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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편 / 시편 30편 1-12절
찬송 / 434장 · 나의 갈길 다 가도록
성서 / 신명기 34장 1-8절, 빌립보서 3장 12-17절
말씀 / 내가 하는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빌립보서 3장 14절)
지난 10월 1일, 아시안 게임 롤러스케이트 3000m 계주 결승전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선수들이 금메달을 딸 것이라 기대하는 경기였지요. 예상했던 대로 우리나라 선수들이 선두로 잘 달렸습니다. 그런데 결승선을 코앞에 두고, 마지막 주자가 갑자기 몸을 일으켜 세우며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만세를 불렀습니다. 우승을 확신하고 세리머니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바로 뒤에서 달려오던 대만 선수가 온몸을 날리며 발을 앞으로 쑥 내밀었지요.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 선수들의 기록이 4분 05초 702였는데, 대만 선수들의 기록은 4분 05초 692였습니다. 그야말로 간발의 차로, 0,01초 차로 대만 선수들이 먼저 들어온 것입니다. 한순간의 자만이 금메달을 은메달로 바꿔버렸습니다. 물론 금메달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은메달도 동메달도 중요하고, 메달이 없어도 최선을 다했다면 박수를 받을 만하지요. 그렇지만 한순간의 자만으로 우승을 놓치고, 동료들에게도 민폐를 끼치고 만 것입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운동 경기에서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요. 흔히 우리 인생은 등산과 같다고 말하는데, 산은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오는 데 더 힘을 써야 합니다. 올라가는 길보다는 내려오는 길이 더 위험합니다. 그래서 인생도 등산도 내려올 때 더욱 마음을 비우고 더욱 겸손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빌립보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바울의 편지 한 대목을 함께 받아 읽었습니다. 빌립보서는 계절로 치면, 소슬한 가을 편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참 아름다운 편지지요. 요즘 가을이 깊숙이 익어가는 이 계절에, 빌립보서를 우리에게 보낸 편지로 마음에 담았으면 좋겠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어떤 교회였을까요? 빌립보는 그리스 마케도니아 지방의 중심 도시였습니다. 로마로 가는 길목에 있어서 아주 번성했던 도시입니다. 그리스의 종교와 문화도 융성했지요. 빌립보 교회는 거대하고 화려한 신전들이 즐비한 도시에서 변변한 예배당 하나 없었지만, 그러나 따뜻하고 애틋한 사랑 가득한 교회였습니다.
바울 자신에게 빌립보 교회는 각별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그리스 지역에 세운 첫 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에서 처음 얻은 신자가 자주 장사 루디아였지요. 자주색 옷과 옷감을 파는 여자였습니다. 당시에 자주색은 황제의 색이었기 때문에 아무나 입을 수 없었습니다. 귀족들이나 계급에 따라 자주색이 들어간 옷을 입을 수 있었지요. 자주색 염색 자체가 아주 까다로워서 자주 옷은 아주 고가로 팔렸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명품이라 할 수 있지요. 루다아라는 유대인 여자가 자주 장사를 했다는 것은, 아마도 전쟁이나 질병으로 남편을 잃고 이방 땅에서 장사로 성공했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어쨌거나 이 루디아의 집에서 빌립보 교회의 첫 모임이 이루어졌습니다. 루디아를 비롯한 빌립보 교회의 교인들은 어려운 중에도 바울을 적극적으로 후원했습니다.
이렇게 빌립보서는 바울에게 각별한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빌립보 편지는 바울이 감옥에 갇혀서 쓴 편지지요. 편지에는 빌립보 교회를 생각하는 바울의 애틋한 마음이 절절히 배여 있습니다. 편지를 쓰는 바울은 감옥에 갇혀서 수난당하고 있고, 빌립보 교회에도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지만,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오히려 기뻐하라고 거듭 당부하지요. 마냥 잘나가서가 아니라 어려울수록 더욱더 주 안에서 기뻐하자는 것입니다. 빌립보 편지에는 아마 교회에서 함께 불렀을 ‘그리스도 찬가’도 있습니다. 그리스도 찬가는 승승장구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낮아지신 그리스도,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리스도, 겸비하신 그리스도를 노래하는, 참으로 아름답고 은혜로운 찬송입니다.
무엇보다 빌립보서에는 바울이 빌립보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을 생각하며 드리는 기도가 나옵니다. 바울은 어느 한 교회에 머물며 목회한 게 아니라 계속 복음을 전하며 전도 여행을 다녀야 했지요. 그렇지만 바울은 자신이 세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생각하며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이 기도에는 목회자로서의 바울의 모습이 배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생각하면서 어떤 기도를 드렸을까요? 바울이 드린 기도가 1장에 나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생각하며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내가 기도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통찰력으로 더욱 풍성하게 되어서, 여러분이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순결하고 흠이 없이 지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의의 열매로 가득 차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게 되기를, 나는 기도합니다.”(1:9-11) 이것이 바울의 기도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게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는 것, 그것이 무엇입니까? 일찍이 종교개혁자 칼뱅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우리의 존재 이유라고 말했지요. 그리스도인이란, 신앙인이란,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는 사람들이다, 그 말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그렇게 되기를, 우리가 그런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한다 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을까요? 목이 터지라며 주여 삼창을 외치고, 확성기를 틀고 하나님 찬양 대회라도 벌여야 할까요? 아닙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지식과 통찰력으로 더 풍성하게 되어서 분별할 줄 알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저 무조건 믿음 무조건 사랑만 외친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무엇이 신앙이고 무엇이 맹신인지, 무엇이 사람이고 무엇이 좀비인지, 뭐가 된장이고 똥인지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 돼야 한다, 그 말이지요.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사랑은 지식과 통찰력으로 풍성해집니다. 그렇게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라야 자신을 순결하게 지킬 수 있습니다. 믿음 좋다는 사람이, 사랑 뜨겁다는 사람이 분별력 없이 전광훈에게 가면 무엇이 되겠습니까? 분별할 줄 모르는 신앙은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없습니다. 그렇게 분별할 줄 아는 믿음으로 자신을 지키는 사람이라야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의의 열매로 가득하게 되고, 마침내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 그의 믿음과 사랑이 지식과 통찰력으로 풍성하게 되어 분별할 줄 알게 되고, 자기 자신을 잘 지켜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의의 열매로 가득하게 되고, 마침내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는 사람, 이런 사람이 누구일까요? 도대체 이렇게 완벽한 신앙의 모범, 신앙의 표준이 될 만한 사람이 하늘 아래 땅 위에 있을 수 있을까요? 있답니다. 그렇게 완전한 인간, 성숙한 신앙인,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이 본받고 따라야 할 사람이 있답니다. 그게 누구일까요? 바울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모범으로 삼고 본받아야 할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17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다 함께 나를 본받으십시오.” 여기 바울이 소개하는 사람은 바로 바울 자신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사도 중의 사도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사도가 된 이후로 바울만큼 오롯이 복음을 위해 헌신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바울이 진정한 신앙인이요 능력의 사도라는 것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래도, 바울이 자기 자신을 완전한 신앙인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이 본받아야 할 성숙한 신앙인으로 자천한 것은 너무 이상하지요. 다 함께 나를 본받으라는 이 말, 너무 당당해서 많이 당혹스러운 바울의 이 말, 무슨 뜻일까요? 다른 데서는 자신의 약점밖에 내세울 게 없다고 말했던 바울이 실제로는 자만이 하늘을 찌르는 위선적인 인간이었다는 말일까요? 아니지요. 그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본받으라 하는 완전한 사람은 이런 사람입니다. 바울의 말을 직접 들어봅시다. 오늘 우리가 받은 본문 12-14절입니다.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오직 한가지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에 무슨 말을 더 보탤 수 있겠습니까? 바로 이런 사람이 바울이 말하는 완전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완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거꾸로, 자신이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완전한 사람입니다. 바울이 자신을 당당하게 천거하는 것은, 자신이 완벽한 인간이라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아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바울이 추천하는 것은 바울이라는 한 개인이 아니라 그렇게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사람들 모두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렇게 서로 본보기로 삼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보듬으면서 부르심을 향해 함께 달려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신명기에서 모세의 마지막 장면을 함께 읽었습니다. 모세는 누구입니까? 율법의 중심인 모세오경의 주인공이지요. 하나님을 직접 뵈옵고 거룩한 율법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파라오의 노예로부터 해방한 민족의 지도자입니다. 그 척박하고 막막한 광야에서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그가 아니면 누가 이끌 수 있었겠습니까? 신명기는 모세 오경을 마무리하면서, 그 후로 다시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나오지 않았다고, 그가 한 것처럼 큰 권능으로 놀라운 일을 한 사람은 다시 없다고 단언했습니다.
모세는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영웅이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가 그토록 소망했던 그 약속의 땅을 한 발짝도 밟아보지 못했습니다. 모세는 약속의 땅을 바라보기만 하면서, 이방 땅 모압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사람이지만, 모세는 그 무덤조차 남기지 못했습니다. 사실 성서는 모세뿐 아니라 그 누구도 영웅화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거의 모든 나라와 민족들이 자신들의 지도자를 영웅으로 만드는 것을 넘어서 신격화했지요. 죽음보차 부정하기 위해 거대한 무덤을 만들지 않았습니까? 세상의 뭇 통치자들이 자신을 완전한 인간으로, 아니 영원불멸의 신으로 만들려 했던 것을 생각하면, 무덤조차 남기지 않은 모세 이야기는 참으로 놀라울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영웅이나 완전한 인간을 통해 역사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완벽한 인간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약함을 잘 아는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만이, 다만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짐짝 뒤로 숨어 있던 바울을 부르셨고, 들판에서 양 떼를 돌보던 막둥이 다윗을 부르셨습니다. 허위와 폭력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입술이 부정하다고 몸부림치는 사람 이사야를 부르시고, 거짓과 불의가 난무하는 시대에 눈물밖에 없는 어린아이 예레미야를 부르시고, 불의와 부정이 판을 치는 때에 농사꾼 아모스를 부르시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무지랭이 죄인이라고 멸시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부르셔서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라 하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오늘도 내가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 겸손한 사람을 부르십니다.
오늘 우리 기독교는 사람들의 신뢰를 잃어버렸습니다. 수많은 이단이 극성하며 세상을 어지럽혔지요. 그런데 이 사이비 이단의 한 가지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면, 그게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교주를 절대화하는 것입니다. 한낱 인간에 불과한 교주를 완벽한 존재라고 신격화하는 것이지요. 교주가 기도하면 부자도 되고 병도 다 낫는다고 속입니다. 그렇게 교주를 신으로 만드는 곳에서 신앙이란 무엇이겠습니까? 맹신이지요. 맹신은 신도를 좀비로 만듭니다. 그렇게 좀비로 만드는 목적은 무엇일까요? 맹신하는 좀비 신도의 재산을 약탈하고, 신도의 몸까지 강탈하려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장 취약한 사람들을 약탈하고 갈취한 돈으로 그들은 무엇을 할까요? 신도들에게 하늘의 천국을 팔아 강남에 천국 같은 아파트를 사들이고, 밤이면 한강의 경치를 바라보며, 천박하고 야비한 자본의 권능을 누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지독한 맹신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이렇게 흔들리는 시대에 어떤 목사와 어떤 신도가 필요할까요? 우리의 시대야말로 나의 입술이 부정하다는 것을 아는 목사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나는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신도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나는 약한 존재라는 것을 뼈저리게 아는 사람 아니겠습니까? 지금 이 나라는 또 자기 자신을 도무지 한사코 모르는 안하무인의 통치자 때문에 얼마나 답답하고 얼마나 깜깜합니까? 하늘 두려운 줄도 모르고 국민이 무서운 것도 모르고, 다만 자기네 배를 하나님으로 삼고,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고, 땅의 것만 생각하는 자들의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짜 성숙한 신앙인은 자신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약함을 뼈저리게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끝까지 자만하지 않고, 오롯이 부르심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입니다. 사실 우리는 얼마나 약한 사람들입니까? 우리의 육신은 얼마나 연약하며 우리의 세월은 또 얼마나 덧없이 빠릅니까? 다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야 우리가 어떻게 이 험한 세상을 살아올 수 있었으며,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바라보고 끝까지 잘 달려갈 수 있도록, 성령께서 우리를 능력으로 든든히 붙들어주시고, 언제 어디서나 사랑과 은혜로 함께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