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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인생] 01
#. 어느 오피스텔 앞 (밤)
택시가 와서 멎는다.
#. 동. 택시 안
백밀러를 힐끔 쳐다보는 택시기사.
택시기사 : 손님, 다 왔는데요.
뒷좌석에 고개 푹 숙이고 잠이 든 박병식. 코를 골 듯 입에서 푸푸 거리는 소리가 난다.
택시가사 : (짜증나서) 손님.
박병식 : 어?
놀래서 깨는 박병식.
택시기사 : 다 왔어요.
박병식 : ...
잠이 덜 깨서 입맛을 다시며 차창 밖을 바라본다. 오피스텔이 보인다.
목을 빼서 택시의 미터기를 바라보는 박병식. 길게 한숨 내쉬고 주머니를 여기저기 뒤져 구겨진 지폐를 꺼낸다.
못마땅해서 낑낑대는 택시기사.
박병식이 다시 택시미터기를 쳐다보더니 주머니서 동전을 꺼내 요금을 맞추기 시작한다.
택시기사 : 잠이 드시면 어떡합니까. 미리미리 준비를 하고 계시다가...
박병식 : ...
못들은 척 동전을 골라 지폐에 얹어 내미는 박병식.
낚아채듯 지폐와 동전을 움켜쥐는 택시기사.
#. 동. 오피스텔 앞 (밤)
택시 문이 열리고 두 발을 내리는 박병식. 엉기적 내려서 택시 문을 닫는데 부웅 떠나버리는 택시.
멍하니 바라보는 박병식. 달려가던 택시가 장애물을 만났는지 급정거를 하며 휘청하더니 이내 다시 달려간다.
박병식 : ...
피식 가만히 웃는 박병식.
“여깁니다, 박 선배님.”
돌아서는 박병식. 이 형사가 다가온다.
이형사 : 주무시는데 깨운 거 아닙니까.
박병식 : 사건 현장이 어디야.
이형사 : 이쪽으로 오시죠.
앞서가는 이 형사.
#. 동. 뒤쪽 공터 (밤)
오피스텔 경비원이 투덜거리며 호스로 물을 뿌리며 바닥을 닦고 있다.
이형사 : 아무래도 자살 같습니다. 저기 꼭대기서 두 번째 층에 창문이 열려 있는 방이 보이죠.
박병식, 쳐다본다. 창문 열린 방이 보인다.
이형사 : 열려있는 창문 유리가 깨지긴 했지만 밖에서 침입한 흔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 뒷조사는 왜 하고 계셨습니까.
박병식 : ...
바닥을 닦고 있는 경비원을 본다.
경비원 : (물 여기저기 뿌리며) 저번에도 뛰어내린 사람이 있었어요. 그땐 젊은 여자였는데... 지독하기는,
그냥 사방에 피가 튀고, 박살이 나서. 으휴...
몸서리치는 경비원. 바닥에 흘러내리고 있는 물줄기.
#. 동. 준수의 방 안 (밤)
문이 열린다.
이형사 : 여깁니다. 여기서 뛰어 내렸는데...
곧장 창문 쪽으로 가서 밑을 내려다보는 이 형사.
박병식 : ...
방안을 차근차근 살펴보는 박병식. 정돈이 잘된 방안. 고급스런 현대식 가구와 비싸 보이는 오디오와 비디오 외 전자제품들.
한쪽엔 계단이 있고 이층 침실이 보인다.
이형사 : 깨끗하잖습니까,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고, 처음 들어왔을 때 그대롭니다. 이 친구 맞죠.
벽을 가리키는 이 형사. 준수의 대형 사진이 걸려있다. 외국의 어느 다리 난간에 기대 찍은 사진이다.
박병식 : ...
갑자기 싱크대로 가서 수도꼭지를 튼다.
허겁지겁 주머니서 약병을 꺼내 뚜껑을 열고 손바닥에 대고 약병을 친다. 약이 잘 안 나온다.
딱하다는 듯 보고 있는 이 형사.
약병 안에 손가락을 넣어서 솜을 한쪽으로 미는 박병식.
이형사 : 선배님도 참, 일년만 참았으면 정년퇴직인데 갑자기 사표는 왜 내셨습니까.
박병식의 손바닥에 떨어지는 알약. 얼른 입안에 처넣고 수돗물을 들이키는 박병식.
싱크대에 두 손을 대고 고개 숙인 채 가쁜 숨을 내쉰다.
#. 밤거리 (밤)
흐느적거리듯 밀려오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들.
#. 달리는 택시 안 (밤)
뒷좌석 시트에 머리를 기대고 두 눈을 감고 있는 박병식. 그 얼굴 위에...
박병식 : (소리) 세상엔 사실만 존재할 뿐이다. 환상 같은 건 없다.
#. 어느 연립 주택의 앞 (밤)
택시에서 내리는 박병식. 구부정 낡은 연립 주택의 현관을 향해 간다.
박병식 : (소리) 이십여 년 동안 강력계 형사로 재직하면서 난 그 사실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해서 살아왔다.
#. 동. 박병식의 집 거실 (밤)
어지럽혀진 안. 여기저기 널려있는 서류더미와 사진들.
이것저것 뒤적이는 박병식.
박병식 : (소리) 난 그 사실의 이면을 보려고 한 적이 없다. 내가 맡은 범죄사건의 실체만 파악하면 그만이었다.
준수의 사진들이 널려있다. 숨어서 찍은 듯한 사진들. 준수와 다애가 찍은 사진들.
어느 순간 박병식이 눈길이 멈춘다. 어느 중년 여인을 마주 바라보는 준수의 얼굴. 중년 여인의 뒷모습.
박병식 : ...
소파에 길게 늘어지며 두 눈을 지그시 감는 박병식.
#. 어느 커피숍
탁자 위의 다애의 사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는 박병식. 그 위에,
하동원 : (소리) 사진 뒤에 이름, 나이, 전화번호, 주소 같은 인적사항을 자세히 적어놨습니다.
박병식 : (본다)
하동원 : 사례는 후히 하겠습니다. 경비는 따로 계산해 드리구요.
박병식 : 그게... (난처한) 이런 일은 처음이라서.
하동원 : 베테랑 형사셨다고 들었습니다.
박병식 : 난 이런 일이 아니고 무슨 사건 뒷조사 같은.
하동원 : (웃으며) 나도 이런 일은 께름칙합니다. 내가 모시고 있는 본부장님이 하도 부탁을 하시니까.
박 형사님도 조직에 있어 보셔서 아시겠지만 조직의 생리라는 게 있잖습니까.
본부장님하고 이 여자하고 어떤 관곈지는 모르겠지만.
박병식 : 사귀는 사람이 누군지 그것만 알아내면 되는 겁니까?
하동원 : (웃으며) 그렇죠, 뭐. 세세한 거 까지 알아서 뭐 하겠습니까.
박병식 : 으흠.
하동원 : 너무 깊숙이 파고드실 거 없습니다. 그럼 골치 아프죠.
돈 다발이 든 봉투를 꺼내 박병식 앞에 놓는다.
박병식 : 나중에...
하동원 : 내 돈 아니니까 받으세요.
박병식 : 나중에...
하동원 : 돈 싫다는 사람, 오랜만에 만나보네요.
재밌다는 듯 웃어대는 하동원.
#. 박병식의 거실 안 (방)
라면을 끓이는 박병식. 계란을 하나 깨서 집어넣는다.
라면을 먹으며 서류 책을 뒤적이는 박병식. 옆에 사진들을 펴놓고 서류와 대조를 해 본다.
문득 준수가 바라보고 있는 중년 여인의 뒷모습이 찍힌 사진에 눈길이 멎는다.
박병식 : ...
여기저기 사진을 헤집는다. 다시 멈추는 박병식의 손길. 혜진의 사진이다.
그 사진 위에 자막. “육 개월 전.”
#. 북해도 치도세 공항 전경
눈 덮인. 공항 청사 지붕 위로 이륙하는 여객기.
#. 동. 출국장 앞 길
혜진이 여행용 가방을 끌고 나온다.
한가한 공항의 모습. 눈 덮인 길을 조심조심 오가는 차들.
혜진 : ...
그런 풍경들을 바라보다 힘껏 숨을 들이마시며 활짝 웃는 혜진.
생각난 듯 핸드백에서 핸드폰을 꺼내 켜서 로밍으로 전환한다. 마음이 설레는지 숫자를 입력하고 버튼을 누르는 손길이 떨린다.
청사에서 륙색을 한손으로 어깨에 걸쳐 메고 나오는 준수. 렌트카행 표지판이 있는 곳으로 가다 힐끔 혜진을 바라본다.
소녀처럼 팔짝 뛰는 혜진.
혜진 : (전화) 나야, 윤혜진. (꺄르르 웃더니) 내가 지금 어딨는지 맞혀봐... 북...해...도. (또박또박 말하고 재밌다는듯 웃는다)
준수 : ...
또 한번 힐끔 혜진을 쳐다보는 준수.
혜진 : (전화) 그래, 내가 드디어 북해도에 왔다구.
성숙 : (전화에서) 니 신랑한텐 나 만나러 동경으로 간다구 했다면서.
혜진 : (전화) 버스 온다. 나중에 다시 전화 걸게.
렌트카 회사의 미니버스가 와서 멈춘다.
성숙 : (전화에서) 뭐야, 나보고 니 신랑한테 거짓말 해달라는 거야?
혜진 : (가며) 걱정 마. 너한테 전화 걸어서 그런 거 확인 할 사람이 아냐. 그 사람은. 끊는다.
전화 끊어버리고 렌트카 미니버스에 타는 혜진. 떠나는 버스.
#. 동. 렌트카 버스 안
짐칸에 가방을 집어넣고 손잡이를 잡고서는 혜진.
버스가 떠난다. 뒷자리에 륙색을 무릎에 올려놓고 앉아있는 준수.
허리를 굽혀 차창 밖을 내다보는 혜진. 눈 덮인 공항의 풍경들이 흐른다.
#. 동. 렌트카 회사 사무실안
북해도의 관광포스터들.
혜진 : ...
순서를 기다리며 서서 고개를 돌려 포스터들을 바라보고 있는 혜진.
“어서오세요.” 일본 여직원의 상냥한 목소리.
흠칫 놀라서 카운터를 바라보는 혜진.
웃으며 고개 숙여 인사하는 여직원. 얼른 카운터로 가는 혜진.
여직원 : 차를 빌리실 거죠?
혜진 : (끄덕인다)
여직원 : 예약은 하셨습니까?
혜진 : (고개 저어 보인다)
여직원 : 그럼 먼저 운전면허증을 보여주시겠습니까?
혜진 : ...
마치 말을 못들은 듯 여직원을 멍하니 바라보다 갑자기 정신이 난 듯 핸드백을 열고 면허증을 찾는 혜진.
여직원 : (웃으며)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국제면허증을 찾아 내미는 혜진.
여직원 : (면허증 보더니) 한국분이시네요.
혜진 : (비로소) 하이.
여직원 : 북해도엔 관광차 오셨나요?
혜진 : (고개를 까딱해 보인다)
여직원 : 북해도는 눈의 나라지요. (창밖을 기웃거리며 내다보는 시늉하며) 오늘은 눈이 좀 그쳤네요.
#. 동. 주차장
렌트카의 시동을 거는 혜진. 계기판이 낯설어 이것저것 훑어본다.
라이트 스위치를 켠다. 불이 들어오는 계기판.
안도의 숨 내쉬듯 한 숨 쉬고 와이퍼를 켜본다. 빠르게 작동하는 윈도우 브러셔.
얼른 다시 끄고 네비게이션을 찾아 켠다. 일본어 안내와 함께 네비게이션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혜진 : ...
손가락을 펴서 행선지를 누르고 입력을 하기 시작한다.
혜진 : 오...타...루.
“미안해 커플들끼리 가는데 어떡하니.”
#. 동경의 자취방 안 (회상)
혜진 : 그래도 그렇지 기집애야. 내가 얼마나 북해도에 가보고 싶어 했는데.
성숙 : 그러니까 헌 짚신 짝이라도 하나 구해놓으라고 했잖아. 다 쌍쌍인데 너 혼자 뭐할 거냐.
혜진 : 몰라, 기집애야.
화가 나서 침대에 벌렁 누워 팔베개 하는 혜진.
성숙 : (놀리듯 힐끔거리며) 야, 정말 북해도 좋더라. 일본 사람들이 북해도로 죽으러 간다는 말이 실감나는 거 있지.
정말 눈 구경 지겹게 하고 왔다. 가는 날부터 오는 날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눈이 내리는데 여기까지 차는 거 있지.
(머리 위를 손으로 가리키며)
혜진 : 나두 북해도 가서 죽어버릴까.
성수 : 뭐.
혜진 : (벌떡 일어나 앉으며) 오타루의 설산. 러브레터에 나오는 그 산. 거기두 가봤니.
#. 치도세 공항 렌트카 주차장 네비게이션
혜진 : ...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머리를 기대고 두 눈을 감는 혜진. 그 얼굴 위에 똑똑똑 차 창문 두드리는 소리.
혜진 본다. 준수가 차 창문을 손가락 끝으로 또 한번 두드린다.
혜진 : ...
멍하니 바라본다. 준수가 차창을 좀 내려보라는 손짓. 혜진이 차창을 내린다.
준수 : (일본어) 스미마센. 혹시 삿뽀로로 가십니까.
혜진 : ... (바라보다 정신 나서 뭐라고 하려는데)
준수 : (일본어) 렌트카를 빌리러 왔는데 지갑을 잃어버렸습니다. 혹시 삿뽀로 가시는 길이면 좀 태워주시면 안되겠습니까.
혜진 : (일본어) 삿뽀로가 아니라 오타루 쪽으로 가는데요.
준수 : (일본어) 아, 그렇습니까. 그럼 더 잘 됐습니다.
뒷문을 열고 배낭 식 가방을 뒷좌석에 던져놓고 조수석에 올라타는 준수. 어이가 없어 말도 못하고 허둥대는 혜진.
준수 : (일본어) 이상한 사람 아닙니다. 오타루까지 태워주시면 사례는 충분히 하겠습니다.
혜진 : ...
기가 막혀 고개 돌려 차창 밖 보며 한숨을 내쉬는 혜진.
준수 : (네비게이션 힐끔 보며, 일본어) 북해도엔 처음 오셨습니까.
혜진 : ... (차창 밖만 내다보는)
준수 : (일본어) 네비게이션만 믿고 오타룰 찾아가시다간 언제 도착할지 모릅니다. 눈 때문에 사방에 길이 막히거든요.
길이 막히면 절 깨우세요.
화가 나서 돌아보는 혜진. 준수가 의자를 뒤로 젖히더니 길게 누워버리고 있다.
혜진 : ...
기가 막혀 고개 돌리다가 다시 준수 본다. 팔로 얼굴을 가리고 죽은 듯 꼼짝 않는 준수.
혜진 : ...
준수를 바라보는 혜진의 눈길이 이상하게 편해지고 있다.
#. 삿뽀로의 고속도로 입구
요금소로 들어오는 혜진의 차.
요금을 지불하고 고속도로로 들어서는 혜진의 차.
#. 동. 고속도로 위
달리는 혜진의 차.
#. 동. 차 안
차창 밖으로 흐르는 삿뽀로시의 모습들.
혜진 힐끔 옆자리를 본다. 여전히 한 팔로 얼굴을 가리고 잠든 시늉을 하고 있는 준수.
네비게이션에서 고속도로를 나가 다른 고속도로를 타라는 음성안내가 나온다.
#. 삿뽀로에서 오타루 가는 고속도로
눈 덮인 산길을 뚫고 이어진 고속도로. 도로는 차선이 안보일 정도로 눈이 덮여있다.
조심조심 운전하는 혜진. 진땀이 난다.
준수 : (팔로 얼굴을 가린 채 일본어로) 조금만 더 가면 휴게소가 나옵니다.
혜진 : ...
힐끔 준수를 보더니 기가 막혀 헛웃음을 웃는 혜진.
#. 동. 휴게소의 식당 안
초밥을 곁들인 우동을 열심히 먹고 있는 준수. 건너편 식탁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혜진.
후르륵 뜨거운 국물을 입김으로 불어대며 국물을 마시고 있는 준수.
못마땅해서 노려보다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 혜진.
#. 휴게소 식당 앞
나오는 혜진. 엉금엉금 눈길을 기어가는 차들이 보인다. 주위를 둘러본다. 보이는 건 눈뿐이다.
혜진 : ...
고개를 들어 눈을 바라보고 있는 혜진의 두 눈 위에.
동원 : (소리) 신부 입장할 때 웃어.
#. 결혼식장의 신부 대기실 (회상)
거울 앞에 혜진, 웨딩드레스가 화려하다.
뒤에서 혜진의 어깨를 감싸듯 쥐고 거울 속의 혜진을 들여다보고 있는 동원.
동원 : 화사하게. 빈티 나게 눈 내리깔지 말고. 모두 네가 어떤 여잔지 궁금해 한다구. 하동원이 어떤 와이프를 골랐나.
여자하고 주식은 다른 거다. 대박 터지는 주식은 족집게처럼 잘 골라내지만 여자 고르는 솜씨는 어떤지 한번 두고 보자.
내가 맹세할게, 윤혜진이 대박 터진 거라구. 내가 평생 행복하게 해줄 거야. 나이에 맞게 삼십대는 루비나 사파이어로
장식해주고 사십대엔 눈깔사탕만한 다이아몬드로 온몸을 장식해 줄게.
혜진 : ...
눈물 떨어 질까봐 눈 크게 뜨고 있는 혜진.
동원 : ... (뒤에서 감싸 안으며) 농담야, 돈은 벌어 봐야 아는 거고. 하지만 한 가지는 약속할게.
내 평생에 여잔 혜진이 너 하나 뿐이야.
지그시 혜진의 볼에 입 맞추는 동원. 문 쪽으로 간다.
혜진 : 저...
동원 : (돌아본다)
혜진 : ...(망설이는)
동원 : (웃으며) 뭐...
혜진 : 자꾸 마음에 걸리면... (또 망설이다) 안 해두 돼요.
동원 : 뭘?
혜진 : ...(겨우) 우리 결혼.
동원 : 내가 결정한 거야. 내가 뭐 윤혜진이가 불쌍해서 자선사업이라도 하는 줄 알어.
혜진 : 내 말은 어쩔 수 없어서...
동원 : (다시 와서 뒤에서 안으며) 세상 사람이 다 사랑해서 결혼하나? 난 첫눈에 반해서 사랑에 빠졌다는 따위 얘긴 안 믿는 놈야.
지금부터 만들어 가자구. 그놈의 사랑인지 뭔지.
거울 속의 동원 바라보는 혜진. 웃어 보이는 동원.
여직원 : (문 열고) 신랑분 그만 나오세요. 시간 다 됐어요.
동원 : (알았다고 손 내젓고 혜진에게) 기죽지 마. 파이팅 윤혜진.
다시 한번 웃어 보이고 나가는 동원. 문이 닫힌다.
혜진 : ...
눈을 뜬다. 거울을 바라본다. 이번엔 기쁨의 눈물이.
#. 휴게소 식당 앞
바람에 눈이 휘날리고 있다.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혜진.
준수 : (소리, 일본어) 날 두고 혼자 가신 줄 알았습니다. 아리가또... (고개 숙이는데)
혜진 : (하늘 보며, 한국어로) 이런 날씨에 누가 차를 태워주겠어요.
준수 : ...(고개 들어 본다)
혜진 : 정말 일본사람으로 보였다면 차를 태워주지도 않았을 거예요.
준수 : 난 일본분인 줄 알고.
혜진 : (홱 고개 돌려본다)
준수 : ...
혜진 : 서울서 같은 비행길 타고 왔죠.
준수 : 날 봤습니까? 비행기 안에서.
혜진 :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에요. 언제부터 날 보고 따라온 건지.
준수 : 삿뽀로 공항에 내리면서.
혜진 : 나한테 거짓말 할 이유가 없잖아요.
준수 : ... (지그시 바라보더니, 가만히 웃는다) 오타루는 처음 가시는 겁니까.
혜진 : ... 다른 사람한테 부탁해 보세요.
차로 걸어가는 혜진. 바라보고 서있는 준수.
차에 타더니 그대로 떠나는 혜진. 그저 바라보고 서있는 준수.
고속도로 입구 쪽으로 가던 혜진의 차가 급정지한다. 브레이크 등의 붉은 불빛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반사적으로 뭔가를 피하듯 눈을 감으며 얼굴을 돌리는 준수.
그 얼굴 위에 후진하는 차 소리. 끼익 급정지하는 혜진의 차.
비로소 얼른 숨을 내쉬며 고개 들어 혜진의 차를 바라보는 준수.
혜진이 뒷문을 열고 준수의 배낭 가방을 꺼낸다. 마치 준수에게 던지기라도 할 듯 배낭을 치켜들다가 멈추는 혜진.
준수 : ...
휴게소 앞에 기우뚱 서있는 준수.
혜진 : ...
그런 준수의 모습을 바라보다 배낭을 치켜들었던 팔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진다.
#. 동. 고속도로 위
달리는 차. 제법 속도를 내고 있다.
#. 동. 차 안
운전하고 있는 준수. 차창 밖만 내다보고 있는 혜진.
준수 : 오타루 어디까지 가실 겁니까.
혜진 : ...
준수 : (힐끔 보며) 장난친 건 미안합니다. 그래야 차를 얻어 탈 수 있을 거 같애서.
혜진 : 네비게이션이 가자는 대로 가세요.
준수 : (힐끔 본다)...
혜진 : 방향이 틀리면 찰 세우구요.
준수 : 속돌 좀 더 올리겠습니다. 이 길은 수십 번 다녀본 길이거든요.
#. 동. 고속도로
달리는 차.
#. 오타루의 댐으로 올라가는 길
눈이 쌓인 길. 천천히 언덕길을 올라오는 차. 멈춘다.
#. 동. 차 안
준수 : ...
프론트 윈도우 너머로 눈 쌓인 길을 바라본다.
옆을 본다.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잠이 든 혜진.
프론트 윈도우에 얼굴을 바짝 대고 길 위쪽을 바라보는 준수. 타원형으로 이어진 구름다리 위의 길이 보인다.
혜진 : (흠칫 놀라서 잠이 깬다) 어디죠, 여기가.
준수 : 길이 막힌 거 같은데 하여간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보죠.
다시 차를 몰기 시작하는 준수.
혜진 : 차, 세워요.
비명처럼 내지르는 혜진. 차 세우는 준수.
혜진 : 내리세요.
준수 : 조금만 더 가면 네비게이션에 입력해놓은 계곡이 나옵니다.
혜진 : 거기까지 데려다 달라고 부탁한 적 없어요.
난폭할 정도로 거칠게 차문을 열고 내리는 혜진. 운전석으로 가서 차문을 연다.
준수 : 잠깐만요.
혜진 : 내려요.
부들부들 떠는 혜진. 할 수 없이 차에서 내리는 준수.
운전석에 올라타는 혜진.
준수 : 그것도 우연이냐고 하시겠지만 내 목적지도 같은 곳입니다.
혜진 : (어이없다는 듯 본다)
준수 : 작년 겨울에, 크리스마스 직전이었는데 친구하고 산 위에 올라갔다가 사고가 나서 친구가 죽었어요.
차 문을 닫던 혜진이 멈춘다. 다시 준수를 본다.
준수 : 갑자기 폭설이 내려서 시신을 못 찾았습니다. 그래서...
혜진 : 이 눈 속에서 친구의 시신을 찾겠다는 거예요?
준수 : 눈 속에 그 친굴 그냥 놔둘 순 없잖습니까. 눈이 녹을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요.
마치 울음이라도 터질 듯이 혜진을 바라보는 준수.
#. 댐 밑의 나선형 도로
차가 느릿느릿 길을 돌아 산 위로 올라간다.
#. 동. 산위로 난 길
눈 위에 솟구친 도로 표시 막대. 길옆에 사람높이보다 더 높이 쌓아놓은 눈.
그 사이에 난 길로 차가 올라간다. 언덕을 바라보는 혜진.
눈사태 막이용 차단막이 처 있고 여기저기 눈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부러지거나 꺾이거나 뿌리까지 드러난 나무들.
차가 멈춘다. 앞을 보는 혜진. 눈사태가 났는지 눈 더미가 길을 막고 있다.
차에서 내리는 준수. 혜진을 따라 내린다.
준수가 달려가 길을 막고 있는 눈 위로 기어 올라간다. 눈 위에 올라가서 앞을 바라보는 준수. 산더미처럼 쌓인 눈들.
준수 : ...
눈 위에 얼굴을 묻고 가쁜 숨 내쉬는 준수.
#. 동. 같은 길
차가 산길을 내려온다. 길옆에 눈을 치우는 장비를 실은 차가 서 있고 인부들이 쉬고 있다.
차에서 내려 달려가는 준수.
차 안에서 바라보는 혜진. 준수가 인부들에게 열심히 뭔가를 물어보고 있다.
혜진 : ...
맥이 빠져 의자에 머리를 기대는 혜진.
#. 어느 호텔의 로비 (밤)
스넥바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혜진. 프론트 데스크에서 직원과 얘기를 주고받고 있는 준수의 모습이 보인다.
가만히 한숨 내쉬고 고개 돌리는데 핸드폰의 벨소리.
얼른 핸드백에서 전화기 찾아 풀립을 여는 혜진. 표시판을 본다. 얼른 통화 버튼 누른다.
혜진 : (전화) 여보세요... 그래 엄마야... 여기? 동경의 성숙이 아줌마 집... 그래... 성숙이 아줌마한테 급한 일이 있어서...
그래, 금방 갈 거야. 나래 잘 봐주고 있어야 돼. 알았지. 엄마 금방 갈게. 아빤? ... 아빠 아직 안 들어왔어? ...
프론트 데스크 카운터에 기대 혜진 쪽을 바라보고 있는 준수. 전화기에다 속삭이듯 통화를 하고 있는 혜진의 모습이 보인다.
혜진 : (전화) 그래, 그만 끊어. 엄마가 다시 전화할게. 알았어. 끊는다? ...
중단 버튼 먼저 누르는 혜진. 가만히 이를 악 물더니 전화기의 풀립을 조심 닫는다.
그 혜진 앞에 호텔 키가 놓여진다.
혜진 : (본다)
준수 : 방 값은 내가 계산했습니다. 차를 태워줬으니 그만한 인사는 해야 할 거 같애서요.
혜진 : (다급히, 말을 막으려는데)
준수 : 봄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이런 한 겨울에 친구의 시신을 찾으러 다니는 게 이상하게 느껴지시죠?
혜진 : (숨 내쉬는)
준수 : 그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요. 봄까지... 살 자신이 없습니다.
혜진 : ...
준수 : ...
방긋 웃고 일어난다.
혜진 : 사람 그만 놀리고 이거 가져가요.
호텔 키 집어 든다.
준수 : 이 삼일은 여기 있어야 할 겁니다. 운 좋게 눈이 그치면 계곡 위로 올라가는 길 위의 눈을 치울 거라고 했습니다.
시간이 맞으면 같이 올라가시죠.
또 한번 싱긋 웃고 현관으로 가는 준수. 호텔 키를 든 채 바라보는 혜진.
#. 동. 앞 (밤)
상자갑처럼 지어진 호텔의 현관 앞.
준수 나와서 하늘을 본다. 밤하늘에 소용돌이치며 땅 위로 떨어지는 눈들.
#. 동. 방 안 (밤)
혜진 : ...
방 안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는 혜진. 일본식 다다미방의 공허함.
#. 동. 앞 길
배낭을 둘러메고 가는 준수. 차가 온다. 택시를 잡으려고 손을 치켜드는 준수.
택시가 아니라 지나쳐 달려가는 차.
#. 동. 방안 (밤)
방안에 아무렇게나 내팽겨 쳐진 혜진의 옷들.
밖이 보이는 창가에 설치한 욕조. 그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두 눈을 감은 혜진. 그 위에...
혜진 : (소리) 남편은 내 인생의 구세주였다.
#. 혜진의 안방 (회상) (밤)
침대에 반듯이 누워 잠이 든 동원.
혜진 : ...
화장대 의자에 앉아 동원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 동원이 잠꼬대하듯 몸을 뒤척여 등을 보이고 눕는다.
혜진 : ...
남편을 바라보는 혜진의 얼굴에 떠오르는 서글픔.
혜진 : (소리) 의지가지없는 나를 자기 인생에 붙들어 매줬고 알프스산맥을 넘은 한니발 장군처럼 날 이끌어줬다.
나는 남편의 인생을 통해서 보고 듣고 느끼고 세상을 바라봤다.
#. 몽타쥬
혜진의 하루가 보여 진다.
새벽 거리를 조깅하는 동원. 잠든 나리와 나래를 깨워 목욕탕으로 밀어 넣는 혜진.
부엌에서 아침을 준비하는 혜진. 나리와 나래가 식탁에 앉아 빨리 달라고 포크로 식탁을 두들겨 댄다.
조깅을 마치고 땀에 젖은 얼굴을 수건으로 닦으며 식탁으로 오는 동원.
질겁하며 동원을 욕실로 미는데 얼른 식탁에서 팬케잌 하나를 집어 입에 처넣는 동원.
인사동의 찻집에서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있는 혜진.
미술관에서 그림을 감상하고 있는 혜진.
학교에서 나오는 나리와 나래. 차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손을 흔드는 혜진. 달려와 혜진에게 매달리는 나리와 나래.
학원 간판들이 흐른다. 학원 앞에 차를 세워놓고 핸드폰을 걸고 있는 혜진. 수다가 한창이다.
혜진의 집 아이들 방에서 공부하다 잠이 든 나리와 나래. 안쓰러워서 바라보다 나래를 안아 침대에 눕혀 주는 혜진.
나리는 깜짝 놀라 일어나 다시 공부를 한다. 그런 장면들 위에,
혜진 : (소리) 새벽에 일어나 꼭 조깅을 나가는 남편이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는 동안 서양식 아침을 차리고
남편과 아이들을 먹여 회사와 학교에 보내고, 설거지는 파출부 아줌마한테 맡기고, 인사동으로 나가 동창들을 만나거나,
혼자서 각종 전람회나 공연을 보러 가기도 하고.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는 시간부터 두 아이를 각종 학원에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이 에스코트하다가 밤 열한 시가 되어 집으로 돌아오면 직장에서 돌아온 남편을 기다렸다
간단한 밤참을 차려주는 그런 생활. 난 그런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고, 그것이 행복이라고 믿었다.
#. 혜진의 집 부엌 (밤)
후르륵거리며 라면을 먹고 있는 동원. 식탁에 턱을 괴고 마주 앉아 그런 동원을 보고 있는 혜진.
동원 : 안 먹어?
혜진 : 싫어요.
동원 : 왜? 나보다 라면 더 좋아하면서.
혜진 : 살찔까 봐요.
동원 : 난 당신이 살이 좀 찌는 게 좋은데. 포동포동. 그래야 만질 데도 많구.
혜진 : 나 휴가 좀 보내줘요.
동원 : 휴가?
혜진 : 직장에 오래 다니면 안식년인가 뭔가 휴가 보내 주는 거 있잖아요.
동원 : 난 몇 년 더 있어야 그런 휴가 얻는데.
혜진 : 나 혼자서요.
동원 : ...(먹던 거 멈추고 본다)
혜진 : ...(눈 깜빡이며 바로 보는)
동원 : ...(다시 먹으며) 얼마나.
혜진 : 한 달?
동원 : 아이들은 어떡하구.
혜진 : ...(바라본다)
부지런히 먹기만 하는 동원. 가만히 한숨 내쉬는 혜진.
동원 : 다녀와.
아무렇지도 않게 내던지고 김치를 입에 처넣는 동원.
#. 인천공항의 커피숍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폐가될까봐 작은 여행용 가방을 의자 옆으로 바짝 당겨 놓는 혜진.
동원이 커피와 케잌을 쟁반에 받쳐 들고 와서 마주 앉는다.
동원 : 일본 가서 한달씩이나 뭘 할려구.
혜진 : 성숙이도 만나고.
동원 : 또,
혜진 : 뭐 그러다...
동원 : 당신, 나한테 뭐 불만 있는 거 아냐.
혜진 : (눈 크게 뜨고) 아뇨, 불만이 있으면 나 자신한테 있지, 당신한테 뭐가 있겠어요.
동원 : ...
한숨 내쉬더니 팔짱끼고 의자에 몸을 눕히듯 앉아 혜진을 바라보는 동원.
얼른 두 손으로 커피잔 감싸서 한 모금 마시는 혜진.
혜진 : 생각 좀 해보려구요.
동원 : 생각?
혜진 : (끄덕)
동원 : 무슨 생각? (어이없다는 듯)
혜진 : 그냥 이것저것 생각 좀 해보려구요.
동원 : 당신한테 어울리지 않아. 잘 살고 있으면서 무슨 생각.
혜진 : ...(굳어지는)
동원 : (얼른) 당신이 생각 없는 여자라는 뜻이 아니고, 특별히 그 나이에, 갑자기.
혜진 : 당신 나 없으면 못살아요?
동원 : ...
혜진 : ...(멍하니 애원하듯 바라보고 있다)
동원 : 유치하게 왜 이래. 당신 나이가 몇인데.
혜진 : 서른 여섯.
동원 : 지금 진심으로 물어보고 있는 거야?
혜진 : 갑자기 그런 생각이 났어요. 나 없으면 당신은 살 수 있을까 하구요. 난 없을 거 같아요. 당신 없으면.
동원 : (기가막히다는 듯 웃는) 또 그 버릇 나오네.
혜진 : 뭐요?
동원 : 문학병.
혜진 : ...(보더니)
흥, 싱겁게 웃는 혜진.
동원 : 다녀와, 안 보내 주려고 그러다 가만 생각해보니 당신 병이 더 도지겠어.
혜진 : 나 열심히 살았어요. 하루도 딴 생각 안하면서.
동원 : 그러니까 갔다오라구, 휴가야. 우리 결혼한 지 십오년 됐나? (생각하더니 혜진 본다)
혜진 : (쿡 웃는다)
동원 : 당신이 무슨 서른여섯이냐.
혜진 : (재밌다는 듯 웃는다)
동원 : (얼른) 한달은 너무 길어. 일주일만 있다 와. 애들이 못 견뎌. 파출부가 뭘 제대로 챙겨 주겠어.
혜진 : (더 재밌어서) 당신은요.
동원 : 나?
혜진 : 당신하고 처음 떨어지는 거잖아요. 당신 출장 갈 때 말고. 난 항상 집에 있었잖아요.
동원 : (이죽거리듯) 나야 좋지. 오랜만에 마누라 없이 자유를 만끽하고. 정말 당신이 몇 살 이드라.
(의자에 두 팔 뒤로 걸치고 웃으며) 바람이나 피워볼까?
#. 출국장 앞
작은 여행 가방 끌고 안으로 들어가는 혜진. 바라보고 있는 동원.
여권을 보여주고 검사장 안으로 가는 혜진.
문득 걸음을 멈추듯 뒤돌아보려는 동원이다. 동원이 웃으며 손을 들어 보이는데 혜진이 그대로 검사장 안으로 사라져 버린다.
동원 : ...
웃음이 사라진다. 들고 있던 손을 장난치듯 흔들며 내린다.
#. 여객기의 안 화장실
앞쪽 맨 뒷좌석 창가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혜진. 추운지 담요로 무릎을 덮고 있다.
혜진 : ...
문득 치미는 설움. 치솟는 눈물을 감추려는 듯 머리를 창에 기댄다. 그러나 다시 치미는 눈물.
의자에 몸을 깊숙이 기댄 채 담요를 머리 위까지 뒤집어쓴다.
이윽고 담요 속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혜진.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온몸을 떨고 있다.
#. 동. 공항의 주차장
차문을 여는 동원. 청사 너머로 솟구치는 여객기를 바라본다.
동원 : (소리) 들켰나? 들킬 리가 없는데. 아니 들켰어도 저렇게 나올 여자가 아닌데.
#. 올림픽 도로
달리는 동원의 차.
동원 : (소리) 요즘처럼 주식 시장이 춤을 출 때는 신경이 날카로워 진다. 그렇다고 그걸 드러내놓고 살 수는 없다.
위기가 닥칠수록 냉정해져야 하는 게 펀드매니저다.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섣부른 판단을 내리면
수십억 원이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다. 하필이면 그런 때에 와이프가 말썽을 부리다니.
뭘까, 눈치 챘나? 그거겠지? 딴 이유가 있을 리 없지. 가만 있어봐. 이 여편네가 뭔가 저지른 거 아냐...
휴우, 말두 안돼. 나와 상관없이 와이프한테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하는 건... (웃음처럼) 그래. 말도 안 되는 소리지.
#. 여의도의 증권가
동원의 차가 와서 어느 건물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간다.
#. 동원의 사무실 안
동원을 따라 들어오는 현필.
현필 : 아무래도 던져야할 거 같은데요.
동원 : 얼마나 떨어졌는데,
현필 : 개장하자마자 오육십 포인트 빠지더니 계속 밀려요.
동원 : (컴퓨터 두들겨 주식 상황 보더니) 견딜만한데,
문 열리고 얼굴 디미는 김영호.
김영호 : 하형, 어떡할 거야. 모두 하형 눈치만 보고 있는데.
컴퓨터만 두드리고 있는 동원.
김영호 : 오후 장에 던져야 하는 거 아냐.
동원 : (컴퓨터 마지막 키 탁 치고 나서) 현필아.
현필 : 네.
동원 : 실탄 남은 거 있어?
현필 : 네. 한 오육십 억.
동원 : 강철주 위주로 사들여, 몽땅.
현필 : ...(김영호 본다)
김영호 : 사자구? (어이없다는)
#. 동원의 회사 사무실
분주하게 돌아가는 직원들. 동원의 방에서 뛰쳐나오는 현필.
현필 : (주문서 흔들며) 주문 들어갑니다.
우르르 현필 위주로 모여드는 프로그래머들. 왁자지껄 난리다.
현필 : 우린 사기로 했으니까 알아서들 하세요.
#. 동. 복도
김영호 온다. 벤딩머신 주위에 모여 웅성거리고 있던 펀드매니저들. 모두 김영호를 본다.
김영호 : ...(엄지손가락 밑으로 처박는 시늉)
펀드매니저 : 우리도 사야 되는 거 아닙니까.
김영호 :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대잖아. 하 부장, 이번에 쓴 맛 좀 볼 거야. 난 판다. 난 팔 거야.
손 흔들며 가는 김영호. 불안해서 속삭이는 펀드 매니저들.
#. 헬스클럽의 수영장 안
접영으로 헤엄치며 턴하는 동원. 뛰어오르는 물. 헤엄쳐 간다.
현필이 들어온다.
반대편에서 턴해서 자유형으로 바꿔 수영 해 오는 동원. 끝까지 와서 현필을 바라본다.
심각한 표정의 현필.
동원 : ...(순간 긴장하는 동원)
현필 : ...(씩 웃더니) 뒤집혔습니다. 오후 장에서... 오전의 폭락을 다 만회하고 삼십 포인트 올랐습니다.
동원 : (남의 일처럼) 그래?
현필 : 하 부장님은 정말 신의 손입니다.
몸을 뒤로 솟구쳐 물 속에 던지는 동원. 배영으로 힘차게 헤엄쳐 간다.
#. 어느 카페 (밤)
들어서는 동원.
창가에 앉아있는 다애. 앞에 켜진 촛불을 손가락 끝으로 흔들어보고 있다.
동원 : (앉으며) 웬일로 저녁에 전활 다했어.
다애 : 나는 인생이 불꽃같은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동원 : 그 나이에 인생은 무슨.
다애 : 사는 건, 맨날 맨날 그저 그렇고. 괴롭고 불행한 일이 연속되다가 어쩌다 한번 좋은 일이 생겨서 이런 게 행복이구나 하구...
동원 : 와인 한 병 시킬까.
손가락 튕겨서 웨이터 부른다. 웨이터가 오려고 하자,
동원 : 와인 리스트 줘봐.
웨이터 그대로 간다.
다애 : 우리 그만 만나요.
동원 : (즉각) 뭐?
다애 : 이거요.
옆자리에 놓아뒀던 봉투를 동원 앞에 내민다.
봉투 안을 조금 열어 들여다보는 동원.
동원 : 이게 뭐야.
봉투를 거꾸로 해서 턴다. 식탁에 떨어지는 아파트 열쇠와 자동차 열쇠.
동원 : 어떡하자구.
다애, 손가락으로 열쇠를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동원 : 좋아하는 사람 생겼나.
다애 : 아뇨.
동원 : 내가 뭐 잘못한 거 있나?
다애 : 아뇨.
동원 : 나한테 싫증났어?
다애 : 아뇨.
동원 : 그런데 왜 그만 만나자는 거야.
다애 : 설명하기 싫은데.
동원 : 일년만. 일년만 더. 그 후에 놔줄게.
웨이터가 와인 리스트 가지고 온다.
동원 : 샤토 마고 1990년산 줘.
웨이터 그대로 돌아간다.
동원 : (식탁에 두 팔 올려놓고 다애에게 얼굴 바싹 디밀고) 지난 삼년간 내 인생을 버텨준 건 너야. 덕분에 몇 천억을 내 맘대로
굴리는 펀드매니저가 됐고, 니 자유분방한 성격과 몸짓. 아니, 젊고 싱싱한 니 육체 덕분이었다고 해도 좋아.
조깅을 한다는 핑계로 니 집으로 달려가 나눴던 새벽의 정사. 그 덕분에 난 활기에 차서 직장으로 달려갔고
펀드매니저로서의 냉정함과 대범함. 때로는 동료들의 등을 찌르는 배반을 서슴없이 행할 수가 있었던 거야.
다애 : (팔짱끼고 재밌다는 듯 듣고 있다) ...
동원 : 내가 처음에 널 만났을 때 말했지. 끝내는 건 내가 결정한다구.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니가 아냐, 나야. 끝내는 건.
다애 : 전세 계약서와 자동차 리스 계약서는 침대 위에 놔뒀어요.
동원 : 휴우. (한숨 내쉬고) 짐은 벌써 다 옮겼다?
다애 : 그냥 이대로 헤어졌으면 좋겠는데, 또 부딪히게 되면 설명은 해줄게요. 우리가 왜...
동원 : (버럭) 누가 그 따위 설명을 듣고 싶대.
사람들이 쳐다본다.
의자에 등을 기대는 동원. 다애를 바라본다. 생글생글 웃고 있는 다애.
동원 : 오늘은 그만 하자. 먼저 일어나.
다애, 일어난다. 동원, 차 열쇠를 집어 흔든다.
동원 : 이래서 차를 갖고 오지 말라고 했나?
다애 : (다시 앉으며 바싹) 한 때는 아저씨 이런 성격이 참 좋았어. 군더더기 없는 감정처리. 스마트한 매너.
가끔은 상스럽기도 한 흡입력. 뭐 박력이라고 해두죠. 아무튼 덕분에 죄의식 안 느끼고 아저씰 만날 수 있었다구요.
동원 : 아저씨?
다애 : 헤어질 때두 쌈빡할 줄 알았는데 점점 치사해 질려구 그러네.
일어나 가는 다애. 와인을 가져오던 웨이터 멈칫한다.
밖으로 나가버리는 다애. 웨이터, 동원 본다.
동원 : ...
식탁에 내려놓으라고 손짓한다.
#. 카페 앞 (밤)
외제 승용차를 갖다 놓고 내리는 파킹맨.
동원 : ...
자동차를 바라본다.
#. 다애의 빌라 앞 (밤)
빌라의 불 꺼진 방. 다애의 차 안에서 바라보고 있는 동원.
#. 동. 거실 (밤)
불도 안 키고 집안을 바라보는 동원. 가구만 남고 텅 빈.
침실을 힐끔 본다. 침대 위의 문서들. 치미는 분노를 꾹 집어 삼키는데.
#. 동. 거실 (새벽) (회상)
팝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다애가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며 음악에 맞춰 요란한 몸짓으로 춤을 추고 있다.
소파에 길게 늘어져 있는 동원. 리모콘으로 음악을 끈다.
요란한 헤어드라이기 소리. 드라이기를 들여다보더니 쫑긋하며 드라이기를 끄는 다애.
다애 : 기분이 안 좋은가 봐요. 샤워라도 하지 그래요. 땀투성인데.
동원 : 어제 그저께 엊그저께 어딜 갔었어.
다애 : 아참, 안되지. 조깅 나갔던 남편이 샤워를 하고 집에 들어오면.
동원 : 뭐 질투라도 하는 거야? 어울리지 않게.
다애 : 어울리지 않는 게 누군지 모르겠네.
동원 : 그 약속하나 못 지켜. 도대체 우리관계에서 불편한 게 뭐냐. 아침잠을 설치는 거 말고.
그 밖엔 뭐든지 니맘대로 하고 살잖아. 또 한번 내 옆에서 와이프 얘길 꺼내면 그 땐 끝장인줄 알어.
조깅복 상의를 낚아채듯 집어 들고 밖으로 나가버리는 동원.
#. 동. 현관 앞 (새벽) (회상)
나와서 문 닫는 동원. 안에서 뭔가 문에 부딪쳐 깨지는 소리.
동원 : ...
씩 웃고 다시 현관문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 동. 거실 (새벽) (회상)
문 열고 들어오는 동원의 목에 매달리는 다애. 미친 듯이 키스를 퍼 붓는다.
#. 동. 거실 (밤) (현실)
텅 빈, 유령 같은 가구들.
동원 : ...
그 얼굴 위에,
다애 : (소리) 못가, 오늘은 안 보내줄 거야.
동원의 시선에, 동원을 끌어안고 소파에 쓰러지는 다애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라진다.
#. 동. 빌라 앞 (밤)
나오는 동원. 다애의 차를 바라본다.
동원 : (소리) 삼억? 삼억이면 되겠지. 그럼 몇 달 동안은 잠잠해 지겠지.
주머니에서 차키 꺼내 차 쪽으로 대는 동원.
동원 : (소리) 한 오억 쏴 버려? (한숨 푹 쉬고) 좋아, 업그레이드를 해보고 싶다 그거지,
차키를 누른다. 차문이 덜컹 잠기고 비상등이 깜박인다.
#. 청담동의 뒷골목
다애가 덜렁거리며 온다.
노천카페에 앉아 차를 마시던 젊은이들이 아는 척을 한다. 손만 흔들어 주고 부지런히 가는 다애.
다애 : (소리) 질투라니? 누가 누굴 질투한다는 거야. 질투란 내가 갖고 싶은 걸 남이 가지고 있을 때 느끼는 감정 아닌가.
#. 청담동의 명품거리
쇼윈도를 들여다보고 있는 다애.
다애 : (소리) 나보다 어린년이 나보다 비싼 빽을 갖고 있으면 난 질투를 느낀다.
난 작년에 유행했던 구두를 신고 있는데 방금 이태리서 건너온 구두를 신고 있는 년을 보면 난 질투를 느낀다.
#. 어느 시계점 안
고급 시계가 진열 돼 있다. 그 중 하나를 골라 손목에 차보는 다애.
다애 : (소리) 나는 매일 같은 시계를 하고 다니는데 일주일 내내 다른 시계를 차고 다니는 년을 보면 미칠 것 같은 질투를 느낀다.
그래, 뭐 그런 식이지.
#. 어느 카페
요란하게 장식한 쥬스를 스트로로 빨아먹고 있는 다애.
옆자리 청년이 다애를 힐끔거린다.
더욱 요란한 몸짓을 하는 다애. 그러다 힐끔 청년을 본다.
청년이 시선이 막 문을 열고 들어서는 여자에게 꽂혀있다.
다애의 눈에서 불이 번쩍한다. 일어나 청년 쪽으로 가는 다애.
탁자 밖으로 내밀고 있는 청년의 발을 하이힐 끝으로 찍어 누른다.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나는 청년.
모른 척 카운터로 가는 다애. 계산을 하고 힐끔 돌아본다.
발을 붙잡고 낑낑대고 있는 청년.
다애 : (소리) 그래, 가끔 나보다 이쁜년을 보면 질툴 느끼긴 하지.
#. 다애의 액세서리 가게 안
힘없이 문을 밀치고 들어오는 다애.
명자 : 정말 가겔 팔 거니.
액세서리를 만들고 있던 명자가 비명처럼 내지른다. 대꾸 없이 털썩 주저앉는 다애.
명자 : 매니저 언니들이랑 코디하는 애들이 도와준대. 배우들도 본격적으로 끌고 오고.
다애 : 여기 전세금 빼서 할 일이 있다고 했잖아.
명자 : 시집 갈 거냐, 너.
다애 : (보다가) 모르지, 그럴지도.
명자 : (어리광부리듯) 야, 다애야. 같이 좀 먹고살자. 응, 다애야.
다애 : 가게 계속 하고 싶으면 이거 일억 쳐서 오천만 미리 주고 나머진 내년에 갚어.
명자 : 나 돈 없는 거 알잖아.
다애 : 구해와.
명자 : 어디서,
다애 : 그걸 내가 알어. 몸이라두 팔던지.
명자 : 누가 나 같은 걸 돈 주고 사!
다애 : 그럼 살부터 빼든지.
명자 : 한 끼만 굶어두 눈이 빙빙 도는데 어떻게 살을 빼.
다애 : 그럼 죽던지.
명자 : 그렇지 않아두 하루에 몇 번씩 죽고 싶은 생각뿐야.
다애 : 그나저나 내 짐 좀 니 집으로 옮길게.
명자 : 안돼. 나 혼자 눕기도 빠듯한데,
다애 : 짐만 옮긴다구.
명자 : 잠은 어디서 자고,
다애 : 밀라노나 파리.
명자 : 뭐?
다애 : 가서 돈 실컷 쓰다 올 거야.
명자 : 밀라노로 쇼핑 간다 그거야?
다애 : 봐봐.
핸드백에서 쇼핑할 목록이 적힌 종이를 꺼내 명자에게 내미는 다애. 명자 재빨리 훑어보더니 비명을 지른다.
명자 : 기집애, 좋겠다. 이걸 다 산다구?
좋아서 펄쩍펄쩍 뛰는 명자.
#. 청담동의 거리
핸드폰 리시버를 귀에 꽂고 열심히 종알거리면서 손에는 커다란 아이스크림 통을 들고
아이스크림을 스푼으로 사정없이 퍼서 입에 처넣으며 마치 무대위의 모델처럼 깡충거리며 걸어오고 있는 다애.
다애 : (소리) 계획보다 일년 빨리 독립하기로 했다. 스물다섯을 넘기고 사랑에 빠질 수는 없으니까.
#. 어느 쇼윈도 앞
허벅지 위까지 올라간 가죽부츠를 신은 마네킹이 자켓 형으로 만든 밍크를 입고 한껏 몸을 비틀고 있다.
다애 : ...
아이스크림을 입으로 처넣으려다 입을 벌리고 넋이 나가서 마네킹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다 고개를 저으며 정신을 차리듯 아이스크림을 입에 처넣는다.
다애 : (소리) 아니지. 스물다섯 살 난 여자가 밍크를 걸치고 사랑을 찾아 나설 수는 없지.
#. 어느 거리
다애가 온다. 길가 쓰레기통에 아이스크림 통을 처넣고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벌리고 활짝 웃어 보인다.
다애 : (소리) 잘 있어. 발렌티노도 마이클 코어도... 프랭크뮐러도 내 루이비통 핸드백도...
#. 오타루의 언덕
오타루의 시내와 이어진 부두. 그리고 바다가 한 눈에 보인다.
#. 오타루의 어느 호텔 앞
혜진이 나온다. 호텔 종업원이 따라 나와 인사를 해댄다.
혜진도 마주 절하다 관광용 팜플렛을 꺼내 종업원에게 물어 본다.
열심히 설명하는 종업원. 한곳을 가리키며 그리로 가라는 시늉.
#. 오타루의 옛 거리
혜진이 흐느적거리듯 온다.
혜진 : (소리) 남편과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낯선 일본의 여관방에 누워 밤새도록 그 생각과 씨름했다.
이건 남편과 나, 그리고 그 사이에 끼어든 어떤 젊은 여자의 문제가 아니다. 순전히 내 문제다.
인생의 목표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런 목표가 있는지도 모르고 살아온 내가 갑자기 인생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는데,
물론 그런 계기를 만들어 준 것은 남편이었지만. 그래서 여행을 떠난 것이다.
어느 갈림길에서 멈추는 혜진. 두 갈래로 갈라진 길. 그 길을 차례차례 바라보는 혜진.
혜진 : (소리) 하지만 죽는 것이 해결책은 아니잖아.
갈라진 길목에서 망연히 서있는 혜진.
#. 오타루의 어느 절 마당
바람이 불어 허공에 매달린 종이 저절로 조금 울린다. 그 안 불당에 모셔진 불상.
혜진 : ...
종 밑에 늘어져있는 줄을 잡아 가만히 종을 쳐보는 혜진. 합장하고 허리를 굽힌다.
준수 : (소리) 뭐라고 비셨습니까.
혜진 : ...
흠칫 소리 나는 쪽을 보는 혜진.
준수 : 죽으면 극락세계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비셨습니까.
혜진의 대답도 듣지 않고 불상을 향해 두 손을 쳐들어 손뼉을 두 번 치고 두 손 모아 합장하는 준수.
한번 두 번 허리 굽혀 빌면서.
준수 : 그 계곡 위까지 올라가려면 그런 옷차림으론 안 되죠. 웬만한 등산장비는 갖춰야 올라갈 수 있는 데죠.
그래서 생각을 해봤습니다. 아마도 죽으러 가나보다... (허리 굽힌 채 고개 돌려 혜진을 보며) 틀렸습니까.
#. 오타루의 어느 우동가게 안
젓가락으로 우동가락을 젖고 있는 혜진. 앞을 본다. 열심히 우동을 먹고 있는 준수.
숨까지 멈춘 채 생각하다 결심하고 입을 여는 혜진.
혜진 :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한 거죠?
준수 : ...
먹다가 혜진을 보는 준수.
혜진 : 난 그저... (더듬거리듯) 러브레터에 나오는 그 설산이 보고 싶어서...
준수 : (막듯이) 잊어버리세요.
다시 먹는다. 기막혀 보는 혜진.
준수 : (먹으며) 그냥 해 본 소리에요. 그런 옷차림으로 산 위에 올라가려고 하는 게 이상해서요.
혜진 : 어째서 내가 그렇게 보였느냐고 묻고 있는 거예요.
파르르 떠는 혜진.
준수 : ...
대답 대신 속주머니에서 만 엔짜리 돈다발을 세 개 꺼내 식탁 위에 놓는 준수.
준수 : 내 전 재산이에요.
혜진 : ...(기막히다는 듯 보는데)
준수 : 죽기 전에 이걸 다 써버릴 거예요. 마지막 동전 한 닢까지 다.
혜진 : ...
기가 막히다는 듯 웃는 혜진.
준수 : (진지하게 바싹 얼굴을 디밀며) 죽으려는 사람이 죽을 장소를 찾아 헤매고 다니는 건 이미 죽을 생각이 없다는 뜻이에요.
살고 싶으니까 죽을 장소를 찾아다니는 거 아닌가요.
혜진 : ...
파르르 떨더니 수치심에 고개를 돌려버리는 혜진.
준수 : (다시 먹으며) 그렇다고 말릴 생각은 없으니까 염려마세요.
혜진 : (화나서 비웃음) 친구가 등반사고로 죽었다구요? 봄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 친구의 시신을 찾아 나섰다구요?
준수 : ...(바라보는)
혜진 : 공항에서 우연히 차를 얻어 탔는데 목적지가 같았다니 우연치곤 정말 재밌는 우연이네.
차라리 그 돈으로 날 사겠다고 하는 게 귀엽겠다.
가방 챙겨 일어나는 혜진.
준수 : (낮고 위협적으로) 그냥 앉아있어요.
혜진 : (기가 막혀 본다)
준수 : 무슨 이유로 오타루의 설산 위에 올라가 죽으려고 하는진 모르겠지만 난 그런 걸 이용할 만큼 비열한 인간은 아녜요.
혜진 : (앉으며) 도대체 날 언제부터 본거야.
준수 : ...
혜진 : 날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믿고 있잖아.
준수 : ...
혜진을 바라보는 준수의 입가에 서글픈 미소가 떠오른다.
#. 동. 우동가게 앞
뛰쳐나오는 혜진. 눈길에 미끄러지면서 도망치듯 가는 혜진.
#. 동. 우동가게 앞
식탁 위의 돈 다발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는 준수.
#. 어느 호텔의 로비
혜진이 여행용 가방을 끌고 프론트 데스크로 간다. 호텔 종업원이 반갑게 맞는다.
카운터 위에 방 열쇠를 놓는 혜진.
혜진 : (일본어) 체크 아웃 좀 부탁합니다.
종업원 : 하이. (컴퓨터 두드리더니, 일본어) 삼 일치 방값을 미리 지불하셨는데요.
혜진 : (일본어) 미안하지만 남은 방값은 방값을 낸 분에게 돌려주시겠습니까. 부탁합니다.
재빨리 인사하고 돌아서는 혜진. 다시 돌아선다.
혜진 : (일본서)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호텔은 없을까요? 사실은 북해도의 겨울 바다가 보고 싶어서왔거든요.
종업원 : 하이. (생각하더니) 아오야마에 있는 호텔이라면 바다가 잘 보일 겁니다. 전활 걸어드릴까요?
#. 동. 호텔 앞
차의 트렁크를 여는 혜진. 가방을 싣고 트렁크 문을 닫는다.
운전석으로 가서 차문을 열려다 길 건너를 바라보는 혜진. 준수가 서 있다. 벌 받는 아이처럼 구부정하게.
혜진 : ...
준수 : ...
어깨를 움츠리며 익살스럽게 웃어 보이는 준수.
얼른 고개를 돌리며 차에 타는 혜진. 차문 꽝 닫는다.
#. 아오야마의 터널 입구
혜진의 차가 와서 터널 안으로 들어간다.
#. 아오야마의 터널 앞
혜진의 차가 나온다. 구부정한 길을 따라 달린다. 오른쪽으로 바다와 선창가의 어선들이 보인다.
#. 아오야마의 호텔 앞
차의 트렁크를 열고 가방을 내리는 혜진. 종업원이 달려와 가방을 들어준다.
혜진 : ...
현관으로 가려다 돌아본다. 북해도의 바다가 서서히 다가온다.
#. 동. 방안
옷을 그대로 입은 채 침대 모서리에 걸터 앉아있는 혜진.
혜진 : (소리) 죽으러 왔다면서 왜 화를 내는 거야. 죽으러 왔다면서.
#. 아오야마 등대의 전망대
혜진이 서 있다. 뒤쪽에 언덕 위에 우뚝 서있는 호텔의 모습이 보인다.
혜진 : ...
혜진의 시선을 따라 펼쳐진 바다. 차가운 북해도의 겨울 바다가 흰 이를 드러내며 해안을 치고 있다.
그 해안을 따라가면 옛날 등대와 낡은 건물이 한 채.
혜진 : (소리) 정말 죽을 거라면 눈 속이든 바다 속이든 상관없잖아. 살 생각이 아니라면...
등대 앞 작은 섬을 휘감듯 넘실거리는 성난 파도.
#. 아오야마의 등대
혜진이 온다. 등대 앞에서 바라보는 바다. 바위를 때리는 파도가 혜진을 삼킬 듯이 튀어 오른다.
물끄러미 그 파도를 바라보고 있는 혜진.
#. 동경의 거주옥 안 (밤) (회상)
혜진 : 하이.
옆 의자에 놓아둔 코트와 핸드백을 얼른 집어 무릎으로 옮기는 혜진. 비집고 앉는 동원.
동원 : (주인에게 일본어) 사케 한잔.
추운지 몸을 떤다.
혜진 옆의 성숙이 몸을 길게 빼서 동원에게 던진다.
성숙 : 한국분이시죠?
동원 : 네? 어떻게 아셨죠?
성숙 : 이마에 써있는데요.
동원 : (얼른 이마를 손바닥으로 짚으며) 아이쿠, 아침에 지우고 나온 다는 걸 깜빡 잊었네.
성숙 : (재밌어 웃으며) 그 자리에 앉으려면 얠 책임져야 하는데.
동원 : 네?
몸을 빼서 성숙 보더니 혜진 본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혜진.
성숙 : 그 자린 혹시 누가 걸릴까하고 얘가 맡아놓은 자리거든요.
혜진 : (펄쩍 뛰며) 얘가.
동원 : 그러죠 뭐,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 아오야마의 등대 (현실)
혜진 : ...
바다를 내려다본다. 바위를 때리는 파도의 흰 포말.
혜진 : ...
한 발 바다로 다가선다. 거센 파도가 바위를 때린다. 튀어 오르는 파도.
흠칫 뒤로 물러서는 혜진.
혜진 : (소리) 정말 뛰어내릴 용기가 있는 거야? 그럴 용기나 있으면서 여기까지 온 거냐구...
얼마나 걸릴까? 일분, 아니 십초나 이십 초? 아니 그보다 더 짧은 순간이겠지. 저 바닥까지 도착하는 데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는 혜진. 웃음처럼 울음이 터진다. 자꾸만 웃음처럼 울면서 등대에 등을 대고 주저앉는 혜진.
#. 오타루 댐 위의 산길
눈 쌓인 길을 준수가 온다. 발을 잘못 디디면 눈 속에 허리까지 빠진다.
숨을 가다듬고 눈 밖으로 발을 디디며 다시 가는 준수. 그러다 눈 속으로 사라지는 준수.
두 손을 밖으로 뻗혀 눈을 헤집고 밖으로 기어 나오는 준수. 지쳤는지 눈 위에 벌렁 누워버린다.
가쁜 숨 내쉬며 하늘을 바라보는 준수.
준수 : ... (문득 미소 짓더니, 마음의 소리) 성구는 죽은 것이 아니다.
사지를 새처럼 활짝 펴고 등을 밑으로 하고 웃으며 계곡을 향해 떨어져 가고 있는 성구의 모습 위에.
준수 : (소리) 새처럼 날아간 것이다. 깊은 계곡을 향해... 새처럼.
눈 위에 누워 소리 없이 웃고 또 웃는 준수.
<1회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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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말 너무 잘받아 갑니다 ㅠ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