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정선이 공암나루 일대의 절경을 그린 소요정(逍遙亭)이다.
물위에 두 개 바위 광주바위가 오른 쪽에 떠 있고 오른 쪽에 탑산 벼랑 공암(孔巖)이 보인다.
그 광주바위와 벼랑 사이 파강(巴江)에 배가 떠 있다.
배에는 강태공 두 사람이 앉아 커다란 견지채를 들고 낚시줄을 강물에 드리우고 있다.
두 개의 바위 광주바위와 공암만을 그려놓고 그 그림의 제목을 소요정(逍遙亭)이라고 했다.
그림 어디에도 정자 소요정(逍遙亭)은 찾아 볼 수 없는데도 말이다.
소요정(逍遙亭)은 중종반정 때 공신 심정(沈貞 1471-1531)의 아호이다.
1518년 형조판서 물망에 올랐을 때 신진사류 조광조(1482-1519)의 반대로 임명받지 못하자 물러나
이곳 탑산 위에 정자 소요정을 짓고 울분을 달랬다고 한다.
심정의 손자는 소요정이 한강 이남의 강가 누정 중에서 가장 뛰어난 승경이라고 자랑했다.
심정은 소요정을 짓고 무척 흡족했던 모양이다. 문장이 뛰어난 선비들에게 글을 청해 현판으로 걸었다.
눌재(訥齋) 박상(朴祥)이, “반허리진 산들은 술상을 밀치고 있고, 가을 골짜기는 술잔을 물리치고 있네
(半山排案俎 秋壑閣樽盂)”라고 써주었더니 심정은 자신을 놀리는 문장임을 알아채고 현판에서 뽑아버렸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무슨 까닭인지 정선은 그림 <소요정>에 누정을 생략하고 강물에 떠 있는 세 개의 웅장한 바위 덩어리만 그렸다.
정선이 이 장소를 그렸을 당시에는 벌써 소요정이 허물어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심정은 훈구파의 대신으로 1519년 남곤(南袞) 홍경주와 모의하여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와 그 신진사류들을 숙청시킨다.
이때 한 궁녀가 나뭇잎에 꿀을 말라 쓴 '주초지왕(走肖之王)' '조씨전국(趙氏專國)' 말을 퍼트려 일을 확산시켰다.
심정은 기묘사화로 권력전면에 나서 화려한 관직생활을 하였다.
1527년 이른바 ‘작서(灼鼠)의 변’으로 심정은 경빈과 함께 몰락한다.
누군가 세자의 생일에 맞춰 불에 지진 쥐의 시체를 나무에 매달아 놓은 사건 '작서의 변'이다.
'작서의 변'은 불태운 쥐를 동궁에 매달아 세자를 죽이기 위한 동궁(東宮) 저주사건이다.
경빈 박씨에게 혐의가 돌아가 경빈 박씨와 그의 아들 복성군은 서인으로 폐하여진 뒤 사사었다.
심정 또한 경빈박 씨와 내통한 죄로 평안도로 유배갔다.
그는 유배지인 평안도 강서에서 기묘삼간(己卯三奸)으로 지목당해 사약을 받아 죽고 말았다.
뒷날 다른 이들이 명예를 회복하였음에도 심정만은 소인배로 간주당해 비아냥의 대상이었다.
살았을 때는 꾀주머니라고 하여 지낭(智囊)이란 별명으로 불리웠다.
심정의 인물 됨을 비야낭하는 말로 '곤쟁이 젓'이 전해온다.
남곤(南袞)의 '곤'과 심정(沈貞)의 '정'을 합친 '곤정'에서 비롯된 말이라는 설이다
남곤과 심정이 일으킨 기묘사화로 온통 집안이 쑥밭이 된 자손들은 물론 조광조에게 기대를 걸었던
백성들의 불만과 실망감 적개심을 담아내는 '곤쟁이 젓'을 낳게 되지 않았나 한다.
원래 곤쟁이는 새우의 일종이다.서해안 쪽에서 잡히는 이 새우로 담근 젖을 그쪽 사람들은 '곤쟁이젓'이라고 한다.
'곤쟁이 젓'은 해안에서 나는 자그만 새우젓에 빗대어 남곤과 심정을 '젓 담아 버릴 사람'으로 여긴 후세인의
마음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