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마음과 비어있는 마음은 다르다. / 현웅 스님
사람의 머리에 무엇이 차 있으면
보고 듣는 것이 여유롭지 못하다.
우리 사람의 얼굴에는 오관이 붙어 있다.
그리고 바깥세상 것을 접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바깥 것을 접하는 것들 중에는 물론
남의 글을 읽어 보는 것도 이에 해당한다.
좋은 음악을 듣는 것도 ,
갤러리에가 미술품을 보는 것도
사람들과 살아가면서 집문서를
계약하고 돈을 주고받을 때도
다 바깥세상을 접하는 것들이다.
일반적으로 삶속에서 일어난 것들을 대할 때
비교적 단순한 것들이 많지만
사람의 마음이 묻어 있는 글을 읽어
그 글속에 뜻이 있어
마음에 새겨 놓아진 것들이 있다면
두고 두고 가슴에 남아 있어 잊혀 지지를 않는
경험을 우리는 갖게 된다.
경험 되어진 것들 중에
좋은 경험은 사람의 마음을 밝게 하지만
그렇지 못한 다툼에서 온 것들이나
시비지심 에서 오는 경험들은
그 사람의 얼굴을 그늘지게 만들며
두고 두고 되씹으며 기억 했던 것들을
털어 버리지 못하고 있으므로
맑은 하늘같은 마음을 가져 보지를 못한다.
이런 것 들을 불교에서는 사람의 마음이
五溫속에 합류되어 있어서 그렇다고 말한다.
다시 설명을 덧붙이면 자신의 의식이
구름 속에 묻혀서 사물을 볼 때나
어떤 생각을 해낼 때
구름 속에 묻혀 있는 것 때문에
바른 생각을 할 수도 없으며
어떤 판단을 할 때도 앞뒤가 안 맞는
긴장 섞여진 판단을 하게 된다.
이와 같이 우리가 오온 속에 갇혀 있게 되면
모든 것을 받아들임을 올바르게 받아드릴 수가 없게 된다.
보통 사람에게는 부처가 깨달아
놓은 법을 대할 때도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아무리 진리를 설해놓은 법이지만
구름이 가려져 버린 눈으로 대하기 때문에
진리의 說도 구름 속에 합류되어 버려
횡설 수설 하는 중생 견해로 바꾸어져
더 이상 사람을 구속됨으로부터 풀어 주는 법으로
사람 속에 남아 있지를 못 한다.
이런 사람들은 법을 말하되 요란할 수밖에 없다.
삐뚜러진 눈으로 불조의 말씀을 접하므로
자신의 마음 정화에 혼란만을 주게 된다.
이와 같은 길에 들어 선 사람들은
그 믿음 또한 불확실하여 말의 뜻을
자기의식 속에 갇혀 있게 되 좁은
영역을 벗어나지 못 하고 있다.
다시 오온을 넘어서 보는 지혜가 깃들지를 못 함으로
법을 알아 지키되 법으로 부터 자유스럽지 못하고
법으로부터 구속을 받고 있는 사람으로
새로운 틀을 만들어 살고 있게 된다.
금강경에도 법이 법이 아닌 줄을 알아야 한다는 말도
다 이런 것을 경계 하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나 禪家에서는 捨敎入禪 이란
가르침이 전해 져 오고 있다.
기신론에서도 아는 것은 바른 믿음을
일으키기 위해서 알고는 버려져 있어야
한다고 가르침을 주고 있다.
중생 생각으로 익혀서 만들러진 자기 생각이
변하여 부처 쪽으로 가야하지 내 생각을
변화 해 주지 못하고 부처 것을 내 쪽으로
변화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불법은 어려운 것이 되어 버린다.
이런 사람은 법을 말하되 사를 말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바른 소견으로 법을 대하는 자는
첫째로 자신의 마음이 평정 되어서 헐떡거림이 없이
쉬어져 있어야 하고 다툼을 향한 마음이
지혜로 바뀌어져서 고요한
마음으로 변해져 있어야 한다.
이 둘이 안 되여 있으면 법은 삿됨을
바탕으로 한 법이 되므로 사람을 시끄럽게 하며
자기마음을 시끄럽게 한다.
이런 곳에서는 지혜의 싹이 돋아나올 기약이 없다.
그래서 원효스님도 쌀로 밥을 짓는 자와
모래로 밥 짓는 자는 다르다고 하셨다.
이렇게 당연한 길을 저버리고 불법을
논함은 밤과 낮으로 어리석음을
쫓는 자의 길을 가고 있는 자일 것이다.
이러한 길에 이미 들어 있는 사람은
하루 빨리 아는 것을 놓는 공부를 해야 하며
불설을 빨리 잊어버릴수록 자신의
생명을 되찾을 수 있어 나중을 보장할 수 있을 것이다,
불법은 사람을 구제 하는 종교이지
구속 하는 종교가 아닌 것이다
조사스님들께서도 사람 떠나 불법이 따로 있다면
사마 외도라고 꾸짖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모든 法兄弟님들께서 佛 法 僧 三寶께 귀의함으로
날마다 감로의 나날이 되기를 기원하면서
여름 장마철 아침 단상을 놓아 봤습니다.
조계사문 육조사 玄雄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