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최초의 공화주의자 정여립 이야기 입니다.
◎ 조선14대 왕 선조 ⇒ 본명 : 이균(李鈞) <1552년 ~ 1608년>
● 정여립(鄭汝立, 1546년~1589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죽도(竹島), 본관은 동래(東萊).
전주의 명문가 출신으로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 였다.
1570년(선조 3년) 과거에 급제하여 1584년 예조좌랑, 홍문관부수찬과 수찬 벼슬을 함.
처음엔 유명한 율곡 이이에게도 사랑 받는 문인이었씀.
그의 사상은
백성이 임금보다 중요하므로(民重君輕) 왕위계승은 혈통보다는
그에 맞는 자격여부가 더 중요하다는 것.
봉건왕조의 기본적 가치관 군신강상론(君臣綱常論)을 부정하는
그야말로 당시로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혁신적인 사상이었다.
선조의 무능이 이런 생각을 키운것 아니었을까? (소인의 생각)
이로 인해 정여립은 한국사 최초의 공화주의자라는 평가와
영국의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보다 60여 년 앞선
세계 최초의 공화주의자 이다.
처음 정당은 서인이었으나 서인을 탈당하여 동인으로 가면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고 스승이었던 이이(李珥)를 비판한 일로 서인드의 반발을 샀다.
그의 이당을 기분 나쁘게 여긴 선조에게 미움을 받아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고향에 내려온 뒤 학문을 연구하고 대동계(大同契)를 결성해
여수 앞바다에서 노략질을 하는 왜구 토벌에도 앞장서는 등 선각자의 면모를 보이면서
천민에서 양반, 스님에 이르기 까지 많은 백성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으며
황해도 까지 대동계 세력을 펼쳤다.
그런데 반역을 획책한다는 서인들의 음모와 밀고로 인하여 선조의 체포 명으로
진안군 상전면 죽도에 피신 하였는데 관군들의 포위속에 자살하였다고 알려져 있씀.
서인들은 그가 역모를 꾸몄다 했고 동인들은 이를 부정하며 양측이 팽팽히 맞섰으나
서인이었던 정철이 우의정에 임명되면서 동인들을 역모로 잡아들여
수 많은 인사들이 희생되었고 피바람을 부른 희대의 인간백정 노릇을 한 것이다.
그 사건이 바로 "기축옥사" ⇒ 1,000 여 명의 희생자를 낳았으며
동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득세하게 되었다.
당파싸움의 사태가 너무 참혹하게 기축옥사(1589년)가 되고
3년 후 임진왜란(1592년)을 부른 결과가 되었다.
정여립 사망 이후 호남의 명문가 하나가 몰락했고,
全州 지역 출신에 대한 인사까지 불이익이 가해졌다 한다.
그의 집은 파헤쳐져 연못으로 변했고 그에 대한 모든 기록은 불타고 소실되었다.
사후 친척들 까지 연좌되었으며, 그의 14촌간인 정인겸까지도 전주에서 추방되었다.
당파싸움의 결과는 滅門之禍(멸문지화)를 넘어 망국의 지름길로 이어졌다.
기록이 사라져 구전에서 구전으로 이어진 한 시대의 영웅 정여립 이야기~
정여립이 꿈꾸던 시대는 400여 년 후에야 민주공화 세상이 열린다.
선조의 무능함과 대신들의 당파싸움은 결국엔 외세 침입의 길을 만들었는데
민주공화세상인 작금에 와서도 무능한 지도자와 부역자들이 득세하고
국민의 안녕과 복지를 외면한체 집권세력만을 위하고 있는 행태를 보면
정말 한탄 개탄 스럽고 부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비뚤어진 가치를 바로잡고 불평등과 차별의 세상을 고쳐보고자
온몸으로 현실에 부딪친 진보적 지식인, 선진적 사상가, 민중의 개혁가 鄭 汝 立 !
하늘나라 어디에선가 지금도 대한민국을 내려다 보며 위정자들에게
대동단결 정신으로 백성이 잘사는 나라 만들라고 호통 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1589년 43세 사망 )
전주 만성동 정여립 거리 ▼
완주군 상관면 신리 정여립공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