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원불사(源佛寺) 원문보기 글쓴이: 단현
눈을 내리 뜨고 멍에의 길이만큼, 스님들의 방종(放縱)과 탁발정신
쇄신안이 발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야단법석’은 계속되는 모양이다. 불교닷컴 기사에 따르면 지난 6월 12일 4차 야단법석이 있었다고 전한다.
종교전문기자의 지적
조계사 100주년 기념관에서 열린 4차 야단법석에서 주목할 만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은 종교전문기자로 잘 알려져 있는 한겨레신문의 조현기자의 발언이었다. 조기자는 야단법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두 번째 이야기손님 조현 기자(한겨레신문)는 ‘종교전문기자의 눈에 비친 불교계의 공동체문화’를 통해 ‘승가공동체는 자유만 있지 책임은 없는 조직’이라고 비판했다.
("사회성 결여된 불교…자유만 있고 책임성 없어", 불교닷컴 2012-06-12)
참으로 정곡을 찌르는 명쾌한 지적이다. 현재 한국불교계가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한 정답으로 보여진다.
“한 잠 잘 자고 일어났더니..”
이처럼 예리하게 지적한 조현기자는 전에도 날카로운 지적을 한 바 있다. 그것은 작년에 범불교도대회 3주년 기념세미나에서 한 발언이다. 그때 당시 다음과 같이 한국불교 현실에 대하여 지적하였다.
조현 한겨레신문 종교전문기자는 “어떤 스님이 한 잠 잘 자고 일어났더니 기독교 국가가 되어 있더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늘어지게 주무신 결과”라며 “현 상황은 장로 대통령 때문에 일어난 문제만이 아니다”고 밝혔다.
이어 “기독교에서 봉사하고 남을 도와줬을 때 불교는 민족의식이나 자비구현 없이 긴 잠을 잤다”며 “앞으로 금강경 정신으로 우리 사회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법화경 정신을 어떻게 여길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뿌리는 불교, 줄기는 사회문제 이야기해야", 불교신문 2011-08-28)
“한잠 잘 자고 났더니 기독교 국가로 되어 있다”라는 말이 인상적이다. 이 말은 앞서 언급한 “승가는 자유만 있지 책임의식은 없다”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결국 한국불교의 문제는 ‘스님문제’라는 말과 같다.
거룩한 스님들
우리나라에서 스님을 승보로 부른다. 물론 ‘거룩한’ 이라는 말이 앞에 붙지만 우리나라 불교에서 이는 형식에 불과하다. 한글삼귀의문에서 부처님도 가르침도 거룩한 것이라 하였는데, 부처님이나 가르침이 거룩하고 성스러운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따라서 “거룩한 부처님” “거룩한 가르침”이라 하지 않고 단지 “부처님” “가르침”이라 불러도 거룩한 것이나 똑 같은 것이다.
그런데 한글삼귀의문에서는 ‘거룩한’ 이라는 명칭을 스님에게도 붙여 주어 “거룩한 스님에게 귀의 합니다”로 하였다. 참으로 절묘한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냥 “스님에게 귀의합니다”라고 하면 문제 될 것임에 틀림없지만 ‘거룩한’이라는 말을 붙였기 때문에 문제 될 것이 없는 것이다.
이런 한글삼귀의문은 결국 대승불교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한국불교에서 스님을 승보로 간주 하게 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으로 기여 한 것으로 보여진다.
삼배의 예
불자들은 불법승 삼보에 귀의 하고 오계를 준수하는 생활을 한다. 이때 삼보에서 승은 ‘공동체’개념이다. 승려 개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커뮤니티’를 말한다. 초기불교나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이런 커뮤니티를 ‘성자의 공동체’ 즉 ‘상가(Sangha)’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고 실천 하여 성스런 흐름이 든 이들을 말한다.
하지만 한국불교에서는 승이 스님들 개인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한국불교에서 스님은 삼보 중의 하나로서 대접받고 있는데, 그런 표현 중의 하나가 ‘삼배의 예’를 올리는 것이다. 나이가 젊은 스님이든 사미이든 머리를 삭발하고 승복을 입은 모든 이는 삼보 중의 하나로서 삼배의 예를 올려야 된다는 것이 해방 이후 전통 아닌 전통이 되었다고 한다.
남자재가불자들이 절에 가기를 꺼려하는 이유
이렇게 스님을 승보로 보고 삼배 올리는 것을 당연시 한 결과 스님들의 위상은 올라 갔을지 모르지만 그에 못지 않게 문제점도 나타나게 되었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남자재가불자들이 절에 가기를 꺼려 하는 것이라 한다.
우리나라 불교에 대하여 ‘보살불교’ 또는 ‘치마불교’라고 한다. 주로 여성불자가 많다는 이유에서이다. 그것도 나이 든 여성을 말한다. 절에 가면 나이 든 노보살만 보일 뿐 젊은이 들이 보이지 않고 더구나 남자불자들을 찾아 볼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렇게 절에서 청년불자, 남자불자를 찾아 보기 힘든 이유 중의 하나가 스님들의 권위에 따른 것이라 볼 수 있다. 스님에 대하여 승보로 간주하여 삼배의 예를 올려야 한다는 전통이 아닌 전통이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한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승(僧)과 속(俗)을 가르는 경계
이처럼 한국불교에서 스님들의 지위와 권위는 매우 높다. 그래서 승과 속으로 나누고, 성과 속으로 구분하려는 경향이 짙다. 그런 것중의 하나가 ‘독신승’제도라 볼 수 있다.
삭발하고 승복을 입은 스님의 권위는 보통 청정비구라 불리우는 ‘독신승’으로부터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로 이 독신승이야말로 성과 속을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준호교수는 자신의 논문에서 승과 속의 경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따라서 경전의 많은 곳에서 “성적 행위의 단절인 범행(梵行)의 실천으로 완전히 고(苦)을 멸한다”는 표현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출가자와 재가자가 구분되는 결정적인 경계로서 성행(性行)을 차단할 수 있는 마음자세와 환경을 가졌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구분할 수 있다.
‘율장’에 여러 조항에 의하면 출가 비구는 이성 또는 동성 간의 직접적인 성행위는 물론 자위행위를 포함한 그 어떠한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방법으로도 성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상대 성을 말로 희롱해서 성적 쾌감을 얻는 경우나 상대성의 자태에 대한 기억이나 상상을 통해서 얻는 것도 포함된다.
(조준호교수, 불교는 성적욕망을 어떻게 보는가, 불교평론 열린논단 2011-10-17)
승과 속, 성과 속을 가르는 기준이 성행(性行)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출가와 재가의 다른 점이 삭발과 승복등 외관상 차이 뿐만 아니라 불사음계를 적용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는 것을 말한다.
출가자의 불사음계
재가자의 불사음계는 ‘남의 아내나 보호를 받는 여자와 불법적으로 성관계를 맺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는 자신의 배우자와 성관계는 허용되지만 그 외는 모두 불사음계를 범한다는 것을 뜻한다.
반면 출가자의 불사음계는 ‘어떠한 경우에서도 성관계를 가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한다. 만약 출가자가 어떠한 경우에 성관계를 갖게 된다면 이는 ‘바라이죄’를 짓는 것이 되기 때문에 승단에서 추방되어 다시는 비구가 될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초기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그대의 성기를 여인에게 집어넣느니보다는 차라리 무시무시하고 독을 품은 뱀 아가리 속에 집어넣는 것이 낫다. 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의 성기를 여인에게 집어넣느니보다는 차라리 검은 뱀의 아가리 속에 집어넣는 것이 낫다. 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의 성기를 여인에게 집어넣느니보다는 차라리 활활 타오르는 숯 구덩이에 집어넣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초기경전, 조준호교수, 불교는 성적욕망을 어떻게 보는가, 불교평론 열린논단 2011-10-17)
부처님은 출가자의 성행에 대하여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는데 있어서 방해 요인으로 보았다. 그래서 여인과 성행을 하는 것에 대하여 뱀의 아가리와 불구덩이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였다.
재가자 따라하기
우학스님의 지은 책중에 “저거들은 맨날 고기 묵고”라는 책이 있다. 포교용으로 만든 책인데 제목이 매우 재미 있다. 재가자들에 대하여 맨날 고기를 먹는 사람으로 표현 하였다.
재가자들은 맨날 고기를 먹는다. 이는 출가자와 다른 것이다. 출가자가 맨날 고기를 먹고 산다면 이를 출가자라 볼 수 없을 것이다. 출가자 이면서 재가자의 삶을 동경한다든가 호기심을 가진다든가 재가자가 하는 것을 따라 한다면 더 이상 출가자자라 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불교에서는 출가자가 재가자가 하는 것을 다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이번 도박추문도 그런 재가자 따라하기의 전형적인 예라 볼 수 있다.
출가자의 권위는 삭발하고 승복입은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계행을 지키는데서 오는 것임은 말할 나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불교에서는 출가자는 매우 자유스러운 것 같다. 모든 면에서 다 그런 것 같다.
마음 내키는 대로
부모형제와 인연을 끊고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는 것은 대자유를 얻기 위한 밑바탕일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득도 하여 대자유를 얻었을 때 아무런 거리낌 없는 것 같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 하면 ‘내키는대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스님들은 왜 내키는 대로 행동할까.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자승스님은 아울러 "상급자의 명령에 순명하는 가톨릭 등 다른 종단과 달리 우리 스님들은 내키는 대로 걸망을 지고 훌쩍 떠나거나, 선방에 들어가서 몇년간 수행하거나, 외국에 가도 아무런 제어를 받지 않는 풍토여서 해외에서 포교하라며 강제로 파견하는 것은 어렵다"고 고충을 토로하기도 했다.
(조계종, 미국서 한국불교 알리기 시동, 매일경제 2010-09-19)
지난 2010년 자승스님이 뉴욕에 갔었을 때 하던 말이다. 우리 스님네들은 “내키는 대로” 산다는 것이다. 이를 걸망하나 지고 훌쩍 떠나 버린다고도 표현 하였다.
스님들이 ‘걸망을 꾸린다’는 말은 ‘떠난다’는 말과 같다. 불교TV에서 어느 선사는 법문에서 자신이 걸망 꾸린 이야기를 하였다. 선방에 들어 갔는데 도저히 맞지 않아 걸망을 꾸린 적이 몇 번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자유인으로 스님들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는 날 갑자기 훌쩍 떠나 버릴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스님들에 대한 또 다른 표현으로서 ‘운수납자(雲水衲子)’라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구름처럼 물처럼 어느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떠 돌아다님을 말한다. 주로 여기 저기 선방을 옮겨 다니며 수도하는 스님들을 말한다.
고정된 틀에 얽매이지 않는다는데
이처럼 운수납자로서의 출가자의 이미지는 ‘대자유인’이다. 세상의 모든 것과 인연을 끊었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거리낄 것이 없는 것이다. 더구나 간화선 수행을 하면 그런 경향은 더욱 더 강화 되는 것 같다.
무비스님은 불교TV ‘서장’강의에서 ‘선(禪)’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선수행을 하는 간화선 수행자들은 수행을 하다 보면 ‘마음에 근육’이 붙기 시작한다고 한다.
그래서 마음에 근육이 붙으면 대범해진 다고 한다. 평소에는 마음이 여린 사람도 수행을 하다 보면 마음의 근육이 붙어 갑자기 호탕하게 웃는다든가 버럭 화를 내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런 선에 대하여 다음의 7가지로 요약하였다.
선(禪)의 7가지 정신
1.간소(簡素) 2. 탈속(脫俗) 3.자연(自然) 4.유현(幽玄) 5.고고(枯高) 6. 정적(靜寂) 7. 변화(變化)
선에 일곱가지 정신이 있다고 한다. 선은 소박하고 간단한 것을 특징으로 하는데, 세속적인 것에서 멀리 떠나 고요한 분위기에서 어떤 고정된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연스런 것이며, 동시에 변화무쌍한 것이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정된 틀에 묶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자승스님은 우리나라 출가수행자들에 대하여 “내키는 대로” 라고 표현 하였을 것이다.
내키는 대로 하는 법문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 가는 것이 한국불교의 스님들이라 보여진다. 어떤 형식이나 틀, 제도에 구애 받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걸림 없이 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일까 법문할 때도 내키는 대로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대부분의 선사들이 법문할 때 경전에 근거한 법문이라기 보다 자신의 이야기 위주이다. 자신이 경험하였던 것, 신도들에게 들은 이야기등이 주류를 이룬다. 그러다 보니 받아 적을 것이 별로 없다.
선사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매번 하던 말을 반복하기 일쑤인데 인천 Y선원의 S선사도 그런 케이스에 속한다.
S선사는 현재 불교방송에서 불교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아침 6시에 방송되는 이 프로는 사실 스님이 오래 전에 법문하던 것을 올려 놓은 것이라 한다. 그것도 스튜디오에서 법문한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법문 한 것을 들려 주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걸림 없는 스님의 목소리를 가감 없이 들을 수 있었다.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소승’또는 ‘소승법’이라는 말이다. 이런 말은 항상 선사가 말하는 ‘정법문중’과 ‘최상승법’과 대비하여 하는 말이다. 그런 선사는 경전에 근거하기 보다 자신위주의 법문을 주로 펼치는데 대표적으로 ‘견성성불’ 들 수 있다.
선사의 법문에 따르면 석가모니 부처님은 ‘견성성불’ 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것도 간화선 수행으로 하였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선사가 늘 강조 하는 말은 ‘이뭐꼬’이기 때문이다.
이뭐꼬화두는 선방에서나 하는 간화선 수행방법의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가불자들에게 적용하려 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은 부정되기 일쑤이고 심지어 왜곡 되기 까지 한다.
또 스님은 법문 시작전에 ‘나무아미타불 게송노래’를 한다. 한자어로 된 게송을 독특한 운률로 노래한 다음 마무리로 “나무아미타불~” 하고 맺는 것이다. 이때 목탁소리가 나고 신도들도 나무아미타불을 합송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나무아미타불 게송노래가 시도 때도 없이 법문 중에 불쑥 나온다는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이야기위주 법문으로 소승과 최상승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왜곡하는 가 하면, 법문 도중 나무아미타불 게송노래를 부르는 것도 선사들의 ‘자유분방함’을 말하는 것이라 볼 수 없다. 한마디로 거리낄 것도 없고 걸림도 없는 ‘내키는대로’ 법문이라 볼 수 있다. 그런 법문이 벌써 수개월째 전파를 타고 있다.
스님들의 방종(放縱)
종교전문 조현기자는 한국의 승가에 대하여 “승가는 자유만 있지 책임의식은 없다”라고 따끔 하게 충고 하였다. 이말은 무엇을 말할까 한마디로 ‘방종(放縱)’이라 말 할 수 있다.
방종의 사전적 의미는 “아무 거리낌이 없이 제멋대로 함부로 행동함”으로 되어 있다. 현재 한국의 승가에 딱 들어 맞는 말이라 볼 수 있다.
스님들이 승보로서 삼배의 예를 받고 운수납자가 되어 선의 7가지 정신에 따라 고정된 틀에 얽매이지 않았을 때 이를 승가의 ‘자유’를 만끽하는 것이라 보여진다. 하지만 자유가 지나쳐 거리낌 없이, 걸림 없이 내키는 대로 살아 갈 때 이에 대하여 책임의식이 없다면 방종으로 볼 수 밖에 없다. .
무언가 하려 하다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걸망을 꾸린다면 끝까지 책임지는 모습이라 볼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걸림 없이 내키는 대로 살다 ‘어느 날 잠에서 깨어 났더니 세상이 온통 십자가 천지로 바뀌어 있었더라’는 이야기는 승가의 책임의식 부재를 말한다. 이는 한마디로 승가의 방종에 해당된다.
이런 방종의 절정이 이번 도박추문사건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룸살롱 출입, 은처문제 등 거론하기에도 낯 뜨거운 일련의 추문으로 인하여 불자들은 실망하고 있다. 이제 실망을 넘어 일부 불자들은 개종을 생각하고 있고 불교에 대하여 우호적으로 생각하였던 사람들조차 유보적으로 돌아섰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기존불자와 잠재적인 불자를 합하여 약 100만명 정도가 이탈 하였을 것으로 어떤 이는 추측하기도 한다.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이처럼 신도가 이탈하고 불교에 대하여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가지게 된 결정적인 요인은 스님들의 방종 때문이다. 자유만 누릴 줄만 알았지 그에 따른 책임의식을 갖지 않는 다면 방종임에 틀림없다. 그런 방종으로 일관한다면 신도들의 이탈은 가속화 될 것이고 불교의 사회의 이미지는 추락할 것이다.
아무 하는 일 없이 산 좋고,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에서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보내는 사이 세상은 온통 십자로 뒤덥혔다면 이는 스님들의 ‘직무유기’나 마찬가지이다. 더구나 스님들의 자유분방한 삶으로 인하여 이번 도박사건처럼 추문이 종종 터진다면 포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포교를 방해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결과 불교의 교세가 약화되면 결국 불자들만 불이익을 받게 되어 있다.
도시에서 절 구경하기 힘들다. 설령 있다고 할지라도 점집이나 무당집의 ‘큰 집’ 정도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온갖 기복과 방편이 난무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식 있는 불자들이라면 결코 그런 곳에 가서 앉아 있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절은 관광지나 산에나 가야 볼 수 있다. 이렇게 사람 사는 곳에 절이 없다는 것은 포교에 손을 놓고 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설령 일선에서 열심히 포교를 한다고 할지라도 도박사건 처럼 한번 메스컴을 타면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지는 듯하다. 이 모두가 자유만 누릴 줄 알았지 책임의식이 결여 되어 있는 스님들의 ‘방종’ 때문이다.
깔 보아서 안될 것 네 가지
종교의 경쟁력은 무엇일까. 많은 신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 경쟁력 있는 것일까. 커다란 성전을 가지고 있는 것을 경쟁력이라고 볼 수 있을까. 종교의 경쟁력에 대하여 여러가지 요인이 있을 수 있지만 가장 크게 작용하는 것은 ‘청정’에 있다. 교역자가 청정하였을 때 비록 신도는 얼마 되지 않고 건물도 작지만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였다.
[세존] "대왕이여, 어리거나 작더라도 깔보거나 업신여겨서는 안될 네 가지 존재가 있습니다. 그 네 가지 존재란 무엇인가.
대왕이여, 왕족은 젊었어도 깔보거나 업신여겨서는 안됩니다.
대왕이여, 뱀은 어려도 깔보거나 업신여겨서는 안됩니다.
대왕이여, 불은 작아도 깔보거나 업신여겨서는 안됩니다.
대왕이여, 수행승은 어려도 깔보거나 업신여겨서는 안됩니다.
대왕이여, 이 네 가지 존재는 어리거나 작아도 깔보거나 업신여겨서는 안됩니다."
(다하라경-Daharasuttaṃ- Should Not Be Belittled-젊은이경, 상윳따니까야 S3. 1. 1, 전재성님역)
부처님이 꼬살라국의 빠세나디왕과의 대화에서 한말이다. 부처님 당시 뿌라나 깟싸빠, 막칼리 고쌀라, 니간타 나타뿟따, 싼자야 베랏티뿟따, 빠꾸다 깟짜야나, 아지따 께싸깜발리 등의 외도 스승이 있었는데, 이들에 비하여 부처님은 나이도 젊고 출가 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빠세나디 왕이 질문한 것에 대하여 부처님은 무시하지 말아야 할 것 네 가지에 대해서 말씀 하신 것이다.
왜 무시하면 안 되는가
부처님은 ‘왕족’과 ‘뱀’과 ‘불’과 ‘수행자’ 이렇게 네 가지에 대하여 무시하지 말라고 하였다. 왜 그럴까 이어지는 가르침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구체적으로 말씀 하셨다.
"귀족으로 명예롭게 태어난 고귀한 가문의 왕족을 어리다고 깔보고 업신여겨서는 안되리.
귀족이 인간의 지배자로 왕의 지위에 오르고 그의 분노를 사면 처벌로써 맹렬히 공격당하리.
자기의 목숨을 지키려면 업신여기지 말아야 하리.
마을이나 숲속에서 사람이 뱀을 볼 때 작다고 깔보고 업신여겨서는 안되리.
여러 모양을 바꿔 강렬한 힘으로 뱀은 돌아다니면서 아이나 남자, 여자에게 다가가 단번에 물어버리리.
자기의 목숨을 지키려면 업신여기지 말아야 하리.
맹렬하게 타오르며 검은 숯을 남기는 불을 사람들이여 작다고 깔보고 업신여기지 마라.
태울 것을 만나면 불은 참으로 크게 타오르며 아이나 남자, 여자에게 다가가 단번에 태워버리리.
자기의 목숨을 지키려면 업신여기지 말아야 하리.
불이 숲을 태우고 불이 꺼지면 검은 숯자국이 되며 밤과 낮이 지나면 거기서 새 가지가 돋아나지만 계행을 지키는 수행승이 청정의 불꽃으로 불타오르면 아들과 가축이 없어 그 상속자들은 재산을 얻지 못하리.
자손이 없고 상속자가 없으니 그들은 뿌리뽑힌 종려나무가 되네.
참으로 슬기로운 사람은 자신에게 유익함을 보며 뱀과 불과 명예로운 귀족과 계율을 잘 갖춘 수행승과 바르게 잘 지내야 하리."
(다하라경-Daharasuttaṃ- Should Not Be Belittled-젊은이경, 상윳따니까야 S3. 1. 1, 전재성님역)
왕자가 어리다고 무시하면 큰 코 다친다. 그 왕자가 자라서 왕이 되면 누구도 거역할 수 없기 때문이다. 뱀이 작다고 무시하지 말라고 한다. 뱀이 비록 작아 보이지만 ‘독’을 가지고 있어서 누구든지 물리기라도 하면 즉사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불씨도 마찬가지이다. 작은 불꽃에 지나지 않지만 방심하다간 모든 것을 태워 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수행자도 마찬가지로 무시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머리를 깍고 분소의를 걸치고 탁발에 의존하는 수행자라 할지라도 청정범행을 닦아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면 공양을 받는 성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앗사지의 경행에 감동하여
이렇게 부처님은 무시하지 말아야 할 것 네 가지를 말씀 하셨는데, 종교의 경쟁력은 바로 청정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지금 비록 교세가 보잘 것 없을 지라도 청정한 수행자들이 있는 한 공양을 할 신도들이 몰려 들어 큰 교단을 형성할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들이 청정한 교단을 유지하였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이 법의 바퀴가 굴러 올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교단에 청정한 수행자가 있다는 것은 가장 큰 경쟁력이다. 그런 예를 부처님의 제자 ‘앗사지’에게서 볼 수 있다. 법구경 인연담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법구경 게송 392 사리뿟따 테라 이야기
사리뿟따 테라는 우빠띳사라고 불리우는 마을에서 태어났고, 또 그의 부모의 별칭도 우빠띳사여서 출가 전에 우빠띳사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다. 테라의 어머니는 사리(Sari)라는 이름이었다. 사리뿟따라는 이름은 사리의 아들(뿟따)이라는 뜻이다.
그에게는 가까운 벗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꼴리따였다. 그는 목갈리(Moggali)라는 사람의 아들이었다. 이들 두 젊은이는 일찍부터 생사 윤회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해탈의 길을 찾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당시 유명한 스승이었던 산자야를 찾아갔다. 그러나 그들은 그 스승에게서 만족을 얻지 못했고, 그 뒤로도 여러 곳을 방황하며 진리를 찾았다. 그러나 결국 실패하고 헤어지면서 누구든지 먼저 죽음을 초월하는 길을 알 게 되거든 서로 알려 주가고 약속했다.
이때쯤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성취하신 부처님께서는 첫 제자인 다섯 빅쿠들과 함께 라자가하에 오시었다. 이때 다섯 빅쿠 중의 한 사람인 앗사지 빅쿠는 거리로 탁발을 나갔는데, 우빠띳사가 앗사지를 보게 되었다. 우빠띳사는 앗사지 빅쿠의 고요하고 품위있는 모습에 큰 감동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앗사지 빅쿠에게 다가가 스승이 누구이며 어떤 가르침을 수행하고 있는지 물어 보았다. 그러나 앗사지 빅쿠는 지금 부처님이 출현하시었다는 것고, 그분은 현재 웰루와나 수도원에 머물고 계시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앗사지 빅쿠는 우빠띳사에게 다음과 같은 짤막한 부처님의 게송 한 편을 들려주었다.
따타가또(여래)께서는 말씀하신다. 모든 담마(현상)는 원인에 의해 일어나고 또한 원인에 의해 사라진다고.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수행자의 가르침이다.
앗사지와 사리뿟따 The wanderer Sariputra sees Ven. Assaji's remarkable deportment (palungjit.com).
앗사지 빅쿠가 이 게송을 다 읊기도 전에 우빠띳사는 소따빳띠 팔라를 성취했다. 그는 이같이 죽음을 초월하는 감로의 법을 들은 다음 너무나도 기뻐서 전신이 환희에 휩싸였다. 그는 곧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꼴리따를 찾아가서 자신이 들은 것과 체험한 것을 전했다. 그들은 곧 평소부터 자기들을 따르던 이백오십 명의 젊은이들과 함께 라자가하의 웰루와나로 부처님을 찾아 뵙고 출가를 허락받아 빅쿠가 되었다. 이때부터 사리의 아들 우빠띳사는 사리뿟따로, 목갈리의 아들 꼴리따는 목갈라나로 불리우게 되었다.
이들이 빅쿠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부처님께서는 그들에게 네 가지 성스러운 지리와 안아따락카나(무아의 특성)에 대한 설법을 듣고 아라한이 되었다. 목갈라나는 이레, 사리뿟따는 두 이레(14일)만의 일이었다. 이들을 다른 동료들보다 늦게 아라한과를 성취한 것인데, 그 까닭은 그들이 과거 전생에서부터 오백 생 동안 다음에 부처님이 출현하시면 그분의 으뜸가는 제자가 되기로 원을 세웠기 때문이었다. 으뜸가는 제자가 되려면 그만큼 더 많은 공덕을 닦아야 하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사리뿟따 테라는 후에 목갈라나 테라와 함께 부처님의 으뜸가는 제자로 선언되었지만 항상 앗사지 빅쿠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았다. 왜냐하면 앗사지 빅쿠를 인연으로 하여 죽음을 초월하는 진리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테라는 항상 자기의 스승 앗사지 빅쿠가 어디에 계시는지 알아서 그 방향을 향하여 공손하게 예를 올렸고, 잠자리에 누울 때에도 언제나 스승이 계시는 방향으로 머리를 향하였다. 그러자 테라와 같이 생활하던 빅쿠들은 테라의 이 같은 행동에 대해 의심을 품고 부처님께 다음과 같이 사뢰었다.
「부처님이시여, 사리뿟따 테라는 아직도 동서남북과 상하의 여섯 방향에 예를 올리고 있습니다. 그는 부처님의 담마에 귀의하여 부처님의 으뜸가는 제자가 되었으면서도 아직까지 옛 신앙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사리뿟따 테라를 부르시어 사실 여부를 물으시었고, 테라는 그것이 단지 앗사지 스승에 대해 예를 표시한 것뿐 외도들처럼 여섯 방향에 예를 올린 것은 아니라고 해명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매우 만족하시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었다
「빅쿠들이여, 사리뿟따는 여러 방향에 예를 올리는 외도 수행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니라. 그는 다만 자기에게 최초로 죽음을 초월하는 진리를 전해 준 스승의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스승이 있는 방향에 존경의 마음을 표했을 뿐이니라. 빅쿠들이여, 그과 같이 스승의 존경하는 태도는 실로 옳은 일로서 칭찬할 만하니라. 너희도 각자 너희의 스승을 저 사리뿟따와 같은 마음과 태도로써 존경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다음 게송을 읊으시었다.
만일 누군가로부터 정각자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웠거든 공손한 태도로 스승꼐 예배하라. 마치 제사지내는 브라흐만이 불을 예배하듯이. (법구경, Dhp392)
이 인연담에서 우빠띳사(나중의 사리뿟따)가 감동한 것은 앗사지비구의 태도 이었다. 탁발을 나간 앗사지 비구의 경행 모습을 보고 반한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알아차림(sati)을 유지하면서 탁발한 것이다.
눈을 내리 뜨고 멍에의 길이만큼
그렇다면 앗사지 비구는 어떤 모습으로 탁발하였을까. 청정도론에 탁발하는 비구의 모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 하였다.
그러므로 탐욕스럽게 탁발하기를 버리고, 눈을 내리뜨고 멍에의 길이만큼 앞을 내다보며 대지에서 자유로움을 원하는 지자는, 차례대로 탁발함을 행할지어다.
(청정도론, 제2장 두타행, 34절)
청정도론의 두타행에 따르면 탁발하는 비구의 모습이 나온다. 탁발하는 비구는 눈을 내리뜨고 멍에의 길이 만큼 앞을 본다고 하였다. 여기서 멍에의 길이는 어느 정도일까.
멍에란 소나 말의 어깨에 씌워 쟁기를 달아 끌기 위해 나무로 구부러지게 만든 기구를 말한다.
소멍에의 길이는 자료 검색에 따르면 약 60센티미터 정도 된다. 일미터가 채 안되는 것이다. 눈을 내리뜨고 걷는다면 코 바로 아래 발끝 조금 앞을 말한다.
이렇게 앗사지 존자가 눈을 내리뜨고 멍에의 길이만큼 앞을 내다 보며 모든 현상이 ‘무상’하고 ‘무아’이고 ‘괴로운 것’이라고 알아차리며 경행 하였을 때 이를 본 사리뿟따 존자가 감탄을 한 것이다. 그래서 결국 ‘개종’을 하게 되었다.
아무리 포교를 열심히 한다고 하여도 포교 하는 사람 자신이 청정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더구나 출가한 자가 걸림 없이 활보 하며 마음 내키는 대로 웃고 화를 낸다든가 거리낌없이 ‘막행막식’ 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을 때 포교는 커녕 ‘혐오’의 대상으로 볼 것임에 틀림 없다. 득도 하여 대자유인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줄지라도 그것이 책임의식이 결여 되어 있다면 다름 아닌 ‘방종’으로 보여 질 수 있다는 것이다.
스님들의 태도에 달려 있다
“한잠 잘 자고 났더니 온 세상이 기독교로 변해 있더라” “승가는 자유만 있지 책임의식은 없다”라고 지적한 종교전문기자의 지적은 매우 따끔 하다. 또 “우리 스님들은 내키는 대로 걸망을 지고 훌쩍 떠난다”라고 말한 총무원장 스님의 지적도 한국불교의 현실을 잘 표현 한 것이라 보여 진다.
이처럼 삼보중의 승보로서 삼배를 받으며 대자유를 누리고 살아가는 한국의 출가자들에게 책임의식은 별로 찾아 볼 수 없다. 오히려 그런 방종으로 인하여 도박추문 등 일탈 행위가 발생함으로 인하여 남아 있는 신도 마저 등을 돌릴지 모른다.
결국 한국불교의 경쟁력은 스님들의 태도에 달려 있다. 승가가 청정하면 자연스럽게 불교의 경쟁력도 높아질 것이다. 따라서 불교가 경쟁력을 확보 하려면 승가가 깨끗해져야 한다.
탁발정신의 회복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깨끗해 질 수 있을까. 그것은 탁발정신의 회복이다. 그리고 수행자의 자세이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작은 숲속의 원숭이처럼, 밀림의 길들지 않은 사슴처럼 안절부절못하는 어린 아기처럼, 눈을 두리번거리지 말지어다.
두 눈을 내리뜨고, 멍에의 길이만큼 시선을 두는 이가 될 지어다.
두리번거리는 숲 속의 원숭이 같은 마음의 노예가 되지 말지어다.
(청정도론, 제1장 계, 108절)
출가수행자는 직업을 갖지 않기 때문에 탁발에 의존해야 한다. 따라서 음식을 얻어 먹을 때는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마치 원숭이처럼 두 눈을 두리번 거린다든가 목에 기부스를 한 것처럼 힘이 들어 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대신 눈을 아래로 내려 뜨고 멍에의 길이 만큼 시선을 두는 것이다. 그리고 눈과 귀와 코 등 감각기관과 마주 치는 감각대상에 대하여 ‘알아차림(sati)’을 유지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알아차림을 유지 하였을 때 계는 자동적으로 지켜 지는 것으로 본다. 그렇게 하였을 때 보는 이로 하여금 공양할 마음이 일어 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탁발정신이다.
공양할 마음이 일어 나게
그런데 한국의 스님들에게 있어서 탁발정신이 완전히 실종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형제와 인연을 끊고 세상과 인연을 끊고 출가한 것이 마치 ‘대자유’를 얻은 것처럼 걸림없이 사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데, 이는 보는 이에 따라 ‘막행막식’으로 보인다.
또 승보로서 삼배의 예를 받으면서 누릴 것은 다 누리고 살지만 정작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내키는 대로 행동하며 책임지지 않는 자세를 보인다면 이는 ‘방종’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수행자에게 누구든지 공양할 마음이 나지 않을 것이다. 진짜 공양하고 싶은 수행자는 “두 눈을 내리뜨고 멍에의 길이만큼 시선을 두며 알아차림을 유지하며 걷는 수행자”이다.
이런 수행자를 보면 백마디 천마디 말이 필요 없을 것이다. 보이는 모습 그 자체로 감화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사리뿟따존자가 앗사지 비구의 경행에 감동 되어 개종하였듯이 백번 천번 말로 하는 것 보다 한 번 행동으로 보여 주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그런 경행 모습은 반드시 출가수행자의 전유물은 아닐 것이다. 재가 수행자들도 일상에서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였을 경우 포교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않을까.
2012-06-15 진흙속의연꽃
진흙속의연꽃 - 이 고뇌의 강을 건너
원불사근본불교대학源佛寺 http://cafe.daum.net/wonbulsatemple
|
첫댓글 감사합니다.나무아미타불_()_
...()()()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_()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