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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절하도록 빈궁한 식습관은 자취생들에게 주어진 천명인가 하노라, 하고 싱크대 앞의 식판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렇다, 귀차니즘은 모든 이즘에 우선한다. 설거지를 여러 번 하기 싫어 몇 걸음 나가면 있는 청계천에서 사온 배식용 식판이 우리의 그릇이요 밥상이다. 식판을 닦는 내 옆에서 나의 동거녀는 자취생들에게 과일은 왜 그리도 귀한 걸까, 금단의 열매도 아닌데! 하고 탄식했다. 귀찮아서 못 사오는 거다. 뭔가 생각하면서 집에 오다 보면 어느새 과일 가게를 스킵했고, 도로 나가기는 또 귀찮고(담배 사러는 잘도 나간다), 그러다 보면 아직도 괴혈병에 안 걸리다니 신기하군, 이라는 말이 나올 지경의 비타민 부족까지 치달으면서 골병이란 두 글자가 무엇인지 몸으로 남에게 보여주는 경지에 가게 되는 것이다. 역병보다 무서운 귀차니즘…생명을 위협한다. 물론 이렇게 살지 않는 자취녀들도 많이 있다. 알뜰살뜰 시장 봐 와서 냄비에다 보글보글 찌개를 끓여 예쁜 밥그릇에 예쁘게, 커피와 과일의 디저트도 잊지 않는 여자들도 많겠지만 나로선 왠 은하계 공주 이야긴가, 그런 여자 있으면 나랑 결혼 좀 해주지(돈도 별로 못 벌면서!), 뭐 이런 생각이나 하면서 집의 하반신 마비 멍멍이가 바닥에 칠하고 다닌 응가를 닦고 있는 게 나의 왕십리 라이프인 것이다. 이 놈으로 말할 것 같으면, 미니핀 견종의 남아로서… 미니는 무슨, 6키로나 나간다!(버럭) 동급최강의 자이언트 미니핀이다.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평택의 사냥터에서 척추에 산탄총을 맞아 하반신이 마비되었다. 그 상태로 고속도로를 횡단하려다가 운좋게 구조되어 동물학대방지연합(www.foranimal.or.kr)의 비호를 받아 엄청난 대수술을 연속으로 받으면서 간신히 목숨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데려가 주지 않았다. 감각이 없어 대소변 조절 등을 전혀 못해서(벽에 똥칠한다는 표현이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인지 확실히 알 수 있다!) 넉넉히 보통 개 5마리분의 품이 들기 때문에 아무도 데려가지 않은 것도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너무나 많은 유기견으로 인해 예산이나 인력 면에서 한계에 이른 연합 측에서는 최후의 수단으로 안락사까지도 검토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때 나타난 게 누구냐 하면, 딩동댕. 네, 바로 접니다 저. 쉽게 감정적이 되는 사람 뽑기 대회를 하면 독보적 1위를 할 사람. 앞뒤 안 보기 대회를 해도 1위. 그놈의 혈기를 못 죽여 성질대로 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지! 어쩌구 하며 지 상황은 생각도 안 하고 확 데려와 버려서 결국엔 등에 총맞은 개랑 대가리에 총맞은 내가 함께 똥밭에 구르게 된 것이다. 리얼하게 똥밭에 굴러보니 이승이 낫다고 장담은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도 좋다고 마구 멀쩡한 앞다리로 마구 돌아다니는 녀석을 보며 외장이 허름할수록 이름이 근사해야 사람들이 널 얕보지 않아! 라며 놈의 명명식을 거행했으니, 그 이름인즉슨 ‘로렌초 데 메디치’ 되겠다… 수의사가 깜짝 놀랐다… (다른 검정 푸들의 이름은 줄리아노 데 메디치임) 한동안 이 녀석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아파서 술을 많이 마셨다. 착각하고 쐈나? 일부러 그랬다면 사냥감이 없었나, 왜 개를 쏜 거야. 쏘는 놈 따로 있고 거두는 놈 따로 있냐. 이러면서 소주를 들이부었더니 속에 그야말로 빵꾸가 나서, 큰맘 먹고 (내 상황에는) 엄청 비싼 베트남 쌀국수로 영양공급 및 효과적 해장을 하러 자전거를 끌고 명동으로 갔다. 때마침 직장인들의 점심 시간으로, 근처의 회사원들이 바글바글했다. 국수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아가씨들이 모여 앉은 건너편 테이블에서 지저귀는 대화 중 언뜻 귀에 들어온 소리가 있었으니 대화의 주제는 ‘퐁듀’였다. 음, 그야말로 먼 나라 이야기다… 예쁜 원피스를 입은 그 아가씨는 남산 밑의 어디어디 레스토랑에 가면 말이야, 퐁듀가 아주 맛있어.. 하며 남자친구와 간 퐁듀 데이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퐁듀? 치즈 녹여서 빵떼기 적셔 먹는 거 말인가? 그리고 무슨무슨 보르도 와인을 곁들이면 말이야… 치즈의 맛과 포도주의 신맛이 어우러져서… 오오오! 전혀 모르겠는 말이다! 하며 나는 자신을 힐끔 쳐다봤다. 좀전에 일어나서 머리는 노란색 새집, 자전거 체인의 기름이 묻은 츄리닝(트레이닝룩이 아니다, 절대!), 티셔츠에 붙어 있는 로렌초의 개털… 그야말로 꼬락서니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구나… 나도 가고 싶다, 남자친구의 차를 타고 남산 밑으로 퐁듀인가 뭣인가 하는 걸 먹으러! 꼼장어 대신 치즈에 집어넣었던 빵을, 소주 대신 보르도 와인을! 결국 그날 국수 먹다 체해서 길에서 옷핀 사서 손 따는 쌩 쑈를 하고야 말았다. 퐁듀가 먹고 싶었던 게 아니라 어딘가 내가 잘못 살고 있나? 하는 우울한 망상이 폭주해서 속을 틀어막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 로렌초 멍멍이의 동그란 눈을 보는 순간 그런 생각은 죄다 잊고 개를 안아 주었다. 어떤 여자들은 남자친구의 뉴비틀을 타고 레스토랑에 갈지 몰라도, 역시 나는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여자다. 뭐 뉴비틀 탄 남자를 잡을 능력이 없는 여자이기도 하지만, 어디든 자전거를 타고 갈 수 있고, 망가진 내 오토바이 윙카 갈아 끼우려면 돈이 얼마 들까 고민하고, 종로통에서 잘 구워진 마늘꼬치와 소주 한 잔에 행복해 하는. 어쨌든 너 지옥갈 거다, 로렌초 쏜 사람! 김현진(게임 시나리오 작가) |
첫댓글 ㅎㅎ 읽기 힘드시죠? 기~~ㄹ 어서^^ 더위에 건강 조심하시구요 사장님 너무 애쓰십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