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나들이
(2) ‘및’ 쓰임과 수동형 표현
♤ ‘및’을 자주 쓰는 예를 살펴보면,
누가복음 6:14~16<한글 개역>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 주신 시몬과 및 그 형제 안드레와 및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셀롯이라 하는 시몬과 및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및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누가복음 6:14~16).
여기 누가복음 6:14~16 세 구절에서 ‘및’ 자가 무려 여섯 번이나 나온다. 그때 한글 개역 성경을 번역한 분을 만난다면 꼭 묻고 싶다. 왜 불필요한 글자를 이렇게 많이 썼는지.
이 본문을 <표준 새번역>에 보면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불필요한 ‘및’ 자가 하나도 들어가지 않아 간결하고 그 뜻도 바로 전달된다.
“14 열둘은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15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열심 당원이라고도 하는 시몬과 16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배반자가 된 가룟 유다이다.”
이제 우리 생활 속에 별생각 없이 쓰고 있는 어색하고 불편한 말의 습관에 대해 좀 더 돌아보자. 특히 자기의 주관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책임회피형 표현을 아주 많이 쓰고 있다.
♤ 창세기 18장에 보면 하나님이 장막에 사는 아브라함을 방문하는 모습이 나온다. 이 내용 중 2절 모습을 요즘 흔히 하는 말투로 좀 과장해서 바꿔보면 이렇다. 곧 수동형 문장이다.
“눈이 들어져 보여진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세워져 있는지라. 아브라함은 그들이 보여지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 나가져서 영접하여지므로 몸이 땅에 굽혀져서 인사하여졌다.”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문장인가? 실상의 내용은 이렇다. 창세기 18:2 “눈을 들어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개역 개정판)(When he saw them, he hurried from the entrance of his tent to meet them and bowed low to the ground. <NIV>)
아브라함이 장막에 앉아 있다가 지나가는 나그네 세 사람을 보았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는 자신이 원해서 그들을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서둘러 나아가 허리를 굽혀 머리가 닿도록 절을 한 것이 아닌가. 그는 그 뒤로도 자원해서 나그네 세 사람을 기쁜 마음에서 대접했다.
♤ 또 누가복음 15:20에 보면, 탕아인 둘째가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회개하여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를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이 부분을 수동형 문장으로 바꾸어 보면,
“탕아가 일어나져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께 그가 보여지고 측은히 여겨져 달려나가져서 목에 안겨져 입이 맞춰졌다.”
정상적인 문장은 이러하다. 누가복음 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개역 개정판)
원래 이런 수동형 문장은 우리 말에는 없는 표현이다. 우리가 처음 영어를 배울 때, 수동형 문장을 배웠다. 하지만 수동형 문장도 우리 말로 할 때는 능동형 문장으로 표현해야 한다.
예를 들어, I was born in 1945. 이 문장을 번역하면 ‘나는 해방둥이다.’이지 이것을 ‘나는 행방되는 해에 태어나졌다’고 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렇게 일상에서 수동형 문장의 표현을 아무런 제어장치도 없이 마구 쓰고 있으니 어쩌면 좋단 말인가? 우리가 이렇게 일상에서 수동형 문장의 표현을 아무런 제어장치도 없이 마구 쓰고 있으니 어쩌면 좋단 말인가?
말과 글을 바르게 표현하지 않으면, 탕아 자신이 회개하여 애통해하는 마음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행여 부끄러워 어두울 때 잃은 아들이 찾아올세라 밤마다 문 열어놓고 기다리는 애끊는 심정은 어떠하며, 어느 날 헐벗은 사람이 힘없이 걸어오는 모습을 보고, 단번에 그가 아들인 것을 알고 달려가 기쁨과 감격으로 끌어안는 아버지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만약 그의 행동이 누구에게 떠밀려 했다면 그 애타던 마음은 무엇이 되는가? 우리는 남이 한 행동에 대해서도 또. 자기 말이나 생각에 대해서도 소신 있고 바르게 표현해야 한다.
우리의 실생활에서 수동형 말을 들어보려고 한다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아주 잘 들린다. 아나운서는 말하기 훈련을 전문으로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경우는 드물지만, 특히 운동선수들의 인터뷰를 들어보고, 또 그 경기를 해설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가관(可觀)이 따로 없다.
~~~ 김영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