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완영 시 ‘외갓집 가는 날’
기차는 앞으로 가는데 산은 뒤로만 가고/ 생각은 달려가는데 강물은 누워서 가고/ 마음은 날아가는데 기차는 자꾸 기어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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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 기차 여행]
그리운 고향역에 시(詩)가 흐르다, 영동 황간역
권다현 여행작가
[여행스케치=영동] 어쩌면 기차역은 시를 닮았는지도 모르겠다. 흘러간 세월만큼 무수한 만남과 이별이 쌓이고, 하루해가 뜨고 지고 또 계절이 바뀌며 수많은 은유와 상징을 빚어낸다.
충북 영동에 자리한 황간역은 그렇게 탄생한 시들이 항아리째 익어간다. 사라질 위기에 처한 고향역을 지키려는 이들이 그림을 그리고 음악회를 열어 제법 옹골진 문화공간으로 재탄생했다.
기차가 다니기 시작한 지 올해로 115년째인 황간역은 한 세기가 넘는 어마어마한 역사를 품고 있다. 이용객이 줄어 사라질 위기에 처했던 기차역은 역장과 지역 주민들이 힘을 합하여 문화명소로 재탄생시켰다.
수시로 시화전과 음악회가 열리고 여행자들을 위한 무인카페와 자전거 대여 서비스도 운영된다. 마을의 오랜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공간들은 천천히 걸어서 돌아보기에도 좋다. 철도유산으로 가치가 높은 추풍령역 급수탑과 영동을 대표하는 여행지인 월류봉, 반야사, 노근리평화공원도 멀지 않다.
한 편의 시를 닮은 기차역
황간역은 지난 2015년 개설 110주년을 맞았다. 기차가 다니기 시작한 지 올해로 115년째, 한 세기가 넘는 어마어마한 역사를 품은 기차역인 셈이다. 하지만 삼각 지붕에 푸른 기와를 얹은 정겨운 옛 역사는 1988년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새로 지은 황간역은 기차를 타고 내리는 목적이 아니라면 굳이 찾아볼 이유가 없는 평범한 모습이다. 그나마 영동역과 멀리 떨어져 있어 꾸준하게 유지됐던 여객수요도 점차 줄어들어 보통역의 지위까지 위태로웠다. 평생을 기찻길 위에서 보낸 반백의 철도원은 이곳에 문화를 입히기로 했다.
지난 2012년 황간역에 부임한 강병규 역장은 사라질 위기에 처한 황간역을 살리기 위해 더 많은 사람이 기차역을 찾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고향역에 남다른 애정을 지닌 주민들과 함께 황간의 풍경을 담은 사진전을 열고 작은 음악회도 마련했다.
시골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항아리에 시를 적고 그림을 그려 기차역 곳곳에 전시하기도 했다. 대부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작품들인데, 그 배경이 황간이나 근처 추풍령이라 더욱 가슴에 와 닿는다. 시조문학의 큰 별로 꼽히는 고 정완영 시인도 힘을 보탰다.
그의 시 <외갓집 가는 날>에는 기차를 타고 가면서 만나는 풍경들이 묘사돼 있는데, 시인의 외갓집이 황간역에서 10km 남짓한 거리의 상주 모동이었던 것. 그 특별한 인연을 계기로 황간역은 수시로 시화전이 열리는 낭만적인 기차역이 되었다. 굳이 기차를 타지 않더라도 가보고 싶은 역이 된 것이다.
추풍령역 급수탑, 월류봉까지…주변 볼거리도 풍성
기차여행을 즐긴다면 근처 추풍령역의 급수탑을 놓쳐선 안 된다. 급수탑은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설치됐던 시설로, 추풍령역 급수탑은 현재 남아 있는 급수탑 중 유일하게 평면이 사각형으로 되어 있다. 급수탑의 유형이 표준화되기 이전인 1939년, 과도기적 형태로 지은 것으로 철도사적 가치가 높아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내부엔 워싱턴 펌프와 배관 시설 등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외벽엔 6·25전쟁 당시 총탄 흔적도 남아 있어 역사적 의미도 크다. 예전엔 추풍령역을 통해 관람 가능했으나 지금은 주변에 공원이 조성돼 언제든 이 특별한 철도유산을 가까이에서 감상할 수 있다.
영동을 대표하는 여행지인 월류봉과 반야사, 노근리평화공원도 황간역에서 멀지 않다. ‘달이 머물다 가는 봉우리’란 낭만적인 이름의 월류봉은 깎아지른 절벽과 그 아래로 흐르는 물 맑은 초강천, 그리고 한 폭의 동양화처럼 바위 끝에 올라앉은 정자가 아름답다.
최근에는 월류봉 주변으로 둘레길이 조성돼 이 같은 풍광을 천천히 걸으며 즐길 수 있다. 반야사의 절경은 황간역과 인연을 맺은 정완영의 시조 <반야사>에도 등장한다. “숨어 핀 들국화가 별빛처럼 뜨는 골짝”, “부처가 이 골에 산다고 물소리가 아뢰더라” 등 맑고 깨끗한 절집 풍경을 청아한 시어로 담아냈다.
한국전쟁 당시 이뤄졌던 노근리 양민학살사건의 비극을 기억하기 위해 마련된 평화공원도 꼭 한번 들러보길 권한다. 여전히 아픈 과거를 기억하고 있는 쌍굴다리와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공간은 전쟁과 평화의 의미를 다시금 곱씹어보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