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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체면을 중시하는 문화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나라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곳에나 체면이라는 것을 많이 생각하게 되죠. 그래서 평소에 우리는 타인의 시선을 매우 의식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말 한마디도 조심하게 되는 것이죠. 또 얼마나 이미지 관리를 잘합니까?
이미지 신경도 써야 되고 어쨌든 간에 이 체면을 잘 지키기 위해서 애쓰고 노력하는 것이 우리의 삶의 변화 중에 하나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체면을 내려놓을 때가 있게 되죠. 그때는 정말 원하는 것이 생겼을 때입니다. 다시 말해 간절해지면 달라지는 것이죠. 체면도 때로는 내려놓을 수 있는 때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70 80년대로 다시 우리가 돌아가서 생각해 보시면 좋을 것 같은데, 그때 어린이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아이들이 많았습니까? 지금이야 아이들이 없어서 난리지만 70~80년대 우리나라의 어린아이들이 엄청나게 많을 때입니다. 그때 어린이날 되면 어린이 대공원에 그렇게 애들이 많이 와요. 엄마 손 잡고 아빠 손 잡고 사람이 너무너무 많아서 손을 꼭 잡으라는 아주 중요한 의무가 떨어지죠. 손 놓치면 안 된다. 손 놓치면 안 된다. 가서 동물을 보는 건지 사람에 밀려다니는 건지 모를 정도로 그렇게 사람이 많았던 때가 있습니다. 대공원 어린이 대공원도 그렇고 6월 초 사람들이 많죠.
그런데 그때 실제로 아이와 엄마가 떨어지는 경우가 있죠. 미아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사실 꽤 자주 있었어요. 그때만 해도요. 그렇죠 그때 부모들이 우리 아이가 없어졌네 어디 있지 이러는 엄마는 아무도 없어요. 그 뛰어다니면서 소리를 쳐가면서 그때 어떤 체면이 뭐가 필요합니까?
당장 내 아이를 찾아야 돼 그때는 갈급한 거예요. 내가 지금 자녀를 찾아야 되는 그러한 아주 엄청난 마음이 부르게 일어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그때는 우리가 그렇게 중시 여기는 체면도 내려놓게 되는 것이죠. 또한 병원에 가서 정말 우리 가족 중에 위급한 상황이 놓이게 된다 그러면 우리가 TV에서도 보고 또 실제로 경험도 해봤지만 의사 선생님을 붙잡고 좀 도와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체면을 대려놓기도 합니다. 평소에 침착했던 분들도 그때만큼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죠.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살려야겠다라 그러한 간절한 마음이 발동이 되게 되는 것이죠.
또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평소에는 줄 서는 걸 정말 싫어해요. 에서 그런데 어느 날 나도 모르게 내가 1시간 2시간 맛집 앞에 줄을 왜 그래요?
그동안 내가 최면 치료했는데 이 맛집 나도 꼭 먹어보고 싶다. 먹고 싶은 열망 때문에 줄 서는 것 이것 하게 된다라는 것이죠.
왜 그렇습니까?
내가 갈망하기 때문에 원하기 때문에 여기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원하는 것 간절함 여기에서 우리는 때로 체면을 버리기도 하죠. 체면도 내려놓고 누군가의 시선도 내려놓고 자존심도 내려놓게 됩니다. 따라서 체면을 내려놓는 순간을 다시 우리가 재조명해서 보면 그때는 그 사람의 갈망이 드러나는 순간이라고도 알 수 있겠죠.
오늘 본문에 보시면 체면을 내려놓은 사람, 시선을 내려놓은 사람, 간절히 원했던 한 사람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름하여 삭개오라는 사람이죠. 신앙생활 좀 하시고 어려서부터 교회 다녔던 분들은 삭개오 하면 떠오르는 게 뭐냐 하면 가장 먼저 외투는 게 뭐예요?
신앙생활 오래 하신 분들이 안 계시는군요. 뽕나무를 외칠 겁니다. 뽕나무 그렇죠 사계 왕은 뽕나무 뽕나무에 올라갔다. 그 외의 것보다도 사실 뽕나무가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죠. 그런데 삭개오가 그냥 나무에 올라간 것이 아니죠. 진짜 그의 마음 가운데 갈망이 있어서 그 뽕나무에 올라가게 된 것입니다.그리고 그 갈망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가정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축복의 통로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이웃들에게 그 사랑을 흘려보내는 속의 통로가 되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도 내 안에 있는 갈망이 회복되고 그 갈망을 통해서 나의 삶이 변화될 뿐만 아니라 가정이 변화되고 나를 통해 이웃이 살아나는 축복의 통로가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첫 번째 삭개오는 갈망했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지나간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소문이 난 거예요. 사람들이 듣고 한 사람 두 사람 사방에서 모이기 시작합니다. 나도 예수님 만나야 되는데 예수님 만나야 되는데 그래서 온 사람들이 일파만파. 그런데 그 자리에 누구도 있었던 거예요 삭개오도 있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성경에 그의 상황을 정확하게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키가 작았다.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볼 수 없었다. 여러분 삭개오가 어떻게 했을까요?
정말 고민 많이 했을 것입니다. 오른쪽으로도 가봤을 것이고 왼쪽으로도 가봤을 것이고, 때로는 까치파를 들어서라도 어떻게 볼까 아니 마음이 불타올라서 점프도 했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그 상황을 알 수 없지만 그렇게 간절함이 그에게 묻어났을 것이지 안간힘을 다해서 어떻게든 주님을 보려고 애를 썼지만 볼 수가 없는 상황. 여러분 이때 이제 삭개오의 마음이 어땠을까? 진짜 보고 싶은데 나도 보고 싶은데 어떡하지? 어떡하지? 이제 선택의 순간이 온 거예요 포기할까? 근데 지금 상황으로는 볼 수가 없는데 포기하자. 첫 번째 두 번째 아니야 다른 방법이라도 찾아봐야겠어 나는 오늘 반드시 그 주님을 만나야겠어라는 다른 어떤 방법을 찾는 거 삭개오가 어떻게 했어요?
고민고민하다가 뛰기 시작했어요. 열심히 뛰어가 오늘 성경에 보니까 돌 무화과 나무라고 돼 있는데 과거에는 콩나무라고 돼 있죠. 돌 무화과 나무 앞에 서게 됩니다. 여러분 거기에서 쓸 때 삭개오는 사실 뽕나무에라도 올라가서 봐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뛰었어요.
그런데 한 가지만 더 생각해 보시죠. 그 앞에 섰을 때 올라가는 게 편했겠어요? 편하지 않았겠어요?
당시의 문화를 한번 좀 생각해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당시 그들이 입었던 옷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지금처럼 우리가 바지를 입는 것이 아니라 원피스 같은 옷 이렇게 통짜로 된 옷을 입었잖아요. 이러한 통자의 옷, 원피스 같은 옷을 입고 나무에 올라간다는 것이 쉽겠습니까?
사실 어려워요. 창피한 순간을 맞이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죠 속이 보일 수도 있는 상황인 거죠. 그러면 그 앞에서 또 머뭇했을 거예요. 그냥 제가 상상해 보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올라가야 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봐야 되는데 우리 주님을 봐야 되는데 여러분 그는 거기에서 잠시 고민을 했을지는 모르겠지만 결과로 볼 때 사기원은 똥나무에 올라가 있었다는 것이죠.
4절 말씀을 한번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 무화과 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더라.
여기 앞으로 달려가서라는 이 짧은 표현 속에 그의 간절함이 보이십니까?
내가 여기에서는 도저히 볼 수가 없네. 내가 키가 작고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그래도 나는 봐야겠어 해서 달려가는 그의 모습. 그래서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돌 무화과 나무 앞에까지 달려와 그 앞에서 그는 나무를 타고 올라가 주님 가는 길을 지켜보고 있었다.
여러분 삭개오가 누굽니까? 삭개오는 오늘 2절에 분명하게 기록해 주고 있어요. 삭개오라 이름 아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고 부자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때 당시에 삭개오는 사람들 위에 있었던 사람이에요. 그런데 지금은 사람들 위가 아니라 나무 위로 올라가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죠. 앞서 이야기했듯이 입었던 옷을 생각해 볼 때 자신의 체면을 노려 놓지 않고는 또 사람들이 분명히 수근수근할 것 아니겠어요?
저 사람 도대체 뭐 하는 거야?
그런 것들을 생각해 볼 때 자신의 체면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나무에 올라간다는 것은 사실 쉬운 것이 아니죠. 따라서 그는 그러한 옷을 입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무에 올라간 것은 체면과 시선과 자존심마저 다 내려놓고 올라가게 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을 봐야겠다는 그 하나 그것이 더 소중하고 더 귀하다라는 마음 그 하나 때문에 올라간 것이죠.
여러분 이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하는 진심이 그의 행동으로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이 사람의 갈망의 표현이 정확하게 드러난 것이죠. 체면보다는 주님 시선보다는 주님 자존심보다는 주님 이걸 비교할 때 주님이 훨씬 위에 있었다는 것이죠. 그 갈망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그리고 그 위에서 기다립니다. 이제 빨리 오시면 좋겠다. 가슴이 두근두근 뜁니다. 조마조마합니다.
꼭 이 길로 가셔야 되는데 분명히 이 길로 가실 거야.
길이 하나밖에 없겠지
그러면서 자신 나름대로 생각과 어떤 스토리를 그려가면서 그다음 문제에 서 있는 것이죠.
여러분 그의 마음은 어쩌면 주님이 자신을 보지 않아도 그렇잖아요. 그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몰려서 지나가는데 어떻게 자기를 볼 수 있겠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주님이 나를 보시지 않아도 나는 주님을 봐야겠다. 그 마음이 있었다는 거예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환경이 바뀐 게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변한 것도 아닙니다. 주님을 향한 갈망이 그에게 살아났기 때문에 그의 마음이 변했고 그의 행동이 그래서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나는 정말 주님을 만나고 싶은가 나는 정말 주님을 보고 싶은 가 여러분 이 갈망이 살아날 때에 하나님은 일하신다. 이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 가운데에 주의 성전에 나올 때에 날마다 이 삭개오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주님 오늘 예배 가운데 나를 만나주십시오. 내가 주님을 보기를 원합니다. 그러한 갈망으로 예배의 자리에 나아가는 우리 존귀한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 번째는요. 갈망 위에 주님이 방문하셨다는 거예요. 사람들이 웅성웅성거리기 시작하니 이러고 있습니다. 예수님 오신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함께 지나갑니다. 그 순간 삭개오의 시선은요. 예수님께 더 집중이 됐겠죠. 수많은 사람들 중에 그 예수님만 바라보는 그 집중력 사실 다른 사람 볼 필요가 뭐 있습니까?
주님 보고 싶어서 올라가는데 그러니까 오로지 예수님만 바라보는 거예요.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지나가던 예수님께서 갑자기 그 자리에 멈춰 서는 거예요. 그리고 고개를 들어서 돌, 무화과 나무 위를 바라보시는 거죠.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예수님과 삭개오가 눈이 마주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여러분 얼마나 가슴 뛰었겠어요? 사실 삭개오는 예수님이 지나가면서 고개를 들 거라고 어떻게 예상을 합니까? 거기에서 주문을 외우겠습니까? 예수님 고개를 들어서 나를 좀 보십시오. 보십시오. 보십시오. 그래서 바뀌었어요. 예수님께서 가시면서 그 삭개오를 바라보며 눈이 마주쳤을 그때 웅성거리던 소리는 어느새 다 사라지고 자기의 마음에 들어오는 주의 음성 삭개오야 삭개오야 여러분 그때 삭개오의 마음이 얼마나 행복했을까? 왜요?
사실 삭개오는 나만 봐도 돼. 이 입장에 서 있었는데 주님이 날 봐주셨잖아요. 주님이 날 봐주시잖아요. 얼마나 행복합니까? 세상에서 그 어떤 사람이 부러웠던지 가장 행복한 사람 여러분 놀랍지 않습니까?
그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들으니 삭개오야 삭개오야 이름을 부르시는 거예요.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었던 나의 이름을 저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여러분 수많은 군중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예수님은 단 한 사람 삭개오를 바라봤고 단 한 사람 삭개오의 이름을 불러주셨다. 삭개오는 자신이 예수님을 찾고 보기 위해서 간 줄 알았는데 그런데 네 이미 주님의 시선은 나를 향하고 있었고 주님은 나를 향해 계셨다. 찾은 자는 삭개오였지만 먼저 찾아주신 분은 주님이셨다. 그리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속히 내려와라.
여러분 이건 요청이 아니라 주의 명령이었죠. 그리고 동시에 삭개오를 향한 주님의 초청의 메시지였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찾는 것 같지만 꼭 기억하십시오.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으신 분이십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이 자리에 우리가 있는 것 내가 주님을 찾았다. 맞아요. 나도 주님 찾은 게 맞죠.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먼저 찾아주셨다. 우리가 주님을 부른 것이 아니라 주께서 먼저 우리의 이름을 불러주셨다.
여러분 이 은혜를 믿으십니까? 이 은혜를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들이 주님의 그 은혜 안에 주님의 부르심에 기뻐하며 사는 존귀한 성도님들이 계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말씀은요. 우리 주님이 내가 너희 집에 유해하겠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여기에서 예수님의 어떤 허락을 구하지 않아요. 그냥 주님이 결정하신 것입니다. 죄인의 집이라도 버림받은 인생일지라도 주님은 그 과정으로 들어가시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단순한 만남이 아니죠. 개인적인 만남 거기에서 확장되어서 가정으로 들어가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방향이 이 안에 담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4개월을 만났지만 그의 삶의 자리로 들어가시는 주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는 구원의 시작이다
주님을 만났습니까?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로 우리의 가정으로 찾아오시는 주님의 은혜가 있다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들리십니까? 들리십니까?
예배 가운데 주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사랑하는 내 아들아, 사랑하는 내 딸아
그 부름 앞에 저와 여러분들이 기쁨으로 맞이하시고 그 주님의 은혜가 나의 삶을 통해 나의 가정으로 나의 삶의 터전으로 흘러가는 축복의 역사들이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세 번째는요. 주님을 만난 삭개오가 진짜 변했다는 거 진짜 변했다는 거 주님이 말씀하셨죠.
속히 내려와라. 내가 너희 집에 임해야겠다.
그때 삭개오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얼마나 신이 났겠어요? 급하게 내려옵니다. 야 이 집에 들어오신다고 난 죄인인데 우리 집까지 주님이 오신다고요 여러분 얼마나 큰 감동이었겠어요?
여러분 단순한 감동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이거는 인생을 뒤집는 순간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표현해 줍니다. 6절 말씀 한번 읽어보실까요? 6절입니다. 시작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제가 말씀을 다시 드릴게요.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했다.
여러분 이 장면 한번 생각해 보세요. 거기 올라갈 때도 힘들었지만 내려오는 게 쉽겠어요. 그런데 얼마나 주님을 영접하고 싶었는데 급히 내려왔다 그렇게 말하죠. 여기 무슨 체면이 있어요? 천천히 내려오는 게 아니에요. 급하게 내려와서 주님을 맞이한 거 왜 주님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리고 즐거워합니다. 기쁨이 그 안에서 터져 나온 거예요. 여러분 이것은 억지도 아니고 형식도 아니잖아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그냥 올라 나오는 즐거움, 헤아릴 수 없는 즐거움, 그 행복감이 이 안에 있는 것이죠. 그래서 그는 주님을 영접합니다. 문을 활짝 열고 주님을 모신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이 주님께서 부르실 때에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이 열리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깊은 곳에서 그 기쁨이 흘러나와서 즐거움으로 주님을 영접하는 그러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가운데도 동일하게 임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은요. 삭개오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8절인데요. 그가 주님을 만나서 뜬금없이 이런 말을 어 8절 같이 읽습니다. 시작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쭤보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내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여러분 고백을 한번 보세요. 내 소유의 절반을 나누겠습니다. 속여서 뺏은 것 있으면 4배로 갚겠습니다. 그러면 남는 게 있어요. 돈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지만 절반 뚝 떼서 나눠주고 남은 절반 가지고 내가 속여서 얼마나 많이 속였습니까? 대관으로서 그거 네 배로 갚겠다. 여러분 이 사람 누굽니까?
세리장입니다. 부자였라고 2절에는 분명하게 명시해 줍니다. 그러면 이 사람의 기준은 뭡니까? 돈이죠. 돈 돈 때문에 살았던 사람, 돈 때문에 관계마저 저버렸던 사람 돈 때문에 매국노라는 소리까지 듣는데도 그것을 감수하면서 살았던 사람. 그런데 지금 그 돈을 나누겠다는 거예요. 그 돈을 돌려주겠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것이야말로 진짜 변화 아니겠어요? 환경이 바뀐 것이 아니죠. 환경은 그대로입니다. 조건도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사람 삭개오가 바뀌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변화는 자신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만났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자신의 입술을 통해서 마음 깊은 곳에 있었던 것을 고백하게 된 것이죠.
왜 그렇습니까?
사람의 가장 가치 있었던 그가 가장 가치로 여겼던 것이 가장 귀하게 붙잡았던 그것이 예수님보다 귀하잖아요. 우리 찬양하자.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고기와 바꿀 수 없네.
여러분 이 고백이 4개월 되는 실제가 그 가치 있다고 여겼던 것보다 주님이 더이 여러분 사기오는 돈보다 크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기꺼이 내어줄 수 있게 된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은요 결심이 아닙니다. 신앙은요. 만남입니다. 주님을 만나면 내가 결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변화가 되는 것이죠. 주님을 만나면 삶이 바뀌게 된다라는 거예요.
여러분 사울이 바울로 바뀌었습니다. 다메섹 도상을 향해서 갑니다. 예수 믿는 사람 핍박하겠다고 잡아들이겠다고 가는 거예요. 그런데 그 다메섹 도상에서 소리가 들립니다. 사울아 사울아 그 소리를 들었어요. 주님의 음성을 들었단 말이죠. 그렇게 찾아오신 주님을 만났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는 자신이 귀히 여기던 것을 다 배설물로 여긴다라고 나중에는 그렇게 고백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가치 있게 여겼던 것, 자신이 가장 귀하게 생각했던 것들 이것 내가 배설물로 여깁니다.
여러분 이 표현은 배설물입니다는 거예요. 여러분 배설물을 끌어안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바울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을 주님의 그 위대함에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 것들을 내어놓는 그런 마음이 있었던 것이죠. 나의 이름을 불러주신 주님 지금도 우리를 부르시며 우리에게 만나자고 말씀하십니다.
바라고 소망하는 것은 저와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귀하다고 여기는 그것보다 주님이 더 귀해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하기가 쉽지 않죠 어려워요. 그런데 그런 우리의 마음을 주님이 그때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 삶 가운데 더 풍성한 내가 귀시 여기는 것들을 더 많이 베푸신 하나님의 손길을 만나게 되는 것이죠.
네 번째는요. 한 사람을 통해 결국 가정의 구원이 임하는 것을 봅니다. 소유의 절반을 나누겠습니다. 4배로 갚겠습니다.
여러분 이것은요. 예수님을 만나서 삶의 방향이 바뀐 거예요. 그렇죠 그런데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변화가 가정을 살리는 통로가 되었다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그때 갑자기 이런 선언을 하세요. 9절입니다. 9절 한번 읽어볼까요? 시작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주목해 보세요. 삭개오 한 사람이 변화 받았습니다. 그런데 가정 전체에 영향이 있는 것이죠. 한 사람의 갈망으로 시작했고 그 갈망이 한 사람의 만남으로 이어졌고 그 만남이 한 사람의 변화로 이어졌고 그게 가정에만 흘러갔습니까?
아니죠. 자신이 절반을 나눠서 진짜로 나눠줬다는 네 배로 갚았다면 누구에게까지 그 사랑이 흘러간 거예요?
이웃들에게 주님을 만나니 주님과의 관계만 회복했고 되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가정의 변화가 일어나 가정만 변화가 일어난 것이 아니라 흘러흘러 나와 원수지었던 사람 나와 관계가 안 좋았던 사람들까지 다 풀어내는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의 통로가 여기에서 시작이 됩니다. 따라서 여러분 지금 말씀이 어쩌면 부담으로 들릴지 모르는데 이게 부담이 아니에요.
잘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이것은 나를 통하여서 살리는 하나님의 축복의 동명 이 사실을 믿습니까?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이왕 될 수 있는데 이 축복의 통로로 이왕이면 나를 통해 우리 가정이 살아나고 할렐루야 이왕이면 나를 통해서 내 주변의 영혼들이 사랑하는 그러한 축복의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혹시 목사님 우리 가정이 힘듭니다. 벌써 포기하고 계신 분 계십니다. 그렇지 않아요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러한 사람으로 인해서 이러한 사람으로 인해 다시 오게.
오늘 그것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나 한 사람이 하나님을 갈망해서 내가 주님을 진짜 만나 내 삶이 변화되어지고 내 삶의 그 영향력이 흘러갈 때 우리 가정은 주님께로 돌아오는 가정, 내 주변은 죽었다가 살아나는 꽃이 되는 아름다운 결실을 보는 축복의 자리가 된다. 나를 통해서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하게 이 5월달을 세우고도 넘치는 그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하고 간절히 간절히 축원을 드립니다.
결론입니다. 10절 말씀 주님은 이렇게 마무리를 지으세요. 10절같이 읽어봅니다. 시작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 그러면 여러분 여기에 예수님께서 이 사건을 통해서 하고자 하고 싶은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가 삭개오를 만났지만 또 한 사람을 통해서 누구를 잃어버린 자들을 많이 삼는다.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이 여러분 한 사람 개인 개인에게 들려져요.
그렇죠 그리고 나 한 사람에게 주신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 주님이 잃어버린 자를 그것이 우리 가족이 될 수도 있고요. 나와 관계 맺는 지인일 수도 있고요. 나와 원수 맺었던 사람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자랑하는 내가 주님을 만나면 그것들이 풀어지고 사랑하는 축복이 문화이 바라기는 오늘 이 가정의 달에 저와 여러분 한 사람을 통해서 가정이 온전하게 회복되어지고 놀라운 은혜가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나를 통해서 내가 다니는 직장, 내가 머물고 있는 곳곳마다 살아나는 역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