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십국 (五代十國)
중국에서 907∼960년의 약 50년 사이에 흥망한 나라와 그 시대. 황허강[黃河(황하)] 유역의 중위안지역[中原地域(중원지역)]에서 후량(後梁)·후당(後唐)·후진(後晉)·후한(後漢)·후주(後周) 등 5왕조가 계속 흥망했고, 중위안지역 밖에서는 전촉(前蜀)·후촉(後蜀)·오(吳)·남당(南唐)·오월(吳越)·형남(荊南)·민·초(楚)·기(岐)·연(燕)·남한(南漢)·북한(北漢) 등 10여 개국이 난립하고 있었다. 중위안의 다섯 왕조를 5대라 하고, 그 밖의 여러 나라를 10국이라 일컬으며 양자를 합쳐서 5대 10국이라고 한다. 5대의 황제는 당나라의 정통적 계승자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며, 10국의 군주들도 5대의 황제와 대등하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무력으로 정권을 세웠기 때문이었다. 5대 10국의 황제와 군주는 황소(黃巢)의 난(875∼884)을 비롯한 당나라 말기의 소란에서 군도(群盜)·병사·토호 등으로 출발하여 무공을 세워 입신했고, 절도사(節度使)가 된 다음 그 자리를 차지했던 것이다. 황제의 출신
5대 황제의 경우, 후량의 태조 주전충(朱全忠)은 몰락양반의 아들인데, 황소의 부장으로 용맹을 떨친 뒤 당나라 조정에 투항하여 절도사가 되었고, 후당의 태조 이극용(李克用)과 후진의 고조(高祖) 석경당, 그리고 후한의 고조 유지원(劉知遠) 등은 모두 사타돌궐족(沙陀突厥族) 출신의 군인으로 전쟁공로에 따라 황제의 신임을 얻어 절도사가 된 사람들이다. 10국 군주의 경우, 전촉의 왕건(王建)은 충무군절도사(忠武軍節度使)의 군기담당 장교에서 당나라 황제 친위군인 신책금군(神策禁軍)의 군관이 되었고, 후에 영평군절도사(永平軍節度使)로 승진했다. 초나라의 마은(馬殷)은 목수 신분에서 유적(流賊)이 되었으나 부하들이 옹립하여 무안군절도사(武安軍節度使)가 되었다. 형남의 고계흥(高季興)은 부상(富商) 이칠랑(李七郎)의 복동(어린 하인)이었던 것을 주전충이 발견하여 측근에 두었다가 형남절도사로 임명하였다. 남한의 유척(劉陟)은 만료 추장의 자손이며 광저우[廣州(광주)]에 거점을 둔 정해군절도사(靜海軍節度使)를 계승했다. 민나라의 왕조는 광주 고시현(光州固始縣)의 현령이었는데, 동생 왕심지(王審知)와 함께 황소의 난에서 공을 세운 뒤 취안저우[泉州(천주)]에서 위무군절도사(威武軍節度使)에 임용되었다. 오월의 전류는 항저우[杭州(항주)] 임안현석경향(臨安縣石鏡鄕)의 협객 신분에서 향촌자위단(鄕村自衛團)의 부장이 되었고, 항저우 팔현(八縣)의 부대장에서 진해군절도사(鎭海軍節度使)가 되었다. 오나라 양행밀(楊行密)은 고아였으나 노주(盧州)와 수주(壽州)의 자위단 대장이 되고 노주자사(盧州刺史)를 거쳐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로 승진했다. 남당의 서온(徐溫)은 오나라 양행밀의 원종(元從)으로 활동했으며, 양행밀이 죽은 뒤에는 실권을 장악하여 양자인 서지고(徐知誥) 대(代)에 남당을 수립하였다. 이와 같이 5대 10국의 시대는 실력이 있는 무인출신의 절도사가 군웅할거하였고, 영역 내의 주·현에서 향촌에 이르기까지 무인들이 지배하는 무인정치시대였다. 정치적 분열과 사회적 혼란의 양상을 보였으나 정치와 문화면에서는 새로운 기운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정치·경제
5대 10국의 여러 나라는 정치권력의 유지와 영토의 안정을 꾀하기 위해서 부국강병과 식산흥업(殖産興業) 정책을 실시하였다. 전촉과 후촉의 견직물을 중심으로 한 쓰촨[四川(사천)]의 산업부흥과 서남만이(西南蠻夷)와의 무역, 초나라의 다업진홍(茶業振興)에 의한 특산물화와 남해의 중계무역, 민·오월·오·남당·남한 등 바다에 면한 여러 나라의 해산자원 개발과 해상무역 등은 각 나라의 국력에 크게 이바지했다. 이와 같은 산업과 무역의 진흥은 여러 국가간의 교통을 활발하게 하여 우호관계의 유지와 안정을 가져오게 했으며, 또 상인들의 활동을 활발하게 했다. 정치면에서는 군사와 재정을 중요시하여 추밀사(樞密使)와 삼사사(三司使) 등 새로운 관직이 생겼다. 군사면에서는 중앙에 강력한 정예군이 편성되었으며, 특히 5대왕조에 의한 금군(禁軍)의 확충과 정비는 송(宋)나라 금군의 모체가 되었다. 또한 행정조직에도 지역성에 입각하여 현상대응에 유효한 정책이 취해졌고 <군(軍)>이라 일컬어지는 새로운 행정단위가 생겨났다. 문화·생활
문화면에서는 제지·인쇄 기술의 발달에 따라 경서·불전·시문 등 많은 서적을 간행했고, 민간속요를 도입한 구어체 운문이 새로 생겨 민간에서 애호되었다. 조숭조(趙崇祚)의 《화간집(花間集)》은 최초의 사집(詞集)이다. 회화에서는 촉나라의 황전(黃筌)과 남당의 서희(徐熙)로 대표되는 화조화(花鳥畵)와 후량의 형호(荊浩)와 남당의 동원(董源) 등의 산수화가 발달했다. 교방(敎坊)을 설치한 남당에서는 가무비파(歌舞琵琶)가 보급되었고 당나라 현종(玄宗)의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이 부흥되어 송·원(元) 희곡의 선구가 되었다. 또 전촉의 왕건묘(王建墓)와 남당의 이릉(二陵) 등의 유적과 유물에 회화·조소·요업·복식·습관 등 문화적 특색이 당나라에서 송나라로의 과도기적 요소를 나타내고 있다. 이와 같이 5대 10국의 문화에서는 중앙과 지방의 차가 적어졌기 때문에 서민문화가 발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인정치 시대의 서민생활은 가혹한 것이었다. 당시의 민중은 전묘(田畝)를 기준으로 과세하는 양세(兩稅)와 부가세인 연징(沿徵) 등의 조세부담 이외에도 무인들의 불법적인 사적 과세와 상인·부농들의 비싼 이잣돈에 시달렸다. 특히 연징은 과중한 세부담이었다. 연징에는 무구용(武具用) 쇠가죽의 대가에 해당되는 우피전(牛皮錢)과, 철기구 제조·판매의 자유화 대상(代償)인 농기전(農器錢), 술과 소금의 자유화 대상인 국전(麴錢)과 염전(鹽錢), 교량보전을 위한 교도전(橋道錢) 등이 있었다. 또, 발전된 도시의 주민에 대해서는 옥세(屋稅)와 지세가 따로 과세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