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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관복음 강론 32 구원의 현실적 절박성에 대하여
마 12:46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12:47 한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하니
12:48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12:49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12: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인간에게는 심지어 혈연 공동체도 답이 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 한 몸 공동체 클레로스만이 답이라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심으로써 이 문제의 심각성과 절박성을 밝히셨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의 정체성이 혈연 공동체인 가족에서 기원한다고 생각하고 있고 가족이 가장 의지하고 신뢰할 수 있는 공동체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미가서를 인용하셔서 너의 원수가 집안 식구이라고 말씀하신 부분도 함께 결합이 되면서 너희가 믿고 의지하는 가족이라는 것이 너희에게 답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답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공동체가 답이라는 것이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속담이 실제로 객관적으로 가족이 답이 될 수 없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원수가 되게 하고 내가 검을 주러 왔다고 까지 말씀하신 것은 가족들 간에 불화를 일으키겠다는 말씀이 아니고, 혈연 관계의 실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드러내겠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지금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너희는 가족을 의존하면서 각자의 정체성을 가족에 두고 살아가는데 그것은 착각이며, 진정한 공동체는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라는 것이다. 따라서 결론은 가족들도 전부 하나님의 나라로 같이 들어와야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가족은 전도 영순위가 되는 것이지 가정을 버리고 교회로 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엄청난 오류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가족은 대치되는 개념이 아니고 가족이 다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오는 것이 우리의 간절한 소원인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만 마지막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요한 사도에게 “네 어머니다” 라고 말씀하신 것은 모친 마리아가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후대 기록을 보면 요한이 모시기도 했고, 소아시아 교회들이 세워지는 데 마리아가 굉장히 기여를 했다는 기록들이 있다. 그리고 예수님의 동생들인 야고보와 유다서를 쓴 유다도 나중에는 다 사명을 이어받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것을 다 미리 알고 계셨던 것이다.
따라서 이 장면은 혈연 관계를 의지해서 살아가는 정상적인 인간들의 모습이 착각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의 실상을 몸으로 미리 보여주시는 것이고,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이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가 얼마나 절박한 일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심지어 혈연 공동체도 답이 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 한 몸 공동체 클레로스만이 답이라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심으로써 이 문제의 심각성과 절박성을 밝히심
(마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페릿슈오/넘어서다, to be over and above)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혈연 관계를 최우선의 가치로 두고 살아가는 것이 대표적인 세상의 의다. 그런데 이런 인간의 의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의 체계 속으로 들어오지 못하면 너희는 하나님의 나라 구성원이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마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나님의 나라의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면서 인간의 의를 버리고 하나님의 의 속으로 들어와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라고 하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언약은 이른 비와 늦은 비로 대표되는 여러 가지 언약들이 있는데 그 모든 언약은 전제 조건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고 인간의 의를 버리고 하나님의 의 속으로 편입되는 것이다. 그러면 다른 모든 약속들이 이루어지기 시작한다는 말씀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구원이라는 것이고 이것은 너무나 시급하고 절박한 과제라는 것이다.
1. 구원 사건의 실체
- 세상 의를 기준으로 살던 삶에서 하나님의 의를 기준으로 살아가는 삶으로 바뀌는 사건이며,
- 각자 사람의 길을 걷던 자들이 함께 여호와의 길을 걷게 되는 사건이다
(갈 1:4)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의 죄(하마르티아, 빗나감) 때문에 자신을 드리신 것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우리를 이 악한(포네로스) 세상에서 건져내시기(엑사이레오, 끌어내다) 위함이었습니다
즉 메시아가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여호와의 길에서 벗어나서 인간의 길을 걷고 있던 우리를 다시 여호와의 길로 끌어당겨 놓으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골 1:13)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건져내셔서(뤼오마이, 구출하다)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고(메디스테미)
인간의 길을 걷던 우리가 단체로 여호와의 길로 옮겨졌다는 선언을 하는 것이다. 엑사이레오는 완전히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그냥 평범하게 잘 살고 있는 인간을 느닷없이 끄집어 내시는 것인데, 뤼오마이는 고통을 겪고 있는 자들을 구출해 낸다는 의미가 더 강하다. 끄집어 낸다는 의미는 같은데 뉘앙스는 그렇게 다른 것이다.
(엑사이레오와 뤼오마이는 70인역에서 출애굽 당시 히브리어 동사 나찰의 역어로 사용됨)
2. 구원 사건 전과 후의 모습
사람의 길에서 하나님의 길로 옮겨온 자들의 옮겨오기 전의 모습과 옮겨온 후의 모습을 비교해서 보는 것이다.
(1) 구원 사건 전의 모습
(딛 3:3)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들이었고 말을 듣지 않는 자들이었으며 길을 잃고 온갖 욕망과 향락에 종노릇하며 악한 마음과 질투심 속에서 지내던 가증스러운 자들로서 서로 미워하며 살았으나
여기서 ‘우리’는 발신인 사도 바울과 수신인 디도이다. 사도 바울은 바리새파 유대인이며, 디도는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이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굳게 믿으면서 살아온 자기 자신이나,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없이 이방인으로 살던 디도나 똑같이 서로가 서로를 경쟁 상대로 보고 살았다는 것이며, 더 폭넓은 의미에서 서로가 서로를 남으로 보면서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서 상대방을 이용하거나 미워하거나 무시하면서 시기 질투하면서 사는 것은 바리새파였던 유대인 자기나 이방인이었던 디도 그대나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느냐 안 믿느냐도 핵심이 아닌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라고 믿느냐 안 믿느냐도 핵심이 아닌 것이다. 즉 양측 모두 그 삶은 각자 자신이 우주의 주인공으로서 타자를 이용하거나 증오하거나 무시하며 매사에 경쟁하고 시기 질투하며 시시비비를 따지는 비참한 삶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마어마한 고백이다
사도 바울 : 바리새파 출신 유대인
디도 :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
양측 모두 그 삶은 각자 자신이 우주의 주인공으로서 타자를 이용하거나, 증오하거나, 무시하며 매사에 경쟁하고 시기 질투하며 시시비비를 따지는 비참한 삶이었음
(눅 9:46)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눅 22:24) 또 저희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성령이 오시기 전에는 모든 인간이, 심지어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까지도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제자들도 서로가 남이며 경쟁 상대인 것이다. 시기 질투하고 경쟁하면서 성령이 오시는 오순절까지 계속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롬 3:9) 그러면 어떻습니까 우리들에게는 무슨 탁월한 점이 있습니까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도 헬라인들도 모두가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지적하였습니다
10 이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입니다 의인은 없으니 단 한 사람도 없으며
11 하나님을 이해하는 자도, 열심히 찾는 자도 없고
12 모두가 엉뚱한 곳으로 벗어나 똑같이 쓸모없는 자들이 되고 자비를 행하는 자가 없으니 단 한 사람도 없다 하였으며
13 사람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과 같고 그 혀로는 속이며 그 입술 밑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그 입에는 저주와 독설이 가득하며
15 그 발은 피를 흘리게 하는 일에 날쌔고
16 그 인생길에는 파멸과 재난이 있을 뿐
17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하며
18 그 눈앞에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없다 하였습니다
유대인들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이해하는 자도 없고 열심히 찾는 자도 없다는 것이다. 모세가 신명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네 입에 있고 네 마음에 있으면 네가 하나님의 윤리를 지키면서 살 수 있다고 했는데 그런 인간은 지구상에 하나도 없는 것이다. 예레미야 언약이 일어날 때까지, 하나님의 법을 마음에 심어 주실 때까지 그런 인간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사 5:7)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공평(미쉬파트)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미스파흐)이요 그들에게 의로움(쩨다카)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짜아카)이었도다
즉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나님이 인정하신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맞지 않는 족속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스라엘과 유대인을 과도기에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의 모형이라고 보는 것이다. 애초에 이들은 안 되는 자들이었던 것이다. 왜? 인간이니까 인간은 안 되는 것이다.
즉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즉 창조주 하나님을 믿느냐 안 믿느냐는 성서에 계시된 구원 사건과 직결되는 것이 아님을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은 유대인에게도 불가능하고 이방인에게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유대인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2) 구원 사건 후의 모습
구원 사건은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일어난다. 그럼 구원 사건 후의 모습은 어떻게 증언되고 있는가?
(롬 12:4) 우리가 하나의 몸에 많은 신체 기관들을 가지고 있고 그 모든 신체 기관들이 같은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 아니듯이
5 우리도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며 서로에게 지체입니다
우리 개개인의 특성은 다 다르다. 눈이 하는 일이 다르고 코와 입이 다르고 손발이 다르고 하는 일도 다르듯이 우리는 다 다르다. 우리는 다 다르지만 이 신체 기관들이 하나의 몸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몸을 이루고 있는 다양한 신체 기관들과 같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리 이야기가 아니고 현실에 대한 설명인 것이다.
(엡 4:3) 평화의 끈으로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키기를 애쓰십시오
에베소의 형제자매들은 다 성령께서 하나가 되게 하신 공동체였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것이다.
3. 결론
구원 사건은 가족이든 뭐든 모두가 서로에게 타자로서 가인과 아벨의 절망적인 구조에서 해방되어 서로를 자기 자신과 같이 아끼고 돌보며 살아가는 행복한 삶으로의 이동이므로 이는 누구에게나 현실적으로 절박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구원의 약속은 인간들에게 주신 절박한 문제가 현실에서 실제로 해결되는 답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살벌한 세상에 나가서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때에도 나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심리적 안정 가운데 담대하게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불안과 근심과 공포가 아주 없을 수는 없지만 그것이 우리를 장악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나를 자기 자신처럼 아끼고 사랑해 주는 형제 자매들이 실제로 있기 때문이다. 가족은 그렇게 못 해 준다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 백성들은 그렇게 한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화목한 가정을 깨뜨리시고 천국 가정으로 만드신다는 것이다. 화목한 가정이 답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무슨 일만 터졌다 하면 뿔뿔이 흩어지는 것이 가족이다.. 따라서 가족에 의존해서 사는 삶에서 빨리 빠져나와서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야 하고 가족들도 다 데리고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다.
(요일 3:11) 그대들이 처음부터 전해 들은 말은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접속법 현재)는 것입니다.
12 가인과 같아서는 안 됩니다. 그는 악한 자로부터 비롯되었고 자기 형제를 살해했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를 살해했습니까? 자신의 행위들은 악했고 그의 형제의 행위들은 의로웠기 때문입니다.
13 형제들이여 세상이 그대들을 미워하여도 이상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14 우리는 우리가 사망으로부터 생명으로 옮겨온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형제들을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인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여전히 사망 안에 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가인처럼 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하나님의 언약의 핵심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렇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가인과 같이 된다는 것이다. 즉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그 인간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래서 가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서로 사랑한다는 이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지 않으면 우리는 가인처럼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우리도 전에는 서로 미워하며 살았다고 한 것과 똑같은 이야기인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로 들어오지 않으면 가인과 아벨의 시스템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그 논리이다.
세상이 그대들을 미워하여도 이상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라고 한 것은 세상 사람들은 가인과 아벨 시스템이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인데 클레로노모스들이 혈육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 하나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보면 가인과 아벨 시스템을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세상 사람들이 너희를 공격하게 된다는 것이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여전히 가인과 아벨 시스템 속에서 서로 미워하면서 비참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 천당 불신 지옥 이야기가 아니고 완전히 현실 이야기인 것이다. 서로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 한 몸 공동체 클레로스의 구성원이 되면 그때부터 행복한 삶이 시작되는 것이고 만약에 그렇지 못하면 가인과 아벨의 서로 물고 먹는 그 시스템 속에서 계속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그 비참한 삶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구원의 성취는 모든 인간에게 절박하고 시급한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가인과 아벨 시스템 속에서 비참하게 서로를 시시비비를 따지고 물고 뜯고 먹는 그 비참한 삶을 어둠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고, 하나가 되어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삶을 빛이라고 비유를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이 어둠에서 빛으로 옮겨가는 이 구원은 절박한 현실 문제인 것이다.
요한 사도의 논리는,
-가인의 살해 행위나 그 동기를 밝히는 것에 머물지 않고 그 행위가 일어나게 된 구조를 밝힘
-가인과 아벨의 서로 사랑하지 않는 관계, 즉 세상 스토이케이온(원리, 이치)인 타자 된 관계가 문제의 핵심으로 제시되고 있으며 장차 클레로스는 이 면에서 세상과의 충돌을 야기하게 될 수도 있다는 점을 밝힘
-만약 서로 사랑하게 되지 않으면 누구나 결국 가인과 같이 되므로 속히 사망(어둠)으로부터 생명(빛)으로 실제로 이동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급박한 과제임을 밝힘
가인과 아벨 시스템은 어느 환경에 있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가해자가 되기도 하고, 피해자가 되기도 하면서 엎치락뒤치락 살아가는 것이다. 항상 가해자인 사람도 없고 항상 피해자인 사람도 없다. 따라서 가인이라는 특정인은 악인이고 아벨이라는 특정인은 의인이라는 설정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것은 사망의 세계 즉 어둠의 세계는 가인과 아벨 시스템이 작동하는 가해자가 됐다가 피해자가 됐다가 하면서 엎치락 뒤치락 지지고 볶으면서 사는 그 비참한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구원은 서로가 서로를 자기 자신처럼 인식하고 아끼고 돌보는 하나님의 나라 한 몸 공동체 클레로스의 삶인데 이것을 빛으로 설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100% 현실 이야기다. 그러나 우리도 가인과 아벨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우리는 누구도 비난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절박한 과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메시아가 오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이어서 성령께서 오신 것이다. 사도들도 그 일이 실제로 성취되었다고 증언하고 있는데 바로 이어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종교 제도가 생겨버린 것이다. 로마의 국교화는 신자들을 가인과 아벨 시스템 속에 딱 묶어 놓는 것이다.
(갈 5:13) 형제들이여 그대들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 자유를 인간의 본성을 채우기 위한 기회로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십시오
14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할 것이다(직설법 미래)”라고 하신 말씀 안에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 인류 역사상 최초로 우리에게 성취되었습니다 라는 증언을 하면서, 그대들에게도 성취되었던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제발 좀 흔들리지 마십시오 라고 설득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할례라는 것은 각자 하나님의 것이 되겠다는 몸부림이다. 그래서 다시 개인 구원 종교로 돌아가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다시 그 비참한 삶으로 돌아가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는 것이다. 이것도 완전히 현실 이야기이지 종교 이야기가 아니다
가인과 아벨과 같은 그런 삶에서 서로 사랑하는 관계의 구원의 삶으로 이동하는 것은 급박한 과제이다. 그래서 회개하고 정말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내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서 넘치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답이 없고 우리는 고통속에서 밖에 살아갈 수 없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은 두 가지다. 하나는 실제로 점점 하나가 되어 간다는 것이고, 그 다음에 우리의 오늘 하루 매일 매일은 그 하나 됨의 성장과 확산을 위한 날들이라는 것이 점점 우리의 현실이 되어 가는 것이다. 이론에서 현실로 그렇게 진행이 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정말 인간으로서는 겪을 수 없는 일들을 겪으면서 그 하나님의 동역자의 삶을 살았던 것은 클레로스의 내적 성장과 외적 확산이라는 것이 목숨을 걸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갔던 지점까지 우리가 지금 한 발 한 발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2.공지사항
다음 주 기도는 조혜자 권사님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