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악소리에 막이 열리면 오른편에서 신라 경순왕 김부는 상대등 유렴 시랑 김비 낭중 한공달. 사빈경 이유. 급찬 김곤 등 신라 문무백관의 응위를 받아 엄숙하게 등장하고 적의한 자리를 차지한다. 다시 풍악소리 새로워지자 왼편에서 상보 선필의 안내로 고려 태조 왕건 나타난다. 신라 백관 왼편으로 나아가 맞이하여 들인다. 왕건의 앞에는 나팔, 소라, 기치, 창검 등을 든 고려 호위군이 서고, 왕건의 뒤에는 낙랑공주, 그 다음 시중 왕철 등 고려 백관이 따랐다. 선필은 경순왕 앞에 나아가 노회한 목소리로 아뢴다.
[선필] 폐하께서 아로이오. 일찌기 고려 대왕께오서 폐하께 국서를 올리신바 있거니와 금번에 불초의 신을 앞세우시고 폐하께 문안을 여쭈어 머나먼 북방 나라 고려에서 거둥하시었나이다. 신라왕 김부는 옥좌에서 일어나 친히 층계를 내려오시어 왕건을 맞으려 한다.
[김부] 대왕이 짐을 위하와 일찌기 후백제 견훤을 물리치시고 이제 또 짐의 나라를 몸소 찾아 주시니 그 감사로운 은혜 이를 바 없소.
[왕건] 망극하옵신 말씀이로소이다.
[김부] 대왕 오르오.
두 왕은 음양하여 층계를 올라 옥좌에 앉는다. 양국의 신은 좌우에 갈라 섰다.
[김부] 신라 제신은 대왕을 뵈음이 어떨꼬?
[왕건] 아니오. 과인이 신라의 높은 덕을 사모한지 이미 오래어늘 신라 백관이 먼저 절함은 당치 못하신 분부인 줄로 아뢰이오. (고려의 신을 향하여) 경들이 먼저 폐하를 배알하라.
상보 선필 출발하여 절한다.
[선필] 금번에 고려 대왕을 모시고 온 고려의 신 상보 선필이오. (전하고 물러선다)
[왕철] 고려 시중 왕 철이오. (뒤로 물러선다)
[왕건] 공주도 폐하를 뵈오라.
낙랑공주, 나와 절하고 물러선다.
[김부] 다음은 신라의 제신 고려왕을 뵈라.
유렴, 나아가 절한다.
[유렴] 신라 상대등 유렴이오. (물러선다)
급찬 김 곤, 나와 절한다.
[김곤] 신라 급찬 김곤이오. (물러난다)
시랑 김비, 나와 절한다.
[김비] 신라 시랑 김비요. (뒷걸음질쳐 물러선다) 사빈경 이 유, 나와 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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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 신라 사빈경 이 유요. (물러선다)
[함공달] (나와 절하며) 신라 낭중 한 공달이오. (물러선다)
[왕건] (신라 제신의 절이 끝나자 일어서서) 과인이 금번에 불고원근하고 귀국의 국왕을 뵈옴은 앞서 국서에도 아로인 바 있거니와 신라와 고려, 이두 나라가 서로 손을 집아 길이 화친함으로써 그 종사를 만세에 보존하기를 원함이오.
[김부] (끄덕이며) 그 뜻이 대왕의 뜻이자 짐의 뜻이오.
(장엄한 풍악소리 이 때 한층 높아진다, 일동, 정숙. 한동안) 자, 대왕 궐내로 드오.
김 부는 왕건과 팔을 끼고 궐내로 들어간다, 양국의 신하, 그 뒤에 따라 서서히 퇴장.
--- 암전---
서막의 직후. 낮. 한길에 면한 신라 궁전의 삼문 앞. 장군 위에 누각. 막이 열리면 신라의 신하들 성문 안에서 한길로 나온다. 손에는 각기 보자기에 싼 물건을 하나씩 들었다. 왕건에게서 받은 뇌물이다. 총중에는 뇌물을 받아 들기는 하였으나 매우 불안한 기색인 자도 있다. 그러나 소오 최 활과 조위 설 효 같은 자는 뇌물을 받게됨을 다행으로 생각하는 편이다.
[최활] (은근히) 설조위 이 무엇일꼬?
[설효] 한번 끌러 봄이 어떠리오?
[최활] (끌러 보고는) 오오, 고귀한 비단이 한 필!
[설효] 이 몸의 것은 무엇일꼬? (끌러 보고 역시 감격하여) 옥으로 만든 환도!
[최활] 진실로 진실로 귀한 선물이로다. 여보소 설 효, 우리끼리 말이지만 우리 이 신라에서는 전자 포석정 난리에 후백제 견훤한테 다아 빼앗기어 정말 이러한 물건은 지금 성상께 진상을 올리려 하여도 못구하여 낼 물건이오
[설효] (그렇다는 듯이) 헤헤헤--- 과시 고려왕은 왕중지왕이 더이다. 하그리 길지 않은 얼굴에 이마가 넓고 안광이 형형하야 위풍이 늠름하오신 품이 황송한 말씀이나 하품만 하옵시고 계오신 우리 상감마마와는 비길바가 아니었소.
[최활] 만사를 주장하시는 그 씩씩하신 품, 정말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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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스러웠소.
[설효] (이때 사람 오는 기척이 나자) 쉬! (하며 두 사람 시치미를 때고 각각 헤어지려 한다)
궁전 안에서 나타난 자는 태수 겸용이다. 겸용은 신라의 신이나 고려에 내통하는 자인 줄 알고 두 사람 안심한다.
[최활] 오오, 태수 겸용이로고!
[설효] 겸용은 무삼선물이더이까!
[겸용] 동궁마마 못 보셨소?
[최활] 예
[설효] 예
[겸용] 고려왕을 맞이하는 오늘과 같은 경사스러운 날 태자가 나타나시지 아니하시다니 될 뻔한 소리요?
[설효] 태자의 성미로서야 그 자리에 참석하시겠소? 고려 대왕을 이 땅에 맞아들임을 그처럼 반대하셨는데
[겸용] 에이 페! (아니꼽다는 듯이 침을 탁 뱉는다)
[최활] 헌데 태수, 이 어이한 일이오. 고려왕께선 이 몸의 성명을 알으시고 계시지 않더이
까? (그 몸은 소오 최활이 아니오?) 마치 백년 친지와 같이 이렇게 다정스럽게 불러 주시었다오. 상대등 마마나 시랑 시중에 성명쯤 알으시고 계오심은 그대도록 괴이한 일은 아니로되 어이하야 이 몸 같은 하관배의 성명까지---
[겸용] 덕이 높으신 어룬일사록 그런 것이라오. 이나라 상감 마마와는 다르시어.
[설효] 이 몸이 들으매 대왕께오서는 고려를 떠나실 제 이나라 만조백관의 이름을 낱낱이 적어 쥐고 오시었다 하더이다.
[최활] 정말?
[설효] 암 정말이다 뿐이오.
[최활] 무서우신 어룬이시로고.
[겸용] 시들은 푸성귀와 같이 김이 쭉 빠지고 맥이 턱 풀어진 이 천년 늙은 나라에도 그러하신 임금님이 들어오시매 단박에 온 궁중에 피가 돌고 맥이 뛰노는 것 같지 않소?
[최활] (감탄하여) 아아, 본국 고려 조정에는 얼마나 시원스러운 일이 많을꼬?
[겸용] (양인에게 다가서서 은근히) 어떻소? 다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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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왕을 모시고 싶지 않소?
[설효] 여보, 태수님! 그무삼 불충불의의 말씀이오?
[최활] 암, 큰일날 소리지! (라고 하면서도 남의 눈치만 슬그머니 엿본다)
[겸용] 아무리 그러한들 임자들이 급한 김곤이나 시랑 김 비와 같은 대접을 받겠소? 이 나라에서는 참뼈가 아니면 사람 축에 못 끼이는 법이오.
[최활] 그야 사람 행세를 할량이면 참뼈라야 하지.
[겸용] 하지만 고려에서는 그러하지 않다오 인물만 중할양이면 너 남즉할 것 없이 고관대작은 제 것이오. 장군 선필은 고려에 가 붙더니 단박에 상보란 다시없이 높은 벼슬을 얻어 하지 않었소.
[설효] 나도 고려왕의 인물만은 추앙하는 편이지마는 이 몸뚱어리마저 고려에다가 팔아 버릴 생각은 털끝만치도 없소.
[겸용] 충을 두려워함은 불충한 자의 할 일이오. 의를 따짐은 불의한 자의 할 일이라오.
[설효] 공연히 여기 있다가는 큰코다치겠군. (발끝을 돌린다.)
[겸용] 설효! 설효! (설효는 돌아보지도 않고 퇴장하여 버린다) 참 고지식한 사람이로고. 이 몸이 그대도록 뚱겨 주었으면 알아는 들었으련만---
[최활] 설 조위가 만일 저 길로 바로 상대등 마마나 태자께 가서 이 몸과 태수가 고려왕의 편임을 아뢰 바치기나 한다면---
[겸용] 헤헤헤--- 걱정마오. 내가 남의 허한 데를 찔러 놓지 않고야 이 몸의 본색을 보이겠소? 설효는 고지식한 척하여도 약고도 욕심 많은 사람이라오.
[최활] 그런데 태수, 고려왕께 이 늙은것의 이야기도 아뢰이었소?
[겸용] 임자는 어이하야 공없이 상을 바라오. 자공을 먼저 세우오.
[최활] 이 몸이 고려 편임을 하늘과 같이 맹세하였으면 그만이지. 어떻게 또공을?
[겸용] 고려를 위하야 또는 이 겸용을 위하야 그 칼날에 피라도 묻히겠소?
[최활] --- 뭐, 뭐요? (무서워 떨며 감히 대답하지 못한다)
[겸용] 자! 말씀하오.
[최활] 마, 만일 그공을 공으로 내세워만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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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겸용] 이 태수를 믿으로. 이 사람은 고려왕의 모사 상보 선필과는 오랜 지기요. 둘도 없는 그의 심복이라오.
[최활] 맹세하지요.
[겸용] 정말 피라도?
[최활] (떨리는 손으로 칼을 뽑아들며) 이 이렇소.
[겸용] 만일 그렇다면 (최활의 귀에다 대고 은밀히 귓속말을 한다)
[최활] (펄쩍뛰며) 동궁마마와 상대등을?
[겸용] (최활의 입을 막으며) 쉬! 이를터이면 그만한 뱃심을 가졌느냐 말이오?(안심시키려는 듯이 넌지시 웃어 보이며) 헤헤헤--- 만일 그러한 뱃심만 가진다면 고려의 상보도 그 몸의 것이오. 고려의 대광도 또한 그 몸의 것일 것을. 헤헤헤 지자는 불언이라 만사는 상보 선필의 흉중에 있는즉 오늘밤을 기다려서 나의 집으로 오오. (사람 오는 기척이 나니까) 쉬!
급찬 김 곤 등장. 십 칠팔세. 태자의 동지중 가장나이 어린 편이다. 역시 뇌물을 받아 들었으나 매우 침통한 얼굴이다.
[겸용] 급찬마마. 마마는 무삼 선물을 받으시었소?
[곤] (깊은 한숨을 지으며 층계돌 위에 선다) 그 몸도 받았소?
[겸용] 어이하야 얼굴을 이대토록 찌푸리시고---
[곤] 이몸이 이것을 들고 어디로 가려는고?
[겸용] 헤헤헤--- 참 마음도 약하신 거지.
[곤] 왕건이 이 나라에 옴은 화친에 뜻이 있음이 아니라 역시 신라를 먹으러 옴이로다. (뇌물을 내던진다.)
[겸용] 아! 이 일을 어찌하리. 만일 고려왕께오서 나와 보오시면---
[곤] (다가서며) 그 몸은 고려왕만 무섭지 자기창자 썩어 감은 무섭지 않단 말이로고.
[겸용] 아모리 그러한들 서산에 지는 해를 끌어올릴 수 있으리까? 만일 이런 물건을 메어쳐서 우리나라의 병이 풀린다면 이 겸용도 바로 이 자리에서 이것을 깨뜨려 버리겠소.
[곤] 허지만 아까워서 못 버리겠단 말이지?
[겸용] --- 아니옵지오. 아까옵지는 아니하압지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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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 하지만 헤헤헤--- 물이란 아모리 굽이쳐도 바다로 흐르는 법이지오.
[곤] 이 늙은 것! 말을 팔고 창자를 팔아 진흙속을 헤엄치는 물오리 새끼처럼 이 성중에 헤엄치러 드는 자! (칼자루를 턱 잡는다)
[겸용] 헤헤헤--- 담벼락에 송곳질일랑 마옵소서. 구멍이 뚫리기 전에 송곳 끝이 분질러지는 법이오니.
[곤] (칼을 빼어) 에이, 더러운 것!
(겸용을 친다. 겸용은 김 곤의 칼을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한다. 김곤은 수삼차 헛칼질만 한다)
[최활] (어쩔 줄 몰라) 이 일을 어이하리.--- 급찬 참으소서. 이럴 때에 누구나 와 주시었으면--- 신라의 태자 등장
[태자] (주춤서서) 저 어이한 일일꼬?
[최활] 동궁마마!
[태자] (큰소리로) 급찬!
[곤] 동궁마마, 궤변을 방패로 이욕에 헤엄치는 이 액구를 그만 한 칼에 버힐 테요!
[태자] 칼을 거두오. 실라 천년 사작이 저까짓 하루살이같이 나부끼는 주구배의 손에 좀멕히지는 않으리니.(땅에 떨어진 각대를 주위 주며) 자 태수, 띠를 고쳐 매라. 내 들은즉 태수는 일찍이 신라 조정에 공을 이루었으나 요즈음에 와서는 왕건에게 아첨하는 난신저자와 더불어 그 몸의 창자를 좀멕히고 있다 하니 그 거짓 소문은 아니렸다?
[겸용] 온 그럴 리가---
[태자] 아니란 말일까?
[겸용] 암 아니다 뿐이겠소.
[태자] (겸용의 손에 든 것을 가리키며) 그러면 그것은 무엇이뇨?
[겸용] --- 이것은---
[태자] 금성 태수왕 흉의 아들 왕건이가 보낸 뇌물이겠지? 이리 내놓음이 어떨꼬? (겸용 할수없이 손에 든 것을 태자에게 준다. 태자, 받아 보며 ) 허허허--- 붕어를 낚는 미끼로고. 전자에 백제가 망할 적에 당나라 장수가 백마를 미끼로 사자수 용을 낚았다더니 이것은 신라의 올챙이를 낚는 미끼로고. 이 철없는 늙은이! 그 몸은 미끼의 그 단맛만 알었지, 몸의 찬자에 밧혀 드는 낚시의 날카로움은 깨닫지 못한단 말일까? 에이! (땅바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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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어친다) 최소오도 그것을 이리보냄이 좋으리라. (태자는 최활의 물건마저 빼앗아 땅바닥에 메어친다 그리고는) 자, 가라.
겸용과 최활, 슬슬 눈치를 보며 도망하다시피 퇴장.
[곤] 왕건이라는 큰 도적을 궁중에 불러들여 놓으매 여태 본색을 내어놓지 못하던 태수 겸용과 같은 좀도적까지도 벌써 기세를 얻어 청천 백일하에 두 활개를 치고 감히 못하는 말이 없게 되었나이다.
[태자] 고려 왕건이란 진실로 말못할 흉물이로고. 이 조정의 관속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양으로 뇌물로써 정을 보이고---
[곤] 참 그 외간 내흉한 꼴이란 두 번 다시 볼수 없더이다. 왕건이 궁중에 처하매 마치 일갓집에 온 손님처럼 또는 구경 온 유객처럼 천하 대사에는 아모 뜻도 없는 체하면서도 기실은 이 조정을 자기 손아귀에 휘어 넣으려고 폐하에게나 신하에게 별별 아첨을 다하고 있나이다.
[태자] 폐하는 어디 계시오?
[곤] 궁중에서 오랑캐 왕건과 더불어 옥좌를 나란히 하고 계오시는 그 딱하신 모양 하늘에 두 해가 없고 땅에 왕이 없는 법이어늘 이 무삼 해괴한 일이니이까?
[태자] 아! (깊은 한숨을 내쉬며 괴로와한다)
태자의 동지인 사빈경이 이 유와 시랑 김 비와 낭중 한 공달 등 신라의 젊은 신하들이 성문 안에서 등장.
[비] (나오면서) 이 몸도 그의 뇌물을 그 자리에서 팽개쳤소.
[공달] 나도 그리하였소.
[태자] 여러분!
[일동] 오오, 동궁마마! (일동 태자에게 모여든다)
[비] (소리를 낮추어) 동궁마마, 오늘의 그 계책은 어떻게 되었나이까?
[태자] 여러분에게 전하여야 할 말이 있소.
[비] 무삼 일이시오?
[태자] 왕건이 거느리고 온 호위군이 오십 명이라 하지 않았소?
[일동] 분명 오십 명뿐이라 하였나이다.
[태자] 그러나 내가 알아본즉 그것은 새빨간 거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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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왕건은 내밀히 성 밖 백리허에 오천 대군을 벌써 출병시켜 두었도다 하오.
[일동] 성밖에 오천 대군을? (눈이 둥그래지며 서로의 안색만 살핀다)
[곤] 에이, 엉큼스러운 도적! 거짓껍질을 쓰고!
[태자] 그러하니 도저히 우리가 작정한 그 군사의 수효로서는 ---
[유] 그렇소. 그 군사로서는 도저히 왕건을 칠수는 없소.
[비] 그러나 그냥두고 오늘밤을 샌다면 내일 아침엔 우리의 수족까지 잘리고 말 것을---
[유] 아닌게 아니라 왕건이 착한 척하니 궁중의 인심은 모두 왕건에게 쏠려 심지어 근시하는 궁녀들까지 상감마마보다 오히려 왕건의 마음을 살 양으로 알랑거리는 판이오.
[공달] 우선 고려 편으로 기울어지려는 백성의 인심부터 막아야 할것이오. 오년전 포석정 난리에 후백제 견훤이 이 서울을 무찔러 하룻밤에 피바다를 만들 때와는 딴판으로 이번에 왕건이 무력을 쓰지 아니하매 그것만으로 벌써 백성들은 감지덕지하는 모양이더이다.
[태자] 아! 딱한지고! 이미 왕건 궐내에 들어 있고 성밖에는 수천의 대군이 있거늘 무슨 수로 왕건을 몰아 내치며 무슨 힘으로 기울어지는 민심을 막으리. 이렇게 될 줄 미리 알았
기에 나는 별별 말씀을 다 사뢰어 절대로 왕건을 국내에 들여놓아서는 안된다고 간하였던 것을---
[일동] 에에 딱하여라.
[비] 이러고 있을것이 아니오라 우리에게 아직 십이영문 군사가 있고 또 성중에는 우리와 뜻을 같이하자는 수백 수천의 피 끓는 사나이가 있고 또 오년전 포석정 난리에 견훤의 군사에게 쫓기어 산으로 들로 숨은 술객 용사들이 무수히 있으니 은밀히 그를 수합하야 고려 오천 군사와 자웅을 다투어 봄이 어떠리오?
[공달] 그 참 좋은 의견이오. 물실차기 하고 금야로 거사하사이다.
[유] 이 수백년 동안 난리에 지쳐서 싸움이라면 백성들은 머리만 내젓는 것을---
[곤] 그러나 아모리 이 나라가 늙었다 하기로 고려군 오천쯤이야.
[태자] 적을 보고 싸우기 전에 패할 것을 앞서 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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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은 서라벌 사나이의 도리가 아니오. 시랑, 급찬, 낭중의 의견대로 금야로 거사함을 같이 맹세하사이다.
[일동] 예
상대등 유렴, 삼문에서 나타난다.
[유렴] 그 아니될 말씀이오.
[일동] 이, 상대등마마!
[유렴] 그렇게 수많은 목숨을 내어걸지 아니하여도 넉넉히 왕건을 잡는 것을 어이하야 그런 험한 길을---
[일동] 그러면?
[유렴] 욍건은 지금 독에 든 쥐! 바로 우리의 수중에 들어 있지 않소.
[태자] 그러면 왕건이 이 궐내에 들어와 있는 이 틈을 타서---
[유렴] 그렇소. 주인 없는 진증은 뿌리 없는 나무와 같을진대 왕건의 모가지 하나면 만사는 족할 것을 오천 대군을 부시어서 무엇하겠소.
[태자] 그러나 자객을 씀은 우리 젊은이로서 너무나 비겁한 짓이 아니리까?
[유렴] 일을 위하여선 체모만 가려선 안되오.
[공달] 상대등마마의 말씀은 가히 버리지 못할 의견인 줄 아뢰오나 호위군으로 겹겹이 싸여 있는 왕건을 무슨 수로 잡는단 말씀이오?
[유렴] 그 일은 오천대군을 물리치기보다는 오히려 쉬울 것 같소. 그리고 설사 우리가 저 오천 대군을 부신다 하더라도 고려 본국에는 지금 수십만 왕건의 군사가 대기하야 있고 그리고 또 백전백승의 명장 유 금필이 있지 않소. 이를 어찌 다 부신다 말씀이오 (일동, 아무 말대꾸도 못하고 있다) 자, 걱정할 것 없이 나의 의견을 따르시오. 나는 지금 궐내에서 왕건의 하는 수작을 일일이 보고 왔거니와 그 불인일병하야 수공 평장하려는 계책! 이대로 두었다가는 이 나라는 수일을 부지하기 어렵겠소. 게다가 폐하께오서는 황송하옵게도 왕건의 장녀 낙랑공주의 뒤만 따르시니---
[태자] 신라이 남방지국이라 하야 과히 업수이보지 마오소서. 기후는 온화할망정 가다 오다 역풍도 불고 회오리바람도 이나니 촉상치 않도록 조심하심이 좋을까 하나이다.
[왕건] 그 말의 뜻은?
[태자] 듣잡건데 대왕은 신라 백관에게 귀국에서 가지고 오신 귀한 선물을 노나 주시었다 하더니 이 몸에게는 어이하야 주시기를 아니하나이까?
[왕건] 나를 심히 비꼬려는 눈치로고. 연이나 내가 신라에 옴은 다른 뜻이 있어 옴이 아니라 첫째로, 근래 삼국의 국정이 장히 살벌하야 날로 도륙을 일삼으매 나는 특히 우리 두 나라가 앞으로 형제지국으로 나아갈 정을 두터이하려 함이요, 둘째, 나는 신라에 와서 이 나라의 근 천년 동안 닦이고 시친 문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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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아 신흥 고려국의 본을 삼으려 함이오. 그리고 셋째로는 나는 건국이래 번거로운 정진에 몸이 더러웠기로 신라 맑은 풍광을 맛보아 호연의 기를 기르려 함이라.
[태자] 어이하야 발관 빼시려 하시나이까? 발을 빼시려 드시면 도리어 그 발은 진흙에 묻히고 마오실 것을.
[왕건] 그러면 내가 무삼 다른 뜻이 있어 왔단 말일까?
[태자] 대왕은 금일까지 하지성, 명주, 진보성, 명지성,경산부, 고울부, 근암성, 재암성 등, 이 나라의 유수한 고을을 수없이 뺏앗아 무고한 백성과 무수한 고을을 수없이 빼앗아 무고한 백성과 무수한 군사를 무찔러 놓고 지금에야 형제지국이란 당치 않소 이다. 그리고 대왕이 이 나라 문물과 풍광을 구경하러 오시었으면 구경만 하고 가실 일이지 어이하야 오천 대군을 성밖에 복병시켜 두시었나이까?
[왕건] (놀라며) 오천 대군을?
[태자] 이 몸은 못 속이시나이다.
[왕건] 나도 일국의 왕인지라 나의 신상의 만일을 위하야 데리고 옴이라.
[태자] 그러하오면 어의하야 애초에 오십명의 호위군밖에 아니 데려왔다 하시었나이까?
[왕건] (주저하며) --- 그, 그것은---
[태자] 그것은 어찌된 일이오니이까?
이때 낙랑공주, 쾌활히 뛰어온다. 그 뒤에 상보 선필, 시녀 그리고 좀떨어져 신라왕 김 부도 따랐다.
[공주] 아바마마, 궁전에서 소녀 몰래 나가시어서 여기에서 무엇을 하시니이까?
[비] (누상을 가리키며) 동궁마마, 페하의 거둥이시오.
[태자] 딱하신 부왕이시어!
[선필] 저 아래 태자가!
[김부] 태자! (태자는 피해 나가려다가 발을 멈춘다.)
태자는 고려왕의 거행에 현신도 아니하고 그나마 궁전잔치에까지 얼굴을 아니 내어놓으니 그 어이한 일일꼬?
[태자] 신까지 이길지 못한 일에 덩달아 춤을 추어야 할 하나이까?
[김부] 짐의 앞에서 그 무삼 소릴꼬? 자, 이 누각에 올라 이 고려에서 온 공주와 인사함이 어떨꼬? 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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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려왕과 형제지의를 맺었으니 태자와 공주는 의남매간이라, 태자는 그렇게 알고 앞으로 가까이 사귈지어다.
[태자] 황공하여이다.
[선필] 공주님, 공주님께서 몸소 저 아래로 내려가시어서 태자께 먼저 인사 드림이 당연한 도리인가 하나이다.
[공주] (부끄러워) --- 아이, 어떻게!
[선필] 태자께오서는 공주님의 오라버니시온데!
[태자] 허허허--- 오라버니?
[김부] 태자! 짐의 말이 아니 들리느뇨? 어이하야 인사 못할꼬?
[태자] (부왕의 명에 할 수없이) 북방나라 고려의 누이시이까, 원로에 오시느라고 얼마나 수고하셨나이까?
[공주] (얼굴을 붉히며) 황송하여이다.
[선필] (일부러 큰 웃음을 웃으며) 허허허--- 벌써 백년 전에 만나신 친남매분 같소이다그려.
[태자] (정색하여) 부왕께 아뢰이오. 어이하야 고려왕은 이 나라의 세 가지 국보 (장육의 존상, 구층탑, 성대를 가리켜 말함) 의 하나인 진평대왕이 띠시던 저 성대를 띠시었나이까?
[김부] 밑도 끝도 없이 그 무삼 소린고?
[태자] 부왕듣조시오. 왕건은 태봉왕 궁예의 신하로서 지금으로부터 십여년 전에 그 임금을 음해하야 그 옥좌를 가로 빼앗은 난신적자이어늘---
[철] 대왕!
[왕건] 저 무삼 당치 못한 말버릇일꼬?
[김부] 태자!
[태자] 이 몸을 책망하시려거든 먼저 사기를 책하소서. 이 몸은 사기에 쓰인대로 오일 뿐이로이다.
[왕건] (부들부들 떨면서) 듣노라니 급기야는 못하는 소리가 없고나! 에이, 천하에 고이한!
[태자] 허허허--- 후덕하신 고려 대왕으로서 너무 지나치신 노염은 삼가소서. (동지들을 보고) 자, 우리는 우리의 갈길로!
태자는 동지들과 바삐 퇴장.
[왕건] 아, 분하여라! 고작 한나라 태자한테 이 무삼 꼴이뇨?
[철] 신은 참을 수 없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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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정말 너무 과하신 말씀을!
[김부] 대왕, 대왕이 너무 노하시면 과인의 처지가 어찌되겠소. 젊은 아이들의 정신 없이 지껄이는 소리이므로 이 늙은 왕을 보시와 참으오.
[공주] 아바마마, 태자를 용서하시오.
[김부] 만사는 이 몸의 불찰이니 과히 심뇌치 마오.
[왕건] (화가 나서) 공주는 안으로 들라!
낙랑공주, 찔금하여 퇴장, 김부는 공주의 뒤를 따른다. 시녀와 궁녀도 다 같이 퇴장.
[왕건] 두고 볼수 없노라. 단박에 태자를 버혀라!
[철] 예. (하고 칼을 빼어 선뜻 나선다)
[선필] 아니오이다. 태자를 버히는 날은 대왕께서 천하를 잃으시는 날이오이다.
[왕건] --- 무어?
[선필] 태자는 신라의 빛! 신라의 기둥! 이 나라 백성은 신라를 건져 낼 사람은 오로지 태자 한분뿐 인줄 믿고 있거늘 그러한 위인을 죽이고서 그 원한을 어찌하려 하시니이까. 옛글에 대원을 화하야도 반드시 여원이 있다 하였으매 태자를 죽임은 대왕의 삼국통일의 대업에 큰 흠을 남기고 말리이다.
[왕건] 그러하면 내가 이 욕을 끝내 견디어야 한단 말이뇨?
[선필] 신은 일찍이 신라의 녹을 먹은 자이므로 이 나라의 민정에는 정통하오이다.
[왕건] (하늘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로) 에이, 그만두어! (그러나 다시 무엇을 생각하였는지 조용히) --- 그, 그러면 상보만 믿겠소.
[막] 2막
밤, 전막과 같은 날.
낙랑공주의 유하는 신라의 미술공예를 극한처소. 공주는 시녀와 더불어 신라의 밤 경색을 즐기며 손수 타는 가야금에 맞춰 노래를 읊조린다.
서라벌 밝은 하늘 님의 눈을 뵈온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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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의 늦인 안개 천년 사직 조우는 듯!
운내에 수양버들 문무왕의 말 매던곳! 김유신 자는 곳에 충신 의사 자노매라.
사천왕사 들어서면 웅장한 벽화로고 빛나는 부귀영화 하늘 끝에 닿았도다.
[시녀] (공주의 노래가 끝나자) 공주님, 어이한 일이시오. 공주님께서는 솔메 서울에서보다 훨씬 노래를 잘 부르시어요.
[공주] 밤이 아름다오매 내 노랫소리도 아름다오리라. (난간 끝으로 나가며) 오오, 서라벌의 밤하늘은 어이하야 이토록 맑을꼬? 아아 저 별들 좀 보렴. 비단이불에서 자다 깬 옛날 공주의 눈초리 같지 않니? 어쩌면 저렇듯 상냥스러울꼬?
[시녀] 우리 나라보다 이 나라는 기후가 온화하야 그렇삽는지 쇤네 눈에도 모든 것이 무척 우아하게만 보이어요.
[공주] 이 나라 대궐만 하여도 때묻고 퇴락하기는 하였으되 깊고 웅장한 맛이 우리 나라로서는 아무래도 따를 수 없지 않겠더냐? 그리고 문무 백관들의 거동하는 법체도 어마어마하고---
[시녀] 하지만 이 나라 신하들은 맥이 풀려서 씩씩한 맛이 조금도 없음이 한이더이다.
[공주] 이애, 그 무삼 소리냐. 너 오늘 누각에서 못 보았느냐? 이 나라의 태자님의 그 굳굳하신 양을. 우리 고려에서는 그와 같은 장부다운 대장부는 아모리 볼래야 못 볼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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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녀] 쇤네는 도리어 화가 나더이다. 그 어른이 대왕마마 앞에서 그와 같은---
[공주] 그야 난들 어이하야 화가 아니 났겠느냐? 그렇지마는 아모리 무서운 것에라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거침없이 나가려는 사나이다운 그 기상은 여간 좋지 않더라.
[시녀] 우리 나라 태자무 (왕건의 아들, 나중에 고려 제이대왕 혜종이 되신분) 마마께오서도 그만 하시지야 않으시리이까?
[공주] 어림도 없다. 삼국을 통틀어도 그마마한 인물은 쉽지 못하리라. 이애야, 오늘이 나라 상감마마께오서 그 태자와 나를 의남매를 맺어 주시었지? 그런 어른을 내가 오라버니로 섬기게 됨은 내 이 나라에 와서의 큰 선물이다.
[시녀] 그토록 훌륭한 인물이시니까?
[공주] 너 아직 사람보는 눈이 없어 그러니라. 아바마마께오서는 말할것도 없거니와 남의 일이라면 좀처럼 치켜 말할 줄 모르는 상보 선필 늙은이까지도 아주 입을 갖추어 태자의 인품을 내게 칭송하셨단다. 이 몸도 사람 보는 눈이 있느니라. 두고 보아라. 이 나라를 빛나게 할 사람은 아니 이 삼국을 빛나게 할 어른은 그분뿐일 터이니까--- (공주는 무엇에 취한 듯이 황홀히 노래를 또 부른다)
내 노랫소리 어디로 가오. 산 넘고 물 건너 어디로 가오. 저 멀리 하늘 끝 장경성 보오.
내 소리 받아서 노래를 하네. 방긋방긋 웃으며 노래를 하니 온누리 별님도 따라들 하네.
김부, 왕건에게 인도되어 이 방으로 들어온다. 김부는 궁녀들에게 부액되었다. 선필도 같이 따랐다.
[김부] (들어와 공주의 노랫소리를 황홀히 듣고 섰더니) 오오, 노랫소리도 아름다운지고! 짐이 즉위한 이
[김부] 상감마마가 무엇일꼬? 짐이 바로 그 몸의 숙부인 것을. 자, 숙부라고 한번 불러 보라!
[공주] 아이!
[김부] 허어, 부끄럽지 않느니라. 어서!
[공주] --- 수, 숙부마마.
[김부] 아, 기특하여라! 오오, 공주(사랑스러워 공주를 덥석 안으려한다)
[공주] (피하며) 호호호--- (왕건과 선필은 신라왕의 하는 양을 보고 서로 눈짓하며 빙그레 웃고만 있다)
[김부] (붙들며) 어이하야 피하려 하느뇨?
[공주] (김부의 품에서 빠져 나오려고 들러댄다) 아아, 저것이 무엇이지?
[김부] 저것이라니? 오오, 저것은 검산이로다.
[공주] 아이고, 저 불 보아.
[김부] 저불은 황룡사에서 재울리는 불이로다. 오늘밤엔 장안팔백 팔십사에서 공주의 아바마마이신 이 고려 대왕의 만수무강을 빌고자 일제히 재를 올리는 것이다.
[공주] 아이, 목탁소리도 요란하여라. 애야 네게도 들리지?
[시녀] 참 굉장하여이다.
[김부] 허허허--- 대왕은 기쁘시겠소! 짐도 이 공주와 같은 딸이나 두었더라면 작히나 좋으리오.
[왕건] 소제도 많은 자식 중에 이 낙랑을 그중 귀여워 한다오. 그러므로 금번에도 원로를 불고하고 귀국까지 데리고 왔지요.
[김부] 그럴 것이오.
[왕건] 페하께서는 좀 앉으심이 어떠하리오.
[김부] (앉으며 열직은 듯이) 짐이 도리어 손님 노릇을 하는구료. 하하하--- 한데 공주, 이 방은 어떠뇨? 이궁전도 포석정 난리에 견훤의 손에 재가 되어버린 것을 짐이 즉위한 후에 다시 지은 것이니라. 그런즉 공주는 매사에 불편함을 느끼리라.(왕건에게 자리를 권하며) 대왕, 우리잠깐 여기에서 쉬었다가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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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 예. (앉는다)
[김부] 오늘 변변치 못한 잔치에 대왕은 매우 고단하시리다
[왕건] 오늘 그 풍악 소리 장히 좋더이다. 진실로 그 풍악만 듣고 있노라면 몇 백년을 살더라도 늙지를 않겠더이다
[김부] 허허허--- 그 까짓 것을 ? 오히려 부끄럽소.수년 전만 하여도 가히 자랑할만한 것이 궐내에 더있더니만 대하가 한번 허물어지매 모다 이 모양 이꼴.
[왕건] 상감께서는 하렴하소서. 나 있거니 오랑캐 또 어쩌리오.
[김부] 진실로 오늘 짐이 여기에 있음은 대왕의 덕인줄로 아오.
[공주] 아이 조올리어라! 아바마마께오서는 어리하야 그런 따분한 말씀만 하시니이까?
[김부] 공주는 무삼 이야기를 좋아하는고?
[공주] 나라가 어찌되고 후백제는 어떻고--- 이러한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소녀는 하품만 자꾸 나나이다.
[선필] 오오, 신이 알었소이다. 오늘 이 나라의 태자께오서 공주님께 묘한 눈초리를 보내시더니 아마 공주님은 그 태자의 이야기를 듣고자 하시는 줄 아로이오.
[김부] (열적은 질투로) 정말일까?
[선필] 공주님, 어이하야 말씀을 못하시오?
[공주] (부끄러워 돌아서며) 아이, 상보 늙은이도!
[선필] 하하하---
[공주] 상보 늙은이는 공연히 이 몸을 놀리시어.
[김부] 참, 태자로 인하야 오늘 짐이 대왕께 공연한 실수를 하였소. 태자는 나이 어려 성미가 격하기 쉬워서 그러한 즉 대왕은 과히 노여워 마오.
[왕건] 노함이 무엇이오. 국가를 위하야 대의를 내세우고 나아가려는 그 위기를 소제는 오히려 장하게 보았소. 하지마는 태자는 소제의 진심을 몰라 줌이 섭섭하더이다. 태자의 입을 빌면 소제는 마치 무삼 극악한 흉계를 품고 귀국에 온 것 같지 않더이까?
[선필]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그것은 오로지 태자의 잘못인줄 아뢰오. 인자하얍신 대왕께오서 어이하야 그런 흉계를 품으신단 말씀이오니이까? 반드시 태자는 대왕의 그 온후하압신 성덕에 감동되고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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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이다.
[김부] 족히 그럴 것이오.
[공주] 또 시작이시로고.
[김부] 하하하--- 공주는 마치 번거로운 세상사를 싫어하는 들꽃과 같구료.
[선필] 상감마마, 벌써 듭시려 하시니이까?
[김부] 공주를 대하매 세상사에 꾸겨진 짐의 마음도 펴지는 것 같구료. 더 놀고 싶으나 밤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공주도 자야지.
[왕건] 소제는 낙랑에게 분부할 바 있사와 서서히 가겠나이다.
[김부] 대왕, 공주로 하여금 이 늙은 왕을 잠깐 바래다 주게 함이 어떠리오? 바로 이 앞까지만---
[왕건] 공주, 숙부마마를 모시어다 드려라.
[공주] 예.---
[선필] (궁녀들에게) 조심하야 모시어라.
신라왕 김부는 궁녀들에게 부액되어 퇴장. 공주와 시녀도 따라 나간다. 김부, 사라지자 왕건과 선필은 대소한다.
[왕건] 하하하--- 죄없는 늙은이로고.
[선필] 진실로 태평 성군이로소이다. 하하하---
[왕건] 태자가 저렇듯 주무르기 쉬운 위인이었던들 작히나 좋으리?
[선필] 신이 보옵건데 아마도 태자를 잡으랴는 덫에 죄없는 늙은 왕이 걸렸나 보오이다.
[왕건] 무엇이 걸리든 걸리기는 걸렸으니 장관이로되, 벌써 공주는 태자를 좋아하는 눈치가 아니었소?
[선필] 그러한 눈치가 보이기는 하오나 또 그렇지 않게 보이기도 하압고--- 하여튼 두고 보오면 일이 꾀대로 아니 꾀지는 아니할까 하나이다.
[왕건] 한데, 상보, 밖으로 자객에 대한 단속은?
[선필] 벌써 성밖에 복병시켜둔 그 군사 중에서 백명을 궐내에 은밀히 불러들여 물샐틈없는 단속을 하여 두었나이다.
[왕건] 오늘 저녁 태자 일당의 뒤를 따르게 한 탐정군의 소식은 어찌되었소?
[선필] 아직 아모 기별도 없나이다.
[왕건] 정히 궁금하구료.
[선필] 연이나 대왕께서는 가히 기뻐하셔야 할 일이 있나이다. 성은이 망극하시와 오늘 낮에는 조위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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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 소호, 최활등이 대왕께 귀부하였삽거니와 오늘밤에는 시중 김 봉휴를 위시하야 서학원학사 최언위등 태자와는 의견을 달리하는 유수한 이 나라 공신이 우리 나라의 성광을 입고자 대왕께 충성을 다하기를 맹세하였나이다.
[왕건] 그 반가운 소식이로고. 모다 상보의 공이오.
[선필] 헤헤헤---
[왕건] 앞으로 내가 여기에 유하는 수일 동안에 상보는 재주껏 신라의 문무 백관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려니와 항상 우리의 뱃속을 넌지시 보여 주어 저편으로 하여금 스사로 자기의 뱃속의 것을 내놓게 히오. 그리하면 내 뱃속의 것은 내어 먹이는 척하면서도 남의 것만 빼앗아 먹을 수 있는 것이오.
[선필] 이 나라 대관들이란 거진 다 포석정 난리에 도륙을 당하고 지금 남아 있는 자란 나이 어리고 경력 없는 자뿐이므로 만사는 의외에도 여의하게 되어 갈줄로 믿나이다.
낙랑공주, 쾌활히 웃으며 시녀와 등장.
[공주] 호호호--- 이 나라 상감은 정말 정말 우스운 어른이시어.
[왕건] 공주는 어이하야 웃는고?
[공주] 아바마마 이것 보옵소서. 이 팔찌를, 이 나라 상감께서 주시었나이다.
[선필] (받아보며) 왕께서 친히 지니시던 팔찌로고. (어이없는 듯 놀라니 의미 있는 듯이 왕건과 더불어 대소한다)
[공주] 이상스러워라. 어이하야 웃으시오?
[선필] 아니오. 아모 것도 아니오.
이때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 조심스럽게 들린다.
OO 마마!
XX 대왕마마!
[왕건] 누굴꼬?
[선필] 글쎄요.
선필, 문을 열어 준다. 왕철과 겸용, 무장을 하고 나타난다.
[왕건] 왕 시중과 태수 겸용이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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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필] 태수, 아까 태자 일당에게 보낸 탐정꾼은?
[겸용] 유렴의 집 후원에서 칼을 맞아 죽었다 하나이다.
[왕건] 유렴의 집 후원에서?
[철]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아마도 금야에 성중에는 길치 못한 일이 있을까 하나이다.
[왕건] 그 어이한 말일꼬?
[철] 신이 듣잡건대 태자의 도당이 금야에 자객을 쓰려던 계책이 탄로난 줄 알고 다른 꾀를 쓴다 하나이다.
[왕건] 다른 꾀를?
[선필] 혹 대군을 일으키어 성밖에 복병시켜 둔 우리군사와 대치하려 함은 아닐는지?
[왕건] 왕 시중은 성밖으로 급급히 내달아 군사를 단속하고 태수는 호위군을 수습하야 이 두란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얼씬못하게 하오.
왕철과 겸용, 예하고 퇴장.
[왕건] 역시 유렴이란 자가 태자 일당을 충동시켜서 이렇게 말썽을 일으키는 거로고.
[선필] 태자가 유렴의 딸 백화를 가까이함을 기화로 유렴은 부원군의 권세로써 천하를 호령하야 볼 양으로 태자를 충둥이는 줄로 아뢰오.
[공주] 태자께서 백화라는 여자를?
[왕건] (깜짝 놀라 공주의 눈을 피하여 선필에게 가만히 주의시킨다) 쉬!
[선필] (돌려댄다) --- 저 백화는 아주 박색이라 태자께서는 거들떠 보시지도 아니하시는 소저이옵지오.
[공주] 정말?
[선필] 암. 정말이옵지오.
[왕건] 허어 유렴이 고질이로고.
[선필] 야반이 넘었사오니 대왕께오서는 취침하심이 어떠하오리이까?
[왕건] (일어서서) 금야도 잠을 못 이루겠고나. 낙랑아, 조심하야 자라.
[공주] 예.
[선필] 공주님은 신라에 오신 이 첫날밤에 아름다운 꿈이나 꾸시오.
고려왕 왕건은 선필과 퇴장. 시녀는 잠잘 준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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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태자께 가까이하려는 백화는 어떻게 생겼을꼬? 서라벌의 여자는 자색은 아름답지 못하여도 마음이 어질고 덕이 높다는데---
[시녀] 쇤네생각에 아주 못생긴 여자인가 하나이다.
[공주] 너는 어이하야 그렇게 생각한단 말이냐?
[시녀] 백화의 아버지는 이 나라 태자를 꼬이어 대왕마마를 해하려 하지 않소이까? 그런 아버지의 딸이오니 오직하리이까?
[공주] 참, 그래. 하지만 가는 곳마다 왜 이렇게 싸움이 많을꼬? 나는 신라가 우리 나라보다도 좋은 나라인줄 알았더니 신라에도 역시 우리 나라와 같이 싸움이 있고 시기가 많은가보아. 아마도 사람이 사는데 나라가 있고, 나라가 있는 데는 싸움이 있는가보지.
[시녀] 정말 그런가 보오이다.
[공주] 아아, 마음이 뒤숭숭하여라. 이애야, 불을 꺼라. 빨리 자기나 하자.
시녀, 불을 끈다. 창으로 달빛이 흘러 들어온다. 은근한 쇠북 소리, 어디선지 적막을 깨뜨리고 들려온다.
[공주] 검산에서 들려오는 쇠북 소리로구나. (혼자 중얼대다시피) --- 검이여 비나이다. 사람이 즐기어 남을 작해하려는 그 무서운 마음을 말끔히 씻어 주오소서.
(또 쇠북소리, 멀리서 은근히 들린다) 아! 달빛도 고울씨고--- (잠깐) 이 애야. 창문 닫아라. 달빛이 너무 밝아 그런지, 어쩐지 무서운 생각이 드는구나.
[시녀] (창을 닫으려 한다. 창 밖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놀라) 아이구머니 공주님, 저것이 무삼 그림 자리이까?
[공주] 어디?
[시녀] 바로 저 아래에
[공주] 웅크리고 기어온 품이 아마도!
[시녀] 예?
[공주] 아마도--- 자객인가보다.
[시녀] (눈이 둥그래지며) 자객요? 앗 (하면서 공주에게 몸을 의지하여 숨는다)
[공주] 이애야, 상보 노인을 불러 다고. 얼른!
[시녀] 공주님도 같이--- (공주와 시녀, 무서워 떨며 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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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는 비었다. 이윽고 창문이 바스스 열리더니 흑의의 사나이. 비수를 들고 나타난다. 쫓겨 온 사람같이 숨을 허덕인다. 잠깐 벽에 몸을 붙이고 선다. 바깥에서 창검소리 지나간다. 여러 사람의 뛰어가는 발소리와 사람을 찾는 듯한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 들리더니 사라진다.
[태자] 인제 되었다. (방안을 둘러보며) 이 방은 아마도 공주의 침실인가 보아. 아니 그럼 왕건의 방은 어딜꼬? 왕건의 방은? (헤매다가 침대 옆에서 팔찌를 발견하여) 이것이? (복면을 뗀다. 태자다) 오오, 부왕의 팔지? 역시 부왕께서는 공주를! (원망스러운 듯이 공간을 노린다 누군가 밖에서 가까이 오는 기척! 창밖으로 피해 나가려다가 주춤서며) 저기에는 순라병이! 앗! 어디로 숨을꼬? (문으로 빠져나갈까 하고 문께로 가자, 사람 오는 기척이 나더니 문이 열린다. 태자는 언뜻 병풍 뒤에 숨어 버린다.)
[선필] (촛불로 방안이며 창 밖을 이리저리 비쳐 보고) 하하하--- 아무도 없지 않소? 공주님같이 활발하신 분이 어이하야 이렇듯 겁이 많으시오?
[공주] 아니 정말이오. 이 난간 밑으로 기어올라옴을 정말 이 시녀와 같이 보았다오.
[시녀] 정말이오이다.
[선필] 아니 그럴 리는 없을 터인데 (하며 수상스러운 듯이 실내에 있는 촛대에 불을 켠다. 방안이 환해진다)
[선필] 아마도 꿈을 꾸셨나 보오. 타국에 나오시면 자리가 뜨시어서 일쑤 그러한 꿈을 꾸시는 법이지오. 만일 또 그런 꿈을 꾸시거든 공주님께서 몸소 행차하실 것 없이 소리만 쳐 주소서. 이 늙은 것은 공주님을 위하야 가지 않고 바로 저 옆방에 앉아 있겠사오니--- (나가면서 가만히) 태수 빨리 순라병을 단속하야 궐내에 들어왔다는 자객을 놓치지 말고 꼭 붙들게 하오.
[겸용] 걱정 마오. 그 자는 인젠 그물에 걸린 물고기요. 어디로 가겠소.
선필과 겸용, 금히 퇴장.
[공주] (불안한 얼굴로 시녀를 잠깐 쳐다보더니 어이없이) 호호호--- 공연히 우리가 잘못 보고 그리하였나보다.
[시녀] 공주님을 놀라게 하여 드리어서 죄송하여이다.
[공주] (기지개를 켜며) 아--- 인제 발을 뻗고 자야지.
[시녀] (창문을 잠근다)
[공주] 창 틈으로 무엇이 들여다보는 것 같고나. 이애야, 병풍으로 창을 좀 가리어라.
[시녀] 예.
[시녀] (시녀 병풍을 옮겨 창을 가린다. 병풍 뒤에 숨을 죽이고 웅크리고 앉았던 태자, 동그랗게 나타난다)
[시녀] (놀라 공주에게 뛰어가 안기며) 앗! 공주님!
[공주] --- 아니 저것이 무엇일꼬?
[태자] 쉬!
[공주] 가까이 오지 마라.
[태자] 떠들면 단박에--- (비수가 번쩍인다)
[공주] 이 비겁한 사나이 같으니! 떠들테다. 큰 소리로 외칠 터이다.
[태자] 쉬! (고함을 지르려는 공주의 입을 꽉 막는다)
[공주] (사나이의 품속에 꼭 끼인 공주는 그 사나이의 얼굴을 한참동안 바라보더니) 아니 이분이 누구시오?
[태자] 소리를 내면 죽을 줄알라.
[공주] 이 나라 태자가 아니시오?
[태자] 헹, 나의 얼굴을 알아보니 장관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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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면을 벗는다)
[공주] 아아! 정말!
[태자] 신라의 원수, 너 아비 왕건의 자는 방이 어디냐? 내가 이 자리에서 너를 살려 둠은 그것을 알려고 함이다. 자, 빨리 알으켜라. 알으켜 주지 아니하면 단박에!
[공주] (괘씸한 듯이) 자, 죽이시오!
[태자] 얼른 안 댈 터이냐? (칼을 번쩍 들어 찌르려 한다)
이때 요란스럽게 문 두들기는 소리. 태자, 깜짝 놀란다.
[선필] (소리만) 공주님, 어이하야 안 주무시오?
[공주] (문고리를 꽉 붙든 채) 아이, 상보 노인이시오?
[선필] 예. 그렇소이다.
[공주] 제발 문을 열지 마오. 내가 지금 자리옷을 갈아입고 있으니---
[선필] 잠 옷을요?
[공주] 예.
[선필] 아니 사나이 소리가 나는 것 같은데요.
[공주] 아니오. 그럴리 없소.
[선필] 그래요. (하며 물러가는 기척)
[공주] 태자님, 태자님은 어이하야 이다지도 비겁하오. 그래도 소녀는 태자님을 사내다운 사나인 줄 알았더니 태자께서 하시는 짓이 고작 이런 일이오? 서라벌의 사나이는 다 이렇소? 제 원수를 죽일 양이면 어이하야 정정당당하게 싸워서 옥으로 께어지지는 못하고 천하에 비겁한 간신배 모양으로 야반에 비수를 품고 난간에 기어올라 여자의 침방으로 숨어들어--- (태자의 칼을 빼앗아 던지며) 이것으로 약한 여자를 위협하려고? 아아, 비겁하여라! 태자가 이다지도 비겁한 줄을 꿈에도 몰랐에라! 꿈에도 몰랐에라!
악에 받쳐 운다.
[태자] (아무 말 못하고 고개를 떨어뜨린다)
[공주] (눈물을 거두고) 자, 죽이랴거든 이 몸을 죽이시오. 고려 왕건이가 밉거든 왕건의 혈속인 이 몸 먼저 죽이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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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자] ---
[공주] 어이하야 못 죽이오? 자, 죽이오!
[태자] (칼을 떨어뜨리며) 아아, 괴로워라. (힘없이 문으로 나가려 한다)
[공주] (앞을 가로막는다)
[태자] 어이하야 이 몸을 막으오?
[공주] 이 문 밖에는---
[태자] 이 문 밖에는 고려 상보 선필이가 있고 저 창밖에는 오천의 고려 대군이 복병하야 있고---
[공주] 그러매도 태자님은---
[태자] 놓으오. 이왕 죽을 터이면 비겁하게 이런 자리에서 적을 기다려 죽느니보다 차라리 적의 손에 뛰어들어 죽겠소.
[공주] 아니오. 그러지 마시고 여기에서 몸을 피하소서.
[태자] (몸부림치듯 외친다) 아아, 적이로다! 적으로 에워싸이었도다. 이 신라 태자는 자기 나라 궁전 한 복판에서 적으로 에워싸이었도다!
[막] 3막
제 2막의 다음 날 낮. 임해 전으로 들어서는 입구. 임해전이란 현판이 붙었다. 정면 문으로 바깥 어원이 보이고 왼편은 잔치 자리로 통하고 오른편에는 광대의 준비실로 쓰는 방이 있는 듯. 이 극의 진행 중 광대들은 각종 가면에 이상한 의상을 갈아입고 오른편 준비실에서 잔치 자리로 들락날락한다. 잔치는 오늘이 가장 성대한 날이므로 이 건물의 도리와 천장에는 각종 등, 기치 등을 달았다. 멀리서 들리는 풍악 소리도 질탕하다. 이윽고 고려왕 왕건은 상보 선필, 시중 왕천, 태수 겸용 등과 더불어 주위 사람의 눈을 피하여 나타난다.
[왕건] (대노하여) 에이! 혈개 빠진 것들! 야순하는 군사와 호위군 백여 명을 거느리고 있으면서 그자객 한 놈을 못 붙들다니!
[일동] ---
[왕건] 더구나 태수 겸용은 바깥을 단속하고 있었으려든 간밤엔 무엇을 하였나뇨?
[겸용]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작야에 무엇인지 시커 먼 그림자 하나가 숲 속에서 나타나 성문을 빠져 바
[페이지] 031
로 공주님의 침방 아래로 기어가는 것을 신이 먼 발치로 보았으므로 즉시 수병을 풀어 그 뒤를 따르게 하였사와도 연해 찾지를 못하였나이다. 그리하오나 지금 생각하오니 그 그림자는 사람의 그림자가 아니오라 정녕 귀신의 그림자이었던가 하나이다.
[선필]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정녕 그러한가 하오니 대왕께오서는 과히 심뇌치 마옵소서.
[왕건] 경들이 귀신이니 무엇이니 하야 나의 입을 슬쩍 막으려 하지마는 나는 쉽사리 속지를 않느니라! 내가 보건댄 태자의 도당 그 행동이 매우 수상하야 상대등 유렴 이하 각 신하들은 병이 났다 칭하야 오늘 잔치에도 참석치 아니하고 태자는 외람하게도 나를 비방하며 다니는 품이 아무리 보아도 상궤를 벗어난 듯하니 내 마음 매우 불안하도다. 모름지기 경들은 뜻을 같이 하야 작야의 실수를 만회시킴은 물론이려니와 특히 성 밖 백리히에 대변시켜 놓은 군사를 은밀히 북문으로 불러들여 그와 연락을 긴밀히 하야 일촉즉발의 차기에 비함이 좋을까 하오.
[선필] 대왕께 아뢰이오. 금일은 잔치도 질탕하매 신하 중에서 누구나 사람을 택하야 대왕과 같이 꾸며서 대왕 가까이 두심이 좋을까 하나이다.
[겸용] 상보의 이 꾀를 버리시지 말아 주소서.
[왕건] 그도 좋은 꾀로다. 만사를 상보와 왕 시중이 맡아 선히 처결하오. 남의 눈이 어려워 경들과 같이 여기에 길이 머무를 수 없으므로 나는 즉시 저 잔치가 자리로 향하거니와 경들은 항상 칼을 쓰기 전에 머리를 쓰고 꾀를 쓰게 하오.
[선필] 대왕마마 전념치 마옵소서.
왕건, 오른편으로 퇴장.
[철] 태수 겸용은 어이하였길래 그 자객을 놓쳤소? 상보를 두고 이를지라도 그 때 궐내에 같이 게시었을 터인데 그것을 못 잡으시다니---
[선필] 정말 원통하오.
[철] 신라를 치려 하여도 칠 만한 핑계가 없어 애를 쓰고 있는 이때에 그 자객이나 붙들었더면 작히나 좋았겠소.
[선필] 옛말에 한 번 실수는 병가지상사라 하였소. 후회한들 소용 있소.
[철] 에이 분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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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필] 그러면 태수 겸용은 조위 설효를 불러 (정면 문을 가리키며) 이 문을 지키게 하고 겸용은 바깥 어원에 숨어 순리병과 연락하오.
[철] 여기는 출입이 빈번하야 자객이 드나들기 쉬운 몫이므로 설효보다 태수를 내세움이 어떠리오?
[선필] 그런데 태수는 급급히 조위 설효를 데려다가 (오른편 방을 가리키며) 방에서 광대들이 휩쓸려 노는 척하며 이 문틈으로 바깥 동정을 엿보게 하오. 그리하야 일조 유사지시는 즉시 태수에게 알려서 내게 기별하여 내가 왕 시중에게 전달하야 단박에 대군을 풀겠소. 그러면 태수는 설 효를 매일것오.
[겸용] 예.
[선필] 은공!
[겸용] 걱정마오.
겸용, 주위를 살피더니 정면 출입구로 재빠르게 퇴장.
[선필] 태자의 도당은 간밤에 자객을 써서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은즉 오늘은 반드시 무삼 거사가 있을 것이오.
[철] 암, 그렇지요.
[선필] 그러면 왕장군은 군사를 북문께로 모아들이어 나의 기별이 있을 때 언제나 성중으로 몰아칠 수 있게 차비를 하고 계시오.
[철] 예.
[선필] 이 몸은 이 길로 소오 최 활을 불러 대왕의 어의를 입히어 대왕의 모습을 꾸미어 두리다.
[철] (사람 오는 기척을 듣고) 쉬!
시랑 김비, 급찬 김 곤, 사빈경 이유, 낭중 한공달, 태자의 동지 등장. 선필, 꾸며 겸손하게 인사한다. 사랑 김 비, 급찬 김곤, 사빈경 이 유, 낭중 한 공달 등 태자의 동지, 등장. 선칠, 꾸며 겸손하게 인사한다.
[김부] (다정하게) --- 공주, 잔칫자리로 그만 돌아감이 어떨꼬? 공주는 나의 곁에 그대로 앉아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공연히 나의 옆을 떠나오니 이런 일도 생기나니라.
[공주] 태자께서 소녀를 천하에 몹쓸 계집아이로 여기시니 소녀는 그 뜻을 알고자 하나이다.태자님! 어이하야 이 몸을 그런 죄 많은 계집아이로 생각 하시니이까?
[김부] 공주 요즘 태자는 기후의 탓으로 제 정신을 못 차리는 듯하니 더 묻지 아니함이 좋으리라.
[태자] 신이 정신을 못 차림이 아니오라 하늘이 분명 미친듯하여 이다. 저 천상에 해님이 제자리를 잃고 또 듣자온즉 간밤에 달님은 동에서 떠서 서쪽으로 가다가 길을 잃어 저 북쪽으로 기울어지더라. 하오니 그 하늘이 미친 것이 분명하오며, 하늘이 미치었길래 땅위에 왕이 나라를 잊고 이웃나라 공주의 치맛자락에 싸여 헤어나지를 못하심이 아닌가 하나이다.
[공주] (눈썹이 꼿꼿하여진다)
[김부] 동궁아! 이것이 신하가 임금에게 하는 소리며 자식이 아비에게 하는 말이냐! 아모리 미치었다기로 너 충효의 길을 잊어버렸나뇨?
[태자] 충효라 하오시니 충효를 아뢰이리까? 오늘의 충이란 견훤이 힘 있으면 견훤의 앞에 허리를 굽히고 왕건이 힘있으면 왕건의 앞에 머리를 숙이고 낙랑공주 자색이 아름다우매 공주의 허리에 팔을 두르는 것이 충인가 하오며---
[공주] 이 또 무삼 당치 못한 말쌈이니이까?
[김부] (칼자루를 턱 잡으며) 이 불효 불충한 놈아! 그 입을 닥쳐라. 이 칼로 네 혓줄기를 끊으리라!
[태자] 끊으시려거든 끊으시오. 제발 이 아깝지 아니한 목숨을 끊어 주소서. 그러하오나 신은 이 가슴속에 박혀 있는 말씀을 폐하께 죄 아뢰고 죽으려 하나이다. 부왕 듣조시오. 신이 듣자오니 북한주 도독 왕륭의 아들 왕건이 그의 딸 낙랑의 색으로써 이미 옥좌를 휘어잡고,
이전 신라왕은 새 왕의 공주의 손을 핥고 신하들은 새왕의 발을 빤다 하거늘 이일은 듣기만 하여도 질통한 일이온데--- 저 풍악소리는 무삼 소리며 춤은 무삼 춤이니이까? (땅을 치며 운다)
[김부] 아아! (괴로워한다)
[태자] (눈물을 거두며 자기의 칼을 빼어 김부에게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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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다) --- 인제 죽여 주오소서. 천년 사직이 망하여 버리고 거룩한 이 서울이 쑥밭이 되는 꼴을 보기 전에 부왕께서 낳으신 몸이니 이 목숨을랑 폐하께서 거두어 주오소서.
[김부] 보기 싫다. 물러나라! 얼른 물러나라!
[태자] 물러나라 하오시면 신은 물러나리이다마는 부왕의 마음이 물러나지 아니하시니 괴로움은 면치 못하시리이다. 부왕께서 이렇듯 괴로우실진대 그 약하신 등에 천년 사직을 아니지시었다면 피차에 좋았을 것을. 국운과 가운이 모다 불길하야 부왕께서 높으신 자리에 오르시니 왼손으로 오랑캐를 불러들이고 오른손으로 역적의 발에 매어달리는 변변치 못한 재주를 부리시게 되었나이다. 이러고 보니 이 나라의 천자로 앉으신 부왕께서도 그 죄적지 아니한가 하나이다.
[김부] 듣기 싫다.
[태자] 원컨댄 상감마마, 제발 저 어린 여자를 삼가소서 (나가려 한다)
[공주] (태자를 막으며) 태자님! 그 무삼 말씀이오?
[태자] (밀치며) 나의 앞을 막지 마오.
[공주] 사람을 밀치시기까지.
[태자] (발을 옮긴다)
[공주] 태자님!
공주는 태자를 부르나 태자는 뒤돌아보려 하지 않고 퇴장. 태자의 뒷모양을 꾹 노리고 동치 않고 있더니 공주는 무엇을 결심한 듯이 들었던 부채를 내던진다.
[김부] 공주.
[공주] (이를 바드득 갈며) 두고 보라 여자의 마음이 이대도록 짓밟고서! 흥 원수의 자식이라 하야 미워하였으니 그 원수의 매서움을 보여 주리라! 고려 계집아이의 차디찬 맛을 보여 주리라.
[시녀] 공주님!
[공주] 아바마마를 모시고 오라.
[시녀] ---
[김부] 공주, 나와 같이 안으로 들어감이 어떨꼬? 공주는 아모 데도 가지 말고 나와 같이 나의 가까이 있어 이 늙은 여생을 위로하야 줌이 좋을지어다.
[공주] 싫소이다. 모두가 귀치 않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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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 (공주를 붙들고) 공주는 모르는 도다. 태자는 지금 정신을 잃은 사람이라 겉으로는
모르거니와 속에는 회로리 바람이 불어 갈피를 찾지 못하는 도다. (팔찌를 끼워주려 한다.)
[공주] (뿌리치며) 놓아 주오소서. 소녀의 품은 뜻은 이 칼로 태자를 해하고 이 몸마저 죽
일 작정이오이다.
[김부] 공주.
공주는 품속에 있는 칼에다 손을 대며 태자의 나간 쪽으로 퇴장.
[시녀] 어이하시려고 저러실까.
[김부] 너 빨리 공주를 붙들어라.
시녀도 공주 뒤를 따라 급히 퇴장.
[김부] (혼잣말로) 공주마저--- 잃으면은 나에게 무엇이 남을꼬?
[김부] ??를 주워들고 힘없이 공주의 나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가 하릴없이 왼편으로 들어
간다.
[설효] (겸용과 같이 광대의 준비실에서 슬그머니 나오며) 이 어찌된 일이오? 상감마마는
낙랑공주를 좋아하시고 낙랑공주는 동궁마마를 좋아하시고 동궁마마는 낙랑공주와 상감마
마를 모조리 미워하시고---
[겸용] 아니오. 아모리 두고 보아도 태자께서는 공주님을 사랑하시는 것 같소.
[설효] 천만에. 사랑하시는 이가 그대도록 미워 하실려고?
[겸용] 허어 사랑하시매 미워하심이오. 설 조위 같은 분이 어이하야 그마마한 이치를 모르오?
태자께서 상감마마께 말대담을 하심도 폐하도 아끼시고 나라를 사랑하시므로 그러하심이 아니오?
[설효] 그것은 그렇지요.
[겸용] 그와 마찬가지 이치가 아니겠소. 이러고 보니 정녕 간밤에 태자와 공주 사이에 무삼일이 있은듯도 하오. 두고보오. 나으 눈은 애꾸눈 애꾸로되 지래 짐작만은 영락이 없을 터이니--- 하여튼 이일은 상보에게 알려야 하오. 암만하여도 심상치 않은 것 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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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효] 그러면 빨리 갔다오오.
[겸용] 설 조위는 여기 꼭 숨어 계시오.
사자 놀리는 광대, 사자를 몰고 땀을 흘리며 등장. 사자춤을 마치고 돌아오는 것이다.
김곤은 숨을 허덕이며 태자를 데리고 정면 출입구에서 등장. 김곤응 흥분한 품이 싸우
고 온 모양이다.
[곤] 태자님, 큰일났소. 간밤의 그일을 저편에서도 눈치를 채고 단속을 하기 시작하였나이
다. 금방 설필의 눈치가 수상하기에 그 뒤를 밟아 보았더니 온 천하에 이런 일이 어디 있겠소. 선필은 벌써 시중왕 철과 짜 가지고 수병 십수인을 내세워 유렴 상대등마마를 성밖에 있는 고려 진중으로 납치하여 갔소이다.
[태자] 상대 등을?
[곤] 상대등이 모든 일을 주장하시고 우리가 모두 그 꾀에 노는 줄 알었나 보오.
[태자] 음.--- 육실할.
[곤] 그것을 보고 참을길 바이없이 나는 칼을 빼어 싸우다가 수병 몇명을 무찌르기는 하였으나 중과부적이라 견딜 수 없어 망을 하여 오는 길이오.
[테자] (이를 갈며) 음, 마침내 도전을 하려 드는구나.
[곤] (손의 피를 씻으며 주위를 살핀다) 사빈경 이유며 낭중 한 공달은 어디 갔을꼬?
여기에서 만나자고 조금 전에 나와 언약을 하였는데---
[공달] 왼편에서 숨어 나온다.
[곤] 한 낭중!
[공달] 마침 잘 만났소. 저편 뜰 아래 왕건이 나섰기에 슬쩍 그 옆을 스쳐 지내었더니 저 편
에서 눈치를 채인 것 같소.
[태자] (칼자루를 잡으며) 어디?
[곤] 지금도 거기에 있을까?
[공달] (가리키며) 저기를 보오. 왕건이 호올러 부채질을 하고서 있지 않소. 무삼 생각에 잠겨서---
[태자] 저 완악무도한 것 같으니? 무삼 생각을 하고있을까? 저 뱁새 같은 눈으로 천하를 엿보며 사욕을 위하여서는 무삼 일이라도 하러 드는 자!
[곤] 이럴 적에 저 자를!
[태자] 이 몸더러 저 도적을 치게 하야 주오.
[공달] 안 되리다. 지금은 안 되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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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 내게 맡겨주오.
[태자] 저리 비키오. (칼을 쑥 매어들고) 하늘이 무심치 않느니라.
이때 설효, 정면 방에 숨어 엿보고 있다가 놀라 부들부들 떨면서 뛰어나온다. 태자, 휙 돌아서서 설효를 힐끗 보며 노래를 부른다.
사르르 사르르 추운지고 북풍이 부난도다. 이에야 비키어라. 바람 막아 주리라.
[설효] (어쩔 줄을 모르고 태자를 꾹 지켜보고 섰다가 태자, 노래를 다 부르고 왼편으로 향
하려 하자) 어디로 가시려오?
[공달] 못 비켜날까!
공달과 김곤은 설효를 닥는다. 그 사이에 태자는 ?? 왼편으로 퇴장하였다.
[설효] (정면 문밖 어원을 향해 시금함을 고하고는 휘파람을 분다.)
[공달] 설효!
[설효]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더 크게 휘파람을 또 한 번 분다.)
[공달] 에잇! (날래게 설효를 친다. 설효 칼을 막는다. 그러나 그 옆에 선 김곤의 일격에 죽
는다)
[곤] (설효의 최후의 숨을 거두는 것을 보고) 에이 방정맞은! 삼생에 다시 내 눈에 보이지
말지어다!
[겸용] (등장하여) 휘파람 소리가 적실히 여기에서 들렸는데. (사방을 살핀다) 앗, 설효가!
(설효의 거꾸러져 있음을 보고) 상보에게 이 일을! (사급함을 선필에게 전하러 뛰어나가려
한다)
[곤] 역적 겸용아!
김곤은 겸용이 나가려는 것을 막아 선다. 겸용이 칼을 뺀다, 공달과 곤 웅전한다. 삼인이 어울리어 싸운다. 이윽고 겸용의 칼에 맞아 공달 죽는다. 뒤이어 김곤도 겸용에게 추격되어 그의 손에서 칼을 떨어뜨리고 만다. 어디선가 악쓰는 소리 이때에 들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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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겸용] (주춤 서서) 저것은 또 무삼 소린고! (허둥지둥하다가 제 빠르게 숨는다)
긴장된 사이 왕건, 칼을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 왼편에서 비틀거리며 들어와 무대 한편에 쓰러진다 태자, 피묻은 칼을 쳐들고 고함치며 왕건의 뒤를 쫓아 나타난다.
[태자] 이 간악한 도적 왕건아! (칼을 번쩍 들어 왕건을 친다. 왕건 마지막 숨을 거둔다.)
에이 더러워라! (칼을 씻어 칼자루에 넣는다.)
[겸용] (태자를 칠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이때 몰래 뛰어나와 배후에서 덤비려 한다)
태자, 이 칼 받으시오! (공주와 시녀 이때 등장. 이 광경을 보고 놀란다.)
[시녀] 공주님!
공주는 지니었던 칼을 빼어 겸용에게 향하여 던지며
[공주] 아아 이놈 태수야!
[겸용] 뭐! (몸을 휙 돌린다)
어느새 태수 겸요의 등에는 공주의 칼이 꽂혔다. 겸용 단말마의 소리를 발한다. 태자를 치려고 둘러대었던 겸용의 칼은 그의 손에서 힘없이 떨어진다.
[시녀] (왕건의 시체를 발견하고 놀라) 공주님! 상감마마께서!
[공주] 왕건의 시체에 엎더져) 오, 아바마마! 아바마마! (통곡)
[겸용] (억울한 눈을 번뜩이면서) 공주님! 공주님! 어이하야 저를 치시었나이까? (말을 다 마치지 못하고 푹 쓰러진다)
[공주] (원망하듯이) 태자님!
[태자] ---
[공주] 아아, 이 일을 어이하리!
[태자] 공주
[공주] (눈물을 씻으며) 태자님, 빨리 이 자리를 떠나소서. 태자님의 신상이 위태하리이다.
[태자] 공주, 공주는 어이하야 이몸을 죽이지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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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부왕의 원수를 갚으려던 겸용을 도리어 죽이시었소?
[공주] 이 몸도 모르겠나이다. 내가 어이하야 부왕을 죽인 원수를 애끼려 하는지.
[태자] 오오, 공주! (감격해 공주 가슴에 머리를 파묻는다)
시녀는 왕건의 시체 앞에 엎디어 여전히 느낄 뿐이다. 두대 뒤에서는 잔치의 풍악소리만 질
탕하다.
[막] 4막
전막과 같은 날밤. 신라 궁성내 어원의 일우에 있는 안압지변. 그 옆에 영월루. 안압지에는
[왕건] 불행중 다행으로 오늘 마침 근시하는 신하를 ???와 같이 꾸며 놓았기에 망???? 그렇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그 칼에 맞아 죽지 아니하였겠소? 이것은 직접 나의 이 몸뚱어리에다가 칼부림을 한 것이나 조금도 다름이 없소. 폐하께서는 이 왕건이가 폐하의 대궐 한복판에서 칼을 맞아 죽어도 모르는 체하고 계시었단 말씀이오?
[김부] ---
[왕건] 에이 괘씸하여라! 질탕한 잔치를 베풀어 우리로 하여금 술과 풍악에 취하게 하여 놓고 파 한편으로 칼을 들려 나의 목을 노리게 하다니 이러한 내역무도한 것이 어디 있겠소?
[김부] 그러매로 몇 번이고 내가 거듭 사과하지 않소?
[왕건] 사과가 무엇이오? 이것은 정녕코 폐하의 칙령으로써 거사된 일이 분명하오.
[김부] 짐의 칙령으로?
[왕건] 안팎이 서로 호응하야 거사함이 아니고 뭣이오?
[김부] 아니오. 아모리 타일러도 태자는 요즘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하야---
[왕건] 태자가 제정신을 못차리다니 그게 무삼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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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이오. 이래 보여도 이 몸은 이 나라의 국빈! 이일은 폐하께서 친히 책임을 지시어야 하오.
[김부] --- 지, 짐이 책임을 지다니?
[왕건] 끝끝내 회피하시겠단 말씀이오?
[김부] 그러면 좋으실 대로 하시오. 어떻게 하여야 대왕의 분이 풀리겠소?
[왕건] 태자를 친히 부르시어 나의 눈앞에서 손수 태자의 목을 버히어 주소서.
[김부] --- 이, 이 손으로 태, 태자의 목을?
[왕건] 예
[김부] (부들부들 떨며) --- 개미 한 마리 잡아보지 못한 나더러 태자의 목을?
[왕건] 못하시겠소?
[김부] 못하지오, 못하고 말고요.
[왕건] 좋소. 못하신다면 지금 저 성밖에 복병이 켜놓은 우리의 오천대군을 몰아 단박에 이
부중 과 궁중을 무찔러 버리겠소.
[김부] 대왕, 모두가 이 늙은왕의 부덕한 탓이니 --- 제발 참으오.
[왕건] 에이 이러???? 수 없다! 왕 시중!
[왕건] 일각 지체 말고 이 부중과 성중을 몰아쳐라.
[철] (신이 나서) 예. (호위병을 보고) 얘들아!
[군사들] (힘차게) 예
[철] (칼을 빼어 들며) 가자!
[군사즐] (기세 좋게) 예! (왕철을 따라서 호위병들 기세 당당하게 퇴장)
[김부] 대왕, 이 무삼 짓이오. 안되오! 안되오!
[왕건] 자! 인제 백전백승한 우리 고려 군사의 솜씨를 좀 두고 보소서. 상보.
[선필] 예
[왕건] 우리는 가지오.
[선필] 예
왕건 퇴장, 선필은 왕건의 뒤에 따르려다가 걱정스러운 듯이 주춤서서 생각더니 김부에게
가까이 간다.
[선필] (정녕스럽게) 성밖에 복병시켜 둥 오천 대군이란 대왕께서 친히 거느리시던 고려 정
병중의 정병이온데 그 대군을 어찌 당하시려고 폐하께서는 안연히 계시니이까? 오년 전 포
석정 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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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겹으로 그 참옥한 변을 또 한 번 당하실 생각이오니까? 폐하, 이러고 계실 것이 아니오라 무고한 백성을 죽이시기 전에 빨리 무삼 조처를 하소서.
[김부] 조처라니?
[선필] 별수 없소이다. 번거로운 속세에서 머리를 썩이시면 무엇하시니까? 나라를 들어 고려 대왕께 그만 맡기소서.
[김부] 항복을 하란 말이오?
[선필] 폐하께서 항복을 하시어도 고려 대왕은 원래 후덕하신 분이시라 결단코 폐하를 억울하게 하여 드리지는 아니할 것이오. 억울하게 하여 드림이 무엇이오? 도리어 폐하는 대왕의 삼국 통일에 뜻을 같이하시었다는 공으로 고려 세 나라에 가시어서 당당한 자리를 차지하시게 됨은 물론 폐하께서 귀히 여기시는 낙랑공주와 더불어 여생을 같이 하실수도 있게 되나이다.
[김부] 공주와 여생을---
[선필] 아문요. 그 애지중지하시는 공주를 친히 후궁으로 모시게 되나이다.
[김부] 하지만 짐에게 공주 있음도 짐이 이 왕위에 있음으로가 아닐까?
[선필] 이때에 결단을 아니하시면 공주고 무엇이고 다 잃게 되나이다.
[선필] 아--- 아 (괴로워하다가) 물러 가오. 물러 가오!
[선필] 예
[김부] 아니오. 상보 잠깐만! (하고 선필을 붙들어 두었다가 다시 ) 가오, 가오!
[선필] 허어 그만큼 간하였으면 짐작도 하시련만---
[김부] 알천 시냇가에서 신라 육촌이 무릎을 마조대고 이룩하여 놓은 이 나라를 나의 손으로는 안되오. 못할 일이야.
[선필] 그러면 폐하의 임의대로 하여 보소서.의신은 이 일에는 아는 체도 하지 않겠소이다.
(화가 나서 퇴장)
[김부] (깊은 한숨을 쉬며) 아아, 이 어이한 일일꼬? 정말 이 몸이 전생에 죄가 많음일까?
이 당에 벌이 내림일까? (고개를 떨어뜨리고 한?이 정회한다)
멀리서 경종이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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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 (고개를 들어) 아! 저 소리가?
경종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본다. 그쪽 하늘이 차츰 붉어진다. 김비 금히 쫓아 들어와서 무대를 횡단하여 대궐 안으로 뛰어 들어가려다가 왕을 발견하고 주춤서서 읍한다.
[비] 폐하께 아뢰오. 성밖에 복병하여 있던 고려 군사가 지금 이 부중을 향하야 행군을 시작
하였나이다.
[김부] 그러면 저 불은?
[비] 선두에 선 고려 군사가 복문을 부수려고 성문에다가 불을 놓은 줄로 아뢰나이다.
[김부] 음, 그예---
[비] 신은 이 급보를 아뢰이러 급급히 뛰어 왔사오니 폐하께서는 옥체에 번거로움이 없으시
도록 선가를 옮기심이 좋을까 하나이다.
[김부] 태자는 어디 갔느뇨?
[비] 신도 태자를 찾눈 중이오나 태자는 오늘 낮에 거짓 왕건을 왕건인 줄 알고 칼질을 한 후로
그 종적을 감추고 날았소이다.
[김부] 태자와 더불어 상의할 바가 있어 백방으로 사람을 보내어 태자를 찾아오라. 짐의 태자를 불러오라!
[비] 예.
[김부] 짐은 궐내에 머물러 있겠노라.
김부 퇴장.
[비] (혼잣말로) --- 어디로 가야 태자를 뵈올까?
이유와 김곤 등장.
[유] 시랑!
[비] 어찌되었소?
[곤] 고려 군이 천하강병이라 하였어요? 시랑 걱정 마오. 우리 군사도 고려 군에 지지 않는 강병이오. 벌떼같이 밀려드는 고려군을 우리 군사는 지금 복 문턱에서 꽉 막고 있소.
[비] 정말이오?
[곤] 정말이다 뿐이오! 이제 저 아우성 소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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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츰 멀어져 가고 있지 않소?
[비] 오오 그러면 되었소. 얼마 동안만 버리고 있으면 후백제에 기별한 견훤의 원병이 오지 않겠소? 그와 호응하야 우리가 안팎으로 치면 고려군이 제 아모리 정병일지라도 견딜 수 없을 것이오.
[곤] 암 그렇고 말고요.
[유] 내가 보는 눈에는 그렇게 기뻐할 것이 못되오. 고려군이 아직 성중을 침범치는 못하였지마는 그는 이미 부중을 에워쌀 자세를 갖추고 있소. 그렇게 되면 원군과 호응하려 하여도 우리의 손발은 아주 끊기어 버리고 말 것이 아니오? 더구나 별안간 태자께서 그 행방을 감추시매 진중의
[유] 예. 그 때문에 우리와 뜻을 같이하던 동지까지도 이상한 눈으로 우리를 보기 시작하였소.
[비] 태자께서 어디 계오실까?
[곤] 아아 딱한지기!
사람 오는 기척.
[유] (놀라) 숲 사이에 보이는 저 그림자가 무엇일꼬? 고려 군사가 숨어 들어옴이 아니오?
세사람은 각각 숲 새로 흩어져 숨는다. 그때 태자 힘없이 등장.
[태자] (무대 중앙에 우두커니 서서) --- 나는 어디로 가리. 이 몸은 어디에 가서 묻히리---
[일동] (나뭇 그늘에서 나와 보고) --- 태자님!
[태자] (일동을 한 번 휘둘러보고) 여러분 이 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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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하야 주오.
[일동] 태자님, 어디 계시었소?
[태자] 이 몸은 죽은몸, 이 몸은 더러운 몸! 이 몸은 인제 이 나라의 태자도 아니거니와 여러분과 뜻을 같이하던 한 도당도 될 수 없소.
[비] 태자님! 태자께서는 어이해 이러고 계시나이까? 국보 간난하야 밖으로 왕건은 대군을
몰아 부중을 둘러매 무고한 백성을 무찌르려 하고 있거늘 태자께서는 어이하여 이다지도 안
연히 계시오?
[태자] (말없이 눈물만 슬쩍 씻는다)
[유] 태자께서 이러시면 어찌되시나이까? 어제의 사직은 벌써 오늘의 사직이 아니온데 태자께서는 무삼 생각으로 낙랑공주에게만 싸이어 계시니이까? 어이하야 우리의 큰뜻을 잊으시었소? 이 나라의 앞길을 어이하려 하시오?
[태자] --- 이 몸을 한칼에 죽여 주오. 여러분의 소원대로 오리가리 찢어주오.
[일동] 태자님!
[태자] 차라리 오늘 낮에 칼에 죽기나 하였던들 이와 같은 욕된 꼴을 이 세상에 보이지는 아니하였을 것을---
[곤] 태자님은 지금껏 폐하를 탓하시더니 이제 태자님마저 그 간사한 왕건이가 놓은 덫에 걸리
었소. 어이하야 그것을 모르시니이까?
[태자] 왜 내가 모르리오.
[비] 아오시면 어이하야 이제야 빠져 나오시었소? 이 부중만 남겨 두고 온 신라 천하가 모조리 적의 손에 빠지고 만 이 때에---
[태자] 천겹 만겹의 거미줄에 얽히어 헤매어도 헤매어도 눈앞을 가리우는 이 거미줄!
[일동] 무서운 덫이로고!
[비] 태자께서 이리하오면 이 나라고 나라려니와 백화아가씨는 어이하려 하시니이까?
[태자] 백화? 백화도 이 나라와 같이 나는 도저히 잊지 못하겠소. 연이나 내가 이 모양으로 된 바에야 백화는 이 몸의 힘은 될 수 없소. 백화의 사랑보다도 나에게는 더 간절한 힘이 있어야 하오.
[유] 아니오. 백화 아가씨는 우리의 힘이요. 신라의 꽃이오이다. 동궁마마, 원컨데 고려의
그 새빨간 오랑캐꽃에 현혹되지 마오소서. 그 꽃은 겉으로 색은 찬란하오나 속에는 무서운
독이 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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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소.
[태자] 차라리 나는 그 독을 들이키고 싶소. 사람을 죽이는 독은 때로는 사람을 살리는 선약
도 되나니 연이나 지금의 나에게는 백화도 소용없고 낙랑도 소용없소.
[비] 태자님 힘을 내옵소서. 우리는 옥으로 부서질지언정 질그릇으로 깨어져서는 안 되오.
우리는 우리의 큰 뜻을 세우기 위하야 여기에서 간노 도지하기를 각오하사이다.
[곤] 살아서 남의 웃음거리가 되기 전에 번듯하게 죽기를 맹세하사이다.
[태자] 그 무삼 어리석은 소리오. 왕건의 그림자를 왕건인 줄 알고 드높이 칼을 들어 큰소리로 호령하던 이 못난 광대가 지금에 와서 남의 웃음거리가 아니될 양이면 어찌 죽어야 한단 말이오.
[일동] (붙들어) 태자님!
[태자] 놓으오. 이 송장을 괴롭게 하지 마오. 이 몸으로 하여금 끝없는 무덤의 길로 나아가게 하여주오. (숲 사이로 발을 옮긴다.)
[유] 어디로 가시오? 태자님!(부르고 따라 ??)
[비] (태자의 뒤를 바라보며) 아주 휘어 잡히었고나. 왕건의 요술에 아주 걸리고 말았고나.
[곤] 그까짓 아녀자에게 발목을 잡히어 국가 대사를 아주 잊으시었단 말일까? 아아, 원통한
지고! 태자가 그런 어른인 줄을 꿈에도 몰랐에라!
[비] 아니요. 태자는 우리보다도 더 깊은 것을 생각하고 계신 것 같기도 하오.
[곤] 무삼 그럴 리가---
태자의 퇴장한 반대편에서 총총히 백화 등장.
[백화] 급찬 ?으리.
[곤] 백화 아가씨 어이? 일이시오? 호올로 이 아닌 밤중에!
[백화] 태자를 뵈옵고자 급급히 왔나이다.
[비] 태자께서는 금방 여기에 계시었다가 저 길로 나가시었소.
[백화] 저 길로?
[비] 이 사빈경의 뒤를 쫓아 나가시었으니 곧 이곳으로 모시고 오시리이다. 그러나 태자께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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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일났소.
[백화] 이 몸도 벌써 다 알고 있소.
[비] 그래도 나는 그대도록 심하실 줄은 몰랐소.
[백화] 또 어찌되시었소?
[곤] 인제 구원할 길은 영영 없을까 하오.
[백화] 그러면 그 독사 같은 고려 계집아이에게 아주 빠지고야 말으셨다는 말씀이오?
[일동] (겨우) 예
[백화] (기가 막혀) 옛날부터 이 세상이란 믿지 못할 세상이라 하더니만 진실로 믿지 못할 쓴 이 세상이로고. 동궁마마 같으신 분까지 그 마음 이대도록 약하실 줄 꿈에도 몰랐에라.(느낀다)
[일동] (무언)
[백화] 하지만 인제 이일은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 할수 없는 일!
[일동] 어찌할 수 없다니 그 무삼 말씀이시오?
[백화] 지금 저 불문을 부수고 ??같이 밀려들어??? 고려 군사를 누가 막고 있는지 아시니이까?
[일동] 물론 우리 신라 군사지요.
[백화] 아니오. 낙랑공주 호올로 그 대군을 막고 있다 하니이다.
[일동] (의아하여) 공주가 호올로?
[백화] 고려 군사가 일거에 이 부종을 몰아치려는 것을 낙랑공주는 그의 아버지에게 여싸와 그렇게 못하게 하고 있나이다. 그리하여 지금 우리가 이화를 면하고 있음은 전혀 원수 낙랑의 힘. 만일 태자님께서오서 낙랑의 사랑을 거역하신다면 이백만 장안은 오늘밤이 새기 전에 피바다가 되고 마옵고 이 나라의 문물은 그 자취조차 남기지 않을 터인데 값없는 이 한몸의 욕심을 고집하야 어찌 억만 ??이 도탄에 빠짐을 수수방관할 수 있으리이까? 이 몸 일신 죽어지면 이 나라의 명 운도 위태롭지 아니하압고 억만 창생도 피를 아니 흘려도 좋삼고 고려진 중에 잡히어 간 소녀의 부친의 한 목숨도 구할 수 있삼고, 그리고 동궁마마의 공주에 대한 소원도 성취될 것이 아니오?
[곤] 그 무삼 당치 못한 말씀이시오.
[비] 안 될 말이오. 태자께서 백화 아가씨를 버리고 왕건의 부마가 되시면 그것은 적에게 항복함과 마찬가지! 급기야 이 나라는 오랑캐의 나라가 되어 죄 없는 억만 창생은 오랑캐의 발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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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굶주리고 빛나는 이 나라의 문화는 오랑캐의 말발굽에 짓밟히고 마오.
[백화] 그러나 소녀는 태자님께는 오히려 폐스런 몸인 것을!
[곤] 태자는 백화아가씨를 희생시키고까지 그 한 목숨의 안락을 꿈꾸실 분은 아니오.
[백화] 그 어른은 한 번 마음에 잡수신 일이면 그에 뚫고야 마는 어른이시오.
[곤] 아니오, 아가씨!
[백화] 옛날 현명한 장수란 싸울 때와 물러날 때를 잘 가리는 이라 하였소. 더구나 나와 같은 것은 이 나라에서는 친히 있으나 만이 있으나 매양 마찬가지 이런 목숨이나마 태자께 바칠수 있다면 이것으로도 이 몸의 소원은 이루어지오.
[일동] 아아. 기맥 히어라!
[백화] 듣잡건댄 왕건은 지금 선필 늙은이를 시켜 저 별전에서 폐하께 주안상을 권하고 있다 하거니와 이는 아마 이 부중이 이렇듯 위급하게 됨을 기화로 무삼 상????? 일을 꾀하고 있지나 아니한가 하오?
[비] --- ?????? 아닐까?
[곤] --- 글세.
[백화] 이 일을 빨리 태자께 전하시와 제발 망극지한을 남기시지 아니하시도록 하야 주옵소서.
[비] 폐하를 뵈오러 가사이다.
[곤] 이몸은 앞서 나간 이 유와 더불어 태자를 찾아보겠소.
[비] 부탁하오.
김 비는 김부를 뵈러 그리로, 김 곤은 태자를 찾으러 각각 급히 퇴장. 멀리서 고려 군사의 노랫소리 들린다.
[백화] (혼자서) --- 아니 저 소리가? (노랫소리 차츰 가까이 들린다) 고려 군사의 노랫소리가 아닐까? 아아, 사면초가! 이야말로 사면초가로고! 경애왕 사년에 황룡사 탑이 북으로 비스듬히 기울어 졌을 적에 이 나라의 명운이 기울어졌다 하더니 과연 그 전조가 맞었나 보아!(눈물을 씻으며 힘없이 퇴장)
욍철, 고려 군사를 데리고 무대를 횡단하여 궐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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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려다가 등장하는 김 부를 만난다. 김 부뒤에 선필 따랐다.
[김부] 아아, 누구나 나아가서 저 노래를 못 부르게 하라. 저 가마귀 소리 같은 노래를 못하게 하라!
[선필] 천하는 이미 고려 군사의 천하로 변하였나이다. 폐하께서 어디로 피하시어도 저 소리는 면치 못하실 것이오니 저 소리를 아니 들으시려거든 폐하께서 어여 결단을 하오소서.
[김부] 아--- 듣기 싫다! (자기의 귀를 막는다)
[선필] 전자 포석정 난리에도 그 때 경애왕께서 바로 금야의 폐하와 같이 마음을 결당하시지 못하시다가 급기야는 밀려드는 견훤의 군사에 잡히어 황공하옵게도 경애왕은 몸소 적의 칼 끝에 돌아가시고 왕후는 강음당하고, 상하 종적 공경대부는 닥치는 대로 목 버히고 부중은 불바다! 금은 보화는 빼앗기고 얼굴이 어여쁜 당년한 계집아이는 모조리 욕을 당하고, 그리하야 이백만 장안은 금일과 같은 쑥밭이 되었거늘 이런 참혹한 욕과 변을 당한 지 불과 수년! 그 때 불살리운 땅에서는 아직 풀이 아니 돋았는데 여기에서 이런 변을 또 한 번 당하시려니까? 자고로 피에 주린 군사의 성낸 이리와 같은 것이 아니오니이까?
[김부] 아아, 모두들 어디로 갔느냐? 이 나라 만조 백관은 다 어디로 갔느뇨?
[선필] 더러는 싸움터로 나아갔다 하오나 실상인즉 모조리 민가로 숨어 버렸소이다. 궁중에 머물러 있다가는 제 목숨을 부지할 수 없으므로---
[김부] 공주는?
[선필] 공주도 난을 피하였지오. 자, 이야말로 시각을 다투는 일이오니 항서에 수결하야 주옵소서.
[김부] 왜 이렇게 추근추근히 나를 괴롭게 굴꼬?
[선필] 이것은 다른 사람이 쓴 것도 아니옵고 폐하께서 애끼시는 시중 김 봉휴가 손수 초한 것이오.
[김부] 그런 것은 짐의 알바 아니니 태자를 불러 처사하라.
[선필] 폐하께서 나라와 백성을 진정 아끼실진댄 이 일은 결단코 나이 어린 태자에게 미실 일이 아니오.
[김부] 태자를 부르라, 태자를 --- 이 아비를 두고 태자는 어디 갔을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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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 괴로운 듯이 퇴장. 나뭇 그늘에 왕철 등과 더불어 숨어 있던 왕건은 이때에 나타난다.
[왕건] 에에, 또 어디로 가실꼬?
[선필] 아마도 앞뒤가 허전하시므로 태자를 찾아가시는 듯하오.
[왕건] 에에, 끈질기기도 하여라!
[선필] 이 일을 태자에게 밀려고 태자를 찾으심인지 정말 수결하실 생각이 없으심인지 하여튼 신은 좀더--- 졸라 볼까 하나이다.
[왕건] 빨리 저 뒤를 따르오.
[선필] 예. (하고 급히 퇴장)
[왕건] 태자가 여지껏 개심치 못하고 나를 비방하고 다니므로 저 신라 왕도 태자의 눈이 어려워서 그 마음을 작정 못하시는 모양이다.
[철] 정녕코 그런가 보오이다.
[왕건] 피를 흘림은 내 뜻이 아니로되 아마도 피를 보아야 이 일이 끝장이 날까보아. (생각에 잠겼다가) 왕 시중!
[철] 예.
[왕건] ???????????? 하고 있을꼬? 그 단속을 더 굳건히 아야 한시바삐 태자의 목을 버히어 오게 하라.
[철] 예. (퇴장)
[왕건] (근심스럽게 거닐다가 숲 사이에서 무엇을 발견하고) 저것이 공주가 아닐까? 아마도 무엇을 조르러 나를 찾아옴이로고.
왕건, 피하는 듯이 사라지자 공주, 누구를 찾으며 등장. 이때 태자를 찾으러 나갔던 김곤과 이 유도 등장.
[유] 공주.
[공주] 태자님 못 보시었소?
[곤] 우리도 찾으러 다니는 길이오.
[유] 공주께서는 아오실 줄 아옵는데---
[공주] 간밤에는 자객을 피하여 이 몸과 같이 있었지오. 연이나 지금은 어디로 방황하고 계오신지! 자객은 아직도 태자님을 노리고 있는 것을.
이때 태자 힘없이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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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곤] 태자님.
[공주] 빨리 이 자리를 피하시와 이 몸과 더불어 자취를 감초아 주소서. 자객의 눈이 닿지 않는 곳을 소녀는 아니이다. 얼른 이 몸을 따르소서.
[유] 아니오. 태자께옵서는 저이들과 같이 폐하를 뵈오아야 할 일이 있나이다.
[태자] 새삼스럽게 폐하는?
[유] 선필이 폐하께 매달리어 항서를 받으려 하고 있다 하나이다.
[태자] (놀라) 항서를?
[유,곤] 예.
[공주] 그러면 빨리 가소서.
[태자] 내 뒤를 따르오.
[유,곤] (같이) 예. (태자와 같이 김 곤과 이유, 급히 퇴장)
이때 왕건의 인솔로 고려 군사 수인, 왕건의 나간 쪽에서 황급히 들어선다.
[철] 공주, 금방 저 길로 나간 이가 누구시오?
[공주] 왕 시중계서는 알으실 바 아니오.
[철] (군사에게) 빨리 저자들의 뒤를 따르라!
[군사들] 예. (하며 종종걸음으로 태자의 뒤를 쫓으려 한다.)
[공주] (군사의 앞을 가로막아 서며 단호하게) 안 되오!
[철] 예?
[공주] 이 길로 그 군사를 보내실 양이면 제발 그 창검으로 이 몸을 무찌르고 그 시체를 밟고 가소서!
[철] (우뢰 같은 소리로) 공주님!
[공주] (찔러 달라는 듯이 가슴을 내대며) 자!
[철] 에이 참! (쓴 입맛을 다시며 할수 없이 비켜선다)
[왕건] (나타나며) 공주! 공주는 어이하야 나의 하는 일에 이렇게 훼방만 몰고 다니느뇨?
대체 공주는 이 국가 대사를 어이하려 함이뇨?
[공주] ---
[왕건] 공주는 태자의 부친이신 신라 왕 김 부의 후궁으로 작정된 몸임을 번연히 알면서 그의 아들과 가까이함은 어이한 일이뇨?
[공주] 누가 그 늙은신 왕의 후궁이 되겠다 하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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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까? 누구의 승낙으로 작정하시었느냐 말씀이오?
[왕건] 부왕의 칙령이로다.
[공주] 아바마마, 불효, 불충한 말씀이오나 그러한 칙령을 내리실진대 차라리 이 몸을 죽여 주오소서. 이 몸을 살려 놓고는 아바마마의 뜻대로는 못하시리이다.
[왕건] 공주!
[공주] 제발 지금 북문턱까지 쳐들어와 있는 저 오천 대군을 오늘밤 안짝으로 한 사람 빠뜨리지 마시고 죄 성밖으로 물리쳐 주오소서. 그리고 이 나라 태자와 태자의 일당을 작해하시려고 수배하신 자객을 모조리 불러 주오소서. 제발 소원이오이다.
[왕건] 그 무삼 망발의 소릴꼬? 공주는 지금 아비가 어떻게 위급한 자리에 처하였기에 그따위 소리를 하나뇨? 공주는 아비의 몸에 칼이 들어와도 아무렇지 않단 말일까?
[공주] 그러면 소녀의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겠다는 말씀이오니까? (품에서 칼을 꺼내며) 만일 부왕께서 그런 하실 생각이시라면 이 칼을 물고 이 몸은 이 자리에 ?????? 뺀다. (달빛에 칼이 번쩍인다)
[일동] (놀라) 앗!
[왕건] 공주!
[공주] 이 몸의 죽는 양을 아니 보시려거든 제발 소녀의 소원을 들어 주오소서.
[왕건] (기가 막혀 구원을 청하는 듯이 고개를 돌려 이때 마침 나타나는 선필을 보며) 상보.
[선필] (왕건의 눈치를 알아채고) 공주님, 그 칼을 거두소서. 그리고 그일은 이 몸에서 맡겨
주시고 어전으로 드옵소서. 이 몸이 대왕께 여짜와서 공주님의 소원대로 하야 드리오리다.
[공주] 정말이오?
[선필] (왕건의 눈치를 살핀다)
[왕건] 에이 참! (쓴 입맛을 다신다)
[선필] (좋도록 하여 달라는 눈치인줄 알고) 앞으로 부왕께서는 신라의 것이라면 날아가는 참새 한 마리도 죽이지 아니하신다 하시나이다.
[공주] (칼을 도로 넣으며) 그러면 또 한가지 부탁할 말씀 있소. 듣잡건대 부왕께서는 신라왕을 애써 소녀에게 가까이하려 하신다 하오나 이는 너무도 어이 없는 일! 제발 신라왕의 침전을 다른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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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옮기어서 신라왕으로 하여금 소녀의 처소에 임의로 출입하시지 못하게 하여 주소서. 늙은이의 따르시는 수작 귀치 않소.
[왕건] 누구를 닮아 낙랑의 성미가 저대도록 팩할꼬? 애초에 나는 공주의 덫으로써 태자를 잡으려 하였더니 공주는 도리어 태자의 덫에 걸리고 말았구료. 에에 나의 일생에 이와 같은 어리석은 덫을 놓아 본 적은 없는 것을---
[선필] 이럴 줄 알았으면 공주님을 아니 모시고 올 것을.
[철] 이 실수는 전혀 상보 선필의 그 꾀 때문이오. 애초에 나의 의견대로 들어오던 맡으로 신라를 쳤을 양이던 이러한 일은 없었을 것을. 에이 분한지거! 지금 일거에 신라 천지를 한 손에 휘어잡을 차비가 다 되었으면서도 공주님의 고집으로 못하고 있다니.
[선필] 왕시중은 모르시는 말씀이오. 대왕의 품으신 뜻은 되도록 불인일병하심에 있음이 아니었소? 피를 흘려 나라를 빼앗으면 나라를 잃은 그 원한이 백성의 가슴에 깊이 못 박히므로 결국 또 다시 나라를 잃게 되는 법이오. 보오, 전날 신라 삼국통일의 대공은 이루었으되 신라는 그 후에 이백 여년을 두고 하로도 평안한 날이 없었고 마침내 견훤은 백제의 유민을 거느려 군림하지 아니하였소? 그러므로 우리 고려가 만일 병력으로 신라를 칠양이면 그것은 손쉬울는지 모르지만 백년이 지나지 못하야 반드시 신라를 빙자하야 일어날 자가 없으리라고 누가 믿을 수 있겠소?
[왕건] 자아, 폐 일언하고 우선 공주의 마음을 사지 위하야 시중은 북문으로 쳐 들어온 우리 군사를 급급히 성밖으로 몰아 내치고 상보는 자객을 모조리 도로 불러들이게 하오.
[철] 대왕께 아뢰이오. 지금 이처럼 공을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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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놓은 군사를 도로 물러나게 함은 당치 아니하옵신 분부인가 하나이다.
[왕건] 이제 군사를 잠깐 성밖으로 물러서게 한다 하여도 그 동안에 신라가 별안간 강하여질 리는 없는일.
[철] 허지만---
[왕건] 나에게는 나라도 중하거니와 공주도 귀하오. 더구나 지금 신라 왕 김부는 공주를 후궁으로 줍시사고 주야로 나에게 조르매 만일 낙랑의 마음이 돌아서 그 후궁으로 들어가겠다 허락하면 만사는 나의 뜻대로 되는지라. 신라 통일의 대공은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성취될 것이니 경들은 이 며칠만 두고 공주의 마음이 태자에게서 물러나도록 힘써 봄이 좋으리라.
[철] 공주님의 그 칼날 같으신 성미를 보아하니 매우 어려운 일일까 하나이다.
[왕건] 얼른---
[철] (바깥을 향해) 얘들아! 싸움을 멈춰라!
[왕건] 칼같은 성미인지라 돌아서려 들면 매섭게 돌아서는 법이며 공주만 돌아서면 태자는 개골산으로 귀양살이????? 하면 그뿐! 그러하니 경들은 첫째, 태자에게는 상대등 유렴의 딸 백화라는 아직 성례를 아니 이루었을망정 이미 태자비로 작정된 소저가 따르고 있다는 것과 , 둘째, 태자는 의리를 앞세우는 위인이라 한 번 작정된 태자비를 두고 결단코 다른 데로 마음을 옮기지 아니한다는 것과 셋째, 태자의 뜻은 굳굳하야 아녀자의 정에 쉽사리 끄을릴 것 같지 않다는 것과--- 이런 것을 낱낱이 따져서 공주에게 들려주도록 하오.
[선필] 예. 신등의 재조껏---
[철] 그런 묘책은 오히려 공주님의 성미에 불을 질러 놓지나 않을까 신은 호올로 저어할 뿐이오이다.
[군사] 대왕께 아뢰이오. 저, 저기에 신라 제신이 오는 줄로 아뢰오.
[선필] 태자 일당에 따라 공주님도 같이 오시는 듯 하여이다.
[왕건] 공주는 어이하야 매양 저자들과 같이 다닐꼬?
[일동] 에이 참!
[왕건] 그럼 경들은 나와 같이 저 나뭇그늘에서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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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의 거동을 엿보도록 하오.
[선필등] 예. (일동, 퇴장)
공주, 그리고 태자와 그 일당인 비, 곤, 유, 등장
[공주] 조금 전에 바로 여기서 그렇게 다짐을 받았으니 인젠 아모 걱정 마오시오. (북쪽
하늘을 가리키며) 저것 보오. 하늘을 어루만지던 그 무서운 불꽃도 사라지고 군사들의 아우
성 소리도 없어지지 아니하였소?
[비] 정말 고맙소.
[곤] 일국의 존망에는 반드시 천운이 있다 하니 진실로 하늘은 우리를 버리시지 아니하시었다보오.
[공주] 태자께서는 무삼 걱정을 그대도록---
[곤] 태자님, 이제야말로 정말 우리들의 계책대로 거사할 때가 왔나이다.
[비] 고려 군사만 물러나면 여지껏 우리들과 연락이 끊어져 있던 12영문의 군사와 부중에 흩어져있는 수천의 젊은이들을 다시 수합할 수가 있지 않겠소? 그러면 우리들의 힘으로도 넉넉히 그 여호같이 간사한 선필이며 ??이 미련스런 그 왕철이까지도 한 주먹에 때려잡을 수 있소이다.
[태자] 그러면 몇 해를 두고 건곤일 척하야 보려던 우리의 포부도 이루어질 수 있을까?
[일동] 이루어지고말고요. 염려 없소이다.
[태자] 바깥 동무들에게도 빨리 이 소식을 알려 주었으면 좋으련만---
[비] 같이 가사이다.
[유,곤] 예.
삼인, 퇴장.
[태자] 공주, 나는 하릴없이 공주에게 지고야 말았구료.
[공주] 동궁마마, 마마께서 이제는 소녈 믿어 주시겠소?
[태자] 공주는 나의 가슴에 불을 지르고 말았소.불같이 타오르는 공주의 뜨거운 정을 나는 막을래야 막을 수 없구료.--- 아! 물밀 듯이 밀려오는 이 벅찬 가슴! 공주 나를 좀 안아주오.
[공주] 태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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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자] (안고) 오! 검이여, 이 복많은 사나이를 용서하야 주오. 나, 나는 내 몸을 지탱할 수 없소.
김부 등장. 태자와 공주의 뜨거운 포옹을 발견한다.
[김부] 공주, 공주는 여기에 있었구려.
[태자] (공주와 얼른 떨어져 선다)
[김부] (질투에 불타는 가슴을 억누르려고 한참 애쓰다가) 에이 천하에! (하며 손에 들고 다니던 염주를 땅바닥에 내던진다)
[태자] (염주를 주우며) 폐하, 항서는 아니 쓰시었지요?
[김부] 항서를 쓸테다. (소리를 높여) 게 누구 없느뇨?
[선필] (숨어 섰다가 이때 나타나며) 부르시었나이까?
[김부] 항서를 가지고 오라. 짐은 이 종사를 들어 왕건에게 바치겠노라.
[선필] (어리둥절하여) 예? (좋아서) 아하하--- 대왕마마! (어둠 속을 향하여 ??친다)
왕건, 왕철, 기타 고려 호위병 숲 속에서 급히 나타난다.
[태자] (당황하여) 부왕마마.
[김부] (노발대발하여) 이 아비 앞에서 공주와 그 무삼 짓이뇨?
[태자] (의아하여) 예?
[김부] 그것이 자식이 아비에게 대한 효며 신하의 임금에 대한 충이냐?
[선필] (김봉휴가 초한 항서를 받들어 정성스럽게 김부에게 올린다. 선필이가 미리 분부한 궁녀는 필묵을 들고 나타나 김부 앞에 대령한다)
[태자] 폐하, 이 종사는 폐하 한 분의 종사가 아니온데 어찌 항서에다가 임의로 수결하신단 말씀 이오니이까?
[김부] 닥쳐라!(항서에 수결하여 선필에게 준다)
[선필등] (일제히) 황공하여이다.
[태자] 폐하!
[김부] 에이 보기 싫다! (퇴장)
[공주] 아바마마. (왕건에게 몸을 던지고 느낀다)
[선필] 아하하--- 공주님, 공주님의 분부하신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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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신라의 것이라고는 참새 한 마리도 우리는 죽이지 하니하였나이다.
[태자] 급찬, 시랑, 사빈경은 어디 갔을꼬? 아아, 이로써 천년 사직은 당하였단 말일까.(땅을 치고 한동안 통곡한다. 그리고는) --- 아아, 나라이 망하야거늘 무삼 낯으로 우러러 하늘을 보며 무삼 면목으로 굽어 백성을 대하리? 살아서 이 욕을 전생에 남길진댄 차라리---
(칼을 빼어 선뜻 자결하려 한다)
[왕건] (깜짝 놀라) 앗, 저것!
[철] 이칼 놓으오! (태자의 팔을 턱 잡은 왕철은 어느새 태자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 든다)
[태자] (이미 적의 호위군의 창끝에 완전히 포위된 자기를 발견하고 염주를 들고 합장하며) 아아, 하늘아 보느냐? 인제 나는 임의로 죽지조차 못하게 됨이로고. (관을 벗고 대수포를 벗는다. 그리고는 환도까지 뗀다. 그는 이제 마의의 일개 초민이 된 것이다)
힘없이 일어서서 태자는 무거운 발을 대궐 밖으로 옮긴다.
[공주] 동궁마마.
[태자] (주춤 서며) 공주!(공주의 바라보는 태자의 두 눈에는 눈물만 꽉 괼 뿐이다.)
[공주] 어디로 가시랴 하오?
[태자] 망국여생이 정처가 있겠소!
[공주] (퇴장하는 태자의 뒤를 쫓으며) 동궁마마! (그러나 차마 따르지 못하고 결국 왕건의 품에 싣고 흐느껴 운다)
[왕건] 자! 공주 인제 이 아바마마와 같이 솔메 우리 서울로 돌아가서는 온 천하와 더불어 이 신라 통일의 대공을 축하할지어다.
[공주] (단호히) 싫소! 소녀는 못 가겠소! (태자의 뒤를 쫓으며) 태자님!
[왕건] (벼락같은 소리로) 공주! (하고 붙들려 한다)
그러나 공주는 어느새 태자의 뒤를 따라 퇴장.
[막] 5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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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으로부터 십수년 후. 개골산 (금강산) 어느 계곡. 조용한 음악에 막이 열리면 짙은 안개, 무대 전면에 자옥히 깔렸다. 이윽고 저 편에서 들리는 바람 소리!- 한동안. 안개 차츰 걷힌다. 쭈뼛쭈뼛한 수려한 산봉우리들이 어슴푸레 나타난다. 안개 위로 이마를 내놓은 그 산봉우리들은 마치 깊은 동굴에서 스며 나오는 듯한 합창 소리 그윽히 들린다.
밤은 가고 또 날이 샌다.
어둠은 스러지고
솟아나는 산봉우리!
굽이굽이 팔백리
괸 물소리 친다.
햇빛 안개를 뚫고
곤두서는 무지개!
숨쉬는 하늘과 땅!
아아! 어제는 가고
오늘 하로 ?????로
오라! 보랏빛 구름아!
듣자! 말없는 산봉우리!
내 가슴에 스치는 바람.
달린다. 고개너머
부딪쳐 몸부림치며---
깔렸던 안개 말끔 걷힌다. 무대 완연히 나타난다. 돌과 같이 웅크린 신라의 귀민 수십명, 이상의 합창을 읊조린 것이다. 그들의 두발은 바래지고 몸에 감은 남루한 베옷은 이미 삭아 주위의 산색과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강렬한 햇빛이 한줄 구름장을 뚫고 새어나와 무대 중앙에 우뚝 솟은 바위에 떨어진다. 그 바위 위에 뚜렷이 보이는 사람의 자태! 그것은 먼 하늘을 바라보고 석불처럼 정좌하여 앉은 태자다.
[유민들] (바위를 우러러보며) 밤새 안녕하시니이까, 태자님?
태자 대꾸도 하지 않고 속으로 축원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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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갑] 태자님, 아무리 하늘에 빌어도 앞산은 태연하고 구름만 오락가락. 아무 영험 없사오니 자리를 옮겨 보심이 어떠하오리이까?
태자는 역시 말이 없고 일심으로 축원만 계속!
[유민들] (일제히) 애달파라, 저 모양! 천년 사직 망친 죄를 한 어깨에 짊어지고 저렇게도 뼈를 깎는 우리 태자 애달파라!
태자, 외로운 듯이 한 손을 내젓는다.
[유민을] (동료들에게) 저것을 보오!
[유민갑] 쉬! 떠들지 말라는 분부시오.
일동, 조용해진다. 계곡에서 (어--- 어--- ) 하고 소리치는 소리 애끓이 들린다. 그 소리 다시 산울림으로 반항해 돈다. 유민들은 귀를 쭈뼛하여 듣는다. 또 울린다.
[유민병] 무슨 소리요!
[유민정] 글쎄, 듣지 못하던 소린 걸.
일동, 소리 나는 쪽을 지켜본다. 한 여자 (낙랑공주) 나타난다. 모두들 바위틈에 몸을 의지하여 숨는다. 공주, 무대 중앙에서 발을 멈추고 사방을 둘러본다. 아무 것도 발견 못한다.
[공주] (실망하여) 아아, 여기에도 역시 아니 드신 모양! (조용히 느끼며) 태자님, 산을 타고 하늘로 오르시었소? 흙을 쓰고 땅으로 드시었소? 개골산 수많은 계곡, 주름잡아 헤매어도 앞서느니 첩첩 태산! 길을 물을 짐승조차 없으니 어이된 일이시오?
[유민갑] (나타나며) 공주님이 아니시오? (다른 유민들도 공주를 눈여겨 바라본다)
[유민들] (공주를 에워싸며) 공주님이시다!
[공주] 나를 알아보는 당신네들은 누구요?
[유민갑] 나라를 잃은 신라의 유민들이오.
[공주] (유민들을 일일이 뜯어보더니) 급찬 김곤,시랑 김비, 사빈경 이유, 낭중 한공달!--- 모두 태자님을 모시고 있던 분이 아니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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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들] 우리는 하늘을 떠난 바람! 발을 붙일래야 붙일 곳이 없는 티끌이 되고 말았소!
[공주] 태자님의 소식을 모르시오? 태자님 계신 곳을 알으켜 주오. 태자님의 거취를 알 분은 당신네들 뿐일 것이오.
[유민들] (바위위를 치어다 본다)
[공주] (유민들의 시선에서 바위 위에 정좌한 사람을 발견하고) 저 돌 위에?
[유민들] (고개만 끄덕인다)
[공주] (바위 위를 우러러보며) 저 돌이 산 사람이면 저렇게 몸에 이끼가 끼고 앉은자리에 고드름이 달렸을 리 만무하오.
[유민갑] 조국의 명운을 비는 일념에 스스로의 몸을 돌보지 아니하시기 때문이요.
[공주] 신라는 이미 고려의 한 쪽이 된 것을---
[유민을] 태자님이 저렇게 고행하심은 천년 사직을 망친 죄를 속죄하여 하심일 것이오.
[공주] (눈물을 씻으며) 태자님, 이 땅에서 살으신 이 태자 한 분이 아니어도 무엇 때문에 호올로 그 죄를 지시어 산둥???? 바람, 연한 ? 여위시고 뼈까지 깍?? 하신다 하시어도 이렇게 참혹하게 그 육신을 괴롭히지 아니하시어도 될 일이오. 이리 내려오시어서 법당이나 암자로 가소서.거기서 불전에 향불 올려 편안히 앉으셔서 기도를 올리시오. 자, 어여 내려 오소서. 어여! 어여! 어여! (거센 바람 소리만 들리고 태자는 꼼짝하지 않고 앉았을 뿐이다) 아, 어이하야 말이 없으시오?
[유민들] 나라 잃은 원한 하도 기가 맥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느끼지도 못하는 돌이 되려 하심이오.
[공주] 아니오, 소녀를 피하시어 저렇게 비켜 앉으시었소.
[유민몇] 조국을 위하여 애써 주신 공주님의 정성 저의 가슴에 돌 무늬되어 또렷이 새겨져 있을 것을---
[공주] 그러면 이 몸도 태자님과 같이 돌이 되겠소. 그래서 태자님의 곁에 앉아 낮이면은 감싸 도는 구름 이불 함께 덮고 밤이 오면 반짝이는 별의 빛을 같이 받아 말없는 산과 같이 천만년 살터이오. (태자가 앉은 바위 아래 도사리고 앉는다)
[태자] (안 된다는 뜻으로 손을 내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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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들] 안되어요, 공주님!
[공주] 예?
[유민들] 태자님께서 안된다 하시어요.
[공주] (아랫입술을 깨물며) 아, 야속하여라. 태자님만 뵈오면 다정히 맞으시어 이름이라도 불러 주실 줄 알고 십년의 긴 세월을 하로같이 헤매었는데--- (느낀다)
(태자, 더 열심히 손을 내젓는다)
[유민들] (피를 짜내는 듯한 비통한 목소리로) 아, 그만 물러나세요. 공주님! 저리 물러나세요. 공주님! 공주님께서 가까이 계시면 굳어진 태자님의 가슴에 다시 피가 돌아 십년 공이 허사될까 염려하고 계시어요.
[공주] 태자님, 정말 그러시어요?
태자는 여전히 같은 동작을 계속하고 있다.
[유민들] 저것 보오소서. 저것 보오소서.
[공주] --- ??! 요즘 솔매 서울에서는 나의 이름을 신랑공주라 새로 지어 궁동 일구에서 나의 태자님의 아바님이 새 살림을 이룩하게 되었다는 소문이 떠돌아다닌다더니 태자님은 그것이 정말인 줄 생각하심이군요? 아니오. 그 소문은 천하 민심을 수습하려고 고려왕께서 공연히 꾸며내신 수작!
[유민들] (열심히) 소원이오. 태자님의 아버님과의 이야기는 제발 하지 말아 주소서. 그 소리는 태자님의 가슴을 무겁게 할 뿐이오.
[김부] (승려의 법의를 입고 조금 전에 나타나다가) 태자!
[공주] 아니 여기까지? (유민들은 김부 앞에 상감마마하며 엎딘다)
[김부] 나는 결단코 공주를 괴롭히려 온 것이 아니오. 공주의 뒤를 따라 단발령을 넘어 때에 각오한 바 있어 이미 나는---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공주] 그렇게 결심하시어 중이 되셨으면 대자대비 하신 부처님 전에 엎디어 계실 일이지 어이하야 여기에는 또?
[김부] 태자 앞에서 공주의 결백함을 밝히고 나의 지난날을 참회하려 함이오.태자, 이 아비를 용서하라. 내가 공주에게 마음을 두었던 것은 천년신라의 안락이 나의 눈을 잠깐 가리었던 까닭.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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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나 태자가 반월 성을 떠나 니 호올로 텅 빈 궁전에 남아 있을 제 나는 비로소 내가 저지른 죄가 무엇인가를 깨달았노라. 태자 공주를 도로 받으라. 공주를 받고 이 아비를 용서해라. 내가 이렇게 부탁함은 공주나 태자보다 나 스스롤 구하기 위함이요. 나의 죄를 씻기 위함이다. 이 아비로 말미암아 조국과 사랑을 한꺼번에 빼앗기고 그 괴로운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하여 그대도록 고생하는 태자를 보니 이 아비의 가슴은--- 제발 공주를 받으라.
[유민들] (비통하게) 나라를 망친 이 죄를 한 몸에 안고 괴로워 돌이 되려는 태자가 어이하여 천륜마저 거역하라 하시니이까? 상감께서 한 번 마음 잡수신 이상 공주는 상감마마의 후궁이시며 태자의 어머니시오.
[김부] --- 바다로 가면 호령하는 파도! 산에 오르면 속살거리는 바람--- 이 모두가 나라를 잃은 이 왕을 꾸짖고 비방하는 것으로밖에 아니 들리니 이제 조금이라도 ???을 씻지 않고는 나는 죽을래야 죽을수도 없??나. 공주는 어이하야 가만히 섰을꼬?
[공주] (전신을 떠는 태자를 가리키며) 아! 태자님의 저 떠시는 모양!
[유민들] 땅이 울리어요. 태자님이 괴로워하시니까 땅까지 울리어요.
태자가 몸을 추스를 때마다 땅에서는 지둥치는 소리 울린다.
[김부] (갈팡질팡하며) 태자! 내 머리 위에 하늘에서 무쇠두멍이 떨어지기 전에 빨리 내 소원을---
천둥벽력. 천지가 뒤집히는 듯한 소리. 한동안 무대는 암흑에 사로잡힌다. 은근한 주악과 더불어 개벽이 되는 천지처럼 다시 뽀오얀 광선이 흐른다. 주위의 암석은 허물어지고 화석된 태자만이 거인과 같이 우뚝 솟았다.
[유민들] 아아, 태자님이!
[공주] (놀란 눈으로 뚫어지라고 화석된 거암을 우러러 본후 어이없는 듯 김부를 치어다본다)
[김부] (역시 놀라) 태자--- 이게 어찌된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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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이 없다) 내 꼴이 보기 싫어 영영 돌이 되어 버린 게 아닐까?
[다른 유민들] (경건한 노래)
오오, 오오 기쁨과 괴로움! 웃음과 울음! 사랑과 미움! 이 모든 사바의 번거로움에서
돌이 되시었도다. 우뚝 솟은 태자님은 온누리와 한 빛깔인 태자봉이 되시었도다.
[공주] 아! 태자님! (태자봉을 힘껏 껴안는다)
[유민들] (노래 계속)
오, 유구한 천지! 영겁으로 속삭이소서. 푸른 하늘과 더불어 이 나라의 한 덩이의 돌이 된 태자님! 오! 영겁으로 속삭이소서.
김부, 역시 경건한 합장을 올리고 섰다. 노랫소리, 최고조에 달할 때에---
-막-
각 등장 인물에 대한 성격
[김부] 신라의 마지막 왕으로 육십 고개를 훨씬 넘으신 늙은이. 외모적으로는 왕의 위품을 엄하게 갖추었으나 마음이 너무 어지시어서 줏대가 없으심.
[태자] 불행히 사기에 그 이름을 잃음. 성격이 영매하고 가슴에는 불같은 포부를 가졌음.
[유렴] 몸이 비대하고 지략이 높으시고 과단성이 있는 분.
[백화] 유렴의 딸로서 태자를 따르고 고결한 처녀. 마음이 착하여 자기희생의 미덕을 가졌다.
[왕건] 김 부의 귀족적임에 대하여 활동, 이오 실무적인 무인이다.
[낙랑공주] 맺고 끊는 듯한 과단성 있는 성격. 백화가 둥근 덕성의 권화라면 낙랑은 예지의 권화라 할까?
[선필] 모사. 항상 남의 마음을 저울질할 만한 지량을 가지고 있는 노회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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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철] 미련스런 무력주의자.
[김곤] 나이 어린 태자의 동지, 나이가 어린 만큼 비분도 많고 꾀도 많고, 실망도 많음.
[김비] 이저적임. 태자의 동지 중 그중 나이 많음.35세쯤.
[이유] 뚱뚱한 호인 타이프.
[한공달] 겸손한 사람
[겸용] 흉물스런 자. 애꾸눈.
[최활] 방정맞은 늙은이.
[설효] 느릿느릿하고 끈질끈질한 성격.
기타 제반 문물, 의상 등이 신라편은 귀족적인데 대하여 고려편은 실용적임에 특히 유의할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