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래의 시는 감빛이다. 그의 시에는 감잎에 반짝이는 햇살과 하얀 감꽃과 홍시내음으로 가득하다. 그의 흔적을 찾아나선 며칠은 온통 회색 구름뿐인 겨울 하늘이었지만 줄곧 감냄새가 따라 다녔다. 오류동 막다른 골목을 시인 대신 지키고 있는, 키가 훌쩍 커버린 감나무를 만난 뒤로 시인의 자취를 따라 다닌 모든 길목은 감빛으로 물들었다. "감새/ 감꽃 속에 살아라// 주렁주렁/ 감꽃 달고"라고 노래했던 대로 아직 그는 한 마리 감새로 우리 속에 살고 있었다.
박용래는 1925년 충남 논산 강경읍에서 태어났다. 기차가 지나가는 강경의 모든 풍경, 채운산과 놀뫼, 황산천과 그 나루터, 옥녀봉 등에서 그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그 서정을 모두 흡수하며 성장한다. 그의 시집 전체에서 정서적 모태가 된 고향이 끊임없이 반짝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강경상업학교를 졸업한 박용래는 조선은행 서울본점으로 발령받아 상경한다. 20세가 되는 해인 1944년 조선은행 대전지점으로 전근오면서 문학적 열정을 얻게 된다. 징집영장을 받으며 은행을 사직하고, 다시 해방을 맞이하면서 시의 혼을 갖게된 박용래는 1946년 정훈, 박희선 등과 <동백시인회>를 조직하고『동백』을 간행하면서 습작에 몰두한다. 이 무렵 줄곧 그의 영향을 준 박목월을 만나고, 1955년《현대문학》에 박두진의 추천을 완료하면서 문학적 지평을 열게 된다.
그의 시세계는 자연과 생명에 대한 연민과 공감으로, 청록파에 이은 전통적 리리시즘의 새로운 계승으로, 전통적 한의 정서 혹은 민중의 삶의 터전에 둔 문학적 토양 등 다양한 각도로 평가되었다. 모두 시인의 시 속에 처음부터 끝까지 넘치고 있는, 적막과 주황빛 햇살과 세상의 모든 존재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을 잘 읽어낸 것이리라. 이처럼 그의 시적 관심은 마지막까지 오직 독자적인 서정을 향토적인 사유 속에 집어넣는 것이었다. 한국 현대사의 소용돌이가 그를 더욱 토속적인 세계로 끌고 가지 않았을까.
세상 구차함을 하얀 무명올로 가리우자
세상 억울함을 하얀 무명올로 가리우자 (「학의 落淚」에서)
오는 봄비는 겨우내 묻혔던 김칫독 자리에 모여 운다
오는 봄비는 헛간에 엮어 단 시래기 줄에 모여 운다
하루를 섬섬히 버들눈처럼 모여 서서 우는 봄비여 (「그 봄비」에서)
위에 보이듯 그의 시세계 속에는 사소하고, 소외되고, 버려지고, 사라진 것들에 대한 끊임없는 애정과 연민이 줄기차게 흐른다. 아무리 깊은 바다라도 물결에 닿는 빛살로 반짝이듯이 작고 잊혀지고 외로운 것들은 존재의 심연은 읽어내는 물비늘이었다. 그 허무한 아름다움들에 천착하고 있는 언어는 곧장 눈물과 상관되는 것이리라. 콩나물이나 하얀 무명올, 버들눈 같은 미세한 몸짓은 존재로서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눈물겨운 의지가 아닐까. 삶에 대한 응어리가 존재에 대한 눈물겨움으로 나타나, 그는 끊임없이 눈물줄기를 닦는 '눈물의 시인'으로 불렸던 것이리라.
시인은 1965년 대전시 오류동 17-15번지에 정착하면서 택호를 청시사(靑枾舍)라 칭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교사라는 사회적 직업을 버리고 전업시인으로 집을 지키게 되는데, 시의 푸른 터전으로, 시혼의 샘터로 자리잡는 이 청시사에서 첫시집『싸락눈』(1969)을 비롯한『강아지풀』(1975),『백발의 꽃대궁』(1979)등의 시집이 탄생하게 된다.
시집 제목에서만도 읽혀지듯이 박용래의 시세계는 향토색이 짙다. 그는 시를 외워서 썼다고 한다. 가슴에 담고 다니며 계속 언어를 고르고 외워 입 속에서 한 편의 시로 외워질 때 비로소 종이에 옮겼다고 한다. 낱말 하나하나, 마음으로 음미하며 정성을 다한 시의 정신이 정제된 시어에 그대로 드러난다. 언어에 대한 예민함과 결벽이 그가 얼마나 시에 순절한 위인이었던가를 말해주는 것이리라. 그래서 그는 자기 작품을 거의 외우는 시인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그는 자신을 시의 가랑잎을 되씹고 씹는 바람 속 노래라고 읊지 않았을까.
청시사는 박목월시인을 비롯한 한성기, 임강빈, 신정식, 홍희표, 최상규 등 글쟁이들과 이종수, 최종태, 권영우 등 예술가들이 드나드는, 가슴 더운 이들의 단골 술자리며 문학 사랑방이었다. 처음엔 꽃밭, 채소밭이 넓었던 이 초가삼간은 1973년 석조 슬라브의 현대식 주택으로 고쳐지어진다. 이 세월을 지켜본 감나무는 홀로 빈집을 지키던 시인의 뿌리 깊은 친구였다. 타향인 한밭에서 끊임없이 고향의 서정 속으로 달려가게 하던 친구. 박용래 시에서 유독 감이 많은 소재가 되고 감빛·감냄새가 가득한 것은 이 감나무 때문이리라. 아래는 한 시인에게 보낸 편지글의 부분이다.
-무성한 창 밖의 감나무가 방안에까지 들어올 듯 합니다. 집을 찾는 사람이 감나무가 너무 가까운 거리에 있어 답답하다고 합니다만 나는 절대로 그 나무를 벨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한 그루 감나무가 무료한 朝夕을 한없이 위안해 줍니다. (후략)-
1980년 향년55세로 불현듯 시인은 지상을 떠나고, 남은 사람들은 대전 근교 산내의 천주교 묘지에 시인을 묻었다. 그가 그리운 세상은 1984년 10월 대전 보문산 공원에 박용래 시비를 세워놓고 한밭 곳곳에 남아 있는 그의 울음을 듣는다. 버드내 기슭, 목척교, 중앙시장 먹자골목 대포집들, 오류동 근처의 선술집들, 유성 들판을 비롯한 한밭 근교 등 술친구를 찾아 끝없이 한밭을 순례를 하던 시인의 울음을.
접시술은 마시던 시인은 가고 없다. 허름한 제재소와 물엿 가게, 짐꾼들의 요기를 돕는 옴팡집 주막이 있던 동네는 이제 지하철 공사가 한창이고, 교통정체가 심한 중심로가 되었다. 시인이 종종 들리던 골목 앞 막걸리집은 고급 수입가구점이 되어 있었다. 작품 속에도 있는 <홍시 있는 골목>은 대로에서 한 걸음 꺾어든 막다른 골목길로 초라하다. 오직 키 큰 감나무 한 그루만이 세기가 바뀐 지금도 시인의 서재 앞 마당가에 선 채 까치밥 두어 개 높다랗게 매달고 있었다.
반쯤 들창 열고 본다.
드문드문 상고머리 솔밭
넘어가는 누런 해
반쯤만 본다.
잉잉 우는 전신주
귀퉁이에 매달린 연 꼬리
아슬히 비낀 소년의 꿈도
반의 반쯤만 본다 (「물기 머금 풍경2」에서)
반쯤, 반의 반쯤만이라도 세상을 보고 싶어했던 박용래의 눈물은 이제 이 사이버 시대에 우리에게 어떤 향기로 전해지는 걸까. 상치꽃은 상치 대궁만큼 웃는다고 했던 시인의 웃음은 어떤 노래로 흐르게 걸까. 시인 떠난 후 급속도로 변해버린, 정보가 최고의 선이 된 인터넷 현실은 그가 쏟아 놓은 눈물을 이해할 수 있을까.
시인으로 산다는 것은 손때 묻은 단지팽이를 돌리는, 그 팽이에 다시 크레용 색칠하는 일이리라. 멈추면 때묻은 현실이지만, 돌리면 눈부신 서정의 아름다움으로 차오르는 언어의 세계. 그 마술 같은 슬픔이 시인의 노래가 된다. 그래서 시인은 울 수밖에 없으리라.
한때 나는 한 봉지 솜과자였다가
한때 나는 한 봉지 붕어빵였다가
한때 나는 좌판에 던져진 햇살였다가
중국집 처마밑 鳥籠 속의 새였다가
먼 먼 윤회 끝
이제는 돌아와
오류동의 동전 (「오류동 동전」)
우리는 아직 시인의 울음이 필요하다. 외롭고 깊은 그리움을 위하여, 무엇보다 인간적인 슬픔을 위하여. 오류동의 동전이 되었던 그는 이제 이 사이버 문화 속에서 무엇이 되어 있을까. 아마도 사람들의 잠을 재우는 창가 달빛이나, 사람들의 잠을 깨우는 자명종시계가 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