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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생이니까 우리 나이로 76세다. 76세라는 나이에도 그는 세상을 향한 응시를 멈추지 않는다. 사회가 땀 흘리는 일을 기피할 때 그는 탄광과 어촌과 시장을 찾아 카메라 앵글을 들이댄다. 母性(모성)이 고갈되고 있다고 느낄 때는 이 땅에 사는, 늙었지만 아직도 열심히 사는 어머니들의 모습을 찾아 나선다. 그의 카메라 앵글은 『열심히 살아야 하고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사회적 발언을 쉼 없이 담고 뱉어 낸다.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尹胄榮(윤주영·75)씨. 교수, 언론인, 장관, 국회의원 등 그가 갖고 있는 화려한 이력 가운데 가장 아끼는 것이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라는 호칭이다. 그가 오는 5월6일부터 11일까지 서울 종로구 동숭동 문예진흥원 마로니에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갖는다. 서울에서는 만 6년 만에 열리는 개인전이다. 이번 개인전 역시 예전에 그의 사진전이 그랬던 것처럼 다큐멘터리 사진에 천착해 온 尹씨의 관심 영역이 끊임없이 깊어지고 넓어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장장 7년에 걸친 작업의 결과인 「석정리驛(역)의 어머니들」은 세상에 대한 그의 관심이 더욱 깊어졌음을, 캄보디아(크메르) 내전의 상처를 다룬 「아아… 지뢰」에서는 세계인의 아픔을 아우르는 지평의 확대를 보여 준다. 지난 4월8일 오후 2시 서울 여의도에 있는 尹씨의 작업실에서 그를 만났다. 그의 작업실은 전시회 준비로 진작부터 바빠 보였다. 작업대 위에는 흑백으로 인화한 사진들이 펼쳐져 있었다. 5월에 있을 전시회에 내걸 작품들이었다. 이번 전시회에는 주제별로 각각 75점 내외의 작품이 전시될 예정이다. 1987년에 「내가 만난 사람들」을 주제로 개인전을 연 이후 尹씨는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총 25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서울에서 하는 개인전은 6년 만인데 이번 사진전을 열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습니까. 『이제는 나이도 있고 그동안 밀렸던 것들을 마무리 지어야겠다고 생각해서, 사실은 내년에 그동안 찍은 작품들을 모아 集成展(집성전) 성격의 큰 전시회를 가지려고 했어요. 내년이 내 나이 喜壽(희수)이기도 하고 내가 사진을 시작한 지 25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거든요. 그런데 금년에 마침 장소가 마련됐다고 해서 지금까지 발표 못하고 있던 것 두 가지를 이번에 우선 발표를 해보자, 하는 생각에서 열게 된 거예요』
『사진은 역사의 기록이다』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로서 당연한 이야기지만, 尹씨는 「사진은 역사의 기록이다」는 생각으로 25년을 일관해 왔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품이 많이 든다. 이번에 전시되는 「석정리驛의 어머니들」을 찍기 위해서 그는 1992년 7월부터 1999년 9월까지 7년이 넘는 동안 전남 무안군 춘양면 소재 無人驛舍(무인역사)인 석정리驛을 오르내렸다. ―석정리驛의 어머니를 주제로 삼은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참을성 많고 자식을 위한 희생을 아끼지 않는 우리들의 어머니像(상)이 점점 퇴색해 간다는 게 안타까웠습니다. 석정리驛의 어머니들은 새벽 4시에 일어나 오전 7시44분에 출발하는 비둘기號(호)를 타고 南光州驛(남광주역) 앞에 한 시간 동안 서는 반짝시장에 채소와 과일을 팔러 다니던 분들입니다. 물건을 팔고 나면 남광주驛에서 오전 10시에 출발하는 비둘기호를 타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거죠. 지금 우리가 이만큼 살게 된 것도 바로 그런 석정리驛의 어머니들 같은 우리네 어머니들이 흘린 눈물과 땀의 결과입니다. 나는 그들의 모습을 기록하고 싶었습니다. 지금은 비둘기호도 남광주驛도 없어졌습니다. 역사가 된 것이죠』 「아아… 지뢰」는 2001년 1월부터 지난 2월까지 2년여에 걸쳐 찍은 작품이다. 아직도 600만 개의 지뢰가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캄보디아에는 男女老少(남녀노소) 없이 지뢰로 인한 장애인들이 많다. 「킬링 필드」로 대표되는 30년간의 內戰(내전)이 남긴 상처다. 『처음에는 전쟁의 아픔과 실상을 기록해 전할 목적으로 갔었어요. 2000년에 캄보디아를 방문했을 때 장애인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있더라구요. 그래서 사진이 되겠다 싶어 다음해에 갔는데 그 마을이 없어졌더군요. 다행히 일본 NGO들의 후원으로 건립한 지원사업센터에서 그들 중 일부를 수용해 자활을 돕고 있었어요. 「아… 지뢰」는 그 센터에서 살고 있는 장애인 가족들의 일상을 기록한 것입니다. 행복한 가정과 평화로운 마을을 만들기 위해 불편한 몸이지만 매일 땀흘리며 일하는 모습을 담았습니다』 尹씨는 1987년에 최초의 사진집 「내가 만난 사람들」을 낸 이후 14권의 사진집을 냈다. 이번에 전시되는 「석정리역의 어머니들」도 사진집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사진계에서는 사진집을 가장 많이 낸 사람으로 尹씨를 꼽는다. 그는 만 51세인 1979년에 사진을 시작했다. 늦게 시작했지만 가장 많은 사진집을 낸 작가가 된 것이다. ―그동안 출간한 사진집 중 제일 애착이 가는 사진집은 어떤 겁니까. 『「내가 만난 사람들」이 아무래도 제일 애착이 가죠. 내가 사진을 시작한 지 8년 만인 1987년에 처음 나온 사진집이니까요. 그 사진집으로 말미암아 내외에 내 사진의 내용이나 수준이나 이런 것들이 처음으로 알려지게 됐어요. 다음으로는 일본에서 이나노부상(伊奈信男賞-1990년 수상)을 탄 「來世(내세)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애착이 가죠』
인간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과 애정
「내가 만난 사람들」은 세계의 奧地(오지)를 여행하며 문명의 바깥에서 소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기록이고, 「내세를 기다리는 사람들」(1990)은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 있는 아슈람(죽음을 기다리는 집)에 14일간 머물며 찍은 다큐멘터리이다. ―이나노부賞은 어떤 성격의 賞입니까. 『일본에 니콘 살롱이라는 곳이 있어요. 그곳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일본 사진계와 문화계에서 저명한 사람들이에요. 그곳에서 사진전을 열려면 운영위원회의 심사를 받아야 해요. 심사에서 통과돼야 전시를 할 수 있죠. 이나노부는 독일에서 공부한 일본 사진평론가의 이름입니다. 그분이 돌아가신 후 그분의 명의를 따서 賞이 제정됐어요. 1년 동안 니콘 살롱에 전시됐던 사진들을 대상으로 심사해서 賞을 주죠. 심사위원으로는 사진평론가, 사진가, 예술가 등이 참여해요』 베트남의 라이따이한, 오지 사람들, 시장 사람들, 탄부들, 어부들, 사할린 동포들… 尹씨의 관심이 초지일관하는 것은 장소와 사람은 달라도 언제나 「인간에 대한 관심」이다. 『「사진의 사명은 인간에게 인간을 설명하며 자기 자신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한 에드워드 스타이켄(1879∼1973)의 말을 항상 생각하고 있습니다. 문학, 연극, 영화 등 어떤 예술 분야에서도 인간은 중심 주제입니다. 사진도 인간의 문제를 다루어야 하고 인간을 통해서 그 시대를 기록함으로써 좀더 나은 세상을 만들게 해야 합니다』 ―사람 가운데서도 일하는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삼는 경우가 많은데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나는 「사람이 건전하고 성공적으로 살아가려면 근면하고 부지런하고 근검절약하는 생활이 바탕이 돼야 한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우리 사회를 건설한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가져야 하고 그것을 계승할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어요』 ―사진을 통해서 사회적 발언을 한다고 볼 수가 있는데, 그런 사진을 통한 발언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많죠. 예를 들면 일본의 미나마타 사건이 대표적이죠. 미나마타 사건은 아시다시피 일본의 미나마타 연안의 주민들이 주변 칫소社에서 바다로 배출한 유기수은에 의해 중독된 사건으로 1956년에 공식적으로 발병이 보고되었지만, 1968년에야 일본 정부에서 공식 인정한 사건입니다. 미나마타병은 유기수은에 중독된 물고기, 어패류 등을 먹은 어민들에게 중독 증상(손발이 뒤틀리고 혀가 마비되는 중추신경 질환)이 나타나고, 이 병으로 인해 기형아가 태어나기도 합니다. 그걸 고발한 사람이 다큐멘터리 사진가 유진 스미스예요. 1년 내내 그곳에 살면서 사진을 찍어 全세계에 발표를 했어요. 그렇게 해서 미나마타병이 알려지고, 환자들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지고 이런 중금속 중독에 의한 병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하나의 좋은 경우가 됐거든요』 ―우리나라에도 다큐멘터리 사진이 사회변화에 영향을 끼친 사례가 있습니까. 『잘 모르겠어요. 있다면 있을 수 있어요. 내가 당사자라 말하기는 좀 뭣한데… 이나노부賞을 탄 사람은 1년 이내에 기념사진전을 해야 된다는 규정이 있어요. 그래서 그때 일본 사진작가의 권유로 사할린 동포들을 찍기로 했어요. 나중에 「동토의 민들레」라는 사진집으로 발간되기도 했는데, 사할린 동포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담아서 수상전을 했어요. 그걸 마이니치(每日) 신문이 한 면 전체를 할애해 다뤘어요. 그런 파격적인 보도를 했어요. 일본 사람들이 아직도 이럴 수가 있느냐고 흥분을 했어요. 그때까지 「우리에게는 아무 책임이 없다, 韓日 수교회담에서 이미 처리가 된 거다」라고 주장하던 일본 정부가 그 후 사할린 동포 문제의 공동조사를 우리 외무부에 제의했어요. 그 후에 사할린 동포들이 돌아올 수 있게 되었죠. 일본 적십자사는 5억 엔을 내서 사할린 동포들을 위한 영구 아파트를 짓는 데 도움을 주었어요』
『마음은 보이지 않지만 사진에는 찍힌다』 ―사진을 찍을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무엇입니까. 『마음이 찍히지 않으면 사진에 생명이 없고 힘이 없어요. 마음이라는 게 보이는 물건이 아니지만 사진에는 그 마음이 찍히 거든요. 마음을 표현하는 물체가 찍히는 거죠. 근육이 찍힌다든지, 눈물이 찍힌다든지, 그런 마음이 우리 마음에 와서 콱 닿는, 다시 말하면 마음과 마음이 찍히는 사진이야말로 힘이 있는 거죠. 그런 사진을 찍으려고 노력을 하죠. 그렇게 노력을 해 오고 있고 사진을 많이 찍지만, 사람의 마음이 찍히지 않은 사진이 더 많죠. 그래서 버리는 사진이 더 많아요』 ―사진을 통해 궁극적으로 얻고자 하는 게 무엇입니까. 『내가 죽은 뒤에 50년, 100년이 흘렀을 때 사람들이 내 사진에 남아 있는 기록을 보고 「아, 그때는 한국 사회가 그랬었구나」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먼 훗날 사람들이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를 연구하는 데 내 사진이 인용된다면 바랄 나위 없겠지요』 尹胄榮씨는 한때 소설가 지망생이기도 했다. ―단편 「향리」로 신춘문예에 입선을 한 경력이 있는데 소설을 썼던 경험이 사진 찍는 데 어떤 도움을 줍니까. 『스토리 구상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죠. 그냥 사진 한 장 한 장의 나열이 아니라 起承轉結(기승전결) 식으로 늘어 놓는다든지 할 때는 소설을 썼던 경험이 도움이 돼요』 ―다큐멘터리 사진을 하는 걸로 미루어 짐작할 때 소설을 썼다면 리얼리즘 소설을 쓰셨겠네요. 『그렇죠. 그런 소설을 썼을 거예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사진을 소설로 치면 장편소설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단편소설 같은 사진은 어떤 사진을 말하는 겁니까. 『그러니까 이번에 나가는 「석정리역의 어머니들」 같은 것은 단편소설이 될 수 있어요. 각 장이 이어져야만 이야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각 장마다 독립적인 이야기를 갖고 있기도 하죠』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는 데 사진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글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진이죠. 그럼요. 사진이죠』 ―어떤 면에서요. 『수백 줄의 글을 가지고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한 장의 사진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경우가 많거든요』 ―정치인, 교수, 언론인, 사진작가 중 하나만 선택하라면 어느 쪽을 선택하겠습니까. 이 질문에 그는 조금의 주저도 없이 대답했다. 『사진작가죠』● ◈ 미리보는 윤주영 개인展(5월6일~11일)
<석정리역의 어머니들>
차표를 입에 문 여인: 짐을 머리에 이고 또 한 손에는 짐을 든 여인. 차표를 간수할 곳은 입밖에 없다.
머리 위의 보따리들: 보따리 속에는 복숭아, 자두 등 과일과 밭에서 손수 가꾼 채소들이 들어 있다.
새벽의 석정리역: 석정리역은 驛舍(역사)도 驛員(역원)도 없는 간이역이다. 그래도 어머니들은 질서정연하게 승차한다.
남광주역에서 내리는 여인들: 비둘기호에서 내리자마자 한 시간 가량 서는 반짝시장으로 달려간다.
<아아… 지뢰>
땀 흘려 일하는 꼿난씨: 그는 지뢰로 왼쪽 발을 잃었지만 자립하는 날까지 쉬는 날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춤추며 노는 아이: TV는 아이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간밤에 TV에서 본 춤 장면을 재연하고 있는 아이.
지뢰로 잃어버린 다리: 그들은 지팡이를 짚어야 일어설 수 있고 걸을 수 있다. 전쟁의 상처는 깊고도 깊다. |
첫댓글 1>-- *붓샘 과 좋은음악 소포 예쁘게 택배로받아// 잘 보관 하였아와용 // 붓님이 서울쪽에라도 거주하셨다면 // 뭔가 어깨춤출일이// 제가 서울모임에(컴모임)더러갈때// 겸사로 만나뵈올 일 많았을 것을 요--꾸벅 --
2>-- *붓님께}}}--소생의 삶이란 <석정리역의 어머니들>처럼 결혼의 시작을 내몸보다 큰보따리에 의지했고// 저를 생각한것은 // 엊그제 재판끝나고// 긴장이 풀리니// 먹고싶다는 생각에// 돼지껍대기 3,000원어치사다 // 볶아서 먹은것이 전부입니다//
*판새넘이 저의 사건을 법정에 세우지 않고 // 변호사 를 샀는 데도// 변호사넘이 붉은 도장 찍힌// 진짜 계약서를 조서에 숨기고 제출 하지 않고// 판새편을 들어서// 변론서 까지 100%로 위증 했다고 합니다// 그런 변호사를 싸워주지 않고 편드는 한(*나쁜 변호사는 감싸고 *현직판사 욕만 한다면 *) 사법개혁은 안옵니다*
3>-- *제가 제일 증오한 것은요}}}---법사 위원들이 대법원 등지에서 법사위 감사할때//사피자 입장과 동등해야될 썩을 언론이/// 놈들이 뱉은 말중에 양측입장에 // 공정해야할 언론이 한쪽입장만 바쳐준 결과// 그것이 사법 피해자들의 두레의식인 거리제
*한 맻인 궂풀이 를// 못하게 한 바<*법이 상정 되기도 전에*> 단박에 만장시위 국민 사피자를// 체포 구금등에 나섰다는 원한이 가장 큽니다 // 법이 제정 되기를 기다렸다가 사법 운동가 들 을 구금 했다면 (*차라리 덜 분하겠습니다*)// 아무리 구금이 다급했더라도// 현제의 시위법을 무시한 처사가 아니면 뭐겠습니까
제가 직접은 시위를 몸소 해 본적은 없지만 // 사피자들 간의 친목 도모겸 피해자들의 문화 행사인// 두레 의식 행사를 못하게 막는 행위를// 반폭력 행위로 증오 합니다// 사법 문화인 사법거리제 행진은// 간접 사피자들은 //심적 치료제가 됩니다// 자신들의 서러움을 스스로 삭여갈수있는 통한의 역활을 했던것입니다
4>--{{{---법사 위의원들 이// 사피자 거리굿을 막은 자들의 말 한마디<<<<* 판검사들 가족이 만장을 보면 얼마나 끔찍 하겠는가?*>>>>>그 말 한마디 의 효과라는 점을 증오 합니다
5>-- *사법놈들을 하늘땅에 천지神께서 정녕 계시다면 사피자 문화권을 막은 넘 들에게 화산 폭팔과 같은 극형을 하사 하사이다// 저희들 가족만 눈에보이는 놈들이 국민을 재판 할 자격이 애저녁에 없으니// *사피자 가족 들은 가정이 박살나는 고초를 판결 장사로<*그물처서 짐승처럼 포획해 놓고*> 그러한 죄악에도 <*저희들 가족 타령을 하다니*> *그 직에서 끌어 내리기를 당장 시행 하시옵소서
6>--재판은 *1. 실제 사실을 밝히자는 것 아닌가 // 가 아니라// 편들고 싶은넘만// 재판을 맘껏동화구현을 시키고// 반대쪽은// 동화구현은 커녕 사실야그를 물어보는 조서따위는 검은 장막 을 쳐 놓고 은페하며 *심지어는 법정에 세우지 않는 방법으로 ((((*양측 변새와 짜고서 고스톱을 칩니다*))) 사실을 은페하는데 동원되는 사법놈들을
7>--사실을 밝히는 노력의 시간의 X 10 배 이상의 시간과 노력을/// *가짜흉계 재판에 소모시키는 사법놈들에게/// 불화산의 폭팔을 감행하시는것만이 .../// 사회정의가 실현되는 세상이 됩니다//
8>--왜냐구 묻습니까// 그곳 사법께가는 과정이// *민생의 말 하수처리장이기// 때문입나이다// 재판으로 국가 공권력으로 원자을 날리고// 데모도 그들 사법피해자들 의 언어인// 프랭카드도 앞수하려는// 그들 사법놈들의// 뱃속을 현미경으로 내시경거울을// 집어넣어// 분석해// 보시 옵소서// *** ***
붓꽃님이 심심하셔서// 소생의 작품성을 높이사셔서 가설나므네// 제가 컬컬하던김에 싱크대를 뒤지니// 정종한잔 교양있게 목축이고 설라므네// 지붕뚫고 하이킥을 해설라므네// 짜장면을 시켜먹는것을 보오니// 짜장면을 시켜먹을까 망설이고 있어유우 ㅋ ㅋ ㅋ ....안녀엉 붓꽃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