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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주작가님께서 주신글]
국가 묘역에 뭍인 선형들의 파묘 주장은 부관참시다
. 그런 망나니를 더 두고 볼 수 없어
이번 주는 우리 역사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슬픈 조선 역사의 한 토막
역사학자 함석헌(咸錫憲) 선생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우리나라는 997번의 외침(外侵)을 당했다고 했다. 부정하고 싶지만 사실이다.
책 표지에는 생뚱맞게도 60살 먹은 늙은 창녀(娼女)의 나상(裸像)이 그려져 있다.
침략자들로부터 갈기갈기 찢겨,
마치 늙은 창녀의 벗긴 몸처럼 퇴락한 몰골을 감히 ‘조선’이라고 한 것이다.
그 책은 서울대학교 2년 선배인 장기홍 형이 읽어보라고 나에게 준 것이다.
함석헌 선생은 형의 장인이다.
되돌리고 싶지 않는 역사
슬프게도 우리 민족은 단일민족(單一民族)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역사는 이 땅에 사는 여인들이 겪은 비극적이고 수치스러운 수난사다.
핏기 없는 얼굴로 “오빠 놀다가” 멋쩍게 웃는 모습에서 치욕스런 과거를 보았다.
용산 집창촌은 병자호란 때 몽고군이 주둔하면서 생겨났다.
험한 놈들이 주위에 있으면 수난 당하는 것이 약소국가 여인들이다.
고려 때는 원의 지배를 받았다.
충렬왕 때이니까 징키스칸의 손자가 칸(왕)일 때였으리라.
원의 강압으로 금혼령이 내리고 원의 주문대로 13-25세 대유녀(大乳女)와
대둔녀(大臀女)를 골라 바치는 것이 공녀(貢女)였다.
사람을 개돼지보다 못한 노리개 감으로 조공(租貢) 품목에 포함시킨 것이다.
.
화냥년(還鄕女)의 죽음
어린 여자 몸으로 험한 오랑캐들의 노리개가 되어 갖은 수모를 당하면서
눈물로 지내다가 구사일생으로 사지를 탈출해
달 몇 해를 걸쳐 산 넘고 강 건너 멀고 먼 고향을 찾아왔으나,
지척에 부모님이 계신 집을 두고도 가지 못했다. 왜? 왜?
정절이 목숨보다 더한 당시 인습에 억매여 더럽혀진 육신을 가족에게 보일 수 없어,
발길을 돌려 마을 뒤 저수지에 몸을 던졌다.
연분홍 봄바람이 돌아드는 북간도
아름다운 찔레꽃이 피었습니다.
꾀꼬리는 산천에서 슬피 울고
호랑나비 춤을 춘다. 그리운 고향아
달뜨는 저녁이면 노래하던 동창생
천리객창 북두성이 서럽습니다.
작년 봄에 모여앉아 찍은 사진
하염없이 바라보니 그리운 시절아
환향년들아!
홍제천에서 심신을 깨끗이 씻어라!
그러면 과거의 일은 불문에 부치고. 새로운 몸으로 환생하는 것을 짐이 보장하겠다.
정묘, 병자 양 호란(胡亂) 때 청나라에 잡혀갔던 처자들이 도망쳐 고국에 돌아왔으나 막상 갈 곳이 없었다.
그리고 '화냥년이라고 손가락질을 했다.
조정에서는 궁여지책으로 홍제천에서 몸을 씻으면 과거의 일을 불문에 붙이겠다는 조서를 내렸다.
지엄한 어명일지라도 한번 버린 몸을 깨끗한 몸으로 되돌릴 수 없는 일이다,
홍제천은 무학재를 지나 도성으로 흘러들어오는 하천이다.
그러니 여성들은 도성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홍제천 부근에 눌러 앉아 움막을 치고 살았다.
한양에서 머슴살이를 하는 노총각들이 젊고 아름다운 여인들이 사는 이곳에서 눈이 맞아 장가를 갔다.
그래서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왔다.’는 말이 생겨났다.
호박은 언덕을 기는 습성이 있어 아무데나 잘 자란다.
한양에서 언덕과 계곡이 가장 많은 동네가 홍제동이다. 인구가 적고, 변변한 평야가 없으며 땅은 척박했다.
환향녀들은 홍제동에 끼리끼리 모여 호박을 심어 생계를 꾸렸다. 이곳이 서대문구 홍제동이다
영국 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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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조선의 역사
서대문형무소를 찾은 하토야마
무거운 마음으로 여기에 섰습니다
. 일본이 해서는 안 될 일을 했다는 사실을 깊이 사죄드립니다.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가 서대문형무소를 찾아 추모비 앞에서 신발을 벗고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헌화를 한 후에 목례를 드리고 독립투사를 기리는 큰절을 올렸다.
유관순 열사가 수감되었던 8호 감방을 둘러보고,
독립운동으로 많은 분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이 자리에서 사죄드린다고 말했다.
이를 통해 여러분의 선조가 독립을 위해 얼마나 힘쓰셨는지 알게 되었다고 했다.
방명록에는
만세운동을 하신 모든 영혼들의 편안한 쉼터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독립 평화 인권 우애를 위하여 라는 글을 남겼다.
종군 위안부
마포 성산동 한적한 골목길을 걷다 보면 ‘전쟁과 여성 인권 박물관’이라는 건물이 나온다.
박물관의 설립 취지에는 여성폭력이 없는 세상을 만들자는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다.
계단 벽에는 할머니들의 유언이 사진과 함께 걸려 있다.
그런데 자반고등어란 시가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목을 잡았다.
자반고등어 *****
썩기 전에 팔려고 나온 여자,
얼마나 뒤집혔는지?
눈알은 빠져 달아났다.
뱃속에 한 주먹 소금을 털어 넣고
썩어빠진 송판 위에 누워 있다.
방구석에 시체를 자빠뜨려
얼마나 뒤집었는지?
죽은 지 오래된 생선
비늘은 다 벗겨지고 없다.
할머니는 할 말을 다 못하고 허공을 쳐다보면서
그걸 다 기억하고 있으면 아마 살지 못했을 거예요!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위안부의 등에는 선명한 상처가 두 곳 남아 있었다.
등에 칼자국을 보여준 분은, 버마에 끌려간 정송명(1924년생)씨다.
버마에 함께 끌려간 15명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5∼6명 정도였다.
너무 피로해 더 이상 상대를 못하겠다고 하자 일본도로 내리쳤다.
심한 상처라 오래 동안 아물지 않았다.
어떤 할머니는 배꼽 위에서 아래쪽까지 상처가 나있었다.
군의관이 자궁 째 태아를 들어낸 수술 자국이다.
어떤 분은 기장밥을 끼니로 때울 만큼 빈농에서 자랐다.
하루는 어떤 사내가 공장의 일자리를 소개해 주겠다고 해서 따라나섰는데
끌려간 곳은 중국의 목단강이었다.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처음에는 하루 5∼6명 정도, 많을 때는 15명을 상대했다.
기절했다가 정신을 차리면 다시 덮쳤다. 이런 생활이 계속되었다.
임신을 하자 낙태 겸 재발 방지를 위해,
태아가 있는 자궁을 들어냈다.
상처가 낫자마자 다시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다.
반항을 할 나이인 16세 어린 소녀들도 많았다.
이번에 일본에 끌려간 조선 도공들의 한을 수록한 “조선가”가
어떤 문인의 노력으로 세상에 나왔다고 하는데 다음 기회에 보내드리겠습니다.
영국 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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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조선의 역사
징비록(懲毖錄)에 수록한 이총(耳塚)과 비총(鼻塚)의 실체
징비록은 선조(宣祖)때 유성룡(柳成龍)이 7년간에 걸친
임진왜란의 참상을 기록한 글이다.
임진왜란은 일방적인 전투였다. 왜군들은 창을 휘두르고 불을 질렀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는 거의가 초토화 되었다.
왜군은 사기를 높이고 공(軍功)을 과시하기 위해 조선 사람들의 코와 귀를 베어 일본으로 보냈다, (‘징비록’)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인들의 수급(首級)을 바치라는 명령을 내렸다.
부피가 큰 목 대신 코를 베어갔다. 코는 소금에 절였다
일본의 ‘조선물어(朝鮮物語)’에 의하면, 정유재란 당시 조선 사람 코 18만5738개,
명군 코 2만9014개 등 모두 21만4752개를 일본으로 보냈다고 한다.
이 뒤에도 왜군들은 코를 지속적으로 본국에 보냈다.
히데요시는 조선에서 보낸 코를 마차에 싣고, 오사카와 교토 등지를 돌아다니며 일본인들에게 구경시켰다.
코가 잘린 희생자들의 원혼을 달랜다는 명목이었으나,
자신의 무위(武威)가 얼마나 큰지를 각인시키려는 정치적 목적이었다.
정유재란 때 포로로 잡혀 간 학자 강항은, “수길(히데요시)이 소금에 절여 묻은 코 무덤은
언덕을 이루었다고 했다. (‘간양록’)
히데요시는 1597년 9월 28일 코 무덤을 조성하고
그 위에 오층탑을 세워. 승려 400명으로 하여금 공양토록 했다. (‘豊臣秀吉譜’)
일본 교토에 있는 코 무덤은 임진왜란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받드는 도요쿠니 신사(豊國神社) 부근에 있다.
코보다는 귀를 벤 것이 덜 잔혹하게 보였을까? 일본인들은 코 무덤을 귀 무덤으로 둔갑시켰다.
조작의 주역은 에도 막부 시대(1603∼1868)의 유학자 하야시 라잔(林羅山)이었다.
안영배 전문기자 3D3D3D3Dojong@donga.com">3D3D3Dojong@donga.com">3D3D3Dojong@donga.com">3D3Dojong@donga.com">3D3D3Dojong@donga.com">3D3Dojong@donga.com">3D3Dojong@donga.com">3Dojong@donga.com">3D3D3Dojong@donga.com">3D3Dojong@donga.com">3D3Dojong@donga.com">3Dojong@donga.com">3D3Dojong@donga.com">3Dojong@donga.com">3Dojong@donga.com">ojong@donga.com
한국 학자들이 대마도, 비젠, 후쿠오카 등지에서 이총을 찾아냈다.
왜군 장수들은 일본 전역에서 차출되었으니 코 무덤도 일본 전역에 산재해 있을 것이다.
정부와 학계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실체파악을 일본에게 요구해야 할 것이다.
영국 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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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유십이(尙有十二) - 이순신
신에게 전선이 아직 12척이 남아있습니다.
세계 각국 해군사관학교에서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세계 3대 해전(世界四大海戰)을 가르치고 있다.
1588년 영국 하워드(Howard) 제독의 칼레(Calais) 해전
1592년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한산대첩(閑山大捷)
1805년 영국 넬슨(Nelson) 제독의 트라팔가(Trapalgar) 해전
그 중에서도 이순신 장군의 승리는 가장 값진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거북선(龜船)은 미국 워싱톤의 전쟁기념관 영국 해사박물관 중국, 독일, 불란서, 캐나다 등 세계 각지의 역사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일본의 평가
1907년 막강한 러시아 극동함대와 싸워 이김으로써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일본의 도오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제독
러시아 무적함대를 격파한 승전 축하연에서, 각하의 업적은 영국의 넬슨제독, 조선의 이순신장군에 비견할 만합니다. 하고 말하자,
나의 공로를 영국의 넬슨 제독에 비교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으나 이순신 제독의 업적에는 따라갈 수 없다.
이순신 장군은 국가를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에서 구한 세계적인 위인이다.
나를 이순신 장군과 비교하지 말라.
그 분은 전쟁에 관한 한 신의 경지에 오른 분이다.
국가의 지원도 없이, 훨씬 더 열악한 상황에서 매번 승리 하였다.
그분과 비교하는 것은 그분에 대한 모독이다.
내가 그분 휘하에 있었으면 하사관도 못되었을 것이다.
내가 제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다.
가장 미운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다.
가장 존경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도 이순신이다.
차를 함께 마시고 싶은 분은 이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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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거북선(龜船)은 미국 워싱톤의 전쟁기념관 영국 해사박물관 중국, 독일, 불란서, 캐나다 등 세계 각지의 역사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일본의 평가
1907년 막강한 러시아 극동함대와 싸워 이김으로써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일본의 도오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제독
러시아 무적함대를 격파한 승전 축하연에서, 각하의 업적은 영국의 넬슨제독, 조선의 이순신장군에 비견할 만합니다. 하고 말하자,
나의 공로를 영국의 넬슨 제독에 비교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으나 이순신 제독의 업적에는 따라갈 수 없다.
이순신 장군은 국가를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에서 구한 세계적인 위인이다.
나를 이순신 장군과 비교하지 말라.
그 분은 전쟁에 관한 한 신의 경지에 오른 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