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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을 찾아서
이 문 열
옛날 옛적까지는 아니고, 한 백 년 전에 경상도 안동 땅에 한 유서 깊은 집안이 있었다. 멀리로는 망국의 한을 달래며 금강산으로 들어간 마의태자와 혈맥이 닿고 가까이로는 이조 중기의 거유(巨儒)요 동인(東人)의 영수였던 덕봉(德封) 선생을 배출한 가문의 종가였다
그때의 종손은 몸집이 크고 풍채가 당당한 데다 주로 의학과 역술에 관계된 여러 가지 기이한 행적이 많아 문중과 인근 민촌 사람들에게는 이인(異人)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의원은 아니지만 마땅한 경우를 당하면 사람을 고치는데, 별나게도 약을 쓰는 일이 거의 없고 어쩌다 약을 써도 세 첩을 넘기지 않았다. 또 주역에 밝아 방위와 때를 잘 보았는데 한번은 도둑맞은 소가 어느 때 어느 장(場)에 나올지를 알아 주어 그 소 한 마리를 전 재산으로 삼던 농부를 감동시킨 적도 있었다.
옛 선비들에게는 여기(餘技) 쯤으로 여겨지는 의학과 역술이 그 정도에 이르렀으니 다른 학문의 경지도 짐작 가는 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벼슬길에는 나아가지 않아 장년에 이르도록 포의(布衣)로 지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어지러운 천기를 미리 알아보고 벼슬길을 피했다고 하지만 질은 도도한 자부심 때문이라는 편이 옳을 듯싶다.
대원위(大院位) 합하(閤下)의 집정 후 탕평책의 일환으로 경신대출척 (庚申大黑出陟) 이래 이맥 년 불우를 겪고 있던 영남 남인(南人)을 불러 쓰던 때의 일이었다. 유림의 천거로 아직 40대에도 이르지 않았던 그 종손에게 고을이 내려진 적이 있었다. 종손은 그때 끝내 고을살이를 마다하였는데 그가 족당들에게 입버릇처럼 하던 말에 이런 게 있다.
“이 종군(宗君)의 자리는 경상 감사와도 바꾸지 않는다 했다.”
그러다가 불혹을 넘기면서부터는 문하(門下)를 열어 인근에서 찾아오는 인재를 기르는 낙으로 남은 삶을 채웠다.
그런데 그 종손에게는 늦게 본 딸이 있었다. 고명딸이라 그 문중으로 보아서는 종녀(宗女)가 되는 셈인데 그 딸에 대한 종손의 사랑은 유별났다. 늦게 본 막내딸이라는 점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젖도 떼기 전에 어미를 여읜 어린것에 대한 애처로움이 유별난 자정(慈情)으로 변한 것이라 보는 편이 옳다.
상처(傷妻) 역시도 마흔 이쪽저쪽의 일이었건만 어찌 된 셈 인지 종손은 재취를 하지 않고 딸이 겨우 유모의 품을 벗어나자 아예 사랑방으로 데려다 길렀다. 그 딸이 다섯인가 여섯 살 때 심하게 생손앓이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종손은 몇 날이고 몇 밤이고 줄곧 고름 잡힌 딸의 손가락을 빨아 마침내는 깨끗이 낫게 했다.
“짐승들을 보하라. 그들에게 침이 있느냐? 뜸이 있느냐? 약이 있느냐? 상한 곳이 있으면 오로지 핥아 다스리느니리.”
종손은 그렇게 자신이 한 일을 의술의 한 처방쯤으로 풀이했으나 사람들은 오히려 그걸 어린 딸에 대한 그의 지극한 사랑으로 보았다.
그 종녀의 생김이나 자태가 고왔다는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특별히 못생겼다거나 괴이쩍었다는 말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외모는 그저 수더분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녀의 내면은 여러 가지로 미루어 유별났던 것 같다.
그 유별남 중에서도 가장 먼저 들 수 있는 것은 나중에 얻은 ‘군군자(裙君子, 치마 두른 군자)’라는 별명으로 짐작되는 남성적인 성취였다. 친정 쪽으로든 시가 쪽으로든 일치되는 인물평으로는 그녀가 식견과 기상 어느 면에서도 당대의 어떤 선비에 못지않았다고 한다.
그 종녀의 그 같은 정신적인 성취는 아마도 딸에 대한 종손의 유별난 자정 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사랑방에서 자라던 그녀는 일곱 살이 되자 조모와 고모들이 있는 안채로 돌아갔지만 정신만은 여전히 사랑방에서 길러졌다. 종손은 낮이 되면 여전히 그녀를 사랑방으로 불러내 어미 없는 어린 딸에 대한 애틋한 정을 이번에는 엄격한 훈도로 나타냈다. 어떤 때는 남녀칠세부동석의 계율을 깨고 문도(門徒)들 곁에 앉혀 가르침을 내리기도 했다.
그 종녀가 여느 규수들처럼 안채로 돌려진 것은 거의 혼기가 가까워서였다. 그러나 이미 그녀의 정신에 뿌리를 내린 사랑방의 문화 탓인지 침선(針線)에도 별 뜻이 없고 전병(煎餠)과 탕갱(蕩羹)에도 솜씨가 붙지 않았다. 그저 타고난 기억력과 변통수로 그럭저럭 흉내만 낼 수 있을 뿐이었다.
“네 복이 그뿐이로구나. 만약 남자로 태어났으면 너를 훌륭한 선비로 길러 낼 수도 있었을 것을.”
종손은 이따금 안채에서의 적응을 힘들어하는 딸을 보며 그렇게 탄식하고는 했으나 그 시절로는 달리 길이 없었다. 나이가 차자 하는 수 없이 문도 중에 쓸 만한 젊은이 하나를 골라 혼사를 정했다. 학행도 빼어났으려니와 문벌도 인근에서는 알아주는 집안의 자손이었다.
그 혼례 날의 광경은 볼만했다고 한다. 벌써 여러 대가 이름 없이 사림(士林)에 묻혀 지내 은연중에 영락의 기운이 돌던 아흔아흡 칸 고가는 10여 년 전의 길례(吉禮) 이래로 가장 붐볐다. 안채는 안채 대로 대소가의 아낙들과 연(계집종)들로 붐비고 바깥채는 바깥채 대로 가깝고 먼 곳에서 온 하객들과 상을 들고 오락가락하는 놈(사내종)들로 분주했다. 특히 열두 칸 사랑 대청은 원근 이름 있는 씨족들의 종손들만으로 가득 찼을 정도였다.
해가 기웃할 무렵 당도한 신랑 쪽의 행렬도 볼만했다고 한다. 사모관대 하고 말 위에 높이 앉은 신랑은 저게 부급구사(負笈求師)로 사랑채에 묵으며 종손에게 가르침을 받던 그 도령인가 싶을 정도로 의젓했으며, 상객(上客)이 탄 가마와 앞뒤를 따르는 구종들의 행렬은 사또의 행차인가 싶을 정도였다. 예물 바리를 실은 마소며 후행(後行)을 비롯한 신랑 쪽 하객들이 타고 온 나귀의 행렬도 동구 밖까지 뻗쳤다.
초행(醮行) 대반(對盤)이 있은 뒤 안대문 앞마당에서 전안상이 차려지고 홀기(笏記) 소리도 낭랑하게 예식 이 치러졌다. 교배(交拜) 합근(合졸)의 예가 격식대로 일없이 지나갔다. 그런데 신방을 차릴 즈음해서 작은 이변이 일어났다. 신부가 차려 둔 신방을 마다하고 그 집 동북각에 있는 폐방(廢房) 으로 든 때문이었다.
원래 그 종택은 아흔아흡 칸이라는 규모보다도 특이한 구조로 더 알려져 있었다. 파조(派祖) 되는 청곡공(淸谷公)이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도본을 얻어 와 지은 까닭에 대개가 입 구(口) 자 뜰집인 인근의 다른 세가(世家)들과는 양식을 달리하는 까닭이었다. 곧 동북각을 접점으로 하는 두 개의 크고 작은 입 구(□)가 겹쳐 있는 형태가 그러했다.
그날 신부가 든 폐방은 바로 그 동북각 두 개의 입 구 자가 겹치는 곳에 있는 방으로 원래는 안채의 건넌방에 해당되었다. 그러나 집이 들어설 때부터 그 방은 집 전체의 지기(地氣)가 뭉쳐 있는 곳으로 지목받았고, 그래서 풍수적으로는 종가의 기운이 몰려 있는 곳일 뿐만 아니라 그곳 문중의 기운이 몰려 있는 곳으로 여겨졌다.
어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그런 풍수적인 믿음은 오래잖아 현실로 나타났다. 윗대 종가의 딸네 하나가 그 방에서 해산한 아들이 귀하게 되어 그때까지는 보잘것없었던 이웃 가문을 하루아침에 행세하는 집안으로 올려놓은 일이 있었다. 그렇게 되자 그 문중 사람들은 아무런 주저 없이 그 외손(外孫)이 자기들 문중의 진기를 뽑아 간 것으로 단정했다.
따라서 그 뒤로는 그 방에서 시집간 딸네의 해산이 엄하게 금지되었는데 다시 몇 대 뒤에 같은 일이 벌어졌다. 역시 인근 몰락한 문중으로 시집을 간 종녀 하나가 당시의 종손이 머리끄덩이를 잠고 끌어내는데도 두 발로 문지방을 버티며 그 방에서 아들을 낳은 것이었다.
그 아이 역시 크게 되어 아무개 하면 다 알 만한, 유림이 높이 우러르는 학자로 자라자 다시 이쪽 문중에서는 크게 공론이 일어났다. 덕봉 선생 이후에 이렇다 할 인물이 나지 않은 것은 모두가 딸네들이 문중의 진기를 그렇게 빼내 간 탓이라 믿은 까닭이었다. 그들은 공론 끝에 더 이상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 그 방의 구들을 파내고 마루를 깔아 아예 광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날 열세 번째의 종녀가 신방 대신 들어앉은 곳은 바로 그 폐방이었다. 이미 신랑이 정해 둔 신방에 든 뒤라 안채에서는 적지 않은 소동이 일고 곧 그 변괴는 사랑까지 전해졌으나 결국은 신부의 뜻대로 되고 말았다. 그날같이 경사스러운 날 혼례복 차림으로 산악처럼 버텨 앉은 신부를 억지로 그 방에서 끌어낼 수도 없었을뿐더러 신부의 처녀 적 성정을 아는 사람들은 그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혼인이 새삼 흡족해 상객으로 온 사돈과 함께 흥겨운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종손도 그 같은 안채의 전갈을 듣고는 실소와 더불어 한마디 탄식으로 딸의 고집을 승인하고 말았다.
“그년 욕심이 대적(大賊)이다. 놔둬라. 외손도 자손이니라.”
그렇게 되자 백여 년 광으로 쓰이던 그 폐방은 신부가 한구석에 버티고 앉은 채로 급히 신방으로 꾸며졌다. 뒤주며 건어물 독은 다른 광으로 옮겨지고 마릇바닥에는 돗자리가 깔렸다. 뜯겨져 있던 문종이가 급히 발라지고 도배도 안 된 벽은 병풍으로 가렸다.
안채에서의 그 같은 북새통을 알 리 없는 새신랑에게는 그 일이 몹시 괴이찍었을 것이다. 잘 꾸며 둔 방을 놔두고 안채 모퉁이 허술한 마루방에, 그것도 예에 없이 신부가 미리 자리 잡고 있는 곳으로, 신방을 옮기게 한 처가를 괘씸하게 여기기까지 했다는 후문도 있다.
하지만 그 신방 일만 빼면 나머지는 가절호일(佳節好日) 기세 좋은 두 가문의 성대하고 흥겨운 혼인 잔치일 뿐이었다. 다음으로는 별달리 할 만한 얘기 없이 신부 쪽에서의 혼례가 끝나고 우귀(于歸, 신부가 혼인 뒤 처음으로 시집에 들어감.)가 있었다. 인재행(引再行, 신랑이 처가 부근에서 하릇밤을 묵은 뒤 처가로 (장가를) 듦.)의 형식을 빌려 삼일우귀(三曰于歸, 신부가 혼인한 지 사흘째 되는 날 시집에 들어감.)를 한 게 이른바 묵신행(신부가 혼례 뒤 한 해가 지나 시집에 들어감.)이 흔했던 당시의 풍습으로 보아서는 좀 유별났다 할까.
그날 그 종택에서는 새벽같이 연놈들을 휘몰아 신행길을 보내는데 신랑은 말을 타고 앞장을 서고 신부는 교전비(轎前婢) 딸린 가마에 올라 뒤를 따랐다. 상객은 종손 자신이 몸소 나섰다. 워낙 몸집이 커서 젊을 때는 집에서 특별히 기르는 크고 기운 좋은 붉은 말을 타고 먼 길을 다녔으나 이제는 늙어 말을 타지 못하고 역시 그 몸집에 맞게 특별히 마련된 팔인교(八人轎)에 올랐다. 뒤따르는 하님과 짐꾼의 행렬도 초행길의 신랑 쪽에 못지않았다.
신부의 시댁까지는 백 리 길, 해마다 안동부와 영해부에서 번갈아 치도(治道)를 한다고 했으나 길이 여간 험하지 않았다. 우마차가 다니기 힘든 좁은 길에 높은 재가 둘이나 있었는데 그중에서 가랫재는 험하기도 하거니와 그 근년에는 활빈도라 자칭하는 도둑 떼가 든 적이 있기도 한 곳이었다.
새벽길을 나선 데다 교꾼을 배로 하여 번갈아 가마를 메게 하고 잿길을 평지 닫듯 걸음을 재촉했으나 신부가 시가에 이른 것은 역시 춘삼월 짧지 않은 해가 뉘엇할 때였다.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 한군데 이르니 빠안하게 들이 터지고 아스라이 노을 진 언덕에 모여 선 기와집들이 보였다. 멀리서 보아도 스무 칸은 넘을 듯한 반듯반듯한 입 구(口) 자 똘집들이 여남은 채 벌어져 나름의 위세를 보이고 있었다. 영해 땅 진안현 광려산(廣廬山) 기슭에 자리 잡은 안릉(安陵) 이씨 일문의 세거지(世居地) 였다.
원래 안릉씨는 영해 땅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한 삼백 년 전에 부제학으로 있던 보공(某公)의 자제 하나가 영해 부사로 내려온 중부(仲父)를 따라와 책방(冊房) 도령 노릇을 하다가 그 땅의 풍광이 수려하고 어미(魚米)가 풍족함을 보고 토호(土毫)의 딸과 혼인하여 눌러앉았는데 그가 바로 인릉 이씨 영해파의 파조(派祖)가 되었다.
그 뒤 안릉씨는 번챵하여 조손(祖孫) 삼대에 이른바 ‘칠산림 (七山林)’이 나고 남인 영수로서 대제학 이조판서를 지낸 태재 선생(太宰先生)을 낳았다. 또 퇴계학외 진전(眞傳)도 두 대에 걸쳐 그 문중
에 머물다 대산(大山) 이상정 정제(定齊) 유치명에게 넘겨진다.
신부의 시가는 바로 그 태재 선생과 더불어 칠산림으로 꼽히던 현제공(玄齊公)의 둘째 집이었다. 시증조부는 종이품 가선대부 돈녕부사를 지낸 좌명공(佐明公)이었고 삼대 증직(贈職) 위로는 다시 실직(實職) 당상이라 나름으로는 ‘삼대불하당(三代不下堂, 삼대가 당하로 내려서지 않았다. 곧 당상관을 지냈다.)’을 뽐내던 집이었다.
그러나 신부의 친정과 마찬가지로, 아니 천하의 운세와 마찬가지로 시가도 희미하나마 조락의 기운을 보이고 있었다. 벌써 두 대를 현관(顯官)도 명유(名儒)도 내지 못하고 보내서인지 학문과 벼슬 길에 아울러 초조함을 드러내며 가문의 여망을 오직 외아들인 신랑에게만 걸고 있었다. 그래도 재지사족(在地士族)으로서의 몇 백석 재물만은 어떻게 지켜 신랑이 궁색하지 않게 부급구사의 길을 나설 수 있었던 게 다행일 정도였다.
그 우례(于禮)의 요란스러움이나 잔치의 흥청거림을 길게 얘기하는 것은 지루함이 될까 하여 피한다. 다만 그날로부터 일 년이 안 돼 세상을 버린 신부의 시조부가 현구례(見舅禮) 뒤에 손주 며느리의 손목을 잡듯이 하며 한 당부는 한 번 더 그 집안을 감도는 스산한 기운을 확인하게 해 준다.
“이 집은 삼대를 독자로 내려왔고 이 대를 포의(布衣)로 허비하였다. 더구나 네 신랑은 독자인 데다 학문에 몸까지 상한 기색이다. 자손이 적으면 영화도 드문 법. 부디 너라도 이 집안에 좋은 자손을 많이 낳아 다오.”
갓 시집온 신부에게 그런 시조부의 당부가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이미 초행 날 자식에 대한 만만찮은 욕심을 보여 준 신부이고 보면 시조부의 어조에 실린 Z}곡한 떨림이 여느 새댁네에게보다는 훨씬 강하게 그 의식에 가닿았을 것이다. 그것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일이 그녀의 첫 근친(覲親)이었다.
산 설고 물 선 곳으로 와 역시 낯선 사람들 틈에 부대끼며 살게 되는 새댁네에게 가장 기다려지는 것은 근친이 된다. 그리운 부모님을 찾아뵙는 기쁨도 있지만 그보다는 낯익은 마을과 정든 사람들 사이로 돌아가 시집살이에 지친 몸과 마음을 쉬게 한다는 뜻이 큰 그 관례는 낯선 문중으로 시집간 옛 여인들에게는 짧으나마 구원과도 같은 것이었다 해도 과장은 아니다.
그런데 시집에서 첫 근친의 논의가 나왔을 때 새댁은 시조부의 우환을 핑계로 그날을 미루었다. 시집에서는 새 며느리의 그 같은 효성을 갸륵하게 받아들였으나 나중을 보면 꼭 그래서였던 것 같지는 않다. 그로부터 오래잖아 마침내 시조부가 세상을 버렸는데 소상도 치르기 전에 이번에는 새댁이 스스로 근친을 졸라 온 까닭이었다.
시어머니는 내심 의아롭게 여겼으나 시집온 지 2년이 가깝도록 근친을 보내 주지 않은 터라 이웃 눈에 야박하게 보이기 싫어서라도 며느리를 보내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새댁은 조촐한 가마에 시집올 때 데려온 교전비 하나만 딸린 채 2년 만에 친정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때도 며느리가 회임하고 있는 걸 알았다면 자손이 귀한 시집에서는 그 멀고 험한 근친 길을 허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시가 쪽으로 보아서 알 수 없는 일은 더 있었다. 근친은 길다 해도 석 달을 넘기지 않는 법이건만 상중인 시집을 이른 봄에 떠난 며느리는 그해 여름이 다 가도 돌아올 줄 몰랐다. 궁금한 시어머니가 사가에 사람을 보내 알아보니 실로 뜻밖의 소식이 있었다. 회임을 알지도 못하고 보낸 며느리가 그새 만삭이 되어 해산 뒤에야 돌아가리라는 상살이(아랫사람이 웃어른에게 올리는 언문 편지. 특히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를 올려온 게 그랬다.
친정집도 딸이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시가 상중에 근친을 온 것도 그러하거니와 까닭 없이 근친을 끌어 만삭에 이른 것도 수상쩍었다. 애초부터 친정에서 해산을 하러 온 것인데 그렇다면 그 의도는 얼른 짐작이 갔다 초행 날 보인 욕심으로 미루어 두말할 나위도 없이 해산도 그 폐방에서 할 작정임에 틀림없었다.
근친 온 딸네가 모르는 사이 친정 문중은 그 일로 문회까지 열었다. 신방으로는 얼결에 그 방을 내주었지만 해산만은 결코 허락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모여든 문중의 공론이었다. 종손도 이번만은 양복할 수 없어 나름대로 수단을 썼다. 안채에서 제일 넓고 불이 잘 드는 방을 골라 새로 도배를 한 뒤 딸의 산방(産房)을 꾸며 주고 문제의 방은 마루까지 걷어 내어 도저히 방으로는 쓸 수 없는 흙 봉당 헛간을 만들어 버렸다.
그런데도 딸은 아무 내색 없이 친정에서 꾸며 준 산방에 자리를 잡고 해산 날을 기다렸다. 거기다가 곧 가을로 접어들어 서늘해진 날씨도 친정 문중의 마음을 놓게 했다. 아무리 그 방이 발복(發福)에 영험하다 해도 그런 날씨에 흙 봉당에서는 해산할 수 없다고 본 까닭이었다.
하지만 결과로 보면 지나친 방심이었다. 추석 사흘 뒤 그 종갓집은 백 년 만에 다시 그 방에서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나는 것을 듣게 되었다. 엄청난 참을성으로 가까운 산기(産氣)를 숨긴 그 딸네는 출산에 즈음해서야 기습적으로 산방을 그 헛간으로 옮겨 기어이 그 방에서 아들을 낳았다. 흙 봉당에다 거적을 깔고 차림 이불만 그리로 옮겨 그 위에서 해산을 한 것이었다. 물론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데는 영리하고 기민한 교전비의 도움이 컸다.
그 밤 자정이 가까워서 느닷없이 그 방에서 터져 나온 어린애의 울음소리를 듣고서야 놀란 친정 식구들이 몰려갔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역시 전의 신방 소동 때처럼 한마디 따져 볼 겨를조차 없이 이리저리 해산 뒤치다꺼리나 해 주는 수밖에 없었다. 급하게 산모와 아이를 원래 꾸며 두었던 산방으로 옮기고 물을 데운다 의원을 부른다 법석을 떨 뿐이었다.
안채의 소동을 전해 들은 종손은 이번에도 하릴없이 쓴 입맛만 다셨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문득 서죽(筮竹)을 뽑아 갈라보더니 딸의 산방으로 내려가 이제 막 정신이 돌아온 딸에게 말했다고 한다.
“네 욕심이 지나쳤다. 여의주를 둘씩 문 용은 등천(登天)을 못 하느니.”
그리고 갓 태어난 외손자를 그윽이 굽어보다가 사랑으로 나갔다는데 여기서 그런 종손의 행동에 대한 해석은 둘로 갈라진다. 친정집 문중은 종손의 그 같은 말을 이인(異人)다운 예언으로 보고 외손자를 본 눈길도 연민에 가득 차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시집 쪽은 오히려 그 말에 주술적인 효력을 부여하고 외손자를 보는 눈길도 심술이 뚝뚝 듣는 것으로 묘사한다.
딸도 그때는 이미 시집 쪽의 정신에 가까워져 있었다. 그 말을 가문의 진기를 도둑질해 가는 딸에 대한 섭섭함의 표현으로 받아들이고 크게 마음 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삼칠을 보내기 바쁘게 교꾼과 교전비를 재촉하여 시집으로 돌아갔다.
시집에서는 큰 경사가 났다. 그새 달덩이처럼 피어난 손자를 받아 안은 시아버지는 아직 탈상도 못 한 상주임을 잊고 파안대소하며 말했다.
“이제 너로 하여 이 집안이 다시 일겠구나.”
그리고 며느리를 대견한 듯 바라보며 보탰다.
“낳은 욕심보다 더 큰 욕심으로 잘 길러라. 이 집안이 다시 일면 이는 모두 네 공일 것이니라.”
그 말로 미루어 시아버지도 사가(査家)의 그 방에 얽힌 전설을 들어 알고 있었으며 또 많은 그 시대 사람들처럼 그 발복 설화(發福說話)를 은근히 믿었던 듯하다.
그로부터 다시 1년이 지났다. 태어난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 첫돌이 되었다. 정말로 한 유서 깊은 집안의 정기를 모두 뽑아 와서 그런지 벌써부터 시집에서뿐만 아니라 그 문중 전체의 입 끝에 오르내릴 정도로 유달리 크고 잘생긴 아이였다. 그사이 탈상도 한 터라 새댁의 시아버지는 큰 잔치를 차리고 사돈을 초대했다.
종손은 사돈의 초대를 받자 아무 말 없이 채비를 시켰다. 이태 전 딸의 신행 때처럼 자신의 거구를 실을 팔인교에 치도(治道) 인부삼아 교꾼 서넛을 여벌로. 딸린 채 광려산 기슭의 안릉 이문(李門)으로 날을 맞춰 떠났다.
재를 넘고 물을 건너 종손이 사가에 이르렀을 때는 돌잔치 바로 전날 해가 저물 무렵이었다. 이미 그 길흉은 뽑아 보았지만 그래도 종손은 예사롭지 않게 태어난 외손자가 그사이 어떻게 자랐는지 궁금했다. 사돈댁 사랑에 들어 인사를 나누기 바쁘게 딸과 외손자를 불러 보려했다.
뒷날 시집 쪽에서는 종손의 그 같은 서두름조차 어떤 음험한 저의가 있었던 것으로 깊이 의심했다. 그러나 아무리 가문이 앞선다지만 외할아버지도 핏줄로 이어져 있기는 마찬가지인데 어린 외손자에게 나쁜 뜻이야 있었겠는가. 있었다면 자신이 읽은 불길한 조짐에 행여라도 어떤 변화가 있었기를 바라는 마음 정도였을 것이다. 그날로 보아 야박했던 것은 오히려 사돈 쪽이었다.
“사돈께서는 멀고 험한 길을 오신 터라……. 도중에 장기(漳氣)도 쏘이셨을 것이고 흉한 꼴도 보셨을 것이니 하릇밤을 새워 장기가 삭고 사기도 가신 뒤에 아랫대를 보시는 게 어떠하올른지.”
그러면서 끝내 그날은 사돈에게 외손자를 보여 주지 않았다.
종손이 1년 만에 외손자를 다시 보게 된 것은 다음 날도 해가 높이 솟은 뒤였다. 소세에 의관을 정제하고도 삼신에게까지 부정을 씻은 뒤에야 사랑방에 나가 앉자 딸이 외손자를 치장하여 돌상 앞으로 데리고 나왔다. 같이 앉았던 사돈이 흡족한 눈길로 손주를 내려 보며 입버릇처럼 크게 뇌었다.
“허엇, 그놈 참 밉상이다.”
그리고 어떠냐는 듯 종손을 돌아보았다. 종손은 뚫어질 듯 외손자를 바라보다 쓰게 입맛만 다실 뿐 아무 말도 없었다. 한마디 덕담이라도 기대했던 사돈이 조바심을 감추고 묻지도 않은 말을 허허거리며 늘어놓았다.
“아명(兒名)을 땅닝으로 해 두었소이다. 두 글자 모두 진서(眞書)에 없는 글자니 염라대왕 명부에도 오를 수 없을 터. 아무리 저승사자인들 명부에도 없는 사람을 어찌 데려갈 수 있겠소?”
그래도 종손은 여전히 말이 없다가 딴청을 피웠다.
“이 집의 좌향(坐向)이 아주 좋소. 누대의 선성(善聲)과 문명(文名)이 우연은 아니었던 듯싶소.”
마침내 참지 못한 사돈이 종손에게 바로 대고 물었다.
“사돈께서는 역(易)의 이치에 밝으시다고 들었는데 ― 아랫대를 한번 봐주시오. 이 물상(物相)이 어떻소?”
“만상이 불여심상(不如心相)이라던가요. 겉으로 보이는 상을 어찌 상이라고 하겠소?”
그래도 종손이 말을 돌리자 사돈이 한 번 더 다그쳤다
“사돈께도 외손주가 됩니다. 짚이는 대로 길흉을 일러 주시오.”
천하에 거리낄 게 없던 종손으로서는 그만하면 자제할 만큼 했다 싶었던지 사돈의 그 같은 다그침에 다시 한 번 외손자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평소의 성품대로 스스럼없이 말했다.
“사돈께서는 저 아이에게 너무 많은 것을 걸지 마시오. 오래 이 세상에 머물지 못할 것이외다. 둘째 손주를 보실 일이 급하오.”
성품이 불같기로는 안릉씨 쪽도 남에게 지지 않은 터; 그렇게 되자 잔치고 사돈 간의 예의고 그걸로 모두 끝장이 났다 낯색이 변한 사돈이 소매를 떨치듯 일어나 혀를 차며 방을 나가고 방 안에 있던 하객들도 해괴하고 심란하다는 표정으로 하나둘 자리를 떴디. 이윽고 방 안에 남게 된 것은 무덤덤한 얼굴의 종손과 그 딸뿐이었다. 딸이 아이를 안은 채 폭삭 꼬꾸라지듯 흐느끼며 아버지를 원망했다
“이 여식이 불효하였기로 어찌 차마 그런 말씀을…….”
그래도 종손은 무덤덤하기만 했다.
“두 번 세 번 묻기에 대답했을 뿐이니라.”
그 뒤 당연하게도 그들 사가는 조면(阻面)에 들어갔다. 시가 쪽은 며느리를 내치지는 않았지ㅌ} 엄하게 친정 길을 막았고 친정 쪽에서도 사죄는커녕 따로이 그 얼을 발명하는 일조차 없어 절로 왕래가 끊겼다.
그러다가 종손이 다시 딸의 시가에 들른 것은 그로부터 7년 뒤 사돈의 초상 때였다. 그사이 세상이 변해 그곳까지도 왜인들이 와서 닦은 신작로가 이르고 종손도 쇠약해져 이번에는 사인교로 왔다. 사위에게 문상을 하고 사캉 건넌방에 앉아 있는데 소복에 산발한 딸이 종손에게 울며 문안을 올린 뒤 원망 섞어 물었다.
“아버님 제가 몇 년이나 친정을 찾아보지 못한지 아십니까?”
“일곱 해쯤 되지, 아마.”
쇠약해지기는 해도 기상은 조금도 꺾인 데가 없는 종손이 여전히 덤덤하게 대답했다.
“아이는 아직도 튼튼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총기가 놀라워 신동이 났다고 원근이 떠들썩하지요.”
“나도 그 소문은 들었다만 여덟 살 가지고는 아직 알 수 없느니라.”
그 말이 어떻게 새어 나가는 바람에 모처럼 전기가 찾아왔는가 싶던 두 집안의 화해는 다시 까마득해지고 말았다. 사위인 상주가 전송조차 않는 바람에 늙은 종손은 안릉씨들의 눈총만 따갑게 느끼며 온 길을 되짚어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도 딸과는 그로부터 다시 5년 뒤에 화해라도 하게 되지만 사위하고는 그게, 마지막 작별이 되고 말았다.
그 아이, 이름을 한문으로 적을 수 없어 염라대왕 명부에조차 오르지 못하고, 그래서 저승사자도 불러 가지 못하리라던 땅닝은 바로 그 이듬해에 죽었다. 겨우 나이 아흡 살 때였는데 남긴 절명시(絶命詩)가 뜻만으로는 아직 도 전해진다.
살아 그 죄가 삼천 가지라도
불효보다 더 큰 죄가 있으리.
죽어 불효가 삼만 가지라도
부모 앞 죽음보다 더 큰 불효가 있으리.
아마도 장질부사 계열의 열병을 앓다 죽은 것으로 추측되는 그 아이가 문득 정신을 가다듬어 그런 뜻의 오언절구를 읊자 전부터 허손(虛損)의 증세를 보이던 젊은 아버지가 먼저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아이는 그날 새벽에 숨을 거두었다. 젊은 아버지는 곧 혼절에서 깨어났지만 그도 오래 세상에 남아 있지는 못했다. 그 이듬해 젊은 아버지도 갑자기 악화된 허손으로 눈을 감게 되는데 그때 그의 나이 겨우 스물아홉이었다.
마침 그 젊은 아버지가 죽은 날이 경술국치로부터 꼭 사흘 뒤여서 사람들은 흔히 그 죽음을 망국의 한과 연관 짓는다. 그도 뼈대 있는 선비였으니 반드시 무관하달 수는 없겠지만 병든 몸으로 이태를 내리 겪어야 했던 상제로서의 애통과 자식 잃은 비탄도 잊어서는 안 된다. 어쨌든 그의 죽음으로 이번에는 3년 만에 삼대가 잇달아 세상을 떠난 셈이 되고, 그렇게 되면 집안의 몰락은 필연적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바로 그 집안의 대가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미처 말할 겨를이 없어 그냥 지나왔지만 일찍이 그 집안은 죽은 그 아이 밑 세 살 터울로 아들 하나를 더 얻었다. 집안의 유일한 남자로 남았을 때 겨우 일곱 살이었고 죽은 형의 화려하고도 비장한 전설에 가리어 얼마 동안은 그 재주를 인정받지 못했으나 그래도 범상함을 넘어서는 아이였다.
그 뉘 그 의아들과 미망인의 감동적인 재기의 노력도 있었다. 오래잖아 다시 처녀 적의 식견과 꿋꿋함을 회복한 미망인은 홀로된지 이태 뒤 겨우 아흡 살 난 아들을 서울로 유학 보내 새로운 시대와 맞서게 했고 그 아들도 노력과 열정으로 무너져 내리는 집안을 되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어설픈 한국판 도약 이론으로 그 아들이 선택한 이데올로기는 오히려 그 집안의 몰락을 훨씬 급속하고 처참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그다음 대는 유리걸식과 다름없는 삶의 밑바닥으로 내몰리게 되는데 그것도 현대적인 서사 공간 속에 전개되는 또 다른 긴 이야기가 된다.
아홉 살에 죽을 외손자를 돌날에 이미 알아본 그 종손이 정말로 이인이었는지, 아니면 자신의 가문만 아는 심술 사나운 외할아비에 지나지 않았는지는 아직도 판가름 나지 않았다. 백 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간 지금도 한쪽 집안은 그 예견을 한 빼어난 이인의 직관으로 보고, 다른 한쪽에서는 다만 약간의 주술력 있는 심술로만 우기기 때문이다. 그 뒤 반세기가 넘도록 두 집안이 나란히 걸어야 했던 참담한 몰락의 세월로 미루어 어쩌면 그같이 상반된 이해는 다가오는 몰락의 예감을 받아들이는 두 집안의 태도 차이일 뿐이었던 것은 아닐는지.
그런데 ― 이쯤 되면 왜 이런 얘기를, 그것도 소설이 차지하기로 된 공간을 빌려 쓰고 있는가를 묻는 이들이 생길 때도 되었다. 거기 대해 홍길동을 찾아서, 라고 대답한다면 너무 엉뚱할까? 『홍길동전』의, 『심청전』의, 『장화홍련전』의 전통이 우리 현대 소설에도 이어질 수 있는가를 살펴보고 싶었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하나 더 보태기로 하자. 가족사적 회고에 따르는 특이한 흥취도 이 수상쩍고 정체 모를 글쓰기의 한 동기가 되었을 거라고.
(1994년)
2016년 12월 1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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