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꽃등 / 장원미
숲은 수많은 생명을 품고 있다. 얼마나 많은 생명이 숲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을까. 바쁘고 조급한 우리의 삶과는 달리 숲은 늘 여유롭고 평화롭다. 어둠 속의 숲길에는 새로운 세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반딧불이를 촬영하기 위해 카메라 장비를 챙기는 남편을 따라 집을 나섰다. 이제는 깊은 숲이 아니면 좀처럼 반딧불이를 볼 수가 없다. 신비로운 빛을 사진에 담으려는 사진작가들의 카메라가 즐비하다. 빛과 소리에 민감한 반딧불이를 위해 카메라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빛도 천으로 감싼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깊디깊은 정적만이 감돈다. 행복한 공존을 꿈꾸며 자연의 일부가 된다. 기다림은 지루하지 않았다.
밤하늘의 별을 연상시키는 작은 불빛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온다. 칠흑 같은 어둠에 익숙해지면서 숲속의 별이 점점 또렷하게 보인다. 멋진 선율로 춤을 추는 반딧불이만 보일 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반딧불이와 함께하는 숲은 아늑하고 신비롭다.
반딧불이는 밤새 빛을 내며 짝을 찾는다. 날개가 퇴화한 암컷은 땅에서 불빛을 보낸다고 한다. 풀섶을 기어다니다 마음에 드는 수컷의 빛을 발견하면 사랑의 신호를 보낸다. 빛으로 이어진 인연, 은밀하고 분주한 움직임은 사랑의 열기로 충만하다.
무한한 어둠 속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반딧불이를 향해 손을 뻗어본다. 머리 위나 손바닥 어깨나 발치에도 사랑스러운 불빛이 흔들거린다. 내가 보는 순간부터 반딧불이가 반짝이기 시작했다.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반딧불이가 훨씬 더 많음을 알려주려는 듯 은은한 달빛이 조명처럼 내려앉는다.
반딧불이를 바라보는 모습을 사진에 담기 위해 모델이 되었다. 쉴 새 없이 날아다니는 반딧불이를 여러 장 찍어서 하나의 사진으로 합성하기 위한 연출이다. 어둠이 내리기 전 한 손에 램프를 들고 숲을 향해 섰다. 무수히 많은 반딧불이가 날아다니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순간, 내 기억 속의 풍경 하나가 산모롱이의 안개처럼 피어난다.
고향집 마당에 놓인 평상에 어머니와 단둘이 앉아 있던 예닐곱 살 무렵이었다. 여름밤 하늘에 별이 총총하고 마당에는 반딧불이가 별처럼 내려앉는다. 밤이 깊어질수록 빛의 향연이 황홀하고 감미롭다.
어머니는 꼬리에서 불빛을 내는 반딧불이를 손등에 올려놓고는 나직이 말씀하셨다. “호박꽃에 반딧불이 여러 마리를 집어넣고 꽃잎을 닫으면 예쁜 호박꽃등이 된단다. 엄마가 너만 할 때 친구들과 호박꽃등을 손에 들고 신나게 뛰어다니며 놀았었지.” 사진을 꺼내보듯 어린 시절로 들어간 어머니의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온다.
아득히 먼 곳을 바라보며 어머니는 아이의 눈빛으로 무엇을 보고 있을까. 너무 어려서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은 무엇일까. 어머니는 반딧불이를 보며 삶의 애환을 위로받던 건 아니었을까. 작고 빛나는 반딧불이의 잔상은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지나간 기억에 머물게 한다.
어머니 이야기를 듣던 꼬마 아이가 중년이 되어 어머니의 시선으로 반딧불이를 바라본다. 인생에서 사랑하는 것과 사랑받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함께이면서 혼자이기도 한 인생길에 호박꽃등은 삶의 어둠을 밝히고 아낌없이 품어주는 빛이 되었다.
남편의 시선으로 본 반딧불이 숲에는 호박꽃등을 바라보는 중년의 여자가 램프를 들고 서 있다. 동심에 젖은 유년의 추억과 함께 별이 내리는 숲은 한여름 밤의 꿈속 같다. 이제 어머니의 호박꽃등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보여주는 남편의 램프로 이어졌다. 잠시의 빛 속에서 영원으로 이어지는 동심과 사랑 그리고 추억을 만들며 숲을 가득 채운다.
나희덕 시인은 <가능주의자>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큰 빛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 반딧불이처럼 깜박이며/ 우리가 닿지 못한 빛과 어둠에 대해/ 그 어긋남에 대해/ 말라가는 잉크로나마 써나가려 합니다.”
시간과 더불어 변화하는 낯섬과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 반딧불이의 빛처럼 수런거리며 흘러간다. 어머니의 웃음소리가 나를 들뜨게 했던 유년 시절의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반딧불이가 밝히는 사랑의 불빛도 이제는 깜빡이며 사라져가고 있다. 반딧불이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는 전설로 남게 될지도 모른다.
반딧불이가 깜박인다고 세상이 밝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좋은 세상도 저절로 오지 않는다. 하지만 반딧불이처럼 작지만 포기하지 않는 사랑의 빛들은 아직 희망이 있음을, 어둠의 끝에는 반드시 작은 빛이라도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을 준다.
길동무인 남편과 함께 걸어가는 숲길이 살아있는 동화 속 같다. 둘이 발자국을 남기며 걷는 여름밤의 한순간을 반딧불이가 반짝 밝혀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