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판관을 역임한 손기양은 울산부선생안에 그의 기록이 남아 있다.
울산부 선생안의 기록은 아래와 같다.
민정순찰사로 인하여 경주제독에서 조사를 면제받고 만력30년 임인년 1602년 2월3일 도임하였다.
문무를 겸비하여 선정을 베풀고 백성을 잘 다스렸으며, 당대의 최고로 평가되었다.
영의정 한음이 별도로 아뢰어 특별히 영천군수에 임명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울산 판관에 임명되는 기록이 보인다.
선조 34년 신축(1601) 12월 29일(임진)
34-12-29[04] 이제민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부사(永興府使)로, 권순(權恂)을 파주 목사(坡州牧使)로, 손기양(孫起揚)을 울산 판관(蔚山判官)으로,
위의 기록을 보면 왕조실록에는 12월29이 이고 도임은 2월3일인데 인수인계의 시간이 많이 걸린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울산판관으로 시기의 경상좌병사는 누군인가 하는 것인데 임진왜란이후라 울산이 정치적으로나
많은 부분이 병영에 속하였기에 판관이 필요하기에 임명되었다고 보고 그 당시의 좌병사는 누군인지 알아
보았다.
울산부 선생안에는 겸병마절도사 이영으로 나와 있다.
1601년에서 1602년 7월17일에 체직된 기록이 보이고
그 다음은 김태허 장군이 1602년에서 1603년사이 좌병사이다.
손기양이 울산판관으로 머물면서 좌병사 이영과 김태허 좌병사를 모신 것으로 보인다.
손기양은 선정비는 울산에는 남아 있지 않고 영천신녕면에 남아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신녕현감의 기록이 보지 않지만 성호전집에는 손기양의 행장이 있어
신녕현감의 기록이 있다.
을미년(1595)에 신녕 현감(新寧縣監)--성호전집의 기록
손기양은 얼안당기(枿岸堂記)지었는데 그 내용은 선생안에 남아 있다.
얼안당기는 손기양은 1602년 울주 통판(蔚州通判)으로 부임하여 정사(政事)를 보는 청사(廳事)를 짓고서 이름을 얼안당(枿岸堂)이라 하고, 이에 대한 기문(記文)인 〈얼안당기〉를 지었다. ‘얼안’은 언덕의 모난 곳을 깎아 평탄하게 한다는 뜻으로, 이 말은 수령의 보좌인 승(丞)의 역할을 강조한 한유(韓愈)의 〈남전현승청벽기(藍田縣丞廳壁記)〉에서 따온 것이다. 즉, 남전현의 승인 최사립(崔斯立)이 영(令)을 보좌하여 공무를 잘 수행한 것처럼, 자신도 수령과 백성의 사이에서 통판의 역할을 잘 수행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내용이다.
마지막으로 손기양의 후손들이 정자를 지었는데 옛것은 허물어지고 100년이 조금넘은 칠탄서원이 남아 있다.
여기는 40여분을 걸어가야 하고 여름에는 가기 힘든 곳이다...
손기양(孫起陽, 1559~1617)으로, 본관은 밀양, 자는 경징(景徵), 호는 오한이다. 할아버지는 군자감 정(軍資監正) 손응(孫凝)이고, 아버지는 생원 손겸제(孫兼濟)이다. 어머니는 신취(辛鷲)의 딸이다. 1588년(선조21) 문과에 합격하였다. 1612년(광해군4)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그 뒤 다시 사헌부와 사간원의 벼슬을 거쳐, 상주 목사(尙州牧使)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여생을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황(李滉)의 학통을 이은 정구(鄭逑)와 도의(道義)의 계(契)로 깊은 관계를 맺었던 학자이다.
옥산 이희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