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망들 1
흰옷은 입는 순간 흰 것이 아니게 되고야 만다
소맷부리를 세탁비누로 문지르며 물 앞에 서 있었지
비누는 모서리가 둥글고 희지 않은 것
황망히
손끝이 허옇게 불어 터지도록
새로 만든 흰 거품들이 더러워지는 것을 보다가
우리 어디에 묻힐까
잠 대신 어디에
몸에 익은 더러운 이불을 꼭 쥐고
깨끗하게 파묻힌 잠을 모두 잃어버린 사람들과
묻힐 곳을 찾으러 왔어
눈덩이를 부풀리듯이 경단을 빚듯이
작고 연약한 잠을 굴리면서
여기가 장소일까?
대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여긴 참 잠들기에 좋으니까
아무튼 우리의 집이라고
집은 습관이나 마음의 상태라고 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했어
정말로, 정말로 멀리 와 있어
어디서 멀어진 것인지 알 수도 없을 만큼 멀리
어디를 둘러봐도 아이들이 잠들 때까지 들려줄 이야기가 밤낮없이 꾸벅꾸벅 조는 사람들의 평화로운 얼굴이 있는 곳
난폭한 졸음 사이로
혼곤한 잠 안팎으로
결말 없이 스르르 점멸하는 이야기가 굴러다니는 곳
여기서 나는 이야기의 천재가 된 것 같고
잊은 것만 빼곤 무슨 이야기든 할 수 있었지
겪고 본 것, 상상한 것, 있었던 일과 없었던 일
오거나 오지 않은 시간을, 지나간 시간을
번복되는 지금을
기억은 충분히 허약하지 않고
시간을 부리고 다니면서
언제나 갓 캐낸 것처럼 신선한 얼굴을 들이밀지
아무것도 꿈은 아니다
형광등이 켜진 환한 방을 서성이느라
백주 대낮을 다 흘려보냈지
자연스럽게 주어지지는 않는 빛
형광등이 켜진 방에서
한낮을 상상하기
한밤중을 상상하기
상상한 것을 믿기
산을 무서워하는 사람이 높이를 생각하는 상상력
그런 것을 용기라고 부른다면
빛남 없이
빛에 속한 채
잠든 사람에겐 도무지 거리 감각이란 게 없고
무람없이 서로의 잠 속을 헤집으며
반복되는 잠 반복해서 살기
죽도록 사랑하고 싶음
처음부터 다시
어떤 흰 것도 기억 속의 흰색만큼 충분히 희지 않네
전망들 2
곤히 잠들었을 때 가장 어여쁜 법이지, 누구라도 천사같이. 그 말이 무서워서 울었던 것은 어른이 되고도 한참 뒤의 일이었어요,
선생님,
잠에 잡아먹히면 약도 없다는데요.
호랑이가 물어 가도 잠만 쿨쿨 잔다는데요.
어여쁜 얼굴로 곤하고 막연하게.
잠 다음만 생각해
꿈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꿈은 거울도 아니고 예언도 아니고 끄는 것을 깜빡한 전등 같은 거다. 알지?
어깨를 두드리며 말해주는 내 친구들
뜬눈으로 오는 하루에도
눈이 마주치면 재채기 같은 웃음이 터져 나오는
유리알 여물듯 맑게 웃는 친구들
굴러다니고 굴러떨어지고
닿는 사물마다 다른 소리를 내며 기뻐하는
아름답게 깨지는 웃음을
웃으면서 우리는
내일은 정말로 죽어야겠다
마음먹은 날에도
게임 판을 놓고 마호가니 테이블에 둘러앉아
이 피로가 원하는 것을 찾아보려 했어
앉으나 서나 누워서도 한 칸 한칸 어디로든 전진하는 세계
전 재산을 모조리 잃고도
다음 칸에서는 끈적한 여름 바닷가에 드러누워 칵테일을 마시는 세계
게임판 위에서 우리 중 아무도 죽음을 원하지 않았지
주사위를 굴려
악착같이, 굴복을 모르고, 아득바득, 노곤함이 딱딱하게 굳도록 기다리면서, 맹점을 뚫어져라 응시하면서
잠과 싸우면서
잠드는 법이 없는 못난 얼굴로 둘러앉아서
터무니없이 시간을 낭비하면서
아직도 너무 젊은 우리, 숟가락 쥘 힘이 남아 있는지 알 수 없도록 피로한 우리, 아직도 막막하도록 막연히
젊은 우리의
샅샅이 뒤질수록 넓어지는
골몰하고 생각할수록 좁아지는 잠
드디어 납작해진 잠
돌발적으로 튀어나온 돌부리를 깎아내며 걸어간 사람들이 있었던 것처럼
너럭바위 같은 잠
삼삼오오 모여 앉아 김밥을 까먹을 양지바른 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잠
무엇으로든 살아볼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다면 저는 늘 이 모든게 꿈인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선생님. 꿈이라면 무엇이든 아름다운 정물처럼 바라볼 수 있잖아요. 깨진 유리 항아리에서 흐르는 액체, 한적한 시골길의 뒤집힌 자동차, 촛불을 든 여자들, 덤불 속에 잠든 것처럼 누운 개・・・・・・
잠에 진 사람들의
곱게 뒤집혀 노곤하게 쪼개진
이 예쁜 얼굴들을.
당신은 당신의 깨끗한 이불을 덮고 단내 나는 입을 반쯤 벌리고 코를 골며 고단하게, 그리고 곤히 주무시고 있겠지요.
우리가 잠들지 않는 밤에
꿈들은 어디로 갈까요, 선생님?
나 정말 아름다운 곳에 와 있어.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워서, 꿈인가 생시인가 싶은 광경이라서 여기서 꾸는 모든 꿈은 현실보다 더 생생하게 느껴지는 거 있지.
거기서 내가 본 것이 어떻게 아름다웠는지
눈을 감고도 눈앞에 훤하도록 보여주려고
긴긴밤 내내 쓴 엽서를 보내면
엽서 앞장의 사진이 정말 아름답더라, 정말 아름다운 곳에 있구나
답장하는
눈 밝은 내 친구
피로를 모르듯이
깨끗하고 바스락거리는 눈꺼풀을 덮고
곤히 잠들어 아름다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