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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만찬(눅22장19-20)
성경본문: 누가복음22:19-20
19 또 떡을 가져 감사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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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서 사랑받는 울산교회 믿음의 식구 여러분,
그리고 이 복된 자리에 나아오신 이웃 여러분,
우린 참으로 부끄러운 나라의 백성이며, 허물진 교회의 일원입니다.
모이기 전부터 우리는 회개를 외치고, 참회를 부르짖지만, 회개든 참회든 우리가 마음대로 하는 일은 아닙니다.
이번 참사의 배 이름 <세월호>는 참으로 시사하는 것이 많습니다.
존 번연이 이 세상을 <장망성>이라고 작명한 이후에 제일 그럴듯한 이름을 붙인 배이름 같습니다.
<세월호>의 침몰과 수많은 생명의 희생을 보면서 참담한 고난 주간을 보냈습니다.
죽음을 이긴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주일이지만 안타깝게도 부활의 기쁨을 들어내놓고 말할 분위기가 아닙니다.
곧 525 해운대 기도모임을 앞두고 마치 하나님은 오늘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으며, 회개하지 아니하면, 우리의 결국이 어디인지를 분명히 보여준 비참한 사건입니다.
주님은 당대의 재난을 언급하시며, 재난의 의미를 말씀하셨습니다.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 13:4,5)
죽은 그들이 더 죄가 많아서, 더 불운해서라고 생각하시면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도 단호히 말씀하실 것입니다.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두 번 반복해서 같은 말로 강조해서 경고합니다.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그러면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지난주일 설교는 6절에서 끝났는데 오늘은 좀 뛰어넘어 19절과 20절을 중심으로 주님이 제정하신 거룩한 만찬을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오늘 예배 중에 실시할 성만찬의 의미를 보다 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서 잠간 앞뒤 흐름을 요약합시다.
무슨 방도로 죽일까 궁리하던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의 음모에 가룟 유다가 동조합니다.
열둘 중 하나인 가룟 유다는 이제 군중들이 없을 때에 스승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찾습니다.
그리고 바로 유월절 양을 잡는 무교절 날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동선을 공개하지 않기 위해 가장 신뢰하는 두 제자를 보내어 유월절을 준비했습니다.
곧 유월절 축제를 하는 시간이 되어서 모든 제자들이 식탁자세로 앉았습니다.
복음서 기자들 가운데 누가가 제일 식탁교제를 즐긴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서에 기록된 일곱 번째 식탁이고 어쩌면 가장 드라마틱한 식탁이기도 합니다.
앞으로도 누가복음에는 두 번 더 식탁교제가 등장할 것입니다.
밥을 같이 먹는 것은 어느 문화든지 서로간의 친밀감을 나누는 자리입니다.
서로의 관심사를 말하며, 서로간의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복된 자리입니다.
그러나 그 밤의 식탁은 화기애애한 자리가 아니라 엄숙감이 감도는 자리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말씀을 하려는 자리입니다.
이 유월절 식탁에서 주님께서 그 입을 여십니다.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고 당신의 깊은 마음을 열어 보입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식탁에서 유언의 말씀을 당신의 사역을 계승할 자들에게 하시려고 벼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 유월절 만찬은 모든 유대인들처럼 과거의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또한 십자가상에서 이루실 당신의 사역을 내다보는 사건입니다.
흠 없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곧 자신을 내어주실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자기 백성의 속죄를 위해 피를 흘리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장차 당신께 속한 자들과 함께 하늘에서 영화로운 잔치에 참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계획이 완성될 때까지 유월절을 더 이상 땅에서는 기념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만찬자리는 격한 감정이 가득한 자리처럼 보입니다.
자세히 살피면 그 식탁에서는 예수께서는 자신이 잡수시진 아니하고 다만 함께 참석해 있습니다.
게다가 주님은 여느 유월절 만찬의 식탁을 당신의 마지막 만찬자리로 만드시고 있습니다.
유월절 만찬에 속한 잔을 가지시고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당신의 입장을 다시 한 번 밝힙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이런 표현 가운데는 주님의 생각이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미래의 회복을 위한 당신의 각오에 대한 강렬한 감정이 배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그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가시적으로, 그리고 영원토록 하나님께 속할 것입니다.
지금 주님의 마음속에는 그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내다보고 사모합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를 그 마음의 지평에는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 영광의 날이 오면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당신의 성도들을 가시적으로 다스릴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살필 본문이 계속됩니다.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앞서 간략히 살펴 본 바에 의하면 유월절 만찬 자리를 최후의 만찬자리로 바꾸어서 새로운 제도를 세우셨습니다.
유월절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주님을 기념하는 성만찬이란 새로운 제도를 세우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예수님은 유월절 축제를 위해 준비된 무교병을 가져서 사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떼어 저희에게 주셨습니다.
떡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인식 때문에 칼로 자르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는 유대인의 생각이 칼 대신 손으로 떡을 뜯어 먹는 것이 올바른 방법으로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그와 동시에 이 유월절 의식에서 전혀 없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십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유월절은 애굽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한다면, 이제 주님의 만찬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우리가 죄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언어의 대가이십니다.
비유적 진리를 표현하기 위해 자유자재로 일상적 용어를 활용하십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마치 빵이 사람에게 자양분을 제공하듯이, 당신이 지금 찢어 나누어 주시는 그 빵은 성도들이 받을 영적인 자양분을 주는 음식과 같습니다.
그 빵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을 위하여 죽음에 내어 준 예수님의 몸을 의미합니다.
그날 밤 예수님께서는 다가올 자신의 수난의 유익들을 미리 맛보는 방식으로 제자들에게 빵을 떼어 주십니다.
더 이상 지상 사역 속에서 함께 하지 아니할 예수께서 제자 공동체에게 스스로를 항상 새롭게 나타내실 것을 엄숙히 약속하시고 그 때마다 자신의 죽음의 유익들에 미리 맛보도록 초대하십니다.
그런 측면에서 성찬은 항상 우리의 시각을 뒤를 향해 돌아보도록 요구합니다.
우린 성경의 많은 가르침을 잊어버리기도 하지만 주님에 관련한 단 하나의 사건은 잊지 말도록 요구하십니다.
우리가 오늘처럼 성찬의 떡을 떼어 나누거나 잔을 부어 나눌 때에 우리는 우리 죄를 위한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성찬을 통해서 이런 반복된 행위는, 그렇지 않으면 과거 속으로 사라질 것을 현재 속으로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지금껏 해온 기념으로서 유월절 만찬은 이제 예수님의 구원성취와 관련해서 새로운 시야를 여는 방안으로 활용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만찬을 행할 때마다 우리는 주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확인합니다.
성만찬을 행할 때마다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 하겠다는 언약을 지키실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그의 몸을 주시므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이 주어질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그 몸을 상하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길이 활짝 열렸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기념하여 뗀 빵을 먹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죄 사함의 근거는 십자가 위에서 주님의 희생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성찬의 떡을 떼어 나눌 때마다 우리가 당신의 사랑을 기억하시길 원하셨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성찬의 빵을 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이심을 고백합니다.
구세주로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합니다.
주님을 기념해서 떡을 떼며 포도주를 나눕니다.
그러므로 성도라면 주의 성찬에 참여하는 것을 사모하십시오.
떡과 잔을 받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기억하십시오.
아직 여러분이 세례를 받지 못했다면 받을 수 있도록 교회가 정한 과정을 이수하고 여러분도 다음 성찬의 자리에서는 주님의 떡과 잔에 동참하도록 소원하십시오. 그리하여 여러분의 삶이 주님의 삶이 되게 하시고, 여러분의 생은 주님의 뜻을 이루는 복된 기회가 되게 하십시오.
예수께서는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기 전까지는 두 번 다시 포도주를 마시지 않겠다고 맹세하시고, 이제 잔을 들고 설명하십니다.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20절)
앞서 간략히 살핀 대로 무교병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시듯 주님은 지금 유월절 만찬의 포도주 잔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십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새로운 언약은 신약 시대의 주요 주제의 하나입니다.
일찍부터 선지자들은 이 새로운 언약이 체결될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 가운데 예레미야가 대표적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렘 31:31)
그 언약은 옛 언약과 같지 아니할 것입니다. 옛 언약처럼 더 이상 파기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 31:33)
이제 짐승의 피로서 인 쳐지던 옛 언약이 종료되고 당신의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 시행되는 순간입니다.
마태의 기록을 보면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고 설명됩니다.
새 언약은 때로 아버지의 약속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눅 24:49)
그 약속 성취를 누가는 두 번째 글 사도행전 2장 14절 이하에서 기록합니다.
아버지의 약속에 대해서는 바울은 고후 3, 4장에서 충분히 설명하고 히브리서 기자는 8, 9, 10장에서 길게 그리고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예수님의 피는 당신을 따르는 자들을 위해서 흘리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 피로 값 주고 산 것입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행 20:28)
이제 주님의 십자가로 새로운 시대의 기초는 놓였습니다.
새롭고 신선한 희생제물을 통해서 새로운 성취의 시대가 활짝 열렸습니다. 새로운 시대는 예수님의 죽음과 성령의 베풀어주심으로 개막되었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잔으로 묘사되는 예수님의 죽음을 이해하는 두 가지 열쇠가 있습니다.
☞첫 째로 그의 죽음은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한 죽음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로마서 3장 20~26에 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 누가의 글에는 다만 암시적으로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뒤에 나오는 사도행전 구절에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밝히곤 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그의 피로서 새로운 언약의 체결을 완성했습니다.
언약이란 항상 피흘림을 통해서 체결되기 때문입니다. 피 흘림이 없으면 언약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8장에서 10장까지 상세히 설명하는 바와 같습니다.
이제 예수께서는 최후의 만찬 자리에 앉으셔서 왜 자신이 떠나가야 하는지를 밝히실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는 새 시대를 여시기 위해서 자신을 새로운 언약의 제물로 내어 주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라고 특히 이 피는 문자 그대로 피를 빼기 위한 것이 아니라 피를 붓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20절)고 표현된 것은 구약에서 폭력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을 말하기에 임박한 폭력적 죽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짐승의 피와 달리 그의 피는 이 새로운 연약 아래 죄인들을 대신해서 죽을 것입니다.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실제로 제거해 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암시하는 피를 붓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들을 죄로 인한 사망의 형벌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흠 없는 어린양의 피가 부어질 것입니다.
동시에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라고 피로 세운 잔을 강조하는 이유는 새 언약의 책임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혹 여러분이 추도예배나 기념예배에 참여해 본 적이 있습니까?
‘제가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돌아가신 분이 그렇게 해 주길 원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곤 말하는 것을 듣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고인의 소원이나 평소의 삶의 원칙과 분명히 어긋나는 행동으로 추모한다면 고인에 대한 모독일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성만찬을 행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죽으심을, 그리고 주님의 다시오심을 기념하는 자리는 반드시 주님의 뜻을 따라 살기로 다짐하는 자리여야 합니다.
단순한 기념예배가 아니라 십자가에 자신을 내어 주신 주님께서, 사흘 만에 살아나신 주님께서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시며 성만찬을 통해서 자신을 우리에게 주는 자리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사랑과 긍휼에 일치하는 방법으로 예배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그분의 생각을 따르고 우리의 행동이 그분의 행동을 본받는 자리여야 합니다.
주의 만찬의 자리에 참여할 때 “그를 기념하며” 사는 방식이 어떠해야 할지를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것입니다.
그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지혜롭게 처신하는 오늘 하루이길 바랍니다. 아멘
이제 우리 모두 기도하며 주님이 베푸신 성찬의 자리로 함께 나아가길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