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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일주8-홍성-선각자와 구국항쟁의 기개 2
만해 한용운/ 홍주성 / 조양문 / 홍주아문 / 안회당 / 여하정
만해 한용운 선사 생가
만해 한용운 선사는 3‧1만세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며, 독립선언서 공약3장을 작성했고, 영원한 민족혼을 일깨우는 시 ‘님의 침묵’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3·1만세운동 때는 독립선언서에 서명하면서 적극적인 독립운동 한 죄목으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기도 했다. 나중에 강원도 고성 건봉사 편에서도 설명하겠지만, 만해 선사는 백담사 본찰인 이 건봉사 조실에 계시면서 봉명학원을 운영하며 수많은 민족 동량들을 교육시키기도 했다.
사진045 만해 한용운 선사 생가 ⓒ김호운
이곳에서 태어난 만해 선사는 서당에서 한학을 배워 14살에 숙사(塾師)로 향리에서 후학을 지도하다가 뜻한 바 있어 1896년에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들어갔다. 1905년에 백담사(百潭寺) 연곡(連谷)스님에게서 계를 받았고, 건봉사 만화(萬化) 스님에게서 법을 받아 수행하면서 <불교대전>을 비롯한 많은 불교 관련 책들을 저술했다. 또한 불교계 혁신을 위한 ‘불교유신론’을 발표하면서 불교청년회를 이끄는 등, 불교계의 지도자로서 많은 업적을 쌓았다. 승려의 신분으로 일본에 가서 일본 불교 조동종 종립대학에서 수강하면서 일본의 신문명을 시찰하고 돌아와 측량학원을 세우고, 종합 사상지 월간 <유심(唯心)>을 발행하는 등 민족 자각을 위한 운동도 전개했다.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만해 선사는 만주로 가서 독립군 군관학교를 방문하며 독립운동을 격려하고, 세계만유(世界漫遊)를 하기 위해 만주와 시베리아 등지를 돌아오기도 하는 등 급변하는 당시 세계정세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1926년에 발표한 시집 <님의 침묵(沈默)>은 한국문학의 발전뿐만 아니라, 민족의 혼을 일깨우는 저항문학의 불씨를 당기는 첫발이었다. 이듬해에 신간회(新幹會)에 가입하여 중앙집행위원이 되어 경성지회장(京城支會長)을 맡아 민족지도자로서 활동했다. 한편 장편소설 <흑풍(黑風)>을 조선일보에 연재하는 등 문학인으로서의 활동도 활발히 하였다.
사진046-1 만해 한용운 선사 생가의 ‘심우재’ ⓒ김호운
1937년, 제자 최범술 스님 등이 진주 다솔사(뒤에 이곳도 여행함)를 중심으로 일으킨 불교 항일단체 만당사건(卍黨事件)의 배후자로 검거되기도 했으며, 그 후에도 불교의 혁신과 작품 활동을 계속하다가 안타깝게도 광복 전 해에 서울 성북동 심우장에서 세상을 떠났다.
만해 한용운 선사의 생가는 초가로 아담하게 복원되어 있었고, ‘尋牛齋(심우재)’란 당호가 걸려 있다. 초옥은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로, 방 두 개에 부엌과 툇마루가 달렸고, 옆으로 1칸을 달아내어 광과 헛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싸리나무 울타리를 두른 만해 선사의 초옥은 청빈한 당시 생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 작은 누옥에서 민족의 근대사에 큰 획을 그은 사상을 싹틔웠을 거라 생각하니 저절로 고개가 숙여져 경건하게 합장 인사를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사진046-2 홍성읍내에 있는 만해 한용운 선사 동상 ⓒ김호운
생가 터에는 생가 초옥 외에 기념관과 선사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 세워져 있고, 매년 여기에서 제사를 올리며 ‘만해문학제’를 열어 선사의 혼을 기리고 있다.
이곳에 방문할 때는 만해 시집 한 권을 손에 들고, 시 한 구절 외면서 조용히 그 시대에 겪었을 우리 민족의 수난사를 한번쯤 가슴에 새기고 돌아오면, 먼 길을 돌아 이곳까지 방문한 보람을 한층 더 크게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 만해 선사 생가를 나와 홍주 읍내로 들어온다. 홍주성의 조양문, 홍주아문, 안회당, 여하정을 보려면 일단 홍주군청으로 가면 된다.
홍주성 / 조양문 / 홍주아문 / 안회당 / 여하정
홍성을 가리켜 ‘인물이 나는 고장’이라고 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고장에서는 최영, 성삼문, 한용운, 김좌진 등 우리 민족 역사에 획을 그은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그만큼 이 지역민들의 선구자적 자각 정신이 남다름을 보여주고 있다.
그 실체로 일본의 강점 야욕이 시작되던 한말에 전국적으로 불같이 일어났던 의병운동 가운데 이 지역에서 불붙은 ‘홍주의병운동’을 들 수 있다. 홍주(홍성의 옛 이름)의 의병운동은 크게 1, 2차로 나뉘는데, 제1차는 1894∼1896년 김복한과 이설이 주동했으며, 제2차는 1905∼1910년 유생 민종식 선생이 주도한 의병운동이다.
대부분 의병운동이 유생(儒生)이 주도하고 자발적으로 동참한 민군들로 투쟁군을 형성했는데 비해, 이 홍주의병은 관을 중심으로 모병(募兵)을 한 조직적 저항 운동이었다는 데서 홍주의병운동이 남달리 주목받는다.
의병을 일으킨 의병군이 홍주부를 습격 점령함으로써 당시 관찰사였던 이승우가 의병에 합류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의병군은 홍주부 내에 창의소를 설치하고 김복한 장군을 수석으로 추대하면서 홍주부 관할 22개 군과 홍주군내 27개 면에 통문을 띄우고, 각 고을 대표들이 가가호호 방문하여 노약자와 독자를 제외한 ‘한 집에 한 사람(一家一兵)’ 입대를 요청했다. 주민들은 이를 피하지 않고 죽기를 맹세하고 의병에 자진 참여하였다.
한편 관찰사 이승우는 ‘숭정(崇禎)’이란 연호를 사용하여 ‘홍주 목사 겸 창의대장’이란 이름으로 절제사에게 명령을 내려 당일로 군사를 모집하여 오도록 하였고, 각국 공사관에 보낼 장계와 격문을 만들었다. 말하자면, 홍주의병운동은 국가 차원에서 침략자 일본군에 정식 선전포고를 한, 국가 간 전쟁 성격을 띤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진047 홍주성 동헌의 정문이었던 ‘홍주아문’ ⓒ김호운
이렇게 하여 홍주의병은 관이 중심이 된 조직적 저항군으로 일본군에 맞섰는데, 불행하게도 창의소를 차린 지 하루 만에 관찰사 이승우가 배신하는 바람에 의거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의병들이 관아를 점령하자 생명에 위험을 느껴 마지못해 일시 참여하였다가, 실패를 두려워한 나머지 배신한 것이었다.
홍주성은 바로 이런 역사적 의미를 안고 있는 곳이다.
홍성군청 정문 앞에 도착하면 우선 한번 놀라게 된다. 정문 옆에 ‘홍주아문(洪州衙門)’이 서 있고, 그 아문 안쪽에 현대식 군청 건물과 주차장이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지금의 홍주 군청은 옛 홍주 성 안 동헌(東軒) 자리에 서 있다. 보통 이런 문화유적은 따로 두어 보존하는데, 이 홍성에서는 군청이 동헌을 이어받아 그 자리에서 행정을 보고 있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모습이 이 홍성이 유일하지 않나 싶다.
사진048 홍주 관찰사가 집무를 보던 동헌, 안회당 ⓒ김호운
당연히 관찰사가 집무를 보던 안회당(安懷堂)과 관리와 선비들이 시가를 읊던 관아 안의 정자 여하정(余何亭)도 군청 안에 있다. 차를 군청 안 주차장에 세우고, 건물 뒤로 간다.
홍주성은 당시 길이가 1,772m에 달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약 800m 정도 남아 있다. 홍성군청 서쪽을 경계하는 담처럼 성벽이 보존되어 있고, 성의 동문인 조양문(朝陽門)은 군청에서 나와 큰길을 따라 조금 가면 나온다. 서울의 숭례문, 흥인지문처럼 조양문을 중심으로 네거리 차들이 돌아서 운행하는 로터리 중심에 서 있다.
사진049 동헌 안에 있는 연못 위에 세워진 여하정 ⓒ김호운
이 유물들이 홍주성으로 현재 남아 있는 유적들이다. 홍주아문을 비롯하여 안회당, 조양문 현판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친필로 내린 것이라 한다. 당시에는 서문인 경의문과 북문 망화문이 있었으나 일본군에 의해 서문과 북문은 파괴되었다.
홍주아문은 홍주 목사가 행정을 보던 안회당의 외삼문인데, 우리나라 아문 가운데서 가장 크고 특이한 형태다. 안회당은 목사가 행정을 보던 동헌으로 22칸 목조 기와집이다. ‘안회’라는 이름은 <논어>에서 ‘노인을 편안히 모시고, 벗을 믿음으로 사귀고, 연소자를 사랑한다’는 말에서 따 왔다고 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안회당의 주인이었던 이승우는 ‘벗을 믿음으로’ 사귀지 않고 배신의 길을 갔다.
여하정은 역대 홍주 목사들이 청유(淸遊)를 즐기던 장소로, 유유히 흐르는 인공 연못에 섬을 만들고 세운 정자다. 제 철에 찾아오면 물위에 떠 있는 연꽃과 물속의 금붕어, 그리고 흐드러진 아름드리 고목이 연출하는 고색창연한 풍광을 볼 수 있다. 이 정자는 관찰사 이승우가 지었으며, 육각 기둥에는 한시(漢詩)를 적은 작은 주련(柱聯)들이 붙어 있다.
사진050 홍주성 정문인 조양문. 시내 로터리에 서 있고, 주위로 차량들이 다니고 있다. ⓒ김호운
☞ 군청에 있는 안회당, 여하정, 홍주아문을 보고 나와 조양문을 본 뒤, 조양문을 지나 앞으로 죽 뻗은 한길을 따라 직진(네거리를 두 번인가 세 번 지난다)하면 5거리가 나온다. 11시 방향에 백야 김좌진 장군의 큰 동상이 서 있다. 여기에서 왼쪽 9시 방향으로 좌회전하면 홍주 의사총으로 가는 길이다. 5거리라 자칫 11방향 길로 좌회전할 우려가 있으니, 반드시 9시 방향으로 난 길을 선택해야 한다. 가다가 보면 큰 도로가 지나가는 네거리를 만나고 앞쪽에 다리가 하나 나타난다. 바로 의사교인데, 이 다리를 건너자마자 좌회전하면 바로 홍주의사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