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 경제
흔히 고대는 도시 문명이고, 중세 초는 농촌 문명이라고 정의하는 경우가 많지만, 근대 이전 세계는 어디나 본질적으로 농업에 기반을 둔 경제였다. 도시민과 농민의 비율이나, 경제구조의 본질 자체는 Devroey 선생의 지적대로 로마제국 시기나 중세나 근본적으로 큰 차이가 없었다. 그렇다면 중세 초 농촌 경제의 매커니즘은 어떠했을까?
중세 초의 가장 독특한 점이라고 하면 역시 농민 자치의 확대를 들 수 있었다. 프랑키아를 비롯해서 서유럽 국가들의 강력한 귀족들은 물론 대토지를 소유하였지만, 지역 농민들 전체에게 지배력을 확장하는 데에는 그리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그 이전 및 이후와 비교하여 중세 초의 농민들은 대체로 지주들에게 예속된 정도가 훨씬 덜하였고, 농촌 공동체 자체도 더 높은 수준의 자치를 누릴 수 있었다.
농민층은 예속농과 자유농으로 구성되었다. 예속농은 모두 차지농이었고, 자유농은 차지농도 있었고 자작농도 있었고, 중소지주도 있었다. 이들 자유농들 중에서 비교적 부유한 농민들이 주도적으로 농촌 공동체를 이끌었다. 따라서 당연한 말이지만 농촌 공동체의 자치권이 강했다는 말을, 그 공동체가 평등한 유토피아였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 안에서 예속농들까지도 나름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는 점 또한 사실이다.
이후 중세 전성기로 접어들면서 농민의 예속 상태가 강해지고, 귀족의 부와 지배력이 증가했지만 중세 초에 형성된 농촌 공동체는 계속 유지되어 농민층의 권익을 대변하였다. 이를 통해서 중세 농촌 사회는 단순히 지배와 피지배로 구분할 수 없는 복잡한 구조로 발전해나갔다. 이에 대해 보다 자세한 내용은 필자가 지난번에 올린 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어찌되었건, Wickham 선생의 지적대로, 자유농의 비율이 높다는 것은 그만큼 귀족 지주들이 보유한 토지의 비율이 그만큼 적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 시기에 가족 단위로 토지를 보유한 소농들의 비율이 늘어났다. 또한 국가의 재정구조가 더이상 후기 로마 제국처럼 세금이 아니라, 토지 소유를 기반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렌트와 현물세가 정부와 지주들의 주 수입원이 되었다. 메로빙 왕조 시대에 농민들이 납부하던 지대는 Deveroy 선생이 지적하듯 기존의 토지세보다 확연히 낮은 부담이었다.
이 말은 로마 제국 시기와 비교하면 귀족층의 부가 확연히 줄어들었다는 뜻이 된다. 이 시기 지어지던 건물이나 거래되던 물품이 덜 화려해보이는것은 문화가 미개해져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수요층인 귀족들의 구매력이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예전에 그러듯이 단순히 '퇴보'라고 논할수는 없다. 가령, 이 시기에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영위하면서 비교적 낮은 세금을 내던 농민들에게 "당신은 화려한 건물 하나 못 짓는 암흑시대를 살고 있네요"라고 말한다면 과연 납득할까?
게다가 부유한 귀족들이 줄어들었다고는 하지만, 지역에 따라 통치 엘리트가 여전히 상당한 부를 누린 지역의 경우 얼마든지 정교한 사치품과 화려한 건축물들을 짓기도 하였다. 메로빙 왕조와 카롤링 왕조의 왕들이 가장 전성기에 누린 부는 그럭저럭 동지중해 세계의 통치자들과 비교할만 했다. 이들이 남긴 건축물과 각종 일용품 유물들의 화려함도 그리 떨어지는 수준이 아니며, 이는 중세 초에 이러한 물건과 건물을 만들 기술 자체가 쇠퇴한 것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정교한 조각으로 장식된 앵글로색슨 귀족들의 상자:
중세 초기 귀족들의 대표적인 사치품이며 예술적 가치도 크다 (대영박물관 소장)
어쨌든, 겉보기에 화려해보이지는 않을지 몰라도, 이 소농 중심 사회는 이후 발전을 선도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당연한 말이지만, 가족 단위로 자기 소유의 땅을 경영하는 소농들은 생산을 더욱 늘릴 동기가 확실하다. 중세 초에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농업 생산력 강화의 중요한 요소는 이들 소농들이었다. 특히 7세기부터 인구 증가 추세가 확연해지고, 이에 따라 농민들은 지주 영주들과 각각 한 축을 이뤄서 늘어난 인구를 부양하기 위한 새로운 농지를 개간해나가기 시작한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삶의 질 개선의 증거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식단이 더욱 풍성해지고 다양해졌다. 이 시기 매장지와 유골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 결과는 영양부족의 증거가 눈에 띄게 감소했음을 보여준다. 8세기부터는 생산량이 크게 늘어나는 것이 확인되며, 이때부터 축적되기 시작한 부는 10세기 중반부터 관찰되는 서유럽의 경제적 급성장의 기반이 되었다.
신분과 사회적 유동성
문명 초창기가 대부분 그런 경우가 많지만, 중세 초기도 상당히 역동적이고 다원적인 사회였다. 앞서 보았듯 귀족의 농민지배가 비교적 약했다는 말은, 귀족이라는 신분의 권위 자체가 그리 크지 않았다는 뜻도 된다. 사실 중세 초의 귀족집단 자체가 정의가 모호했다. 이들은 아직 '고귀한 혈통'으로 정의된 신분집단이 아니었다. 왕과 친하거나, 관직을 갖고 있거나, 땅이 넓어서 귀족적 스타일의 생활을 할 수 있다거나 한다면 모두 귀족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었다. 쉽게 말해서 대다수가 "저 사람은 높으신 양반이야"라고 인정한다면 그럭저럭 귀족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런 면에서 가장 귀족이라고 인정받기 쉽고, 귀족 중에서도 세력이 높은 대귀족들은 소위 '왕과의 거리'에 의해 결정되었다. 이들은 궁정에 상주하면서 국가의 대사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수 있는 집단이었다. 당연히 이 집단 역시 혈통으로 결정된다기보다는 국왕의 신임과 총애에 의해 결정되었다.
이 말은 상대적으로 신분상승의 기회가 많았다는 점을 의미한다. 예속농과 자유농의 구분은 있었지만(이것도 사실 아직 넘을 수 없는 경계는 아니었다), 자유농과 귀족의 신분상의 구분은 이론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령, 자비로 무장을 갖출 수 있는 중농이 전쟁에 참여한다고 하자. 이 사람이 무예에 재능이 있어서 전쟁터에서 능력을 발휘한다면 대귀족의 눈에 들어 가신이 될 수 있다. 만일 이 사람이 지속적으로 능력을 발휘해서 이 대귀족이 밀어준다면(왕의 눈에 든다면 더욱 쉽다) 1-2대 안에 본인도 귀족의 반열에 들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시기는 엄연히 전근대에 속하는 시기고,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열려있다는 것이지 이 기회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일단 최소한의 재산은 있어야 하고 본인의 능력도 있어야 하고 운도 따라야 했다. 그러나 적어도 닫힌 사회는 아니었다. 비교적 드물지만, 평범한 하층 농민이 주교직까지 오르거나 더 나아가 백작까지 되는 경우도 이 시대에는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상업 경제
상업 부분은 분명 서로마의 붕괴로 큰 타격을 입었다. 전 지중해 무대로 형성된 복잡한 경제구조가 보다 단순하고 지역화된 구조로 바뀌었다. 이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Wickham 선생이 지적하듯, 이 복잡한 경제구조는 단일한 제국의 존재가 전제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과거에는 북아프리카의 농민이 로마의 시장을 겨냥하고 작물을 재배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자기 지역에서 먹고살기 위한 것 위주로 재배해야만 했다.
물론 지역화되었다고 해도 그 양상은 다 달랐다. 프랑크 왕국의 중심지역은 가장 대규모이면서 복잡하고 정교한 경제 시스템을 유지했다. 이탈리아와 스페인 등 지중해 지역은 예전보다 분산되긴 했지만, 그래도 비교적 복합적인 생산과 교환 체제를 유지했다. 반면에 본래도 변방지역이면서 제국 붕괴의 충격을 가장 크게 받았던 브리튼은 경제도 가장 큰 타격을 입어서 적어도 8세기 초엽까지는 가장 단순한 형태에 머물러있었다. 애초에 로마의 세력권 밖이었던 북유럽도 마찬가지로 보다 단순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 상업의 역사도 단순히 퇴보와 쇠퇴라고 요약하기에는 훨씬 더 복잡한 양상을 보인다. 무엇보다도 이 시기는 옛 로마 제국이 분열되어 지중해 상권이 붕괴한 상황, 즉 피할 수 없는 '지역화(localization)'라는 상황 내에 적응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활로를 뚫으려 모색하던 시기였다.
첫번째 변화의 조짐은 농업 생산력과 인구 증가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는 7세기에 나타났다. 이 시기에 프랑크인들은 도버 해협으로 나갈 수 있는 두개의 항구, 캉토빅과 도러스타트를 개발한다. 8세기에는 해협 맞은편에서 이와 대응할만한 정착지가 개발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곳이 함윅(현재의 사우스햄튼. 지금도 영국을 대표하는 상항으로 기능하고 있다.), 런덴위치(로마 시대 런던의 바로 옆에 위치), 입스위치 등이었다. 고고학자들은 이 시기 국제교역의 거점이 된 이들 항만 정착지들을 '엠포리아(emporia)'라고 부르고 있다.
엠포리아
이 정착지들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영불해협과 북해를 잇는 국제교통로를 형성하였다. 이 항만 정착지 인근에는 일종의 산업단지가 들어서서 장인들이 거주하였다. 따라서 이 항만을 통해서 주로 거래된 물품은 거기 거주하는 장인들이 생산한 수공업품들이었다. 왕들은 이 항만 정착지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수입의 원천으로 삼았다. 이렇게 해서 8세기에 북해는 물동량이 지중해를 능가하는 새로운 국제교역의 무대로 성장한다.
중세 초의 도시
'암흑시대' 담론의 상투적 서술이 바로 버려진 도시들과 고대 세계의 상징처럼 자리잡은 도시 생활의 쇠퇴이다. 그러나 이 역시 과장이 심하다. 우선 이 역시 지역별로 편차가 심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넘어가야 한다. 남부 갈리아나 이탈리아 등지 등 본래 로마화의 역사가 길었던 곳의 도시들은 다수가 비교적 온전히 살아남았으며, 여전히 상업의 중심지로 기능하였다.
프랑크 왕국의 경우 왕들이 도시에 머물기보다는 농촌의 왕궁에 머무는 것을 선호하였기 때문에, 정치적 생활 자체가 어떤 의미에서는 '농촌화'되었다. 브리튼은 물론 앞서 언급한대로 타격이 컸다. 그러나 역시 앞서 서술한대로 이들은은 새로운 정착지인 '엠포리아'를 만들어 도시의 상업 기능을 대신하도록 하였다.
주교좌 성당이 있는 도시들도 대부분 살아남아서 종교 중심지로 기능하였다. 사실, 주교가 있고 없고는 로마 도시들이 살아남느냐 여부를 결정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 도시들과 교회들은 옛 로마 제국에서 시민 종교 의례가 가졌던 기능을 거의 그대로 이어받았고, 때로는 의도적으로 모방하였다. 그 결과 중세 초에 지속된 시민 의례의 연속성은, 고대 로마에서 그랬듯이 도시 거주민들이 중요한 정치적 아이덴티티를 만들어가는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7세기부터 시작된 농업과 상업의 발전은 도시의 발전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11세기쯤 되면 도시 인구는 중단없이 빠르게 늘어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고대와는 다른 중세도시만의 특색도 이 시기가 되면 분명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이렇게 형성된 도시는 상업의 발달을 더욱 촉진시키고 새로운 도시 엘리트를 만들어냈다. 이들 상공업 엘리트들은 곧 도시의 주도권을 놓고 전통 엘리트들과 대립하게 되고, 이는 12-13세기 코뮌의 성립으로 이어지게 된다. 여기에 이르기까지는 중세 초기부터 단절없이 계속된 점진적인 발전이 있었다.
나오며
이와 같이 현재 역사학계가 바라보는 중세 초는 느리지만 꾸준한 발전과 역동적인 변화가 결합된 대단히 흥미로운 시대다. 무엇보다도, Devroy 선생이 지적하듯 '장기적 변화'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않고는 중세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중세 중기의 급성장은 아무 기반 없이 갑자기 일어난 현상이 아니며, 그 뒤에는 5세기 서로마의 멸망 이후 치열하게 계속된 정치, 경제, 문화 전방위에 걸친 실험과 모색의 과정이 있었다. 표면적인 단절만 보고 심층을 흐르는 연속성을 보지 못한 18세기식 '암흑시대' 담론으로는 이 변화와 발전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그렇다고 중세 초가 단순히 중세 중기 이후의 발전을 설명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목적론(teleology)적인 설명이야말로 현대의 역사학이 가장 피하고자 하는 함정이다. 모든 시대는 우선 그 자체로 이해되어야 하며, 중세 초도 예외는 아니다. 중세 초는 그 자체로도 대단히 흥미롭고 역동적인 시대였으며, 사람들이 어떻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상호작용하면서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암흑시대'라는 단어로는 이런 노력은 물론, 이 시대의 복합적인 면모도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다. 사실 후대의 우리가 무엇이기에 이 시대의 다양한 노력들과 거기서 나온 다양한 면모들을 '암흑시대'라는 한 마디 용어로 규정지을 수 있단 말인가? 물론 모든 것이 다 좋았고 발전적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그건 다른 모든 시대도 마찬가지다. 역사는 발전과 퇴보의 이분법으로만 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장 오늘 우리의 일상도 그런 이분법적 잣대로 재는 것은 불가능하다.
참고
Chris Wickham, Medieval Europe: From Breakup of the Western Roman Empire to the Reformation (New Haven, 2016).
Chris Wichham, The Inheritance of Rome: A History of Europe from 400 to 1000 (London, 2009).
Hendrick W. Dey, The Afterlife of the Roman City: Architecture and Ceremony in Late Antiquity and the Early Middle Ages (New York, 2015).
Paul Fouracre (ed.), The New Cambridge Medieval History , Vol 1 (Cambridge, 2005).
Rosamond McKitterick (ed.), The Early Middle Ages (Oxford, 2001).
첫댓글 역사를 모 아니면 도 이런식으로 보는게 이래서 잘못된 것이군요...
권리가 좀 더 보편적으로 확대되어 가는 사회였다는 거군요. 뭐 5세기경에는 서유럽에는 거의 완전하게 노예가 사라졌다고 하니까..
6세기 들어가면서 노예는 오히려 더 생겼을 수도 있습니다. 프랑크 왕국 기준으로 게르만 왕국들이 들어서면서 새로히 사회변동과 정복전이 증가하고 다시 노예의 수가 일시적으로 늘어났다고 보기도 합니다. 다만 메로빙 시대에는 기록이 미미해서 노예 자체의 수를 확인하기 힘들지만, 카롤링 시대의 여러 영지명세서 등에서 과거에 노예였던 소작농이나 반자유민들이 꽤나 확인된다고 합니다. 참조는 이기영 교수의 「고대에서 봉건사회로의 이행 」(2017)
후후
트롤링은 이렇게 하는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저 이 몸을 찬양하시면 됩니다.
암흑시대의 암흑 곰팅이...
잘 읽었습니다. 사학자가 아닌 분들이 집필한 과학사나 철학사는 '과학'이나 '철학'이 두드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중세 초를 '암흑시대'로 보는 경향이 강합니다. 물론 철저히 현대 철학과 현대 과학의 관점으로 본 휘그주의 사관이죠.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