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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사람 바나바1 (행 4장32- 37)
성경본문: 사도행전 4:32-37
32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34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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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추석도 명절 잘 보내셨습니까?
이제 가을이 무르익고 있습니다. 무서운 더위는 기억도 사라지고 이젠 하루 종일 가을바람이 산들 불고, 오곡백과는 무르익어 추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부터 우리 모두가 본받을 만한 초대교회 성도 한 분을 몇 차례 나누어 그의 은사를 살펴보겠습니다.
사도행전에는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자기가 받은 은사를 활용한 사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만 누가는 오직 한 사람 바나바를 가리켜 “착한 사람”(행 11:24)이라는 설명을 붙입니다.
기라성 같은 초대교회 성도들 가운데 오직 바나바 한 사람을 가리켜 “착한 사람”이란 설명을 하는 것을 보면 바나바는 틀림없이 착한 사람일 것입니다.
일곱 집사를 설명할 때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을 듣는 사람”으로 말합니다.
그 중 스데반을 가리켜서는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자”라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누가는 바나바를 본격적으로 설명하면서 사도행전 11장 24절에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고 합니다.
누가는 베드로도 잘 알았고 바울도 잘 알았지만, 유독 바나바를 설명하며 “착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을 잘 살펴보면, 누가의 정확한 어휘 사용에 누구나 감탄할 것입니다. 누가를 가리켜 ‘신학자요 역사가’란 표현은 매우 정확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공동체를 섬기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데 자신이 받은 영적 은사를 활용한 사람들은 많습니다만 유독 바나바를 소개할 때 한 번만 “착한 사람”이란 표현을 누가가 사용하는 것을 보면, 그 때나 지금이나 유능한 삶은 많아도 “착한 사람”은 드문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면 사도행전의 기록을 따라서 ‘착한 사람 바나바’의 영적 은사가 무엇이며 그 은사로 어떻게 공동체를 섬기고,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사용했는지 살펴봅시다.
다시 사도행전 4장 32절에서 37절까지 읽어봅시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구브로에서 난 레위 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우선 바나바가 본문에 등장한 배경을 살펴봅시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 상황을 32절에서 35절은 보여줍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후 신앙 공동체의 특징을 살펴보십시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은혜 받은 공동체는 무엇보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됩니다.
거기에 물질이 서로 통용되고, 서로 섬기는 데 사용되는 기적이 뒤따릅니다.
죄 가운데 세상에 태어난 아이가 처음 배우는 말 가운데 하나가 “내꺼야”라는 말인데 그 한계를 초월하는 역사는 큰 은혜를 입은 증거입니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라는 증거가 본문에는 입증됩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형성된 신앙공동체의 특징을 거듭 설명하는 구절입니다만 그 전모를 알기 위해서는 사도행전 2장 42절에서 47절을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 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본문 4장 32절 이하는 오순절 신앙공동체의 특징 중 한 측면을 반복하므로 바나바가 등장할 배경을 마련합니다. 능력 있는 말씀 선포의 결과로 자연 성도들의 수효가 급증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첫 날 세례를 받은 남자의 수효가 3,000명이나 되었고(행 2:41), 성령이 충만한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백성들에게 열심히 복음을 전해서 사도행전 4장 4절은 믿게 된 남자의 수효만 해도 약 5,000명에 이르렀습니다.
어떤 학자(J.Jeremias)는 당시 예루살렘 총 인구를 55,000~95,000명으로 추산합니다.
물론 이 숫자는 명절이 되면 더욱 늘어납니다.
그렇게 예루살렘 인구를 추정할 때 남자만 5,000명에 이르렀다는 보고는 엄청난 이야기입니다.
여자와 아이들을 합하면 예수 부활을 믿게 된 수효가 적어도 2만 이상 될 것입니다.
선교 100주년 만에 전 인구의 20%에 육박해도 경이적인 기록으로 통하지만 당시 10년도 되지 않은 기간에 20%에 육박한 예루살렘의 신자 증가율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본문의 또 하나의 강조는 그 많은 사람 가운데 핍절한 자가 없었다는 보고를 하고 있습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먹고 입는데 어려움이 없다는 이야기는 별로 특기할 것이 못됩니다만 2,000년 전 팔레스틴에서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우선 사도행전 3장만 보아도 구걸하는 앉은뱅이가 등장합니다만 복음서 곳곳에 걸인이 나오는 것을 보면 당시 유대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대인 가운데는 많은 걸인이 산재했는데도 신자 가운데는 핍절한 자가 없었다는 것은 실로 그 시대의 아들 누가의 눈으로 보면 대단한 이야기입니다.
요즈음은 상황이 많이 바뀌었습니다만 몇 년 전만해도 우리 교회 단기 선교팀이 동남아 국제공항에 내리는 순간, 공항부터 시작해서 길거리마다 구걸하는 아이들을 만나면서, 우리나라가 엄청난 하나님의 축복 속에 사는 것을 실감했을 것입니다.
누가는 당시 팔레스틴 경제 상황에서 성도들 가운데 가난한 자가 없었다는 것을 대단한 사건으로 기록합니다.
그것은 바로 신명기 언약의 성취의 증거로서 말하고 있습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신 15:4-5).
그러면 어떻게 가난이 극복되었습니까?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줌이라”(34절)
가진 자 가운데 누군가가 밭이나 집을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계속적으로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공동체의 필요에 따라 자발적인 연보가 계속되었고 사도들이 그것을 적절히 나누어주었기에 성도들 가운데 끼니 걱정하는 사람은 없었다는 기록입니다.
우리 울산교회는 요즈음 그런 현상을 접하고 있습니다.
한 분은 오래 동안 팔리지 않던 집이 팔려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본당 리모델링을 위한 헌금을 하고 싶은데 주일까지 기다리질 못해서 500만원을 사무실로 가져오기기도 하고, 울산교회에 등록한지 채 2년이 되지 않는 또 한 분은 주일날 천만 원을 건축헌금을 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땅이나 집 가진 성도들이 들으면 뜨끔한 기록입니다만 너무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이런 기적은 마음에 부어진 은혜가 풍성할 때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은혜가 핍절한 시대의 성도들은 그 동안 바친 연보라도 되찾고 싶어 합니다.
찾을 수만 있다면 되찾아 증권이나 주식투자에 보탰으면 합니다.
그러나 은혜가 풍성한 성도들의 마음에서는 자기 명의로 된 땅이나 집을 팔아 성도의 필요를 채우는 일에 참여합니다.
성령이 부은바 된 오순절을 경험한 예루살렘 교회는 물질적인 희사가 줄을 이은 가운데 그 대표적인 경우로 바나바의 일을 기록합니다.
마음에 부어진 은혜에 보답해서 자원해서 자신의 땅이나 집을 팔아 연보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누가는 바나바의 경우를 본문 4장에서, 또 5장에는 그와 대조적인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 경우만 기록합니다.
“구브로에서 난 레위 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행 4:36, 47)
바나바는 구브로에서 태어난 레위족 유대인입니다. 혈통은 유대인이지만, 구브로에서 태어난 것 보면 말은 헬라 말을 했을 것입니다. 소위 헬라 파 유대인 중의 한 사람일 것입니다.
본명은 요셉이었으나 요셉이라고 하면 그 때나 지금이나 통하지 않습니다.
본명보다는 사도들이 붙여준 별명 바나바로 소개해야 누군지 쉽게 알아봅니다.
별명 바나바가 그가 누구인지 잘 나타내었기에 우리에게는 바나바란 별명이 훨씬 익숙합니다.
바나바란 이름 뜻이 무엇입니까?
개역개정 성경은 “위로의 아들”이라고 잘 번역하고 있습니다.
바나바의 이름 뜻은 ‘권면하고 위로하는 아들’이란 의미로 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깊이 연구한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권면과 위로’뿐 아니라 “예언의 아들” “예언자의 아들”로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물론 예언의 주요 기능이 권면이요 위로입니다만 하여간 누가는 작명소를 위해서 이름풀이를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됨을 소개하려고 이 설명을 붙입니다. 특히 별명은 사람됨을 보여줍니다. 여러분은 어떤 별명이 어울리는 삶을 살고 있을까요?
바나바의 행적을 앞으로 우리가 살펴볼수록 그가 얼마나 탁월한 위로의 아들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만 오늘은 우선 4장 37절의 행동을 중심으로 살펴봅시다.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팔아가지고 온 밭도 밭 나름입니다.
텃밭으로 이해하면 몇 십 평, 기껏해야 몇 백 평일 것입니다만 이 경우 대개의 성경학자들은 그가 소유한 구브로에 있는 농장으로 봅니다.
구브로는 지금 지중해의 한 섬 사이프러스(키프로스)를 가리킵니다.
거기는 흩어진 유대인들이 당시 많이 살았고 비옥한 농토로 알려진 곳입니다.
포도주, 밀가루, 올리브 오일, 무화과, 벌꿀 등이 그 곳의 주요 농산물입니다.
바나바는 거기 있는 밭을 판 것입니다. 논 밭 개념이 아닌 농장 개념의 밭을 그가 팔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상당한 신앙적 결단이 요구됩니다.
그 때는 무슨 우루과이 라운드다 해서 농사지어 봤자 수지가 맞지 않아 ‘팔아서 연보나 하자’고 내린 결단이 아닙니다.
급속도로 늘어나는 성도들의 필요를 감당하기 위해 바나바의 마음속에 성령이 역사한 결과입니다.
바나나, 그는 역시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공동체의 필요를 위해 자신의 것을 드리는 사람입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과 자기 것을 나누는 사람입니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신앙 공동체의 필요를 못 본체하고 지나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앞서 말했듯이, 2천 년 전 초대교회는 일반적으로 가난한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도 그 시절은 예외가 아닙니다.
“가난은 나라님도 해결할 수 없다”고들 하던 시절입니다.
지금 북쪽 위원장도 인민의 가난을 위해서 발 벗고 나서고 있질 않습니까?
당시 초대 교회 성도들은 일반적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함으로 말미암아 직업을 갖거나 유지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런 일반적인 상황 뿐 아니라 오순절 날 회심한 다른 지역에서 온 순례자들 가운데 얼마는 그대로 예루살렘에 남아서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성도들과 교제를 나누었을 것입니다.
모이면 떡을 떼고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는 것이 초대 신앙 공동체의 특징(행 2:46)이다 보니 다른 한 편 많은 재정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아주 지혜롭고 검소하게 주일날만 식당에서 소찬으로 8백 명이 나누어도, 일 년 친교비가 6,400만 원이나 되는데, 초반부터 3,000여명 남자 장정이요 그 수효가 5,000까지 늘어난 상황을 감안해 보십시오.
그래서 부유한 사람들이 재산과 집을 팔아 사도들로 하여금 구제할 수 있는 재원을 조달했습니다.
그 때 지주였던 바나바 역시 구브로에 있던 자신의 땅을 팔아 그 판돈 전체를 주저하지 않고 교회의 구제 자금으로, 우리 식으로 말하면 친교비로 사용토록 내어놓았습니다.
자기 재산 포기하고 공동체를 위해 바칠 때, 자연 성도들은 그런 결단을 내린 사람을 흠모하고 감탄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탐낸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의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명성도 얻고 싶고, 돈은 다 바치기 아깝고 해서 생긴 사건입니다.
신앙 좋다는 소리는 듣고 싶은데 다 바치고 나면 노후대책 걱정이 되었던 모양입니다.
밭을 팔아 챙겨둘 만큼 챙겨두고, 다 바친 양 위장 신고하다가, 자신의 속임수에 자신의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속여 세무 신고하듯이 해보려고 했지만 국세청 무슨 과 하고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성령에 충만한 공동체는 그것을 용인하지 않았을 것이고 성령께서는 거짓을 대번 알아채고 즉각 심판을 시행했습니다.
바나바는 어쩌면 돈 될 만한 소유 전부를 다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고 생각됩니다. 뒤에 기록된 그의 삶을 보면 남긴 재산에 의지하고 살아간 사람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신약 교회 최초의 선교사로 바울과 함께 뛰는 것을 보면 4장의 결단은 그의 생의 분기점이 되는 사건으로 생각됩니다.
역시 그는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재산 처분한 뒤에도 열심히 손으로 일하면서 주님 사업에 참여한 흔적을 우리는 성경 다른 부분에서 읽어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사도됨을 항변하면서 자신과 같은 자비량 선교 방침을 따라 사역하는 사람으로 바나바를 언급합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고전 9:4-6).
바나바는 자신의 재산을 처분해서 성도들을 섬긴 일 말고도 배고픈 자를 먹이는 일에 관여한 기록이 두어 곳 나옵니다. 사도행전 11장 27절에서 30절과 12장 25절입니다.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구제금을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행 11:27-30).
“바나바와 사울이 구제금을 전달하는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 오니라”(행 12:25)
4장 기록과는 10년 가까이 세월이 흐른 후입니다. 교회가 더 이상 예루살렘에만 있지 않고 유다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퍼져 나갔고 급기야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안디옥에 이방 선교의 놀라운 소식이 전해지자 예루살렘 모교회가 사실 조사 겸 격려를 위해 파송 받은 자가 바나바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안디옥 사역을 살핀 바나바는 다소까지 내려가 친히 사울을 찾아 일 년 이상 거기서 동역한 다음 사도행전 11장 27절 사건으로 연결됩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항상 재정적으로 궁핍했습니다.
그러나 글라우디오 황제 때 (41-54년) 지중해 주변 지역들은 곡물 재배의 실패로 인해 심각한 기근에 봉착했습니다.
로마의 통치 아래 있는 모든 문명 세상이 심각한 기근으로 시달렸습니다.
그 때 바나바가 당시 지도자로 있던 안디옥 교회에서는, 예루살렘에서 온 선지자 아가보가 예언한 이후 동정심이 발동해서 힘껏 구제금을 마련했습니다.
예루살렘과 주변 유대에 사는 형제들을 위해 그 심각한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연보해서 돕기로 결정했습니다.
전에는 혼자서 가진 것을 모두 바쳐 교회의 필요를 채웠지만, 이제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로서 바나바의 동정심은 온 교회를 움직이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런 구호품은 바나바와 사울의 손을 통하여 예루살렘 장로들에게 전달됩니다. 달리 말해 바나바는 가난하고 배고픈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있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이 있었던 초대교회라고 누구나 다 선뜻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 돕는 일에 뛰어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성경에 계시된 가난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에 그 마음이 움직인 사람입니다.
신앙이 성숙한 사람은 자기보다 잘사는 사람을 바라보는 대신 어려운 사람을 돌아봅니다.
누군가 본문을 설명하면서
“오늘날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보존하기에 급급할 뿐 아니라 무정하게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아야 흡족해한다. . . 그들은 팔았다. 그러나 우리의 최고 욕망은 사서 모으려는 욕망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너무 몰인정해서 가난한 사람들과 이 땅에서 같이 사는 것, 물, 공기, 하늘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것조차 아까워서 꺼려한다.”라고 우리의 잘못을 지적합니다.
바나바는 먼저 자신이 가진 것으로, 다음에는 모든 성도들과 함께, 힘껏 가난한 자 돕는 일에 발 벗고 나서고 있습니다.
바나바는 연보 구제의 은사가 탁월한 사람입니다.
모든 신자는 물질을 드리는 일에 부름 받았습니다만 바나바는 연보 구제에 탁월한 능력을 부여받은 성도입니다.
이 은사는 꼭 잘 사는 사람들에게 한정된 은사는 아닙니다.
마케도니아 성도들은 매우 가난했지만 풍성한 연보를 드리는 일에 기쁨으로 참여했습니다.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했습니다.
이 은사를 받은 사람은 바나바처럼 형제나 교회의 필요를 감지하는 마음가짐과 자기희생의 정신이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직분자 여러분,
말씀을 맺습니다.
성도들은 누구든지 물질로 서로 섬기는 일에 부름 받았습니다.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복을 주신 정도에 따라 예물을 가져와서 드리십시오.”(신 16:17). 물질로 서로 섬기는 것은 우리 모두의 직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은 이 연보의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려운 사람을 보면 그 돕는 일은 자기가 할 것으로 느낍니다. 시의 적절하고 후한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습니다.
기쁨으로 자원해서 주님의 백성 돕는 일에 주의 일을 진전시키기 위해 참여하는 자는 구제 연보의 은사를 받은 자입니다.
여러분의 은사로 공동체의 부족을 채우는 기쁨을 누리십시오.
이 은사를 가졌으면서도 주저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일이 여러분의 물질 지원을 필요로 할 때 마음에 부담이 느껴지면 그 일을 위한 하나님의 부름이라고 여기십시오.
그래서 초대교회의 전통 때문에 마음에 부담을 느끼는 자가 실천하는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생활수준을 낮추더라도 기꺼이 하나님 나라를 위한 선한 청지기 사명을 다하십시오.
하지만 조심하십시오.
드린 연보 액수로 자부하지 마십시오.
자기만큼 드리지 못하는 사람을 신앙 없는 자로 단정하는 잘못을 범하지 마십시오.
드린 물질적 공헌으로 공동체 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위치를 확보하려는 위험을 피하십시오.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바칠 때 하나님은 반드시 갚아 주십니다.
바나바는 구브로의 농장을 팔아 바친 후 일생을 가난하게 살지 않았습니다.
보십시오.
그는 더 이상 구브로의 한 농장에 메어있지 않고 지중해 모든 영역을 그 일터로 삼아 헌신토록 주님은 그의 생애를 보상했습니다.
땅을 파고 사는 생활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의 사역으로 보상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지도자 된 우리 모두에게 자비, 구제, 연보의 은사를 활용토록 도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자신의 것을 먼저 모두 드리고 다음에 공동체의 지도자답게 모든 공동체를 선한 일에 동참토록 하는 것을 바나바에게서 배울 수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분야에서든 헌신의 바른 순서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