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2번째 편지 - 이래도 세월 가고 저래도 세월은 갑니다
우리는 AI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Chat GPT가 나오고 더 이상 영어나 일어 등 외국어 공포에 시달리지 않아 좋았습니다. 저는 평생 영어의 벽을 넘지 못하고 늘 영어 주변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학창 시절 십수 년간 영어를 배웠고 직장을 다니면서도 영어 공포증 때문에 1년에 몇 개월은 회화 선생님을 초빙하여 배웠지만 거기서 거기였습니다.
검찰에는 일정 기간 근무를 하면 1년간 해외연수를 보내주는 제도가 있습니다. 저도 해외연수를 가기 위해 처음에는 영어를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나 경쟁자들이 많고 실력자들이 수두룩해 바로 포기하였습니다.
다음으로 선택한 언어가 일본어입니다. 혼자서 몇 달간 독학을 하고 외국어 대학교 평생교육원에 시험을 봐서 반 배치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시험 성적이 좋아 고급반에 배치되었습니다.
첫 시간부터 한국 신문 사설을 일본어로 가르치면서 무차별적으로 학생들에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저는 매시간 선생님과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앞의 학생 뒤에 숨어야 했습니다. 결국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선택한 언어가 경쟁자가 거의 없던 스페인어였고 혼자 응시하고 합격하여 스페인 연수를 다녀왔습니다. 스페인에서도 영어에 대한 열망으로 스페인어로 영어를 가르치는 학원에 다니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저의 외국어 학습사는 잔혹하였지만 결국 터득한 외국어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외국에 여행 갈 때면 불어를 전공한 아내 뒤에 숨었고 늘 외국인은 기피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Chat GPT는 구세주나 다름없었습니다. 이제는 영어든 일본어든 걱정이 없습니다. 파파고만 열고 대화를 나누면 되니까요. 작년에 일본을 수차례 여행할 때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 외국어 공부를 할 필요는 없어졌습니다. AI 시대가 저에게 준 축복이었습니다. 물론 자유자재로 외국어를 구사하면 좋겠지만 제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라 이렇게 만족하고 살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외국어 자족 생활에 균열이 생겼습니다. 아내가 일본어를 배우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선생님을 집으로 초대하여 일본어를 배우기 시작하였습니다. 두어 번은 저 몰래 배우더니 저에게도 같이 배우자고 권했습니다. 저는 고민하다가 마지못해 끌려 들어갔습니다.
저는 평생의 외국어 수업이 저에게 안겨준 한계치를 잘 알고 있어 큰 기대 없이 수업에 임했습니다. 그런데 이 일본어 선생님은 차원이 달랐습니다. 저보다 두 살이 많은 이 여선생님은 거침이 없었습니다.
두 시간의 수업을 교재 없이 진행합니다. 아내는 일본어 글자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에 비하면 저는 꽤 일본어를 아는 사람입니다. 사법연수원 시절 좀 배우기도 했고, 이래 봬도 일본 연수를 꿈꾸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분의 교수법은 독특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입니다. 일본어를 전혀 모르는 아내에게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아내를 끌어안으면서 당신을 '아나따'(안았다). 기억하세요. '아나따'가 일본어로 '당신'입니다. 지금부터 '이마 까라!. 이마'가 '지금'이고 '까라'가 '부터'입니다. 짧은 거 입으면 엉덩이가 시리지요? '시리'가 '엉덩이'입니다 코가 몇 개지요? 하나이지요. 그러니까 '코'는 '하나'입니다.
일종의 연상법입니다. 아내와 저는 수업에 빨려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두 시간 동안 한눈팔 새가 없습니다. 선생님은 저를 똑바로 바라보고 각종 제스처를 써가며 일본어를 가르칩니다. 선생님은 자신의 눈을 깜빡거리며 "미마쓰"합니다. "미마쓰"가 '봅니다'입니다. 저는 어색하여 선생님과 눈을 마주칠 수가 없습니다. 고개를 외면하는 순간 선생님은 외칩니다.
"저를 쳐다보세요. 절대로 머릿속에 칠판을 그리면 안 됩니다. 그저 저를 보고 따라 하세요. 외국어는 머리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입으로 배우는 것입니다. 제가 동작을 하면 따라 하세요. 저절로 몸에 기억됩니다. 책으로 수십 년을 배워도 외국어를 말할 줄 모르는 것은 머리로 배워서 그런 것입니다. 글 모르는 아이들도 말을 잘 하잖아요."
이렇게 15번, 시간으로 계산하면 30시간쯤 공부를 하였습니다. 교습법도 좋지만 열정적인 선생님 덕분에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 신기합니다. 열심히 공부하는 아내는 일찌감치 저를 따돌렸고 학생 두 명인 클래스에 우열반이 나누어졌습니다. 열등생의 심정이 무엇인지 느끼고 있습니다.
저는 분석하였습니다. "아내가 어떻게 일본어 우등생이 되었을까?"
첫째, 선생님 말씀을 잘 듣고 따라 하기를 잘합니다. 반면 저는 선생님이 말씀을 하면 따라 하기보다 작문을 하려고 머릿속을 굴립니다. 선생님이 외칩니다. "조상! 머리 굴리지 마세요 ."
둘째, 복습을 밤 두세 시까지 합니다. 일본어가 재미있나 봅니다. 틈만 나면 선생님과 전화하여 일본어로 수다를 떱니다. 저는 수업 시간만 간신히 앉아 있습니다. 그것도 수없이 하품을 하고 시계를 보면서 말입니다.
셋째, 저에게 시도 때도 없이 일본어로 말을 걸어옵니다. 그때마다 저는 소음 공해에 시달립니다. 도망치고 싶은 심정입니다. 저는 일본어 <공부>를 하고 있고 아내는 일본어 <소통>을 하고 있습니다.
어제 수업 시간에 저는 선생님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학생 중에 가장 오래 배운 분은 얼마나 배웠나요?" "15년 배운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참 외국어 학습 진도가 더딘 분이었는데 이제는 일본 사람이나 마찬가지로 일본어를 잘하십니다."
저는 선생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10년간 배워 보렵니다. 75세까지 배우렵니다. 그때까지 배워서도 일본어가 안되면 그때부터는 무료로 애프터서비스하세요."
이런 무모한 각오가 얼마나 지속될지 알지 못합니다. 몇 달 만에 손들고 포기할지 아니면 제 일생에 처음으로 외국어를 정복할지 그 결과는 미지수이지만 확실히 상황은 바뀌고 있습니다.
지난주 일본에 갔을 때 파파고를 꺼내지 않고도 말을 하기 시작하였고, 특히 일본어를 유창하게 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나는 그 많은 세월 무엇을 하였나" 하는 자괴감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60대에 '사업한다고 대출받는 사람', '이민간다고 외국어 배우는 사람', '거리 늘린다고 골프 레슨받는 사람'들을 바보라고 한답니다. 저도 그 바보 대열에 들어서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어찌해도 세월은 갑니다. 그냥 지내도 가고, 이렇게 일본어 공부해도 가고. 그러니 기왕이면 일본어 배우며 세월 가면 좋지 않을까요."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24.4.29. 조근호 드림
<조근호의 월요편지>
첫댓글 최근 찍사한 사진을 AI가 만들어 주네요!
참 편리한 시대에 살고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