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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행복1등하우스 원문보기 글쓴이: 회오리
백정 범부를 아우르는 단 하나의 소원 - 백범일지
이번에 읽은 도서는 누구나 다 아는 책임과 동시에 역사의 기록이다. 학교의 과제든 개인적인 관심이든, 어떤 경로로든 한 번은 읽었을 법한 기록이고, 설령 읽지 않았다고 해도 이름은 다들 알 만한 책이다. 그 작품은 바로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 선생의 기록 ‘백범일지’ 되시겠다. 그가 유언 대신 기록한 그 자신의 발자취, 지나온 자리의 기록을 이번에 만났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할 것이오. 또 ‘그 다음 소우원이 무엇이냐?’ 하는 세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백범일지’는 백범 김구 선생의 수기이자 우리나라 역사의 뼈아픈 시대상을 담은 글이다. 보통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로 칭하지만, 그의 본명은 ‘창암’ 내지는 창수’로
황해도 벽촌에서 태어났다. 여기서 창암은 김구의 아명이고, 창수는 그가 동학에 입교하며 개명한 이름이다. 그리고 김구가 쓴 ‘백범일지’는 그가 평생을 걸어온 삶에 대한 기록이자 자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을 담은 책이요, 후손들에게 경계로 내리는 설움과 수난의 기록이다.
일지의 시작은 김구(김창암)의 어린 시절부터 전개된다. 그의 집안은 원래는 양반이었으나, 역모의 죄로 신분을 숨기게 되었다고 한다. 그 결과 김구 출생 당시 소위 말하는 ‘상놈’이 되어 농사를 짓고 살았다. 김구 역시 여느 아이들처럼 말썽도 부리고, 지꿎은 면도 있었다. 엿이 먹고 싶어서 멀쩡한 숫가락을 반토막 내서 엿과 바꾼 일화는 정말이지 ‘아이들이란 다 이런가’ 하는 실소를 금할 수 없게 만든다. 덧붙여 다혈질적이고 즉흥적인 기질이 있어 보인다. 아마도 그런 면은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어떤 특성이 아닌가 추측한다. 일지에 묘사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삼촌 등 집안 어른들의 행동을 보면 나름 그럴듯한 가설인 것 같다. 비교적 평온했던 유년기와 달리 백범의 청소년기는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오늘날 중고생들이 진로에 대해 고민하는 시기, 김구 또한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나 고민했다. 무시당하는 상놈의 군레를 벗고자 과거를 보기 위해 공부했으나 입시장의 비리를 목격하고 응시하기를 포기했으며, 부친의 권유로 관상을 배웠으나 자신의 인물이 성공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깨닫고 낙담하기도 했다. 비록 외형이 못나고 잘난 것도 없어 큰 인물이 못될 상이더라도, 다만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며 심기를 다잡기도 했다. 이상향을 꿈꾸며 세외를 배척하는 척양척왜 정신으로 동학에 입교 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적도 있었다. 그러나 현실의 세파에 실패를 겪고 만다. 한동안 방랑을 하던 중 우리나라 국모를 피살한 복수로 ‘왜놈’ 중위 쓰치다를 기지를 발휘해 치하포에서 처단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일단 김구의 입장에서는 복수더라도 살인은 맞고, 백범은 공고문을 붙여 그 사실을 널리 알리기까지 했다. 당연히 인천 감옥으로 연행되었다. 김구는 훗날 척양척외 정신이 반듯이 옳지만은 않음을 깨닫고, 인생살이도 막막해 ‘원종’이란 법명을 받고 불제자가 될 결심까지 했다.
그런 굴곡진 시간을 따라가다 보니 마치 우리네 방황하던 사춘기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경제 불황이요, 성공만능주의요, 입시전쟁이요, 취업경쟁 등 팍팍한 세상이라 살기 힘들다지만, 그래도 전쟁이나 일제의 치하와 같은 난리통은 아닌 요즘이다. 그럼에도 청소년기 진로의 방황은 누구에게나 힘들고 골치가 아프다. 하물며 시국이 어수선하다 못해 몹시 막장스러운 그 시절에는 오죽했을까? 그럼에도 김구의 행적을 관통하는 일관성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조국에, 아니 민족에 대한 ‘애국심’ 말이다. 그의 사상이 아주 명백하게 드러난 글이 바로 저 위에 따로 발췌한 내용이다. 하느님이 네 소우원이 무엇이냐 세 번 물으면, 그 세 번 모두 대한민국의 독립이라 답하겠다고 절절하게 쓴 글에서 백범 김구 선생의 부르짖음이 들리는 것 같다.
그런 한편 김구는 독립운동가였을 뿐만 아니라 미래의 동량인 아이들의 교육에도 힘썼던 교사이기도 했다. 게다가 ‘교육’은 독립을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 독립운동을 펼치는 데 어려움은 비단 일제의 폭압에만 있지 않았던 것이다. 무지한 민중, 나라를 빼앗겼다는 자각이 부족한 사람들, 서양의 것이면 무조건 배척하고 보던 양반들의 고리타분한 사고, 일본에 압자비가 되어 활동하거나 차라리 외세에 힘을 빌려 안주하고자 했던 위정자들이 그를 탄식하도록 만들었다. 적이 밖에만 있는 게 아니었던 거다. 그리고 자고로 내부에 있는 적이 더 골치 아프고 해결하기 난해한 법이다. 때문에 백범은 기독교의 힘을 빌려 농민, 상놈에 이르는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교육과 계몽에 매진했고, 그런 한편 암암리에 독립을 추진하는 일에도 힘써야 했다. 그의 호 ‘백범’ 역시 백정 범부에게까지 애국심이 널리 확산되길 바라며 지은 것이다. 앞에서 백범이 한때 불교에 몸을 담았다고 했는데, 따지자면 그는 기독교와 불교 둘 다에 몸담은 셈이요, 동양 철학을 기반으로 서양의 학문도 익힌 셈이다.
임진왜란 당시 ‘난중일기’를 남긴 이순신 장군은 기록상의 오류가 별로 없는 편인데 ‘백범일지’는 날짜나 시기에 오류가 제법 있고, 지명이나 인명 역시 부정확한 대목이 다수 보인다. 또 지방 방언인 듯한 사투리나 바로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문체도 몇몇 있다. 때문에 주석을 달고 주해를 덧붙였지만, 오히려 그 부분 탓에 쭉쭉 읽기에는 가독성이 떨어지는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백범일지가 혼란스러운 시국에 기록되었다는 점을 감안해야하겠다. 하지만 비록 여러 군데 오류가 있다고 해도 이 기록은 그 나름의 가치가 있다. 개인의 기록, 그 시대를 살았던 역사의 진솔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감옥에서의 추태, 속으로 품었던 사심(邪心) 등 구태여 드러낼 필요가 없는 부분까지 백범 선생은 가감 없이 써놓았다. 자기 포장이 없다시피 한 그 대목만으로도 됨됨이를 알 수 있었다.
“제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6원을 주고 구입한 것인데, 선생님 시계는 불과 2원짜리입니다. 저는 이제 1시간밖에 더 소용없습니다.”
사실 김구의 생해는 백범일지를 따로 읽어보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는 알 수 있다.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가, 그때 국어책에도 이번에 독서한 백범일지의 한 장면이 실렸기 때문이다. 이 일지를 읽다 보면 ‘아, 이 장면!’ 하고 놀라는 대목이 분명 있을 것이다. 바로 윤봉길 의사와 백범의 만남이다. 백범은 상해까지 가서 임시정부에 합류해 독립운동을 진행한다. 하지만 일제의 탄압과 자금 부족 등의 이유로 공작이 위축되자 결국은 극단적인 수단을 취하게 된다. 바로 저 유명한 ‘도시락 폭탄’을 쓴 거다. 일종의 테러인데, 이렇게까지 해서 독립을 이루었다는 것이, 필설로 형용하기 어려운 감흥을 준다. 백범은 윤봉길
등 죽으러 가는 길을 마다하지 않은 실천적 행동가인 ‘철혈남아’들을 보내며 어떤 심정이었을까?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라는 말로 마지막 인사를 나누며 대체 무슨 생각을 했었을까.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장정들을 사지로 보내야 했고, 생포당할 시에 온갖 끔찍한 고문을 당할 것을 알면서도 조직의 기밀 유지를 위해 행동지침을 하달해야 했다. 아무리 대의를, 조국 독립을 위해서라지만 그런 일을 과연 멀쩡한 정신으로 감당할 수 있었을까. 자기가 폭사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을 죽으라고 떠나보내는 건데? 차라리 자기 혼자 폭발물 품고 적진에 뛰어드는 거라면 편했을지도 모른다. 백범은 자신의 목숨을 길가에 들풀 같다고 말했다. 하찮은 명줄이나 독립을 바랐기에 죽지 못했다고 술회한다. 하지만 끝에 가서는 대의를 위해 죽어간 젊은이들 때문에라도 눈을 감을 수 없었을지 모른다. 독립이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나중에 지하에서 ‘철혈남아’들을 만났을 때 그들을 바로 보기 위해서라도, 백범은 끝까지 최선을 다했던 게 아닐까.
“눈 오는 벌판을 가로질러 걸어갈 때 발걸음 함부로 하지 말지어다. 오늘 내가 남긴 자국은 드디어 뒷사람의 길이 되느니.”
이 시는 서산대사의 선시지만, 분단 전후 백범이 주로 쓴 시이기도 하다. 눈밭에 찍힌 발자국을 역사에 남기는 자취로 은유해 정치적 이념과 사상으로 반목하기보다, 서로 신중하게 새로운 나라와 앞으로의 후손들을 위해 행동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는 게 주요 해설이다. 백범 김구 선생은 반평생을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살았고, 나머지 20여 년 또한 이 나라의 자주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하지만 일제 해방은 보았으되, 끝내 한국의 ‘완벽한 자주 독립’은 보지 못했다. 다들 알다시피 해방 직후부터 그놈의 사상의 불씨가 옮겨붙어서, 곧 분단이 되고 말았으니까. 특정 이념에 지배를 받아 민족이 둘로 쪼개진 그 상황을 과연 완벽한 자주 독립이라고 칭할 수 있을까? 그래도 되는가? 백범의 입장에서는 답답하다 못해 속이 문드러졌을 것 같다. 천신만고 끝에 독립이 되었더니, 그 감격을 다 누리기도 전에 이제 같은 민족끼리 총뿌리를 겨눈 꼴이라니, 그 얼마나 한심하고 서글펐을까? 아니, 애초에 미국의 개입으로 타국의 손에 해방을 맞은 것부터가 서러웠을지도 모른다.
내가 국사를 배우고 근현대사를 배울 때 선생님들이 늘 강조하던 대목이 하나 있다. “우리나라는 이미 독립을 위해 싸울 군대를 준비하고 막 그 작전을 시작하려던 참이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그 군대가 바로 미국의 전략사무국 OSS(office of Sttrategic Service)를 통해 훈련받은 우리 ‘광복군’이다. 무기 수송, 병력 이동 등 계획을 꽤 디테일하게 세웠었다고, 미국의 폭탄이 없었더라도 한국은 어떻게든 독립이 되었을 거라며, 해방을 맞은 건 잘된 일이나, 그것은 우리 손에 의한 것이여야 했다고, 외세의 개입이 오히려 좋지 않았다고, 어쩌다 이 대목이 나올 때마다 강조하며 안타까워하곤 했었다. 나는 그때마다 드는 의문이 있다. 미국은 이미 훈련 지원을 하고 있었으면서, 왜 갑자기 일본에 폭탄을 떨어뜨렸는가 하는 점이다. 걔네가 우리나라가 빨리 독립이 되길 바라서 화끈하게 도와줬을 리는 물론 없다. 당시 수업 시간에 폭탄을 빌미로 한국을 지들 손에 쥐고 요리하려 했을 거라는 음모설이 심심치 않게 제기되곤 했었다. 실제로 남과 북으로, 미국과 소련으로 편을 먹고 싸우는 참사가 벌어지기도 했으니까. 자기들 사상전쟁에 남의 집(나라)까지 끌어들인 격이다. “역시 광복군이 일주일 더 빨랐어야.....” 하는 아쉬움 금할 길 없다.
아마 당대를 살던 백범 김구는 후세의 이런 평가를 예상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도 사람이다. 완벽하지 않다. 현재 내 입장에서 봤을 때 특정 행동은 무모하게 보였고, 계획성이 조금 부족하다 싶은 면도 있었다. 그럼에도 백범 선생이 낫다고 여겨지는 이유는 그는 실천적 행동가였기 때문이다. 즉, 행동하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또 시간이 백범을 성숙하도록 했으며, 그의 생각을 단련시켰기 때문이다. 곧잘 상놈 운운하며 자신을 낮추지만, 그는 이따금 다혈질일지언정, 우리의 고유 문화와 더불어 선진 지식을 받아들일 만큼 유연하고 생각이 깊은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김구가, 백범 선생이 우리나라 지금의 현실, ‘헬조선’ 운운하는, ‘개한민국’ 소리가 곧잘 터지는 이 꼴을 보면, 과연 뭐라고 하실까?
“자네의 생명은 상제께서 보호하시는 줄 아네. 사악한 것이 옳은 것을 범하지 못하지. 하나 유감스러운 것은 그 정탐꾼도 한인인즉, 한인의 총을 맞고 산 것은 일인의 총에 죽은 것보다 못하네.”
백범은 1949년 6월 경교장에서 육군 장교 안두희가 쏜 총탄을 맞고 서거한다. 그러나 그의 가슴에 총탄이 박힌 건 그 일이 처음은 아니었다.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중에도 그는 총탄을 맞고 생사의 기로에 섰었다. 그것도 같은 한인의 손에 의해서 말이다. 그때 김구의 어머니가 그 소식을 듣고 남긴 말이 위의 저 문장이다. 그러나 십수년 후, 결국에는 같은 민족의 손에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이승만 정파가 내세운 ‘남한만이라도 정부를 수립하자’는 주장에 반대한 탓에 암살을 당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 남·북 상황이 통일과는 거리가 먼 형국이었으나, 남쪽에서 김구의 지지도는 제법 높았던 걸로 보인다. 그런 이유로 일종의 정적 제거라고 할 수 있다. 솔직히 남한 자체에서도 포용보다는 암살 총탄이 오가는 판국에 남북간 통일은 요원하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김구의 죽음이 아쉬운 까닭은 그가 같은 민족의 손에 돌아갔기 때문인 것 같다. 일본의 손에 의한 것도 아니요, 국운을 건 전장도 아닌, 고작 외세의 반목과 한낱 정쟁으로 인해 숨을 거두었기 때문인 것 같다. 만약 백범이 끝까지 살아서, 우리나라가 분단 초기에 어떻게든 다시 합치된 대한민국이 되었더라면, 북쪽에 무늬만 공산주의지 실상은 독제인 그 정권이 들어서지 않았더라면, 만약 진짜 그랬더라면 어땠을까. 그런 아쉬움이 백범 김구의 주검 위에 미련의 꽃을 피운다. 더불어 자기 나라 국민을 아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온갖 망언으로 국민 가슴에 비수를 쑤셔대는 위정자들을 보면, 자꾸 김구의 가슴에 박혔던 총탄이 떠오르기도 한다. 비약이 심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막말로 그를 죽인 총탄과 우리나라 정치인이 국민을 비하하는 발언과의 차이가 뭐란 말인가. 같은 민족의 손에 암살당한 김구와 자기 나라 정치인에게 모욕당한 국민의 차이점이 대체 뭐란 말인가.
이것도 나름 역사의 기록이니 당당하게 실명 적겠다. 인터넷 한구석에 대대손손 보존되었으면 싶다. 당신의 역사가 이렇게 새겨지고 있다는 거 알랑가 몰라. 얼마 전에 더불어민주당 유튜브를 통해 이해찬 당대표가 “선천적인 장애인은 의지가 약하다”라는 장애인 비하 망언을 해서 문제가 된 적이 있다. 참고로 내가 바로 그 의지가 약하다고 주장하는 ‘선천적 시각장애인’이다. 이 발언을 접하고 나는 ‘수치감 + 모욕감 + 인권침해 + 그 외 온갖 분노감’을 느꼈다. 사람이 왜 사람을 죽이는지 알 것 같았다. 이해찬 그 작자는 장애인 당사자뿐 아니라 그 가족들의 마음도 찢은 것과 같다. 그에게 ‘의지’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고 싶다. 내가 걸어온 인생이, 또 걷고 있는 인생이, 대체 뭘로 보이느냔 말이다. 그놈의 의지가 없어서, 사람답게, 사람 구실하며, 사람으로 살아보겠다고, 내가 이러고 있느냐고! 명예훼손으로 고소장 날리고 싶다. 한시련은 단체 서명을 받아서 대규모 고소장이라도 접수할 것이지 언제까지 사과문으로 퉁칠 건가 하는 생각도 했다. 알고 봤더니, 이해찬 이 작자, 상습범이더라는 이 말이다. 대략 2년 전인가, 그때도 “정치권에는 정신장애인들이 많다. 신체장애인보다 더 한심한 사람들” 어쩌고 하며 신체장애인은 한심하다는 전제를 깔고 망언을 한 바 있다. 그런데 또 정신 못 차리고 막말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백범일지를 읽으며, 또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망언질을 보며, 과거의 일제강점기 역사가 반복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독립운동을 할 사람이 없을 테니까. 당시에는 백범 김구나 도산 안창호, 윤봉길 의사 등 독립을 바라는 애국지사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 나라, 오늘의 ‘헬조선 개한민국’에는 그런 인사들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의문이다. 이 나라 국회위원들은 자기 나라 국민을 비하하길 서슴치 않고, 심심하면 자기 국민에게 모멸감을 준다. 듣자니 이번 우리나라 정부 슬로건이 ‘사람이 먼저’라고 하던데, 그거 순전히 글자로만 하는 것 같다. 정작 행동은 ‘내 사람 먼저’인 것 같지 않은가. 어디서는 지금 대통령 정부를 ‘내 캠코더’라고 요약하고 있더라. 그러니까, ‘내 선거 캠프, 나랑 코드 맞는 인사, 더불어민주당’의 약칭으로 말이다. 자기를 의지박약하고 한심한 인간으로 취급하는데, 그런 취급을 당하고 어느 나라 어떤 국민의 애국심이 펄펄 끓어올라 용소슴치겠냐고! 한낱 백정과 평범한 범부에 이르기까지 애국심 고취를 바라 지은 호, 백범. 그 범부에는 장애인도 포함되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가장 하층 직업인 백정도 속하는 판국에, 장애인은 제외했겠는가? 그러나 나는 한국인임을 자랑스럽게 여길지언정, 대한민국 국회는 한없이 부끄럽게 여긴다. 이런 시간이 쌓여 역사가 된다는 것을, 저 푸른 기와지붕의 높으신 분들은 자각이나 하고 있는 걸까. 눈을 밟는 걸음도 신중하라던 당부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우리는 해방이 됐으되, 아직 독립은 되지 않았다. 대통령 있고, 정부가 있고, 국가 꼴을 갖추고 있다고 독립은 아니라고 본다. 선진국 칭호 얻고, 기술 개발과 성장이 획기적이라고, 계몽이 된 게 아닌 것처럼. 솔직히 이 책, ‘백범일지’를 읽고 이렇다 싶은 감상은 들지 않는다. 그저 답답할 뿐이다. 한때 위대한 순국의 의지가 있었고,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을 일궈낼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재 이 나라가 그들의 희생에 걸맞는 국격을 갖추고 있느냐 묻는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저을 것이다. 끝으로 백범 김구 선생께 묻고 싶은, 혹은 넋두리를 하고 싶은 문장으로 감상을 마무리하겠다.
“백범 선생님. 당신께서 평생을 바치고, 죽는 순간에도 바라신 완전한 자유, 오롯한 주권의 독립국은 아직 요원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도 서로 다른 이념으로 자유롭지 못하고, 위정자들은 제 나라 국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앞장서 욕보이며, 설원에 그려질 발자국은 되새기지 않고, 사리사욕에만 눈이 멀어 스스로 불에 뛰어드는 나방이 되기를 자청하는군요. 사람답게 살길 원하나, 그들은 사람으로 보지 않고 있으니, 이를 어찌하겠습니까. 당신께서 지켜온 역사를 알면서도,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빛바래니, 이 송구함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목근화 봉오리 틔움은 해를 그리는 줄기 덕이요, 가는 들풀이 된바람에 누웠다 일어남은 그 뿌리가 깊기 때문일 것인데, 과연 푸르른 뜻이 흩어질 수밖에 없는 오늘의 필부들이 당신의 유지를 따를 수 있겠습니까.”
첫댓글 북벌 비밀문서를 청국에 건너바친 김자점의 손자 김창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