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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자 빌립(행 8장 4- 8)
성경본문: 사도행전 8: 4-8
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5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6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7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8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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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주대망 2022년 우리 울산교회 연간표어는 “은사의 발견 섬김의 기쁨”입니다.
상반기에는 은사의 발견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하반기에는 섬김의 기쁨에 초점을 맞추어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오늘부터 <섬김의 기쁨을 맛본 사람들>이란 큰 주제 아래 계속 말씀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첫 번째 시간, 신약 최초의 선교사요 전도자인 빌립의 은사를 살펴보겠습니다.
시간상 몇 절만 읽었지만 오늘 설교는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라고 시작하는 8장 전부를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교회가 그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흩어져 존재해야 합니다.
저는 유학 후에 8년 만에 귀국해서 “흩어진 사람들이 모이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 두레교회>라는 이름으로 서울 장승백이에서 새로운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런데 후배 신학생들이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교회가 모이기만 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비판을 했습니다.
모이기만 해서는 교회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하지만 실제로 흩어져 방황하던 사람들이 모여든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개척 2년 반 만에, 정릉에서 분립개척을 할 때는 오해의 소지를 줄이기 위해서 “흩어져 복음을 전하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 탄포리 교회>라는 이름으로 했습니다.
그리하여 장승백이는 친구 장희종 목사님이 맡고, 정릉은 정근두 목사가 맡았습니다.
어느 해 여름 150, 60명 모이는 <정릉 탄포리 교회>에서 한 가정이 선교하기 위해서 태국으로 떠나고 형제자매들이 유학이다 선교훈련이다 해서 미국으로, 영국으로 떠나가니까 빈자리가 느껴지더라고요,
그래서 어떤 집사님이 물었습니다. “목사님, 교회 이름 잘못 지은 것이 아닙니까?”
잘못했으면 정릉에서 가까운 미아리 고개에 즐비한 작명소를 찾을 뻔 했습니다.
그 작은 교회에서 한 때는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흩어진 식구들이 많았습니다. 영국, 프랑스, 인도할 것 없이, 그리고 캐나다와 미국에는 20가정도 넘는 식구들이 지금도 흩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한 차례 미주를 심방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가 그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흩어져 존재해야 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은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파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는 이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흩어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 거기에는 사도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는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간절히 기도하는 공동체이면서도 본래 사명을 잊고 예루살렘에만 안주하고 있었습니다.
말씀이 있고 풍성한 교제가 있고 간절히 기도하는 교회지만 사명을 감당하는 일에는 무관심할 수 있습니다.
2절을 보면 이런 상황 속에서 예루살렘 교회에 큰 핍박이 시작됩니다.
스데반의 순교를 기점으로 핍박의 회오리바람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와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4절을 보면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4절)
복음의 말씀을 전하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듭니다.
이 새로운 역사의 주역으로서 빌립의 일을 사도행전 8장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8장에 빌립이 등장하기 전에 그의 이름은 이미 6장에서 일곱 집사 가운데 한사람으로 나옵니다.
열두 사도를 도와 매일의 구제를 담당한 일곱 일꾼들은 모두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일곱 사람 중 다섯 명은 그 이름만 알 뿐이고, 스데반과 빌립의 행적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집사 스데반은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고’(행 6:8)
제일 처음 순교를 당할 만큼 뛰어난 사역자입니다.
사도행전 7장을 읽어보면 그는 집사라기보다는 탁월한 설교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요즈음 신학생들이 선호하는 구속사적인 설교의 원형을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그 행적이 기록된 빌립의 경우는 행전 21장 8절에서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라는 칭호를 주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유일하게 ‘전도자’ 라는 칭호를 받은 사람입니다.
물론 전도자라는 단어는 두 번 더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향해 ‘전도자의 사명을 감당하라’고 권면합니다.
또 한 번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은사로서 ‘사도, 선지자, 목사, 교사, 그리고 전도자’를 주셨다고 언급합니다.
그러나 그 외에는 전도자라는 말이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전도자는 좋은 소식을 알리는 사람을 뜻합니다.
복음의 선포자로서 승천하신 주님으로부터 교회를 세우도록 명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먼저 복음을 분명히 이해하고 이를 전해야겠다는 열심이 가득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올해 같이 더운 여름에도 물러서지 않고 훈련을 받습니다.
복음 전하는 새로운 사명으로 파송을 받습니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도 단기선교를 다녀옵니다.
오늘날은 전도사는 있지만 전도를 하는 사람, 전도자가 드문 것이 현실입니다.
전도자는 주님을 믿지 않는 친구나 친지들로 인해 마음의 부담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모르는 사람에게 하나님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보다 쉽게 분명하게 소개하기를 소원하는 사람입니다.
빌립은 전도의 은사를 받은 사람 중에 가장 탁월한 사람입니다.
전도자라는 명칭을 받은 첫 번째 사람일 뿐만 아니라 사도행전에 그의 전도사역이 기록된 사람입니다.
‘사도행전’이라고 부르지만 사도들의 행적이 모두 기록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스데반과 함께 빌립은 말씀 사역자로 부름 받은 것은 아니지만 가난한 사람 사이에서 구제하는 일에만 그들의 활동을 제한할 수 없었습니다.
사도행전 8장에는 주로 빌립의 전도 사역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전도자 빌립의 사마리아 사역을 살펴봅시다.
4-13절은 그의 사역 자체가 기록되어 있고 14-25절은 그 결과적인 사건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이 흩어진 무리들(Diaspora)로서 이방 가운데 살았듯이 신약의 하나님의 백성 역시 흩어지고 있는 모습이 4절에 나옵니다.
“이방인에게 선을 행하도록 내가 이 백성을 이방 가운데 흩으리라”는 가경의 예언처럼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은 가는 곳 마다 최고선을 사람들에게 베풀었습니다.
그 흩어진 무리들은 가는 곳마다, 찾는 집마다 복음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이런 일반적인 상황 속에서 빌립의 사마리아 활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록상으로 보면 그는 사마리아 지역을 복음화 시킨 최초의 선교사입니다.
사도들을 제치고 복음을 들고 유대지역을 벗어나 최초로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한 사람은 집사 빌립입니다.
돌아보니, 저도, 서울에서는 집사님 부부를, 울산교회에서도 장로님 부부를 평신도 선교사로 파송하는 일을 감당했습니다.
서울 탄포리 교회 첫 번째 선교사도 집사님 가정이셨고, 새로운 비전을 따라서 파송된 울산 교회 최초의 선교사가 최복만 장로님과 김순예 권사님이라는 점은 이런 사도행전의 전통과 부합되는 일이라고 자부합니다.
교회사에는 항상 목사나 전도사가 먼저 전도/선교하러 나가진 않았습니다.
유대와 사마리아 사람들 사이에는 오랜 불화의 앙금이 있는 처지입니다.
그 틈새는 세월이 흐를수록 좁혀지기는커녕 오히려 넓어져 가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는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상종하지 않기 위해서 사마리아를 돌아서 다녔던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서로 한자리에 앉지도 아니했고 그들 사이에는 혼사도 없었습니다.
북쪽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당한 후 똑똑한 사람들은 모두 포로로 잡아가고 그 땅에 아시리아가 다른 민족들을 이주 시켰습니다.
그래서 남은 이스라엘 사람들과 이주당한 이방사람들은 자연 서로 가깝게 지내게 되어 종교적으로, 혈연적으로 구분이 없이 지내게 되었습니다.
후에 남쪽 유대 사람들 역시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했다가 70년 만에 다시 돌아온 후 북쪽에 살던 혼혈족 사마리아인을 멸시했습니다.
순수한 유대의 혈통을 지키지 못했고 순수한 신앙의 유산을 전수하지 못했기 때문에 같이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후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건축할 때 사마리아 사람들도 참여하기를 희망했으나 거절했습니다.
그 때부터 사마리아 사람들이 앙심을 품게 된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본래 이방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본래는 한 혈통 유대 사람이었고 9지파 반이 거기에 살고 있었습니다.
어쨌거나 “그 날에 예루살렘 교회에 큰 박해”로 인해 흩어질 때만 해도 의식적으로 사마리아를 복음의 대상으로 여기는 사람은 없었을 것 같습니다.
그냥 각 곳에 흩어지다 보니 사마리아까지 이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사마리아인들은 종교적인 순수성을 지키지 못했다고 유대 사람들로 부터 지탄을 받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에는 오실 그 분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수가 성 여인의 이야기를 떠올려 보십시오.
오실 메시아에 대한 소망을 사마리아 사람들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오신 메시야를 전한다는 것은 파격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전도자 빌립의 가슴속에는 영혼을 향한 뜨거움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만이 아니라 사마리아인 역시 하나님의 복음이 필요함을 알았습니다.
전도자 빌립은 주님의 명령 속에 사마리아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남달리 의미 있게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그리스도인입니다.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는 요즈음 식으로 표현하면 ‘능력전도’였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빌립이 전하는 복음의 말씀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행하는 표적도 보았습니다.
빌립의 능력전도의 양상을 7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
예수님의 사역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사마리아에 임한 표적으로서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쫓겨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몰려오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악의 능력이 맞대결이 필요합니다.
또한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고침을 받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것이 사마리아 전도를 특징짓는 현상이었습니다.
빌립의 능력전도의 결과는 대중적인 회심으로 귀결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복음의 능력, 성령의 능력에 접한 결과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 왔습니다.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고 누가는 간단히 그 결과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귀신에 사로잡혔다는 것은 한 인생이 끝났음을 의미합니다.
귀신들린 식구가 나음을 입었을 때에 그 가정이 누리게 될 기쁨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앉은뱅이가 걷게 되고, 중풍병자가 낫게 되리라고 상상인들 해 보았겠습니까?
그런 역사가 일어나니까 성중에 큰 기쁨이 있었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효과적인 복음전도를 위해서 오늘날도 영적인 능력의 역사가 필요합니다.
복음의 선포와 영적 능력의 역사가 결합될 때 효과적인 대중전도가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능력 가운데 임하는 표적으로 그러한 역사가 나타날 때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효과적으로 사람들을 돌아오게 만듭니다.
저는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행한 능력전도가 오늘날도 타당한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능력전도는 복음서에 기록되고 그리고 사도행전에서 끝나는 이야기여서는 안 됩니다.
예수의 제자가 가는 곳마다 이러한 현상은 반드시 나타나야만 합니다.
귀신이 예수의 이름으로 쫓겨나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불치의 병에 걸린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한 역사가 오늘날도 일어날 수 있도록 우리는 기도할 소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능력전도야 말로 사람들을 물밀 듯이 주께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희망도 없이 고통 가운데 사는 많은 사람들을 주께로 이끌기 위해서는 이런 능력전도가 꼭 필요합니다.
오늘 경향각지에 사람들이 모여드는 교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곳은 반드시 능력이 나타나는 곳입니다.
능력이 나타나는 현장이라야 사람들이 모여들고 사람들의 삶의 변화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기도하는 대신에 정신과 의사에게 먼저 보내곤 합니다.
그리고 많은 양의 약물로써 치료해 보려는 시도밖에는 하지 않습니다. 어떤 병은 의사의 도움을 받아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상당한 정신병은 의사의 도움으로 나을 수 있는 병이 아닙니다.
귀신에 들린 사람치고 정신과 의사의 도움으로 고침을 받은 사람을 여러분은 본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능력만이 그들을 자유하게 할 수 있습니다.
빌립의 사역은 엄청난 파문을 가져왔습니다.
당시 사마리아 영계의 거장인 시몬이라는 사람까지 믿고 세례를 받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가 얼마나 진지한 믿음을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습니다만, 전도자 빌립의 사역이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을 손 안에 넣고, 자칭 큰 자라고 내세우던 시몬이, 어쨌든 예수를 믿겠다고 따라나선 것입니다.
급기야 예루살렘 교회가 사마리아도 복음을 받았다는 기쁜 소식 앞에 대표단을 파송했습니다.
두 사람의 사도,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어 기쁜 소식의 진상을 살피고 복음의 진전을 돕도록 하였습니다.
여기 대표단 가운데 베드로와 함께 요한이 왔다는 사실은 흥미롭습니다.
요한은 사실 사마리아에 대해서 감정이 좋지 못했습니다.
요한은 자기 형제 야고보와 예수님의 제자로 다닐 때에 사마리아인들이 스승 예수를 환대하지 않는다고 사마리아 마을에 불을 내려 태우도록 건의했던 사람입니다.
그 요한이, 지금 사마리아가 복음을 받았다는 기쁜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파송을 받았습니다.
복음은 사람의 마음을, 감정을 바꾸어 놓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면서 지역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다면 여러분은 아직도 복음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 사람입니다.
사마리아가 복음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요한은 달려가 보고 싶었습니다.
그처럼 완고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어떻게 들어갈 수 있었는지 자기의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말로 듣던 것 보다 눈으로 확인한 빌립의 전도 사역은 엄청났습니다.
사도들은 사마리아에서의 빌립의 전도활동을 보고 아주 놀랐을 뿐만 아니라 감동하였습니다. 그들은 시기와 질투를 하지 않았습니다.
노회의 허락도 없이 집사가 전도를 했다고 몰아세우지도 않았습니다.
집사의 직무는 구제이지 전도가 아니라고 책망하지도 않았습니다.
사마리아 성중에서 기뻐하는 것은 감정적인 기쁨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고 평가 절하하지도 않았습니다.
함께 기뻐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성령이 임하도록 간구했을 뿐 아니라 빌립의 전도에 자극을 받아 예루살렘에 돌아오는 길에 두 사도도 사마리아 고을고을 들려 전도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사도가 주의 말씀을 증언하여 말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새 사마리아인의 여러 마을에서 복음을 전하니라”(25절)
빌립이 복음을 전했던 사람들을 모아놓고 두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교대로 말씀잔치를 인도하여 회심 자를 양육하고 예루살렘에 돌아오는 길에는 사마리아 여러 촌에서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로 내려가는 길에도 여러 촌을 거쳐 왔을 터인데 복음을 전했다는 이야기가 없었지만, 사마리아에 와서 빌립의 사역을 목격하고 난 후, 그들의 마음속에는 전도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 교회의 성도들 모두가 전도의 은사를 받은 자일 수는 없습니다.
전도의 은사를 받은 성도들이 보통 10 % 정도 되는 교회가 있다면 그 교회는 성장할 수 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10 % 넘는 성도들이 전도의 은사를 활용할 때 나머지 성도들에게 전도해야 할 사명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전도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빌립의 전도은사 활용은 베드로와 요한으로 하여금 사마리아 각 촌에서 전도하도록 불을 지폈습니다.
교회마다 전도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제일 기쁜 날은 전도하는 날일 것입니다.
길거리에서든 공원이나 동헌에서든 전도지 한 장이라도 더 나누어 주려는 사람은 분명히 전도의 은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전도의 은사를 활용하게 될 때 나머지 사람들도 전도의 직무를 더 잘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어서 빌립의 전도, 제 2 장면을 살펴봅시다.
26-40절까지의 기록입니다.
여기 전도자 빌립과 구도자 에티오피아 내시 사이에 아름다운 만남이 있습니다. 복음은 예기치 않은 자에게도 기쁜 소식인 동시에 찾아 헤매는 자에게도 기쁜 소식임에 틀림없습니다.
주의 천사가 성공적인 대중전도의 현장에서 가사 사막 길로 가도록 빌립을 내몰았습니다. 왜 이처럼 전도가 잘 되고 있는 도시에서 왜 광야 길로 가게 하는지 빌립은 몰랐지만 순종했습니다. 거기서 진리를 갈구하는 한 구도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리 같았으면 어떻게 했을까요?
‘나는 도시전도 전문가입니다.’ ‘길거리 전도 전공이 아닙니다.’라고 했다면 어떤 결과가 있었을까요?
보십시오. 한 때 큰 기쁨이 넘치는 성읍 사마리아는 이교도의 지역으로 전락했지만, 순종한 전도자 빌립을 통해서 한 나라가 2천년 동안 기독교 국가로 남았다는 사실을 직시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로는 이같이 분명하지는 않지만 여러분의 마음속에 누구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권하시는 성령의 지시를 느껴 보신 적은 없습니까?
조용히 여러분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이름들을 위해 기도해 보고 싶은 소원을 느낀 적은 없습니까?
가서 만나도록 권하시는 주님께 순종해 보십시오.
주께서는 순종하는 전도자를 축복해 주십니다.
사막 길을 걷다가 빌립은 그 길을 달려오는 병거를 만납니다.
2000 킬로나 되는 그 먼 길을 나서, 진리를 갈구하는 에티오피아 여왕의 재정을 맡은 관리- 재무장관을 만났습니다.
마차에서 큰 소리로 이사야의 글을 읽는 그에게 다가서도록 성령께서 강권하셨습니다.
“읽는 것을 깨닫느냐?” 복음을 전하고 싶은 빌립은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물었습니다.
전도자는 먼저 말을 붙일 줄 알아야 합니다. 먼저 접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병거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이제는 오히려 에티오피아 내시 편에서 묻기 시작합니다.
“청컨대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
성령께서는 순종하는 전도자를 위해서, 하필 그 때 내시가 읽고 있던 본문이 이사야 53장의 이야기였습니다.
고난당하는 그 여호와의 종에 대한 본문을 읽고 있었습니다.
고난당하는 종에서 시작하여 영광 받으신 메시야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는 아주 좋은 부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짊어지신 것을 설명하고 그 죽음과 부활을 증거 했습니다.
그 부활을 믿고 회개하는 자에게는 그의 죄가 용서됨을 증거 했습니다.
에티오피아 관리는 마음을 열고 주 예수를 받아 들였습니다.
그 때 마차가 물 있는 곳에 이르자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라고 물었습니다.
빌립의 마음속에는 이 내시가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거기서 세례를 주었습니다. 내시의 마음을 여신 분이 성령이셨기 때문에 빌립은 그에게 세례 주는 일을 주저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몇 가지 면에서 사마리아 전도와 대조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전도가 다수를 상대로 한 대중전도라면 여기에서는 한사람을 상대로 한 개인전도입니다.
빌립은 대중전도에 있어서도 능력의 은사가 있었을 뿐 아니라 한사람을 두고도 복음을 전하는데 탁월했던 사람으로 보입니다.
사마리아 전도가 도시전도였다면 여기서는 길에서 복음을 전한 노방전도입니다.
사마리아 전도가 더러운 귀신이 쫓겨 나가고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낫는 능력전도였다면 여기서는 성경을 풀어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는 말씀전도입니다.
그러나 두 전도의 공통점도 있습니다.
우선 사마리아 전도에 나타난 표적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사건임에 틀림없습니다.
나타난 것은 표적이고 능력이지만 그 능력과 표적의 주체는 성령이셨던 것입니다.
여기, 빌립을 사막 길로 내려가도록 내 모신 분도 역시 성령이십니다.
그래서 전도의 주체는 항상 성령이십니다.
주의 성령이 병거 가까이 가도록 지시하였고 읽는 성경에서 부터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도록 하신 분이 성령이십니다.
전도의 주도적 역할을 성령께서 담당하신 점에 있어서는 서로 공통점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는 귀신을 내어 쫓고 병을 고침으로 인해 성중에 큰 기쁨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복음이 능력으로 전파된 결과는 사람사이에 기쁨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내시가 복음을 받은 결과 역시 마음속에 기쁨이었습니다.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기쁨이 찾아 듭니다. 복음을 영접한 가슴에는 기쁨이 넘쳐 납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말미암는 복음 전도의 결과가 사람사이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주는 공통점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사람들 사이에 찾아올 때 그 마음속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에 순종해서 할 때는 여러분 마음에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에 순종하여 그 지시를 따라 살 때 여러분의 삶에 기쁨이 있을 뿐 아니라 여러분이 만난 사람들에게도 그 기쁨이 전달됩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영에 순종하여 충고 하였는데 상대방에게는 기쁨이, 평안함이 없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는 일에는 평안과 기쁨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최고의 선을 베푸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질 만큼 가지고도 행복하지 못한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사명이 있습니다.
사마리아 성중에 큰 기쁨이 있었던 것처럼 울산광역시 집집마다 큰 기쁨이 넘치도록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에티오피아 고위관리의 마음 뿐 아니라 대한민국 보통사람들의 마음마다 기쁨이 넘치도록 예수님 소식을 전합시다.
빌립은 계속해서 전도자의 직무를 다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40절)
주의 영에 이끌린 빌립은 가는 곳마다 전도의 은사를 활용하였습니다. 아마 에그론, 욥바, 아볼로니아, 사론 평원을 지나면서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한 번 전도자는 한 평생 전도자입니다.
빌립은 열두 사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성직을 수여 받지 않았지만 복음 전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입니다.
복음전파는 목사나 선교사나 전도사의 전매특허가 아닙니다.
누구나 제자라면 순종해야 하는 부름이고 은사를 받은 사람이면 더욱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올 해는 구역별로 전도의 계획을 세워 보시지 않겠습니까?
해마다 가을이면 하던 공동체 전도축제는 올 가을에는 본당 1층과 지하 수리 공사로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럴 때는 창의적 접근을 할 절호의 기회입니다. 구역마다 공동체마다 새로운 계획들을 세워주십시오.
살고 있는 주변을 따라서 전도계획을 수립해 보십시오.
아파트, 또는 빌라를 대상으로 복음 전할 계획을 마련합시다.
계층별로 복음을 전할 수도 있습니다.
어른을 대상으로 할 때는 입이 떨어지지 않지만 어린 아이들이나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이 쉬운 사람이 있다면 그렇게 하시고 또 다른 사람은 노인 분들을 대상으로 하는 전도에 은사를 가졌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을 직접 만나는 일이 부담스러운 사람에게는 문서전도도 가능합니다.
신앙서적도 선물할 수도 있습니다.
커피 전도나 팥빙수 전도는 어떻습니까?
먼저는 구역으로 모시고 적절한 때에 예배의 자리로 모시면 됩니다.
좋은 설교가 담긴 유투브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전도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은 아예 전도에 유리한 직업을 선택해서 빌립처럼 평생을 전도인의 직무를 다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나갈 때 많은 수입이 보장된 직장을 찾는다는 것이 꼭 바람직한 일은 아닙니다. 물질 때문에 생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직업이라면 그 자체가 아름다운 헌신이 될 수 있습니다. 많은 돈을 벌어서 선교기금을 내놓는 일도 할 수 있겠지만 직업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다면 그것도 하나님께서 받으실 제사입니다.
복음단체의 간사로서 사역할 수도 있습니다. 생명의 전화 자원봉사도 할 수 있습니다. 외판원도 복음 전하기 좋은 직종중의 하나입니다. 사람을 만나기 때문에 말을 붙일 수 있고, 그러다 보면 가져간 물건 뿐 아니라 복음도 함께 내어 놓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미용사나 이발사, 택시기사, 의사나 교사등도 복음 전하기 좋은 직종입니다.
여러분이나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그런 직업을 택하도록 권유할 수 있는 새로운 삶의 변화가 일어나야만 합니다. 좋은 교회 울산 교회에 나오는 성도들은 자식들이 모두 좋은 대학만 가기를 바라서는 안 됩니다. 대학이 아니라 아무 직업이라도 좋습니다. 여기는 잠깐 우리가 주의 뜻을 행하기 위해 나그네로 사는 곳입니다.
여러분 중에서 언변이 좋은 사람을 활용하십시오. 그 사람은 상품 세일즈만 잘할 뿐 아니라 복음의 세일즈도 잘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틀림없이 복음을 전할 때도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설득력 있게 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합니다만 필요 이상 대학 공부할 것도 없습니다. 석사, 박사학위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냥 세일즈 해도 복음을 위해 살 수 있습니다. 세일즈 하는 사람들 보면 집집마다 들어갈 수 있는 특권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초인종 누르고 찾아가서 물건만 파는 것이 아니라 슬쩍 복음도 함께 끼워서 팔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직장 한 번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자매들의 직장 중에서 전도하기 좋은 것이 미용사더라고요. 거기 와서는 머리 감아서 씌워놓으면 할 수 없이 앉아있어야 합니다. 무슨 소리를 들어도 들어야 하니까요. 미용실에 앉아있으면 이 골목에 누가 살고 어쩌고저쩌고 며느리, 시어머니 이야기 다 나옵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곳이 아니라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개인 전도소를 차린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얼마나 좋습니다. 대학 나와도 전도하기 그만큼 좋은 직장 가지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필이면 어려운 대학, 졸업해도 취직도 안 되는 대학에 가려고만 꼭 생각하지 마십시오. 떨어지는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뜻이 있고, 그러지 않아도 좋은 직장들 많이 있습니다. 아파트 경비원도 괜찮은 면이 있습니다. 아파트 주민들의 신상파악을 다 할 수 있고 원하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가 먹고 살 일터가 좋아서 모여들었다고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흩어져 복음을 전하는 교회 본연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이 하나님께서 울산 지역으로 파송하셨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이곳에 아무 연고도 없지만 직장을 따라서 오신 분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여러분을 파송하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각자가 구주대망 2022년 한 해가 가기 전에 전도의 결실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올 한해 “은사의 발견, 사역의 기쁨”을 맛보는 해가 되길!
특히 이번 여름 전도훈련을 받고 전도의 은사를 확인한 성도 여러분, 복음을 전하는 일에 결단하기를 바랍니다. 그 때 여러분의 삶에 진정한 보람과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이제 더운 여름도 지나갈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대답할 말들이 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