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슬한 바람이 목덜미를 은근슬쩍 스치는 가을은 추어탕의 계절이다. 특히 시월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인 벼베기와 타작이 시작되는 남도의 가을은 수확과 추어탕을 끓여먹는 기쁨으로 채워진다.
서녘하늘에 노을이 곱게 물들 무렵, 벼를 벤 논의 물꼬에서 살이 통통하게 오른 누우런 미꾸라지를 잡는 그 재미도 그만이다. 하지만 그 살찐 미꾸라지에 소금을 뿌려 호박잎으로 박박 문질러 가마솥에 포옥 삶아 체에 거른 뒤 여러 가지 재료를 넣고 끓여먹는 그 추어탕의 향긋하고도 시원한 맛은 좀처럼 잊을 수 없다.
하루의 고된 노동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가면 노을이 물든 마루 저만치 저녁 밥상 위에 올려져 있는 추어탕 한 그릇. 막걸리 한 잔 꿀꺽꿀꺽 마신 뒤 맛보는 그 맛갈스런 추어탕의 맛을 그 어디에 비길 수 있으랴. 행여 누가 뺏어 먹을세라 밥 한 공기 서둘러 말아 후루룩 후루룩 소리를 내며 먹는 추어탕의 그 기막힌 맛!
아마 시골에서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은 깊어가는 가을 저녁 어둑해지는 마루에 가족들끼리 옹기종기 모여앉아 오손도손 나눠 먹는 그 깊고 오묘한 추어탕의 맛과 그 추어탕을 먹는 큰 기쁨을 결코 느끼지 못하리라.
▲ 미꾸라지는 맛이 달며, 성질이 따뜻하고 독이 없어, 비위를 주고 설사를 멈추게 한다
숙취해소, 발기불능에 탁월한 효과가 있는 추어탕
추어(鰍魚)의 미꾸라지 '추'(鰍)는 고기 '어'(魚)자와 가을 '추'(秋)자가 합쳐져 이루어진 글자이다. 그러므로 추어는 낱말 그대로 '가을에 먹는 고기'이며, 추어탕은 가을에 탕으로 끓여먹는 물고기란 뜻이다. 이처럼 미꾸라지 추'(鰍)자 한 글자만 풀어보아도 추어탕이 왜 가을철을 대표하는 음식이 되었는지 잘 알 수 있다.
추어탕은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초가을부터 제 맛이 나기 시작한다. 또한 추어탕에는 사람 몸에 아주 좋은 단백질과 칼슘, 무기질이 많아 가을에 먹으면 지난 여름 땀으로 빠져나간 원기를 북돋워준다. 게다가 미꾸라지는 단백질이 주성분이어서 탕으로 끓여 먹으면 피부가 고와지고, 세균 저항력을 높여주는 것은 물론 고혈압과 동맥경화, 비만증 환자에게도 아주 좋다고 한다.
허준의 <동의보감>에는 "미꾸라지는 맛이 달며, 성질이 따뜻하고 독이 없어, 비위를 주고 설사를 멈추게 한다"고 적혀 있다. 또한 중국 명나라 때 이시진(李時珍, 1518∼1593)이 엮은 약학서 <본초강목>에 따르면 "미꾸라지는 뱃속을 따뜻하게 덥혀주며 원기를 북돋우는 것은 물론 술을 빨리 깨게 하며, 발기불능에도 효과가 있다"고 되어 있다.
이처럼 맛도 좋고 건강에도 좋은 추어탕을 우리 나라 사람들이 언제부터 즐겨먹기 시작했을까. 이에 대한 자료는 정확치 않다. 추어탕에 대한 기록은 고려 말 송나라의 사신 서긍이 지은 <고려도경>에 처음 나온다. 하지만 미꾸라지는 우리 나라 강이나 논에 아주 흔했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민초들이 즐겨먹었으리라 짐작된다.
▲ 미꾸라지는 뱃속을 따뜻하게 덥혀주며 원기를 북돋우는 것은 물론 술을 빨리 깨게 하며, 발기불능에도 효과가 있다
▲ 추어탕 먹고 여름철 땀으로 빠져나간 원기 회복하세요
그 많던 미꾸라지 다 어디로 갔을까?
내가 어릴 때 살았던 동산마을(지금의 창원시 상남동 주변)에서는 추분이 지나고 들판의 벼가 누렇게 익어갈 무렵이 되면 마을 어르신들은 누구나 '도구를 쳤다'(논 주변에 도랑을 내고 논물을 빼는 것). 그맘때쯤 논에 갇힌 물을 서둘러 밖으로 빼내지 않으면 나락이 빨리 여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락을 벨 때에도 논바닥이 질척거려 몹시 불편하기 때문이었다.
그때 마을 어르신들이 논 주변에 친 도구에 가면 미꾸라지가 참 많았다. 특히 나락을 벨 때쯤 물이 질척한 그 도구에 가서 진흙을 파뒤집으면 살이 통통하게 오른 누우런 미꾸라지가 진흙에 박혀 요리조리 꿈틀거리고 있었다. 또한 그렇게 한 시간쯤 진흙을 파뒤지다 보면 금세 미꾸라지를 세숫대야 가득 잡을 수 있었다.
"허어! 이 많은 미꾸라지로 오데 가서 잡았더노? 고놈 참! 누르스럼한 기 추어탕 끓여놓으면 맛이 기가 차것네." "올개는 비도 적당히 내리고 태풍도 없다 보이(보니까) 나락농사만 풍년이 든 기 아이라 미꾸라지 농사도 풍년이 들었는 갑네." "퍼뜩 누구메(네 어머니)한테 갖다 주라. 그래야 오늘 저녁에 시원하고 구수한 추어탕을 맛 볼 수 있을 거 아이가."
그랬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농약을 거의 치지 않았기 때문에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들판에 나가면 미꾸라지뿐만 아니라 메뚜기와 여치도 참 많았다. 그 당시 나와 동무들은 학교에서 돌아오기만 하면 지게를 지고 소를 몰고 나가 그 흔한 미꾸라지와 메뚜기, 여치를 잡았다. 또한 마을 어머니들은 그때마다 맛갈스런 추어탕을 끓였고, 메뚜기와 여치는 볶아 밑반찬을 만들었다.
▲ 경상도에서 추어탕에 넣어먹는 방아잎, 독특한 향기가 난다
▲ 추어탕은 풋고추와 함께 먹으면 더욱 맛이 있다
미꾸라지를 체에 걸러낸 것은 '추어탕', 그냥 통째 끓인 것은 '추탕'
추어탕은 지역마다 끓이는 방법이 조금씩 다르고 맛 또한 제 각각이다. 추어탕을 끓이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라고 볼 수 있다. 하나는 미꾸라지를 삶아 으깨 체에 거른 뒤 호박잎과 시레기, 머위대, 토란대, 고사리 등과 함께 각종 양념을 넣고 끓여내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사골과 내장을 끓인 국물에 두부와 버섯 등을 넣고 살아있는 미꾸라지를 통째로 넣고 끓여내는 방법이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추어탕은 경상도나 전라도처럼 미꾸라지를 체에 걸러내 여러 가지 채소와 양념을 넣고 끓여먹는 것이 으뜸이다. 또한 서울이나 경기지역처럼 미꾸라지를 통째 넣어 끓인 탕은 보통 '추어탕'이라 부르지 않고 '추탕'이라고 부른다. 추어탕의 맛이 지역에 따라 다른 것도 이처럼 끓이는 방법과 들어가는 재료가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다.
내 고향은 경남 창원이다. 나는 창원에서 태어나 스무 살 허리가 꺾어질 때까지 창원에서 살았다. 그래서 그런지 추어탕, 하면 어릴 때 어머니께서 끓여주시던 그 맛깔스런 추어탕이 떠오른다. 그때 내 어머니께서는 나와 형제들이 세숫대야에 미꾸라지를 가득 잡아오면 미꾸라지를 깨끗한 물로 한 번 씻은 뒤 물을 붓고 굵은 왕소금을 뿌려 한동안 그대로 두었다.
이윽고 노을이 물드는 저녁 무렵이 다가오면 어머니께서는 그 미꾸라지를 소쿠리로 건져내 굵은 왕소금을 다시 뿌린 뒤 호박잎으로 몇 번이나 박박 문질러 댔다. 그리고 커다란 솥에 미꾸라지를 넣고 물을 부은 뒤 포옥 삶아 체에 걸렀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체에는 미꾸라지 뼈다귀만 남고 살은 모두 아래로 빠졌다.
어머니께서 추어탕을 만드는 방법은 간단했다. 체에 거른 그 미꾸라지 국물에 물을 조금 더 부은 뒤 된장과 고추장 몇 숟가락을 풀고, 호박잎과 시레기, 머위대, 토란대, 고사리 따위와 다진 고추, 대파, 생강, 마늘, 제피가루 등을 넣고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를 때까지 끓이다가 집간장으로 맛만 보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추어탕이 담긴 국그릇에 방아잎을 올리기만 하면 그 기막힌 맛이 혀끝을 끝없이 희롱했다.
▲ 추어탕은 지역마다 끓이는 방법이 조금씩 다르고 맛 또한 제 각각이다
추어탕 속에 어머니 아버지의 모습 어른거린다
"저어기 냉장고 속에 추어탕 넣어 놓았는데 왜 안 꺼내 먹어? 엄마가 맏사위 추어탕 좋아한다고 어제 저녁 내내 애써 끓인 건데?" "추어탕? 밥 먹기 전에 진작에 말을 하지. 그렇찮아도 요즈음 찬바람이 살살 부니까 추어탕 생각이 간절했는데." "멀쩡한 두 눈을 두었다가 어디에 쓸려고 그래. 평소 보이지 않던 게 냉장고 안에 들어 있으면 그게 뭔가 하고 꺼내서 열어보고 알아서 끓여 먹어야지."
지난 23일(일) 아침 9시. 마악 때 늦은 아침밥을 거의 다 먹었을 때 백화점으로 출근하던 아내가 내가 어슬프게 차린 밥상을 바라보면서 한 마디 툭 던졌다. 그 말뼈를 곰곰이 곱씹어보면 평소에도 추어탕을 참 좋아하는 내가 이미 끓여놓은 추어탕을 데워 먹을 줄도 모르느냐는, 항의의 뜻이 약간 숨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내의 그런 퉁명스런 말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장모님께서 직접 끓인 추어탕이 우리 집 냉장고 속에 커다란 냄비 하나 가득 들어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분이 썩 좋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장모님께서 끓이는 추어탕은 어릴 때 내 어머니께서 끓여주시던 그 추어탕과 꼭같은 맛이 나기 때문이었다.
그날 점심 때, 나는 정말 오랜만에 어머니의 손끝에서 나오는 그 깊은 맛이 감도는 추어탕을 게눈 감추듯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추어탕 속에 허연 막걸리 한 잔에 추어탕 국물을 드시며 '어, 시원하다' 되뇌이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추어탕을 국그릇에 퍼담을 때마다 제피가루와 잘게 쓴 매운 고추, 붉은 고추, 송송 썬 방아잎을 올리는 어머니의 거친 손이 자꾸만 어른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