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5년 을축년이다.
그해 7월 한강가를 사상 최대의 홍수가 휩쓸었다.
이 7월 초 경기 지역을 뒤덮은 장마 전선에 이어 태풍이 들이닥쳤다.
서울 한강 일원은 최악의 홍수에 뒤덮이고 황해도 이남의 거의 모든 강이 범람했다.
이후 8월에는 청천강 압록강 일대에 집중 호우가 쏟아졌고 또 한 차례 태풍이 영호남 지역을 휩쓸고 지나갔다.
거의 전국이 물바다가 되어버린다. 을축년 대홍수이다.
이때 전국을 폭격한 집중호우의 강수량은 700-970밀리미터.
피해액은 조선 총독부 1년 예산의 58퍼센트에 해당하는 1억 300만원에 달했다.
사망자만 647명이었고 파손되고 유실된 집은 수만 채, 이재민도 수십 만 명이었다.
그 중에서도 괴멸적 타격을 입은 것은 식민지 조선의 수도 경성이었다.

당시 대홍수로 한강물이 넘처난 범람지역이 지도가 잘 나타났다.

을축년(1925년) 대홍수 당시 파괴된 한강철교의 모습이다.
경성의 명물이었던 한강인도교가 떠내려 갔다. 용산에 있던 철도청의 1층까지 물이 들어찼다.
남대문까지 홍수의 끝자락이 닿았으니 그 위세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만 그런 게 아니다. 한강 서쪽의 절경으로 우뚝 솟았던 선유봉은 홍수 이후 납작해졌다.
홍수에 혼이 난 일제가 그 선유봉을 폭파시켜 그 골재로 한강둑을 쌓는 데에 이용했다.
그래서 오늘날의 선유도는 양화대교 아래 야트막한 섬으로 변한다.
을축년 대홍수로 인해 잠실은 원래 강북이었다가 강남으로 변했다.
원래 왕실 여인들이 양잠 시범을 보이던 그 ‘잠실’은 아마도 오늘날의 한강 밑바닥에 잠들어 있을 것이다.
그 잠실은 강북에 있었지만 홍수 이후 강의 흐름이 바뀌면서 강남이 돼 버린 것이다.
오늘날의 서래 마을은 반포에서 수재를 당한 사람들이 개척한 것이 마을의 시초가 됐다.
조선 시대 이래 번잡한 장터였던 송파 나루는 홍수의 직격탄을 맞은 후 점차 쇠퇴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