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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부활의 증인들
2024.10.13. 일본 미토무교회집회에서 한 말씀
고야마 유코(小山祐子)
먼저 제 약력을 말씀드립니다. 센다이 출생. 부모님의 전근으로 아키다, 이와테, 미야기현에서 살았고, 소학교 5학년쯤 제 이름의 ‘祐’가 하늘의 도우심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하나님과 아버지께 감사합니다.
아버지 동료의 따님이 수녀학교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성스러움을 동경하였습니다. 악몽을 꾸는 일도 많아서 그런 소망이 있었지요. 고교시절 센다이에서 살았는데, 지금 우리 집회의 호시노 씨 부부(星野光利・吟子) 하숙이 같은 동네에 있었다는 사실을 미토무교회 잡지에서 보고, ‘기막힌 우연이었구나’ 생각했습니다. 동네에 미야기학원의 여자 기숙사가 있어 성탄절이 되면 학생들이 길에서 캐롤을 부르곤 했는데 정말 좋았습니다.
대학시절 성탄절 이브에 교회를 찾다가 가톨릭교회가 보여 들어갔더니 친구 가족이 있어 놀랐던 적도 있었지요. 대학을 졸업하고, 목표를 잃고 좌절하던 때, 갑자기 ‘내가 여기 있다’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무척 놀랐지만 말씀하신 이가 하나님이라 생각했습니다.(‘내가 여기 있다’는 출 3:14과 요 8:8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옵니다.)
도쿄에서 결혼을 하고 미토(水戶)로 오면서 교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남편은 학생 때부터 무교회의 존재를 알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기독교연감이라는 두꺼운 책에서 무교회집회가 열리는 미토유치원을 찾아 전화를 걸었는데 벌써 35년 전의 일이네요.
미토유치원에는 원장님이 계셨고 우리를 직원실로 안내하며 이야기를 들어주셨습니다. 그 마쓰모토(松本友子) 원장님은 후일 요양시설에 계실 때, 도움을 주던 직원 아이코(木村愛子) 씨에게 성서이야기를 하였는데, 지금 아이코 씨가 우리 집회원으로 앉아 있으니, 복음의 씨를 심도록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고야마 유코 씨와 남편이신 고야마 사토시 씨 | 이바라키현의 미토(水戸)무교회집회 |
오늘의 발표는 홈페이지 ‘가정예배 안내’에 올렸던 ‘4복음서의 예수 부활’을 기초로 합니다. 우치무라 신앙저작전집 13권과 야나이하라 선생의 ‘예수전-마가복음’을 인용하며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우치무라 선생의 글(눅 24:13-35)을 소개합니다.
신약성서에 따르면, 예수가 부활체로 제자들에게 나타난 일이 12회이다. 그중 3회는 복음서가 아니다. 즉 다메섹 가는 길의 바울, 돌에 맞고 있는 스데반, 밧모섬의 사도 요한의 체험이 그것이다.
다른 아홉 번은 복음서에 있다. 최초는 막달라마리아와 여자들에게, 다음은 시몬베드로, 엠마오의 두 제자, 제자들인 모였던 장소까지 연이어 오셨는데 모두 부활하신 첫째날 일이다. 다음은 1주일 후, 주의 부활을 의심했던 도마에게 나타났고, 갈릴리로 내려가 호반에 있던 베드로 등에게, 그리고 산상의 열 한 제자에게, 야고보 형제에게(고전 15:7), 아홉 번째는 제자들을 인도하여 베다니에 이르러 손을 들어 축복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다.
성서에 나온 순서대로 정리하였는데, 모두 다 의의와 가치가 있는 귀한 사실이다. 이를 가장 명료하게 묘사한 것이 엠마오의 사건이다. 부활은 과연 믿을 수 있는가? 이는 오래된 문제이다. 사실은 이를 믿지 못하는 이가 더 많다.
우치무라 선생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반론을 펼칩니다.
기사 그 자체가 가장 유력한 증인이다. 다른 기사는 차치하고 엠마오의 기사에 이르면, 앞뒤 자르고 또 부활에 대한 의심을 열어놓더라도 그 서술이 사실이라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보라, 그 기사의 발칙함과 생기약동함을. 한 점 꾸밈을 찾을 수 없고, 거두절미 진솔하고 자연스럽다. 체험이 없이 이렇게 생생한 글을 쓸 수 없다는 건 글을 써본 사람은 누구나 잘 알 것이다. 엠마오 부활 예수의 출현에 관한 누가의 필력은 성서중에 가장 생생한 묘사이다. 사실 이 기사는 어떤 주해도 필요치 않다. 일독하면 그 힘을 감지할 수 있다.
놀라운 절찬입니다. 예루살렘에서 거기까지 60스타디온, 약 11km입니다. 서너 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입니다. 예수님에게 3시간 이상 성서 강의를 들은 제자들은 마음이 가득 차고, 어두웠던 표정이 기쁨으로 바뀌지 않았겠습니까? 마음이 타올랐다는 표현처럼 그 나그네(예수)를 신뢰하여 이야기를 듣고 더 싶었습니다. 함께 머물자고 강권한 일이 그 마음을 알려줍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사건을 논하였습니다. ‘논하다’는 사전에서 ‘차례로 말하다, 말싸움하다’인데, 비밀스런 사건을 나그네(예수)에게 다 말한 것입니다.
“부인들이 우리를 놀라게 했어요. 아침 일찍 무덤에 가더니, 시신을 보지 못하고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천사들이 나타나 ‘예수는 살아나셨다’고 말했다는 겁니다. 우리 중 몇이 무덤에 가 봤지만, 부인들 말대로 그분은 볼 수 없었습니다. 예수의 시신은 어디에 있을까요? 천사의 말대로 예수님은 정말 살아나셨을까요?”
두 사람은 각각 자기 의견을 이야기했겠지요. 그 일에 마음이 쓰인 예수님이 다가와서 함께 걸으며 이야기합니다.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 시작하여 성서 전체에 걸쳐 자신(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씌어있는 일을 설명합니다.
이 대목을 우치무라 선생은 ‘얼마나 위대한 주해였을까’라고 썼습니다. 두 사람 혹은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는 나도 그 안에 있다(마 18:20) 하셨으니, 엠마오의 여정은 작은 에클레시아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번에는 야나이하라 선생의 예수전에서 인용하겠습니다.
“예수의 부활 기사는 4복음서 외에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에도 있다. 한 사건을 여러 사람이 보고할 때 각각 세부사항이 일치하지 않는 게 당연하다. 이 불일치는 그 사건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사실이며,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증거이다. 특히 부활처럼 대사건의 기술이 일치하지 않는 건 매우 당연하다.”
선생은 부활 후 예수가 나타나신 기사를 책에 따라 이렇게 비교하였습니다.
1) 마가복음 : 예수의 부활 사실 기술.
천사가 갈릴리에서 제자들에게 특히 베드로에게 나타날 것을 알림.
2) 마가복음 추가 : 막달라 마리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예루살렘에서 11제자가 식사하던 때, 예루살렘에서 승천.
3) 마태복음 : 막달라 마리아와 여자들. 예루살렘, 다음은 갈릴리에서 11제자.
4) 누가복음 : 엠마오 두 제자, 예루살렘의 11제자, 베다니, 승천.
5) 요한복음 : 막달라 마리아, 예루살렘에서 도마를 제외한 11제자, 도마,
갈릴리에서 베드로 등에게 보이심.
6) 사도행전 : 부활후 40일 동안 종종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고 포괄적으로 기술.
7) 고린도전서 : 베드로, 12제자, 500여 형제, 야고보, 모든 사도, 바울 자신의 순.
위의 기록을 비교할 때, 막달라 마리아와 여자들에게 나타나신 기록이 고린도전서에는 없다는 게 눈에 띈다. 이들 문헌 중에서 고린도전서는 가장 오래된 책이며, 그것을 쓴 바울은 논리적인 학자였는데 왜 막달라 마리아를 기록하지 않았을까?
둘째로 복음서 중 가장 오래된 마가복음이 예수의 부활을 천사의 고지로만 기록하고 있다. 부활의 사실이 아니라 무덤이 비었다는 것뿐이다. 그래서 부활을 부정하는 여러 주장이 나왔다.
이어서 그 여러 주장에 대한 반론을 말합니다.
예수의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의심하는 이유가 전혀 성립될 수 없다. 오히려 이를 사실로 인정하는 게 간명하다. 그렇다면 예수는 어떻게 되었나? ‘그는 이미 다시 살아났다’고 천사가 고지하였다. 즉 계시에 의한 영감이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이를 믿었던 것이다.
부인들은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막 16:8)고 합니다. 뭔가 석연치 않았던 야나이하라 선생은 이렇게 아쉬움을 표현합니다.
왜 여자들은 두려웠을까? 예수는 부활하셨다! 기쁜 소식을 들었지만. 전혀 뜻밖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차가운 얼음에 갑자기 손을 대면 뜨거움을 느낀다고 한다. 화창한 날씨, 행복한 자리에서 온몸을 덜덜 떠는 것과 같다. 이런 경험은 누구나 다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마도 너무나 큰 환희를 감당할 수 없어 정반대의 감각과 감정을 느낀 게 아닐까. 예수의 빈 무덤에서 천사로부터 부활을 고지받은 여자들에게 말할 수 없는 공포가 엄습하였다는 기사야말로 당시의 진상을 잘 말하고 있지 않은가.
여자들이 침묵했다는 부분에 대해서도 야나이하라 선생은 이렇게 썼습니다.
여자들은 정말 침묵했을까? 엠마오의 두 제자는 부인들의 이야기에 대해 논하였다고 했으니, 그들이 제자들에게 말했음은 틀림없다. 그리고 두렵고 떨렸으나, 자신들이 본 사실, 들은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였으므로 그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어마어마한 기쁨이었음을 깨달았다. 전율로 창백해진 입술에 조금씩 기쁨의 미소가 떠오르고 두려움에 떨던 입에서 힘찬 노래가 나왔을 것이다.
우치무라의 손자인 日永康 씨의 강연기록 ‘그리스도의 부활과 신자의 부활’입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렸을 때 제자들은 모두 흩어져갔지만 막달라 마리아와 여자들은 멀리서 예수를 지키며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의 몸을 인수하여 무덤에 모실 때까지 따라가 확인하였다. 그분들에게 부활의 예수가 가장 먼저 자신을 드러낸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마 28:9-10).
오늘의 주제가 ‘예수 부활의 증인들’입니다. 사실 그날 아침 베드로만 예수님의 무덤에 간 게 아닙니다. 또 한 제자(아마도 요한)도 있었습니다. 한때 예수님께서 심약한 제자들을 앞에 두고 탄식한 적이 있습니다.
“아아, 마음이 흐리고 둔하여 예언자의 말을 믿지 않는 자들아, 뭘 걱정하는가, 왜 마음에 의심이 가득한가, 불신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어라.”
그 제자들이 달라졌습니다. 먼저 베드로입니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기를. 하나님은 큰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부활하게 하시고 우리가 거듭남으로 살 소망을 주셨다(벧전 1:3).”
“우리가 너희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힘과 재림에 대해 알게 하였는데, 그것은 꾸민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의 목격자로서 전한다. 이 분이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과 명예를 받을 때, 영광중에서 이런 음성이 있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가 기뻐하는 자! 우리는 거룩한 산에서 주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하늘에서 울린 음성을 직접 들었다(벧후 1:16-17).”
베드로는 변화산 일을 정확히 기억하고 목격자로서 있는 그대로 전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요한입니다. 요한도 본 것을 적극적으로 증언합니다.
“생명이 나타났다. 거룩하신 아버지와 함께 우리에게 오신 영원한 생명, 우리는 그것을 보았기 때문에 증거하며 여러분께 전한다(요 1:2).”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낸 것을 보았기 때문에 말한다(요 4:14).”
저는 베드로와 요한의 편지를 읽고 하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더 확실히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예수께서 하늘 아버지의 일을 말해도 잘 받아들이지 못했던 제자들이 후일 보여준 영적성장에 놀라움을 느끼는 정도였습니다. 성령께서 선생님이 되어 제자들을 크게 변화시켜 갔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본 자는 모두 신앙을 가졌다. 즉 신앙이 아니면 부활의 증언을 할 수 없다. 부활의 기사는 증언이지 증명이 아니다(신구약성서신학사전에서).”
日永康(우치무라의 손자) 씨의 글도 같은 결론입니다.
“초대 기독교회에서는 부활의 그리스도를 직접 체험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 부활의 증인으로 큰 역할을 했다.”
베드로전서 1장 8절입니다.
“너희는 예수를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며, 지금도 볼 수 없으나 믿는다. 또 말할 수 없는 영광과 기쁨에 차 있다. 너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
요한도 말하였습니다.
“보지 않고 믿은 사람들은 복이 있다(요 20:29).”
후세의 우리에게 위로 가득한 말씀을 남겨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여기에서 마무리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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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야마 사토시 씨가 오류문고에 기증하고 싶다면서 도서 20여 권과 함께 보내주신 원고와 사진입니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