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식명칭 : 경주 정혜사지 십삼층석탑(慶州 淨惠寺址 十三層石塔)
지정일 : 1962.12.20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탑
수량/면적 : 1기
시대 : 통일신라
주소 :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1654번지
경주 정혜사터에 세워져 있는 탑으로, 흙으로 쌓은 1단의 기단(基壇) 위에 1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인데, 통일신라시대에서는 그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이다.
1층 탑몸돌이 거대한 데 비해 2층부터는 몸돌과 지붕돌 모두가 급격히 작아져서 2층 이상은 마치 1층 탑 위에 덧붙여진 머리장식처럼 보인다. 큰 규모로 만들어진 1층 몸돌은 네 모서리에 사각형의 돌기둥을 세웠으며, 그 안에 다시 보조기둥을 붙여 세워 문을 만들어 놓았다. 이렇듯 문을 마련해 놓은 것은 열린 공간을 추구하고자 한 의지의 표현으로 보인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을 조각이 아닌 별개의 다른 돌로 만들어 놓았고, 직선을 그리던 처마는 네 귀퉁이에 이르러서 경쾌하게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露盤)만이 남아있다.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 즈음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되는 이 탑은 13층이라는 보기 드문 층수에, 기단부 역시 일반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당시의 석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비교적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1층을 크게 부각한 후 2층부터 급격히 줄여나간 양식 덕분에 탑 전체에 안정감이 느껴진다. -문화재청
정혜사(淨惠寺)
회재 이언적(1491~1553)이 어려서 공부하러 드나들었다던가? 또 그가 한양에서 순탄하게 잘 나가다가 41세 때 당시 권세가이자 실력자이던 김안노의 복귀를 반대하다가 삭탈관직당하고 낙향한 뒤 독락당을 짓고 글 읽으며 세월을 보낼 때에 정혜사 스님과 깊게 교분하면서 왕래하였다 한다. 그래서 자신의 정자 계정(溪亭)에 양진암(養眞庵)이라는 절 이름 현판을 달아놓고 맘 편하게 무시로 드나드시라고 배려하였다는, 그 정혜사는 1834년 큰 화재로 타버리고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 정혜사는 회재가 죽고 그를 배향한 옥산서원이 창건되자 서원에 편입되어 공부하는 유생들에게 종이를 만들어 공급하거나 신발 등 필요한 물품들을 납품하는 역할을 하며 존재하였었다고 하니 유교에 예속되고 난 후에야 존립을 보장받은 셈이다. 생존전략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렇게나마 유지해 오던 절집은 흔적도 찾기 어렵고 보기 드문 석탑 하나만을 남겼다.
십삼층석탑
숱한 국보급, 보물급 아니 비지정 문화재 석탑까지 몽땅 찾아보아도 십삼층 석탑은 없다.
탑골공원의 원각사지 십층석탑이나 국립중앙박물관 실내에 세워진 경천사지 십층석탑 정도가 우리가 알고 있는 높은 층수의 탑들이며 듣기로는 북한의 평안북도 영변의 보현사에 팔각십삼층석탑이 있다고 할 뿐 어디에도 십삼층 석탑은 금시초문이니 신기할 뿐이다.
정혜사지 십삼층 석탑.
탑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가 외우다시피 알고 있는 신라 석탑의 전형 '2단의 기단 위에 삼층석탑' 방식이 아니다.
기단은 1단뿐인데 그것도 다듬지 않고 큼직큼직한 잡석들을 거칠게 쌓아 올린 토단(土壇)이다. 전하기는 1911년 도굴꾼들이 위에서부터 3개 층을 떼어내다가 발각되어 도망친 후 그대로 방치되다가 1922년경 일본인들에 의하여 복원 수리되었다고 하는데 상세한 수리내용은 전해지지 않으며 그때 기단부를 시멘트로 고착하였다가 그마저 파손되어 큼직한 잡석으로 기단을 구축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2011년 국회 국정감사에서 모 국회의원은 이를 지적하여 '탑신 아래부분 기단이 흙으로 완전히 덮인 채 방치되고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한 바 있으며, 이에 대하여 문화재청에서는 '흙으로 쌓은 1층 기단'이라는 입장이니 누구 말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간에 석탑의 기단으로는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이다.
이렇게 말 많은 토단 위에 2단의 석재 기단을 깔아서 몸돌을 받치는 지대석으로 삼았으며 그 위에 가장 커 보이는 부분이 1층 몸돌과 지붕돌인데 마치 위에 얹혀진 작고 촘촘한 열 두 층의 탑신을 받치는 큼직한 기단처럼 보인다. 그러나 홀로 비대할 정도로 커 보이는 저 부분이 정혜사지 십삼층석탑의 1층 몸돌과 지붕돌임은 분명하다.
석탑의 1층 부분. 구석의 기둥 즉 우주가 지나치게 크고 돌출되어서 몸돌이 안으로 들어가 보인다. 몸돌 부분도 중앙을 비우고 짜맞추니 자연스레 감실이 생겨 네 면마다 하나씩 부처님을 모실 공간이 생겼다.
1층 몸돌 위에 지붕돌을 바로 얹은 것이 아니라 석장의 받침돌을 점차 커지는 순서로 얹어 3단의 층급 받침을 이루었고 비로소 그 위에 큼직한 지붕돌을 얹었는데 네 귀퉁이는 솟아올랐으며 지붕돌 중앙에 얹은 굄대로부터 네 귀퉁이로 이어지는 처마선을 보면 살며시 도드라지게 만들어 목재건축물의 기와지붕 못지않은 곡선미를 살리고 있어 감탄스럽다.
이렇게 1층만 보면 비례를 맞추어 나머지 12층을 어떻게 얹을까 걱정스러운데 막상 1층 지붕돌의 굄돌 위로는 앙증맞게 줄어든 열 두 개의 층 탑이 매우 촘촘하게 쌓은 방식이다. 소위 밀첨식(密?式)탑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즉, 2층부터 13층까지의 열 두 층 탑은 각각 12개의 몸돌과 지붕돌이 아니라 돌 하나가 지붕돌이자 그 위에 다음 층 몸돌을 함께 지닌 모습이다. 그래서 언뜻 보면 몸돌은 없고 지붕돌만 12개를 포개서 얹은 것처럼 볼 수도 있으니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1층 지붕돌 중앙에는 네모난 굄돌이 있고 그 위로 급격히 줄어든 크기의 2층부터 13층까지가 올려져 있다. 각 층돌은 아래부분은 1층 지붕돌과 마찬가지로 3단의 층급받침을 조각하였고, 지붕 위로 솟은 부분은 다음 층을 받치는 굄돌이 아니라 다음 층의 몸돌이 되는 것이다. 즉 돌 하나에 아래 층 지붕과 위 층 몸돌이 함께 있는 보기 드문 이형석탑이다. 그럼에도 올라갈수록 일정하게 고른 체감률을 보여 날씬하고 미끈해 보인다. 상륜부는 노반만 남아 있다.
원래 10층 이상의 다층탑은 중국적인 탑이라고 한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경주 망덕사(望德寺) 십삼층 목탑이 중국 황실의 안녕을 기원한다는 데서 그리 해석하는 듯한데, 그것만으로는 이것이 왜 중국풍이고 왜 하필 13층인지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일각에서 3층 탑은 신라, 5층 탑은 고려하는 식으로 단순 분류하는 오류가 있는데 다층탑은 중국풍이라고 하는 것도 이해가 안 간다.
자료제공·내나라 문화유산 답사회 http://cafe.daum.net/sm-academ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