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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tween The Bars / Elliott Smith 지식채널e
매년 세계는 700만 톤의 커피를 생산하고 4천억 잔의 커피를 마신다. 100ml 커피 한 잔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커피콩은 100개, 커피콩 100개의 현지 가격은 10원.
이윤의 1%는 소규모 커피 재배농가의 몫 이윤의 99%는 미국의 거대커피회사, 소매업자, 중간거래상의 몫
1%에 속하는 전세계 커피 재배종사자는 50여개국 2천만명, 그들의 대부분은 극빈자들이며 그들 중 상당수는 어린이다.
[ 아프리카는 어떻게 몰락했는가? ]
우리는 보통 아프리카를 대부분 아주 빈곤한 국가들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중앙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이 지금처럼 최빈국가로 전락할 정도로 가난한 나라들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20세기까지 노예상 들의 수탈도 아프리카를 괴롭혔지만 실제 아프리카의 전통사회가 몰락하게 된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도입되면서 공업 제품에 대한 수요처로서 새로운 구매능력이 필요하게 되면서부터입니다.
아프리카도 사실 아시아와 더불어 벼농사를 주로 짓는 지역인데 이런 전통적이고 안정적인 순환형 농법에서 제국주의적인 단작 경영, 소위 플랜테이션형 기업농-대표적으로 커피 농사-과 만나면서 이것이 초기에는 상당히 높은 이윤을 올려주었습니다
그러나 6-70년대에 자원 선물시장이 등장하면서 선진국들이 자국에 커피나 설탕을 공급하는게 매우 안정적으로 변하면서 아프리카 같은 신생국들이 더 이상 커피 등의 플랜테이션 단작으로 부를 창출하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즉 커피농장들이 더 이상 원가보존도 어려워 져서 문을 닫았습니다
전통적으로 벼농사를 짓던 아프리카인들이 다시 기아를 면하기 위해서 벼나 콩을 재배하고 싶지만 이미 커피를 재배한 땅은 더 이상 작물을 재배할 수 없는 죽음의 땅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그 결과 발생한 굶주림의 행렬이 아프리카 전역으로 퍼져나가게 된 것입니다.
실제로 아프리카 사람들의 삶이 어려워 진 것은 1960년대 이후의 일이고 이때 까지만 해도 오히려 우리나라보다도 국민소득이 높았습니다.
만약 우리가 쌀과 농업을 오로지 경제적 관점에서 하나의 산업으로만 보았을 때, 최근에 많이 퍼져가는 인식처럼 쌀을 포기하고 핸드폰을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니냐? 는 식으로 갔을 때 극단적으로 아프리카와 같은 상황도 오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을까요?
[ 커피의 역사 ]
처음에 커피는 에티오피아와 동아프리카 해안지역에서 캐러밴이 가져다 보급했으나 나중에는 배에 실려 홍해를 건너 멀리까지 전파되었다.
이런 이유로 당시 중동 지역에서도 커피는 부자들이나 향유할 수 있는 값비싼 기호품이었고 일반인들에게는 통증을 완화시켜주는 의약적 목적으로 활용되었지 매일 마시는 음료는 아니었다.
1450년에 에티오피아를 여행한 제말 에딘에 의해 커피관목의 경작법과 음용법이 예맨에 전해진 이후 아랍세계에서도 자체 생산하게 되자 커피가격은 싸지고 널리 보급되기 시작한다.
영국 최초의 커피 하우스는 1650년 대학 도시인 옥스퍼드에서 탄생했다. 이를 계기로 2년 뒤엔 런던을 거쳐 영국 전역으로 퍼져나간다.
1700년에는 런던에만 수 천 개 있었고 커피 하우스에서는 커피뿐만 아니라 홍차, 초콜릿 같은 유럽 외부에서 수입한 음료들을 팔았다.
유럽에서도 원두 커피콩이 가진 그 특유의 쓴 맛과 향기 그리고 잠을 쫓는 독특한 기능 등으로 때로는 당국에 의해 판매금지나 전매품으로 취급되기도 했다. 그 밖에도 오랜 세월 유럽의 전통 음료로 자리 잡아온 와인과 독일의 맥주가 커피의 상용화를 가로막는 큰 장벽이었다.
이런 수많은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커피 향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일단 유럽에 퍼져 나간 커피향기는 유럽의 문화는 물론 경제 정치영역에 까지 커피의 본고장인 중동이나 아프리카를 훨씬 능가하는 폭발적 영향력을 지닌 문화 그 자체로 번져 나갔다.
그 매혹적인 향기와 맛은 유럽의 문학, 음악, 미술 등의 예술 분야뿐만 아니라 프랑스 등 유럽 시민혁명의 사상적 산실이 카페라는 점에서 그 촉매제의 역할까지 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그 문화가 다른 세계에 끼친 파급력을 결코 매혹적이거나 고소함과는 거리가 먼 오히려 정반대로 나타난다.
커피는 열대 또는 아열대 지방의 일부지역에서나 재배 가능한 작물이기 때문에 유럽에서 그것을 자급재배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고소하고 매혹적인 커피향기가 유럽의 카페와 가정으로 퍼져나가는 만큼 그들은 자신의 식민지에다 커피와 설탕의 플랜테이션을 확대시켜 갔다.
그래서 커피는 이제 또 다른 형태의 금이 되어 지구상에 노예를 양산하게 되었다.
유럽의 예술문화와 혁명의 촉매제로 그윽히 피어오르던 커피향도 실은 식민지 플랜테이션의 노예노동자들이 풍긴 짙은 피땀 냄새의 화신이었던 것이다.
[ 낙원을 지옥으로 만드는 커피 플랜테이션 ]
1823년 프랑스와 스페인의 전쟁을 앞두고 커피거래소가 값을 좌지우지 하고 있을 때 브라질 커피의 생산량은 급속으로 늘어났다.
열대태양의 혜택아래 오랜 세월동안 자라온 숲의 낙엽으로 퇴적된 비옥하고 순결한 다공성 토양이 커피재배 적지인데 브라질이야 말로 바로 이런 토양조건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이 같은 토질과 기후조건에다 브라질의 노동조건이 커피 생산량을 폭증시켰다.
플랜테이션 농장주들은 그 악명 높은 노예무역으로 아프리카의 서쪽해안과 동쪽해안으로부터 니그로 노예를 계속 수입했었다.
그래서 1888년까지도 브라질에는 발목에 쇠사슬을 채우는 노예제도가 있었다고 한다.
브라질이 커피생산 대국으로 부상하자 이에 자극받은 식민주의자들은 커피의 대 소비지로 부상하던 북미와 가까운 중앙 아메리카의 멕시코, 코스타리카, 엘살바도르, 과테말라에 이어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콜롬비아, 페루에다 플랜테이션을 만들었다. 그러나 1930년경 이들의 총 수확량은 브라질 수확량의 6분의 1에 불과했다고 한다.
동남아 지역에도 플랜테이션이 더 만들어졌다. 프랑스인들은 인도차이나에 영국인들은 말레이 반도 남부 말라카해협에 면한 피낭, 말라카, 싱가포르와 부속도시지역에 커피 플랜테이션을 건설했다. 미국과 스페인 전쟁이후 미국역시 필리핀에서 자국의 커피 플랜테이션을 마련했다.
커피의 원산지인 에티오피아가 있는 아프리카를 그대로 둘리 없다. 프랑스인들은 마다가스카르, 기아나, 소말릴랜드 등을 커피 생산지로 만들었다. 그러나 아프리카 전 대륙의 생산 수치는 1930년 현재 브라질의 2천 900만 포대에 비해 54만 포대에 불과했다.
이 같은 커피 생산지의 이동과 부침은 19세기 식민지 정책 특징이 반영된 것이다. 즉 미래에 대한 아무런 고려 없이 새로 획득한 영토의 가능성을 모조리 착취하는 것이다
커피 단작재배는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데만 그치지 않고 순결한 열대의 처녀림과 처녀지의 가차 없는 유린 위에서 자행된다.
[ 케냐 여성의 저항 ]
아프리카의 케냐도 전통적인 자급자족농 사회였었다. 토지는 전통적으로 남성들의 소유이나 실제로 그 땅에서 농사짓는 일은 모두 여성들이 마을 단위의 협동으로 해왔다.
이같은 여성 주도의 전통 자급농을 케냐 정부가 세계은행의 차관으로 갈아엎고 그 땅에다 대신 커피를 재배시켜 수출하는 농업으로 이른바 구조 조정을 했다. 케냐의 자급 농업도 국제 분업에 편입시킨 것이다.
1980년에 커피 가격이 폭락했다. 남성들은 농장에서 수입이 없어지자 여성들에게 임금을 제때에 주지 못했다. 그러자 여성들이 커피 농장 일을 그만두는 사태가 벌어졌다.
여성들은 당시 커피나무를 베면 7년형에 처하는 무서운 케냐의 법률 때문에 커피나무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 대신 커피나무 사이에다 콩이나 토마토 등의 자가 소비를 위한 식량 작물과 채소들을 간작했다.
방치된 커피나무는 결국에는 고사될 수밖에 없었다.
케냐 정부와 현지 실정을 무시한 세계은행의 국제 분업적 커피 플랜테이션은 완전히 실패했다.
결국 말라 죽은 커피나무를 베어내고 여성들은 식량작물과 야채를 본격적으로 재배하여 자급하고 나머지는 지역 시장에 내다 팔아 지역 주민들의 자급에 이바지했다. 이 같은 케냐 여성들의 자급농 회복운동은 아프리카 남부와 동해안과 중부에까지 성공한 모델로 파급 확산되었다.
자급적 관점의 마리아 미즈는 이 운동을 다음 세 가지 측면에서 큰 의미와 함께 진정한 혁명 사례로 평가하고 이를 성취한 케냐 여성들에게 최대의 헌사를 바쳤다.
첫째로 케냐 여성들은 이를 통해 앞에서 말한 오늘의 3대 세계 모순인 남편들의 가부장주의와 케냐 정부라는 국가주의 그리고 지속 불가능한 착취체제인 세계 자본주의(세계은행)를 동시에 극복하는 가능성을 보였다.
두 번째로 그녀들은 자본에 고용되는 노동자(플로레타리아)가 되는 것을 거부했다.
그녀들은 돈 받고 자본에 고용된 노동자가 되어 노동조합 등을 만드는 근대적인 노동운동 방법 등으로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자신의 안전보장을 도모하지 않았다. 대신 처음부터 고용노동자로서의 자본 예속을 거부하고 옛날부터 내려오는 자급․자치적인 마을 공동노동과 공동체생활을 통해 이들을 극복했다.
세 번째로 그녀들은 새로운 생산수단의 쟁취라는 사회 변혁의 공식을 통하지 않고서도 자신들만의 노동과 삶의 방법으로 사회를 바꾸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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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향기로운 카푸치노의 유혹에서 그 누가 벗어날 수 있을까 ~~ 좋은글 감사합니다 ~
고맙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좋은 하루되셔요~~~^^
좋은날 되시길~~
우리나라도 일부에서 동티모르 등지와 직접 무역 형태인 공정무역을 시도하고 있지만 아주 미미하죠. 자급자족으로 회귀하지 않으면 진짜 아프리카 꼴이 날 수 있다는데 두렵기 까지 하군요. 좋은 글과 음악 고맙습니다.
그렇지요..식량을 자급자족하지 못하고 자주성을 찾지못하면 결국 우리민족도 아프리카처럼 되지말란 법이 없습니다.슬픈우리의 미래를 생각하면 우울하다는.....
글 잘 읽었습니다. 향기로운 커피 저변의 비참함, 위대한 케냐여성들에게를 보냅니다.
고맙습니다..들풀하나님..^^
클라라님 감사합니다.좋은글 읽게 해 주셔서......언제나 인간들은 정신을 차릴지요.자연을 지배한다고 생각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은 참 서글픕니다.
인간의 문제이기보다 제도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인간의 욕망을 끝없이 자극하는 사회제도는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감사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강제 노역(노예)들의 이면에는 부패한 정부가 있었을 것이다. 특권층에 의해서 자국민들이 아이들이 노예 처럼 일하게 되는 것이고... 순간 지금 당장에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결국 죽음의 땅이 된 것이다.
자본축적을 위해서라면 피도 눈물도 없는...결국는 제도의 문제이겠지요..^^
공돌이님이세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