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일간지 사회면에 '날인없는 유언장의 법률상의 효력문제'가 세인의 관심을 끌고 있기에, 유언장을 남기신 선생님을 비교적 잘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당신을 추모하는 뜻에서 글을 올립니다.
전 대학 4학년때부터 대학원(석사과정) 졸업시까지 한 학기 등록금에 상당하는 '운초장학금'을 받았더랬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학업을 무사히 마치는데, 당신의 도움을 상당히 받았더랬습니다. 이 때까지만 하더라도 전 당신을 잘 몰랐더랬습니다. 장학금을 전달받을 때마다 감사의 편지를 서울로 드렸지만, 답장이 없었으니까요!(^!^) 사실 이 분은 1970년 부산대학교 문리과대학에 사회사업학과가 처음 창설되었을 때 창설에 소요되는 재정적 지원을 몽땅 책임지셨다고 들었습니다. 또한 창설 후 한 학기동안은 '사회복지개론'을 본 학과에서 강의하셨답니다. 그럼 이 분은 사회사업과 무슨 인연이 닿아 있을까요? 바로 강남사회복지학교(현 강남대학교)를 졸업하신 다음, 한국어린이재단(국내 시설아동들과 외국 후원자들간의 결연사업)을 운영하셨답니다.
어째든 제가 더욱 잘 알게 된 것은, 대학원 졸업후 학교본부의 사정으로 사전에 예정되어 있던 자리가 잠시 지체되게 되었을 때입니다. 대학원을 졸업했는데도 마땅한 자리가 없기에 당분간은 두문불출하면서 공부만 하겠다는 생각으로, 식구들의 눈총에도 불구하고, 그간 창고로 쓰던 다락방을 완전히 새롭게 도배하고 나니까, 지도교수님께서 "당분간 한국사회개발원에 가 있거라!"고 주선해 주셨죠. 그리하여 79년 3월부터 5월21일까지 약 3개월동안 원장님을 모시게 되었답니다.
그때부터 소위 '어리벙실이의 상경기'가 시작된 겁니다. 물어 물어 찾아가니, 김포가도가는 길의 등촌동(영등포에서 인공폭포를 지나서)의 연구원엘 가니, 꼭 무슨 외국인 주택같기도 하고 무슨 수목원인 것 같았습디다. 지금도 말할 것 없겠지만, 당시에도 땅값이 상당한 왕복 8차선의 대로변, 일만 수천 평의 넓은 부지에 형형색색의 수목들 사이에 원색의 양옥집 두 채가 화사하게 자리잡고 있습디다. 그래서 인근 주민들은 백목련과 자목련 등이 화사한 늦봄에는 무슨 유원지처럼 놀러들 왔더랬죠.
많은 직함 중에서도, 그 분은 한국어린이재단과 한국원예협회를 중점적으로 운영하고 계셨습니다. 본채의 1층은 온통 도서실로, 2층은 재단 사무실과 내실로 꾸며져 있었습니다. 그 곳에서 전 특별히 하는 일이란 없었습니다. 아침에 직원들(경비원, 인부 제외한 노처녀 둘)과 원장님 모시고 모닝 커피한 다음, 도서실로 가 책을 본다든지 사회복지 도서들을 좀더 체계적으로 분류 관리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가끔 원장님이 보건복지부 혹은 대학 교수들과 점심 약속이 있을 때, 수행원 혹은 비서인 양 수행하면서 원장님께 무게를 실어드렸죠!
당신은 기독교 신자이면서 독신으로 한 평생을 보내셨습니다. 특히 철저한 無교회론자이셨죠. 근데, 왜 독신을 고집하셨는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제가 근무한 3개월동안 여성과 알콩달콩 이야기 나누는 걸 한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또 묘령의 여성으로부터 온 전화를 제가 받은 적도 없습니다.왜 그러셨을까? 그러니 경제적으로 상당히 안정되어 있으면서도 사실은 꽤 외로워셨을 겁니다. 한 밤중에 정원을 거닐고 계신 모습을 자주 목격했으니까요! 그 동안 있었던 에피소드 두 가지.
첫째, 저녁식사때 식탁에 앉으니,
원장님 : 미스터 김! 오늘은 한잔 합시다.
나 : ...(우씨! - 또...)
한잔하자는 제안을 처음 받았을 때, 결단코 '우씨!'라는 속 반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후는 왜 그랬을까요? 처음 제안을 하셨을 때, "와! 이런 면도 계시구나!"라고 했죠. 그런데 그 분은 절대 무리를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 '한잔'은 그야말로 딱 한잔인 겁니다. 그것도 술인지 물인지도 모를 포도주로만... 그러면서도 나보고는 더 하라고 하시지만, 어른이 안 하시는데 내만 어찌 ... 그러니 감칠나지요!
둘째, (문이 드르륵 열리면서)
손님 : 저 왔습니다.
원장님 : 으- 응
앉으라는 말씀이 없으니까, 손님은 엉거주춤 의자에 슬그머니 앉습니다. 전혀 살갑게 대하질 않습니다. 갑자기 원장님은 벌떡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시더니,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일을 인부들에게 확인하십니다. 그러면 손님은 원장님 뒤를 애면글면 따라 다니는 형국이 되고 맙니다. 얼마후 손님이 돌아가신 다음,
나 : 누굽니까?
최씨(인부) : 동생!
나 : 뭐 하시는데요?
최씨 : 하는 일 없어요! 괜히 돈이나 좀 얻어보까 싶어, 저렇게 찾아온다오!
지금껏 서론이 너무 길어졌습니다. 친애하는 여러 분!'날인없는 유언장'에 대한 관계 법원의 판결은 어떻게 나올 것 같습니까? 그 판결이 어느 쪽에 유리하든지와 상관없이, 법원으로서는 법률적인 판단을 치중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라는 점이 저를 우울케 합니다. 그런 점과 관련하여,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다'고 하지 않습니까? 즉, 법률적인 판단이 항상 최선의 판단이지는 않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재판관들은 형식적인 법률상의 요건에 치중하지 말고 고인의 참된 유지를 헤아리는 자세가 필요하겠지요! 자립하는 동생을 진정으로 바라셨다면, 보다 젊었을 때 도와 주셨겠지요! 허나, 그 동생도 이미 연세가 일흔이랍니다. 북망산이 내일 모레인 분에게 500억이라는 황금이 무슨 대단한 의미를 가질까요? 중세 신학자 아퀴나스는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것 그리고 품위 유지에 필요한 것 이외의 모든 것은 사회 공익에 써야 한다고 오랜 전에 외쳤더랬죠!
과연 여러 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특히, 강진영 변호사님 그리고 조일환 선생님! 고견으로 저희들 안목을 틔워 주시지요?
첫댓글짭디짭은 지식이지만 감히 한마디 드린다면, 법률행위에 있어서 형식적인 요건이 실질보다 우선하는 것들이 있읍니다. 그 형식이 갖추어 져야만 의사표시가 성립이 되어서 법률행위로서의 효력이 발생될 것으로 사료 됩니다. 김운초님도 충분히 그 사실을 아시고 계셨을 위치 이신데 그 요건을 갖추지 않으신것에 대하여 의
요즘 일이 바빠 카페에 들어올 기회가 없어 오늘에야 김교수님의 글을 보았슴니다. 뉴스시간에 고인에 대한 소식을 보고 가슴 찡~하는 감동을 경험했었는데, 그분이 김교수님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분이시고, 그래서 극히 일부분이나마 그분의 생활을 엿볼수있음에 다소나마 위안을 느낍니다.
법율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저를 포함해서)들의 경우에도 자기의 의사를 문서로 표시하고 그것을 확실이 입증하기위해 기명 날인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또 달리 자필로 의사표시를 하고 서명하면 그것만으로도 확실한 의사표시로 간주하기도 합니다.법율상 "기명 날인하여야 한다"라고 한것은 고인의 뜻과는 관계없이
제삼자가 어떤목적을 위하여 악용하는 경우를 방지하기 위함에 더무계를 두기위함이었다고 생각함니다. 다만 서면에 의사표시를 해놓고 확정은 차후 어느시점(사망직전이나 또는 확실한 결심이 섰을때)에 하기위해 날인을 그시점까지 유보했다는 추측이 가능하며 이부분은 양자간 시비의 대상이 되리라 봅니다.
그렇다고 하드라도 김교수님께서 소개해 주신 그분의 평소생활모습으로 볼때 아마도 날인을 하지않은 것은 날인을 유보한것이 아니라 "날인하여야 한다"는 법율조항에 대해 몰랐기때문 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분과 함께 생활을 했던(가능하면 오래 그리고 여러사람)분들의 고인에 대한 보다 상세한 증언이 확보된다면
아마도 송사를 조금은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수 있으리라고 기대해 봅니다.또한 그것을 대여금고속에 보관했다는 사실은 매우 종요합니다. 앞서 다른분들이 지적해 주셨듯이 법관은 법율적 테두리 안에서 판결해야하는 한계때문에 100% 달성은 무리라 생각되고 아쉽지만 10~30%선에서나마 고인의 뜻을 받들수 있지않을까 ?
첫댓글 짭디짭은 지식이지만 감히 한마디 드린다면, 법률행위에 있어서 형식적인 요건이 실질보다 우선하는 것들이 있읍니다. 그 형식이 갖추어 져야만 의사표시가 성립이 되어서 법률행위로서의 효력이 발생될 것으로 사료 됩니다. 김운초님도 충분히 그 사실을 아시고 계셨을 위치 이신데 그 요건을 갖추지 않으신것에 대하여 의
사표시가 아니 마음이 없었다고 볼수밖에 없지않나 (생각이 짭은 소견으로서는 )합니다. 따라서 그 기부행위는 무효이지않나 생각이 드는군요.
제 짧은 생각이지만 법관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판단해야 하는 한계가 있습니다. 법관이라도 법을 넘어서서 판단하는 것은 월권이될 것이고, 최종적으로는 대법원의 판결이나 판례에 의해서 결정되겠지만 교수님의 뜻을 연세대측의 변호인에게 전달하신다면
소송진행에 참고자료로서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됩니다. 저보다 더 전문가이신 강선배님의 고견이 기대되고 방송으로만 접하는 피상적인 내용보다는 깊은 사정을 알 수 있게해 주신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새상을 살다 가시는 분도 계시군요. 감동^^!)
그 돈을 찾지 할려는 동생분의 나이가 70세라는 기사를 보니, 인간의 탐욕을 보는 것같아,씁쓰리 합니다 그려...
요즘 일이 바빠 카페에 들어올 기회가 없어 오늘에야 김교수님의 글을 보았슴니다. 뉴스시간에 고인에 대한 소식을 보고 가슴 찡~하는 감동을 경험했었는데, 그분이 김교수님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분이시고, 그래서 극히 일부분이나마 그분의 생활을 엿볼수있음에 다소나마 위안을 느낍니다.
법율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저를 포함해서)들의 경우에도 자기의 의사를 문서로 표시하고 그것을 확실이 입증하기위해 기명 날인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또 달리 자필로 의사표시를 하고 서명하면 그것만으로도 확실한 의사표시로 간주하기도 합니다.법율상 "기명 날인하여야 한다"라고 한것은 고인의 뜻과는 관계없이
제삼자가 어떤목적을 위하여 악용하는 경우를 방지하기 위함에 더무계를 두기위함이었다고 생각함니다. 다만 서면에 의사표시를 해놓고 확정은 차후 어느시점(사망직전이나 또는 확실한 결심이 섰을때)에 하기위해 날인을 그시점까지 유보했다는 추측이 가능하며 이부분은 양자간 시비의 대상이 되리라 봅니다.
그렇다고 하드라도 김교수님께서 소개해 주신 그분의 평소생활모습으로 볼때 아마도 날인을 하지않은 것은 날인을 유보한것이 아니라 "날인하여야 한다"는 법율조항에 대해 몰랐기때문 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분과 함께 생활을 했던(가능하면 오래 그리고 여러사람)분들의 고인에 대한 보다 상세한 증언이 확보된다면
아마도 송사를 조금은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수 있으리라고 기대해 봅니다.또한 그것을 대여금고속에 보관했다는 사실은 매우 종요합니다. 앞서 다른분들이 지적해 주셨듯이 법관은 법율적 테두리 안에서 판결해야하는 한계때문에 100% 달성은 무리라 생각되고 아쉽지만 10~30%선에서나마 고인의 뜻을 받들수 있지않을까 ?
법율전문가가 아닌 제가 순전히 저의 상식의 범위내에서 말씀드린 것입니다. 아무튼 고인의 높은 뜻이 빛바래지 않고 우뚝 솟아 찬란하게 비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함니다. 김 교수님! 새해 복많이 받으시고 건달 즐달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