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보트(U-boot, U-boat)
"100척의 유보트로 수상함대 이상의 성과를 낼 수 있으며, 200척으로는 영국의 보급선을 완벽히 차단할 수 있으며, 300척이 있다면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
- 카를 되니츠
"전쟁 중 내가 유일하게 두려워한 존재는 U보트였다. 우리들의 생명선인 바다를 위협했기 때문이다. 독일은 U보트에 모든 것을 걸어보는 편이 현명했을 것이다."
- 윈스턴 처칠
2. 소개
독일어 운터제보트(Unterseeboot)의 약어로, 영어로 치자면 'Under-Sea-Boat'가 된다. 말 그대로 잠수함. 독일 잠수함만 칭하는 것은 아니고 1차대전 당시 독일어를 공용어로 쓰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잠수함도 유보트라고 했다.
이 자체가 독일어로 잠수함을 뜻하는 명사이지만 영어권에서는 일반적으로 독일 해군이 운용하는 잠수함을 통틀어서 말하며 특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U보트라는 말만 들어도 1, 2차 세계 대전 당시 운용된 독일 잠수함을 떠올린다.
가끔 중위나 소령 함장도 존재했으나 원칙적으로 대위가 지휘관이었고 독일 해군에서 함(Schiff)이 아닌 정(Boot)으로 분류했기 때문에 엄밀히 밀하면 잠수함이 아닌 잠수정이라 해야 하지만 오래 전부터 잠수함이란 용어로 고정되었기 때문에 그냥 잠수함이라고 많이 번역한다. 이는 독일 해군이 베르사유 조약에 명시한 함정 보유 수량 제한을 서류상 회피하려 일부러 타국 해군의 동급 함종보다 급수를 낮춘 탓도 있다. 조약으로 인해 전함과 순양함 각 6척, 구축함 12척만 보유 가능한 현실에서 가용 가능한 구축함을 늘리기 위해 타국의 호위구축함 수준인 천톤급 고속함도 어뢰정으로 분류하고 대위를 지휘관으로 삼은 것이 대표적, 조약 파기 이후에도 연합국에 대한 기만책 일환으로 종전시까지도 이런 체계를 유지했다.
독일 내에서는 현재 세계 각국에서 사용하는 디젤 잠수함의 베스트셀러인 209급 잠수함과 214급 잠수함, 독일 해군이 운용하는 202, 206, 212급 역시 이 U보트라고 부른다.
3. 독일 해군
"유보트 승조원 제군들이여. 이제 6년에 걸친 전쟁이 끝났다. 그동안 누구한테도 부끄럽지 않을만큼 잘 싸워주었다. 이제는 무기를 내려놓아야 할 때다. 앞으로 무슨 일에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던 유보트 정신을 잊지말길 바란다. 이제, 먼저 떠나간 전우들에게 경의를 표하자."
- 카를 되니츠 제독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을 통틀어 엄청난 양의 연합군 함선들을 격침시켜 한때는 영국을 거의 아사 직전까지 몰아갔던 독일 해군의 효녀. 크릭스마리네의 수상 함정들이 영국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는 대륙국가인 프랑스 상대로도 보잘 것 없는 전력을 지니고 있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독일 해군은 자원과 인력이 적게 들어가는 비대칭 전력인 잠수함을 가지고 영국을 괴롭히는 작전 말고는 답이 없었다. 잠수함이 일부 전투함과 싸워서 이긴 전과는 있지만 주 목적은 통상파괴였다. 이것이 무제한 잠수함 작전이다. 이리저리 통상함을 파괴하다보니 중립국, 특히 미국 상선이 재수없게 유보트의 사냥감에 걸려버렸고 이에 분노한 미국이 연합군에 참전하는 계기를 만들어버리기도 하였다.
4. 제2차 세계 대전 활약
"유보트가 정말로 독일 해군의 약골 잠수함이었을까요? 뭐, 그것도 전쟁이 끝나갈 때의 이야기지만요. 하지만 전성기 때 유보트와 그 승조원들의 힘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을 것만 같았죠."
- 밀리터리 Q&A, 히스토리 채널
대서양 전투 문서 참고.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U보트 함대를 지휘한 사람이 바로 유명한 카를 되니츠 제독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초기 독일 해군 잠수함대는 많은 제약을 안고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통상 파괴와 관련된 다양한 조약들이었다. 정선과 검수, 공격 전 경고 등을 명시한 이 조약은 기습, 즉 '쏘고 튀는' 목적이 강한 잠수함으로서는 아킬레스건이었으나 히틀러는 미국 등의 참전을 우려해 잠수함대가 이 조약을 준수할 것을 명령해놓은 상태였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카를 되니츠는 정치적인 작전을 준비했다. 바로 독일 제국 함대의 한이 서린 스캐퍼플로를 유보트로 기습하는 것이다. 귄터 프린 대위가 지휘한 U-47은 영국 해군의 모항인 스캐퍼플로에 침투하여 영국 전함 로열 오크를 격침시키는 대전과를 올렸다. 영국 해군도 입구에 폐선박을 침몰시켜서 방어막을 쳤지만 프린 대위와 U-47 승조원들은 그걸 무시해버리고 뻔뻔하게 수상항해로 도망쳐왔다. 안 그래도 거창한 걸 좋아하는 히틀러가 이 대전과에 열광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호기를 놓치지 않은 카를 되니츠 제독은 "제독이 바라는 대로 300척의 유보트를 띄워주겠소!"라는 히틀러의 약속을 받아냈고 그동안 잠수함대의 발목을 잡아오던 제약도 풀어버렸다. 이는 늑대떼 전술의 시발점이었다.
파일:external/www.bildpostkarten.uni-osnabrueck.de/normal_17_3-007nf.jpg
▲독일 군가 영국 정벌가의 가사가 담긴 그림 엽서에 등장한 귄터 프린 대위(엽서 하단에 "프린 대위는 '리펄스'를 뇌격했고 '로열 오크'를 격침시켰다"라는 설명이 적혀 있다.)
이전까지 잠수함의 전력은 특정위치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목표물이 나타나면 단독으로 공격하고 빠지는 식이었던 데 비해서 늑대떼 전술은 산개한 유보트(= 늑대)들이 무선 통신으로 서로 정보를 교환하다가 시야 안에 선단(= 사냥감)이 나타나면 통신을 통해서 집결지점을 선택해서 다같이 모여서 사냥(= 늑대 떼)하는 전술이었다.(이는 굉장히 효율적이며 현재의 잠수함의 전략으로 흔히 사용되는 전술이다.)
되니츠는 "우리가 300척의 유보트만 있으면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고 했는데, 100척은 작전에 투입하고 100척은 유지 보수 및 임무교대선상에서 대기 100척은 훈련을 받으면서 앞의 100척의 소모를 보충하는 데 쓰는 것으로 계획했다고 한다. U보트가 한참 공포와 엄청난 전과를 불러일으키던 시절인 1939~41년간 북대서양에서 가용가능한 U보트는 평균 7척으로, 단 1척밖에 없는 날도 많았다. 그러나 히틀러가 약속한 숫자의 유보트가 도착하는 날은 상당히 늦어졌다. 1942년에 가서야 100척의 유보트가 동시에 작전에 나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독일의 역량부족이 원인으로 유보트는 1척당 300만달러의 꽤 고급장비(당시 4호 전차가 약 5만 달러 정도)이다. 독소전을 준비하면서 게다가 아직까지 수상함대도 건설중인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단기간에 300척 가량 건조할 수 있는건 미국이라도 쉽지 않다.
영국이 계속해서 대잠전력을 변경하고 확충하면서 U보트의 전과도 이전에 비해서 줄어들었고 막대한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창과 방패의 전략대결로 한쪽이 전술을 바꾸면 상대가 대응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영국은 호송선단을 처음에는 함선 단독으로 운용하다가 선단을 구성하기 시작하고 마침내 구축함이나 호위함과 같은 소수의 호송전력을 추가하는 전략을 완성시킨다. 하지만 유보트 함장들 중 간이 큰 함장들은 아예 그 안에 파고들어서 공격을 감행하기도 했다. 당연히 호위함들은 팀킬할까봐 쉽사리 반격하지도 못했고 그 사이 연락을 받고 온 다른 유보트들이 어뢰를 발사하면서 간이 큰 함장들 중에서는 본인 잠수함이 들키면 호송선단의 공격을 유도하면서 다른 유보트들의 공격을 수월하게 만드는 함장들까지 있었다.
진주만 공습을 기점으로 미국이 참전하고 한달에 한 척씩 건조하는 리버티급 수송선이 투입됐지만 리버티선은 무장도 빈약한데다 유보트에 쉽게 따라잡혔기 때문에 대낮에 모습을 드러낸 유보트의 8.8cm 포의 먹잇감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1942~1943년까지도 유보트의 성과는 무시무시했으며 리버티선의 개량형인 빅토리선(속도가 두 배 가까이 늘었다.)과 소나의 전신인 애즈딕, 항공기 등이 투입됐지만 북극해를 통해 랜드리스 물품을 옮기는 미국과 소련 선단가 유보트의 새로운 먹잇감이 되었으므로 악명은 여전했다. 여기에 공군이 못이겨 주는 편에 가까웠지만 대전 내내 '대서양의 악몽'이라고 불린 Fw 200 콘돌을 제공하면서 유보트의 효율은 더욱 커졌다. 콘돌이 수송선단의 위치를 알려주면 유보트들이 달려들어서 공격을 감행하기 때문에, 수송선단 선원들에게 콘돌이 보인다는 것은 곧 유보트의 공격이 시작된다는 전조였다.
대전 후반에는 7형에도 장비되었던 스노클을 도입하고 배터리 용량을 예전의 5~1.5배 이상으로 늘려(U보트 7형의 배터리는 7000~9200 Ah, 9형은 11300~ 22600 Ah 21형은 33900 Ah) 작전반경을 늘리고 전기모터출력을 올리고 수중고속항행용의 디자인을 채용해서 수중속도를 늘린 신형 U보트인 21형이 등장했다.
그러나 이 전술을 위해서는 유보트와 사령부간의 통신이 필수적이었는데 연합군은 허프-더프라는 장치를 개발하여 이런 무전을 감청하고, 장거리 레이더로 잠수함들의 위치를 찾아내기 시작했다. 이런 방법이 효과적이었던 이유는 잠수함의 배터리 용량 한계로 잠항 시간이 짧고 모터의 출력 문제로 속도 역시 느렸기 때문이다. 이 탓에 적군의 항공기(특히 전쟁 중, 후반 무렵부터 등장하는 수상탐색 레이더를 탑재한 초계기)에 노출되면 손발도 쓸 수 없었다. 물론 잠수함들도 이런 해상초계기의 위협에서 벗어나려고 레이더 전파를 역으로 탐지해내는 안테나를 달고 다니곤 했으며 호위함이 붙는 호송선단에 대응하기 위해서 공격에 가담하는 유보트의 수도 늘리는 등 늑대떼 전술을 더욱 향상시켰으며 항공기의 항속거리가 미치지 않는 곳으로 이동해가며 호송단을 사냥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하지만 헤지호그 폭뢰, B-24 리버레이터 등의 장거리 폭격기가 등장하고 보그급으로 대표되는 호위항모가 호송선단 호위에 투입되자 에어갭(air gap) 이라고 불렸던 대서양의 사각지대가 거의 사라졌고 호위항공모함에, 무장호송선에도 캐터펄트가 설치되어 전투기를 제공할 수 있게 되면서 Fw200 역시 쫓겨나고 만다. 이렇게 대전초기의 위용은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U보트의 가장 큰 패인은 역시 앨런 튜링을 필두로 한 영국의 암호 해독반이 독일군의 암호 해독장치인 에니그마를 해독해 낸 것이다. 이로 인해 모든 작전이 드러나게 되고 U보트의 예상 위치, 진로, 현재 목적지가 다 드러나게 되며 모든 메리트를 상실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기들 작전이 너무 잘 들킨다는 것을 깨달은 크릭스마리네가 에니그마 구조를 더 복잡하게 고치자 아예 유보트를 나포해서 신형 에니그마를 입수한 뒤 암호를 해독하게 된다. 그 결과, 독일은 2차대전에서 9백여척의 유보트 중 777척(그 대부분이 1944~1945년)을 잃게 된다. 그나마 크릭스마리네의 경우 개전 이전부터 뚫려버린 육군 및 루프트바페보다는 오래 버티고 있었지만 초기 3로터 에니그마는 1941년 5월부터 해독당하고 있었고 1942년 2월 로터를 하나 더 늘려 암호를 더 복잡하게 하자 잠시는 따돌릴 수 있었으나 1942년 말부터 4로터 에니그마가 해독당하기 시작하더니 1943년 9월부터는 완전히 털리게 된다. 이로써 유보트 승조원 4만여명 중 3만 5천여명이 전사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미국의 무지막지한 생산력이 절정에 달하기 시작하면서 격침당하는 수보다 훨씬 많은 수송선들이 무사히 도착하게 되면서 유보트가 아무리 애를 써도 더 이상 큰 효과를 볼 수 없게 된다. 유보트가 전쟁기간에 격침시킨 총 상선이 1,500만톤이고 영국이 자체적으로 찍어낸게 600만톤에 캐나다등 영연방국가에서 받아온게 600만톤에 그외 다른 연합국(프랑스등)에서 얻어온 배들이 300만톤으로 현상을 유지하는데 미국은 혼자서 2,500만톤을 건조했다.
물량에는 장사없다. show me the money & operation cwal
4.1. 몬순 전단
유보트 세력이 대서양에서 열세를 보이기 시작하던 1943년, 이들 중 일부는 인도양과 태평양까지 진출해 일본과 공동 전선을 구축하게 되는데 이를 몬순 전단(Monsoon group)이라 부른다. 이 해역은 독일과 일본이 공동 전선을 펼친 유일한 전역이며, 아군의 잠수함을 적으로 오인해 공격하는 일이 없도록 잠수함에 대한 공격은 상호간에 금지되었다.
하지만 인도양까지 가는 것만 해도 험난한 여정이었고 많은 유보트들이 가거나 돌아오는 길에 격침당했다. 특히 전세가 완벽하게 기운 대전 후기에 귀항하던 몬순 보트들은 스노클을 장착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더더욱 손쉬운 먹잇감이 되었다. 이 와중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일부 유보트는 독일의 항복 직후 일본에 노획되어 이(伊)급 함명을 부여받은채 종전을 맞이했다.
4.2. 지중해
1941년 9월부터 1944년 5월까지 총 62척의 유보트가 지중해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연합군의 살벌한 경계를 뚫고 지브롤터 해협을 돌파한다는 것부터가 매우 위험한 시도였고, 막상 들어간 지중해는 북대서양보다 환경이 평온하다 보니 악천후를 이용해 몸을 숨기기도 어려웠다. 그리고 대부분의 해류가 대서양에서 지중해로 몰려들다 보니 마음대로 나갈수도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고, 결국 작전에 투입된 모든 유보트가 지브롤터의 벽을 넘지 못하거나 지중해 내에서 격침 혹은 자침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유보트는 몇 척 되지 않는다. 영국에는 종전 직전에 격침되었으나 거의 멀쩡한 상태로 인양된 9C/40형 U보트 U-534가, 독일에는 종전 직후 노르웨이 해군에 압류되었다가 반환받은7C/41형 U보트 U-995가, 미국에는 전시에 카사블랑카급 호위항공모함 과달카날(CVE-60)이 나포한 9C/40형 U보트 U-505가 시카고 산업과학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여기에 1945년에 자침한 것을 인양해서 독일 연방군 해군이 실험함으로 1984년까지 운용한 21형 U보트 U-2540이 브레머하펜에 박물관으로서 보존되고 있다. 또한 핀란드의 헬싱키에도 2차대전 당시 독일에게서 인도받은 2형 유보트가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