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사립대학 소수서원(紹修書院)을 찾아서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임금이 이름을 지어 내린 사액서원이자
사학(私學)기관 즉 사백 육십년 전통을 자랑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대학이다
조선 중종 37년(1542)에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안향(安珦)을
제사하기 위해 사당을 세웠다가, 중종 38년(1543)에 유생들을
교육하면서 백운동서원이라 하였다.
명종 5년(1550)에는 풍기군수 이황의 요청에 의해 ‘소수서원’이라
사액을 받고 나라의 공인과 지원을 받게 되었다.
중종 39년(1544)에 안축(安軸)과 안보(安輔)를 제사지냈고,
인조 11년(1633)에는 주세붕을 더하여 제사지냈다.
서원의 건물은 비교적 자유롭게 배치되었는데,
일반적인 서원의 배치가 완성되기 이전인 초기의 서원이기
때문인 듯하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강당인 명륜당이 있고, 인재가 4000명이나 배출
된 이곳에는 학생들이 머물며 공부하는
일신재와 직방재가 연속으로 있다.
서원의 일반 배치가 강당 좌우에 대칭으로 동·서재를
두는 것인데 비해, 소수서원은 현판의 이름으로서 구분하였다.
사당은 명륜당의 서북쪽에 따로 쌓은 담장 안에 있다.
서원이 있던 자리에는 원래 통일신라시대의 절인
숙수사가 있었는데, 그 유적으로 당간지주와 초석 등이 남아있다.
소수서원은 조선시대 후기에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며,
지금도 매년 봄·가을에 제사를 지낸다.
회헌(晦軒) 안향(安珦)영정(影幀)
[국보 제111호]
고려 중기 문신인 회헌 안향(1243∼1306) 선생의 초상화로
가로 29㎝, 세로 37㎝의 반신상이다.
안향은 고려 원종 1년(1260)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하였으며,
여러 차례에 걸쳐 원나라에 다녀오면서 주자학을 우리나라에 보급한 인물로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림의 화면은 상하로 2등분되어 위에는 글이 쓰여 있고
아래에는 선생의 인물상이 그려져 있다.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왼쪽을 바라보며 붉은 선으로 얼굴의 윤곽을 나타내었다.
옷주름은 선을 이용하여 명암없이 간략하게 처리하였다.
시선의 방향과 어깨선에서 선생의 강직한 인상이 보인다.
소수서원에 있는 이 초상화는 선생이 세상을 떠난지 12년 후인
고려 충숙왕 5년(1318) 공자의 사당에 그의 초상화를 함께 모실 때,
1본을 더 옮겨 그려 향교에 모셨다가
조선 중기 백운동서원(후에 소수서원이 됨)을
건립하면서 이곳에 옮겨놓은 것이다. 선생의 초상화는 현재 전해지는
초상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초상화로, 고려시대 초상화 화풍을 알 수 있어
회화사 연구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귀중한 작품이다.
주세붕(周世鵬)영정
[보물 제717호]
조선 중종 37년(1542) 풍기군수로 재임하면서 회헌선생이 공부하던 숙수사의
옛터에 우리나라 서원의 효시가 되는 백운동서원(후에 소수서원)을 설립
주자학을 원나라로부터 들여와 유학을 진흥시켰던 고려시대의 안향을
이곳에서 받들게 함과 동시에 그 자신도 향학육성과 학문진흥에 힘썼다.
주세붕의 초상화는 소수서원 창설에 힘쓴 그의 공로를 기린다는 의미에서
문성공묘에 위패를 배향하고 영정도 함께 소수서원에 봉안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경렴정(景濂亭)/서원입구 옆 동편의 정자
유생들이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 정자.
중국 북송의 유교 사상가이며 성리학의 기초를 닦은
염계 주돈이의 호 앞 글자를 따와
경렴정(景濂亭)이라 이름을 지었다고…
강학당(講學堂)(보물 제1403호)
유생들이 강의를 듣던 곳, 인재가 4000명이나 배출된 강학당은 학문의 공간으로
사당 왼쪽에 배치하고 그 뒤에는 스승의 숙소로 쓰였던 일신재. 직방재라는
6칸 건물을 두었다. 그뿐만 아니라 공부 잘 하라는 뜻에서 건물 입면은
‘공부(工夫)를 뜻하는 한자 ‘공’(工)자로 배열한 뒤 학문의 숫자이자
진리의 숫자인 3칸으로 마무리 했다.
직방제(直方齊)(퇴계 친필)/스승의 집무실 겸 숙소
일신제(日新齊)(매일 새롭게)/스승의 학문연구실
학구재(學求齊)/제자들의 공부방
스승과 출입시 나란히 서지 않고 스승의 그림자 조차 밟지 않는다고 해서
제자들의 기숙사를 스승의 숙소 왼쪽 뒤편으로 물려 지었으며
또한 방높이도 한자(一尺) 정도 낮게 함
지락재(至樂齋)/음악을 하던 곳이 아닌 학문의 즐거움이 이르는 곳.
창석(蒼石) 이준(李埈)이 풍기(豊基)군수로 있을 때,
소수서원(紹修書院) 뜰 동쪽 언덕에 작은 서재(書齋)를세우고,
서재 아래에 대를 쌓고, 대(臺) 아래 못을 파고,
못을 탁청지(濯淸池), 대를 앙고대(仰高臺), 서재를 ‘지락재(至樂齋)라하였다.
장서각(藏書閣)/강학당 옆
문성공묘(文成公廟)/안향 선생의 위패를 모신곳
영정각(影幀閣)/영정을 모신 곳
광풍정(光風亭)/공부에 지친 선비들이 잠시 쉬며 휴식하던 곳
강학당 뒤로 작은 문을 통과하면...
사료관(史料館)/유물 전시관
그 뒤로 또 작은 문을 통과하면...
충효 교육관
취한대(翠寒臺)/원생들이 학문을 토론하고 시를 짓든곳
백운동 "敬"자 바위/경렴정에서 죽계수를 격하여 바라보면 ‘경(敬)’과
‘백운동(白雲洞)’이라는 글씨가 음각된 돌출된 바위가 있다.
주세붕 선생은 백운동서원을 창건한 후 이 바위에
‘경(敬)’자를 새기고
“회헌(晦軒) 선생을 선사(先師)로 경모하여
서원을 세우고 후학들에게 선사의 학리를 수계(受繼)하고자 하나
세월이 흐르게 되면 건물이 허물어져 없어지더라도
‘경(敬)’자만은 후세에 길이 전하여 회헌 선생을
선사로 경모하였음을 전하게 되리라”
고 하였다 한다.
‘경(敬)’은 성리학에서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여 흐트러짐이 없다(主一無適)’는 의미로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는 수양론의 핵심이 되는 선비들의 지침이며
성인이 되어 가는 지름길과 같아 효경(孝經)과 맹자(孟子)에서는
공경의 뜻으로, 논어(論語)에서는 삼가 근신하는 의미로 풀이했다.
한편 '경(敬)자' 위에 씌어진 ‘백운동(白雲洞)’이란 글씨는
퇴계 이황선생이 새긴 것으로 전해온다.
덧붙여 이 敬자바위는 순흥땅의 아픈 역사와 얽힌 전설이 있다.
세조3년(1457) 10월 단종복위 거사 실패로 이 고을 사람들은
정축지변(丁丑之變)이라는 참화를 당하게 되는데
그때 희생 당한 순흥도호부민들의 시신은
이곳 죽계천에 수장되고,
그 후 밤마다 억울한 넋들의 울음소리가 들리므로
당시 풍기군수 주세붕 선생이 원혼을 달래기 위해
경(敬)’자에 붉은 칠을 하고, 위령제를 지낸 후로
울음소리가 그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옴.
숙수사지 당간 지주(통일 신라 시대 작품)
당간은 절에서 불교의식이 있을 때
부처와 보살의 공덕을 기리거나 마귀를 물리칠 목적으로 달았던
‘당(幢)’이라는 깃발의 깃대를 말하며 이 깃대를 고정시켜
받쳐 세우는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함.
경렴정(景濂亭) 옆 수령 500년의 은행나무/ 오랜 세월 동안 은행열매처럼 유생들을
많이 길러 내라는 뜻에서 은행나무를 학자수(學者樹)로 가꾸어 놓음
경내에는 아름드리 소나무와 푸른 대나무를 가꾸어
선비의 기상을 느끼게 해주고 있음
학자수군락(學者樹群落)/겉과 속이 모두 붉다하여 적송(赤松)
소수서원 경내에는 3백년에서 천년이 된 적송나무 수백루가
서원 주변을 뒤덮고있고
겨울을 이겨내는 소나무처럼 인생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참선비처럼 되라고 이 소나무를 "학자수(學者樹)"라라고 부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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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영주의 소수서원(紹修書院)이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대학 이군요.
3백년에서 천년이 된 적송나무가 있다니 놀랍습니다.
지기님,
바쁜 와중에도 다녀가시었군요.
그렇습니다.
소수서원(紹修書院)이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대학이라고 하는군요.
저도 지난여름 다녀왓는데,,입구부터 안내하시는 분이 계셔서,,많이 배우고왓읍니다,,
백송님,
이미 다녀오시었군요.
다녀가신 고운 흔적과
댓글 남겨주심에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구경잘하고갑니다
백암님,
감사합니다.
다녀가신 고운 흔적에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지금 서울에 계시겠군요
여행에 대한 "추억" 많이 만드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