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수지 물고기의 마지막 겨울
유기섭
일월 저수지가 하얗게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포크레인이 깊숙이 들어가 쉼 없이 흙을 퍼 올린다. 공원 조성사업으로 저수지 바닥을 파내어 수심을 더 깊게 하고 수변 산책로를 만들 것이라고 한다. 낚시꾼들이 사랑방처럼 찾아들던 둑방에 지금은 싸늘한 바람만 지나간다. 간간이 산책 나온 사람들의 발걸음만이 죽어 가는 물고기들 앞에 머뭇거릴 뿐. 작업기사는 표정이 없다. 웅크린 어깨로 추워진 날씨만큼이나 운전대를 세게 잡는다. 주어진 임무 수행에 충실한 그를 아무도 탓하진 않는다. 물 빠진 바닥에서 흙과 생명체가 뒤엉켜 대책 없는 몸부림으로 나뒹군다. 물기가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웅덩이는 살아남기 위한 물고기들의 전쟁터로 변했다. 처절한 생존경쟁의 현장이다. 그나마 힘이 센 물고기들은 물 가운데를 차지할 수 있지만 작은 물고기는 옆으로 밀려서 진흙더미 위로 튕겨나간다. 결국은 모두 다 얼마 안 가서 온몸이 마르고 굳어질 것이다. 한 무리의 고기들은 이미 허연 배를 위로 드러낸 채 움직이지 않는다. 마지막 몸부림의 주검이 처절하다. 더러는 가느다란 물줄기를 따라 위쪽으로 올라가 보지만 어느새 하늘에는 황새들이 날아들고 바닥에 이미 내려앉은 해오라기는 그들을 노려보고 있다. 물고기의 울부짖음이 귓가를 스친다. 하늘을 보아도 땅을 보아도 슬픈 그림자가 밀려옴을 예감한 듯. 인간에 대한 야속한 속내를 토로하는 함성이 뽈록 뽈록 진흙 속에서 꽈리로 솟는다. 사람들은 우리들을 상대로 낚싯대를 던져 놓고 무료함을 달래며 한때를 즐기더니 위기에 처한 지금의 처지를 모른 척한다고. 예고 없이 찾아온 불행, 인간에게 저와 유사한 불행이 닥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어느 날 무서운 갈퀴 손이 지구를 뒤집는다면, 마지막 한 방울 생명의 물줄기까지 앗아간다면 무엇으로 목숨을 지탱할까. 지금 지구를 옥죄는 현상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지구의 온난화로 가뭄이 계속되고 숲이 점점 소멸된다고 한다. 숲은 맑은 물과 공기를 공급해주는 지구의 허파 역할을 한다는데 참으로 큰 위협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빙하가 녹아서 해수면이 높아지면 바닷가의 낮은 지역이 물에 잠기게 되어 항구 도시와 바닷가의 경작지가 사라지게 된다고 한다. 생각만 하여도 무서운 일이다. 이러한 자연 재해의 원인 중에는 무분별한 개발로 인한 자연 파괴가 큰 몫을 차지한다고 하니 인간이 스스로 자멸의 길을 자처하는 것은 아닌지. 파헤쳐 놓은 흙더미 사이 깊은 수렁에 숨어들었던 큰 물고기들이 장화발로 들어온 두 남자의 잰 손놀림에 잡혀 어망 속에 들어간다. 이 후의 운명은 알려고 하지 말아라. 바람 앞의 등불이 이미 바람에게 먹혀지고 있는 것을. 주안상 위에서 생을 접어야 하는 순간이 온다해도 지금 너의 운명과 무엇이 다르겠느냐마는 바라보는 내 눈이 더 시리다. 어렸을 때 논 위에 있는 못에 새끼 고기들을 놓아주고 빨리 커서 성어가 되기를 바랐던 기억이 난다. 그 못은 할아버지가 계곡 물을 모아서 가뭄에 대비하기 위하여 축조한 못이었다. 틈만 나면 못 가에 소를 놓아 풀을 먹이며 물고기가 빨리 자라기를 바라곤 했다. 그런데 어느 해 홍수로 인하여 못 둑이 터져서 물이 모두 빠지고 가두어 놓았던 고기들도 떠내려갔다. 그들은 자유를 찾았다고 좋아했겠지만 한동안 걱정이 놓이지 않았다. 사람의 보호막을 떠난 그들이 주변 환경에 잘 적응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그후 그들의 생사를 모른 채 기억에서 차츰 멀어져 갔는데, 오늘 또다시 마른 절벽 앞에서 기약 없는 생의 몸부림을 본다. 저수지 물고기의 마지막 겨울, '폼페이 최후의 날'은 아닐지라도 큰 재앙이다. 타락한 영혼으로 분류된 것도 아닌데 왜 저들이 저렇게 몰락해야 할까. 굴삭기의 삽질 속에 한 더미의 물고기 시체가 매달려 올라와 잔인하게 흙 두덩이 살얼음 속에 내동댕이쳐진다. 여기 저기 널부러진 시체들이 벌렁 누워 있다. 평온하던 보금자리에서 한마디 항변도 못한 채 으스러지는 처참한 광경이 돌아서는 발끝에 자꾸만 매달린다. 걸음 걸음 마다 아픔으로 밟힌다. 사람들의 편의를 위한 개발의 이면에는 많은 생명체들이 제물로 사라지고 있다. 이곳에서 그치는 비극이길 소원해 보지만 이 순간 또 지구촌 어느 곳에서 더 큰 참극이 벌어지고 있을지 모른다. 저수지 공사를 시작하기 전에 그들을 다른 곳으로 옮겨놓았으면 좋았을 텐데. 이삿짐 센터의 대형 트럭에 가득 실려 이웃 넓은 왕송 저수지로 이사하는 모습을 그려본다. 춤을 추겠지. 비늘이 허물어지도록 절을 하겠지. 낯선 둥지에서 살아갈 계획을 근사하게 세우겠지. 새로운 살림도 장만하자고 의논하겠지. 행복은 늘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라고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하겠지. 연약한 아기 물고기를 보듬어 안고 씩씩한 물고기는 좁은 공간에서나마 유영하며 콧노래를 부르겠지. 이삿짐 자동차의 굉음 속에서 저들이 줄지어 부르는 환생의 축복 노래를 듣고 싶다. 비스듬히 구름에 기대선 태양이 날 보고 배시시 웃는다. 그래, 그게 불가능하다면 한번쯤 예고령이라도 주어 대피하도록 할 순 없었을까. 아래로 내려가는 물길을 따라 이곳을 빨리 떠나라고. 머지않아 봄이 오면 저수지 주변에 자연공원이 조성되어 사람들의 산책로가 생기고 저수지에는 다시 예전처럼 물이 한가득 채워질 것이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또 다른 물고기 가족이 이곳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여 살 것이다. 넘실거리는 물결은 사랑으로 품어 안겠지. 하지만 보금자리를 되돌려달라던 예전의 새끼 물고기의 가녀린 외침소리를 어떻게 잠재울런지.
저수지 물고기의 마지막 겨울- 여울수필 2005년 봄호. 수필문학 추천작가회 대표선집 15집(2005년). |
첫댓글 물고기들이 불쌍합니다. ㅜㅜ
저수지, 그 겨울의 서글픈 마지막...말은 못하지만 많이도 울었을 물고기들...지금은 어디에 있을지...우리네 생도 그러하겠지요. 절감하며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