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여순반란 사건이 몰고 온 피해는 고흥지역도 적지 않았다. 이를 1978년에 발간한 <고흥군 향토 반공사>에 의해 면별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고흥읍 : 여순반란 사건당시 30여명의 우익 인사들이 고난을 겪었을 뿐 큰 피해는 없었다.
⁚풍양면 : 반란군에게 당시 대한청년단장 송계은이 체포되자 풍양지서로 끌고 가서 철 솥을 머리 위에 씌워놓고 가혹한 고문을 하였다.
⁚도양읍 : 여순반란사건당시 제14연대의 출신 장지필과 김영식은 반란군 대열에서 탈출 고향으로 돌아왔다. 10월 23일 반란군이 도양을 점령하고 우익인사들을 검거 학살 하려하자 장지필(張志必) 김영식 장병은 동기생인 반란군을 찾아가 설득 극구 만류했다. 그리하여 반란군은 형식적 시위에 그쳤고 지방폭도들의 횡포가 잠시 있었을 뿐 비교적 평온한 상태에서 진압되었다.
⁚ 금산면과 도화면, 포두면, 봉래면은 피해가 없었고 평온했다.
⁚점암면 : 반란사건 당시 반란군이 침입하여 지방폭도와 합류하여 우익인사 및 청년단장을 체포하는데 혈안이 되었다. 국군 진압부대가 입성하자 반란군은 운암산, 팔영산 등지로 입산 도망하여 밤이 되면 민가에 침입하여 약탈과 살인을 일삼았다. 이에 우익인사, 양민 그리고 반공 청년들은 한시도 마음놓고 지낼 수 없어 가족들과 같이 산중을 배회하면서 피난생활을 해야만 했다. 한편 천학리 청년단장 김기우를 중심으로 잔도들의 횡포를 막고 주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죽창을 무기로 보초를 서면서 자체경비를 하다가 초소에 폭도들이 침입 김기우, 조용진, 김진행, 김옥기 등 4인은 그들의 총칼에 무참히 살해 당했고 또한 성기리 박한용, 강산 이상문, 과역면 분천리 김동선 등이 이곳에 피신중 붙잡혀 처참하게 살해됐다.
이와 같이 반란사건을 통하여 인적, 물적 피해가 많았던 요인은 팔영산이 그들의 은신처로 최적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 과역면 :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나자 우익인사와 반공청년들은 미리 피난했기 때문에 무사했으나 당시 면장 김중남의 부친은 지방폭도들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었으며 남일우(호덕) 경관은 운암산 공비토벌작전에서 전사했다. 진압 10일 후 마치(馬峙)작전에서 30여명의 청년단원과 민간인들이 빨치산 유격대에게 섬멸(殲滅)되어 대서 청년단원 20여명 동강 청년단원 10여명이 희생되었다. 당시 피살된 청년단원은 황병년(광복청년단장), 장기연, 송유불, 김영현, 김두일, 안모, 최모, 신남휴, 채모 박동래, 김모 등 10여명이다.
⁚ 대서면 : 여순반란사건당시 잔악한 반란군들에게 송화봉(전면장), 신봉근(당시 면장), 김재수 등은 체포되어 현 시장터에서 총살되었고, 장봉호, 장양호(광복군 사령부 간부)는 부친 회갑시 귀향하여 뜻하지 않게 반란군에게 검거되어 면사무소 앞 도로변에서 형제가 사살되었으며, 당시 지서장 김영원 경위는 남양마을에서 붙잡혀 사살되었다. 또한 동강 청년단원, 대서 청년단원 30여명이 죽창으로 무장하여 경찰과 합동 마치 작전에서 빨치산 유격대에게 포위되어 모두 사살당했다. 당시 피살된 분은 대서 청년단장 송선섭 형인 송방섭, 송기송 등 20여명이었다.
⁚두원면 : 반란사건당시 피신중 김낙중, 황명환, 이종일, 송기오, 박모 등은 반란군에게 체포되어 그들의 총칼에 살해당했고 일부는 박양주 가옥에 방화하고 민가에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했다. 당시 순천중학 재학중인 박양주의 아들은 속절없이 화염속에 파묻혀 처참한 죽음을 당했다.
뿐만 아니라 아군의 진압으로 산으로 도주한 폭도들은 야간을 틈타서 운대리 마을회관에 잠입하여 마을청년회원과 민간인 30여명을 집단 학살했다. 이렇듯 본 군내에서 폭도들의 만행에 의하여 우익인사와 반공인사들이 희생되었다.
첫댓글 맴이 무겁구 아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