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가부의 남쪽 관문인 이곳이 영호루의 옛터다. 배야임수背野臨水로서 앞으로 봉황암과 봉지산이 병풍같이 둘러있고 낙동강 칠백리 맑게 흐르니 사시지경이 장관이라, 춘하경명春和景明에 파란波瀾이 문채紋彩를 이루고 호월천리皓月千里에 상하루경上下樓景이 영수만경映水萬頃하므로 이름하여 영호루라 하고 영남 삼대루의 하나로 명성이 높다.
영호루
그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밀양의 영남루와 진주의 촉석루는 고려말에 건립되었으나, 영호루는 고려 충렬왕 초년(1274년) 명현 김방경이 일본 원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고향인 안동에 들려 이 누에서 시를 지었다는 기록을 보아 고려 중엽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안동에 몽진하면서 누에 자주 소요하였고, 환도 후에 영호루 3글자의 어필을 하사하니 공민왕 17년(1368년) 안동 판관 신자전이 누각을 중건하고 액자에 금을 입혀 현액하였으며, 120년 후 성종 19년(1488) 퇴락으로 인하여 부사 김질이 중수하였고, 명종 2년(1547년) 7월 홍수로 유실되어, 5년 후 부사 안한준이 복원하였으며, 선조 38년(1605년)에 두 번째 유실되어, 74년 후인 숙종 2년(1676년)에 부사 맹주서가 복원하였고, 영조 51년(1775년) 홍수로 세 번째 유실, 12년 후 무신에 부사 신익빈이 복원하였으며, 정조 16년(1792년) 홍수 시에 네 번째 유실, 4년 후 병진에 부사 이집두가 복원하였고, 139년 후 갑술(1934년) 칠월 홍수로 다섯 번째 유실되어, 36년 후 경술(1970년)에 시장 김각현 재직 시 강 건너 남안 현 위치로 이건하고 박정희 대통령의 영호루 3글자의 친필 액자를 거니 지체로나 창건 연대로나 전국의 누 중 단연 으뜸이다. 회상하면 물리의 흥폐가 무상하여 공민왕 후 640년간 홍수로 유실된 것이 5차례요, 중수 복원이 7차례다. 역대 선현들의 풍유영시한 곳도 여기, 여러 차례의 복원을 위해 조상들의 진성갈력한 것도 또한 여기다. 그러나 지금은 초석마저 매몰되고 빈터마저 분간할 수 없음을 개탄하여 안동시 초대 의회에서 발의되어 유허비를 건립키로 하고 차역을 문화원이 담임하여 이 비를 세우니 웅부 안동의 전통문화의 자취를 영원히 후세에 전하고저 함이다.”
1914년 3월 17일 촬영한 영호루의 유리건판 사진이다. 중앙선 철교가 놓이기 전으로 태화동 일대의 논밭이 훤하다. 낙동강가에 자리 잡은 영호루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위 내용은 김일대 선생이 지어 1992년 9월에 세운 영호루 유허비의 내용을 옮긴 것이다. 영호루는 위로는 남쪽에서 안동으로 오가는 사람들이 통과하는 나무다리가 있었고 또 누 뒤쪽으로는 안동 읍성과 안기역으로 가는 갈림길이 있어서 늘 사람으로 붐벼 수많은 시인 묵객이 누에 올라 주위 경관을 감상하고 시를 읊으며 회포를 달래곤 했다. 특히 영호루는 시내에서 가깝고 경치가 좋으며, 누 앞에는 맑은 강물이 호수를 이루어 배를 띄우고 선유(船遊)하기에 알맞아 고을민과 고을을 찾는 나그네들의 놀이터로 이름 높았다. 그러나 이 누는 강물과 너무 가까이 있어 홍수 때마다 유실과 복원을 거듭했기 때문에 언제 창건되었으며 또 몇 번 유실과 복원을 되풀이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고려 시대 김방경 장군이 1274년(원종 15) 일본 원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이 누에서 시를 지은 것으로 보아 고려 중기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원래는 현 위치에서 마주보이는 낙동강 건너편 물가에 있었다. 홍건적의 난 때 안동까지 피난 왔던 고려 공민왕이 개경으로 돌아가서 ‘영호루’라고 쓴 현판 글자를 내려 주었다. 이 현판을 걸기 위하여 1367년 안동 판관 신자전이 누각의 규모를 더욱 확장하여 지었는데, 누각이 강물에 너무 가까이 있어 홍수로 인해 떠내려가고 다시 짓기를 몇 번이나 거듭하다가 1934년 갑술년 홍수 때는 건물이 완전히 떠내려갔다. 현재의 영호루는 1970년에 철근 콘크리트로 건축한 정면 5칸, 측면 4칸의 한옥 누각이다. 일찍이 우탁, 정도전, 정몽주, 권근, 김종직, 이황 등 당대의 대표적 문인이 영호루의 경관을 칭송하여 시를 남겼다.
1934년 갑술년 홍수 직전의 영호루이다. 영남 3대 누각이라 불릴 만큼 규모도 웅장하고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갑술년인 1934년 7월에는 안동 시내가 물에 잠기는 대홍수가 있었다. 이 홍수는 강 상류 지방의 폭우로 인하여 일어났으며, 영호루는 처마까지 물에 잠기자 더는 견디지 못하고 떠내려갔다. 이때가 1934년 7월 23일 오전 11시였다. 강물이 줄었을 때는 영호루 옛터에는 주춧돌과 돌기둥 몇 개만 남아 있어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 후 중창되지 못하다가 1970년에 뜻이 있는 안동인들이 모금한 성금과 국비, 시비를 모아 옛 영호루의 자리에서 강 건너편인 현 위치(안동시 정하동 소재)에 새로 지었는데 지금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 건물은 시멘트로 지은 것이어서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고 1992년 안동문화원에서 영호루 옛터에서 북쪽으로 약 20미터 지점에 영호루 유허비映湖樓遺墟碑를 세워 옛 자취를 잊지 않도록 하였다.
1934년 7월 23일 갑술년 대홍수로 말미암아 경상도 북부지역은 초토화되었다. 수마가 앗아간 영호루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주초석과 돌기둥만 널브러져 있다.
(사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광산김씨 김광계(金光繼, 1580~1646)가 쓴 매원일기에 기록된 영호루는 수해 전 갑진년(1604)과 을사년(1605) 음력 7월 21일의 수해를 본 후의 기록을 적었다. 요즘의 수해 현장 보도를 보는 듯한 생생한 중계가 인상적이다. 선생은 자는 이지以志요 호는 매원梅園이다. 선생이 쓴 갑진년 12월 4일 일기에는 ‘홍수가 나기 이전의 영호루’의 정경을 볼 수 있다. 그 전문을 옮겨보면, “아침에 눈이 내렸다. 일찍 길을 떠나 낮에 영호루 건너편 강변에 도착했다. 강이 얼어서 배가 단단하게 엉겨 붙었다. 아무리 잡아당겨도 움직일 수 없어서 사람들이 모두 건널 수가 없었다. 강변에 모두 모여 있는데, 겨울 장마가 처음으로 갰다. 얼음이 녹아 물이 불어나니 어찌할꼬. 어떤 사내가 벌거벗은 채 물을 건너가는데 강물이 얕은 곳과 깊은 곳을 재 보았더니 겨우 말을 타고 건널만했다. 간신히 건너편 강둑에 올랐다. 또 말을 보내 종들에게 말을 타고 건너라고 하니 얼음의 차가운 기운이 뼛속까지 스며서 말의 넓적다리가 밤톨처럼 단단해져 눈으로 볼 수가 없었다. 안동판관이 사람들이 건널 수 있도록 우마차[牛車]를 보내서 모두 건널 수가 있었다. 낮에 안동부 안에 도착해 처음으로 아침밥 지을 불을 피웠다. 밤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오니 2경이 가까웠다.”
서악사와 관왕묘이다. 사진 촬영은 조선총독부 박물관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이다. 멀리 영호루의 모습이 아련하다.
(사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또 이듬해인 을사년 7월 21일 일기에는 홍수로 인해 광산 김씨 집성촌인 예안 부내의 수해 상황과 유실된 영호루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아침에, 지난밤에 물의 기운이 더욱 성해져서 탁청의 정자와 중촌 및 하촌까지 이르러 피해를 보지 않은 곳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가서 살펴보니 하양댁, 제천댁, 안음댁은 모두 물속에 잠겼다. 일휴당은 기둥 위에 물이 든 흔적이 남았는데, 키 큰 사람 머리카락이 늘어진 것처럼 아주 멀었다(높은 곳에 물이 들었다가 빠진 흔적이 머리카락처럼 가느다랗게 남았다는 뜻). 흙탕물에 쓸리고 깨진 마을 집 50여 채를 보니 숙연하기만 한데, 병화 때보다 더 심하다. 사람이 살 만한 곳은 산기슭의 임시 숙소뿐이었다. 하양댁과 제천댁 두 집은 간신히 피해 나와 임시 숙소에 의탁했다. 이지(김광계)의 집도 피해를 본 집인데 담과 울타리가 모두 떨어져 나가고, 다만 지붕만 남았다. 진흙과 진창물이 집 안에 가득하여 더러워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가마솥 같은 그릇들이 간혹 높다란 곳에 있는 방이나 집 안에 고인 물 위에 떠 있었다. 하양댁에는 선생이 손수 쓴 병풍 두 위(圍)가 물 위에 떠돌다가 강변에 이르러 훼손되고 깨졌으니 안타깝구나.
예안 객관은 담장과 울타리가 다 떨어져 나갔는데, 뚫린 구멍으로 안이 다 들여다보였다. 대문 밖 괴목은 물 위에 떠다니는 나무들을 끌어당겨 크게 끌어안은 것 같았는데, (나무들을) 길에 쌓아놓았다. 수일당, 척금정, 쌍벽정은 모두 광류(狂流)가 들어오고, 오직 침류정의 방만 면했다. 어찌 큰 다행이 아니겠는가. 저녁에 안동 영호루와 남문 역시 물에 떠내려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물이 객관까지 다다르고, 동남촌의 주막까지 쓸어버려 사람과 가축이 많이 죽었다. 영호루는 화산(안동)의 걸구(傑搆 : 걸작)이자 전조(고려조)의 구적(舊迹)인데 하루아침에 이 지경이 되었으니 안타깝구나. 여강서원도 물에 떠내려갔는데, 위판만 간신히 얻어서 옮겨 나왔다. 들리는 소식이 더욱 심해 놀랍고 또 놀랍다.
안동의 역사와 함께해 온 영호루는 어쩌면 안동의 상징과도 같다. 문화는 개성이 생명이다. 개성이 없는 문화는 생명력을 가질 수 없다. 개성 있는 문화는 지역의 고유한 역사와 정서가 녹아 있고 독특한 삶을 배경으로 형성된다. 이러한 문화 개성은 지역 이미지로 형성되어 정체성을 갖게 된다. 지역 이미지는 지역을 상징하는 것으로 안으로는 지역주민들의 결속력을 가지게 하고, 밖으로는 지역에 대한 홍보와 신뢰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안동의 상징과도 같은 영호루가 우리 곁에 영원히 안동인들의 자긍심으로 살아 있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