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은숙 스타일: 아, 이 소리는 뭐지?
‘더 클래식’ 5회의 주인공은 작곡가 진은숙(63)입니다. 음악 팬들의 진심 어린 충고가 벌써 들리는 듯합니다.
‘뭐, 현대음악?’ ‘아름다운 부분은 하나도 없으면서 끽끽거리는 그 작품들?’ ‘다시 연주자를 다뤄줘요!’
하지만 저는 용기 있게 진은숙을 소개해 드립니다. 그의 음악에는 황홀한 순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 지금 이 소리 뭐지?’ ‘왜 한 번도 못 들어본 음향이 나오지?’
편견을 버리고 지금 들려오는 소리를 그대로 느끼시면 됩니다. 찬찬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진은숙 작곡가가 대중 강연에서 한 말부터 소개해 드립니다.
“서양, 특히 독일어권에서 1950년대부터 해왔던 ‘현대음악’은 실패했다고 생각합니다.”(2002년)
우리가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그 어려운 음악의 실패를 인정하고 다시 시작한 음악입니다. 새로운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지금부터 살펴보시지요.
작곡가 진은숙의 작품 수는 많지 않지만 세계 곳곳에서 연주되고 있다. 중앙포토
오늘은 퀴즈로 시작해 보겠습니다. 다음 중 작곡가 진은숙에 관한 설명이 아닌 것을 골라 보세요.
① 시사평론가 진중권의 누나다.
② 전 세계에서 이틀에 한 번꼴로 작품이 연주된다.
③ 2024년 1월 상금 약 3억6000만원의 작곡상을 받았다.
④ 베를린필이 진은숙만의 작품을 모아 앨범을 냈다.
⑤ 한국의 정서로 이름을 알린 세계적 작곡가다.
한때는 진은숙을 설명할 때면 늘 동생인 진중권(61) 전 동양대 교수의 이름이 거론됐죠. 그들은 경기도 파주의 개척교회 목사였던 아버지 밑에서 함께 자랐습니다. 2번도 참입니다. 음악 출판사(부시 앤 호크스)에 따르면 2023년 그의 작품은 전 세계에서 151회, 약 2.4일마다 한 번씩 연주됐습니다. 상금 25만 유로의 에른스트 폰 지멘스상, 베를린필의 음반 2장 발매도 사실입니다. 베를린필이 현대음악 작곡가의 이름으로 음반을 낸 것은 역사상 두 번째라고 합니다.
5번은 마치 맞는 내용 같지만 아닙니다. 진은숙은 ‘자, 변방의 나라에서 온 여성 작곡가의 작품을 들어 보자’와 같은 뻔한 기대를 무참히 무너뜨리면서 명성을 쌓아왔습니다. 1985년 스물 네 살부터 독일에 살고 있는 그는 한국적·동양적인 음악에 매달리지 않습니다. 스승의 스승인 윤이상(1917~95) 작곡가와는 달리, 한국에서도 한국 음악(국악)을 들으며 성장하지 않았죠. 진은숙은 한국·동양에 대한 상투적 이미지에 거부감을 가집니다.
그럼 진은숙의 작품은 왜 인기가 많을까요. 어떤 점이 그 음악의 매력이며, 왜 베를린·뉴욕·LA·런던 같은 곳에서 그에게 새 작품을 위촉하고, 자꾸만 연주하는 걸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처음 들어보는 소리’ 때문입니다. 진은숙은 독자적 판타지를 위해 수없이 다양한 소리를 만들어냅니다. 피아노·바이올린 같은 악기에서 새로운 소리가 납니다. 또 신용카드로 피아노를 긁고, 타악기 주자에게 부엌 쓰레기통을 쥐어줍니다. 이제 세상에 없었던 진은숙 사운드를 탐험해 보겠습니다.
※이번 회는 손민경 하버드대 음악학 박사 후 연구원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환상적 사운드 조각들
오케스트라와 바이올린이 함께하는 협주곡입니다. 시작 부분에서 ‘어, 이상하다?’ 하면서 어디서 나는지 찾게 되는 소리가 있을 겁니다. 고요히 퍼지는 이 소리를 한번 들어 보세요. 마치 요가 수업에서 들려오는 사운드 같은, 명상적이고 정적인 소리입니다. 도대체 어떤 악기가 이런 웅얼대는 소리를 내는 건지 오케스트라 내부를 두리번거리게 됩니다.
〈처음부터〉
영상에서 들리는 스틸 드럼 사운드의 악보 표기.
가운데가 움푹 패어 있어 소리가 은은히 울리는 스틸 드럼의 소리입니다. 오랫동안 진은숙을 연구한 이희경 음악학자는 “현대음악에서도 흔치 않은 스틸 드럼의 사용에 주목하라”고 했습니다. 진은숙이 인도네시아 악기인 가믈란의 기억, 즉 “귀가 아닌 배로 들리는 듯했던 경험”에서 영감을 얻었던 흔적입니다. 그러나 그 악기에 대한 모방은 아닙니다. 이전의 비슷한 사례를 찾을 수 없는, 새로운 음향을 스틸 드럼이 선사합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는 이런 타악기가 무려 23종류 나옵니다. 글로켄슈필, 비브라폰, 실로폰, 마림바폰, 슈타인슈필, 카우벨…. 이희경은 이렇게 새로운 타악기가 많이 쓰이는 데 대해 “상투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음색의 가능성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합니다. 붕 뜬 듯 시작한 그 음향은 뒤에서 수많은 변화를 겪으며 상상할 수 없었던 색깔을 보여줍니다.
‘무지개’ 또는 ‘프리즘’에 비유되고, 음색이 폭발하는 진은숙의 작품에서 타악기가 중요합니다.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2007년)에는 타악기 40여 종이 필요합니다. ‘부엌 쓰레기통’과 ‘사이렌’ '유리 음료수 병'도 타악기 목록에 있습니다. 앨리스가 위협적인 공작 부인의 집에 들어간 장면을 볼까요. 공작 부인이 아이를 꼬집고 때리는 기괴한 노래에서 쓰레기통 두드리는 소리가 짧고 강렬하게 나옵니다.
그런데 더욱 신기한 것은 전통적인 악기로도 생전 처음 듣는 소리들을 만들어낸다는 겁니다. 첼로 협주곡 3악장의 시작 부분을 들어 보세요.
〈처음부터〉
이건 새로운 악기가 아니고요. 더블베이스 10대, 첼로 12대, 플루트, 클라리넷의 소리입니다. 화음의 진행마저 무척 단순합니다. 그런데 미세한 떨림과 타이밍으로 새로운 소리가 됩니다. 음악학자 고르돈 캄페는 “이전에는 들어보지 못한 무중력 음향”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또 “새로운 가상의 악기가 만들어졌다”고 했는데, 이 부분에 딱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피아노에서도 새로운 소리를 상상하고 발견합니다. 거리의 노래인 ‘구갈론’(2011년) 2악장의 제목은 ‘대머리 여가수의 슬픈 노래’인데요, 전체 악기들이 처량한 노파처럼 노래하는 동안 피아노 줄을 신용카드로 좍좍 긁어야 합니다. 신용 카드로 긁어야 나오는 딱 그 소리는 절묘하게 무심한 음향입니다.
〈4분10초부터〉
또 있습니다. 음악학자 손민경이 “파핑 캔디가 터지는 것 같다”고 한 이런 순간은 어떠신가요?
〈15분8초부터〉
진은숙의 소리는 순수하게 독자적인 판타지에서 나옵니다. 작곡 과정을 보면 더 이해가 됩니다. 피아노를 사용하지 않고, 그러니까 소리를 미리 현실화하지 않고 머릿속에서 끝까지 붙잡으면서 곡을 씁니다. 아직까지 손으로 악보를 하나하나 그리는 드문 작곡가이고요. 기계나 기구를 통하는 대신 꿈과 상상에 의존하는 거죠. 그는 “내 음악은 내 꿈의 반영이다. 나는 모든 꿈에서 보는 거대한 빛과 놀라운 색채의 환상을 사운드 조각으로 만들려고 노력한다”고 했습니다.
동양 작곡가라고?
진은숙이 아시아의 오래된 악기인 ‘생황’을 꺼내 들었을 때 모두가 “드디어 동양이다!”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하지만 그의 생황 협주곡(2009년)은 동양적 작품이 아닙니다. 손민경은 “이 작품은 악기의 맥락을 부인한다”고 했습니다. 동양적인 음계, 장식음을 쓰지 않고, 소리의 가능성이란 측면에서 이 악기를 본다는 뜻입니다. 혀를 사용해 윙윙거리는 소리를 내고, 연주자의 목·입술·혀를 사용해 다양한 소음을 만드는 식으로요. 제목마저 ‘동양적이지 않다!’고 선언하듯 이집트의 신화에서 가져온 ‘슈(Šu)’라고 붙였죠.
그래서 이 작품은 서양이 바라보는 동양의 신비가 담긴 음악이 아닙니다. 바람의 소리, 또 인간의 근원인 ‘숨’이 보이는 작품입니다. 작곡가가 “숨소리 소음(breath noise)을 들리게 하라”고 지시한 부분을 들어 보세요.
〈8분35초부터〉
'숨소리 소음으로 점차 변하라'고 된 지시어. 영상에서 연주되는 부분이다.
동양적이라기보다는, 생황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작품이죠. 독일의 작곡가가 생황을 ‘동양적’이라는 기존의 이미지에 맞게 쓴 아래의 음악과 비교해 보시면 어떨까요.
이렇게 진은숙은 음악의 재료들이 지금까지 사용됐던 관습을 벗겨나가면서 본인만의 판타지와 사유를 드러냅니다. 손민경은 “이중협주곡(2002년)에서도 서구와 비서구, 일상의 모든 타악기를 모아 새로운 사운드를 만든다. 모든 문화적 출처가 혼합되면서 오히려 출처가 모호해진다”고 설명합니다. 음은 그저 음이 되고, 소리가 되는 거죠. “고향을 뒤로하고, 자신의 길을 계속 걸어간다”는 음악학자 폴 그리피스의 진은숙 묘사도 그럴듯하죠?
정체성의 덫 벗어나기
진은숙의 세계는 어떻게 만들어진 걸까요? 먼저 고통스러웠던 시절을 알아야 합니다. 독일에 건너갔던 진은숙은 슬럼프를 겪게 되는데요, 스승인 죄르지 리게티에게 완전히 깨지고 나서입니다. 리게티는 “한국 출신으로 독일에서는 살아보지도 않았던 자네가 어째서 벌써 이곳의 상투적인 현대음악 어법으로 곡을 쓰는 건가!”라며 역정을 냈다고 합니다.
당시 독일 음악계를 열심히 쫓아가려던 진은숙은 3년 동안 아무 음악도 쓰지 못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한국적이지도 않고 유럽의 실험적 현대음악도 아닌 자신만의 어법을 찾죠. 스스로 “정체성의 덫을 거부한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니 진은숙 작품의 출처는 작곡가 자신 말고는 없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사운드의 향연에 몸을 맡기고, 독자적 환상을 경험해 보면 됩니다.
마지막으로 베토벤 250주년을 맞아 그의 작품을 이리저리 비틀어 만든 곡(‘수비토 콘 포르자’, 2020년)을 소개합니다. 이 작품에서 특유의 위트까지 만나면 진은숙 음악의 즐거움으로 가는 입구에 들어서신 겁니다. 이 작품 처음의 베토벤 ‘코리올란’ 서곡 화음이 진은숙 방식으로 ‘팡’ 부서지는 사운드가 묘한 쾌감을 줍니다. 2023년에 55회가 연주된, 진은숙의 최신 히트작이랍니다.
정근영 디자이너
"삼수에 미달" 그를 지탱한 꿈의 힘
“내 인생 살아온 걸 보면 살얼음판에서 너무 잘 풀린, 진짜 너무 운 좋게 잘 풀린 케이스잖아요. 내가 돈이 있어, 누가 날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 서울대 두 번 떨어지고 진짜 기적같이 세 번째 해에 미달로 들어간 거니까.”
음악 비평지 『오늘의 작곡가 오늘의 작품』23호에서 진은숙이 한 말이다. 음악학자 이희경과의 대담이었다. 세 살쯤, 살던 초가집에 들어온 까만 피아노를 보고부터 혼자서 음악을 사랑하게 된 진은숙이었다. 대학교 입학시험에 무엇이 나오는지도 몰랐다가 삼수 끝에 입학했다. 독일에서도 무명 기간이 길었다. “13~14년 동안 내 곡을 거의 연주해 주지 않더라”고 했다.
그런데 그는 이 인터뷰에서 ‘꿈’을 언급한다. “그런데 내 인생이 그렇게 풀릴 거라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 꿈들이 나한테 그런 확신을 안겨줬어요.” 진은숙이 어떤 일에도 망가지지 않고 작곡을 계속한 힘이 ‘꿈’이라는 뜻이다. ‘꿈’과 ‘환상’ 은 진은숙 음악의 키워드다.
진은숙은 지금도 꿈에 관한 오페라를 쓰고 있다. 2025년 5월 초연 예정이다.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인 볼프강 파울리(1900~58)에 관한 이야기를 오페라 스토리로 직접 만든다. 파울리가 칼 구스타프 융과 나눴던 꿈에 대한 해석의 편지가 오페라의 단초다. 우주의 비밀, 과학의 궁극에 다가가도록 과학자를 끌어당기는 꿈의 힘에 대해 그려낸다.
김호정의 더 클래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