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문학의 오늘》신인문학상 시 부문 당선작
수목장樹木葬 (외 5편)
안영선
꿈꾸는 후생後生이 나무 밑으로 스며들었지
푸석한 잔디가 밑동을 덮는 동안
단풍나무의 푸릇한 기억은
서서히 지워지고 있었어
그늘을 늘이던 모난 가지는 툭툭 잘려나갔어
오래 묵은 옹이는 환부의 딱지처럼 단단해졌지
뿌리 깊은 생장점은
번식의 촉수처럼 유골의 온기를 쫓고,
촉촉하던 물관은 모세혈관을 만들겠지
나이테는 표찰에 적힌 나이를 헤아렸어
나무의 눈이 동물성으로 반짝이기 시작했지
수십 수백의 영혼이 수군거리는 저곳,
한 때는 물길과 바람이 관장하는 초식의 영토였어
뿌리와 가지와 그늘로 영역을 표시하던 수목,
유골의 따뜻한 체온은
나무의 이면에서 부활을 꿈꿨지
나무는 죽음의 영역을 넓혔고
유골에 덮인 나무는 공중에 붉은 표식을 남겼지.
갯벌
달은 수음手淫 중이다
달빛 속에서 바다가 출렁거린다 달이 바다의 물기를 빨아드리자 축축하게 감춰둔 갯벌이 열린다 여자 몇 질퍽한 갯벌 위로 다리 하나를 내놓고 휘젓는다 투명한 무게에 눌려 잠잠하던 생이 꿈틀거린다 널배 위 출산의 기억을 잃은 덩치 큰 자궁이 하나씩 놓여 있다 여자의 낡은 자궁이 지나간 자리마다 질퍽한 새 항로가 새겨졌다 자궁을 깨끗이 비워낸 여자의 손 몇이 꿈틀거리는 생식기처럼 갯벌을 더듬는다 여자의 섬세한 촉수에 출렁이는 갯벌이 황홀경에 젖는다 갯벌은 생의 비애를 맛보는 것들과 더러는 더 깊이 숨는 것들로 분주하다 젊은 날 여자는 몸에서 어린 영혼을 분리해 낸 적이 있었다 하나를 덜어내면 다른 하나가 생길 거라는 기대는 무너졌다 여자의 갯벌은 더 이상 축축하지 않았다 여자는 바다 속 갯벌의 빈 자궁을 상상한다 무심코 지나온 길은 다시 돌아가야 할 미궁의 길 회귀의 항로가 혼미하다
수분을 토해낸 달은 바다에 빠져 갯벌과 한창 교미 중이다.
새
햇살이 식은 몸을 힐끔
흘겨보고 지나간다
촉촉한 바람이 굳은 몸을 톡톡
건드려 본다
출입문 앞에서 그렇게 발견되었다
부드러운 살이 깃털 속에 흩어져 있고,
나는 아주 잠시 위로하며
날아가는 영혼의 주저흔*을 본다
벌써 세 구째 유리에 부딪힌
새의 영혼을 수습한다
죽은 새는 자작나무 뒤편으로 던져질 때
잠시 다시 날기도 했다
나는 손바닥에 잠시 머물던
죽음을 탁탁 턴다
새는 현생과 후생의 사이에서
얼마나 많은 날갯짓을 퍼덕였을까
새들 중에는 살기 위해 자신을 던지는 것들도 있다
푼푼이 모아 생명보험에 가입하는 새
갈아엎은 배추밭 고랑에 쓰러져 잠드는 새
낡은 크레인 위에서 툭 자신을 던지는 새
새는
살기 위해 날마다 몸을 던진다
———
* 주저흔躊躇痕 : 자해로 입은 손상
더덕북어
용대리 덕장에 겨울이 소복이 쌓인다
이 비릿한 어류의 본적은 러시아산 오호츠크 바다
바다를 떠난 순간 더러는 이름을 바꾸기도 국적을 바꾸기도 한다
피었다 시든 얼음 꽃에서 비릿한 이국 언어가 흘러내린다
굳고 단단한 몸이 바람과 햇살에 겨워 숨겨둔 바다를 쏟아낸다
속살이 푸석하게 부풀어 오른다
낡은 침대 위 아버지가 어류처럼 누워 있다
바람에 한껏 마른 낡은 몸
쥐어짜듯 온몸에서 물기 흘러내린다
흘러내린 물기에 바다를 담은 지도가 흥건하다
한 때 명태처럼 깊은 세상의 주인이었을 아버지,
단단한 고집과 견고한 헛기침을 놓자
물기 빠진 팔과 다리에서 푸석푸석 소리가 난다
속살이 푸석해질수록 아버지는 이름을 바꾸곤 했다
어머니는 황태를 더덕북어라 부른다
두드리지 않아도 푸석한 속살이 부드러워 좋다 한다
온갖 시름 내려놓아야 속살이 부드러워진다는데,
채이고 흔들리고 숨죽여 온 생
아침부터 황태 속살을 뜯던 어머니가
침대 위 아버지를 슬쩍 돌아본다
물기 빠진 아버지 낡은 배가 푸석하게 부풀어 오른다.
벽을 오르다
화단을 디딘 뿌리는 힘이 없다
검버섯을 피워대는 낡은 무게의 줄기
한 때는 뚝 튀어나왔을 힘줄과 근육은
하늘을 향하는 것들에게 다 내어주고
이제 빈손을 털듯 뒷짐을 쥐고 있다
나약한 뿌리가 만든 저 무한 생의 흔적
오를수록 싱싱해지는 푸릇한 생장점마다
그 싱싱함의 이면에 딱지처럼 달라붙은 상흔傷痕
욕창이 들어 진물이 묻어나는 줄기 하나
지상에 주소를 둔 잎이 벽을 타고 오른다
지붕 끝에서 잠시 주춤거리는 흔들림
수묵水墨으로 다가서는 어둠의 저편에서
저녁놀에 물든 잎은 바람을 따라다니고
물질하던 낡은 뿌리는 휘청대며 자리를 잡는다
먼저 오른 잎은 정상에 깃발을 꽂듯 붉게 물드는데
허공에서 만나는 정점은 저런 것일까
등 굽은 가지가 그림자를 넓히며 지상을 향하듯
시작과 마침은 늘 그 자리에 있다
깃발이 바람의 끝자락을 쥐고 흔든다
정상은 휘청대는 것들이 다시 발길을 내딛는 시작점
만년설은 저만을 위한 허공을 뒤춤에 감추고
더는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하루하루를 쫓는 생의 정점도 이러할까
모든 길은 뫼비우스의 띠 속으로 이어져
오르는 길은 내리는 길을 찾아 돌고 도는데
하산을 꿈꾸는 셰르파의 호흡이 저리 편한 것은
목숨의 뿌리를 지상에 둔 까닭
오름의 끝은 지상이다
만월滿月
낙과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농협의 체납 이자도 많아졌다 대형 마트의 낙과 할인 판매는 바자회 혹은 선심성 자선 행사처럼 화려했다 그들은 또 다른 이윤 만들기에 바빴고 나무 상자 채 가득 쌓아놓은 낙과 옆에는 열대 과일이 엠보싱 용기에 가지런히 담겨 있다 과일 좌판을 따라 현수막이 걸렸다 현수막에 그려놓은 홍옥이 과수원 김 씨의 얼굴처럼 붉었다
과수원 옆 비탈에 쑥부쟁이가 피기 시작했다 트랙터가 출하를 앞둔 질퍽한 배추밭을 갈아엎는다 녹아내린 배춧잎의 알싸한 군내가 최 노인 댁 무밭으로 옮겨가는 트랙터 바퀴에서 출렁거린다 트랙터 뒤를 쫓는 최 노인의 걸음이 저녁노을처럼 붉었다.
봉제선 위로 만월이 고개를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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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진정성 있는 삶을 담아내고 싶습니다.”
더위에 지친 오후, 낯선 전화에 넋이 나갔습니다. 전화 한 통이 이토록 사람의 마음을 흔들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습니다. 순간 텅 빈 하늘을 잠시나마 훨훨 날아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내 어깨 위에서 무거운 멍에가 온몸을 짓누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詩의 무게이겠지요?
늘 멀게만 느껴졌던 시의 길. 때로는 그 끈을 슬쩍 놓기도 했었고, 다른 길을 찾아 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유년의 꿈을 접지 않은 것이 새로운 세상을 열었습니다. 버거운 시의 무게가 즐거운 일상 속에서 공존 공생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언제나 부족한 제게 시안을 열어주신 김윤배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힘없이 돌아설 때마다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김종경, 박후기 시인, 등단의 꿈을 이루도록 묵묵히 기다려준 용인문학회의 사랑하는 문우들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끝으로 부족한 작품을 끝까지 읽어주시고 문단의 길을 펼쳐 주신 유성호, 이경철 심사위원님과 귀한 지면을 열어주신 ‘문학의 오늘’에도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진정성 있는 삶을 담아낼 수 있는 시를 쓰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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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영선 / 경기도 이천 출생. 국민대학교 국문학과와 아주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 2011년 교원문학상 시 부문 가작. 2013년 공무원문예대전 시조 부문 은상. 저서 『살아있는 문학여행 답사기(2008. 마로니에북스)』. 현재 용인 상하중학교 국어교사로 재직.
[심사평]
계간 『문학의 오늘』 신인상 공모 시 부문에는 모두 178명의 신인 지망생들이 응모작을 보내 왔다. 문단 내외에서 가지는 이러한 커다란 관심은 계간 『문학의 오늘』이 가지는 매체적 위상을 알려주는 의미 있는 지표라고 생각한다. 첫 신인상 모집에 이렇게 많이 투고해 주신 모든 분께 깊이 감사드린다. 투고된 작품들을 거듭 읽으면서 심사위원들은 개성적 어법과 향상 그리고 주제 의식에서 남다른 성취를 보인 시편들에 깊이 주목하였고, 더불어 작품의 완결성과 주제의 진정성을 주요한 기준으로 삼아 안영선 씨의 작품들을 대상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안영선 씨의 작품들은 감각의 구체성과 진정성이 남다른 밀도와 언어를 동반하며 펼쳐진 가편들이었다. 가령 「수목장」의 경우, 후생의 꿈과 지상의 기억이 나무를 둘러싸고 결속하면서 펼쳐내는 표현이 매우 구체적인 상상력의 그물을 보여주었다고 판단하였다. 「갯벌」의 경우에는 생태적 사유와 인생론적 고백을 선명한 바다 심상으로 구체화하였고, 「더덕북어」나 「새」 「벽을 오르다」 「만월」 등에서도 삶의 신산함과 자연 사물들이 겪어내는 시간들에 대한 치밀하고도 개성적인 관찰과 유비를 보여주었다고 판단된다. 안영선 씨의 강점은 지나온 시간의 진정성을 일방적인 회감의 시법에 싣지 않고, 사물의 구체성과 감각의 다층성으로 우회하고 간접화하는 형상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더불어 심사위원들은 배귀선 씨의 작품들을 우수상으로 뽑기로 합의하였다. 대상에 오르지는 않았으나 개성적인 사유와 감각이 우수상으로서 가지는 격려의 몫을 받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하였다. 특별히 「종이 십자가」에 나타난 공동체적 감각과 시간의 흐름에 대한 사유는 만만찮은 시간 동안의 관찰과 적실한 유비, 그리고 낱낱 어휘의 적절성을 두루 보여주었다. 그리고 다른 작품에서도 방언을 비롯한 말의 구체적 활용 가능성에 대한 역량 등을 충분히 보여주었다고 생각된다.
이분들의 시편은 저마다 고유한 경험을 자산으로 삼으면서, 오랜 습작의 시간을 깊숙이 품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특정 유행 담론을 추구하지 않고 스스로의 경험적 구체성에 정성을 들이고 있어 매우 긍정적으로 다가왔다. 거듭 대상과 우수상 결정을 축하드리며, 신인다운 개성과 시인으로서의 지속 가능성을 보여준 안영선 씨와 배귀선 씨의 시편이 더욱 깊은 진경으로 나아가기를 크게 기대해 마지 않는다.
심사위원 : 이경철(시인, 문학평론가), 유성호(문학평론가, 대표 집필)
—《문학의 오늘》2013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