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우리 주변에서 '중세' 하면 자동적으로 뒤에 '암흑시대'라는 말이 따라붙는 문장을 관찰하기는 아직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근래 들어와 학계의 최근 연구성과가 전달이 되면서, 적어도 역사에 어느정도 관심이 있는 분들에 한해서는 중세 천년 전체를 암흑시대라고 보는 현상은 많이 사라진 편이다. 그러나 '중세 중기 이후는 몰라도 중세 초는 암흑시대 맞잖아?'라는 의견을 표명하시는 분들도 상당히 많고, 여기에 대해서 질문을 주시는 분들도 많기 때문에 한번쯤은 중세 초기에 대한 최근 학계의 담론을 정리한 글을 올릴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선, '중세 초 한정 암흑시대'라는 표현도 현재 학계에서는 지양되는 표현임을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현재 고대 말-중세 초를 가리키는 학술적 표현으로는 'Late Antiquity'와 'Early Middle Ages'가 가장 널리 쓰이고 있다. 일부 소수 학자들 중에서 통사를 쓸때 중세 초를 '야만과 폭력이 횡행했던 시대'라고 상투적으로 쓰고 넘어가는 이들도 전혀 없진 않으나, 그런 이들 상당수는 중세사에 크게 전문성이 있다고 보기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예전에도 서술한적이 있지만, 특정 시대를 비난하거나 찬양하기 위해 보는 것은 현대 역사학이 추구하는 바가 아니다. 또한 '암흑시대'와 같은 용어를 피하는 이유는 단순히 기계적 중립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이 시대의 복잡성과 의의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데 크게 방해가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용어 문제
우선 '암흑시대'라는 용어부터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간혹 "중세 초기는 ~가 뒤떨어졌다는데 그럼 암흑시대 맞는거 아닌가요?"라는 질문을 종종 받을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초에 암흑시대라는 용어가 가진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고전시대 그리스, 로마의 문명이 완전히 잊혀졌다는 인식에서 등장한 것이다.(게다가 무언가가 '뒤떨어졌다'는 것도 객관화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은데다가, 특정 분야가 발전이 미진하거나 단순화되었다고 해서 암흑시대라는 용어가 정당화된다면, 인류 역사에 암흑시대라는 용어가 정식 학술 용어로 쓰여야 할 시기는 수도 없이 많다는 문제점이 있다) 14세기 초엽 이탈리아의 페트라르카가 이 용어를 처음 꺼내들었을때의 의미는 그동안 잊혀졌던 고전 문명이 자신들의 시대에 재발견되었음을 선언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작 페트라르카가 살았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태동기인 14세기는 지금은 완전히 중세로 분류되고 있다는게 아이러니한 점이다.(학자마다 중세의 끝을 언제로 잡는지는 의견이 갈리지만 대체로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1453년이나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으로 잡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페트라르카의 시대가 중세에 속함에는 현재 거의 이견이 없다)
따라서 '암흑시대' 담론이 왜 학계에서 사라지게 되었는가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후기 로마 제국과 중세 초의 연속성 문제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학문 분과로서 근대 역사학이 정립되고, 이 방법론에 의해 중세사 연구가 진행되기 이전에는 페트라르카 식의 고전문명이 잊혀진 암흑의 중세와 이를 회복한 르네상스의 '빛' 식의 담론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여기에 18세기 에드워드 기번 식의 '야만과 종교의 승리' 담론이 더해져서 중세는 빛나는 고전문명이 잊혀지고, 오로지 믿음에만 의존한 '미개'한 시대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물론 20세기 들어와 중세사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이러한 담론은 강력하게 도전을 받았다. 중세 문명이 로마 문명을 계승한 부분에 있어서도 충분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근래 브라이언 워드-퍼킨스 선생 등이 제기한 문제점들이 보여주듯, 연속성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어찌되었건, 서로마는 평화롭게 교체된 것이 아니라 꽤 폭력적으로 최후를 맞았기 때문에 그로 인한 충격과 후유증이 전혀 없을 수는 없다. 따라서 후기 로마와 초기 중세 유럽은 상당히 비슷하면서 또 상당히 달랐다. 그러나 현대 역사학자들이 고민하는 질문은, 전근대 역사서술이 종종 그랬듯 이를 피상적으로 보면서 '퇴보'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면이 어떻게 유사했고, 또 어떻게 달랐으며 그 이유는 무엇이었는가'이다. 그렇다면 가장 기초적인 면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의 영역에서부터 이에 대한 현대 학계의 연구를 살펴보도록 하자.
로마인과 '야만인'-정치적 정체성 문제
사실 유럽의 중세가 정확히 언제 시작되었는가는 여전히 규정하기 힘든 문제다. 서로마 제국 황제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고 해서, 제국 전역의 그 수많은 로마인들이 하루아침에 '로마인'이라는 정체성을 버리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본질적인 연속성은 우리가 역사를 볼때 특정 시기를 한 마디로 규정짓는 것을 매우 어렵게 만든다. 후대 입장에서 볼때 특정 시대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하더라도, 그 변화는 말 그대로 후대 입장에서 봐야지만 뚜렷해지는 경우가 많다. 당대 사람들은 그 변화를 피부로 느끼기 힘들었다. 그저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하루하루를 살아갔을 뿐이다.
가령, 서로마 말에 중요한 변화를 야기한 반달족은 이미 거의 로마인과 비슷해져있었다. 북아프리카 반달 왕국의 정부와 행정 구조는 로마의 그것과 거의 비슷하다. 그러나 이 '로마화'된 반달족은, 스스로는 몰랐겠지만, 서로마 제국으로부터 아프리카를 떼어냄으로써 지중해 세계의 구도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이러한 패턴은 이후 서로마의 소위 '후계자 왕국들'에서 반복된다.
이 왕국들의 새로운 통치자들은, 자신들이 세운 왕조의 권위를 새로이 만들고 새로운 엘리트층을 만들어내고, 백성들의 아이덴티티를 만들어야 했다. 대략 650년경에 이르면 이 작업은 어느정도 마무리된다. 이 작업들은 각각이 처해있는 상황에 따라 크게 달랐다. 이 점이 또한 한 시대를 '암흑시대' 등과 같은 용어로 한줄정리하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로마제국만 해도 균일한 국가는 결코 아니었다. 제국 동방과 서방의 사정도 달랐고, 제국의 변방인 브리타니아와 중심부인 이탈리아는 당연히 달랐다. 갈리아도 북부 갈리아와 남부 갈리아의 상황은 달랐다. 중세 초 왕국들이 걸어간 길도 여기에 따라 크게 갈린다. 로마가 가장 일찍 철수해버린 브리튼의 앵글로색슨 왕국들과, 로마의 기존 인프라를 상당부분 흡수한 다른 왕국들의 상황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샤를마뉴의 왕궁 부속성당, 아헨
어쨌든 새로이 모습을 갖춘 중세 초 왕국들은 특별히 야만적이지도, 미개하지도 않았다. 새로운 게르만 엘리트들은 로마 세계에 적응하였고, 기존 로마 엘리트는 새로운 정치 현실에 적응하였다. 가령, 이 시기에 대한 최고의 사료를 제공해주는 투르의 성 그레고리우스는 옛 원로원 가문 출신의 주교였다. 이런 식으로 수많은 옛 로마의 지배층들이 프랑크 왕국을 비롯한 신생 왕조들의 엘리트층으로 통합되었다. 이들 문인들은 매우 로마적인 용어로 새로운 통치자들을 칭찬하거나 비판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은 스스로를 더이상 로마인이 아니라 '프랑크인, '비시고트인', '롬바르드인'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엘리트 문인들 중 대표적인 이들이 바로 이미 서술한 투르의 성 그레고리우스, 대교황 그레고리오 1세, 스페인의 성 이시도루스 등이다. 한때 역사가들은 이들을 '중세의 창조자들'로 불러야 할지, '최후의 고대인들'로 불러야 할지 고민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Fontaine 선생이 지적하듯, 이러한 이분법은 지나친 단순화에 불과하다. 고대에서 중세로의 이행이 매우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듯이, 이들도 두 문명의 성격을 모두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호작용이 중세 초의 정치적 아이덴티티를 만들어냈다. 이 과정을 거쳐서 각 왕국들의 정치와 사회와 문화는 점진적으로 로마 세계에서 중세 세계로 나아갔다. 그러나 Wickham 선생이 지적하듯, 그것은 어디까지나 '로마의 선례에 기반을 두고 발전해나간 것'으로 보아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정부와 국가 만들기
그렇다면, 로마의 선례와 게르만 전통을 융합하여 만들어낸 새로운 국가들의 형태는 어떠했을까? 우선 이 역시도 지역적 차이가 상당히 크다는 점을 먼저 언급해야 한다. 로마의 전통 중 어떤 부분을 특히 강조하여 새로운 통치 구조를 만들어낼 것인지는 무엇보다도 각 지역의 특성과 정치적 상황에 달려있었다. 그러나 대체로 새로운 통치자가 새로이 토지에 안착한 전사 귀족과 옛 로마 행정관료 집단의 보좌를 받아 통치했다는 점에서 유사점을 보인다.
이러한 특성은 메로빙 왕조에서 잘 찾아볼 수 있다. 예전에는 중세 초의 정부가 소위 '암흑시대' 답게 엉성했을 것이라는 편견이 주를 이루었고 이때문에 '중세 초에는 정부랄게 없었다'라는 서술까지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는 메로빙 왕조의 정부가 생각보다 정교한 형태로 운영되었다는 것을 밝혀내었다. 무엇보다도, 이 시기 정부의 일상적인 행정에 대해서는 생각보다 사료가 풍부하게 남아있는 편이다. 앞서 말했듯, 로마의 관료귀족들은 예전과 별로 다를것 없이 새로운 통치자들을 위해 업무를 계속했고, 덕분에 이 시기의 행정문서와 법령들은 매우 체계적으로 보존되어있다. 그리고 이 사료들은 메로빙 왕조의 왕들이 흔히 생각하는 야만족 전사왕의 이미지와 사뭇 다르게, 능숙하게 정부를 운영하고 적극적으로 통치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정부의 구조가 후기 로마 제국과 비교하면 상당히 단순화된 것은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전 지중해를 통합한 제국과 그 중 몇몇 지역만 통합한 국가의 통치 매커니즘이 같을 수는 없다. 또한 가장 중요한 차이는 다수의 새로운 통치 엘리트가 전사 귀족이었으며, 이들의 목표는 토지에 정착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국가 재정정책의 기본구조도 세금에 의한 지배보다는 토지를 매개로 한 지배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를 단순히 퇴보로 규정짓는 것도 지나치게 단편적인 시각이다. 사실 따지고보면 로마제국도 대규모 관료조직을 바탕으로 한 정부를 추구한 것은 제국 후기부터의 현상이다. 필자가 지난번에 썼던 몇몇 글들에서 언급했듯이, 소위 '중앙집권'이나 '관료화'는 각각의 특수한 맥락에 따라 해석해야 할 현상이지 그 자체로 절대선이 아니다.
또한 이 시기 메로빙 왕조가 이룬 성취는 후대까지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Wickham 선생이 지적하듯, 본래 프랑크족의 중심지는 북부 갈리아였다. 반면에 로마 제국 입장에서 북부 갈리아는 후기에 트리어가 수도로 기능할때를 제외하면 대체로 군사적 기능이 더 강한 변방에 더 가까웠다. 이제 메로빙 왕조 통치하에서 프랑크족은 옛 로마 제국 시기의 인프라와 부가 집중된 남부 갈리아와, 앞서 서술한 북부 갈리아, 그리고 로마의 세력권 밖이었으며 인프라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했던 라인강 동편까지 장악하게 되었다.
성 요한 세례당, 푸아티에: 메로빙 왕조 시대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메로빙 왕조의 왕들은 북부 갈리아를 거점으로 삼고 개발하였다. 즉, 이 시기에 파리에서 콜로뉴 지역이 처음으로 정치적 중심지로 발달하게 된다. 그리고 그 상황은 현재까지 쭉 이어지게 된다. 동시에 이들은 로마 제국의 국경선을 넘어 라인강 서안과 동안을 동시에 지배한 첫번째 왕조가 되었다. 앞서 서술했듯, 라인강 동안 게르마니아는 갈리아보다 단순한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었고, 로마식 인프라가 매우 적었다. 그러나 메로빙 왕조 치하에서 느리지만 점진적으로, 라인강 동안과 갈리아는 보다 비슷한 모습으로 통합되게 된다.
브리튼은 프랑키아와 사정이 매우 달랐다. 앞서 서술했듯 로마가 철수하면서 이곳의 인프라는(그나마도 대부분 남부에 집중되있었지만) 큰 타격을 입었다. 따라서 앵글로색슨 왕국은 프랑키아와 상당히 다른 뿌리에서 시작했으며, 프랑크족이나 고트족과 달리 참고할 로마의 선례도 부족했고, 기반으로 삼을 인프라도 부족한 상황에서 시작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9세기 무렵이면 앵글로색슨 왕국도 어려움을 이겨내고 프랑크 왕국과 비슷한 방향으로 발전해나가고 있었다. 왕국의 외형적 팽창 못지 않게 행정적 인프라 정비도 잘 이루어졌고, 이는 저 유명한 '오파의 제방(Offa's Dyke)'이 잘 보여주고 있다. 이쪽이야말로 거의 맨땅에서 시작해야 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결코 작지 않은 성취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오파의 제방: 머시아의 오파 왕에 의해 만들어진 8세기의 거대한 방벽
'법에 의한 통치'는 중세 초 왕국들이 로마로부터 물려받은 또다른 중요한 개념이며, 이들이 더욱 정교하게 발달시켜서 후대로 계승하였고 근대까지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 중요한 유산이다. 예전엔 로마의 법 개념도 이후 재발견될때까지 잊혀졌으며, 중세 초는 무식한 전사귀족들이 깡패짓하고 다닌 무법천지라는 인식이 강했으나, 이는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Mickitterick 선생이 지적하듯, 로마 법의 "쇠망(decline and fall)"은 없었다. 각 지역의 상황에 맞게 점진적인 변형이 있었을 뿐이다.
중세 초의 법치주의는 9세기 랭스 주교였던 힌크마르가 가장 잘 표현한 바 있다.
"모든 이들이 법을 알고 거기에 따라야 한다고 선포되었으므로, 그 누구도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법의 권위에서 예외는 있을 수 없다. .......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듯이, '법령이 제정되는 동안에는 누구나 그에 대해 토론하는 것은 합당하다. 그러나 일단 동의를 얻어 제정이 되면, 재판관들은 이를 적용할 뿐이다.'"
중세 초의 가장 기본적인 법은 테오도시우스 법전을 들 수 있다. 여기에 성서에 기반을 둔 교회법이 더해졌다. 여기에 현실의 상황에 맞게 왕들이 새로이 제정한 법령집까지 더해져서 중세 법의 기본 체계를 이루었다. 재판이 벌어질 경우 법전의 해석은 기존 판례에 의거하여 이루어졌다. 따라서 판례를 제공하기 위해 기존 판결들은 체계적으로 잘 보존되었다. 이는 프랑키아, 이탈리아, 스페인의 서고트 왕국 등등 유럽 전역에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동시에 법령집들의 사본들이 대량으로 제작되어 배포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중세 초에 법의 권위가 받아들여진 정도와 그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교육과 학문
중세 초에 교육과 학문이 일괄적으로 쇠퇴했으며, 전사귀족으로 구성된 통치 엘리트들은 문맹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무식쟁이였으며 학문은 수도원에서나 근근이 맥을 이었다는 것은 꽤 오래 정설처럼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현대 연구가 밝혀냈듯이 중세 초 왕국들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의 행정력을 발휘했으며, 법치의 전통을 이어갔다는 점을 볼때, 위의 견해는 상당히 의심스럽기 짝이 없다.
일단 5세기의 내전과 침공이 고대의 교육 시스템에 일시적으로 큰 타격을 입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교육과 학문의 전통은 살아남았고, 곧 충격에서 회복되어 발전하기 시작한다. 고대 말의 체계를 대체로 온전히 보존하는데 성공한 집단인 그리스도교 교회가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비단 수도원만이 아니고, 전 유럽에 걸친 교구들은 성직자 뿐 아니라 모든 세례받은 교인에 대한 교육을 중요한 의무로 받아들이고 시행하였다. 여기에 옛 로마 상층 가문의 가정 교육도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메로빙 왕조와 카롤링 왕조 내내 대다수의 왕과 귀족들은 문맹이 아니었다. 중세 초 왕국들의 통치 행위는 철저히 문서를 기반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암흑시대' 이미지에서 떠올리기 쉬운 편견과 달리, 이 시기에 생산된 텍스트의 양은 Wickham 선생의 지적대로 후기 로마 제국과 비교해서 특별히 뒤떨어지지 않는다.
달라진 것은 글의 주제였다. 로마 제국의 통치 엘리트와 비교해봤을 때, 중세 초의 엘리트는 전사귀족과 성직자로 바뀌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텍스트 상당부분은 산문이나 희곡 등보다는 보다 종교적인 주제나 성인전으로 바뀌었다. 이때문에 이 시기의 교육과 학문이 쇠퇴하였다는 오해를 낳았다. 그러나 이는 주 수요층의 기호 변화를 따랐을 뿐, 종교적인 주제가 세속적인 주제보다 더 열등하다고 볼 이유는 없다. 현대 학자들이 강조하듯, 역사학적 방법론이 정착하기 이전의 저술가들과 달리 현대 역사학은 이런 문제에서 '중립'을 지켜야 한다.
물론 종교적 텍스트가 이 시기 문서의 전부는 아니다. 성직자층 외에 세속 귀족들도 물론 앞서 말했듯 대부분 문맹이 아니었기 때문에 텍스트 생산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생산하는 문서는 문학보다는 일상의 행정과 법령에 관련된 문서들이었다. 이런 아카이브 자료들이 역사학 연구에 본격적으로 이용되는 것은 생각보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중세 초에 대한 막연한 선입견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도 이러한 사료들이 연구되기 시작하면서의 일이다.
'종교에만 의존한 야만의 시대'라는 편견과 다르게 중세 초 사람들은 학문의 가치를 무시하지 않았다. 앞서 서술했듯 법학은 그 중요한 사례이며, 의학 전통 또한 마찬가지다. 중세의 의학에 대해 몇몇 단편적인 에피소드에 기초한 잘못된 이해가 많이 퍼져있지만, 이 시기에 고대 그리스와 로마 의학의 전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특히 갈레노스의 이론을 담은 저작은 계속해서 유통되었고, 중세 의학의 핵심 이론을 이루게 된다.
물론 대다수의 사람들은 현대인이 보기에는 매우 미신적이었고, 신앙과 기적에 의한 치료가 가능하다고 확신하며 살았다.(그런데 따지고보면 고대 로마인들도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의학과 신앙을 대립시키고 한쪽을 탄압한다든가 무시한다든가 하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적어도 귀족과 성직자를 비롯한 사회 상층부와 부유한 사람들은 주치의를 두고 있었고, 나머지 사람들도 병이 나면 성인과 의사에게 동시에 의지하였다. 그리고, Wickham 선생이 지적하듯, 당시 사람들은 이를 모순이라 보지 않았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6세기에 스페인 비시고트 왕국에서 살았던 그리스 출신의 의사 파울로스였다. 그는 스페인에서 사산된 아기를 제왕절개 수술로 꺼내 산모의 목숨을 구한 것으로 유명해진 실력 있는 의사였다. 그런데 그는 단순히 의사가 아니라 성직자(메리다의 주교)였으며, 결국 성인품에까지 오른다. 이는 당시 중세 초 왕국들이 상당히 열린 사회(외국 출신이 고위 사제직에 오를 수 있는)였을뿐 아니라, 중세인들이 가졌던 의학에 대한 태도까지 잘 보여주고 있다.
이상이 중세 초의 가장 기본적인 국가 구조와 이를 지탱한 학문적 기반에 대한 현대 연구 결과를 요약한 것이다. 다음 글에서는 사회구조와 경제 등의 문제를 다뤄보면서 이 시기를 단순히 문명의 퇴보로 보는 시각이 합당한 것인지에 대해 논해보고자 한다.
첫댓글 서기장의 트롤링이 이런 좋은 글을 만들었습니다.!! 트롤링은 이렇게 좋은 것입니다.!!!!
농담은 각설하고.. 서유럽의 붕괴 과정에서 이들은 "약탈자"가 아닌" 정복자"로 변모해 갔다는 거지요. 중동에 정착한 몽골족이나, 중국에 정착한 만주족 사례도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충돌은 빈발했을 것이고 아랫것들은 정말로 힘든 세상이었겠지만요..(툭하면 전쟁에, 저 시기는 기후적으로 소빙하기라 농작물도 잘 안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도 같고..) 비록 내전이 있었다고 해도 1~2세의 거대 제국의 정치적 안정성과 비교하면 아무래도 분쟁의 수 자체는 증가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은 드네요.
@게오르기오스 뭐 3세기의 혼란상이나, 공화정 말기의 내전기는 그렇긴 하죠. 5헌제 시절에도 마르코만니 전쟁에서 판노미아가 돌파당하기도 했고, 반란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그렇지만 "같은 제국" 이라는 매리트는 컸다고 보입니다. 전쟁 없는 태평성대는 아니었지만 총독끼리 수 틀리면 칼 뽑고 싸우지는 않았다는게 제 요지죠.. 뭐 봉건제가 정착되어 가면서 같은 봉신끼리 붙는 건 빠른 속도로 감소해나가기는 합니다만..
@델카이저 일단 생각해봐야 할 점은 이점입니다. 로마 천년 역사에서 비중을 따지자면 제국의 안정과 평화가 유지되던 기간은 생각보다 꽤 짧습니다. 그 나머지 기간은 아무리 혼란기라 하더라도 암흑시대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중세에 역병이 돌아서 사람이 많이 죽었다'는 문장을 접할 경우 많은 이들은 '역시 중세는 막장 헬게이트구나'라는 반응을 보입니다. 그런데 로마의 안토니누스 역병이나 다른 사례들은 그냥 무덤덤하게 지나가지요. 우리가 떠올리는 중세 초의 이미지는 상당부분이 선입견에 의해 형성된 캐리처져입니다. 고대사도 마찬가지지만요.
뭐.. 결국 "암흑시대"라는 폄훼도 19세기적 단선적인 진보관에서 나온 것이고, 그 19세기적 진보관은 전 시대 근세의 역사인식을 답습한 것이니..
결국 단순화 시켜서 보자면 중세를 암흑시대로 여기는 견해가 있다면, 그 "암흑"에 대비되는 "빛"은 무엇을, 누구를 지칭하는가를 생각해보면 되지요. 결론적으로 말해서 중세라는 '암흑'에 대비되는 것은 고대라는 찬란한 빛이고, 고대의 양상을 현대의 역사학, 고고학처럼 자세하게 알아볼 수 있는 여건이 안되었던 시대적 한계 상 근세의 사상가, 학자들이 접할 수 있었던 고대의 모습이란 다분이 이상화 된 감이 있습니다.
그러니, 그 "빛나는" 고대가 끝난 이후에 찾아온 시대에 대해 계승, 발전의 측면이 아닌 단절과 파괴의 측면으로 바라보는 것이고, 그런 단절과 파괴의 시대를 "극복"한 자신들의 시대가 고대의 "빛"을 이어가는 "적통"이라는 (좀 심한) 자뻑을 거하게 날리다보니 말 그대로 "흑역사"라는 의미에서 '암흑시대'라는 딱지를 붙였죠...
결과적으로는 19세기 말이 지나면서 현대 역사학이 제대로 정립된 이후에 그런 경향이 사라지고 곧이어 중세사 연구의 황금기가 찾아온 것이 어쩌면 필연이었을지도...
암흑시대란 표현을 좀 안써야겠어요. 안그랬던거 알면서도 자꾸 중세초기상황하면 매드맥스를 일단 떠올림.
이런 글 너무 좋아요^^, 글 잘 읽었습니다. 편견이 깨진다는 건 좋은 거니까요.
‘고대 찬란했던 로마제국’에 대한 사람들의 - 환상에 가까운 - 인식이 강한것도 이유중의 하나 같네요.
기존의 인식하고는 다르군요 중세를 다시봐야겠네요
급 궁금해진게 서양사 말머리의 암흑시대가 중세초를 가리키던가요. 중세초 글 쓸 때보니 뭔가 했는데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