했답니다.
큰 화면으로 보시면 더욱 멋있을것 같습니다!
https://arteconcert-a.akamaihd.net/am/concert/076000/076600/076634-000-A_SQ_0_VOA-STA_03416125_MP4-2200_AMM-CONCERT-NEXT_syEh1Kq24F.mp4
TV로 streaming해서 보니 볼만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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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리고 갑자기 모자를 벗더니 자기 주머니에서
10달러를 꺼내 거기에 넣는 것이 아닌가.
그는 이어서 이렇게 최종 판결을 내린다.
“여러분, 여기 벌금 10달러가 있습니다.
할머니는 벌금을 완납했습니다.
나는 오늘 굶주린 손녀들에게 빵 한 조각을 먹이기 위해
도둑질을 해야 하는 이 비정한 도시에 살고 있는 죄를 물어 이 법정에 앉아 있는
모든 사람에게 50센트의 벌금형을 선고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자를 법정 경찰에게 넘겼다.
그렇게 모인 돈이 자그마치 57달러 50센트였습니다.
대공황의 불황 속에서는 결코 작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판사는 그중에서 벌금 10달러를 뺀 47달러 50센트를 할머니의 손에 쥐어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