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교실엔 메밀꽃 향이 가득했다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이 고교 후배와 인터뷰한 내용인데, 공감도 되고 아직도 배울 점이 많이 드러나 있어
우리 카페 회원들과 함께 공유하고자 올립니다. 참고로 제 고교 동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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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증현 님은 2009년 2월부터 2년 4개월간 기획재정부 장관을 지냈다. 2010년엔 잠깐 국무총리권한대행도 했다.
기재부 장관을 그만둔 후 개인연구소인 윤경제연구소를 차려 소장으로 있는 그를 여의도 사무실에서 만났다.
+서울고
시절 하면 떠오르시는 추억이 무엇입니까?
“문학에
조예가 깊은 국어 선생님께서 계셨습니다. 수업 시간에 많은 문학 이야기를 들려주셨는데 혀는 좀 짧으셨지만 말을 아주 재미있게
하시는 분이었어요. 고골리, 체홉 등이 쓴 러시아 단편 등
많은 소설을 선생님을 통해 접했죠. 특히 이효석의 단편 ‘메밀꽃 필 무렵’은 이분이 하도 많이 인용해 전문을 거의 외우다시피 했어요. 선생님은
이 작품이 노벨문학상을 받을 만한 걸작이라고 하셨죠.”
‘메밀꽃
필 무렵’은 한국 단편소설의 백미로 꼽히는 작품이다. 당시
국어시간은 점심시간 직후 식곤증으로 졸음에
겨운 시간이었지만 그는 늘 즐거웠다고 한다. 다른 친구들도 대체로 그런 눈치였다. 어느 날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졸리지 않으냐고 물으셨다. 그가 답했다. “교실에 메밀꽃 향이 가득해
졸리지 않습니다.” 이 답변이
인상적이었는지 선생님은 그를 기특해 했다. 당시 그의 꿈은 영화감독이나 소설가가 되는 것이었다.
+왜
소설가는 ‘가지 않은 길’이 됐습니까?
“고3 때 서울대에 응시했습니다. 1965년 당시 서울대 국어 작문시험에 ‘메밀꽃 필 무렵’이 출제됐어요. 동이와 허생원 등이 떠난 봉평에서 대화까지의
칠십 리 길을 묘사하라는 게 문제였습니다. 서울고 출신들은 쾌재를 불렀죠.
용기백배 했지만 웬걸 글이 잘 안 써졌습니다. 쓰고 나서 읽어 보면
유치했습니다. 아마 이 소설에 대해 단편적으로 알고 있거나 한두 번 읽어봤다면 적당히 쓸 수 있었을지도
몰라요. 눈높이가 너무 높아져 대충 쓸 수가 없었습니다. 썼다
지우기를 여러 번 그날 나의 라이팅 능력에 좌절했습니다.” “소금을 뿌린 듯이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숨이 막힐 듯했다”고 이효석이 묘사한 그 길을 헤매다. 그는 마침내 소설가의 꿈을 접고 말았다고 했다. “나중에 보니 점수가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소설가가 될 자질은 없었어요. 라디오 드라마 대본을 쓰는 추호식 극작가의 아들이 동기였는데
그 친구는 그 시절에도 문체가 좋았어요.”
+고교
시절이 어떤 시기라고 생각하십니까?
“청년으로서
의식을 가꾸고 좋은 벗을 사귈 기회죠. 고교 시절 문화적 격차로 갈등도 겪었습니다. 서울은 대도시지만 왠지 왜소하게 느껴졌어요.”
그는
서울고 재학 시절 일부 상급생과 폭력서클 학생들에게 시달렸다고 했다. 이 때문에 몇 번이나 짐을 싸 다시 고향인 마산으로 내려가려고 했다. 그때마다 “서울로 유학 보낸 부모님을 생각해 청운의 꿈을 접지 말라”고 담임 선생님이 만류했다.
그가
경제 사령탑에 올랐을 땐 세계적인 금융위기로 우리 경제가 큰 타격을 입은 뒤였다. 마이너스 성장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한 그는 취임
열흘 만에 2009년 성장률 전망치를 –3%로 수정, 발표하겠다고 청와대에 보고했다.
7% 성장을 약속한 747 공약으로
집권한 이명박 정부 시절이었다. 청와대가 “국민들에게 정부가
희망을 줘야 한다”며 제동을 걸었다. 논란 끝에 그가 물러서 –2%로 조정됐다.
취임 후 첫 기자회견에서 그는 정부의 성장률 전망치를 3%에서 –2%로 수정한다고 발표했다. 기자들이 청와대와 협의했느냐고 물었다. 그는 “국내외적으로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한국경제가 플러스 성장을 할 수 있다고 보느냐”고 되물었다. “국민의 신뢰를 잃지 않아야 정부가 제대로 일을 하고 국민의 협조도 얻을 수 있습니다.
지금은 정부가 정직하게
사실을 밝혀 모두 허리띠를 졸라맬 때입니다. 마이너스로 성장률 전망치를 수정했지만 마이너스 성장을 하지 않도록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겠습니다.” 2009년 한국경제는 0.3% 성장했고, 이듬해엔
6.2%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 등 외국 언론이 한국 경제가 ‘교과서적 성장’을 했다고 격찬했다.
“부총리
타이틀도 없이 2년 가까이 경제 수장을 하고 나니 몸이 망가졌습니다. 병원의 6개과를 다니다 청와대에 더는 못하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편하고 좋은 자리에 보내주겠다고 극구 만류해
반년 더 하고 물러났죠.”
+평생
공직에 종사하셨습니다. 공직자의 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글로벌
시대 행정부를 세종시로 옮겨 놓았습니다. 행정의 생산성이 하락했을 뿐더러 국가 경쟁력 추락에 한 몫 했어요. 공무원들 개개인의 삶도 피폐해졌어요. 그렇지만 공직자로서 자신이
선택한 공직인 만큼 엄정하게
나라 일을 해야 합니다. 투명성 있게 소신과 책임감을 갖고 일해야 합니다.”
+흔히
공무원은 영혼이 없다고 말합니다. 공직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가능하면
그런 소리를 듣지 말아야죠. 하지만 행정이 정치를 이길 수는 없어요.
테크노크라트는 새로 출범하는
정부에 맞출 수밖에 없어요. 영혼 있는 공무원이 되겠다고 사표를 쓰겠습니까? 공무원은 정부와 색깔을 맞출 필요가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명령에 죽고 살아야 할 직업군인이 ‘영혼 있는 군인’이 되겠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좌우명이
무엇인가요?
“정책은
사람이 만듭니다. 사람을 위해 만들기도 하고요. 마땅히 자기가
만드는 정책이 국민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 고민해야죠. 논어에서 공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하고
소인은 동이불화한다.
경제를 보는 시각 등 생각이 달라도 동료와 화목하고 공감대를 만들어야 합니다.
흐르는 물은 앞을
다투지 않는다(流水不爭先)는 말처럼 사람은 될 만큼 되게
돼 있습니다. 무엇보다 진정성으로 국민을 대해야 합니다. 정직해야
돼요. 그러지 않으면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가 없어요.”
+“서울고는 □이다”에서 (□)를 채워
주시죠. “서울고는 나에게 (깨우침의 요람)이다. 성년에
접어들기 전 중요한 시기 3년을 보낸 곳입니다. 더욱이 운동장이 넓어 기분이 좋았었죠.”
+세컨
라이프는 어떻게 사실 생각인가요?
“앞으로 10년 간 과거 공직생활 하는 동안 쌓은 경험, 얻은 교훈을 후배들에게
전수하려 합니다. 또 각종 기관, 기업, 관공서 등에서 특강을 통해 그 동안 우리 사회에서 받은 혜택을 돌려주려고 해요.
그러고 나서
건강이 허락한다면 자연과 벗해 살면서 인생을 정리할 생각입니다. 이를 위해
시골에 농토를 장만했고 세컨도
하우스도 마련했어요. 주말이면 가는데 나중에 아예 거기로 들어갈 참입니다.”
그는
어디에도 귀속되지 않은 채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가려 비상임 말고는 어떤 직책도 맡지 않았다고 말했다. 정부에서 일하는
동안 거둔 주요 성과로는 세계 금융위기 당시 모범적인 경제 회복 외에 재무장관으로서 G20 정상회담을
유치해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것, 금융위원장 시절 원칙을 세워 정치권의 외풍을 차단하고 생명보험사를 상장시킨 일 등을
꼽았다. 금융위원장 시절엔 LTV·DTI를 만들었다.
+나중에
묘비명은 어떻게 쓰시고 싶습니까?
"묘비를 세울 생각이 없습니다. 화장해 뿌리라고 할 참입니다.”
이필재 후배(10년 후배)님이
편집 - 서울고 월간 뉴스레터 3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