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8:21~30)
"When you have lifted up the Son of Man, then you will know that
I am the one I claim to be and that I do nothing on my own but
speak just what the Father has taught me." (28절)
하나님의 아들인 내가 승천하게 될 때에서야 너희들은 내가 바로
이전부터 말했던 그런 존재임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스스로 한 것은
없고 하나님께서 내게 가르쳐 주신대로 말할 뿐이다.
예수님이 영적인 얘기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 유대인들이 갈 수 없다는 등-에
육적인 관점으로 접근하니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그럼 예수가 자살한다는 말이냐?'는 결론에 도달하기도 한다.
그리고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하나님의 옆에 거하시게 될 때에서야
깨닫게 된다. 마지막 순간에야 알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고 믿게 된다는 것을
이성(지성)의 관점으로 보면
이성이 깨끗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성을 도말하는 것도 아니고
이성이라는 안경이 서리낀 채 시야를 제한 받는 것도 아니다.
이성을 도말하려는 자는 기독교 근본주의적, 극보수적 행태이고
이성이라는 안경이 서리가 낀 것은
육신 저 너머에 계신 진리의 영을 이성이라는 좋은 안경을
써 놓고도 보지 못하는 행태이다.
그러니 이성의 안경을 잘 사용하는 것,
깨끗해진 이성의 안경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렇기 위해서는 안경에 낀 서리/찌꺼기(=죄악)을 걷어내야 한다.
이성(지성)을 malfunction한다는 식의 가르침은
정말로 위험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성은 우리의 인격을 중앙통제하는,
하나님이 주신 중요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남의 은혜를 받은 이들이
변화된 행동을 한다는 것은
우리의 중앙통제 수단인 이성(지성)을 올바르게 사용한다는 것이지
그것을 도말한다는 것이 아니다 .
그런데 마치 그것을 도말하는 것이 미덕인 것처럼
믿고 행동하는 이들이 있다.
그래서 이성의 1단계만 적용해도
'와, 큰일났다. 정말 잘못되었다.'라는 이성의 외침을
무시하고 마치 혼이 빠진 인형처럼
악한 지도자의 악행에 협조하거나 맹종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런 혼이 빠진 인형으로 만들지 않으셨다.
그렇게 만드셨다면
우리를 위해 인내, 수용력, 존중을 할 필요가 없으셨다.
귀한 존재라 일컫지도 못하셨을 것이다.
<오늘의 명언>
모든 희망을 주시는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죽음의 절망에 빠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본 로버츠
명언에서 '받아들인다.'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영험한 것을 보여주셨을 때
그에 대한 '존경심(=감정)'이 움직이고
우리의 이성(지성)의 통제로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심겨 놓으신
가장 거룩하고 좋은 것임을 인정하게 됨으로써
선한 행동과 실천으로 이어지게 해야 한다는
성스러운 의무감을 가지게 하는 과정이다.
전인격이 작동하여 내 존재가 변화되는 것이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정신원 목사님을
소중하고 거룩한 자리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 곳에서 한 영혼, 한 영혼 귀하고 선량한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는 소명을 다하게 해 주십시오.
저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죄의 감각을 도말하여 주십시오.
오로지 하나님의 선한 일들에만 관심을 가지고
행하게 해 주십시오.
내일은 친가에 가서 명절을 지내고
이어서 일본에 가게 됩니다.
평안하고 기쁜 시간, 안전한 여정이 되게 해 주십시오.
사랑을 깊이 나누는 시간이 되게 해 주십시오.
감사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