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문화를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흔히 사과 얘기를 꺼내곤 합니다. 역
사의 흐름을 바꾼 세 개의 사과가 있다는 거죠.
첫 번째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아담과 이브의 사과입니다.
잘 알다시피 아담과 이브는 뱀의 꼬임에넘어가 선악의 열매를 따 먹은 뒤
낙원에서 추방당했습니다. 이때부터 인류 문명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죠.
두번째는 빌헬름 텔의 사과입니다. 조국을 침략한 세력에 저항한
빌헬름 텔은 아들의 머리 위에 놓인 사과를 화살로 맞히고 승리자가 됩니다.
독재 권력과 싸워 이긴 이 사과에서 민주주의의 탄생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죠.
마지막 세 번째는 영국의 과학자 뉴턴의 사과입니다.
사과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모든 물체가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지요.
그러니 이 사과가 근대과학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서양미술의 역사에도 아주 유별난 사과가 있습니다. 바로 세잔의 사과지요.
“나는 사과 하나로 파리를 놀라게 하겠다!”
세잔이 친구인 에밀 졸라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 유명한 말입니다.
파리는 예나 지금이나 예술의 도시예요. 따라서 파리를 놀라게 하겠
다는 것은 예술계를 놀라게 하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지요.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어요. 세잔의 사과에서 현대미술이 싹텄다고 할 만큼
서양 미술사에 큰 파문을 던졌으니까요.
세잔은 정물화를 즐겨 그렸는데, 그 중심 소재가 사과였어요. 그는
사과를 그리고 또 그렸지요. 때론 그림을 다듬고 고치느라 사과가 다
썩어 문드러졌지만 그때까지도 그림이 완성되지 않았답니다.
도대체 얼마나 잘 그렸기에 그토록 공을 들인 것일까? 잔뜩 기대
를 안고 그림을 본 사람들은 크게 실망하게 됩니다. 막상 그림을 보
면 별로 잘 그린 것 같지 않았으니까요. 형태도 불분명하고, 물감 덩
어리를 대충 칠해 놓은 것처럼 엉성해 보입니다. 보통 사람들도 저
정도면 나도 그리겠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본래 정물화는 고정된 물체를 그리기 때문에 안정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잔의 정물화는 매우 불안정해 보입니다. 탁자도 삐딱하고
접시도 기울어져, 곧 사과가 우르르 쏟아질 듯 위태롭습니다. 일부러
사물을 이렇게 배열해 놓은 것일 수도 있고, 그림을 그렇게 그린 것
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어딘지 균형이 잘 맞지 않습니다. 전통
적인 미술 기법을 익힌 사람의 눈에는 아주 형편없는 그림으로 보일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세잔 미술의 진가는 바로 거기에 있답니다.
르네상스 이래 화가들은 그림의 사실감을 높이기 위해 두 가지 기
법을 썼어요. 하나는 원근법으로 사물이 멀고 가까움에 따라 크기를
달리해서 공간적 깊이를 느끼게 하는 것이지요. 다른 하나는 명암법
인데, 빛이 드는 곳과 그림자가 지는 곳을 명확히 묘사하여 입체감을
살려 내는 것이죠. 세잔은 이런 전통적인 기법을 모두 버렸어요. 그
는 사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 거의 관심이 없었거든요. 제욱시
스의 일화에서 보듯, 새들의 눈을 속일 정도로 포도 그림을 잘 그렸
어도 그건 결국 먹을 수 없는 물감 덩어리에 불과하니까요. 세잔은
눈속임에 가까운 사실적인 묘사보다도 사물이 가진 형태와 구조, 색
채에 더 관심을 기울였답니다.
지금부터 조금 어려운 얘기가 될 수도 있으니까 귀를 바짝 기울여
들어 보세요. 모든 사물은 3차원의 입체적 공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는 방향에 따라 모양이 조금씩 달라 보입니다.
사과를 예로 들어 볼까요? 둥근 사과는 매우 단순한 형태지만 실
제 가만히 관찰해 보면 옆에서 보는 것과 위에서 보는 것, 아래에서
보는 것이 약간씩 모양이 다릅니다. 보는 방향에 따라 원에 가깝기도
하고, 타원형을 띠기도 하고, 또 찌그러진 형태가 되기도 합니다. 한
번 과일을 놓고 관찰해 보세요. 그러면 무슨 말인지 금방 이해가 갈
겁니다.
이렇듯 보는 각도에 따라 형태가 달라지기 때문에 사과의 완전한
모양을 그린다는 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닙니다. 사과뿐 아니라 모든
사물이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보통 화가들은 한 시점에서 본 모양
을 정확히 묘사하지요. 하지만 세잔은 달랐습니다. 이 불가능한 일에
도전했지요. 그는 눈을 조금만 돌리면 모양이 달라지는 사물의 완전
한 형태를 그림 속에 담아내기 위해 고통스런 싸움을 벌였던 것입니다.
그림 가운데 오렌지가 담긴 속이 움푹한 접시가 있습니다. 이 접시
를 유심히 살펴보면 한 시점에서 그린 게 아닙니다. 접시 앞쪽은 측
면에서 본 모습이지만 과일이 담긴 곳은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이지
요. 사물의 완전한 형태를 그리기 위해 서로 다른 시점을 한 화폭에 담
아내는 실험을 한 것이죠. 그의 그림을 보면 사물의 윤곽선이 여러 개
겹쳐 있고, 물감이 얼룩덜룩 칠해져 마치 그리다 만 것 같은 느낌을 주곤 하는데,
아마도 이런 실험이 빚어낸 결과일 겁니다. 세잔의 엉뚱한 노력은
훗날 20세기 미술의 혁명이라 일컬어지는 큐비즘의 씨앗이 되었고,
그를 현대미술의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답니다.
폴 세잔 (1839~1906년) | 프랑스의 후기 인상파 화가예요. 처음엔 아버지의 권유에
못 이겨 법학을 공부했지만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어요. 그래서 얼마 지나지 않
아 법학 공부를 포기하고 자신의 고집대로 미술의 길로 들어섰답니다. 하지만 미술
가의 길은 그리 평탄치 않았어요. 그는 미술학교 입학에 두 번이나 실패하기도 했
고, 인상파 전시회에도 참여했으나 좋은 평가를 얻지 못했지요. 그 뒤 고향 프로방
스로 돌아가 그곳에서 평생 그림을 그렸어요. 사물의 구조와 형태에 관심이 많던
그의 작품은 살아 있을 당시에는 별로 인기가 없었지요. 하지만 그가 죽은 뒤 새로
운 평가를 받았고, 나중에 입체주의 미술이 생겨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답니다.
* 별첨 사항: 이 글은 졸저 <새콤달콤한 세계명화 갤러리>(길벗어린이)에서 발췌 수록한 것입니다.
글과 도판은 길벗어린이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싣는 것이며, 본 내용은 저작권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