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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계별 학습-25(시편51편-100편)
시편51:3-5
말씀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빛이 있으라고 했을 때 빛이 있었지요. 말씀으로 살 수 있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말씀으로 살게 되어 있는 것이 원래의 인간이었는데, 지금은 이미 범죄 한 상태에서 태어났기에 불가능한 것입니다. 죄를 지어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시편 51편 5절에 보면,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라는 다윗의 고백이 나와요. 이것은 자기가 원해서 죄를 범했다기보다는,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것이 자기의 본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시 51:3)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시 51: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시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그러니 돌이 돈이 되게 하는 것이 자기의 본성이이고, 부인할 수 없는 진솔한 모습입니다. 죽을 때까지 말입니다. 그러니 성경말씀은 우리보고 위장하란 말씀이 아니고, "진짜 네 모습은 이렇다" 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재 우리의 주소입니다. 왜요? 우리는 범죄를 한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설교를 해도, "이 설교를 듣고 날 쫓아내지 마세요. 말씀에 은혜 되는데 날 쫓아내면 안 되지. 나를 쫓아내면 우리가족은 뭘 먹고살라고" 라고, 사실 노골적으로 그렇게 이야기하고 설교하면 괜찮아요. 그런데 아닌 척 하는 겁니다.
◈ 성화의 열매를 주장하고, 빛과 소금이 되자고 외치는 자들은 다 사기꾼 !!
그리고 "제가 목사 되기 전까지는 돈을 사랑했는데, 이제는 아닙니다. 돈보다는 말씀이 우선입니다. 여러분 저를 본 받으세요" 라는, 이런 되도 않은 나쁜 놈에 속아서 "아직도 한국 교회에 이런 목사님이 계시네" 라고 하면서 깜빡 속는 사람들이 있어요. 성화의 열매를 주장하고, 빛과 소금이 되자고 외치는 자들, 이런 자들은 전부 사기꾼입니다. 이들은 다단계 판매원보다 더 악질이고 말입니다.
그러니 노골적으로 말해서, "목사인 저나 여러분이나 돈을 좋아하지요. 그러나 주님께서 그것조차 용서했습니다" 라고, 이렇게 되어야지요. 그래서 교인들로 하여금 목사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게 해야지요. "십자가가 뭐기에 그런 죄도 다 용서하는구나. 십자가 안에 뭐가 들어 있기에 그런 죄도 다 용서되나?" 라고, 이렇게 주님께 관심을 두고 주님을 주목하게 되고 이렇게 되어, 주님의 그 용서가 이 세상 돈 보다 더 위대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이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고 하시면서, 창세기 1장으로 되돌아가기를 촉구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죽음 속에 이미 갇혀있기에 스스로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시체가 벌떡 일어나서 걸어가는 것을 봤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시체가 아니라 산 사람이지요.
시편51편1-19
◈ 시편 51편을 보자 !
(시 51:1)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시 51:2)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시 51:3)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시 51: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시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 51:6)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시 51:7)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시 51:8)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시 51:9)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시 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 51: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시 51: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시 51:13)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시 51:14)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시 51:15)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시 51:16)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시 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시 51:18)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성을 쌓으소서
(시 51:19)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
* 다윗은 개인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왕으로 철저히 죄를 깨닫는다. 그래야 용서를 받기 때문이다.
(시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 주께서 꺾으신 뼈 - 제사를 드릴 때는 짐승의 뼈가 수없이 꺾였지만, 여기서는 짐승의 뼈가 아니라, 사람의 뼈이다. 그리고 다윗이라기보다는 우리야 이다. 희생당하는 의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시 51:8)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 꺾이면 죄인이고, 꺾이지 아니하면 의인인 것이다(?). 51편과 34편을 무리하게 연결해서는 곤란하다.
(시 34:19)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시 34:20)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꺽이지 아니하도다
* 이 시편 51편을 다윗에게만 적용을 시키지 말고, 모세언약의 완성으로 결부를 시키면 맞아서 떨어진다. 모세언약은 한 지파에게, 다윗언약은 한 인물에게 집중이 되는 것이다. 또한 다윗은 왕이 아니고, 다윗의 자손(메시야)이 왕이 된다.
* 그러면 다윗은 범죄 했음에도 불구하고 왕의 자리에서 바로 물러나지 않는가? - 그것은 우리야와 같은 의인의 희생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야와 한 세트를 이루는 것이다.
* 다윗언약 - 다윗은 처음에는 하나님이 언약을 맺으시니까, 자기가 그만한 능력이 있는 줄 알았고, 한 세트를 이루더라도 하나님 쪽인 줄 알았다. 오해를 한 것이다. 그러나 밧세바와의 사건을 통해서 자기가 죄인의 역할을, 악역을 담당하고 있음을 알았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야는 빠지고 다윗의 자손이 등장하고, 그래서 이 자손과 다윗이 맺은 언약이 다윗언약이 되는 것이다.
* 목사의 역할 - 다윗처럼 "나는 죄인입니다!" 를 강단에서 연발하는 것이다. 예수 안에서 의인이라는 것은, 그 외침이 밖으로 튀어나올 때는, 의인이라는 것이 아니라, '나는 죄인입니다' 로 나오는 것이다. 루터는 이것을 오해해서 '죄인이며, 동시에 의인'이라고 했는데, 그런 것은 성경에 없다. 루터는 언약의 관점에서 성경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죄인만이 있을 뿐이다. 의인은 오직 죄를 아는 자이다. 그래서 다윗은 누가 뭐라고 해도 죄인인 것이다.
*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한 이유? - 이스라엘(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그 맞은 편에 하나님의 아들을 선택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아들 사이의 선택으로 참다운 하늘나라를 구성하는 것이다. - [ 하나님의 선택 ] 의 흐름
시51:7-8/18
⊙ 다윗언약은 모세언약의 완성으로 나타난다. 모세 시절에는 동물을 잡아 번제나 화목죄를 드림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죄용서 받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죄용서의 본질은 더 깊은데 있었다. "주께서 친히 꺾으신 뼈"가 있어야 가능하다. (책)
* 죄용서의 본질 - 모세언약의 본질은 유월절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내가 잘나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시 51:7)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시 51:8)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 주께서 꺾으신 뼈란 사람의 손으로 꺾을 수 있는 번제나 화목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죄 짐을 진 사람을 하나님이 손으로 치는 것을 의미한다. (책)
(요 19:32) 군병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요 19:33)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요 19:34)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요 19:35) 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니라
(요 19:36)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함이라
(시 34:20)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꺽이지 아니하도다
⊙ 하나님이 직접 제물 되는 이를 쳐서 다른 이를 구원하는 방식이 모세계약을 통해서 보여진 희생제물 방식의 완성태이다. 이러한 구원 방식이 이스라엘에 투입되면서 다윗언약의 본질이 다음 세 가지 과정을 거쳐서 밝혀지는 것이다.(책)
◈ 다윗언약의 본질 - ① 인간은 죄인이다. - 언약에 비추어 볼 때만
②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상한심령뿐이다.
③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선택이다.
(시 51:18)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성을 쌓으소서
⊙ 그러면 다윗의 죄 때문에 주님에 의해 꺾여진 뼈는 누구인가? (책)
(시 51:14)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 시편 51편의 제목은,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저에게 온 때'이다. 선지자 나단이 찾아온 시점은 이미 우리야가 다윗 때문에 죽고 난 다음이다. 따라서 다윗의 손에 피 흘려 죽은 사람은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이다. (책)
⊙ 우리아를 죽인 죄악이 자기 자식의 죽음을 통해서 밖으로 표출되었다. 주께서 친히 치셨기에 죽은 자기 아기는 우리아의 죽음의 반복으로 다윗 앞에서 되살아났다. (책)
시51:1-7/[행하는 자라야] 라는 자료집을 읽고
선택론에 대한 이해도 분명히 해야 한다. 반응론으로 점검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으로 확인되어 진다는 사실이다. 즉 소위 구원받았다는 자들의 반응들을 조합해서 선택론을 구축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서 그냥 선택론이 선포될 뿐이다. 이해되는 자와 안 되는 자는 그 때 그 때마다 구분되어 진다. 이해 안되는 자를 억지로 이해시키는 것이 복음 선포의 취지가 아니다. 성령님이 약속에 따라 택한 자만이 구원될 따름이다.
정 교수는, 인간이 가만있어도 죄인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을 공격하려 오신 메시야의 무기에 대해서 어둡다. 계속 인간의 몫과 가능성을 챙겨 가지고 피할 수 있는 데까지 피하려 하고 있다. 하나님의 원수는 바로 인간 그 자체였다.(로마서 5:10) 마귀와 함께 노니고 있었다.(고린도후서 4:4)
다른 메시야를 구상케 한다. 바로 이점을 가지고 성도는 싸움에 나서게 된다. 그러나 정교수의 싸움은 자기가 자기 지키기 싸움이다. 하나님 전쟁이 아니라 자기에 관한 전쟁이다. 즉 인간의 노력을 보태야만 비로소 구원을 이룰 수 있는 예수상을 가지고 마귀로부터 독려 받는다. 정 교수는, 참된 제사가 상한 심령이라는 점을 놓치고 있다.(시편 51:17)
정 교수가 왜 하나님의 능력을 이토록 무시할까? 그것은 하나님을 제대로 만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이사야 6:5)라는 고백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린도전서 2:2)
사도 바울이 과연 행함이나 윤리를 몰랐을까? 아니다. 왜 그러면 이 말을 하는가? 그것은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린도전서 1:18)
시51:7/마16:25질문
태어날 때부터 죄인인 인간들이 갖고 있는 구원관 속에는 궁극적으로 '나'가 최종적으로 구축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예수님을 거론하고 하나님의 열심과 영광을 거론해도(박영선 목사같이) 그것이 어디로 초점을 찾아가게 되어 있느냐 하면 바로 '나'입니다.
즉 '나'의 구원을 포기하지 않은채 하나님이 행하시는 건져냄을 거론하는 것은 예수님 당시에 유대교의 신학의 기본에 불과합니다.
유대인들이 모든 인류의 대변자인 것을 염두에 둔다면 곧 우리보고 하는 이야기도 됩니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시편 51:17)
시51편 자유의지와 의지
왜 인간에게 의지가 있다는 말을 하지 않고 꼭 자유의지라는 말을 사용하십니까?
그리고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범주가 어디까지 일 때를 자유의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설마 인간의 선택의 범위가 무한정이라고 할 수 없겠지요. 그렇다면 인간이 선택해서 행동할 수 있는 폭과 범위와 항목을 자신이 결정하지 못하고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상황이 분명하다면 '의지' 앞에 '자유'라는 말을 붙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계셨습니까?
인간이 천리안을 갖고 있습니까?
인간이 세상사를 다 알고 있습니까?
인간이 자기 자신이 누군지를 제대로 압니까? 당신의 부모님이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아십니까?
인간의 결심과 각오와 결단이 하루에서 수백번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아십니까?
환경따라, 처지따라 수시로 자기 변명과 자기 수호에 나선다는 것을 아십니까?
인간이 욕망의 화신인 것을 아신다면 그래도 자유의지에 대해서 강변하실렵니까?
귀하는 왜 천주교로 가지 않으십니까? 귀하의 생각은 천주교에서 주장하는 것과 동일합니다.
천주교에서 왜 연옥설이 꼭 들어가야 되는 이유를 아십니까?
왜 자유주의자들이 교회를 버리고 예수님을 버리고 인권운동으로 나갈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아십니까?
왜 자유주의자들이 악마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이유를 아십니까?
다윗에게 물어보세요. 자신을 비롯해서 인간들이 도대체 어디서 만들어지느냐고요. 오직 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상한 심령'일 뿐임을 알았습니다. (시편 51편)
귀하는 인간의 행동을 탐구하여 신과 관계를 짓기 위해 성경을 보십니까 아니면 예수님 말씀대로 예수님에 대해서 알기 위해 성경을 보십니까?
사람이 오래 살수록,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알면 알수록 더어둑 죄가 증가한다는 사실을 진정 모른다는 말씀입니까?
거룩한 하나님깨서 인간에게 완벽을 원하고 있으면 만약 완벽치 않으면 가차없이 저주해 버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온갖' 거룩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면 저주 아래 놓인 자인 것을 아십니까? (갈라디아서 3:10)
돌맹이나 로벗이나 해나 별이나 책상이나 걸상이나 나무나 채소는 적어도 악마편에 서서 조직적으로 체계적으로 논리적으로 하나님께 대들고 반항하고 메시야를 죽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어떠합니까?
스스로 '자기 의'를 포기할 수 있는 위인이 있다고 보십니까? 없습니다.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씻은 막달라 마리아 마음 속을 귀하는 아십니까?
막달라 마리아가 자신의 자유의지에 근거해서 자기 행함을 유지했습니까?
그녀는 오로지 예수님에 대한 사랑 뿐이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밝혀주십니다.
"용서받음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귀하는 예수님의 용서하심 보다 여전히 자신의 행함을 크게 생각하며 사는 자니 귀하야말로 진짜배기 불교신자는 입니다.
이 땅의 많은 절간처럼(교회들) 귀하도 이 땅에 민중들의 탐욕을 정당시하는 제단들을 세우기 위해 힘껏 노력하시고 그리고 예수님의 피만을 사랑하는 자들을 마음껏 핍박 하시기 바랍니다.
"너는 네 할 일을 하여라. 저의 입장에서 볼 때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 하였으니라."(예수님께서 가롯 유다보고 하시는 말씀)
시편의 성전개념과 마16:19해석
천국을 어떤 집으로 표현하는 것은 시편에 나오는 성전 개념에서 비롯됩니다.
성전의 문은 오직 메시야에 의해서만 열립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베드로를 통해서 그 일을 하시겠다는 겁니다.
제자들에게 12고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신 것은
야곱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이 구체적으로 완성되었음을 그들(12사도를) 통해 증명해 주시겠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란 사도의 터 위에 세워지는 겁니다.(에베소서 2:20)
시편51:11
하늘나라는 하늘나라다운 삶의 방식이 있다.그것은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식으로 살지 않고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 의식하며 사는 삶을 말한다.
누가복음 14:12-14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잔치를 배설하거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구제를 해도,기도를 해도,금식을 해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행위들은 하늘 나라에 상이 없다.이들은 예수님의 행위와 계시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자들이다.자기네들이 완벽하게 율법을 준수하므로써 상을 차지하려는 자들이다.그러나 법 지킴으로 보상으로 상을 받을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멸망의 이유에 대해서 전혀 무지몽매한 자들이다.하나님이 율법을 통해 진정 알기를 원하는 것은 인간 본질의 회복 불가능성이다.
상한 심령,이것은 성신이 오지 않고서야 치유되질 않는다(시편 51:11).이미 육체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육체의 행함에 따른 보상을 기대하는 것은,죄의 열매를 가지고 상을 받겠다는 시도에 불과하다.벌받을 짓을 해놓고서는 어처구니없게도 상을 달라는 것이다.상이 어디에 근거해서 주어지며 무엇 때문에 제공되는가를 모르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
상이란,상을 주시는 쪽의 취지가 계속 남아있는 대상에게 주는 것이다.그래서 상 수여자의 판단과 결정은 상 주는 쪽의 권한이다.만약 선지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자가 있다면 선지자는 그 사람에게 자기의 상을 수여할 것이다.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상을 받으려고 한다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온 분을 믿어야 한다.그렇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상을 받게 된다(마태복음 10:40-42).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자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했다.예수님을 영접하는 것 이외에 달리 하나님의 상을 받을 수 있는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다.왜 예수님 이외에는 하나님의 상을 받을 수 없을까? 이점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풀어서 둘 씩 짝을 지어 세상으로 보내어 진다.
"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나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마가복음 9:41)고 하셨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의 일을 제대로 구분하여 그들에게 대접하는 것에는 곧 상이 주어진다.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는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사람이다.그리스도의 일은 곧 하나님 일이다.하나님의 일이 그리스도로 집중되어서 이루어지는 것은(요한복음 6:29),역사의 종말 때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결국 상 받을 사람은,종말 때 그리스도의 일에 참여된 사람들이다.
시편51편10-11절
* 성경에서 말하는 의(義)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이지 우리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에 총신의 최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에는 성부와 성자가 계약을 했지만, 그 이후에는 성부와 우리가 계약을 맺은 것이 되어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예수 안에서' 라는 의미가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 그것은 바로 구원론적으로 보기 때문인데, 즉, 하나님도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언약이라고 하는 것은 필요할 때만 동원되었다가 빠져버리는 결과가 되고 마는 것이다. 예수님마저도 약속을 위해 사셨는데 하물며 인간인 우리가 어떻게 그런 주장을 할 수가 있겠는가? 우리가 언약을 이용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 구약에 나오는 인물들은, 시편에도 나오지만 사실 다 죽어야 할 인물들이다. 다윗 같은 경우도 사실은 율법에 의하면, 간통을 한 자는 둘 다 죽어야 하는 것이다. 다윗도 왕이지만 예외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죽어야 될 대표자로서 선택을 받은 것이다. 사사기에 나오는 사사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을 한 번 살펴보면, 결코 그들이 잘나서 사사(지도자)가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시 51: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 51: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 여기서 다윗이 성신을 거두지 말라고 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서 성신은 창조력을 의미하는데, 뭔가 조금 모자라는 것을 도와주는 보조적인 창조력이 아니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그런 하나님의 창조능력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창조력을 계속 유지해 달라는 것이다.
* 다윗 자체가, 자기는 죄인이고 자기 주위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자기의 죄 됨을 드러내고 동시에 하나님의 은총을 드러내는 장(場), 즉, 필드(field)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 다윗이 그렇다면, 그래도 그는 과거의 옛날 사람이 아닌가?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십자가는 동에서 보나 서에서 보나, 과거에서 보나 미래에서 보나, 지금 현재에서 보나 똑 같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나 과거의 다윗이나 십자가 안에서는 다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역사는 흘러갈지 몰라도 십자가 안에서는 그런 시간의 흐름은 무의미한 것이다. 즉, 하나님은 다윗을 하나님의 언약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인물로 사용하셨다는 것이다.
◈ 남은 자 - 지난 시간에 남은 자에 대해서 강의를 했는데, 남은 자의 접근 방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구원론적 방법이 있고, 언약적인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이 언약적인 방법은 인간을 구원시키기 위해서 관해서 남은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시51:16-17/긍정적 사고방식의 허구성
"사람을 좋게 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라는 갈라디아서 1:10의 말씀은 이들 우매한 민중들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여기서 파생된 것이 소위 "치유와 위로의 목회"라는 것이다. 치유와 위로는 긍정적 사고방식을 복음으로 삼아 가르치면 다 되게 되어있다. 어떤 성경 귀절이든 모두 다 긍정적 사고방식으로 해석하면 되는 것이다. 민중들은 자신들의 몸담고 있는 종교 집단이 상대적으로 위대해지기를 원한다. 그것은 스스로 원대한 꿈의 노예가 되어 불쌍하게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 줄 수 있는 극상품 대마초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일을 사단의 일로 간주하신 이유가 여기 있다. 사람의 모든 일 속에는 인간의 자기 긍정이 가득 담겨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덧붙여 하셨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예수님을 따르지 않겠다고 한다면 더 이상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계속 자기 긍정을 하도록 놔버려두자. 하지만 만약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한다면 긍정적 사고방식부터 청산해야 한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세례 요한이 세상을 향해 심판을 예고했던 그 정신 상태를 가져야한다. 즉 도끼를 가슴속에 품고 다녀야 한다는 말이다.
교회란, 예수님의 제자군이요 또한 자기 부정을 하고 있는 자들의 모임이다. 따라서 교회 설교단에서 제대로 울러 나와야 하는 주제는 오직 회개뿐이어야 한다. 성경의 어느 귀절을 근거로 하더라도 회개만이 나와야 한다. 왜냐하면 성도의 옛 품성 속에서 아직도 계속 솟구쳐 올라오는 자기 긍정심이 있기 때문이다. 전도를 하든 기도를 하든 봉사를 하든 헌금을 하든 모든 공로를 자기 자신에게 돌려보고자하는 그 사단성이 아직도 몸에 배여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설교자는 사정 봐주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회개를 촉구해야 한다. 하나님이 원하는 예배는, 이런 상한 심령자의 제사뿐이다.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편 51:16-17). 날마다 자기를 죽이는 예배뿐이어야 한다. 한평생 지속되어야 한다. 사단은 메시야의 고리를 끊어 놓기 위해서 예수님 앞에다 큰 자기 교회 예배당의 정경이나 꿈 같은 것을 배치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한국 교회는, 복음 확장을 빙자하여 긍정적 사고방식을 전파하고 있다. 자진해서 교회 되기를 포기한 자들에게 결국 주어지는 것은 지옥의 젖가슴뿐이다.
시편51편 16-17/히브리서 10:1-7 /제사와 한 몸
개인적인 속죄제를 수시로 드려왔더라도 일년에 한 번, 대제사장이 드리는 대속죄일의 제사를 보게 되면 아직도 우리들에게는 남아 있는 죄가 있었구나 하는 점을 알게 됩니다. 왜 이처럼 죄가 자꾸만 추〉풔?것일까요?
레위기 5:1절과 4절을 보게 되면 다소 이해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증인이 되어 맹세시키는 소리를 듣고도 그 본 일이나 아는 일을 진술치 아니하면 죄가 있나니 그 허물이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라고 1절에 나와 있으면 "혹 누구든지 무심중에 입으로 맹세를 발하여 악을 하리라 하든지 선을 하리라 하면 그 사람의 무심중에 맹세를 발하여 말한 것이 어떠한 일이든지 깨닫지 못하다가 그것을 깨달을 때에는 그 중 하나에 허물이 있을 것이니"라는 말씀은 4절에 나옵니다.
여기에 보면, 사람이 자신도 모르고 맹세 같은 것을 내 뱉을 수가 있습니다. 잘해 보겠다든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악한 일을 해볼까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무심코 내뱉은 맹세 조차도 죄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도대체 하루에도 몇 번씩 죄를 짓게 되는 겁니까? 또 젊은 때는 도무지 허물이라고 이해 안되든 것도 연세가 많아지면서 죄라고 느껴지면 빠진 그 죄 항목을 위하여 속죄제를 또 드려야 할 판입니다.
예를 들면, 디모데전서 6:7-8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이 말씀을 젊을 때에 보게 되면 하나님에 대한 원망부터 먼저 나올 것입니다. 너무 가혹하다고 말입니다.
그것은 설교 처음에 말씀 드렸듯이 하나님 중심적이지 못하고 우리 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나이가 많아서 세상을 떠날 쯤 되어 신앙적인 눈으로 지난 날을 돌아보면, 왜 이 하나님의 말씀이 옳은 줄을 아는 겁니다. 그러면 젊은 날의 죄지은 것을 위하여 새삼스럽게 속제죄를 드려야 할까요? 그래야 마음의 짐을 들게 될까요?
실제로 일상적인 생활에서 이웃집 사람을 미워하고 교회에 오게 되면 괜히 하나님에게 미안해서 헌금에다 돈 1000원을 더 얹게 되지요. 그렇다면 이웃 사람과 한바탕 싸우고 난 뒤에는 얼마나 더 헌금해야 마음이 후련하겠습니까? 이처럼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는 추가적으로 드러나는 죄에 대해서 대책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뭔가 단번에 죄를 다 해결할 길은 없을까요? 바로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이 그림자요 모형의 입장에서 드린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시절은 지나갔습니다.
오늘 본문 5절에 보니 한 몸을 하나님이 예비하셨습니다. "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이 한 몸으로 인하여 단번에 모든 죄가 다 해결되어 버린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대책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성경을 보는 것은 이 '단번에 드리는 제사'의 의미를 늘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자에게 이 제사의 효과가 해당됩니까? 시편 51:16-17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왜 하나님은 번제나 제사를 원치 아니하시고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원하십니까? 속죄라는 것이 집단적으로 해결 지을 문제가 아니라 개별적으로 본인에게만 적용될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즉 매사에 남 탓으로 돌리지 않고 자기 탓으로 돌리는 그런 자에 한해서만 단번에 대신 드린 속죄 제사의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더욱 알기를 바라는 것은, 하나님의 악취미 때문에 그러하다고 생각해서는 아니됩니다. 도리어 하나님은 그 어떤 죄라도 용서할 만반의 대책이 있음을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민수기 23:21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여호와 그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은 우리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고 용서해 주시려고 하는 겁니다. 발람이라는 이방 선지자가 감히 하나님과 함께 있는 나라인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갔던 적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타고 가는 당나귀의 입을 열어서라도 그 발람 선지자를 책망하시게 했습니다. 사람이 자기 중심이 되어 살면, 자기 변명만 나열되지 결코 자기 죄가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이렇게 되면 단번에 드린 한 몸도 귀한 줄 모르게 됩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서 이렇게 핀트가 어긋나서야 되겠습니까? 자기 중심으로 살면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을 대적하게 된다는 이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제 하나님하고 그만 싸우시기 바랍니다.
시편51편16-17
시편 51:16-17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이 사회는 사람들만의 사회입니다. 만나는 대상이 늘 같은 사람들뿐입니다. 만약에
우리 가운데 하나님 한 분이 섞여 있다고 합시다. 아마 도저히 믿지 않을 것입니다.
온 우주와 천지를 창조하신 그 위대하신 어떻게 인간 속에 섞일 수 있느냐고 여길 것
입니다. 이 말 속에는 하나님을 높이 존재해 준다는 뜻으로 이야기 할 수도 있지만 역
시 인간은 인간들끼리 살아야 마음에 부담이 없다는 계산에서 나온 마음일 수도 있습
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섞여 산다는 것은 사람도 괴롭지만 역시 하나님도 괴로움 법입
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마음을 낮추시사 사람들 속에 계신 유일무일한 나라가 이스
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처음 세상에 나올 때부터 인간들의 요구에 부응해서 나온 나
라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영원히 그 속에 계시기 위해서 세워진 나라입니다. 이스라
엘은 영원한 나의 성소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같
이 살아야 될 축복과 부담을 함께 지니고 있는 셈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리들과
보통 사람입니다. 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난 주제입니다. 그런 죄인들 속에 하나님이
들어와 계시니깐 그들이 얼마나 심적인 압박감을 가졌겠습니까? 집에 시골의 어른이
와 계시면 모든 일에 손에 잡히지 않고 스트레스를 받게 마련입니다. 행동에 제약을
받고 아무렇게 행동하다가는 일일이 불호령이 받게 되는 것이 뻔한 일입니다. 사람이
란 자기가 무슨 행동을 해도 잘했다 칭찬해 주는 사람을 제일 좋아합니다. 하지만 일
일이 시비 걸고 나오면 아무리 한 집에 사는 부모라도 미워지게 마련입니다. 차라리
마음에 맞는 친구하고 살아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것입니다. 바로 이스라엘 사람도 예
외가 아니었습니다. 과거에 그들이 애굽의 위험에 쳐 했을 때나 혹은 약속의 땅에 들
어서서 주변 강대국의 위협이 있을 때는 그들은 하나님을 부지런히 찾았습니다. 그러
나 위기의 시절이 지나가고 다시 평온한 시절이 오면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여느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 그대로 살아가곤 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제사란
단지 신의 마음을 달래 주는 아부하는 의식이 아닙니다. 그들이 처음 애굽에 나올 때,
흠없는 양이 자기네들 대신 희생되었기에 비로소 애굽에서 나올 수 있었음을 늘 되새
기는 의식입니다. 즉 그 때 그 시절의 지금에 와서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사장의
존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사장이 하는 일은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이 생존될 수 있
는 근거를 늘 마련하는데 있습니다. 그들은 성막에서 매일 같이 제사를 드렸습니다.
성막이란, 법궤를 모셔 놓은 것입니다. 법궤란 모세가 하나님 만나고 난 뒤 하나님의
지시대로 만들라고 해서 만들어 놓은 나무 상자입니다.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가 대단
히 궁금할 것입니다. 그 상자 안에 들은 것은 놀랍게도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죄지은 증거물들만 가득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법궤를 일명 증거궤라고도 합
니다. 인간들이 중차대한 죄를 지었을 때에 그 때 그 사건을 담아 놓은 상자가 법궤입
니다. 왜 하나님을 법궤 위에 계실까요? 그 법궤의 뚜껑 위는 바로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자신의 흠없는 피가 묻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죄가 있는 곳
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는 법칙 하에 하나님은 도저히 자신과 함께 동거 내지는 동행
할 수 있는 죄인들 속에 용서하시는 하나님으로 와 계시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이 성막
뜰 한 복판에서 하는 일이란, 죄 많은 백성을 죽이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직접
백성을 죽인다는 말이 아니라 다신 안수 받기 위해 가져온 희생 제물을 잡아죽입니다.
이 죽음의 의식이 곧 번제요 제사의 핵입니다. 다 태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제
사도 이스라엘이 역사를 가지면 가질수록 점점 형식적이 되고 말았습니다. 관행적으로
정기적으로 드리는 제사가 신의 노여움 삭아 줄 것이라는 미신이 온 나라에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기계적 행정 처리에 익숙해졌던 그는 충실한
신앙인이 헷 사람 우리아가 거룩한 하나님 전쟁을 치르는 동안에 소위 왕이라는 다윗
은 그 우리아의 아내를 자기 것을 삼았습니다. 그리고 알리바이를 성립시키기 위해서
그 충실한 신하 우리아를 적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도록 유도했습니다. 그래 놓고 하는
말이 하나님이 죽여겠지라고 주위 사람에게 말하게 했습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이 우
리아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 죽게 하신 그 의인의 죽음으로 인해 다윗을 비롯한 모
든 이스라엘 나라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입니다. 즉 제사장 나라인 이스라엘이 매
일 같이 그 제사의 진정한 의미를 우리아의 죽음을 통해서 다시금 회복하려 하신 것
입니다. 이것을 안 다윗은 비로소 자신의 죄인 중에 태어난 것을 알게 되었고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
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다윗은 우리의 죽음을 통
해 통회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것은 죄인을 위해서 희생당
하신 우리아 같은 모습으로서의 함께 계심입니다. 늘 우리가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회
개하라고 하십니다. 이러한 통회하는 심령이 진정 제사 드리는 마음입니다. 우리 가운
데 서로들 건방떨고 교만한 사람들도 있지만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계속해서 무시당
하는 겸손한 주님의 형제들도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시편51:17
인간은 회개하기 위하여 살아있다. 죽어가면서도 하나님은 거룩한 생활을 요구하신다. 이 요구를 통해서 인간은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안다. 즉 용서받은 몸으로 죽어간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성도를 용서하신 하나님이 약속대로 그 성도를 죽이신다는 사실이다.
죽어가고 있는 몸들이, 죽이시는 하나님께 찬양하고 감사하게 된다. 자기를 통해서 죄의 본질이 다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이다(시편 51:17).
그동안 죄에게 장악당하여 죄에 깊이 빠져 있던 자아가 부활의 능력에 의해서 그곳에서 벗어나면서 죄의 결과가 어떤 식으로 마감되고 있음을 자신의 육체를 통해 파악할 수 있도록해 주신 하나님께서 감사하고 그 죄를 극복하시는 그리스도의 몸을 부할시키신 하나님의 사랑의 위력에 감탄한다. 동시에 그 부활의 영을 보증금으로 죽어가는 몸에 남기신 하나님께 찬양한다(고린도후서 1:22).
이 몸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이 스며나온다. 이런 일로 모인 곳이 교회이다. 주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자신의 죽음을 이해하는 자만이 자기의 죽음으로 주님의 죽음을 증언하려는 자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린도후서 5:14-15)
사망해야 될 자기 몸으로 참된 그리스도 몸에게 자리를 내어줄 줄 알아야 참된 교회이다. 그리스도의 몸만이 거룩함을 보이기 위해 그들의 몸은 늘 죽음 안으로 빨려 들어가 있다.
시편55편/이준
시편을 읽을 때 오늘 읽었던 본문과 같은 경우, 다윗의 체험담에 그리스도가 투영되어 있다는 점에 입각하여 읽어야 한다고 본다. 성경은 근본적으로 예수님께 대한 이야기이다(요 5:39). 성경의 모든 내용을 예수님께만 끌어다갖다 붙인다고 해서 그게 바른 해석이냐, 그게 신앙이냐 라고 반문하는 세력들도 있는가 하면, 또 예수님이라는 이름하에 선포되는 악마적 메시지들도 있지만 말이다.
아담들에 관한 이야기만 늘어놓으려면 굳이 성경이 이 세상에 존재할 필요가 없었다고 본다. 성경에서 다루는 예수님의 섭리에는 아랑곳없이 겉으로 보기에 아담의 역사는 아담들에 의해서 잘도 지속되어 온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상담을 하려면 성경 없이도 상담 지침서들이 있고, 개별 혹은 집단 상담 과정들이 잘 준비되어 있다. 리더십을 갖추려면 잘 조직된 리더십 매뉴얼과 프로그램들이 산재해 있다. 건강을 위해서라면 굳이 과거 유태인들의 종교적 식단을 찾아 성경을 탐구하지 않아도 된다. 수많은 식이요법 전문가들과 그들의 조언들이 대기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언젠가 시 55편을 본문으로 한 설교 한편을 접한 적이 있다. 아들 내외가 있는 미국에 건너갔다가 인간적 소외만을 경험하고 다시 귀국한 어느 권사 이야기, 믿었던 친구가 자신의 아내와 함께 도피해버린 어느 남성 이야기...이 두 가지를 예화로 들면서 본문에 등장하는 바, 주변의 믿었던 자들로부터의 배신과 실망감을 어떻게 극복하고 치유할 것인가 라는 내용의 상담적 설교 말이다. 아담들은 수많은 문제 거리들을 커다란 바지게에 힘겹게 지고 살아간다. 어쨌든 그런 문제들에서 빠져나오고자 그 어떤 도움이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예수도 좋고, 부처도 좋다는 식이다. 그래서 성경을 펼칠 때마다 예수로부터 그런 도움을 얻고자 한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보았던 군중들처럼...
이사야는 다윗이 별세한 지 수백년 후에 다윗의 부친 이새의 줄기에서 새로운 싹이, 그 뿌리에서 새로운 가지가 나올 것이라고 예언하였다(사 11:1). 죽은 다윗을 부활시킨다는 말인가? 앞서 성경의 모든 내용이 근본적으로 예수님만을 향하고 있다는 말을 했는데, 그렇다면 이사야의 예언 당시를 기점으로 하여 그 이후에 오실 새 다윗은 누구란 말인가? 예수님이시다. 시편 55편의 다윗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시간 속에서 다윗 당시를 기점으로 하여 미래에 오실 새 다윗의 행적을 미리 엿볼 수 있다.
15절의 경우, 다윗이 대적들을 저주하는 말이 나오는데, 인간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저주를 퍼부을 수 있는 권세와 자격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점을 우리가 염두에 둔다면, 한 인간으로서의 다윗이 누군가를 저주하는 것은 하나님의 고유 권한에 속하는 저주권을 일개 인간일 뿐인 다윗이 발휘하고 있다?사실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아울러 그가 제사장의 빵을 먹었던 일을 비롯해서 기타 여러 행적들을 미루어보건대, 그리스도의 권세(그 중에서도 심판권, 요 5:22 참조)가 이미 인간 다윗에게 투영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정황 가운데 우리는 다윗이 그저 일개 인간으로서의 다윗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사울에게 악신이 임했을 때, 다윗이 수금을 연주하여 악신이 물러가기도 했는데, 왜 다른 연주자도 아니고 궁중 전문 악사도 아닌 다윗의 수금 연주가 그런 효력을 유발한 것일까(당시 사울 왕가는 우리가 상상하는 번듯한 기반을 갖춘 수준이 아니어서 전문 악사를 두지 못했을 수도 있겠지만...어쨌든 부차적인 내용이긴 하지만 굳이 삼상 8:11-17을 보면 왕 앞에서 노래하거나 연주하는 자들은 언급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런 다윗으로부터의 은혜에 대하여, 그리고 여러 번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데 대하여 사울이 급기야 악으로 되갚은 이유는 무엇일까?
서로 다른 두 기름부음 받은 자의 대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뭔가 하실 말씀이 있으시기 때문이다. 사라와 하갈은 단순히 두 여자가 아니라 대조적인 두 언약이었던 것처럼(갈 4:24). 두 기름부음 받은 자, 곧 두 피택자는 단순히 두 남자가 아니라 두 가지 권력(내지는 세력)을 의미한다. 사울과 다윗...한 사람은 당대의 최고 권력자였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최고 권력자로부터 핍박받는 자였다. 이러한 대조적인 관계가 나중에 다윗과 우리야의 관계 - 최고 실세, 그리고 그 권력에 의해 살해당한 자의 관계 - 로 이어졌듯이.
이 두 남자의 조우는 각자의 배후에 놓여진 두 권력(세력)의 충돌을 드러낸다. 사무엘 기자는 이 점을 놓치지 않고 고스란히 기록했던 것이다. 두 사람 모두 하나님께 선택된 사람들이지만, 서로 다른 양상으로 사건이 진행된다. 한 쪽은 억압하고 핍박하며, 다른 한 쪽은 억압당하고 핍박당한다.
이러한 다윗 당시의 충돌은 미래의 새 다윗, 곧 예수님께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 빌라도와 예수님이라는 대조적인 두 통치자(권력자 또는 왕)의 만남으로 말이다.
이 두 사람의 만남과 대화, 그리고 그 이후에 벌어지는 사건 - 한 통치자가 다른 한 통치자를 처형시킨 것 - 을 통해 하나님께서 택하신 서로 다른 두 부류의 만남과 대조를 통해 한쪽을 폭로시키시고 누군가를 심판하시며, 반대로 다른 한 쪽을 구원시키시는 것이다.
왕과 왕의 만남... 곧, 당시 예수님 앞에 선 - 빌라도 앞에 선 예수님이라는 흔한 표현을 반대로 생각해 보면 - 빌라도는 한 지역을 관할하는 일개 총독의 지위를 넘어, 당대 전세계를 지배했던 로마 황제로부터 통치 위임을 받은 자였다. 즉, 예수님이 빌라도 앞에 서신 것은 로마 황제 앞에 선 것이나 다름없었다. 황제(의 권한을 위함 받은 빌라도) 앞에 선 예수님...이것은 성령님에 의해 이미 마 4장에서 악마와 예수님의 만남이 성사되었듯, 황제의 대리자를 통하여 예수님은 다시금 악마와 조우하게 된 것이었다.
통치자와 통치자의 만남...한 쪽은 당시 로마로 상징되는 아담 나라 임금(이 세상신, 곧 악마)의 대리자요, 다른 한 쪽은 이 세상(아담 나라)에 속하지 않은 자기만의 왕국이 별도로 있다고 주장한 통치자이다. 그런데 그 두 왕의 관계가 한쪽이 다른 한쪽을 죽여버린 결과로 치달았다는 사실은, 한 왕국이 다른 한 왕국과 근본적으로 대결(전쟁)하는 관계에 놓여있다는 말이다. 십자가 사건...이것이 악의 실체(악마)가 품고 있는 바가 온전히 폭로된 것이요, 악마과 그의 세상을 겨냥하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의지 표명이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에 하신 말씀, 곧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요 14:30)”라는 말씀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 두 왕의 만남을 통해 양측의 관계가 어떻게 전개되는가에 있다. 조화가 아닌 부조화, 공존이 아닌 대립이다. 한치의 양보도 없는 전쟁에 이미 돌입되어 있는 상황이다. 이 전쟁의 판도와 결과가 십자가 사건을 통해 결정지워졌던 것이다. 십자가는 '늘(오늘날에도)' 실제 상황이다.
두 왕의 대립...한 왕은 죽이려 들며, 다른 한 왕은 죽임 당한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왜 한 왕은 대적하지 않았을까? 다윗이 사울을 대적하지 않았듯이 예수님도 빌라도 정권에 물리적으로 대항하지 않았다. 이 와중에 이런 점도 생각해 본다. 충신 뒤에 사람이 백이면 역적 뒤에도 사람이 백이라고, 두 왕에게 속한 각각의 백성들도 자기네 왕과 똑같은 운명에 놓여 있다는 점을 말이다. 성도는 다윗처럼, 이 아담의 땅에서 고난당하고 짓밟히신 왕께 속한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언약은 이러한 점까지 그 자체적인 틀 안에 묶어놓고 있다. 아담이 대적을 일삼는 역사, 그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심판으로 응수하시는 역사, 그 과정에서 남은 자만 구원받게 된다는 사실이 그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13-14절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원수요, 악의 실체는 시편 기자(다윗)의 영적 동무로서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섬긴다는 부류에 속한 자였다. 악의 실체는 바로 우리 주변에 있으며, 그 힘은 우리 가까이에 있다. 아담과 하와 곁에 머무르고 있었으며, 가인의 문지방에 엎드려 도사리고 있었으며, 스스로를 신자라고 생각하는 속사람에 형제를 미워하는 살인의지로서 감추어져 있다. 이러한 상태에 대하여 시편 기자는 저주로 다가선다. 시편 기자의 저주는 곧 하나님의 심판이다. 저주받은 악의 실체는 음부로 운명지워진다(15절).
18절에 언급된 바, 다윗이 말한 ‘전쟁’은 21절을 통해 다윗이 과거에 참전했던 수많은 물리적 전투들만을 가리키는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따라서, 18절의 ‘대적하는 자’ 또한 단지 블레셋 등과 같은 이교도들만을 의미하는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동무라고 생각했던 자들...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믿고 섬기는 듯 보였던 자들...그들이 새 다윗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려했다.
(요 8:39)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요 8:41)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21절에 따르면, 악의 실체는 ‘전쟁’을 품고 있다. 악마는 끊임없이 전쟁하려는 자이다. 누구와? 사울은 다윗과 전쟁했으며, 빌라도와 유태인들은 예수님과 전쟁했던 것이다. 이 전쟁은 이 아담의 땅 위에서 예수님, 다윗, 성도가 핍박당하는 전쟁이다.
이 여호와의 전쟁은 ‘미끄러운’ 뱀의 혀요, ‘부드러운’ 용의 입과 싸우는 전쟁이다(21절). 비복음, 비진리를 배후에서 조종하는 악마와의 전쟁이다. 혀와 입은 그 마음에 담긴 것을 말로써 겉으로 표출하는 데 대한 상징이다. 이것은 곧 말씀과 말씀 아닌 것(가짜 말씀), 즉 진리와 비진리 사이의 대결을 말한다. 이것이 영적 전쟁의 실상이다.
이 와중에서 18절의 ‘나를 치는 자’의 실체가 밝혀진다. 바로 ‘악’이요, ‘악의 실체’이다.
우리는 전도하다가 핍박 받거나 순교하는 것만을 두고서 ‘그리스도 안에서(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으로 오해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생활 속에서 평소 인간 관계 속에서 뜻하지 않게 발생하는 사건들을 통해서 성도의 삶 주변에 관여하는 악의 실체(특히 불신자들의 의식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배후), 성도 속에 뿌리 박혀 있는 악의 실체(까닭 없이 유혹에 넘어가고, 언제고 무기력해지기도 하며, 근본적으로는 은근히 예수님께 대드는 고약한 심보)가 폭로됨과 동시에 또한 그런 세력들에 대한 예수님의 관여하심(영적 전쟁을 주도하심)을 알게 하신다.
처음에 하만은 단지 모르드개의 오만불손한(?) 태도가 마음에 안들었을 뿐이었다. 모르드개라는 자가 심중에 무슨 저의로 감히 자기 앞에서 오만방자했는지 그는 제대로 감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만이 그저 자신의 일상생활 속에서 발생한 순간적인 불쾌감이 유태인들에 대한 민족적 증오심으로 돌변한 과정을 바라볼 때, 그의 분노는 단지 표면적인 사건에만 자극받아 생겨난 일시적인 감정 문제가 아니었다.
감정은 빙산의 일각일 뿐, 그 밑에는 거대한 악의 실체가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하만 사건의 전모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는 갈고리로 악어를 꿰어 깊은 강바닥 속에서 끌어내듯(겔 29:3-4), 악마의 실체를 폭로시키시고 징벌(심판)하신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앞서, 본 장을 통해 인간 삶의 온갖 국면들이 발생시키는 스트레스와 고통의 문제들에 대한 치유를 이끌어내는 설교를 접했었다고 했는데, 이 또한 원수의 ‘미끄러운’ 혀와 ‘부드러운’ 입에서 나온 소리가 아닌가. 이것을 복음이라고 주장하는 데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참 복음으로 대적하시는 전쟁을 펼치신다.
모르드개와 하만의 이야기에서와 같이,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신 바 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삶의 여러 가지 산발적이고도, 사소해 보이며, 그저 그 경위가 해프닝에 불과한 듯한 사건들을 틈타(?) 우리 주변의, 그리고 우리 속의 악의 실체들을 그때그때 들추어내신다.
그러면서 우리의 외적 조건에 상관없이 우리의 정체성(성도임)을, 즉 이 아담의 땅 위에서 평화롭게, 안일하게, 이 세상과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님을 상기시키신다. 또한, 악의 실체가 이 세상의 일상사 - 내 주변에, 내 속에 - 와 보편적으로 결부되어 있음을 새삼스레 실감케 하신다. 그리고, 동시에 이것은 성도임에 대한 예수님의 위상(주되심)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듯, 성도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은 성도가 놓인 관계(주변과 자신)에 작용하는 악의 실체를 들추어내시고 폭로시키시고 ‘죽이시는’ 사랑이다. ‘치유하시는’ 사랑이 아니라.
아담 안에서 태어나 몸이 죄로 죽은(롬 8:10) ‘시체’인 우리는 ‘치유의’ 대상이 아니라, 죄에 대하여 ‘죽임 당한’ 대상이다. ‘시체’는 이미 절명하였으므로 치유할 필요가 없다. 고칠 대상이 아니다. 시체에 약을 먹일 수도 없을뿐더러, 주사 놓는다고, 연고 바른다고 낫?될 리 만무하다. 이 아담 세계가 포획하고 있는 저주의 사슬을 끊고 그 속에 놓인 시체를 재생시킬 수 있는 방법은 창조 당시처럼 ‘생명의 입김’을 다시 불어 넣는 길 밖에는 없다. 뱀의 혀에서 나온 거짓 말씀이 아닌, 예수님의 참된 '말씀'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신다.
우리는 그저 예수님이 벌이시는 전쟁터 가운데 놓여있는 존재들이다. 우리의 일상사를 통해 다윗이 경험했던 전쟁은 오늘도 예수님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이 아담의 땅(나라) 위에서, 그 배후에 도사린 악의 실체에 대항해서 말이다.
*시편56편1-4/모세언약대로 고수하고 적용하는 것이 성신의 역할이다.
◈ 이스라엘은 룻을 통해서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시는 새로운 안식의 국가가 된다 !!
* 룻은 원래 약속밖에 있는 이방여인이기에 없는 것인데, 그러나 이를 통해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다는 것이다. 즉, 이 룻을 통해서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시는 새로운 안식의 국가가 된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하나님의 원수는 무엇인가? 사무엘상 18장 19절을 다시 한번 봅시다.
(삼상 18:29) 사울이 다윗을 더욱 더욱 두려워하여 평생에 다윗의 대적이 되니라
* 재미있는 것은 사무엘상의 특징이, 사울이 다윗을 미워할 아무런 이유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다' 라는 것이 과연 이유가 되는가? 사울이 얼마나 다윗을 자랑스러워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다윗을 어떻게 미워할 이유가 되겠는가? 사울은 다윗에게 '너의 가문을 통해서 왕이 태어났으면 좋겠다' 라는 말까지도 했다는 것이다.
* 성경은 사울이 개인적인 감정이 결코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다윗을 미워하게 되는데, 그 이유를 무엇이라고 설명하는고 하니까, 한 마디로 '악신이 들렸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윗은 왜 또 그렇게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을 그렇게 너그럽게 대하는가? 그것은 성신이 임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다윗이 착해서가 아니고 말이다.
* 여기서 새로운 성령론이 등장하는데, 본인이 어떤 글에서 말하기를, '성령론은 기존의 언약을 유지 보존하고, 적용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다' 라고 했는데, 구약에서 이미 모세언약까지 왔으면 성신이 어떻게 하는가? 모세언약대로 고수하고 적용하는 것이 성신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 여기서 성신과 악신이라는 말을 집어넣음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께서는 이것이 개인적인 감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명기 32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마귀에게 제사를 지낸다고 했으니, 이것은 분명히 창세기 3장의 뱀과 여인의 후손이 벌이는 전투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 이렇게 되면 드디어 시편이 풀린다는 것이다. 시편 56편을 한번 보자.
(시 56:1)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사람이 나를 삼키려고 종일치며 압제하나이다
(시 56:2) 나의 원수가 종일 나를 삼키려 하며 나를 교만히 치는 자 많사오니
* 그런데 이 시편이 '다윗의 믹담시로, 영장으로 요낫 엘렘 르호김에 맞춘 노래' 라고 앞서 설명되어 있는데,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고, 그냥 '형식은 소월의 진달래꽃이고, 곡은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이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또 박사학위를 받으니, 음악박사인가?
* 그렇다면 여기서 '나(다윗)의 원수' 라고 되어 있는데, 과연 그 원수가 누구인가? 목사가 쫓겨나지 않으려고 새벽기도 시간에 이 본문을 가지고서 구라를 치고 하는데, 그러나 시편에서 '나' 라고 하는 것은 사실 다윗 개인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적용을 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 시편에서 '나' 라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다 !!
* 어떤 경우에든지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공관복음서와 사도행전을 한번 살펴 보라. 누구에게 적용을 시키는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예외가 없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믿는 자들에게는 왜 안 되는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이다. 머리와 지체는 다르다는 것이다. 오직 머리되신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원수가 우리를 압제하는 것이 아니고, 종말에는 원수가 우리를 유혹한다는 것이다. 사람을 압제하면 오기가 나서 반발을 한다는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을 보라. 얼마나 열을 받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마지막 때에는 우리들을 마귀가 좁은 길로 몰아넣는 것이 아니라, 넓은 길로 유도한다는 것이다.
* 시편을 제대로 강의하려면 상당히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 중요한 것만 말씀드리자면, 시편에 있어서 원수들이 살아가는 방법이 있는데, [ ① 재물 ② 힘 ③ 칼 ] 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의지한다면 원수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시편에서 다윗이나, 혹은 예수 그리스도가 의지하는 것은 무엇인가? 재물과 힘과 칼은 의도적으로 피하고 말이다. 주(主)와 하나님과 말씀을 의지한다는 것이다.
(시 56:3)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시 56:4)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혈육 있는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 그러니까, 재물과 힘과 칼이 하나님과 병행될 수가 있는가?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인들은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말하면서도 누구를 의지하는가? 재물과 힘과 칼을 의지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시편에서 도무지 용납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 중에 있기에 말이다.
* 시편 8편을 한번 보자.
(시 8:1)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시 8:2)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 먼저 주의 이름을 찬양하고, 그리고 주의 대적이 나오는데, 그렇다면 이것은 분명 싸움 중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대적을 어떻게 물리치는가?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물리친다는 것이다. 어린아이의 특징이 무엇인가? 제물과 힘과 칼이 없다는 것이다.
* 지난 4월에 부산에서 강의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사울의 메시야관과 다윗의 메시야관이 다르다' 라고 말이다. 이 소리를 듣고 얼마나 기분 나빠하는지? 그것을 보고, 남이 듣기 싫은 소리를 골라서 하는 내 팔자도 참 한심스러웠다는(?) 것이다.
* 여기서 시편 89편을 한번 보자.
(시 89:2) 내가 말하기를 인자하심을 영원히 세우시며 주의 성실하심을 하늘에서 견고히 하시리라 하였나이다
(시 89:3)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나의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시 89:4) 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위를 대대에 세우리라 하였다 하셨나이다{셀라}
(시 89:5) 여호와여 주의 기사를 하늘이 찬양할 것이요 주의 성실도 거룩한자의 회중에서 찬양하리이다
* 시편에서는 재물과 힘과 칼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는데, 이것을 시편 89편에서는 '하나님의 언약' 이라고 하는 것이다. '주의 성실하심', '언약을 맺으며', '주의 성실도' 라는 것을 보면, 하나님은 말씀대로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이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 다시 말해서, 재물과 힘과 칼을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은 인간의 한계인 것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약속, 그것을 이루어 가는 하나님의 성실하심, 이것을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 어릴 적에, 힘들게 물을 손으로 퍼 올리면서, 어린 마음에 '야, 이렇게 하지 아니하고 입만 벌리고 있으면 물이 올라오는 것이 없는가?' 라고 희망사항이 있었는데, 그런데 사실 실제로 있었다는 것이다. 그 유명한 '한일 자동펌프' 라고 말이다.
* 내어놓는 놓는 분도 하나님이고, 거두시는 분도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즉, 물을 준비하시고, 퍼 올리시는 분도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입만 대고 있으면 되는데, 이것이 믿음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하신 것을, 그것을 그냥 공짜로 얻어먹는 것을 믿음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행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함이라는 것이다.
* 다윗의 경우에,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주께서 하십니다' 라는, 그것을 유일한 힘으로만 의지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을 받을 이름이 없다는 것이다.
*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렇다면 과연 여기서 믿음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참 믿음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마귀를 섬기고 결국 망할 수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성실하심으로, 자기 약속대로 변함없이 이루어 가신다는 것이다.
(시 119:89) 여호와여 주의 말씀이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사오며
(시 119:90) 주의 성실하심은 대대에 이르나이다 주께서 땅을 세우셨으므로 땅이 항상 있사오니
(시 119:91) 천지가 주의 규례대로 오늘까지 있음은 만물이 주의 종이 된 연고니이다
* 욥기도 그렇고, 전도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전도서는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이 변함없이 마지막 심판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이다. 아가서도 그러한데, 아무리 네가 나의 사람을 피해 도망을 가도 나중에는 결국 잡힌다는 것이다.
* 이것을 두 글자로 '지혜' 라고 말하는데, 이 지혜라는 것은 잠언서에 나오는 데로, '하나님 자신이 이루어 가신다' 라는 것이다. 이것을 신약에서는 말씀으로 이룬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어떤 인간도 독생자가 하시는 일을 방해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 복음 - 인자 위에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한다는 것은, 너희들은 못했지만 인자이신 예수님은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이 율법을 지킬 생각을 말고, 오직 나 예수만을 믿으라는 것이다. 나 예수 외에는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을 받을 이름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라는 것이다.
* 나 대신에 누군가 물을 펌프질해서, 나는 입만 벌리고 있으면 시원한 물을 마구 준다는 이 사실이 그 얼마나 기분이 좋고, 가뿐한가? 그렇지 않는가? 인간은 땀을 흘려야 보람을 얻는가?
*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데, 만약에 누군가 어떻게 올라가느냐고 묻는다면 엘리베이터와 전기의 힘으로 올라간다고 해야지, 내가 버턴을 침착하게 잘 눌러서 올라간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 전기장치가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올라가는가? 집에 가서 벽에 있는 스위치를 한번 눌러 보라. 하루종일 눌리고 있어 보라. 올라가는가?
* 그래서 로마서 4장에서 무엇이라고 하는가? 행함은 아브라함 계통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강조해서 말한다는 것이다. 자꾸만 인간들이 자기들이 알아서 믿고 눌렀다고 하는, 그런 인간 스스로의 믿음, 즉, 행함을 강조할까 싶어서 말이다.
(롬 4: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롬 4: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 신약성경이 엄청나게 어려운데, 구약성경이 어떤 원리로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어 가는 지를 모른다면, 신약성경은 완전히 백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시편60편
시편68편19
◈ 언약구조 - 거듭난 사람의 죄 : 의로운 예수님의 용서함
그래서 언약의 구조가 어떻게 되는고 하니, 달랑 하나가, 즉 '거듭난 사람의 완벽한 행실'이 남는 것이 아니라, 다시 말해서, '거듭난 사람의 죄'가 있고, 또 '의로운 예수님의 용서함' 이라는 것이 짝을 이루면서 언약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68편에,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날마다 자기가 죽는다고 단언했고 말입니다. 아니 거듭났으면 솜씨를 발휘하면 되는데 죽기는 왜 죽습니까? 또 고린도전서 4장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시 68:19)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고전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 4:4)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시편69편9
범죄한 후에 아담과 여자는 서로 딴 몸으로, 타인으로 간주하면서 죄악을 전가하고 있다. 하나님의 훼손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본래의 인간의 모습에서 벗어나 있다. 창조의 원리를 어떻게 다시 유지될 것인가?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린도전서 6:16-17)
이 본문에서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다고 하셨다. 몸과 몸이 성관계를 갖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창조 원리이다. 그래서 그 둘은 한 육체가 된다. 하지만 '주와 합하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어떻게 주님과 합해 질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있어 몸이 어떤 한 위치에 점유하고 있다는 전제가 될 때 이 말씀이 수용된다.
마치 창기가 창조 원리에 있어 여성의 자리에 있고, 창기와 합하는 자가 창조 원리에 있어 아담의 위치에 있는 것 같아서 서로 합하면 한 육체가 된다는 것이 성립된다. 그렇다면 주님은 어떠한 분이기에 창조 원리에 적용을 받는 분이란 말인가? 이 해결책은 고린도전서 6:19에서 비롯될 수 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이 본문에서, 몸이라는 단어가 나오고 성전이라는 구약적 용어가 튀어나온다. 그러면서도 서슴없이 상호 결합시켜 의미를 창출한다. 몸이라는 단어와 성전이라는 단어가 무리 없이 결합시키는 신학적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얻어진다.
"비둘기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육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요한복음 2:16-17/19-22)
이 본문에서 구약이 하나 인용되어 있는데,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나를 삼키리라'는 본문은 시편 69:9의 말씀 들어 있다. 그 대목을 찾아보면,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주의 집'은 성전을 뜻한다.
그리고 '나'라고 하는 것은 다윗을 뜻한다. 즉 다윗을 해하고자 하는 자들이 이방인들이 아니라 바로 누구보다 더 성전을 아끼고 사랑하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시편 69:8에 "내가 내 형제에게는 객이 되고 내 모친의 자녀에게는 외인이 되었나이다" 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시편 69:9을 계속 보면, 그 성전을 지키고자 하는 그들의 열성이 도리어 하나님의 뜻을 훼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태가 일어나는 것은, 그들이 진정 성전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즉 다윗과 그 가문이 주님의 의도하는 성전인데 이 사실을 그들은 몰랐기 때문에 성전을 제대로 지키기 위해 참된 성전인 다윗을 못살게 굴어서 도리어 하나님의 성전을 깨는 그런 짓을 했다는 것이다. 이 시편의 정황은 예수님을 통해서 재현되어야 되는데 그래야 말씀이 예수님으로부터 완성이 된다. 즉 예수님의 육체가 성전이냐 아니면 건축 구조물이 성전이냐 하는 판단은, 예수님이 이 지상에 오셔서 몸이 수난(훼방)을 당해야 하는 그런 경험을 통해서 비로소 드러난다는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이 말씀을 믿었다. 왜 성전 구조물이 성전이 될 수 없느냐 하는 최종 결정은 예수님의 육체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모두 예수님의 육체를 중심으로 해서 벌어지는 사건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 육체성으로 인해 창조 원리는 다시 성취의 계기를 맞이한다. 창조로부터 다시 새로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이 창조 작업은, 필히 창조 원리에 위배되는 사고 방식을 가진 세력들이 배경으로 되어 있어야 한다. 주님의 훼방하고 주님의 일을 배척하는 그런 세력으로 인해 구약에 있는 모든 예언들이 예수님의 한 몸으로 다 집중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인간이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완벽하게 훼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영원한 증거로 삼아진다.
시편69편 21-23
◈ 칼바르트와 선택론 - 칼바르트가 가장 공격을 받은 것은 선택론으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기존 인간들은 항상 구원론으로 시작하기에, 방법론이 나오는데, 바르트에게는 그러한 방법이 없는 것이다. 나중에 바르트가 인간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이신건의 주장처럼, 바르트의 입장이 바뀐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 범위가 어디에까지 미쳤는지를, 예수님을 넘어서 교회에까지 미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선택론의 연장선에서 인간을 이야기 한 것이다.
* 구원론 중심으로 성경을 보면, 선택론은 하나의 간이역으로 지나가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문제에 집착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 하나님을 앞에 두고 행위를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뺨을 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은 자기편에서는 아무 것도 없지만, 하나님 쪽에서는 선택하신 행위가 있는 것이다.
* 자기의 행위가 없어서 허전한 것이 바로 인간이다. 롬 7:11은 이스라엘이니까 구원을 받는다는 안일한 생각을 다 깨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인가?
(롬 11:9) 또 다윗이 가로되 저희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옵시고
(롬 11:10) 저희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저희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
(시 69:21)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 - 십자가 사건
(시 69:22) 저희 앞에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저희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서
(시 69:23) 저희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하시며 그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
* 십자가 앞에서 먹고 마시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 다윗은 그 당시의 자기의 고난을 통해서, 다윗언약이 그 당시의 이스라엘을 몽땅 부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은 선택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시69:25
베드로의 구약 해석은 참으로 특이하고 낯섭니다. 왜냐하면 구약 성경에 정통해 마지 않는 유대인들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연구해도 나올 수 없는 해석을 베드로 사도가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에 가롯 유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는 겁니다. 베드로는 두 가지 본문을 시편에서 뽑았는데 우리는 그의 성경 해석을 그대로 따르고자 합니다. 그래야지만 문제를 뛰어넘는 제대로 된 영적 해석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본문은 시편 69편이요, 다른 하나는 시편 109편입니다. 시편 69:25에 보면, "저희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그 장막에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에 아무리 눈 닦고 봐도 가롯 유다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27-28절에 보면, "저희 죄악에 죄악을 더 정하사 주의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시편은 전체가 장차 오실 예수님을 묘사하기 위해 미리 예언된 것이라고 베드로는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에 의해서 죄 씻음받고 용서받은 자도 이 시편에 예언되어 있을 것이요, 그렇지 않고 예수님의 의해서 죄씻음 받지도 못하고, 용서도 받지 못할 것도 이 시편에 예언되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시편 109:8절과 12-15절에 나옵니다. "그 년수를 단촉케 하시며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시며… 저에게 은혜를 계속할 자가 없게 하시며 그 고아를 연휼할 자도 없게 하시며 그 후사가 끊어지게 하시며 후대에 저희 이름이 도말되게 하소서 여호와는 그 열조의 죄악을 기억하시며 그 어미의 죄를 도말하지 마시고 그 죄악을 항상 여호와 앞에 있게 하사 저희 기념을 땅에서 끊으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구약 성경은 예수님에 의해서 행하신 일에 대해서 미리 언급한 책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로 인해 이 세상은 두 종류의 사람이 생기고 말은 것입니다. 한 쪽은 자신의 지은 죄가 모두 예수님에 의해서 다 씻음받은 자인데 그 사람은 생명책에 이름이 그대로 유지되는 자이요,
다른 한 무리의 사람들은, 남들 보기에는 하나님께 속한 자인 것처럼 살아왔지만 예수님에 의해서 용서가 되지 않았기에 자기 부모에게 물러받은 죄가 그대로 남아 있어 저주받게 되어 무리들입니다. 가롯 유다는 바로 이 저주받을 무리의 대표로 이 다윗의 시편에 예언되어 있다는 것이 베드로의 구약 성경 해석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입장에 서서 거꾸로 구약 전체를 내다보는데 거기에는 확실하게 대비가 되어 두 가지 노선을 나란히 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11사도들이 받은 은혜성과 가롯 유다가 받은 저주성을 함께 지니고 있어야 교회가 된다는 것을 이미 베드로는 익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 중심으로 구약을 대하는 영적 해석입니다. 영적 해석이란 모호하?해석한다는 것이 아니라,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엄연히 교회의 주인되시는 분이 자신의 구원 사역을 다 이루었다는 그 증거물로서 교회를 만들고 계심을 확연히 아는 상태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겁니다.
시69:27-28
◈ 열 처녀 비유 - 구원은 본인 행실이 아니라, 기름을 준비하라는 주님의 요건 !!
마태복음 15장에 이런 비유가 나옵니다. 열 명의 사람이 있는데, 열 명 다 처녀입니다. 이들 중에서 이혼한 사람이 있다거나, 동거녀가 있는 것도 아니고 모두가 다 처녀라는 말입니다. 다만 여유 분의 기름을 준비했다는 것과 준비하지 못했다는 것의 차이가 있지요.
그런데 기름 준비한 그것을 다섯 처녀가 기름 준비할 때 신랑이 와 버려요. 미처 기름 준비 못한 사람들이 기름을 사러간 사이에 말입니다. 그들이 사서 돌아올 때 신랑이 온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한 명도 도착하기 전에 신랑이 왔어요. 왜 그렇습니까? 다섯 처녀?혼인잔치에 참석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여기에서 기름이 등장한 것은 사실 핑계에(?) 불과합니다. 애초에 다섯 명만 들어가도록 되어 있어요. 그래서 그들이 구원을 받은 것은 본인의 행실이 아니라, 기름을 준비하라는 주님의 요건 때문에 천당에 가고 지옥에 가는 것이지, 그 사람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예수를 믿으면 구원시켜 줄게" 라고 요한복음 3장에서 말했잖아요. 그러면 날 때부터 불교 집안에 태어나서, 학교도 불교 재단학교에 다니고 그러다가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조차 없었잖아요. 이것은 마치 주일학교 학생의 질문처럼, "조선시대에는 목사도 없었고, 선교사도 안 왔고, 교회도 없었는데 어떻게 됩니까?" 하는 것과 같은 말이지요.
이것은 일부러 천국에 못 오도록 가로막는, 즉 사랑을 못 받도록 하는 그러한 작업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기어이 지옥에 갈 사람을 지옥으로 보내는 하나님의 솜씨에 대해서 찬양해야 되지요. "야, 주님 참 끈질기다. 역시 하나님의 능력은 대단해!" 라고 찬미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제가 이런 소리해서 얼마나 욕을 많이 들어먹는지 모르는데, 하지만 성경을 한 번 찾아봅시다. 누구 말이 맞는지 말입니다. 시편 69편 27, 28절입니다.
(시 69:27) 저희 죄악에 죄악을 더 정하사 주의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시 69:28)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
이 말씀은, "죄를 짓게 해서라도 기어이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신다" 라는 것이지요. 신약시대에는 이러한 역할을 누가 합니까? 구약의 여호와가 하시는 일을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하시지요. 구약에 나오는 모든 말씀을, 빈틈없이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성취해 내시는 그런 자리에 지금 주님이 주로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예수'가 아니고, '주 예수' 라는 것입니다. '주 예수' 라는 말은, 구약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을 다 성취해서 오직 사랑을 입은 자에게만 천국을 허락하시는 그런 분이란 말이고, 이런 주님의 활동 때문에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 열 처녀의 비유 - 공평의 원리는 없다 !!
사실 조금 전에 말한 열 처녀의 비유에 있어서 공평의 원리는 없습니다. 인간 측에서 보자면 전혀 공평하지 않지요? 그리고 디모데전서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만민이 구원되기를 원한다고 했는데, 이 말씀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딤전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무슨 뜻입니까? 구원을 얻기 위한 어떠한 장벽도 하나님은 일체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구원을 결정할 때 인간들이 "너는 이런 죄를 지었으니 구원을 못 받아, 너는 이런 삶을 살았으니 반드시 구원받게 되어 있어" 라는, 이런 것들은 하나님 앞에 안 통한다는 말입니다.
구원의 조건에 그 사람이 유리하든 불리하든 상관없이 하나님이 그 모든 장벽을 허시고 자신이 원하는 자는 다 구원해 내시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편을 가르고 하는 것이 하나님께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름을 준비할 때, 기름을 준비하라는 소식이 다 같이 들었잖아요. 그것을 보고 공평하다고 생각하시는데, 과연 맞습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꽃 한 송이씩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라고 말했다면, 어떤 사람은 금방 가서 꽃을 준비한 사람이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급한 일 먼저하고 나중에 준비하려고 한 사람도 있고, 아예 잊어버린 사람도 있겠지요. 우리 같으면 모든 사람이 꽃이 있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면 다 꽃을 준비해 오도록 기다리겠지요.
그런데 다섯 처녀들은 미처 기름 준비가 늦었지만, 그래도 준비를 했는데 혼은 잔치 집 대문은 닫혔고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열어주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기름을 준비하라는 취지는 무엇입니까? "내가 원하는 사람만 부르겠다" 라는 뜻입니다. 뭐가 어렵습니까?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이렇게 쉬운 이야기가 왜 납득이 안 되고 이상하게 들리는가 하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방법과 우리가 평소에 생각했던 구원방식이 너무나 차이가 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려운 것이 아니고 다르기에 생소하다는 것입니다.
시편69:28
전도란,교회 자신의 붕괴를 이야기하는 것이다.그래서 이 땅에 속한 모든 것이 현재 하늘의 저주의 대상이 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의해서 세우심을 받았지만 역시 허물어지기도 했다.이것이 바로 전도이다.이스라엘 국가를 통해서 보여지는 하나님의 본 뜻,그것은 땅의 죄악성이며 아담 세계의 정죄성이다.
이방인들이 과거 유대인들과 상관없이 예수님과 막무가내로 연결될 수는 없다.예수님을 안다는 것 자체가 아브라함 후손의 운명과 자기와 동일시 해야 한다.이방인이 새삼스럽게 유대인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인간의 죄악됨을 보이기 위해 뽑힌 그 유대인의 슬픈 역사가 바로 예수믿는 이방인의 역사를 대신했다는 말이다.이방인이건 유대인이건 다같이 구약역사에 나타난 실패한 유대인들이다.그리고 그 노선 위에서 하나같이 죄인들이다.이럴 때 비로소 구세주가 유대인에게서 나오게 되며(요한복음 4:22) 그 구세주로서의 예수님의 존재가 이방인건 유대인이건 다같이 의미가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것은 또한 허물기 위해서 세우신 것이다(요한계시록 2장-3장).영원하다는 생명책,그러나 그 생명책의 이름도 지움을 받는다(시편 69:28).모든 것이 붕괴되고 모든 것이 허물어지는 이런 종말의 시점에서,지상에서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을 찾는 자만이 구원을 얻는다(로마서 10:13/사도행전 2:21).그러나 이 복음을 믿을 사람은 없다(로마서 10:16).복음을 듣지 않아서 안 믿은 게 아니다(로마서 10:18).
그것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이 되게 어떤 이는 완악한 채로 남겨 두었다(로마서 11:7).그리고 어떤 이는 은혜로 택하심을 입어 구원의 남은 자가 된다(로마서 11:5).어쨌던 자연적으로 복음을 믿어 구원받는 자가 없이 모두다 순종치 아니한 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 만이 그들에게 임하여 그들이 구원되기 때문이다(로마서 11:31-32).
시69:28
언약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설정되는가?
모세가 두 번째 하나님께 나아와서 보고 온 모든 제도와 기구들이 바로 언약을 설정하기 위한 요소였다. 성막과 제사장제도는 이스라엘에게 있어 언약의 역할을 한다. 물론 그 중심 되는 법궤 안에는 모세가 하나님께 받은 십계명이 들어가게 된다. 출애굽기 24: 5- 8에서 체결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체결된 언약을 보다 확고히 가르치고 확립해 놓기 위해 하나님은 돌판과 기타 여러 제사모형과 성막을 제조케 하셨다.
백성의 타락 전에는 십계명의 준수여하에 따라 언약이 유지되었지만 모세의 대속의 기도 이후에는 백성들의 지은 죄를 사해주는 제사장 기능의 존속여하에 따라 언약이 유지된다. 제사장복장에 걸쳐있는 12지파의 이름은(출28:29) 제사장이 책임지고 죄를 사해주어야 될 백성들의 이름이다. 따라서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모세언약 안에 들어와 있어야 언약의 백성,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그리고 그의 이름이 주의 책에도 그대로 명단이 등록되게 된다. 만약 지상에서 모세언약에 대해 불신을 갖게 되면 자동적으로 주의 책에서도 이름이 지워진다.
우리는 등재와 지워버림의 법칙이 이스라엘 즉 하나님의 백성의 속성을 알 수 있게 한다. 등록과 말소의 규정이 꼭 필요한 것은 언약이 하늘과 땅 사이에서 계속 존속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모세언약을 통한 죄사유하심을 거부하는 자가 구원과 생명의 책에 그대로 남아있게 되면 언약체계가 붕괴되기 때문이다. 언약의 빈틈없는 실행만이 모세의 대도의 기도에 합법한 취지가 된다. 다시 말하지만 범죄란 언약을 기준으로 해서 결정된다.
따라서 지상의 범죄와 무관하게 그대로 남아있는 생명책에 명단이 없음이 확실해졌다면 지상에서 마음 놓고 범죄하면서도 구원의 평안을 함께 누리는 그런 오류 있는 구원론이나 교회론적 사고방식은 결코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시편 69:28에서도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라는 간절한 기도가 나와 있는데 신약이라 고해서 일관된 하나님의 의지와 마찰되겠는가!
요한계시록 3: 5에서도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라고 나와 있듯이 [흐리지 아니하고]라는 말을 보아 이미 적혀있던 명단도 흐려져 없었던 것으로 되는 경우를 볼 수 있는 것이다(애초부터 안 적혀 있었던 명단이라면 흐려진다는 말이 필요 없다)
우리는 보건대 언약을 확고히 고수하는데서 백성이 된다는 취지에는 변함이 없으나 그 대상은 유동적임을 알 수 있다. 구약 때는 조건부였고 신약 때는 무조건적 구원이라는 주장이 근거 없는 이유는 구약 때나 신약 때나 인간 중심이 아니라 언약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신구약 모두 무조건적인 구원이었다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구약 때도 자기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언약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받기 때문이다.
구약 때도 이스라엘이라는 언약의 공동체를 예정하셨기에 하나님은 그 선택된 자의 구원행위와 유기행위를 통해서 변함없는 이스라엘과 남은 자를 유지시켜 오셨다. 그러나 예정론과도 모순되지 아니한다. 예정의 지향점이 [그리스도 안]이기 때문이다. (엡 1: 4)
시편70편
*시편71편2/거듭난자는 죄짓지 아니한다?
요한 일서 3:7-9에 이런 말씀이 있다.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여기에 나오는 '죄 짓지 아니한다'라는 말씀은,
마귀가 범죄한 죄악에 빠지지 아니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마귀의 범죄는 무엇인가? 윤리이나 도덕적 차원에서의 죄인가?
아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마귀는 인간에게 선악 지혜와 의식을 심어 주려고 했다. 즉 마귀의 죄는 선악과와 관련된 죄악이다.
마귀는 선악의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에게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 인간은 의와 상관없는 범죄인이 되었다. 아무리 율법에 달라붙어 완전하게 순종하려 해도 이미 죄가 그 율법을 가지고 왕노릇하고 있는 이상 의라는 것은 인간에게 도출될 수 없었던 것이다. 더나아가서 율법 앞에서의 인간의 모습은 도리어 주주의 대상에 불과함이 확연해졌다.
구약에서도 이미 밝혔듯이 오직 의는 주의 의 뿐이다.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풀어 주시며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나를 구원하소서"(시 71:2)
바로 이러한 구약의 예언이 신약에 와서 그대로 성취된다. '하나님께로 난 자'에 한해서 범죄치 아니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로 난 자'란 누구를 의미하는가? 그것은 자기로부터 난 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자기가 자기를 관리하거나 조절해서 거듭 태어나게 하는 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요한 일서 2:27-29)
이 본문 끝에 보면,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라고 되어 있다. 즉 예수님의 의로우심을 아는 자가 바로 예수님께로서 난 자들이다.
요한 일서 1:10에 보면,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모든 인간의 범죄성을 기정 사실화하고 있다.
이 문장의 뜻은, 만약 이후에 말씀이 들어간 자가 있다면 그는 더 이상 죄와 무관한 완전한 자가 되었다는 뜻에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죄악된 인간 속에서 어떤 작용을 작렬하는가 여기에 주목하라는 것이다. 즉 화목 제물에 의한 계속적인 용서함이다.
그런데 이 용서함을 완전함으로 곡해하면 진리 전체가 와해된다.
시편 71:15-16의 말씀에 나와 있는 거듭난 자의 모습과 어긋난다.
"내가 측량할 수 없는 주의 의와 구원을 내 입으로 종일 전하리이다 내가 주 여호와의 능하신 행적을 가지고 오겠사오며 주의 의 곧 주의 의만 진술하겠나이다"
하나님은 말씀만 던져 놓고서는 그 이후에 모든 것을 성도에게 일임하시지 않는다. 늘 성령께서 성도 안에서 작용토록 하신다. 주의 의가 작용한다고 말해야 될 것을, 성도는 이제 완전히 무죄한 행위를 한다는 선악적 차원에서 해석해 버리면 엄청난 오류이다.
이것은 성도와 주님과의 지속적인 사귐을 무시하는 처사이다. "우리가 보고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요한 일서 1:3)
계속적인 사귐 안에서 주님의 계속적인 메시야 기능이 적용될 뿐이다. 그것이 바로 화목 제물에서 나오는 의이며 사랑이다. 더 이상 사랑이 불필요할 정도도 성도는 완전히 자립한 존재인가? 주님을 증거 하겠다고 나서다가 급기야 구원받은 자신의 완전함을 증거 하는 경우로 빠질까 늘 두려워해야 한다.
시편71
시편 19편 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만든 이 세상 모든 만물은 무엇을 알고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이 속에 가득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모르는가 하면, 다른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광이 이 세상에 가득하다는 것을 다 아는데 누구만 모르는가 하면 바로 잘난 체 하는 우리 사람, 똑똑한 체 하는 우리 사람,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제일 훌륭하다는 인간들만 이 우주만물에 가득 찬 하나님의 영광을 모르는 것입니다.
여기 시편 19편 뒤에 읽어보면,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움, 영광스러움이란 하나님은 정말 대단해! 하는 이런 소리가 온 만물에서 소곤소곤 쏙닥쏙닥 다 전하여지고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솜씨와 위대함을 코스모스도 자기들끼리 전하고 알고 있는데 사람은 아무리 마이크를 대고 귀를 쫑긋 세워서 들어도 이 코스모스가 옆의 코스모스가 무슨 소리를 하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으니 아무른 이야기도 하지 않는 것으로 이렇게 오해를 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아무른 소리가 들리지 않더라도 코스모스와 코스모스 사이에는 하나님이 얼마나 높으신지! 얼마나 훌륭하신지! 대단하셔! 함께 찬양하세! 바로 옆에서 바람에 날리고 있는 코스모스가 코스모스에게 다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것들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구나! 그러니 이 세상은 조용한 거야! 인간이 이렇게 된 것은 인간들 속에 마귀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마귀는 내가 최고야!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야! 사람이 최고야! 자꾸만 이렇게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 목사님이 천문학의 책을 보니, 세계 최고의 천문학자들이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우주는 왜 생겼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 세계의 최고의 천문학자들이 전부다 이야기하기를 우주가 발달하고 진화하고 성장한 것은 그 마지막에 우리 인간이 있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주는 왜 있는가? 이 은하계는 왜 있는가? 수천억 광년 끝에 은하계 같은 은하계가 수천 억 개 있다고 하는데 그 방대한 우주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커지고 넓어졌는가? 그것은 이 우주에서 가장 훌륭한 우리 인간이 태어나기 위하여 우주는 그동안 그렇게 애썼나 보구나!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런 시기 있지요!
이렇게 광활한 우주가 왜 있는가? 사람 하나 태어나게 하?위하여 우주가 있으니까 우리가 감상하라고 우주가 있다고 세계 최고의 똑똑한 사람들, 아이큐가 150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서 내린 결론이 그것입니다. 이 우주는 사람을 위해서 생긴 것이다. 여러분 맞습니까? 틀렸습니까?
틀린 것입니다. 마귀가 그렇게 한 것입니다. 선악과 ?먹을 때부터 너는 최고야! 이제부터 하나님 없어도 살 수 있어! 이제 하나님을 찾지 마! 너 혼자 살수 있는데 왜 하나님을 찾는 거야! 그러니 이제 하나님과 헤어져! 그까짓 하나님 대충 넘겨버려! 이제 네가 하나님 해! 네가 하나님이야! 그러니 그때부터 인간들은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우기면서 위대한 문명이 어떠니, 발달이 어떠니, 우주는 다 내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시편71:20
시편 71편 20절에 보면, “우리에게 많은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 고 해서 죽은 자들이 집합하는 장소가 “땅 깊은 곳”으로 되어 있습니다.
“땅 깊은 곳”이니까 땅을 떠나지 않지요.
그리고 하나님은 어디 계시냐 하면 하늘에 계십니다.
구약 성경의 특징은 인간이 땅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죽더라도 땅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구약 성경의 아주 독특한 저승관입니다.
우리 현대인들은 죽으면 땅을 벗어난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구약에서는 인간은 죽어도 그 땅에 그대로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처음부터 창세기 3장 24절에 아담이 죄짓고 난 뒤 하나님이 추방해 버렸습니다. 어디로 추방했느냐? 땅으로 추방했어요.
그러니까 구약성경에서 원래 아담이 있었던 장소는 낙원이었고, 낙원에서 현재 살고 있는 땅으로 추방되었고, 낙원은 우리와 상관없는 곳이 되었어요. 천사들이 지키고 있기 때문에 그 곳으로는 갈 수가 없고 우리는 죽으나 사나 땅에 속한 것입니다. 살아서도 땅에 머물고 죽어서도 땅을 못 벗어나는 그런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쁜 짓 한 사람은 어디에 갑니까?’ 하는 질문이 구약 성경에도 있어요. 어디 가느냐? ‘힌놈의 골짜기’라고 해서 ‘게헨나’로 되어 있어요. 이것은 신약에서 번역해서 ‘하데스’(지옥)라고 했는데, 이곳이 뭐하는 곳인가 하면 쓰레기 태우는 곳입니다. 예루살렘 남쪽에 쓰레기 태우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쓰레기 태우는 곳도 역시 땅이에요.
구약 성경에서는 처음부터 낙원에서는 추방되었으니 낙원은 우리와 상관없고 땅으로 추방되었으니 죽으나 사나 우리는 땅에서 못 벗어나는데, 땅에서 못 벗어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사나 죽으나 동일한 원리, 즉 땅의 원리에만 저촉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땅을 없애려고 합니다. 따라서 땅에 사는 인간들도 없어져야 되는 거예요. 없어질 땅에 내가 살면서 ‘나는 죽어서 어디에 갑니까?’ 라고 물으면 하나님 왈 “너는 땅에 있고 땅과 함께 날아가 버린다.” 이것이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시편73편1-5
호세아 12:2-4에 보면, 이러한 야곱적인 정신상태에 대해서 하나님 보시기에 벌받을 짓이라는 겁니다. "여호와께서 유다와 쟁변하시고 야곱의 소행대로 벌 주시며 그 소위대로 보응하시리라 야곱은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저를 만나셨고 거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그 당시 유다나라의 소행이 딴데서 온 것이 아니라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 이 야곱의 행동이 그 당시 '야곱, 즉 이스라엘의 소행'의 원조가 된다는 겁니다. 야곱은 진정한 축복이 뭔지를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본인이 염두에 둔 처 자식과 재물이 결코 하나님이 주고자 했던 그 축복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뭡니까? 야곱을 진정한 싸움꾼으로 변모되는 것이 야곱이 받을 축복의 전부입니다. 마하나임이라는 천사들의 싸움 군단으로 하여금 야곱을 만나게 했던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속에 함께 들어가 있는 바입니다.
싸움하다 보니 밤이 다 샙니다. 이제 낮을 피해 떠나야 될 그 인물로부터 환도뼈를 얻어맞고서는 싸움이 더 이상 진행될 수 없었습니다. 더 이상 그 천사를 붙들고 싸울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낯선 상대를 만나 자신의 본성을 다 드러나고 만 상태가 되고 말입니다.
모든 것이 들켜 버렸을 때에 야곱은 자신에게 아무 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모든 것을 가져간 그를 붙들고 이번에는 싸움이 아니라 애원을 합니다. 제발 축복해 달라고 말입니다.
그 때 그 낯선 분은 야곱의 이름을 묻게 됩니다. 야곱의 모든 것을 회수하려 하는 겁니다. 야곱식으로 생각한 축복은 이제 끝났습니다. 야곱식으로 축복을 지키려는 결과로서 야곱에게 돌아온 것은 절둑절둑 절게 되는 장애를 입은 신체 뿐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새로운 축복을 내립니다. 이것은 야곱이라는 이름이 없어진 근거에서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가지고 전쟁을 벌리려는 것입니다. 야곱식으로 버티는 모든 자를 향한 이스라엘식의 공격입니다.
사실 성도라는 자들은 모두 이스라엘입니다. 이름만 이스라엘을 사용한다고 성도가 아닙니다.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뀌게 한 그 하나님의 일관된 능력이 임한 자만이 참 이스라엘입니다. 이들은 야곱식의 사고방식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그리고 야곱식의 축복관이 무엇인지도 압니다. 내 힘으로, 내 기도로, 내 헌신으로 내 축복을 지킨다는 것이 하나님께 원수가 되는 사고방식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축복관입니다. 이스라엘이 되면 애시당초 내 것, 내 축복이라는 것이 도무지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뜻만이 작렬할 뿐입니다.
시편 73:1-5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여러분 이런 상황에서 안미끌어질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싸움은 결코 육적인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권세를 잡은 악마와의 싸움입니다. 즉 인간 자신의 능력과 솜씨에 의존해서 사는 그런 야곱식을 좋아하고 옹호하는 세력입니다.
이 싸움은 타인과의 싸움 이전에 우리의 싸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시편73:1-5
예수님이 갚아주는 복수는 복음 때문에 당했던 억울함과 희생에 대해서만 갚아 주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3-5절 보겠습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란 중에서 우리를 위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란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주님께 위로 받는 경우는 언제인가 하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했을 경우에만 예수님이 주는 위로를 받게 되지, 돈 1억 5천 날려서 그것 때문에 씩씩거리다가, 주기도문에 나오는 것처럼 ‘주여 주께서 나를 용서하신 것 같이 내가 형제를 용서했나이다’ 이런 것은 엉터리에요.
돈 1억 5천 때문에 씩씩거린다는 자체가 오히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만약에 집에 불이 나서 온 재산 다 태웠을 때, 예수님에 찾아 오셨다면 예수님 멱살을 잡고 ‘당신이 왜 우리 집에 불나게 했어’ 하고 달려들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위로를 받는 다는 것은 특이한 사람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떤 특이한 사람인가 하면, 이상하게 예수님 때문에 같이 고난의 길을 가게 된 독특한 사람에게만 예수님의 위로를 받게 됩니다. 이것이 좁은 길입니다. 남들이 찾아도 알 수 없는 길입니다. 감춰진 길이지요. 그래서 성도는 감춰진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영화 이야기를 다시 해 봅시다.
이 영화에서 모사드(이스라엘 정보부)가 ‘검은 구월단’을 찾아내서 죽일 때, 늘 격려하는 내용이 뭐냐 하면, 우리 민족을 잔인하게 죽인 놈, 우리 형제를 죽인 놈. 하면서 TV를 통해 형제를 죽이는 장면이 떠올라서 분노를 더 일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복수를 정당화 시킵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와 있는 환란과 정당함은 뭐냐 하면, 욥기를 보면 그런 것이 나옵니다. 욥이 제일 난처한 것이 뭐냐 하면, 왜 정당한데 고난 받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정당한데 왜 고난 받습니까’하는 것이 정당하냐, 그런 너에게 고난을 준 이 하나님이 정당하냐” 라는 그러한 대비가 욥기의 전체 주제로서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도 우리 성도에게는 이 두개의 길이 나란히 흘러가고 있습니다.
시편 73편을 보겠습니다. 1-5절입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에, 하나님 믿지 않는 사람인데 죽을 때도 건강하다가 죽고 그리고 평소에도 아프지도 않고 만사형통하고 평소에 재앙이란 찾아 볼 수도 없고, 자기는 하나님 믿는데 이런 형통한 사람과 비교해 보니까 뭘 해도 안 되고. 그래서 신앙이 미끄러질뻔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엇이 선이가 하면, 자기는 선을 행하면 만사형통하고 평안할 줄 알았는데, 시편을 보니 그것이 아니고, 바로 그렇게 안 하시고 악인에게는 재앙이 없고, 예수 믿는 자에게 고통을 주는 그러한 하나님이 나타난 자체가 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욥기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나보다 죄 많은 사람은 멀쩡한데, 하나님 잘 믿고 선하게 살아가는 나에게 자식 10명 다 죽고, 재산 다 불타고, 내 몸은 만신창이 되고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합니까?
여기에서 원망과 불평이 생겨나지요.
그런데 원망과 불평이 생길 때 그 때 욥 스스로 해결책이 있습니까? 욥은 전혀 해결책이 없어요. 이것이 진리입니다. 해결책이 뭡니까? 그냥 나는 원래부터 그런 하나님 이었어 하고 나타나심 자체가 욥에게는 해결책입니다.
‘내가 그동안 하나님에 대해 잘못 알았구나. 하늘의 영광스런 하나님만 생각했지 독생자의 영광, 인간들이 보기에 고난당하고 수치당하는 식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그렇게 등장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부자와 권력자를 부러워하다 보니 나도 하나님 믿으면 저렇게 잘 되겠지. 잘 되겠지 ---
자기가 생각한 상징. 상징적 존재의 최후가 바로 신입니다. 자기 신체의 욕구와 욕망이 상징이 되고, 이 자기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법을 만들고, 이 법의 최고 법은 신입니다. 그런데 이 전체 모두가 다 사기입니다. 몽땅 거짓말이에요.
이렇게 내 잘되기 위해서 법을 만들고, 법을 잘 지켜서 신에게 복을 받는다는 식의 이 모든 것이 엉터리라고 나타날 때 바로 십자가로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너는 죽어도 싸지. 너는 나의 함께 십자가에 같이 죽자. 이제 너 속에는 복음만 남겨야해. 하는 식으로 십자가가 나타날 때, 이 십자가 지신 그 하나님이 위이 있고 높이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밟히는 제일 천한 곳, 인간의 원한과 분노를 뒤집어쓰고 거기서 피 흘리고 희생물이 되어버린 연약한 그분이 바로 진짜 하나님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발견 못한다면 그런 사람을 평생가야 천당 못갑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을 죽었다 깨어나도 천당 못갑니다.
시편74/근본주의 신학
근본주의 신학에 대하여 근본주의임을 스스로 표방하고 긍지를 느끼면서 변호하는 입장에 있는 학자가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의 입장에 있는 자유주의 신학을 하는 저자가 자기와 같은 입장의 신학을 하는 사람들의 근본주의에 대하여 갖고 있는 편견이나 미숙한 견해를 시정하고자 쓴 것이 외형적으로 이 책을 목적이다. 자유와 보수로 첨예화된 기독교계의 현실이 안타까워 어떻게 해서든지 서로 이해하고 화해를 도모하자는 의지로 썼다고 저자는 강변하지만 실제로 이 책을 처음부터 찬찬히 훑어보면 저자는 오히려 근본주의들의 무지막지한 억지에 분노를 터뜨리고 있다. 심지어 "역겹다"라는 (p83) 라는 표현까지 등장된다.
자유주의 진영의 선두에 서서 할 수 있는 모든 지식을 동원하여 보수적 복음주의를 맹렬히 공격하고 있다. 그러면 여기서 저자는 왜 근본주의, 흔히 쉽게 말하는 용어로 자유주의의 반대 개념으로의 보수주의에 대하여 그토록 분개하는 것일까?
1. 보수주의자들은 성경의 무오성을 자기들의 변증으로 입증할 수 있다고 나서는 것이 가관이요 꼴사나운 것이다. 즉 이성을 그렇게 혐오한다고 자청하는 그 보수주의가 혐오하는 이성을 가지고 진리를 수호하러 나서니 그 얼마나 모순이 되느냐 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상호 모순되고 또 같은 사건이라도 각기 달리 기록된 사실을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이 무슨 하나님이라도 되는 양 있지도 않는 사실을 가지고 해명하려더니 오히려 하나님의 진리가 그들이 주창하는 엉터리 교리와 철학으로 대체되는 것이 안타까운 것이다. 억지와 억지의 연속, 비논리와 비논리로 일관된 것을 고발하고 싶었던 것이다.
2. 현대의 근본주의는 교회사적으로 유래가 없는 것이다.
근본주의자들이 칼빈을 성경무오의 원조로 보고 있지만 칼빈도 시편 74편이나 79편을 다윗을 저자로 돌리지 않고 후대 마키비 시대로 돌리고 있으며 베드로 후서의 저자를 베드로라고 보지 않고 있다.
3. 근본주의자들의 변증이 일관성이 없다. 성경의 서로 상충되는 부분을 해명할 때에 비보수주의의 업적을 차용하면서도 자신들이 차용한 그 학자를 자유주의라고 비난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또 자유주의가 인위적인 해석을 한다고 비난하지만 더 인위적인 해석을 서슴지 않은 세대주의의 해석을 용납하는 것을 보면 공격의 기준이 일정하지 못하고 있다.
4. 소위 보수주의라는 학자들이 이미 몇 십년 전에 진보주의에서 한 업적을 이제사 뒤늦게 인정하고 나선다.(사과 한마디 없이)
예를 들면 리델보스는 이사야 저자에 대하여 자유진영을 따르고 있고 Ladd 부활에 대하여 부활 사실과 그 증거를 분리하고 있으며 도널드 거스리도 양식 비평에 대하여 포괄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제임스 Packer는 계시론에서 사실 계시에서 명제계시(혹은 해석 계시)로 양보함으로 난제를 해결하려고 하나 이는 이미 자유 진영에서 주창하던 바이다.
5. 그리스도의 신성은 강조하면서도 인성을 소홀히 하고 있다. 아마 누군가 신성을 소홀히 했다면 이단으로 취급할 것입니다. 자신들이 인성을 소홀히 한 만큼이라도.
6. 자유주의 진영에서 이적을 안 믿는다고 비난하고 있다고 그것은 자유주의 신학을 곡해한 것이다 이적을 믿고 있으며 다만 그 이적을 설명하는데서 그 이적 자체에 중점을 두지 않고 그 이적이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에 관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많은 보수주의 학자들도 똑같이 시도하고 있는 해석이다.
7. 성령께서 최초의 원본에 영감을 주어 잘못되지 않게 보장해 주신다면 그 뒤에 전승이나 번역이니 다른 사본의 등장에 대해 하나님이 나타나지 않도록 간섭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수많은 사본들 중에서 어느 것이 영감된 것이고 어느 것이 영감 되지 않았나를 어떤 기준에서 평가할 것인가? 만약 현대 보수주의들의 작업이 성령의 영감이라면 왜 자유주의자들의 비평작업은 영감이 아니라고 할 기준은 무엇인가? 보수주의자들은 후대의 모든 자료 보존 작업을 성경의 영감설에서 제외시키는 이유는 무엇인가? 히브리어의 모음도 영감되었는가? 최초 원본에는 모음이라는 것이 아예 있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제임스 바의 결론: 근본주의는 자유주의를 공략하기 위해 현대에 등장된 새로운 사상 흐름이기 때문에 그 어떤 역사적 정통성을 줄 수가 없다. 그들의 논리들은 하나님의 자유성을 오히려 파괴할 뿐이다. 기독교의 핵심은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되어야지 성경이 되어서는 안된다. 근본주의자들의 주장은 모순 투성이의 사상일 뿐이다.
시78:60
유다지파의 축복은 남의 이야기가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그런데 그 축복의 내용이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11-12절에 보면,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그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 이는 우유로 인하여 희리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온통 포도주, 포도밭 천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 땅을 축복의 상태로 본다는 뜻이요, 땅이 축복받는 것은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복받을 만한 사람이다는 뜻입니다. 왜 유대지파의 거주하는 땅이 축복을 받을까요?
그것은 그 지파에서 누군가 특이한 분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바로 이스라엘의 영원한 왕이십니다. '홀리 유다를 떠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홀'이란 임금이 갖게 되는 지팡이를 말합니다. 즉 '일시적인 왕'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영원한 왕'이 있는 이상 그 지파는 영원한 축복상태에 돌입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왕은 어떤 식으로 나타납니까? 왕이 나타나는 지역을 오늘 본문에 보니 '실로'라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어느 지파가 나중에 진정한 장자가 될 것인가 하는 점을 우리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유다지파에만 최후의 장자가 돌아가야 합니까? 시편 78:55-72에 보면, "또 열방을 저희 앞에서 쫓아 내시며 줄로 저희 기업을 분배하시고 이스라엘 지파로 그 장막에 거하게 하셨도다 그럴찌라도 저희가 지존하신 하나님을 시험하며 반항하여 그 증거를 지키지 아니하며 저희 열조 같이 배반하고 궤사를 행하여 속이는 활 같이 빗가서 자기 산당으로
그 노를 격동하며 저희 조각한 우상으로 그를 진노케 하였으매 하나님이 들으시고 분내어 이스라엘을 크게 미워하사 실로의 성막 곧 인간에 세우신 장막을 떠나시고 그 능력된 자를 포로에 붙이시며 자기 영광을 대적의 손에 붙이시고 그 백성을 또 칼에 붙이사 그의 기업에게 분내셨으니 저희 청년은 불에 살라지고 저희 처녀에게는 혼인 노래가 없으며 저희 제사장들은 칼에 엎드러지고 저희 과부들은 애곡하지 못하였도다 때에
주께서 자다가 깬자 같이, 포도주로 인하여 외치는 용사 같이 일어나사 그 대적을 쳐 물리쳐서 길이 욕되게 하시고 또 요셉의 장막을 싫어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산을 택하시고 그 성소를 산의 높음 같이, 영원히 두신 땅 같이 지으셨으며 또 그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젖 양을 지키는 중에서 저희를 이끄사 그 백성인 야곱, 그 기업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 이에 저가 그 마음의 성실함으로 기르고 그 손의 공교함으로 지도하였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미 마음 속에 요셉의 장막을 싫어버리고 오직 유다 지파를 사랑하시로 마음을 정해놓으셨습니다. 그런다음 왜 유다 지파 외에는 장자가 아니되는가 하는 점을 나타내보이시기 위하여 그들의 육적인 행위를 허용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악을 증거들이 하나님께서 유다 지파의 왕을 세우실 때까지 계속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야지만 하나님의 선택의 은혜성과 인간들의 죄악성이 병행해서 다 함께 대조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특히 인간의 죄악성이 확연하여 드러나는 지점이 '실로'라는 장소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장막이 처음으로 세워졌던 장소입니다.
예레미야 7:12에 보면, "너희는 내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둔 처소 실로에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악을 인하여 내가 어떻게 행한 것을 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시편 78:60에 보면 "실로의 성막 곧 인간에 세우신 장막을 떠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실로라는 장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인간적인 행위를 더 이상 묵과하지 않고 거부하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실로가 오시기까지'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마치 '실로'라는 것이 지명이 아니라 어떤 인물의 이름으로 거론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유다지파를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실 진정한 지도자가 등장한다는 뜻입니다. '실로'란 하나님의 이름이 머무는 최초의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장소가 아니라 어떤 인물에 담겨서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이스라엘의 지도자요 왕의 역할을 유다지파에서 나와야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의 올바른 속성을 담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르우벤은 탈락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와있는 유다 지파를 논하기 전에 첫째 아들 르우벤, 둘째 아들 시므온, 셋째 아들 레위, 모두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담지 못하고 있습니다. 르우벤 지파에 대한 예언은 르우벤이 행한 행동과 연관있습니다. 그리고 시므온과 레위 지파에 내린 하나님의 예언도 시므온과 레위가 저지른 행동과 관련있습니다.
르우벤은 아버지 침상에서 아버지의 처와 통간했습니다. 그래서 장자로서의 자격이 박탈당했습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그들의 자인한 본성을 유감없이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은 온 이스라엘 전체에다 뿔뿔히 흩어져서 살게 하십니다. 그런데 유다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유다의 지난 행동 가운데서 하나님의 마음과 본질을 제대로 보여주는 면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렇다면 그 내용이 무엇일까요? 그 예가 창세기 43:9에 보면, "내가 그의 몸을 담보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 그를 물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지금 그 자리는 , 막내 동생을 인질처럼 애굽의 총리대신 앞에 데리고 가야 될 시점에서 유다가 아버지 앞에 하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이 막내 동생을 무사히 아버지 야곱 앞에 데리고 오지 못한다면 자기 자신이 동생 대신 죽겠다고 합니다. 참으로 장렬한 생각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생존이 우선입니다. 우선 자기가 살아남아야 그 다음에 타인도 도울 수 있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자신은 죽고 대신 남을 살린다는 것은 아무리 형제지간이요 부모지간에서도 어려운 일입니다. 이런 마음 자체는 야곱의 육적인 본성의 열매는 아닙니다.
분명 이 마음의 근원은 딴 데 있습니다. 그곳이 어딜까요? 사실 유다라 할지라도 다른 형제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39장에 보면, 유다는 자기 며느리 다말로 통해서 하나님에 대해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유다는 자기 기분대로 행동했던 사람입니다.
자기 아들들이 죽자 그 죄악의 책임을 며느리인 다말에게 뒤집어 씌운 사람입니다. 희생 정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정반대가 되는 사고방식의 소유자였습니다. 이처럼 유다의 죄로 인해 그 피해가 엉뚱한 자에게 가도록 하나님은 조치했던 것입니다. 다말은 이 시집의 잘못된 생각을 바뀌축복의 가정이 되기 위해 자기가 희생하기로 마음 먹게 됩니다. 머느리 다말은 창녀의 모습으로 시아버지 앞에 나타나야 했던 것입니다.
이로소 그 유다가문은 죽음의 가정에서 축복의 가정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 와중에서 유다는 하나님의 축복 방식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희생자로 인해 다른 사람을 살리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이 축복의 원칙 아래 이미 자기와 자신의 집안 전체가 놓여 있음을 알았습니다. 따라서 유다의 입장에서는 무슨 일이 터질 때마다 이 원리를 적용시키게 됩니다. 이것은 다른 형제들 간의 차이점입니다.
이 정신에 입각해서 유다지파를 통해 메시야가 오십니다. 실로에 오십니다.
시편78:67-72
⊙ 이 선택은 왕의 권한으로서의 선택이기에 그 누구도 이의를 달수가 없다. 왕으로서 선택성이 잘 나타난 것이 바로 다윗언약이다. (책)
(신 17:15) 반드시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자를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며 네 위에 왕을 세우려면 네 형제 중에서 한 사람으로 할 것이요 네 형제 아닌 타국인을 네 위에 세우지 말 것이며
⊙ 가문도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선택하신다. (책)
(시 78:67) 또 요셉의 장막을 싫어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시 78:68) 오직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산을 택하시고
(시 78:69) 그 성소를 산의 높음 같이, 영원히 두신 땅 같이 지으셨으며
(시 78:70) 또 그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시 78:71) 젖 양을 지키는 중에서 저희를 이끄사 그 백성인 야곱 그 기업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
(시 78:72) 이에 저가 그 마음의 성실함으로 기르고 그 손의 공교함으로 지도하였도다
* 구약학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이러한 하나님의 선택사상이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분열된 것이 하나님의 선택이 아니고, 다윗이 너무 융통성이 없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주장 - 이스라엘에는 노선이 두 개인데, 다윗만을 고수하는 노선과 여호수아 노선이 있었? 그런데 이 다윗을 고집하는 노선의 독선 때문에 나라가 갈라졌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도, 예수님 스스로가 아니라, 이러한 독선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을 후대에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조상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게 하기 위하여, 자기들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렇?하신 것처럼 편집했다는 것이다. - 총신에서도 이렇게 배우고 있는 것이다.
* 새로운 성전에는 아론 계통이 아니고, 사독 계통만이 제사장이 된다. 왜냐하면 다윗 때는 사독 계열만 지명했듯이, 새 에스겔 성전에도 그대로 사독 계열만 지명했다. - 이것도 구약학자들은 다윗 계통이 에브라임 지파를 미워해서 그렇게 했다고 주장을 한다.
* 구조주의 - 성경을 말씀으로 안 보고, 자세히 살펴서 분석을 하면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국어학자들이다. 그러나 성경은 구조분석을 해도 안나오게 되어 있다. 말씀을 배우는 것이지, 국어공부를 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 그레마스의 인물론, 기호론 - 주체와 객체의 인물구조는 주체를 중심으로 만난다.
* 롤랑 바이트 - 하나의 의미가 생기면 그 의미는 부정과 모순의 4가지의 모서리를 가진다. 어떤 문학이던, 성경이라도 이것으로 해결된다는 것이다.
* 예) 사람, 사람의 반대-짐승, 사람의 비(非)사람-로버트, 짐승의 반대-하청동물, 이렇게 4가지 모순이 반드시 생긴다는 것이다.
* 노들븝프라 - 신화를 예표와 상징으로 설명했다. 은유, 환유, 상징, 신화단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성경도 계속해서 파고 들어가 보면, 원래 신화적인 요소가 나온다는 것이다. 이것을 김지찬 교수가 그대로 전하고 있다. 아마추어 국어학자로서 말이다.
* 시편 - 시편강의도 모빙켈, 구켈이 주장한 대로, 왕을 중심으로 축제를 모방해서 시편해석을 하는 것을 그대로 하고 있는 것이다. 잠언, 전도서 등도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 애굽의 잠언집인 '아멘호텝'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을 폰 라드가 주장한 것처럼 구속적 전승만을 생각하지 말고, 창조적 전승도 생각하자는 것이다. 즉 모든 민족에 공통적으로 다 들어있는 창조적 개념을 무시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교회밖에도 구원이 있다' 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만다. 쓰레기들이다.
* 칼 라너의 [ 익명적 그리스도인 ] - 창조와 구속을 다 생각하자. 즉, 교회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것이다.
* 총신대 교수들 - C.C.C., 침례교 출신이다. 가정목회, 목회 상담학 등으로 출발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문제다. 아무리 학문을 해도 본색이 드러난다. 하나님의 선택을 그렇게 싫어한다. 선택되었다면 전도를 안 해도 되는데, 전도하지 말고 도를 전하면 되는데, 실컷 전도해놓고, 배나 지옥 백성 만드는 것이다. 회개만 하면 된는 것이다. 그러나 전도는 암웨이가 아닌 것이다. 전도를 상품화 시켜서는 안 되는 것이다.
☞ 선택, 127 페이지
⊙ 가문도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선택하신다. (책)
* 다윗언약이 보여주는 것은 일방적인 선택이고, 사랑으로의 접근이다. 유다지파를 선택하신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이며, 또한 에브라임지파를 싫어하시는 것이다. 다른 이유가 없다. 이 말은 유다지파가 에브라임지파보다 더 뛰어난 점이 있다는 말도 결코 아니다. 오지 하나님의 선택이다. 교회는 이러한 주님의 선택만 들어 있으면 된다. 선택해서 사랑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아들도 그냥 혈통적 아들이 아니라 약속의 아들이요 언약적 아들이 된다. 바로 이것은, 약속이 실현되는 그 곳에만 하나님 자신이 영원히 쉴 수 있는 거처가 된다는 출애굽 때의 원칙과 변동 사항이 없다.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나의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시편 132:13-14/출애굽기 15:17-18) 다윗을 선택할 때 이미 시온도 같이 선택되었다.
즉 거룩한 인물 선택과 동시에 거룩한 성전이 있을 장소 선택도 함께 이루어진 것이다. "또 요셉의 장막을 싫어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산을 택하시고 그 성소를 산의 높음 같이,영원히 두신 땅 같이 지으셨으며 또 그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젖양을 지키는 중에서 저희를 이끄사 그 백성인 야곱 그 기업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시편 78:67-71)
시편78:68
◈ 창세기와 히브리서의 관계 !!
* 창세기의 경우에는, 아브라함의 시대가 끝나면 이삭에게로 그대로 중심이 넘어온다는 것이다. 사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데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음으로 장애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런 것들이 아브라함을 은퇴(?)시키는 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이 약속의 중심지라는 것이다.
* 그런데 이제 이삭으로 그 중심이 넘어오면, 복은 그대로 내려오지만 그것을 누가 방해하는고 하니, 이삭 본인이 복에 대한 장애물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에서에 대해서 축복하려고 했다는 점이라는 것이다. 에서는 축복의 대상이 아닌데 말이다. 그래서 이런 이삭을 보면서, 역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복이 가도록 하셨다는 것을 알게 한다는 것이다.
* 이렇게 되니까, 이삭에게 내려준 하나님의 말씀과 서로 맞아떨어진다는 것이다. 사실 이렇게 맞고 안 맞고는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아무튼 야곱의 이방에서 보니까,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긴다는 것이 적용이 된다는 것이다.
* 이제 야곱에게 모든 중심이 넘어오면서, 모든 복은 야곱에게 일임 된 것이다. 그러니 야곱은 얼마나 기분 좋겠는가? 그런데 그런 우쭐거린 야곱 자신이 하나님의 원수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씨름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야곱은 복의 근원인 것이다. '이것은 아니구나!' 라는 차원에서 말이다.
* 이렇게 되면, 야곱의 12 아들들에게 내려졌던 축복도 야곱의 손을 떠나버리고, 하나님께서 임의로 나게 한 아들을 통해서 약속이 성취되는데, 그가 바로 요셉이라는 것이다. 이 모든 사항이 야곱에게 주어졌지만 야곱에 의해서 실행된 것이 아니고, 야곱의 하나님에 의해서 된다는 것이 드러난 것이다.
* 이렇게 되니, 요셉 자신도 야곱 언약의 혜택 자가 되는데, 그런데 이런 야곱 언약을 가장 잘 이해한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유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요셉지파와 유다지파가 일단은 투톱(?)을 형성하고 진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 이렇게 되면서, 요셉지파가 유다지파에게 밀리게 되는 장애물이 등장하는데, 그것이 므낫세 반지파인데, 그렇게 되면서 유다지파가 주역으로 등장하게 되는데, 그래서 갈렙이 유다지파로 나오게 되는데, 그는 사실 이방인이라는 것이다. 갈렙이 다른 모든 지파들의 믿음을 부끄럽게 만든다는 것이다.
* 여기서 요셉의 경우에, 요셉은 자기가 주도권을 잡지 못하고 야곱의 부정적인 역할을 감당했다는 것이다. 야곱이 가장 사랑했던 아들이 요셉이니 말이다. 마치 다윗의 경우에, 바세바와 간통해서 낳은 아들을 요셉으로 보고 솔로몬을 유다로 보자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죽은 아들에 의해서 야곱의 공로 등은 같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유다는 떠오르는 스타가 되고 말이다.
* 그렇다면 유다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 그것은 시편 78편에 나오는 데로,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오직 유다지파를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시 78:68) 오직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산을 택하시고
* 아브라함이 이삭을 지독히 사랑한 것처럼 야곱이 요셉을 그렇게 편애를 했는데, 그래서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그렇게 하신 것처럼 야곱도 그렇게 하신다고 예상을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예상을 하나님께서 엎어버린다는 것이다. 요셉은 기껏해야 야곱 정도밖에 안 되고, 유다를 따로 설정하심으로 말미암아, 야곱이 요셉을 사랑하는 그 사랑마저도 부정하게 한다는 것이다.
* 이삭의 경우에 에서를 좋아했지만, 그러나 축복은 야곱이 받았으니 그 사랑의 원칙이 깨어졌다는 것이다. 그 원칙이 그대로 야곱에게 넘어와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좋아하는 요셉을, 그런 좋아하는 것을 빌미로 삼아서 죽여버린다는 것이다. 요셉을 죽임으로 말미암아서 야곱과 하나님의 관계가 끝났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야곱언약이 깨어졌다는 것이다. 심지어 베냐민도 빼앗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이삭이 에서를 집착하는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 이런 것이 바로 인간적인 언약 달성의 모습인데, 하나님은 이것을 완전히 부수어 버린다는 것이다. 유다를 통해서 말이다. 즉, 하나님은 한번 쓰신 것은 두 번 다시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한번 그렇게 되면, 그것을 자꾸만 이용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언약조건은 변할 수가 없는데, 그런데 우리가 자꾸만 놓치는 것은, 언약조건 중에 하나가 '인간들의 것은 부정을 당한다' 라는 것이다.
* 창세기에서 이야기하는 장자개념은, '하나님의 언약정신을 누가 담고 있는가?' 라는 것인데, 그래서 이스마엘과 이삭을 두고보면 분명히 이삭이 되고, 에서와 야곱의 경우에도 야곱인데, 그런데 문제는 야곱의 자식들로 가면 유도리(?)가 생긴다는 것이다. 야곱이 사랑하는 자로서 맺어버린다는 것이다. 그가 바로 요셉이라는 것이다.
*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투톱으로 계속해서 연결되는데, 창세기 마지막을 보면 야곱이 12지파를 축복할 때 축복을 받은 지파는 유다와 요셉지파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투톱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유다가 왜 부각이 되는가? 무엇을 했다고 말이다. 그래서 이렇게 창세기에서 예언된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유다지파가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사사기까지 성경을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 지난번에 히브리서 7장에서 십일조를 말하면서, 유다지파를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는, 율법에 속하지 않은 엉뚱한 지파로 본다는 것이다. 레위지파와 비교해서 말이다. 유다지파를 살아있는 지파로 본다는 것이다. 요셉지파는 레위지파에 흡수된 것으로 보고서 말이다. 그래서 요셉지파를 말하는 여호수아가 끝나면 레위지파로 넘어간다는 것이다.
* 그런데 히브리서 7장에서 유다지파가 등장하는 것을 보니까, 이 유다지파는 하늘에 속한 지파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늘을 설명하기 위해서 땅에 속한 것에 애착을 갖고 사랑을 갖는 것들을 모두 부정해버린다는 것이다. 이런 '없앰'의 정신으로 하늘이 계속해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시편79편/근본주의 신학
근본주의 신학에 대하여 근본주의임을 스스로 표방하고 긍지를 느끼면서 변호하는 입장에 있는 학자가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의 입장에 있는 자유주의 신학을 하는 저자가 자기와 같은 입장의 신학을 하는 사람들의 근본주의에 대하여 갖고 있는 편견이나 미숙한 견해를 시정하고자 쓴 것이 외형적으로 이 책을 목적이다. 자유와 보수로 첨예화된 기독교계의 현실이 안타까워 어떻게 해서든지 서로 이해하고 화해를 도모하자는 의지로 썼다고 저자는 강변하지만 실제로 이 책을 처음부터 찬찬히 훑어보면 저자는 오히려 근본주의들의 무지막지한 억지에 분노를 터뜨리고 있다. 심지어 "역겹다"라는 (p83) 라는 표현까지 등장된다.
자유주의 진영의 선두에 서서 할 수 있는 모든 지식을 동원하여 보수적 복음주의를 맹렬히 공격하고 있다. 그러면 여기서 저자는 왜 근본주의, 흔히 쉽게 말하는 용어로 자유주의의 반대 개념으로의 보수주의에 대하여 그토록 분개하는 것일까?
1. 보수주의자들은 성경의 무오성을 자기들의 변증으로 입증할 수 있다고 나서는 것이 가관이요 꼴사나운 것이다. 즉 이성을 그렇게 혐오한다고 자청하는 그 보수주의가 혐오하는 이성을 가지고 진리를 수호하러 나서니 그 얼마나 모순이 되느냐 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상호 모순되고 또 같은 사건이라도 각기 달리 기록된 사실을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이 무슨 하나님이라도 되는 양 있지도 않는 사실을 가지고 해명하려더니 오히려 하나님의 진리가 그들이 주창하는 엉터리 교리와 철학으로 대체되는 것이 안타까운 것이다. 억지와 억지의 연속, 비논리와 비논리로 일관된 것을 고발하고 싶었던 것이다.
2. 현대의 근본주의는 교회사적으로 유래가 없는 것이다.
근본주의자들이 칼빈을 성경무오의 원조로 보고 있지만 칼빈도 시편 74편이나 79편을 다윗을 저자로 돌리지 않고 후대 마키비 시대로 돌리고 있으며 베드로 후서의 저자를 베드로라고 보지 않고 있다.
3. 근본주의자들의 변증이 일관성이 없다. 성경의 서로 상충되는 부분을 해명할 때에 비보수주의의 업적을 차용하면서도 자신들이 차용한 그 학자를 자유주의라고 비난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또 자유주의가 인위적인 해석을 한다고 비난하지만 더 인위적인 해석을 서슴지 않은 세대주의의 해석을 용납하는 것을 보면 공격의 기준이 일정하지 못하고 있다.
4. 소위 보수주의라는 학자들이 이미 몇 십년 전에 진보주의에서 한 업적을 이제사 뒤늦게 인정하고 나선다.(사과 한마디 없이)
예를 들면 리델보스는 이사야 저자에 대하여 자유진영을 따르고 있고 Ladd 부활에 대하여 부활 사실과 그 증거를 분리하고 있으며 도널드 거스리도 양식 비평에 대하여 포괄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제임스 Packer는 계시론에서 사실 계시에서 명제계시(혹은 해석 계시)로 양보함으로 난제를 해결하려고 하나 이는 이미 자유 진영에서 주창하던 바이다.
5. 그리스도의 신성은 강조하면서도 인성을 소홀히 하고 있다. 아마 누군가 신성을 소홀히 했다면 이단으로 취급할 것입니다. 자신들이 인성을 소홀히 한 만큼이라도.
6. 자유주의 진영에서 이적을 안 믿는다고 비난하고 있다고 그것은 자유주의 신학을 곡해한 것이다 이적을 믿고 있으며 다만 그 이적을 설명하는데서 그 이적 자체에 중점을 두지 않고 그 이적이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에 관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많은 보수주의 학자들도 똑같이 시도하고 있는 해석이다.
7. 성령께서 최초의 원본에 영감을 주어 잘못되지 않게 보장해 주신다면 그 뒤에 전승이나 번역이니 다른 사본의 등장에 대해 하나님이 나타나지 않도록 간섭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수많은 사본들 중에서 어느 것이 영감된 것이고 어느 것이 영감 되지 않았나를 어떤 기준에서 평가할 것인가? 만약 현대 보수주의들의 작업이 성령의 영감이라면 왜 자유주의자들의 비평작업은 영감이 아니라고 할 기준은 무엇인가? 보수주의자들은 후대의 모든 자료 보존 작업을 성경의 영감설에서 제외시키는 이유는 무엇인가? 히브리어의 모음도 영감되었는가? 최초 원본에는 모음이라는 것이 아예 있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제임스 바의 결론: 근본주의는 자유주의를 공략하기 위해 현대에 등장된 새로운 사상 흐름이기 때문에 그 어떤 역사적 정통성을 줄 수가 없다. 그들의 논리들은 하나님의 자유성을 오히려 파괴할 뿐이다. 기독교의 핵심은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되어야지 성경이 되어서는 안된다. 근본주의자들의 주장은 모순 투성이의 사상일 뿐이다.
시편80편17
인자 개념은 시편 8편에 의하면, 초라하고 보잘것없고 소멸되어야 될 실존을 두고 말한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우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이니이다"(3-8절) 하지만 인자는 하나님에 의해서 만물을 다스리는 지배권을 부여받은 존재이다. "주의 우편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인자의 위에 주의 손을 얹으소서"(시편 80:17) 즉 '초라함'과 '다스림', 이 양 요소를 다 함유한 언약적 몸이 바로 [인자]이다. 이 [인자]는 하나님의 구원의 혜택을 입은 자이다. 즉 죄 용서받은 몸이라는 뜻이다. '초라한 [인자]되시는 분의 언약적 다스림 안에서 이스라엘도 같이 그 다스림의 혜택을 누리는 유일한 백성이 된다. 똑같은 통치성 속에 놓여 있는 똑같은 아들이다. 하나의 백성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제사장 언약의 범주 안에 있기 때문이다. 온전한 제사장으로서 다윗 왕이 등장하고 그 다윗 왕은 인자라는 실존으로 그 역할을 하게 된다. 이제 그 역할이 에스겔에게 떨어진 것이다. 이제 이 인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담겨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인자]와 [성신]은 서로 대비되는 개념으로 에스겔서에 자리잡게 된다. 즉 [인자] 시절 때의 성전과 [성신] 시절 때의 성전을 대조해 보라는 말씀이다.
시편84편5-10/히브리서 11:13-16/더 나은 본향
일체의 경쟁을 하나님은 붙이지 않습니다. 누가 많은 돈을 벌었는가, 누가 잘났는가, 누가 많이 배웠는가 하는 경쟁 말입니다. 떠나느냐 마느냐 그것 뿐입니다. 죽음이냐 생명이냐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고마워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개인적인 능력 차이를 묻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홀가분합니다. 정말 신앙의 선배들은 무엇을 알았고 무엇을 발견했기에 모든 자들이 가는 쪽으로 가지 않고 오히려 이 땅에서 나그네며 이방인이다는 점을 자신만만하게 주장할 수 있었던 그 힘은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그 힌트가 16절에 보면 나옵니다.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했다'고 했습니다. 신앙의 선배들은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한 것을 알았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니, 하늘에 어떤 성이 있고 그곳은 영원히 살만한 곳이라는 점입니다. 여러분, 정말 이 성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까? 만약 아신다면 기꺼이 이 세상에서 자신을 나그네로 간주하실 의향이 있으십니까? 하늘에 있는 그 무엇이 이 지상에 있는 우리들에게 기쁨과 환희의 원천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선조들도 그랬으니까요.
에스겔 48:35에 보면 하나님이 친히 만든 성이 나옵니다. 왜 하나님깨서 이 지상에다 성을 만들지 아니하시고 하늘에다 성을 만드신 것입니까? 그것은 그 성은 거룩한 성이기 때문입니다. 방금 제가 '거룩'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흔히 교회 나오는 이유가 갓바위 복을 빌기 위해 나오는 그런 사람에게 무엇이 빠지게 되느냐 하면, '거룩'이 빠진 겁니다. 거룩의 소중함을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룩에 대해서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거룩에 대해서 호감을 갖느냐, 네가 거룩에 대해서 깜짝 놀라고 있느냐? 네가 거룩에 대해서 푹 빠지고 감탄하고 싶으냐?"를 묻는 겁니다.
하나님은 거룩에 대해서 말씀하는데 인간들은 교회와서 "복 주세요"만 따지고 있습니다. 자기 소유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소유는 작은 겁니다. 또 타인의 것을 뺏아서 합쳐봐야 이 사람 것 , 저 사람 것을 아직 다 합치지 않았기에 여전히 작은 겁니다.
그러나 거룩은 큰 것입니다. 내 것을 따로 가지지 않더라도 온 우주를 충분히 덮을 만큼 큽니다. 작은 것을 소유하려고 하지 마시고 큰 것에 푹 빠지는 것이 행복입니다. 사람이 작은 것, 가지고 사는 재미로 살면 안됩니다. 큰 것에 참여한 재미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이 더럽기에 하늘 나라에다 거룩한 성을 지으신 겁니다. 거룩이 성립해야 영생도 장만되는 겁니다.
이 땅은 거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 더러운 것에 마음을 둡니까? 사실 대다수가 이 더러운 세계에만 몰두하며 삽니다. 따라서 이런 대세를 벗어나서 하늘 나라만 바라 보고 산 사람들이 어떤 마음 가짐으로 살아갔을까요? 시편 84:5-7에 보면,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가서 10절에 보면,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대세를 따르지 않고 그 삶의 현장에서 주의 나라를 사모하는 자들은 따로 있었습니다. 단지 거룩됨 때문에 문지기로 서 있는 것으로 만족하다는 자들이 이들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그 거룩한 곳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히브리서 10:19-20에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요구로 거룩한 곳에 들어 갈 수 있을까요? 우리들의 노력으로 사다리를 높이 걸치면 들어갈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거룩한 분이 이 땅까지 주저않아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하늘이 거룩이 내려앉은 그 곳만이 이 지상의 거룩이 성립되는 겁니다. 이것은 히브리서 10:20에서 이것을, '산 길'이라고 하는 겁니다.
위에서 뚜레박이 내려와야 우리가 올라 간다는 것이 예수님의 주장입니다. 그 어떤 인간도 뚜레박이 안 내려오면 하늘 나라에 못 올라간다는 말입니다. 옛날 신앙의 선조들은 시온의 대로를 통해 하늘 나라 궁전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근거를 실제로 장만한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거룩이 주저 앉아야만 된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육체를 찢어 산 길로 제공해야 합니다. 자신의 육체를 더러운 육체를 위해 대신 희생해야만 됩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시편84편
시편 84:1-4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참새와 제비에게도 집이 있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하고 의미심장한 사실입니다. 자연
물도 안식과 휴식의 공간을 가짐으로서 생기를 얻는 것 같습니다. 사람에게는 물론 집
이 있습니다. 이 집에서 자손이 태어납니다. 인간에게 있어 집이란 단순한 휴식 공간
이 아니라 생명의 원천입니다. 어린아이들의 악한 환경에서 보호를 받으면서 안락하게
자라납니다. 그 집안의 생명을 이어나갈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니 또 다른
집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주의 장막에서 살기를 간곡하고 원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왜
하나님이 계시는 주의 장막을 기어이 고집할까요? 자기 집에서나 편안히 살면 되지
왜 구태여 하나님을 찾아 뵙겠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만드시는 성소라는 곳은 주의
백성이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처음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이 친히 용사가 되
셔서 애굽의 왕과 그에게 소속된 군사들을 쳐 부셨습니다. 이 때 전리품으로 데리고
나온 자들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홍해를 막 건너고 난 뒤 마음껏
하나님께 감사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가사는 출애굽기 15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볼 것 같으면 '영원한 성소'라는 말이 들어 있습니다. 이 영원한 주의 처소
는 구원의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 둘러싸여져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직 주님의
능력으로만 자신들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고백하는 그런 백성들 가운데 하나
님이 영원히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나라에 성전이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하지만 그 성전이 나중에 깨어져 버렸다는 사실을 압니다. 포로 시절을 보내고 돌아와
서 다시 성전을 개축했다는 사실을 압니다. 하지만 또 로마군대에 의해서 그 성전마저
다시 무너져 버렸다는 사실도 압니다. 왜 하나님이 계신다는 주의 처소, 주의 상소가
왜 악한 인간들에 의해서 무너져 버렸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의 혜택
을 그들이 잊어버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이 이스라엘
을 만들었으며 죽은 데서 살려내듯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였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사랑과 긍휼의 위력을 이스라엘 백성이 늘 간직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곧장 주위에
늘려 있는 이방 나라의 종교와 사고 방식을 닮아 갔습니다. 이렇게 되면 솔로몬 왕이
지었다는 성전은 단순히 건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거기에 순번제로 돌아가며 매일 드
리는 제사도 완전히 형식에만 국한되는 의식일 뿐입니다. 사회에 하나님이 주신 사랑
이 확산되지 못했기에 가진 자와 배운 자의 횡포가 이루 말 할 수가 없었습니다. 선지
자가 나서서 국가 전체의 멸망을 말하는 시기도 이런 시기였습니다. 성소나 성전이란
단지 하나님만이 계시는 곳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과의 만남이 가능하도록 특별
한 장치를 한 장소입니다. 이 특별한 장치라는 것이 딴 게 아니라 옛날 처음 출애굽
할 때의 유월절을 매일 같이 제사로서 반복하는 것입니다. 옛날 홍해 강가에서 노래
불렀던 그 찬양을 성전을 지키는 레위 지파를 통해 전담하도록 다윗은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그 찬양의 시간도 형식으로 끝나 버립니다. 하나님은 다윗 시편에 기초를 둔
형식적인 성전 찬양을 안 듣겠다고 하십니다. 아무리 정교한 화음으로 인간의 심금을
울리는 찬양도 하나님은 감동 받지 않습니다. 오히려 흥분하고 감동 받아 마치 신앙이
한 단계 무르익은 것처럼 오해하는 쪽인 인간들뿐입니다. 참된 성전은 지상에 있는 것
이 아니라 천상에 있습니다. 참사도 제 집을 짓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마련하
듯이 참된 신앙인의 영원한 보금자리는 그 때 홍해가에서 불렀던 찬양을 하나님의 사
랑 속에 거하면서 영원히 하게 하는 그 성소뿐입니다. 이 성전이 어떻게 하면 참여 될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충분
히 그런 주장을 해도 옳으신 것은, 예수님은 인간을 죄에서 구출해 주시는 하나님의
용사이시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공로로서 죄악에 갇혀 있었던 참 이스라엘들은 구조해
내셨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몸을 드려서 그것이 가능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몸은
백성들로부터 찬양과 경배를 받으실 만한 영역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을 정말로 맞아 본 사람은, 결코 기존의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
도의 사랑의 영이 거하시는 자기 몸이 바로 성전인 것을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처소는 주님의 사랑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 집에
산다고 다 된 것이 아닙니다. 주의 백성이 거할 것은 고층 아파트 단지가 아니라 하나
님이 계시는 영원한 성소입니다. 거기서 즐겁게 할 일이 있습니다. 일방적인 자비와
능력으로 아무 대가 없이 구원받은 이 사랑을 마음껏 쏟아 놓을 수 있는 영역이 필요
한 것입니다. 그곳이 바로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 앞입니다.
시편84편 10절/하나님의 선택(36) - 새 언약 11
◈ 왜 버림의 신학이 있어야 하는가? - 예수님의 비유에 대해서 (씨 뿌리는 비유를 중심으로)
* 누가복음 15장의 3가지 비유 - ① 잃어버린 양의 비유
② 잃어버린 동전의 비유
③ 잃어버린 둘째 아들(탕자)의 비유
(눅 15: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눅 15: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 버림의 신학과 되찾음의 신학 - 이러한 일이 벌어지려고 하면, 반드시 잃어버림의 모습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되찾음의 신학이 있기 위해서는, 몽땅 이끌고 십자가에서 버리는 신학이 먼저 있고 난 다음에 되찾음의 신학이 성립되는 것이다. 잃어버린 적이 없는 99명보다도,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으로 인해서 하늘나라에서 잔치가 벌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눅 15: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눅 15: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라고 하는 고백이 나와야 한다. 정말 내가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종으로서 살아가려는 신앙이 되어야 진정한 신앙이라는 것이다. 구원받았다고 입닦고 있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시편에도 이런 말씀이 나온다.
(시 84:10)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 문지기의 믿음이 과연 우리에게 있는가? 교회의 사찰로 있음도 감사하는 것이다. 그런데 무슨 목사로서의 대우가 없으니, 사례가 적다고 불평?할 수 있다는 것인가?
* 질문 - 누가복음 15장의 이러한 비유와 16장의 '불의한 청기기' 와의 비유가 상관이 있는가?
* 답변 - 상관이 있다.
(눅 16: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눅 16:11)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눅 16:12)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눅 16: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 여기서 작은 것이란 재물을 의미하고, 큰 것이란 하늘나라로 본 것이다. 그런데 그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돈을 사랑하면서도 돈이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모르고, 돈을 사랑하면서도 하늘나라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네가 돈도 어디서 온 것인 줄도 잘 모르면서 어떻게 하늘나라에 대해서 가르치느냐?' 라고 하시는 것이다.
* 그래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시는 것이다. 재물의 종이 되어 있으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종이라고 말할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없다는 것이다. 불의한 청지기를 통해서 그 당시 유대인들을 완전히 비꼬는 것이다. 돈에 관해서는 이 불의한 청지기가 너희들보다도 더 낫다는 것이다.
* 작은 것(돈)에 대해서도 잘 모르면서 어떻게 하늘나라의 본질에 대해서 안다고 떠들어대느냐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누가복음 15장의 맏형 이야기하고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 탕자의 비유에서는 둘째 아들도 중요하지만 맏형도 함께 언급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맏형 이야기를 예수님이 하지 아니했다면 유대인들에게 욕을 듣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둘째 아들의, 탕자의 비유는 유대인들도 잘 알고 있는 내용인 것이다. 자기들도 하나님께 돌아와서 회개해야 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 그래서 이 맏형에 대한 비유로부터 16장의 불의한 청지기 비유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 99마리의 양도 유대인들보고 하는 소리인 것이다.
* 이 말은 육적인 것을 가지고 구원받을 생각을 하지 말고, 예수님이 구원할 자를 따로 뽑으시겠다는 것이다.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은 계속 이러한 점을 강조하고 계시는 것이다. '구원받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라는 예수님에게 묻지도 말라는 것이다. 그러다가는 부자청년처럼 떠나고 마는 것이다.
* 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보고 구원에 관해서 묻는다든지 협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이 점을 목사나 신학자들이 제일 싫어하지만 말이다. 예수님은 인간과 의논을 하시지를 않는다. 그냥 주님의 일방적인 의사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믿어야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하는 것은, "예수님은 나의 돗대입니다" 라고 하는 것이다.
시편89:6-7
예수님의 십자가가 유대인들 손에서 발생되었다.예수님의 죽음은,유대인들의 사고와 맞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그 당시 유대인들은 성경대로 메시야 오기를 소원했다.그런데 그 메시야는 실제적으로 이 지상에서 국가 형태를 지닌 이상 나라를 건설하시는 분으로 알고 있었다.그런데 이들 유대인들 앞서 다소 모호한 인물이 한 사람 등장했다.사실 로마라는 외국의 압제 상태를 지긋지긋하게 여기던 판국에 누구라도 메시야적인 희망을 몰고 오는 사람이라면 일단 대중의 주목을 받는다.유대인들은,자기 나라가 옛날 다윗왕국처럼 번창되고 안정된 나라이기를 바란다.그런데 선지자들의 예언에 의하면,그 다윗 왕,혹은 다윗 가문에 속한 사람이 다시 온다는 것이다(에스겔 37:24-25).물론 실질적인 왕은 하늘의 여호와 하나님이시다.그렇게 되면 유대 나라에 와서 온갖 못된 짓을 일삼는 원수들은 다 일소해 버릴 것이고 세상 위에 군림하여 세계를 다스리는 왕같은 국가가 될 것이다.민중들에 예수님을 따라 다닌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이 인물에게는 로마 군대가 감히 흉내도 내지 못하는 무슨 능력 같은 게 있었다.하나님이 주신 능력이 그 사람 속에 살아있는게 분명했다.폭풍을 진압하고 귀신을 축출하고 죽은 자를 다시 살려내고 가는 곳마다 저주 병에 들린 사람들은 온전케하다는 소문이 이스라엘 전역에 파다했다.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 오천명을 먹일 때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민족의 왕으로 삼고자 하셨다(요한복음 6:15).기다렸던 모세 같은 선지자가 드디어 나타난 것으로 보았다(요한복음 6:31).유대인들은,자기 민족의 신이신 여호와가 세상에 있는 모든 신들을 다스린다고 보았다.여호와는 만군의 주이시다.여호와와 견줄 만한 그 어떤 신도 하늘과 땅에서 없다고 했다(시편 89:6-7).특히 신명기 32:8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온다."지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을 기업으로 주실 때 인종을 분정할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민족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이 말은,이스라엘이 모든 민족과 나라를 다스릴 신분에 있다는 것이다.이스라엘만큼은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고 다른 민족들은 이스라엘 민이 통치하는 체제가 하나님의 축복임을 굳게 믿었다.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했다.이 현실과 하나님의 예언간의 그 차이를 극복할 메시야를 손꼽아 고대한 것이다.
시편89편26-29
사울 왕은 나중에 블레셋과의 전쟁 중에 전사하지만 결국 최종적으로 사울 왕을 죽인 자는 아말렉 소년이었다. 다윗은 이 아말렉 소년을 가치없이 죽여 버렸다(사무엘하 1:15-16) 이렇게해서 기름받은 자의 언약적 입장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백성들에게 상기시켜 주게 된다.
왕에게도 기름을 바름으로 인해 이스라엘 나라는 이제 하나님과의 제사장 언약에서 왕 중심 체제로 전환된다. 이스라엘 나라는 원래부터 왕이 있어야 될 나라가 아니라 제사장이 요구되는 나라이다. 왕은 이미 여호와 하나님으로 고정되어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 왕은 이방 나라의 왕처럼 단순히 독단적인 정책을 펼칠 수 있는 왕이 아니라 철저하게 제사장 제도에 의해 제한을 받이야 되는 왕이다.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 보관한 이 율법서를 등사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의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신명기 17:18-20)
제사장으로의 왕 자리에 다윗이 이제 선택된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이스라엘에 아무리 많은 왕이 왔다가 사라져도 하나님만이 여전히 왕으로서 오직 다윗과 맺은 언약에 의해 지상에 왕을 남기신다. "여호와께서 그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영토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시편 18:50) 이들 왕의 가문은 하나님에게 소속되며 하나님의 판단력과 지시를 그대로 실시해야 하는 종의 입장에 놓여 있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종의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종이 오늘날 주의 앞에서 부르짖음과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열왕기상 8:28)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시편 72:1)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왕은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 뿐이다.
만약 하나님의 왕되심을 제대로 천명하지 못하는 왕이 있다면 계약에 의해서 징계와 채찍을 받게 되어 있다. 따라서 계약대로 순종하는 참된 왕만 나타난다면 이스라엘은 언제든지 다시 회복이 된다. 하나님은 바로 이 언약의 토대 위에 새로운 왕과 새로운 성전을 마련하시겠다는 것이다.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우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빈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서 잘찌라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내 산 사면 모든 곳도 복되게 하여 때를 따라 비를 내리되 복된 장마비를 내리리라 그리한즉 밭에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그 소산을 내리니 그들이 그 땅에서 평안할지라 내가 그들의 멍엣목을 꺾고 그들로 종을 삼은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낸 후에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겠고 그들이 다시는 이방의 노략거리가 되지 아니하며 땅의 짐승의 삼킨바 되지 아니하고 평안히 거하리니 놀랠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그들을 위하여 유명한 종식할 땅을 일으키리니 그들이 다시는 그 땅에서 기근으로 멸망하지 아니할지며 다시는 열국의 수치를 받지 아니할지라 그들이 나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있는 줄을 알며 그들 곧 이스라엘 족속이 내 백성인줄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라"(에스겔 34:24-30)
이처럼 다윗을 통해 다시 왕이 등장되는 것이 이미 전부터 확정된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다.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 내가 말하기를 인자하심을 영원히 세우시며 주의 성실하심을 하늘에서 견고히 하시리라 하였나이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나의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위를 대대에 세우리라 하였다 하셨나이다"(시편 89:1-4) 다윗을 통해서 영원한 언약을 세우겠다는 것은 도저히 변할 수 없는 언약인 동시에 하나님이 책임지고 반드시 성사시키시는 언약이라는 말씀이다. 왜 그런가? 하나님은 다윗을 자신의 아들로 삼으셨기 때문이다. "저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오 나의 하나님이시오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 내가 또 저로 장자를 삼고 세계 열왕의 으뜸이 되게 하며 저를 위하여 나의 인자함을 영구히 지키고 저로 더불어 한 나의 언약을 굳게 세우며 또 그 후손을 영구케하여 그 위를 하늘의 날과 같게 하리로다"(시편 89:26-29)
시편89:6-7
예수님의 십자가가 유대인들 손에서 발생되었다.예수님의 죽음은,유대인들의 사고와 맞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그 당시 유대인들은 성경대로 메시야 오기를 소원했다.그런데 그 메시야는 실제적으로 이 지상에서 국가 형태를 지닌 이상 나라를 건설하시는 분으로 알고 있었다.그런데 이들 유대인들 앞서 다소 모호한 인물이 한 사람 등장했다.사실 로마라는 외국의 압제 상태를 지긋지긋하게 여기던 판국에 누구라도 메시야적인 희망을 몰고 오는 사람이라면 일단 대중의 주목을 받는다.유대인들은,자기 나라가 옛날 다윗왕국처럼 번창되고 안정된 나라이기를 바란다.그런데 선지자들의 예언에 의하면,그 다윗 왕,혹은 다윗 가문에 속한 사람이 다시 온다는 것이다(에스겔 37:24-25).물론 실질적인 왕은 하늘의 여호와 하나님이시다.그렇게 되면 유대 나라에 와서 온갖 못된 짓을 일삼는 원수들은 다 일소해 버릴 것이고 세상 위에 군림하여 세계를 다스리는 왕같은 국가가 될 것이다.민중들에 예수님을 따라 다닌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이 인물에게는 로마 군대가 감히 흉내도 내지 못하는 무슨 능력 같은 게 있었다.하나님이 주신 능력이 그 사람 속에 살아있는게 분명했다.폭풍을 진압하고 귀신을 축출하고 죽은 자를 다시 살려내고 가는 곳마다 저주 병에 들린 사람들은 온전케하다는 소문이 이스라엘 전역에 파다했다.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 오천명을 먹일 때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민족의 왕으로 삼고자 하셨다(요한복음 6:15).기다렸던 모세 같은 선지자가 드디어 나타난 것으로 보았다(요한복음 6:31).유대인들은,자기 민족의 신이신 여호와가 세상에 있는 모든 신들을 다스린다고 보았다.여호와는 만군의 주이시다.여호와와 견줄 만한 그 어떤 신도 하늘과 땅에서 없다고 했다(시편 89:6-7).특히 신명기 32:8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온다."지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을 기업으로 주실 때 인종을 분정할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민족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이 말은,이스라엘이 모든 민족과 나라를 다스릴 신분에 있다는 것이다.이스라엘만큼은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고 다른 민족들은 이스라엘 민이 통치하는 체제가 하나님의 축복임을 굳게 믿었다.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했다.이 현실과 하나님의 예언간의 그 차이를 극복할 메시야를 손꼽아 고대한 것이다.
시편90편
시편90편7-10/히 2:5-9 /죽으심을 맛보심
빌립보서를 잠시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뭘 알았기에 무엇으로 자신의 인생 길을 결정짓겠다고 나섭니까? 빌립보서 3:10-11에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 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인생을 다음과 같이 결정지었습니다. 즉 죽음을 통해서만 부활에 이를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것도 자기 죽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말입니다.
자... 어떻게 해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서만, 아니 예수님만이 해내신 그 죽음의 맛보심을 통해서만 우리가 부활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 6-7절에 보면, "오직 누가 어디 증거하여 가로되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잠간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시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겁니다. 인간에게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은혜로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으로 하여금 우리들의 죽음을 맛보게 하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될 것은, 왜 잠깐 동안이지만 왜 인간들이 천사보다 못하게 한 겁니까? 왜 지금은 천사같이 날개 짓하며 휘파람 부는 생활이 안되게 하시는 겁니까? 아니 더 나아가서 왜 예수님도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고 죽음의 맛보는 고통을 주신 것입니까?
사람들은 자기 고통의 원인을 놓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인간의 죽음과 연관시키고 그 죽음은 또한 인간의 죄와 연관시켜 나갑니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쪼르르 쫓아와서 우리의 죽음부터 먼저 맛보게 하십니다. 그 쓰다 쓴 그 맛을 말입니다. 옆에서 누가 옆구리를 푹 쑤시면서 "예수님은?"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금방 다음과 같은 대답이 튀어나와야 합니다. "내 죽음을 맛본 사람!"이라?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내용은 시편 8편에서 따온 구절입니다. 그런데 그 구절만으로 왜 사람이 잠시동안 천사보다 못한 지 그 이유가 안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시편 90편에 보면, 시편에서 말씀하신 인생관이 적나라하게 잘 나타나있습니다. 그 대목을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시편 90:7-10입니다.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 심에 놀라나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여기에 보면, 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즉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죄라는 별게 라고 여길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늘 행복해야 합니다. 저는 실패하기 싫습니다. 저는 늘 강건해야 합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최고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라고 주장하기 일 수입니다. 그러나 시편에 나타나 있는 인생이란 하나님은 그렇게 보지 않고 심각하게 보십니다. 그 결과로 인해 우리네들의 인생이란 비극적인 인생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수명은 칠십이요 강건해 봤자 80이라는 것입니다. 그 인생이라는 것도 통해 내놓을 수 있는 자랑이라는 것이 기껏 수고와 슬픔뿐이라는 겁니다.
어떤 아주머니는 남편이 일찍 돌아가시고 자식 두 명과 더불어 열심히 삽니다. 물론 교회를 다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것도 압니다. 그래도 아직도 섭섭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왜 하나님이 사랑하는 남편을 왜 죽게 하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선하면 선했지 내 남편은 왜 죽이십니까?"라는 갈등의 연속입니다. 이와 같은 섭섭함이 우리 모두에게 다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죽음을 맛보시려 오신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의 본질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참된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이 선하심을 같이 아셔야 합니다.
그 이유가 시편 90편에 보니, 주님께서 우리의 은밀한 죄를, 우리도 미쳐 모르는 죄를 주님의 밝은 빛 앞에서 내세워보니 우리는 주의 분노로 고생해도 마땅하고 당연한 존재에 불과한 겁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그런데 시편 90편에 이렇게 우리 자신의 본질에 대해서 나와 있어도 바보 등신 같은 우리들은 이 사실을 모르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의 죽음을 맛보게 하신 겁니다. "이것이 너의 실체이다. 이것의 본질이다."라는 것입니다. "너는 죽어야 돼"라는 것입니다. "살고자하는 의지는 인정하지. 그것은 너의 고집이고 너의 희망사항이기는 하지만 그 의지는 너의 본질과 부합되지 않으니 불행의 씨앗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는 거야"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오면 믿음이 없는 사람이 이렇게 나옵니다. "좋습니다. 제가 죽어야 하는 죄인인 것을 자인합니다. 하지만 저도 고집 꽤나 있는 놈입니다. 하나님이 저를 죽이기 전에 제가 먼저 자진해서 죽겠습니다. 자살하겠습니다."라고 하면서 반항의 극치를 드러냅니다. 방금 제가 말을 강하게 했지만 사실 우리가 평소에 무심코 내뱉는 말속에 이런 정신이 질퍽하게 깔려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큰 죄입니다. 우리의 죽음을 일부러 맛보려 오신 하나님의 은혜를 몰라서 나온 소리입니다.
시90:8-10
하나님의 뜻은 이것입니다. 인간에게 비록 저주가 주어져 있다 할지라도 그 저주조차 어찌 할 수 없도록 평안한 안식이 심어져 있는 존재만이 참다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고생이 아예 없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고생 속에서도 평안의 요소가 눅눅하게 배겨나올 수 있는 인간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오셔서 고생을 어마어마하게 하셨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은 그 고생이 무겁고 무서워서 뒤로 나자빠져 버렸습니까? 자살하셨습니까? 운명을 버리고 도망쳐 버렸습니까?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다시피 인생 자체가 고생입니다. 칠순 잔치 같은데 가보게 되면 여럿 자식을 둔 것을 큰 자랑인 것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식들이 얼마나 부모를 위하는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떠버려 자랑하고 싶은 겁니다.
사실 부모가 되어서 많은 자식을 다 키워낸다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고통의 긴 긴 나날이라는 것을 이들 부모는 깊이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힘들었기에 이 수고로움을 잠시 잊겠다는 의미에서 잠시 기쁨의 시간을 갖겠다는 것이 칠순 잔치의 의의입니다. 하지만 그 잔치의 날이 지나고 다시 내일이 되면 또 수고로움은 계속 이어집니다. 이것이 인간들의 안식의 한계입니다.
지금 사람들이 옛날 사람들보다 더 잘 논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옛날 농사짓던 시절에는 일 년의 반을 놀았습니다. 원래 겨울철에는 완전히 놀았고 농사철에도 보름이다, 단오다, 하는 식으로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틈만 나면 놀았습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사람들은 거의 쉬는 날 없이 노동합니다. 얼마나 수고로이 일했으면 그것을 푸는 스트레스 오락마저도 얼마나 발전되겠습니까. 노는 것이 발달되었다는 말은 그만큼 수고의 양이 더 깊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찾으시는 안식은 이런 수고를 새로운 노는 수고로 푸는 식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수고의 극한, 고난의 극한 속에서 마르지 낳고 소진되지 않고 생긋생긋 살아있는 안식을 두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시편 90:8-10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성경도 인간에게는 일생을 통해 밀러오는 수고와 슬픔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보다 간편하게 말씀하시는 것이 전도서 5:15-17에 나옵니다. "저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 즉 그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 것도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이것도 폐단이라 어떻게 왔든지 그대로 가리니 바람을 잡으려는 수고가 저에게 무엇이 유익하랴 일평생을 어두운데서 먹으며 번뇌와 병과 분노가 저에게 있느니라"
여기에 보면 인간의 한평생은 번뇌와 병과 분노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수고한 모든 것이 바람을 잡는 셈이 되었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시들지 않는 안식은 어떻게 주어지는 겁니까? 오늘 본문 29절에 끝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즉 어떤 인물을 통해 안식을 주시는 방법을 하나님이 사용하신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도의 역할이라는 것이 단순히 자기 구원만 챙기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구원받았기에 내 멋대로 살겠다고 내빼는 짓이 얼마나 비겁한 행동입니까! 요한복음 6:65-66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즉 하나님의 일에 성도가 참여하는 것은 단순히 구원 소망을 챙기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생과 고난 속으로 몰아넣되 그로 인해 타인에게 안식과 영생을 주는 증거인으로 삼고자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자리입니까? 누가 교회 안나온다고 해서 섭섭해 할 것이 아니라 이 엄청난 자리를 타인에게 맡긴 것이 아니라 보잘 것 없는 우리 자신들에게 맡겨주신 것에 도리어 황송해 해야 합니다.
시편90편9-10
* 김영규 교수(안양신학교)의 철학을 보는 관점도, 성경과 마찬가지로 '핵심'과 '흐름'으로 보고 있는데, 철학의 핵심을 현대철학은 인간을 언어를 통해서 표현하는 것으로 보았고, 철학의 흐름은 '신화적인 단계에서 존재론적인 단계, 기능적인 단계로 넘어갔다' 라고 함으로, 이 세 가지 단계를 비신화화 작업도 포함하는 철학의 핵심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 여기서 신화라고 하는 것은, 옛날에 과학이 발달하지 않던 시절에도 사람들은 세상의 우주와 자연에 대해서 나름대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김 교수가 유럽에서 공부했음을 염두에 두고, 우리나라의 귀신 차원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미국, 유럽은 현재 모든 문화의 선두주자이기에 먼저 그들의 학문을 알아버리면 후발주자들은 따라가기에 자기들은 앞섰다는 것이다.
* 이 신화적 단계라고 하는 것은, 종교라고 보면 되는 것이다. 이 신화적 단계에서는 우주를 셋으로 나누는데, 하늘과 땅과 땅 아래로 보는 것이다. 이 세 가지의 구조는 인생이 어떻게 순환이 되는가와 결부가 되는 구조이다. 인생의 흐름을 우주의 흐름과 일치를 시키는 것이다.
* 왜냐하면, 이 눈에 보이는 우주를 신이 인간에게 준 계시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주가 하나님의 계시이기에, 내가 살고 죽는 과정이 이 우주에 있는 법칙 중에 하나가 되면서, 나 자신은 우주의 동일한 법칙에 휘말려 들어가는 것이다.
* 쉽게 말해서, 선풍기가 돌아갈 때 빨간 종이를 대면 휘말려 들어가게 되고, 노란 종이도 마찬가지이고, 우주라는 큰 선풍기에 내 자신을 맡겨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우리가 태어나고, 살고, 죽고 하는 것은 단지 우리 인생의 법칙뿐만 아니라, 온 우주의 삼라만상의 법칙이 되는 것이다.
* 이런 점을 알고 있어야 하는데, 특히 나이 많은 교인들이 교회에 나와서 말씀을 들을 때, 특히 시 90편의 경우에 평소에는 자다가도 이런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며 것을 '아멘' 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은 말씀을 이해하는 차원이 아니고, 우주의 돌아가는 법칙과 자기의 인생 법칙이 일치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바로 신화적 단계라고 하는 것이다.
(시 90:9)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시 90: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 이것이 세상의 종교인데, 여기에 갑자기 기독교가 등장해서, 그래서 하나님의 선택한 민족이 등장해서, 세상의 톱니바퀴와 선택된 민족사이의 톱니바퀴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의 계시가 우주를 통해서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교회를 통해서 보여주는 계시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즉, 순환되며 흘러가는 세계에 그것을 한 가운데로 부정하며 관통하는 법칙이 있는데, 이것이 이스라엘이고, 신약의 교회라는 것이다.
* 그러면 이 세상과 우주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바로 교회를 위해서이다. 이쪽에 있는 법칙과 저쪽에 있는 법칙이 다르다는 것이다. 신구약 성경의 법칙과 자연의 법칙은 다른 것이다. 이 자연법칙이 이방종교가 되고 자연종교가 되는 것이다. 순환논리에 입각한 종교(우상)가 되는 것이다.
* 판넨베르그는 '미래 지향적인' 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미래가 되어야 모든 계시가 밝혀진다는 것이다. 몰트만의 '목적 지향적' 이라는 말은, 모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실현이 되었는데, 그것을 실현하는 의미에서 목적 지향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판넨베르그는 시간이 계시가 되고, 몰트만은 부활이 계시가 되는 것이다. - [ 종말론의 죽음과 부활의 신앙 - 융겔, 몰트만, 판넨베르그 ] - 정기철(호남 신학교 교수)의 논문을 참고.
* 중세에 기독교가 발달하면서, 신화적 단계에서 존재론적 단계로 바뀌게 되는데, 여기서는 인간의 존재가 중요하게 되는 것이다. 김 교수가 유럽에서 공부했음을 염두에 두고 계속 살펴보면, 그런데 중세시대가 지나면서(기독교의 영향력이 약해지면서), 인간 해방이 강조되면서, 이제는 신이 나에게 의미를 주는 그러한 존재론적 단계에서, 인간의 의미를 신이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소질과 능력으로 자기 스스로에게 자기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즉, 기능적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다
시편91편12
지금 제가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에게 머물지 않고 예수님께 이어지는가를 이 시간에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것이 바로 역사와 묵시입니다. 역사와 묵시라는 것은 구분이 됩니다. 처음에 강의를 시작할 때에 역사를 주장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벌써 다 잊어버리셨지요! 딜타이가 역사를 주장하는 이유는 너무 개인적인 감정, 내가 은혜 받았다는 것들을 못 믿겠다는 것입니다. 너 외에 다른 사람이나 후손들에게로 그 역사의 범위를 넓혀 보면 그것이 진리에 가깝다고 하였지요! 진짜 진리냐 아니냐?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는가 안 되는가는 역사에 귀를 기울여서 나중에 말씀대로 되니까 그것은 진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판정할 수 있다는 것이 유대신학의 포인터입니다.
신명기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선지자의 말을 다 믿지 말라고 합니다. 그 선지자의 말이 효험이 있으면 선지자 이고, 없으면 선지자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뒤에 말씀을 보면 그 역사적 효험이 있든 없든 간에 선지자는 선지자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왜 자꾸만 뒤로 가면 바뀌는 것입니까? 앞의 신명기에서 이야기 한 것이 에스겔 예레미야에 오면 바뀌는가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바뀌게 하는 것입니까? 그것이 인간의 죄입니다.
딜타이가 말한 대로, 사람들의 뜻은 유대인들처럼 기적을 원하는 것입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보아야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는 것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역사라는 범위를 못 벗어납니다. 역사적으로 손에 잡힐만한 기적이 있을 때에 그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광야에서 물이 나오고 만나가 내린 것처럼, 예수여! 당신이 만나를 내려보시오! 요한복음 6장에 나오지요! 당신이 만나를 내어보라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묵시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내가 만나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런 떡 말고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보라는 것입니다. 만나를 내려 주어야 모세가 말하기를 나 같은 선지자가 오리라는 그 예언이 실제적으로 성취가 되는 것이라고 인정 해줄게,
또 시편 91편 12절에 나오지요!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는 말씀을 가지고 악마가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로 데리고 올라간 것입니다. 왜 성전 꼭대기로 올라갔는가? 성전이란 그 당시 모든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는 중심가입니다. 모든 대중들이 성전을 바라봅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거룩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곳에서 말씀이 성취되는 기적이 일어나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렸는데 갑자기 천사가 와서 1.5미터 상공에서 발을 붙들어 다치지 않게 하면 사람들이 박수를 치면서 메시아가 왔다고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악마가 요구하는 메시아 상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실제로 기적이 일어날 때 그것이 자기의 간증 목록에 삽입이 됩니다. 20살 때, 24살 때, 30세 목회 할 때 일어난 기적들을 모아서 역사적으로 편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주의 아닙니까?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일반교인들이나 장로님이나 이런 것이 아닙니까? 내가 40세 때에 땅 바쳤는데, 그 땅 바친 것으로 교회를 못 지을 줄 알았는데 갑자기 땅 값이 올라가지고 예배당을 지었고, 옆에 있는 땅을 주차장으로 사용하려고 팔라고 했는데 그 주인이 팔지 않다가 주인이 죽게 되고 그 아들은 교회 나와서 그 땅마저 바쳐서 교육관도 짓고 주차장고 지었다는 이런 것이 장로의 기도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젊은 놈들아 너희들이 이런 기적을 만나 보았느냐는 것입니다.
시편91:12
사람은 말씀으로 산다고 예수님께서 말하자 악마는 이제는 말씀을 들고 예수님에게 찾아들었다. 육신의 죽음과 관련된 성경 구절을 가지고 말씀 자체가 과연 인간을 살리는지를 시험하러 왔다. 즉 육신이 부스려져서 죽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과연 삶을 보장해주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이 말씀을 직접 예수님 육신에다가 적용시켜 보겠다는 것이다. 그 여부를 보고 과연 사람은 하나님 말씀으로 산다는 진리를 비로소 확인할 수 있다고 악마는 주장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말씀은 시편 91:12에 있는 말씀이다.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이 본문에서 '저희는' 천사를 의미하고 '너'는 메시야를 의미하고, '돌'이란 직접 사물체로서의 돌을 의미하고, '부딪치지 않는다'는 말은 메시야의 물질적 육체가 뮌繭遮?물질과 아예 충돌하지 않고 공중에서 멈춘다는 식으로 악마는 해석하고자 하는 것이다. 즉 아무리 메시야의 육신이라도 돌과 강하게 부딪치면 죽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놓은데서 메시야의 육신을 떨어뜨려도 돌과 강하게 부딪히지 않으면 그 때사 비로소 '사람은 말씀으로 산다'는 진리를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결국 악마의 이러한 말씀 해석의 토대는, '산다'에 대한 집착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 '산다'라는 개념에 대해서 현 육신이 어쨋던 유지되는 것이 '산다'의 기본이 아니냐고 여길 때만 비로소 나올 수 있는 해석이다. 거기에 비해 예수님의 의미하시는 '산다'는 개념은, 말씀이 살아있는 그런 존재로서 인간이 사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 인간에게 있어 말씀이 그 어떤 식으로도 시험당하지 않고 말씀대로 유지됨을 보여주는 그런 인간이 바로 제대로 사는 존재이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다른 성경 말씀으로 악마의 허점을 공격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마 4:7) 즉 인간이라면, 그리고 제대로 산다고 주장할 수 있는 인간이라면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라는 말씀을 드러내놔야 하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 생존을 우선으로해서 '산다'라고 하는 하나님 말씀을 해석하는 것은 여전히 악마의 발상에서 못 벗어난 것에 불과하다.
시편94편
시편 94:20-22
"율례를 빙자하고 잔해를 도모하는 악한 재판장이 어찌 주와 교제하리이까 저희가 모여 의인의 영혼을 치려 하며 무죄자를 정죄하여 피를 흘리려 하나 여호와는 나의 산성이시오 나의 하나님은 나의 피할 반석이시라"
하나님의 법이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자에게만 이해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의 마음을 가진 분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자신이 같은 일을 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편에 들어 있는 이 말씀에서 '나'라고 하는 분은 결국 예수님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
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인용할 때 꼭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 구절을
자기 합리화를 위하여 인용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교회 내에서 무슨 다툼이 일
어나는 경우를 보면, 제각기 자기를 변호하는 성경 구절들을 들고 나오는 경우가 있고
심지어 같은 본문을 가지고 자기네 편을 격려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5:39에 보면,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
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모든 성경은 예수님
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흔히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구
절이 있더라도 그것은 예수님 안에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예수
님을 모르고서는 전혀 엉뚱한 하나님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인간에 관
해서 말하는 성경도 실제로는 예수님과 연관시켜 주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원하시는 마지막 아담이요 참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은 실은 예수님의 몸으로서의 교회를 두고 말
하는 것이지 인간들이 교회라고 간판 걸어 놓는 일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예물과 헌금과 헌물에 관한 이야기도 실은 예수님 한 분의 몸으로 완성되는
예물에 대해서 미리 징표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약에서 안식일에 관한 일도 모두 다
예수님을 통해서 완성된 제사의 그림자를 시간적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옛것은 다 모
형이요 그림자입니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모든 것을 말씀하십
니다. 예수님을 거치지 않고 교회와 성전과 제사 제도와 헌금과 안식일 거론한다면 그
사람은 전혀 예수님의 존재 의의를 모르는 사람이요 더나아가서 예수님이 하신 일을
못 믿는 사람이요, 더나아가서 예수님을 귀찮아하는 사람입니다. 즉 구원받는 데는 예
수님의 피를 살짝 이용하다가 실제로 교회 전반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예수님과 관
련 짓지 않고 바로 성경 구절을 직접 들이대면서 모든 말씀은 반드시 다 지켜져야 하
고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변하면서 교인들로 하여금 다시 예수님과의 고리를 끊게 만
들고 맙니다. 이미 완성된 축복의 상태에 놓여 있는 신자들에 대해서 마치 예수님이
뭔가 미흡하게 일을 처리한 것처럼 여기게 만들고 더나아가서 새롭게 하나님께 뭔가
바치지 아니하고 봉사하지 아니하고 전도하지 아니하면 복이 안 오는 것처럼 가르친
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거짓 종들에 대해 대항하는 일은 오직 예수님의 하신 일에 근
거를 두어야지 또 나름대로 성경 구절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시켜서는 아니됩니다. 오
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이 주신 율례를 가지고 하나님의 의안에 살아가는 사람을 도리
어 정죄하고 괴롭히는 상황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재판장의 역할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적용하는데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선물로 주신 의를 과연 백성들이 제대
로 감사하고 그 사랑 받은 긍휼의 생활을 잘하고 있느냐가 판단 기준이어야 하는 것
입니다. 만약 조금이라는 재판장 자신의 권위를 부축이기 위하여 하나님의 법을 들고
나오면, 이 법은 하나님의 법이 아니라 인간 제판장의 법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여기
에 나오는 의인을 예수님이라고 간주해 볼 때, 모든 문제는 쉽게 해석됩니다. 예수님
은 하나님의 의를 지니신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유대교의 재판장들은
자기네들이 지금까지 늘 의를 주었기에 새삼스럽게 하나님이 다른 방식이 도입될 필
요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 이외에 의를 줄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죄를 사하는 권세는 오직 예수님 자신의 고유 권한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점이 그
당시 재판장의 화를 돋우게 했습니다. 예수님이 의를 가지고 왔다면 그렇다면 자신의
존재 가치가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들 재판장들은 회개할 리가 없습니다. 이들은 이미 자기 자신의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인 것도 모르고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여러분, 구원이란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입니다. 회개라는 것은 예수님의 완성됨을 바로 증거 하는 것이
일단 기본으로 해야 합니다. 주님과 우리들 사이에서 회개라는 것이 이루어져야지 특
정 성직자나 교인들이 우리들의 회개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목회자는 주의
뜻만 전하면 되고 구원받은 성도는 자신에게 구원을 준 것은 어느 인간이 아니라 예
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구원받은 것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온전히 주님께만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시편94편9절/징계-히브리서12:3-13
무엇이 착함이고 무엇이 선함이고 무엇이 바르게 함입니까? 전체를 모르고 동시에 자신도 모르는데, 그저 자기 조직과 자기 집단의 생존을 염두에 두면서 살아가는 자들에게 있어 진리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들이 찾고자 하는 진리란 그껏 '자기 이익' 뿐입니다. 개인적인 권태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반복되는 소비 형태는 이 땅에서 기본적인 생필품에 치중하는 중소기업의 설 자리를 점차 잃게 만듭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 예수님께서 팔 걷어붙이고 이러한 인간 세계의 경제 문제를 해결하시므로 이 세상에 구원과 행복을 주시려고 하십니까? 9절에 보면, '영'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참 이상하죠? 우리 인간들은 눈만 뜨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육에 대해서만 집중 관심을 두고 살고 또 육으로 육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 이외에는 아무 것과 관심없는데 어째서 성경에는 '영'이라는 말씀이 나옵니까?
영이라는 말씀은 육이 아니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영으로 인간을 다루고자 하십니다. 사실 오늘날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되지 않는 것은 전부 무가치한 것으로 취급합니다. 영은 돈이 되지 않기에 사람들의 관심사에서 떨어져 나갑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중요시 하지않는 그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방식입니다. 마태복음 10:28에 보면,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이것도 모르고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신이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왈, "뭘?" 사람들이 말합니다. "육적인 것을 주시옵소서" 하나님 왈, "또 육이냐? 나는 영으로 다가설꺼야"
인간들은 육이 전부인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육을 치는 쪽으로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징계'라는 겁니다. 징계란 단순히 벌 받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확보되어 있는 영을 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육을 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육을 쳐서 수리된 그 육을 가지고 그 전에 잃었던 이득을 다시 얻고자 하는 식의 징계는 하나님에게 있을 수 없습니다. 육적인 징계를 받았다고 함부로 주장하면서 바르게 살고자 다짐을 하지만 그 결과는 도리어 전보다 악화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저는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받고 바르게 살고자 나름대로 애쓰고 노력하는데도 불구하고 왜 전에 잃어버린 것을 회복시켜 주지 않는 겁니까? 진짜 저는 하나님에게 실망했습니다"라는 식으로 나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밥먹고 살게 하는 이 사회 구조 안에서 옳다, 바르다 같은 것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다면, "하나님, 저의 죄가 이 정도 인 것을 몰랐습니다."라는 선에 그쳐야 됩니다. 평소에 인간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어떠한 태도를 갖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시편 94:9에 보면,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진리는 육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영에 있습니다. 진리와 선함과 옳음을 육에서 찾는 것 자체가 죄입니다.
하ご纛?징계는 바로 이 점에 집중 공략합니다. "제발 육으로 육을 해결하려고 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육적인 징계를 겪게 되므로 보다 나은 육적인 이득을 챙기려는 바로 이러한 육적인 생각을 때려 부수기 위한 징계가 하나님이 벌리시는 징계입니다.
성경 공부 좀 한다고 행복해집니까? 우리 자체가 바르지 못한 존재인데 이 바르지 못한 존재가 무슨 염치로 행복을 논하고 행복을 기대합니까? 그런 생각부터가 징계 받을 이유입니다. 인간의 행복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영의 아버지이고 나는 그 영의 아버지의 그 아들이다는 그 관계성" 이 자체로만 행복입니다.
영과 영이 서로 내통된다는 이 놀라운 기적적인 산물이 되었고 이런 식의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 자체가 행복입니다. 육의 피조물이 아니고 영의 피조물인 사실을 말입니다. 이것 보다 더 큰 다행스러운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육으로서는 아무 것도 해결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처음에 육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나서다가 결국 자신도 도망자 신세가 되어 버렸습니다. 제가 김 집사님이 편찮으셔서 병원에 병문안 가서 다음과 같은 설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을 인용하면서, "집사님의 육은 엉망인데 문제는 과연 온전한 영은 지니고 계십니까?"하고 물어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육의 하나님 뿐만 아니라 우선 영의 하나님이십니다. 육의 온전보다 영의 온전을 감안해야 합니다. 육은 어차피 늙으면 해체될 대상일 뿐입니다. 육과 혼을 멸하는 분으로서의 아버지로서 하나님을 믿습니까?
저는 어릴 때부터 나름대로의 진리 체계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착하면 복준다"입니다. 무엇이 착한가에 대해 세분화 시켜보니, 거짓말 안하고 성실, 근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면 좋은 대학갑니까? 보장됩니까?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이 세상을 향해 징계적 차원에서 일을 하시는데 그 일의 기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2-4절에 보니,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피'라는 말이 나옵니다. 죄라는 것은, 내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목숨을 최고로 보게 되면 무엇 때문에 목숨 바쳐, 피 흘리는 손해를 보면서 무엇을 지키려고 싸우겠습니까? 동시에 죽어가는 이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이 이미 확보되어 있는 자라면 그것을 지키기 위해 자기 피 흘림과 죽음조차도 능히 감수할 것입니다.
시96:5/과학적 창조론의 허구성
기생 라합이 자기 나라, 자기 민족을 배신하고 남의 나라인 이스라엘 편에 붙은 것은 그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하나님이 참 하나님은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기존의 자기의 신 개념과 이스라엘의 신 개념을 적당하게 혼합하거나 절충하는 것이 아니다.
출애굽기 20:1-3에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이미 기존의 신들이 있었음을 반영하고 있다. 애굽인들이 가나안 이방인들이 결코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의미에서 무신론들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그들의 신은 신도 아니다. "만방의 모든 신은 헛것이요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시편 96:5)
이방들이 주장하는 신 개념은 자신들의 입장이나 그들의 세계 안에서는 통용되는 신이 될는지 모르지만 선택받은 이스라엘 국가 안에서 전혀 신이 아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구태여 그들의 의견을 고려하고 참작할 필요성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택되었음"의 의의가 오직 자기들에게만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지시하시기를 그들과 전쟁하라고 하신다. 결코 타협이나 설득이나 의견 조정을 지시하신 것이 아니다. 아예 "진멸하라"고 하신 것이다. 이들이 진멸당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이스라엘을 통해 나타난 참 하나님을 거부하고 아직도 자신들의 신을 참 신으로 고수하기 때문이다
시편97편
* 시편 2편의 말씀을 통해서는 전혀 예수님이 나올 수 없는데, 또 6절에 나와있는,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지어다' 라는 것은 성경 어디에 있는가? 이것은 97편에 나오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히브리서는 이렇게 시편 2편과 97편을 마구 갖다 붙이느냐는 것이다.
(히 1:5)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뇨
(히 1:6) 또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지어다 말씀하시며
* 여기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간단하다는 것이다. '내 말씀을 가지고 내가 내 마음대로 하는데, 왜?'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시편에 나오는 것을 예수님에게 모두 다 갖다 붙여버린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지막 때에 아들을 통해서 이야기한다면, 그 마지막으로 오기까지의 모든 말씀도 모두 다 그 아들을 집어넣어서 해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 그러므로 히브리서는 하나의 해석법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해석이 되어진 것을 그대로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즉, 이러한 해석자체가 하나의 계시가 된다는 것이다. 아들을 중심으로 말이다. 만약에 누군가 어느 놈이(?) 그런 해석을 하느냐고 묻는다면, 주님께서 '내가 했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 따라서 히브리서 1장을 설교할 때는, 얼마나 여러 모양과 여러 부분이 아들과 가까이 부각되어있는지를 설교하면 성공이라는 것이다. 히브리서는 오직 아들만을 강조하는데, 그 연결부분이 바로 1장에 나오는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본문자체가 무엇을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이분이 바로 구약에서 말하는 아들이다' 라고 하기에, 우리는 그것만 강조하면 된다는 것이다.
(히 1:8)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히 1:9) 네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였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너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 부어 네 동류들보다 승하게 하셨도다 하였고
(히 1:10)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히 1:11)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히 1:12) 의복처럼 갈아입을 것이요 그것들이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
(히 1:13)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느뇨
(히 1:14)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 11절에 '그것들은' 이란 누구인가? 피조세계라는 것이다. 피조세계는 멸망하지만 주는 영존한다는 것이다. 벌써 이렇게 히브리서에서 앞으로 나올 구약해석은 이미 끝났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인데 그 해답은 주는 영원하다는 것이다.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시며, 모든 천사들을 부리는, 그 어떤 피조물보다도 뛰어나다는 것이다.
* 그러므로 히브리서 1장을 보면, 이미 앞으로 히브리서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를 알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를 설교하면서, 1장에 나오는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제대로 부각시킨다면 설교는 아주 깔끔하게(?) 끝났다는 것이다. '이러니까 예수님은 영원하시지', '이러니까 예수님만 홀로 다 이루셨지' 라고 말이다.
시편100편
출처:십자가 마을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