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초부터 노골화하기 시작한 붕당간의 대립은 17세기말 숙종조를 지
나면서 상대방을 철저히 숙청하는 극단적인 대립방식으로 전개되었으며
영조가 즉위할 무렵에는 노론의 일당 전제가 심화되었다. 영조는 소위 탕
평책을 써서 각 정파가 자기 주장만을 내세우지 않고 서로 타협하는 자세
를 갖도록 유도하는 한편 여러 정파를 고루 기용하는 자세를 취하였다.
아울러 왕권을 강화하여 정파간의 극심한 대립을 어느정도 완하시켜 나갔
다. 그러나 영조치세 중반 이후로는 노론계가 왕실과 혼인 관계를 유지하
면서 세력을 쥐게 되었고 이에 소론은 사도세자를 등에 업고 정권을 얻으
려고 하였으나 이를 저지하려는 노론과의 대립속에서 결국 사도세자의 죽
음을 빚어내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정조가 즉위할 무렵 정계는 여전히 노론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정조
는 아버지의 죽음 때문에 당쟁을 극도로 혐오하였을 뿐 아니라 왕권을 강
화하고 통치체제를 재정비 하려는 의도하에 영조에 이어 탕평책을 폈다.
이른바 청류 탕평을 써서 노론내 청류계 인사들을 정계에 끌어들이는 한
편 비 노론계의 진출도 열었다. 당시의 정계는 노론을 중심으로 한 벽파
와 남인과 소론을 중심으로 한 시파로 크게 나뉘어져 있었다. 그러나 정
조 자신은 어느 당파에 특별히 의존하지 않고 비교적 균형을 이룬 통치를
하였다. 그 대신 정조가 추구한 것은 강력한 왕권의 확립이었다. 완권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어느정도 대립되는 여러 정파의 존재가 필요했던 것이
다.
이런 정치적인 위협속에서 정조는 신해통공,문체반정,탕평책,규장각,장용
영,수원 신도시 건설 등 통치체제의 정비와 왕권 강화책들을 강구하게 된
다.
2. 정조의 여러정책에 대하여.
가. 신해통공
1791년(정조5년) 신해년에 당시 우의정으로 있던 체제공의 건?슛에 의해
통공발매 정책이 공포되엇다. 통공발매란 일부 특권상인이 족점적인 상품
판매권을 갖고있던 것을 폐지하여 누구나 자유롭게 상품 판매 행위를 할
수 있도록 한 조처였다. 이것은 이미 영조때부터 부분적인 시도가 있었으
나 기존 특권상인들의 강력한 반발로 시행에 옮기지 못했던 것이었는데
특권상인에 의한 폐해가 한계에 이르게 되어 이 해,즉 신해년에 와서 실
천에 옮기게 왼 것이다. 그런데 기존의 특구너 상인들은 대체로 노론파의
정치적 비호를 받고 상권을 장악하고 잇었다. 따라서 신해통공의 공포는
기존 노론계의 경제적 이들을 타파하려는 의미를 내포한 것이다.
통공정책에 의해 종전의 봉건적인 독점적 상업행위는 서울의 6의전에만
인정되고 나머지 전국의 지방도시나 성루의 다른 시전은 독점권을 잃었다
이런 통공발매정책에 의해 이득을 얻은 계층은 지방 시상인이나 도시 영
세상인들이었다. 반면에 타격을 입은 것은 기존의 시전상인었고 또한 노
론 세력이기도 했다. 통공정책이 발효되자 서울의 시전상인들의 거셍항의
가 뒤따랐다. 그러나 정조는 이에 굴하지 않고 정책을 추진하였고 다시
1794년 갑인 통공을 통해 정책을 확립해 나갓다. 그것은 보수적이고 봉건
적인 과거의 상업조직의 옛 껍질을 벗는 과감한 조처였으며 아울러 특정
정치세력의 발호를 억제하는 왕권 강화의 정책이기도 했다.
나.문체반정
정조가 즉위한 18세기 후반에 선비들 사이에는 청나라의 영향을 받은 자
유로운 스타일의 문장이 유행하였다. 중국을 왕래하는 사람들을 통해 중
국의 소설류도 관리들 사이에 읽혀졌다. 정조는 선비의 글은 고대 6경(역
경,서경,시경,예학,춘추,악기)의 문체를 ?? 받아야 한다고 믿었다. 문장은
곧 그 사람의 인품이요 사상이라는 전통적 문장관에 입각하여 정조는 비
속한 문장의 유행을 금지하고자 하였다. 여기에는 단지 문장의 복구가 아
닌 더 정치적인 뜻이 담겨져 있었다. 대체로 당시 세력을 잃고 있던 남인
은 고대 6경을 중시하는 학문자세에 있었고 기득권층인 서인,노론계는 4
서(논어,맹자,중용,대학)를 기본으로 한 주자 성리학을 위주로 하였다. 고
대 6경은 대체로 왕의 위상을 지상의 다른 어떤 존재보다 우월한 것으로
정의하고 있었으나 이러한 생각은 주자의 4서에 대한 재해석으로 상당히
약화되어 있었다. 왕은 예를 지키는데 있어서 신하와는 같을 수 없다는
고대 경서에 대해서 성리학적 해석에서는 왕과 신하는 예를 지키는데 있
어서 근본적으로 동일하다는 인삭을 갖고 신하의 위상을 ??히고 잇었다.
문체반정은 표면적으로는 시류를 따른 비속한 문장을 금하고 고대적인
문장의 규범을 준수하자는 것이었지만 고대 예론에 대한 재인식을 강조하
고자 한 정조의 의도가 깔려 있었다. 문체반정은 실권한 남인들의 입지를
강화시켜주는 구실이 되고 노론중에도 신진학자들을 왕 편으로 전향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 셈이다.
다. 탕평책.
정조는 선왕 영조에 이어 탕평책을 인선의 원칙으로 내세?떰다.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탕탕평평한 자세를 갖는다는 것이었다. 이 원칙 덕분
에 서인의 노론계가 독점하던 정부요직은 소론계는 물론 남인들에게도 차
례가 돌아갔다. 탕평책은 신하들에게 골고루 국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
를 준다는 훌룡한 명분을 갖는 것이었고 동시에 왕의 입장에서는 권력이
노론에 독점되지 않고 왕과 이해를 같이 할 수 있는 남인측에게도 권력을
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엇다. 그리고 탕평의 근본 목적에는 이렇게
신하들의 세력을 분산함으로 해서 왕의 위상을 더 공고히 하는 것이었다.
라. 규장각
정조는 즉위 직후 전에 선왕의 유퓸을 보관하던 규장각기구를 대폭 확대
개편하여 이곳을 학문의 중심기구인 동시에 신진관료의 양성기구로 강화
하였다. 규장각에는 수많은 서적이 보관되고 그 안에 재기발랄한 신진학
자들을 두어 서적의 편찬과 같은 문화사업을 펴는 한편,임금을 보좌하는
학문소의 역할을 맡도록 하였다. 규장각이 설치는 트게 두가지로 압축되
는데 하나는 右文之治라 하여 서적을 모으고 간행하는 사업이었고 다른
하나는 作成文化라 하여 인재들을 불러모아 학문을 편찬토록하는 것이었
다. 특히 정조는 중국 청나라가 편집한 중국의 백과전서인 '고금도서집성'
과 중국최대의 총서인 '사고전서'의 도입을 추진하였는데 외국의 서적을
국내에 들여오는 일,이것은 통치자에게는 쉽게 결정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본래 새로운 정보는 기존질서를 깨뜨릴 소지를 안고 있으므로 기존질서에
만족하고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면 가급적 바깥으로부터의 정보를 차단하
고 백성들이 새로운 소식에 접하지 않도록 벽을 쌓아야 하기 때문이다.
외국 서적의 도입을 통치자가 적극 추진한다는 것은 퉁치자가 자신감에
차 있어가 통치자 자신이 사회의 어떤 변화를 필요로 할 때 그러하다고
할 수 있다. 정조는 아마 후작에 속한 결정이 아닌가 한다. 정조 즉위 직
후는 아직 통치력이 불안하였고 기존 관료세력의 힘이 강력하였다. 이 기
존 체제를 무너뜨리는 데는 관료 사회의 의식 개혁이 필요하였다. 성리학
에 물든 지식인들에게 고대 6경의 근본정신을 교육시켜야 하였다. 중국의
모든 고전에서부터 당대에 이르는 새로운 서적을 갖고 들어와 이 주자학
밖에 모르는 지식층의 인식을 뒤흔들어 놓고자 한 것이다.
규장각의 또 하나 중요한 기능은 이곳을 신진학자들의 결집소로 하여 임
금의 친위적 학자군을 형성하고 동시에 왕의 정치적 구상을 학문적으로
뒷받침할 이론 구축의 장으로 만드는 것이다. 여기에는 남인계 학자는 물
론, 서인의 소론,노론계 인사들도 널리 불러모아 파벌을 초월한 새로운 기
상을 갖춘 학자들이 모였으며 이들 속에서 실학파와 같은 새로운 이념과
주장을 구체적으로 피력할 수 있었다. 또한 초계문신제도를 두어 고대경
서의 집중교육을 통한 정조의 새로운 정치이념의 뒷받침을 하는 두뇌집단
의 역할을 맡기게 된다.
마. 장용영
1789년 장용위를 크게 확대 개편하여 장용영으로 하고 장용영에는 내영
과 외영을 두어 내영은 도성에 외영은 이해에 막 이전을 마친 수원부에
두기로 하였다. 장용외영을 수원부에 두는 이유에 대해서 현륭원을 지킨
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국와 호위부대를 지방에 둔다는 것은 자칫 벽파쪽
에 신하들로부터 문제가 제기도리 수도 있는 조처였으나 일단 현륭원을
지킨다는 명분을 얻은 셈이다. 장용외영의 설치는 수원부를 조선팔도 안
에서는 한양을 제외하고는 다른 어느 도시보다 강력한 지위와 군사력을
갖춘 실질적인 조선 제2의 도시로 발돋움 할 태세를 갖추게 한 것이었다.
바. 수원 신도시 건설.
수원읍 이전의 배경
18세기 말 당시 고을 주변에는 천여 호 이상의 주민이 살고 있었는데
집단 이주 명령의 이주대상 가구는 319호 였다. 이 가구들에 대해선는 호
주의 이름과 직업 그리고 살고있는 집의 규모등을 면밀히 조사하여 가옥
의 보상비를 주었고 거기에다 이주에 필요한 돈까지 책정하여 지급해 주
었다. 수원읍을 새로운 장소로 이전하게 된 까닭은 원래 읍이 있던 곳에
사도세자의 무덤을 옮겨 오기 때문이었다. 사도세자는 당시의 임금,정조의
친아버지이다. 정조는 비명에 죽은 아버지 무덤을 팔도 굴지의 명당 자리
에 모시고자 하였고 그 후보지로 수원 고을 뒷산이 선택된 것이다. 그러
나 이것은 표면적인 이유로 보는 것이 옳으며 수원을 새 장소로 옮겨서
자신의 이상으로 꿈꾸던 하나의 신도시를 건설하고자 한 원대한 계획이
있었던 것이다. 젊은 군왕 정조는 신하들의 싸움을 억누르고 왕의 권위를
되찾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군주의 절대적인 권위와 신하들의 한
결같은 충성으로 그려진 중국 한나라의 군주 모습은 정조가 꿈꾸던 목표
였다. 조선의 어지러운 현실속에서도 굽히지 않고 정조는 그 이상을 향한
조처들을 하나 둘씩 실현해 나갔다. 왕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을 지지하는
믿을만한 신하와 이들을 이끌고 마음에 둔 정책을 실천해 나갈 재정적 뒷
받침 그리고 군사력이었다. 한양에거 이 모두를 얻기는 어려웠다. 이미 도
성은 노론계의 기존 세력들이 부리를 깊이 내리고 있었고 도성 시전상인
들은 이미 기존 관료 세력의 편이었다. 결국 목적에 맞는 신도시를 건설
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리고 수원은 모든 면에서 그 목적에 가장 부합하는
도시였던 것이다.
옛 수원읍은 주변에 산이 겹겹이 감싸이고 또 고을의 터전도 넓지 않았
다 고을 주위에는 주산인 화산을 비롯하여 서쪽의 홍법산,남쪽의 발점산
이 다 둘러싸고 있어서 이 고을의 외적의 침입에는 효과적인 방비에 능하
지만 사람들의 활달한 소통에는 썩 편한 곳은 아니었다. 수원이 도성을
남쪽에서 지키는 도호부가 된 것도 이런 지세에다 서해바다에 인접하여
바다로부터 들어오는 적을 방비하기 좋은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새 수원읍의 터전은 서쪽에 고을의 주산인 팔달산이 버티고 있는 것 외
에 이 곳은 남이고 북이고 동이고 다 활달하게 터져 있었다. 또 위치상으
로도 서울에서 남쪽 충청도나 전라도,경상도로 내려가는 길목이었다. 이런
곳이라면 남쪽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사람들이 반드시 이곳을 거쳐야 하고
또 서울서 남으로 내려가는 사람들도 여기서 하룻밤을 쉬고 내려가는 요
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사람만이 아니고 지방의 갖가지 물품들이 다 여
기를 거쳐 서울로 올라가게 마련인 것이다. 물론 옛 수원도 서울과 남쪽
지방을 딧는 교통상의 요지였다 그러나 새 수원은 바로 그 장애 요인을
제거한 신도시의 탄생인 것이다.
당시 조선시대에는 몇 개의 주요 간선로가 있었다. 하나는 한양에서 개
성을 거텨 황주.평양을 지나 의주로 이어지는 길로 주로 중국을 왕래하는
사신들이 다니기 때문에 사행길로 중요시 되었다. 또 하나는 한양에서 광
주를 거쳐 충주를 지나 상주 대구로 가는 길과 충주에서 안동으로 빠지는
길인데 소위 자로 즉, 반도의 왼쪽길 또는 중로라 해서 이 길의 남쪽의
가장 중요한 간선로였다(정치적인 길). 또 하나가 전라도로 이어지는 길로
수원을 지나 공주 전주로 해서 나주,광주,능주 등으로 연결되었다. 이길은
경상도로 나가는 좌로와 짝을 이루어 우로라고 불렀다.(경제적인 길)
18세기 이후 상업이 발달하고 경제에 대한 중요성이 새삼 커지면서 우로
의 역할이 커졌다. 서울로 올라가는 물동량이 커지자 서해 뱃길과 육로의
비중이 늘어난 것인데 18세기 전라도 해안이나 충청도 해안은 드러나지
않게 경제적 부를 축척하고 있었다. 우로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우로의
서울 길목에 위치한 수원의 위상은 말할 수 없이 증대 되었던 것이다.
이미 18세기 들어오면 사회는 활발한 상업활동에 의해 빠르게 변모하고
있었다 정치가들에게도 상업을 타기해야할 말업이 아니고 권력장악을 위
해서는 부엇보다도 중시해야할 바탕이 되었다. 상업의 발달에는 자연히
활발한 물품의 유통이 전제가 되었고 물품은 도시에서 도시로 이동되게
마련이었다. 중앙집권체제를 유지한 조선후기에 모든 물품의 집합체는 역
시 서울이엇다. 지방의 물품산지는 삼남이었고 삼남의 물품의 서울로 이
동하는 유통도로는 새삼 중요시 되었다. 수원은 바로 서울로 들어오기 전
의 가장 중요한 길목으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구 수원읍의 지형
조건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 요구를 충족시키기에는 너무 궁벽한 곳에 자
리잡고 있었고 사방에 야산이 둘러 쌓여서 우너할한 유통의 흐름을 방해
하고 있었던 것이다. 새 수원읍의 입지조건은 바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한
열려진 길들이 시원하게 이어지는 조건을 충족하고 있었다. 팔달산 아래
새 읍치는 서쪽에 팔달산을 주산으로 하면서 남북으로는 지형이 평탄하게
열리고 광교천에서 흘러들어오는 개천이 역시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동편
에는 낮으막한 경사지가 있는 곳이다. 따라서 이곳은 전통적인 도시 입지
관에서 말하는 풍수지리상의 명당터도 아니고 방어상의 요충지 모습을 갖
춘 지세도 아니다. 그러나 북으로 서울을 향하여 비교적 도로가 시원하게
열려있고 남으로도 소위 삼남으로 이어지는 도로망이 쉽게 펼쳐지는 말하
자면 교퉁의 요충에 걸맞는 지세인 것이다. 구 수원읍이 전통적인 산으로
둘러쌓인 폐쇄적인 읍치의 형세에 걸맞는데 비하여 새로 이전한 곳은 개
방적이고 열려진 지형이라고 비교할 수 있가. 시대의 흐름에 맞게 폐쇄적
이고 전통적인 도시를 버리고 개방적이고 새로운 도시를 탄생시킨 것이
다.
신도시의 건설.
새로운 장소로 이전하게 된 수원읍을 새 장소에 옮겨지면서 과거의 수원
읍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큰 규모로 변모되었다. 특히 신읍의 관
아는 행궁이 들어서면서 일반 읍치와는 격을 달리하는 튼 건물군이 조성
되었다. 수원부가 제대로 모습을 갖추고 3년이 지난 1793년(정조17),왕은
수원부의 명칭을 화성으로 고치고 그 장관인 유수의 관직을 정2품으로 정
하였다. 따라서 수원부는 광주부와 함께 서울 다음의 대 도시의 서열에
오르게 된 것이다. 또한 현륭원의 조성과 관련하여 부수적으로 벌어진 공
역중에 과천행궁의 개축과 용주사 창건이 있다. 과천행궁은 무덤을 옮길
때 관을 실은 가마가 잠시 머무르는 주정소가 되고 또 뒤에 원이 완성되
고 나서 왕이 원에 참배하러 가는 도중에 쉬는 장소가 되었다. 용주사는
현륭원을 수호하는 원찰로 새로 지어진 절이다.
이렇듯 신읍을 건설하고 나서는 이제 수원을 경제적으로 발전시켜 정말
로 번듯한 대 도회로 만들려는 구상이 구체화 되었다. 주로 유능한 상인
을 유치하고 이들이 자유롭게 상업활동을 펼칠 수 있도록 나라에서 지원
하자는 안이 제기되고 또 일반 주민에 대해서도 특별 조처로 통상적인 세
금을 면제해 주는 조처가 취해졌다. 그 밖에도 수원을 경제적으로 튼튼한
도시로 만들려는 지우너책들이 뒤를 이었다.
수원부에 경제적 부 뿐만아니라 이를 지킬수 있는 군사력을 갖추도록 해
야 했는데 이것이 장용외영의 설치이다. 수원부를 화성으로 개칭하면서
직제를 승격시키면서 화성에도 장용영을 두어 외영으로 하였다. 이렇게
하여 수원은 조선 제2의 도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막강한 국왕의 친위
부대가 설치되고 각종 경제적 특혜를 주어 수원은 군사력과 경제력에서
서울을 빼고는 견줄 상대가 없는 대도시의 요건을 고루 갖추게 된 것이며
이것은 왕권강화 그 하나로 귀결될 수 있을 것이다. 막강한 군사력과 튼
튼한 경제력을 구비한 신흥도시를 배후에 둠으로써 구 세력들이 진을 치
고있는 서울을 견제하면서 왕의 지위와 권한을 키워 나가고자 한 것었다
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