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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 百濟本紀
卷第二十三~卷第二十八
三國史記卷第二十三.
삼국사기 권 제 23
百濟本紀第一.
始祖<溫祚王>·<多婁王>·<己婁王>·<盖婁王>·<肖古王>.
백제본기 제 1
시조 온조왕, 다루왕, 기루왕, 개루왕, 초고왕.
○<百濟>始祖<溫祚王>, 其父, <鄒牟>, 或云<朱蒙>. 自<北扶餘>逃難, 至<卒本扶餘>. <扶餘>王無子, 只有三女子, 見<朱蒙>, 知非常人, 以第二女妻之. 未幾, <扶餘>王薨, <朱蒙>嗣位. 生二子, 長曰<沸流>, 次曰<溫祚>.[或云: "<朱蒙>, 到<卒本>, 娶<越郡>女, 生二子."] 及<朱蒙>在<北扶餘>所生子, 來爲太子. <沸流>·<溫祚>, 恐爲太子所不容, 遂與<鳥干{烏干}> ·<馬黎>等十臣南行, 百姓從之者, 多. 遂至<漢山>, 登<負兒嶽>, 望可居之地, <沸流>欲居於海濱. 十臣諫曰:"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 難得之勢, 作都於斯, 不亦宜乎?" <沸流>不聽, 分其民, 歸< 鄒忽>以居之. <溫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 是<前漢><成帝><鴻嘉>三年也. <沸流>以< 鄒>, 土濕水鹹, 不得安居, 歸見<慰禮>, 都邑鼎定, 人民安泰, 遂慙悔而死, 其臣民皆歸於<慰禮>. 後以來時百姓樂從, 改號<百濟>. 其世系與<高句麗>, 同出<扶餘>, 故以<扶餘>爲氏.[一云: 始祖<沸流王>, 其父<優台>, <北扶餘>王<解扶婁>庶孫. 母<召西奴>, <卒本>人<延 勃>之女, 始歸于<優台>, 生子二人, 長曰<沸流>, 次曰<溫祚>. <優台>死, 寡居于<卒本>. 後<朱蒙>不容於<扶餘>, 以<前漢><建昭>二年, 春二月, 南奔至<卒本>, 立都號<高句麗>, 娶<召西奴>爲妃. 其於問{開} 基創業, {頗} 有內助, 故<朱蒙>寵接之特厚, 待<沸流>等如己子. 及<朱蒙>在<扶餘>所生<禮>氏子<孺留>來, 立之爲大子{太子} , 以至嗣位焉. 於是, <沸流>謂弟<溫祚>曰: "始, 大王避<扶餘>之難, 逃歸至此, 我母氏傾家財, 助成邦業, 其勸勞多矣. 及大王厭世, 國家屬於<孺留>, 吾等徒在此, 鬱鬱如 贅, 不如奉母氏, 南遊卜地, 別立國都." 遂與弟率黨類, 渡<浿>·<帶>二水, 至< 鄒忽{彌鄒忽}> 以居之. 『北史』及『隋書』皆云: "<東明>之後有<仇台>, 篤於仁信. 初立國于<帶方>故地, <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 遂爲東夷强國." 未知孰是.]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북한본』.
백제의 시조 온조왕은 아버지가 추모이다. 혹은 주몽이라고도 한다. 주몽은 북부여로부터 난을 피하여 졸본 부여에 이르렀다. 부여왕은 아들이 없고 세 명의 딸만 있었는데, 주몽을 본 후, 그가 비상한 사람임을 알고는 그에게 둘째 딸을 시집보냈다. 그 후 얼마 안되어 부여왕이 죽고 주몽이 뒤를 이었다. 주몽은 두명의 아들을 낳았다. 맏아들은 비류, 둘째 아들은 온조라고 한다.[혹은 '주몽이 졸본에서 월군 여자를 취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고도 한다.] 주몽이 북부여에서 낳았던 아들이 이곳에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자신이 태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걱정되어, 마침내 오간·마려 등 열 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 지방으로 떠났다. 백성 가운데 그들을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는 한산에 도착하여 부아악에 올라가 거주할만한 곳을 찾았다. 비류는 바닷가에 거주하기를 원하였다. 열 명의 신하가 간하여 말했다.
"이곳 하남 땅만이 북쪽으로는 한수가 흐르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들이 보이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습니다. 이러한 천험의 요새는 다시 얻기 어렵습니다.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들을 나누어 미추홀로 가서 터를 잡았다.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로 하여금 보좌하게 하고, 국호를 십제라고 하였다. 이 때가 전한 성제 홍가 3년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토지가 습기가 많고, 물에 소금기가 있어 편히 살 수가 없다고 하여 위례로 돌아왔다. 그는 이곳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태평한 것을 보고는 부끄러워 하며 후회하다가 죽었다. 그의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위례로 돌아왔다. 그 후 애초에 백성들이 즐거이 따라왔다고하여 국호를 백제로 바꾸었다. 그의 조상은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같이 나왔기 때문에 '부여'를 성씨로 삼았다.[시조 비류왕의 아버지는 우태이니,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이었다. 어머니는 소서노이니 졸본 사람 연타취발의 딸이다. 그녀가 처음 우태에게 시집와서 두 아들을 낳았다. 첫째는 비류, 둘째는 온조였다. 어머니는 우태가 죽은 뒤 졸본에서 혼자 살았다. 그 후 주몽이 부여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자, 전한 건소 2년 봄 2월,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도착하여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으며, 소서노에게 장가들어 그녀를 왕비로 삼았다. 주몽이 나라의 기초를 개척하며 왕업을 창시함에 있어서 소서노의 내조가 매우 컸으므로, 주몽은 소서노를 극진히 사랑했고, 비류 등을 자기 소생과 같이 대우하였다. 주몽은 부여에서 낳았던 예씨의 아들 유류가 오자 그를 태자로 삼았다. 그 후 그가 주몽의 뒤를 잇게 되었다. 이 때 비류가 아우 온조에게 말하기를 "처음 대왕께서 부여의 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도망하여 왔을 때, 우리 어머니가 가산을 내주어 나라의 기초를 세우는 위업을 도와 주었으니, 어머니의 조력과 공로가 많았다. 그러나 대왕께서 돌아가시자, 나라가 유류에게 돌아갔다. 우리가 공연히 여기에 있으면서 쓸모없는 사람같이 답답하고 우울하게 지내는 것 보다는, 차라리 어머님을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살 곳을 선택하여 별도로 도읍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라 하고, 마침내 그의 아우와 함께 무리를 이끌고 패수와 대수를 건너 미추홀에 와서 살았다는 설도 있다. 한 편, [북사]와 [수서]에는 모두 "동명의 후손 중에 구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이 어질고 신의가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대방 옛 땅에 나라를 세웠는데, 한 나라 요동 태수 공손도가 자기의 딸을 구태에게 시집보냈고, 그들은 마침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어느 주장이 옳은지 알 수 없다.]
○元年, 夏五月, 立<東明王>廟.
원년 여름 5월, 동명왕의 사당을 세웠다.
○二年, 春正月, 王謂群臣曰: "<靺鞨>連我北境, 其人勇而多詐, 宜繕兵積 , 爲拒守之計." 三月, 王以族父<乙音>, 有智識膽力, 拜爲右輔, 委以兵馬之事.
2년 봄 정월, 왕이 군신들에게 말했다.
"말갈이 우리의 북부 국경과 인접하여 있는데, 그 사람들은 용맹스러우면서도 거짓말을 잘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병기를 수선하고 식량을 저축하여, 그들을 방어할 계획을 세워야 한다."
3월, 왕이 그의 재종숙부 을음이 지혜와 담력이 있다 하여 우보로 임명하고, 그에게 군사 관계의 임무를 맡겼다.
○三年, 秋九月, <靺鞨>侵北境, 王帥勁兵, 急擊大敗之, 賊生還者十一二. 冬十月, 雷. 桃李華.
3년 가을 9월, 말갈이 북쪽 국경을 침범하였다. 왕은 정예군을 이끌고 재빨리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격파하였다. 적군 중에 살아 돌아간 자가 열 사람 중에 한 두 명이었다.
겨울 10월, 우레가 쳤고 복숭아와 오얏 꽃이 피었다.
○四年, 春夏, 旱, 饑, 疫. 秋八月, 遣使<樂浪>修好.
4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어 흉년이었다. 전염병이 돌았다.
가을 8월, 낙랑에 사신을 보내 우호관계를 맺었다.
○五年, 冬十月, 巡撫北邊, 獵獲神鹿.
5년 겨울 10월, 왕이 북쪽 변경을 순행하면서 사냥하여 신기한 사슴을 잡았다.
○六年, 秋七月辛未{辛卯} 晦, 日有食之.
趙炳舜. 『三國史節要』.
6년 가을 7월 그믐 신미일에 일식이 있었다.
○八年, 春二月, <靺鞨>賊{兵} 三千來圍<慰禮城>, 王閉城門不出. 經旬, 賊糧盡而歸. 王簡銳卒, 追及<大斧峴>, 一戰克之, 殺虜五百餘人. 秋七月, 築<馬首城>, 竪<甁山>柵. <樂浪>太守使告曰: "頃者, 聘問結好, 意同一家, 今逼我疆, 造立城柵, 或者其有蠶食之謀乎? 若不 舊好, 城破柵, 則無所猜疑. 苟或不然, 請一戰以決勝負." 王報曰: "設險守國, 古今常道, 豈敢以此, 有 於和好? 宜若執事之所不疑也. 若執事恃强出師, 則小國亦有以待之耳." 由是, 與<樂浪>失和.
趙炳舜. 『三國史節要』.
8년 봄 2월, 말갈군 3천명이 침입하여 위례성을 포위했다. 왕은 성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 열흘이 지나자 적은 군량이 떨어져 돌아갔다. 왕은 정예군을 선발하여 대부현까지 추격하여 단번에 이기고, 적병 500여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가을 7월, 마수성을 쌓고 병산에 목책을 세웠다. 낙랑 태수가 사람을 보내 말했다.
"지난 날 서로 사신을 교환하고, 우호관계를 맺어 한 집안과 같이 여기고 있는 터에, 지금 우리의 영역에 접근하여 성을 쌓고 목책을 세우고 있으니, 혹시 우리 땅을 점점 차지하려는 계획이 아닌가? 만일 옛날의 우호관계를 유지하려면, 성을 허물고 목책을 제거하여, 즉시 억측과 의심을 하지 않도록 하라!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전투로 승부를 결정내보자!"
왕이 이에 대답하였다.
"요새를 설치하여 나라를 수비하는 것은 고금의 상도이다. 어찌 이 문제로 화친과 우호관계에 변함이 있겠는가? 이는 당연히 그대가 의심할 일이 아니다. 만일 당신이 강한 것을 믿고 군사를 출동시킨다면, 우리 또한 이에 대응할 뿐이다."
이로 말미암아 낙랑과 우호관계가 단절되었다.
○十年, 秋九月, 王出獵, 獲神鹿, 以送<馬韓>. 冬十月, <靺鞨>寇北境. 王遣兵二百, 拒戰於<昆彌川>上. 我軍敗績, 依<靑木山>自保. 王親帥精騎一百, 出<烽峴>, 救之. 賊見之, 卽退.
10년 가을 9월, 왕이 사냥하다가 신기한 사슴을 잡았다. 이를 마한에 보냈다.
겨울 10월, 말갈이 북부 국경을 침략하였다. 왕이 200명의 군사를 보내 곤미천에서 싸웠다. 그러나 우리 군사가 패하여 청목산을 거점으로 자체 수비를 하고 있었다. 왕은 직접 100명의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봉현으로 나와 구원하였다. 적들이 이를 보고 즉시 퇴각하였다.
○十一年, 夏四月, <樂浪>使<靺鞨>襲破<甁山>柵, 殺掠一百餘人. 秋七月, 設<禿山>·<狗川>兩柵, 以塞<樂浪>之路.
11년 여름 4월, 낙랑이 말갈로 하여금 병산의 목책을 습격해서 파괴한 다음 1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 잡았다.
가을 7월, 독산과 구천 두 곳에 목책을 설치하여 낙랑으로 가는 도로를 차단하였다.
○十三年, 春二月, 王都老 化爲男. 五虎入城. 王母薨, 年六十一歲. 夏五月, 王謂臣下曰: "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 侵 疆境, 少有寧日. 今妖祥屢見, 國母棄養, 勢不自安, 必將遷國. 予昨出巡, 觀<漢水>之南, 土壤膏 . 宜都於彼, 以圖久安之計." 秋七月, 就<漢山>下, 立柵, 移<慰禮城>民戶. 八月, 遣使<馬韓>, 告遷都. 遂畵定疆 , 北至<浿河>, 南限<熊川>, 西窮大海, 東極<走壤>. 九月, 立城闕.
13년 봄 2월, 서울에서 늙은 할미가 남자로 둔갑했고, 다섯 마리의 호랑이가 성 안으로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가 사망하였다. 나이 61세였다.
여름 5월, 왕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다. 그들이 변경을 침공하여 편안한 날이 없다. 황차 요즈음에는 요사스러운 징조가 자주 보이고, 어머님이 세상을 떠나셨으며, 나라의 형세가 불안하다.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가 어제 순행하는 중에 한수의 남쪽을 보니, 토양이 비옥하였다. 따라서 그곳으로 도읍을 옮겨 영원히 평안할 계획을 세워야겠다."
가을 7월, 한산 아래에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백성을 이주시켰다.
8월, 마한에 사신을 보내 도읍을 옮긴다는 것을 알렸다. 마침내 국토의 영역을 확정하였다. 북으로는 패하에 이르고, 남으로는 웅천이 경계이며, 서로는 큰 바다에 닿고, 동으로는 주양에 이르렀다.
9월, 성과 대궐을 수축하였다.
○十四年, 春正月, (+來) 遷<(+漢山)> 都. 二月, 王巡撫部落, 務勸農事. 秋七月, 築城<漢江>西北, 分<漢城>民.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14년 봄 정월, 도읍을 옮겼다.
2월, 왕이 부락을 순회하면서 백성들을 위로하고 농사를 장려하였다.
가을 7월, 한강 서북방에 성을 쌓았다. 그곳에 한성 주민의 일부를 이주시켰다.
○十五年, 春正月, 作新宮室, 儉而不陋, 華而不侈.
15년 봄 정월, 새 궁실을 지었다. 궁실은 검소하면서도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았다.
○十七年, 春, <樂浪>來侵, 焚<慰禮城>. 夏四月, 立廟以祀國母.
17년 봄, 낙랑이 침입하여 위례성을 불태웠다.
여름 4월, 사당을 세우고 왕의 어머니에게 제사지냈다.
○十八年, 冬十月, <靺鞨>掩至, 王帥兵, 逆戰於<七重河>, 虜獲酋長<素牟>, 送<馬韓>, 其餘賊盡坑之. 十一月, 王欲襲<樂浪><牛頭山城>, 至<臼谷>, 遇大雪, 乃還.
18년 겨울 10월, 말갈이 습격해왔다.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칠중하에서 그들과 싸웠다. 추장 소모를 생포하여 마한에 보내고, 그 나머지는 모두 생매장하였다.
11월, 왕이 낙랑의 우두산성을 습격하기 위하여 구곡까지 갔다. 그러나 눈이 크게 내렸으므로 되돌아왔다.
○二十年, 春二月, 王設大壇, 親祠{祀} 天地, 異鳥五來翔.
趙炳舜. 『三國史節要』.
20년 봄 2월, 왕이 큰 제단을 설치하고 천지신명에게 직접 제사를 지냈다. 이상한 새 다섯 마리가 그 위를 날았다.
○二十二年, 秋八月, 築<石頭>·<高木>二城. 九月, 王帥騎兵一千, 獵<斧峴>東, 遇<靺鞨>賊, 一戰破之, 虜獲生口, 分賜將士.
22년 가을 8월, 석두·고목의 2성을 쌓았다.
9월, 왕이 1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부현 동쪽 지방에서 사냥하다가, 말갈의 도적을 만나 단번에 물리쳤다. 이 때 잡은 포로들을 장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二十四年, 秋七月, 王作<熊川>柵. <馬韓>王遣使責讓曰: "王初渡河, 無所容足, 吾割東北一百里之地, 安之, 其待王不爲不厚. 宜思有以報之, 今以國完民聚, 謂莫與我敵, 大設城池, 侵犯我封疆, 其如義何?" 王慙, 遂壞其柵.
24년 가을 7월, 왕이 웅천 목책을 세웠다. 마한왕이 사신을 보내 책망하였다.
"왕이 애초에 강을 건너와 발 붙일 곳이 없을 때, 나는 동북방의 100리 땅을 주어 살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왕을 후하게 대우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마땅히 이에 보답할 생각을 해야 할 것인데, 지금 나라가 안정되고 백성들이 모여들어 대적할 자가 없다고 생각하여, 성과 연못을 크게 만들고 우리의 강토를 침범하니, 이것이 어찌 의리라고 할 수 있는가?"
왕이 부끄러워하며 목책을 허물었다.
○二十五年, 春二月, 王宮井水暴溢. <漢城>人家馬生牛, 一首二身. 日者曰: "井水暴溢者, 大王勃興之兆也, 牛一首二身者, 大王幷 國之應也." 王聞之喜, 遂有幷呑<辰>·<馬>之心.
25년 봄 2월, 왕궁의 우물이 엄청나게 넘쳤다. 한성의 민가에서 말이 소를 낳았다. 머리는 하나였으며, 몸은 둘이었다. 점치는 자가 말했다.
"우물이 엄청나게 넘친 것은 대왕께서 융성할 징조이며, 하나의 머리에 몸이 둘인 소가 태어난 것은, 대왕께서 이웃 나라를 합병할 징조입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기뻐하여, 마침내 진한과 마한을 합병할 생각을 하게 되었다.
○二十六年, 秋七月, 王曰: "<馬韓>漸弱, 上下離心, 其勢不能又{久} . 爲他所幷, 則唇亡齒寒, 悔不可及. 不如先人而取之, 以免後艱." 冬十月, 王出師, 陽言田獵, 潛襲<馬韓>, 遂幷其國邑, 唯<圓山>·<錦峴>二城固守不下.
趙炳舜. 『三國史節要』.
26년 가을 7월, 왕이 말했다.
"마한이 점점 약해지고 임금과 신하가 각각 다른 생각을 하고 있으니, 그 국세가 오래 유지될 수 없다. 만일 다른 나라가 이들을 합병해 버린다면 순망치한이 되어, 그 때는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차라리 남보다 먼저 빼앗아 후환을 없애는 것이 낫겠다."
겨울 10월, 왕이 사냥을 간다고 하면서, 군사를 출동시켜 마한을 기습하였다. 마침내 마한을 합병하였는데, 오직 원산과 금현 두 성만은 굳게 수비하고 항복하지 않았다.
○二十七年, 夏四月, 二城降, 移其民於<漢山>之北, <馬韓>遂滅. 秋七月, 築<大豆山城>.
27년 여름 4월, 원산과 금현 두 성이 항복하였다. 그곳의 백성들을 한산 북쪽으로 이주시켰다. 마한이 마침내 멸망하였다.
가을 7월, 대두산성을 쌓았다.
○二十八年, 春二月, 立元子<多婁>爲太子, 委以內外兵事. 夏四月, 隕霜害麥.
28년 봄 2월, 왕의 맏아들 다루를 태자로 삼고, 그에게 서울과 지방의 군사에 관한 일을 맡겼다.
여름 4월, 서리가 내려 보리가 피해를 입었다.
○三十一年, 春正月, 分國內民戶, 爲南北部. 夏四月, 雹. 五月, 地震. 六月, 又震.
31년 봄 정월, 국내의 민가들을 나누어서 남북부를 만들었다.
여름 4월, 우박이 내렸다.
5월, 지진이 났다.
6월, 지진이 다시 났다.
○三十三年, 春夏大旱. 民饑相食, 盜賊大起, 王撫安之. 秋八月, 加置東西二部.
33년, 봄과 여름에 큰 가뭄이 들었다. 백성들이 굶주려 서로 잡아 먹었으며, 도적이 많이 생기자, 왕이 이들을 위무하여 안정시켰다.
가을 8월, 동부와 서부의 2부를 더 설치하였다.
○三十四年, 冬十月, <馬韓>舊將<周勤>, 據<牛谷城>叛. 王躬帥兵五千, 討之, <周勤>自經. 腰斬其尸, 幷誅其妻子.
34년 겨울 10월, 마한의 옛장수 주근이 우곡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왕이 직접 5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하였다. 주근은 목매어 자결하였다. 그 시체의 허리를 자르고 처자들도 죽였다.
○三十六年, 秋七月, 築<湯井城>, 分<大豆城>民戶, 居之. 八月, 修葺<圓山>·<錦峴>二城, 築<古沙夫里城>.
36년 가을 7월, 탕정성을 쌓고, 대두성 주민의 일부를 이주시켰다.
8월, 원산·금현의 두 성을 수리하고, 고사부리성을 쌓았다.
○三十七年, 春三月, 雹大如 子, 鳥雀遇者死. 夏四月, 旱, 至六月乃雨. <漢水>東北部落饑荒, 亡入<高句麗>者一千餘戶, <浿>·<帶>之間, 空無居人.
37년 봄 3월, 크기가 달걀 정도인 우박이 내려 새가 맞아 죽었다.
여름 4월부터 가물다가 6월에 이르러서야 비가 내렸다. 한수의 동북 부락에 흉년이 들어, 고구려로 도망간 자가 1천여 호에 달하였고, 패수와 대수 사이에는 사는 사람이 없었다.
○三十八年, 春二月, 王巡撫, 東至<走壤>, 北至<浿河>, 五旬而返. 三月, 發使勸農桑, 其以不急之事擾民者, 皆除之. 冬十月, 王築大壇, 祠{祀} 天地.
趙炳舜. 『三國史節要』.
38년 봄 2월, 왕이 순무하여 동으로 주양, 북으로 패하까지 갔다가 50일만에 돌아왔다.
3월, 왕이 사람을 보내 농업과 잠업을 권장하고, 급하지 않은 일로 백성들을 괴롭히는 부역을 모두 없앴다.
겨울 10월, 왕이 큰 제단을 쌓고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냈다.
○四十年, 秋九月, <靺鞨>來攻<述川城>. 冬十一月, 又襲<釜峴城>, 殺掠百餘人, 王命勁騎二百, 拒擊之.
40년 가을 9월, 말갈이 술천성을 침공하였다.
겨울 11월, 말갈이 다시 부현성을 습격하여 백여 명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왕이 2백 명의 정예 기병을 보내 방어하였다.
○四十一年, 春正月, 右輔<乙音>卒, 拜北部<解婁>爲右輔. <解婁>, 本<扶餘>人也. 神識淵與{奧} , 年過七十, 旅{ } 力不愆, 故用之. 二月, 發<漢水>東北諸部落人年十五歲以上, 修營<慰禮城>.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41년 봄 정월, 우보 을음이 사망하자, 북부의 해루를 우보로 임명하였다. 해루는 본래 부여 사람이었다. 그는 도량이 넓고 식견이 깊으며, 70세가 넘었으나, 체력이 강하여 등용한 것이다.
2월, 한수 동북의 모든 부락의 15세 이상 되는 장정을 징발하여 위례성을 수리하였다.
○四十三年, 秋八月, 王田<牙山>之原五日. 九月, 鴻 百餘集王宮. 日者曰: "鴻 , 民之象也, 將有遠人來投者乎!" 冬十月, <南沃沮><仇頗解>等二十餘家, 至<斧壤>, 納款. 王納之, 安置<漢山>之西.
43년 가을 8월, 왕이 5일 동안 아산 벌에서 사냥하였다.
9월, 1백여 마리의 기러기가 왕궁에 모였다. 점치는 자가 말했다.
"기러기는 백성의 상징이므로, 장차 먼 곳에서 귀순하여 오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겨울 10월, 남옥저의 구파해 등 20여 명이 부양에 와서 귀순하였다. 왕은 이들을 받아들여 한산 서쪽에 거주하도록 하였다.
○四十五年, 春夏大旱, 草木焦枯. 冬十月, 地震, 傾倒人屋.
45년, 봄과 여름에 큰 가뭄이 들어 초목이 말랐다.
겨울 10월, 지진이 발생하여 백성들의 가옥이 기울거나 쓰러졌다.
○四十六年, 春二月, 王薨.
46년 봄 2월, 왕이 사망하였다.
○<多婁王>, <溫祚王>之元子. 器宇寬厚, 有威望. <溫祚王>在位第二十八年, 立爲太子, 至四十六年, 王薨, 繼位.
다루왕은 온조왕의 맏아들이다. 그는 도량이 넓고 명망이 높았다. 온조왕 재위 28년에 태자가 되었고, 46년에 왕이 사망하자, 그 뒤를 이었다.
○二年, 春正月, (+王) 謁始祖<東明>廟. 二月, 王祀天地於南壇.
趙炳舜. 『三國史節要』.
2년 봄 정월, 왕이 시조 동명왕의 사당에 배알하였다.
2월, 왕이 남쪽 제단에서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냈다.
○三年, 冬十月, 東部<屹于>, 與<靺鞨>戰於<馬首山>西, 克之, 殺獲甚衆. 王喜, 賞<屹于>馬十匹·租五百石.
3년 겨울 10월, 동부 흘우가 마수산 서쪽에서 말갈과 싸워 승리하였다. 이 전투에서 죽이거나 생포한 자가 매우 많았다. 왕이 기뻐하여 흘우에게 말 열 필과 벼 5백 석을 상으로 주었다.
○四年, 秋八月, <高木城><昆優>, 與<靺鞨>戰, 大克, 斬首二百餘級. 九月, 王田於<橫岳>下, 連中雙鹿, 衆人歎美之.
4년 가을 8월, 고목성 곤우가 말갈과 싸워 크게 이겼다. 2백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9월, 왕이 횡악 아래에서 사냥하다가 두 마리의 사슴을 연이어 적중시켰다. 많은 사람들이 감탄하고 칭찬하였다.
○六年, 春正月, 立元子<己婁>爲太子. 大赦. 二月, 下令國南州郡, 始作稻田.
6년 봄 정월, 왕의 맏아들 기루를 태자로 삼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2월, 남쪽 주군에 명령하여 처음으로 논에서 쌀농사를 짓도록 하였다.
○七年, 春二月, 右輔<解婁>卒, 年九十歲. 以東部<屹于>爲右輔. 夏四月, 東方有赤氣. 秋九月, <靺鞨>攻陷<馬首城>, 放火, 燒百姓廬屋. 冬十月, 又襲<甁山>柵.
7년 봄 2월, 우보 해루가 나이 90세로 사망하였다. 동부 흘우를 우보로 삼았다.
여름 4월, 동방에 붉은 기운이 나타났다.
가을 9월, 말갈이 마수성을 침공하여 함락시키고 불을 질러 백성들의 가옥을 태웠다.
겨울 10월, 그들이 또 병산책을 습격하였다.
○十年, 冬十月, 右輔<屹于>爲左輔, 北部<眞會>爲右輔. 十一月, 地震聲如雷.
10년 겨울 10월, 우보 흘우를 좌보로 삼고, 북부 진회를 우보로 삼았다.
11월, 지진이 났는데 우레 같은 소리가 났다.
○十一年, 秋, 穀不成, 禁百姓私釀酒. 冬十月, 王巡撫東西兩部, 貧不能自存者, 給穀人二石.
11년 가을, 곡식이 잘 익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이 사사로이 술빚는 것을 금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동서 양부를 순회하며 백성들을 위무하고, 가난하여 자력으로 살 수 없는 자들에게는 일인당 곡식 두 섬을 주었다.
○二十一年, 春二月, 宮中大槐樹自枯. 三月, 左輔<屹于>卒, 王哭之哀.
21년 봄 2월, 왕궁 뜰에 있는 큰 홰나무가 저절로 말라 죽었다.
3월, 좌보 흘우가 사망하자 왕이 슬프게 울었다.
○二十八年, 春夏旱. 慮囚, 赦死罪. 秋八月, <靺鞨>侵北鄙.
28년, 봄과 여름이 가물었다. 죄수들을 재심사하고 사형수들을 사면하였다.
가을 8월, 말갈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二十九年, 春二月, 王命東部, 築<牛谷城>, 以備<靺鞨>.
29년 봄 2월, 왕이 동부에 명령하여 우곡성을 쌓아 말갈을 방어하게 하였다.
○三十六年, 冬十月, 王拓地至<娘子谷城>. 仍遣使<新羅>請會, 不從.
36년 겨울 10월, 왕이 낭자곡성까지 토지를 개척하였다. 신라왕에게 사신을 보내 만나기를 요청하였으나, 신라는 거절하였다.
○三十七年, (+秋八月) 王遣兵攻<新羅><蛙山城>, 不克, (+冬十月) , 移兵<狗壤城>. <新羅>發騎兵二千, 逆擊走之.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37년, 왕이 군사를 보내 신라의 와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군사를 옮겨 구양성을 공격하였다. 신라는 기병 2천 명을 동원하였으나 우리 군사는 이들과 대적하여 물리쳤다.
○三十九年, 攻取<蛙山城>, 留二百人, 守之, 尋爲<新羅>所敗.
39년, 와산성을 공격하여 빼앗고, 군사 2백 명을 그곳에 두어 수비하게 하였다. 그러나 얼마되지 않아 신라에게 쫓겨났다.
○四十三年, 遣兵侵<新羅>.
43년, 군사를 보내 신라를 침공하였다.
○四十六年, 夏五月戊午晦, 日有食之.
46년 여름 5월 그믐 무오일에 일식이 있었다.
○四十七年, 秋八月, 遣將侵<新羅>.
47년 가을 8월, 장수를 보내 신라를 침공하였다.
○四十八年, 冬十月, 又攻<蛙山城>, 拔之.
48년 겨울 10월, 다시 와산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四十九年, 秋九月, <蛙山城>爲<新羅>所復.
49년 가을 9월, 와산성을 신라가 회복하였다.
○五十年, 秋九月, 王薨.
50년 가을 9월, 왕이 사망하였다.
○<己婁王>, <多婁王>之元子. 志識宏遠, 不留心細事. <多婁王>在位第六年, 立爲太子, 至五十年, 王薨, 繼位.
기루왕은 다루왕의 맏아들이다. 그는 뜻과 식견이 넓고 원대하여, 사소한 일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그는 다루왕 재위 6년에 태자가 되었고, 50년에 왕이 사망하자 즉위하였다.
○九年, 春正月, 遣兵侵<新羅>邊境. 夏四月乙巳, 客星入紫微.
9년 봄 정월, 군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침공하였다.
여름 4월 을사에 객성이 자미 성좌로 들어갔다.
○十一年, 秋八月乙未晦, 日有食之.
11년 가을 8월 그믐 을미일에 일식이 있었다.
○十三年, 夏六月, 地震, 裂陷民屋, 死者多.
13년 여름 6월, 지진이 나서 땅이 갈라지고 주민들의 가옥이 무너졌다. 사망자가 많았다.
○十四年, 春三月, 大旱, 無 {麥} . 夏六月, 大風拔木.
趙炳舜. 『三國史節要』.
14년 봄 3월, 큰 가뭄이 들어 보리가 나지 않았다.
여름 6월, 큰 바람이 불어 나무를 쓰러뜨렸다.
○十六年, 夏六月戊戌朔, 日有食之.
16년 여름 6월 초하루 무술일에 일식이 있었다.
○十七年, 秋八月, <橫岳>大石五, 一時隕落.
17년 가을 8월, 횡악의 큰 바위 다섯 개가 한꺼번에 떨어졌다.
○二十一年, 夏四月, 二龍見<漢江>.
21년 여름 4월, 두 마리 용이 한강에 나타났다.
○二十三年, 秋八月, 隕霜殺菽. 冬十月, 雨雹.
23년 가을 8월, 서리가 내려 콩이 죽었다.
겨울 10월, 우박이 내렸다.
○二十七年, 王獵<漢山>, 獲神鹿.
27년, 왕이 한산에서 사냥하다가 신기한 사슴을 잡았다.
○二十九年, 遣使<新羅>請和.
29년,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였다.
○三十一年, 冬, 無氷.
31년, 겨울에 얼음이 얼지 않았다.
○三十二年, 春夏旱, 年饑民相食. 秋七月, <靺鞨>入<牛谷>, 奪掠民口而歸.
32년, 봄과 여름이 가물어 흉년이 들었다. 백성들이 서로 잡아 먹었다.
가을 7월, 말갈이 우곡에 침입하여 주민들을 약탈하고 돌아갔다.
○三十五年, 春三月, 地震. 冬十月, 又震.
35년 봄 3월, 지진이 났다.
겨울 10월, 또 지진이 났다.
○三十七年, 遣使聘<新羅>.
37년, 신라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였다.
○四十年, 夏四月, 巢于都城門上. 六月, 大雨浹旬, <漢江>水漲, 漂毁民屋. 秋七月, 命有司, 補水損之田.
40년 여름 4월, 서울 성문 위에 황새가 둥지를 틀었다.
6월, 열흘동안 큰 비가 내려서 한강물이 넘쳐서, 주민들의 가옥이 유실되었다.
가을 7월, 관리에게 명령하여 수해를 당한 논밭을 복구하게 하였다.
○四十九年, <新羅>爲<靺鞨>所侵掠, 移書請兵, 王遣五將軍, 救之.
49년, 신라가 말갈에게 침략을 당하자 서신을 보내와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왕이 다섯 명의 장수를 보내 구원하게 하였다.
○五十二年, 冬十一月, 王薨.
52년 겨울 11월, 왕이 사망하였다.
○<蓋婁王>, <己婁王>之子, 性恭順, 有操行. <己婁>在位五十二年薨, 卽位.
개루왕은 기루왕의 아들이다. 그는 성격이 공손하고 품행이 방정하였다. 기루왕이 재위 52년에 사망하자 그가 즉위하였다.
○四年, 夏四月, 王獵<漢山>.
4년 여름 4월, 왕이 한산에서 사냥하였다.
○五年, 春二月, 築<北漢山城>.
5년 봄 2월, 북한산성을 쌓았다.
○十年, 秋八月庚子, 熒惑犯南斗(-一) .
趙炳舜. 『三國史節要』.
10년 가을 8월 경자에 형혹성이 남두 성좌를 범하였다.
○二十八年, 春正月丙申晦, 日有食之. 冬十月, <新羅>阿 <吉宣>謀叛, 事露來奔. <羅>王移書請之, 不送. <羅>王怒, 出師來伐. 諸城堅壁, 自守不出, <羅>兵絶糧而歸.
○論曰: <春秋>時, < 僕>來奔<魯>. <季文子>曰: '見有禮於其君者, 事之如孝子之養父母也; 見無禮於其君者, 誅之如鷹 之逐鳥雀也. 觀< 僕>, 不度於善而在於凶德, 是以去之.' 今<吉宣>亦姦賊之人, <百濟>王納而匿之, 是謂掩賊爲藏者也. 由是, 失 國之和, 使民困於兵革之役, 其不明, 甚矣.
28년 봄 정월 그믐 병신일에 일식이 있었다.
겨울 10월, 신라의 아찬 길선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자 우리 나라로 도망해왔다. 신라왕이 글을 보내 소환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를 보내지 않았다. 신라왕이 노하여 군사를 출동시켜 공격해왔으나 모든 성이 굳게 방어하고 나아가 싸우지 않았다. 신라 군사들은 군량이 떨어져 돌아갔다.
저자의 견해 : 춘추 시대에 거복이 노 나라로 도망해왔을 때, 계문자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기 임금에게 예절이 있는 자를 보면, 임금 섬기기를 마치 효자가 부모를 봉양하는 것같이 하며, 자기 임금에게 예절이 없는 자를 보면, 임금 죽이기를 마치 매가 참새를 쫓는 것같이 한다. 거복을 보니 그의 뜻이 선한 데 있지 않고 악한 데 있기 때문에 그를 쫓아버리노라."
지금보면 길선도 역시 간사한 역적인데 백제왕이 그를 받아들여 숨겨 주었으니 이야말로 도적을 비호하여 탐오를 함께 하는 격이다. 이로 말미암아 이웃 나라와 화친함을 잃고 백성들로 하여금 병역에 시달리게 하였으니, 그는 대단히 명철하지 못했다.
○三十九年, 王薨.
39년, 왕이 사망하였다.
○<肖古王>[一云<素古>.], <蓋婁王>之子. <蓋婁>在位三十九年薨, 嗣位.
초고왕[소고라고도 한다.]은 개루왕의 아들이다. 개루왕이 재위 39년에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었다.
○二年, 秋七月, 潛師襲破<新羅>西鄙二城, 虜獲男女一千而還. 八月, <羅>王遣一吉 <興宣>, 領兵二萬, 來侵國東諸城. <羅>王又親帥精騎八千繼之, 掩至<漢水>. 王度<羅>兵, 衆不可敵, 乃還前所掠.
2년 가을 7월, 군사를 몰래 보내 신라의 서쪽 변경에 있는 두 성을 격파하고 남녀 1천 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8월, 신라왕이 일길찬 흥선으로 하여금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동쪽의 여러 성을 침공하게 하였다. 신라왕은 또한 직접 정예 기병 8천 명을 거느리고 뒤를 이어 한수까지 진격해왔다. 왕은 신라군이 많아서 대적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곧 이전에 빼앗았던 성을 돌려주었다.
○五年, 春三月丙寅晦, 日有食之. 冬十月, 出兵侵<新羅>邊鄙.
5년 봄 3월 그믐 병인일에 일식이 있었다.
겨울 10월,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의 변경을 침공하였다.
○二十一年, 冬十月, 無雲而雷. 星 于西北, 二十日而滅.
21년 겨울 10월, 구름 없이 우레가 쳤고, 혜성이 서북쪽에 나타났다가 20일만에 사라졌다.
○二十二年, 夏五月, 王都井及<漢水>皆竭.
22년 여름 5월, 서울의 우물과 한수가 모두 말랐다.
○二十三年, 春二月, 重修宮室. 出師攻<新羅><母山城>.
23년 봄 2월, 궁실을 중수하였다. 군사를 출동하여 신라의 모산성을 공격하였다.
○二十四年, 夏四月丙午朔, 日有食之. 秋七月, 我軍與<新羅>戰於<狗壤>, 敗北, 死者五百餘人.
24년 여름 4월 초하루 병오일에 일식이 있었다.
가을 7월, 우리 군사가 신라와 구양에서 싸우다가 패배하여 죽은 자가 5백여 명이었다.
○二十五年, 秋八月, 出兵襲<新羅>西境<圓山鄕>, 進圍<缶谷城>. <新羅>將軍<仇道>, 帥馬兵五百, 拒之. 我兵佯退, <仇道>追至<蛙山>, 我兵反擊之, 大克.
25년 가을 8월,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 서쪽 국경에 있는 원산향을 공격하고, 더 진격하여 부곡성을 포위했다. 신라 장수 구도가 기병 5백 명을 거느리고 저항하였다. 우리 군사가 퇴각하는 척하자 구도는 와산까지 추격해왔다. 이 때 우리 군사가 반격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二十六年, 秋九月, 蚩尤旗見于角·亢.
26년 가을 9월, 치우기별이 각성과 항성 성좌에 나타났다.
○三十四年, 秋七月, 地震. 遣兵, 侵<新羅>邊境.
34년 가을 7월, 지진이 났다. 군사를 보내 신라 변경을 침공하였다.
○三十九年, 秋七月, 出兵攻<新羅><腰車城>, 拔之, 殺其城主<薛夫>. <羅>王<奈解>怒, 命伊伐 <利音>爲將, 帥六部精兵, 來攻我<沙峴城>. 冬十月, 星 于東井.
39년 가을 7월,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의 요차성을 공략하고, 성주 설부를 죽였다. 신라왕 나해가 분개하여 이벌찬 이음을 장수로 삼아 6부의 정예군을 거느리고 와서 우리의 사현성을 치게 하였다.
겨울 10월, 혜성이 동정 성좌에 나타났다.
○四十年, 秋七月, 太白犯月.
40년 가을 7월, 태백성이 달을 범하였다.
○四十三年, 秋, 蝗, 旱, 不順成, 盜賊多起, 王撫安之.
43년 가을, 메뚜기 떼가 생기고 가물어서 곡식이 잘 익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도적이 많이 생기자 왕이 그들을 위무하여 안정시켰다.
○四十四年, 冬十月, 大風拔木.
44년 겨울 10월,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四十五年, 春二月, 築<赤峴>·<沙道>二城, 移東部民戶. 冬十月, <靺鞨>來攻<沙道城>, 不克, 焚燒城門而遁.
45년 봄 2월, 적현성과 사도성을 쌓고 동부의 민가를 그곳으로 옮겼다.
겨울 10월, 말갈이 사도성에 와서 공격하다가 이기지 못하자 성문에 불을 지르고 도망하였다.
○四十六年, 秋八月, 國南, 蝗害 , 民饑. 冬十一月, 無氷.
46년 가을 8월, 남쪽 지역에 메뚜기 떼가 곡식을 해쳐 백성들이 굶주렸다.
겨울 11월, 물이 얼지 않았다.
○四十七年, 夏六月庚寅晦, 目{日} 有食之.
趙炳舜. 『三國史節要』.
47년 여름 6월 그믐 경인일에 일식이 있었다.
○四十八年, 秋七月, 西部人<茴會{荀會}> 獲白鹿, 獻之. 王以爲瑞, 賜 一百石.
趙炳舜. 『三國史節要』.
48년 가을 7월, 서부 사람 회회가 흰 사슴을 잡아 바쳤다. 왕이 상서로운 일이라 하여 곡식 1백 석을 주었다.
○四十九年, 秋九月, 命北部<眞果>, 領兵一千, 襲取<靺鞨><石門城>. 冬十月, <靺鞨>以勁騎來侵. 至于<述川>. 王薨.
三國史記卷第二十三.
49년 가을 9월, 북부의 진과에게 명령하여 군사 1천 명을 거느리고 말갈의 석문성을 습격하여 빼앗게 하였다.
겨울 10월, 말갈이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침입하여 우술천에 이르렀다.
왕이 사망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 23 끝
三國史記卷第二十四.
삼국사기 권 제 24
百濟本紀第二.
<仇首王>·<沙伴王>·<古 王>·<責稽王>·<汾西王>·<比流王>·<契王>·<近肖古王>·<近仇首王>·<枕流王>.
백제본기 제 2
구수왕, 사반왕, 고이왕, 책계왕, 분서왕,
비류왕, 설왕, 근초고왕, 근구수왕, 침류왕.
○<仇首王>[或云<貴須>.], <肖古王>之長子, 身長七尺, 威儀秀異. <肖古>在位四十九年薨, 卽位.
구수왕[혹은 귀수라고도 한다.]은 초고왕의 맏아들이다. 그는 신장이 7척이고 풍채가 특이하였다. 초고왕이 재위 49년에 사망하자, 그가 왕위에 올랐다.
○三年, 秋八月, <靺鞨>來圍<赤峴城>, 城主固拒, 賊退歸. 王帥勁騎八百, 追之, 戰<沙道城>下, 破之, 殺獲甚衆.
3년 가을 8월, 말갈이 적현성에 와서 포위했으나 성주가 굳게 수비하니 적이 퇴각하였다. 왕이 정예 기병 8백 명을 거느리고 그들을 추격하여, 사도성 밖에서 격파하였는데, 죽이거나 사로잡은 적병이 많았다.
○四年, 春二月, 設二柵於<沙道城>側, 東西相去十里, 分<赤峴城>卒, 戍之.
4년 봄 2월, 사도성 옆에 두 곳의 목책을 세웠다. 동서의 거리가 10리였다. 적현성의 군사를 나누어 이곳을 수비하게 하였다.
○五年, 王遣兵圍<新羅><獐山城>, <羅>王親帥兵, 擊之, 我軍敗績.
5년, 왕이 군사를 보내 신라의 장산성을 포위했다. 신라왕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하였다. 우리 군사가 패배하였다.
○七年, 冬十月, 王城西門火. <靺鞨>寇北邊, 遣兵拒之.
7년 겨울 10월, 왕성 서문에 화재가 났다. 말갈이 북쪽 변경을 침략하므로 군사를 보내 방어하였다.
○八年, 夏五月, 國東大水, 山崩四十餘所. 六月戊辰晦, 日有食之. 秋八月, 大閱於<漢水>之西.
8년 여름 5월, 동쪽 지방에 홍수가 나서 40여 곳의 산이 무너졌다.
6월 그믐 무진일에 일식이 있었다.
가을 8월, 한수 서쪽에서 대대적으로 군사를 사열하였다.
○九年, 春二月, 命有司修 防. 三月, 下令勸農事. 夏六月, 王都雨魚. 冬十月, 遣兵入<新羅><牛頭鎭>, 抄掠民戶. <羅>將<忠萱>領兵五千, 逆戰於<熊谷>, 大敗, 單騎而遁. 十一月, 庚申晦, 日有食之.
9년 봄 2월, 관리에게 명령하여 제방을 수축하게 하였다.
3월, 명령을 내려 농사를 권장하였다.
여름 6월, 서울에 물고기가 비와 함께 떨어졌다.
겨울 10월, 신라의 우두진으로 군사를 보내 민가를 약탈하였다. 신라 장수 충훤이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웅곡에서 우리 군사와 싸우다가 대패하고, 단신으로 도망하였다.
11월 그믐 경신일에 일식이 있었다.
○十一年, 秋七月, <新羅>一吉 <連珍>來侵, 我軍逆戰於<烽山>下, 不克. 冬十月, 大白{太白} 晝見.
趙炳舜. 『三國史節要』.
11년 가을 7월, 신라의 일길찬 연진이 침입하였다. 우리 군사는 봉산 아래에서 그들과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겨울 10월,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十四年, 春三月, 雨雹. 夏四月, 大旱, 王祈<東明廟>, 乃雨.
14년 봄 3월, 우박이 내렸다.
여름 4월, 큰 가뭄이 들어 왕이 동명왕의 사당에서 제사를 지냈다. 곧 비가 내렸다.
○十六年, 冬十月, 王田於<寒泉>. 十一月, 大疫. <靺鞨>入<牛谷>界, 奪掠人物. 王遣精兵三百, 拒之. 賊伏兵夾擊, 我軍大敗.
16년 겨울 10월, 왕이 한천에서 사냥하였다.
11월,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말갈이 우곡에 들어와 사람과 재물을 약탈하였다. 왕은 정예군 3백 명을 보내 방어하게 하였다. 그러나 적의 복병이 양쪽에서 협공하여 우리 군사가 대패하였다.
○十八年, 夏四月, 雨雹, 大如栗, 鳥雀中者死.
18년 여름 4월, 밤알 크기의 우박이 내렸다. 이에 맞은 새들이 죽었다.
○二十一年, 王薨.
21년, 왕이 사망하였다.
○<古爾王>, <蓋婁王>之第二子也. <仇首王>在位二十一年薨, 長子<沙伴>嗣位, 而幼少不能爲政, <肖古王>母弟<古 >卽位.
고이왕은 개루왕의 둘째 아들이다. 구수왕이 재위 21년에 사망하자, 그의 맏아들 사반이 왕위를 이었으나 나이가 어려 정사를 잘 처리하지 못하였므로 초고왕의 동복 아우 고이가 왕위에 올랐다.
○三年, 冬十月, 王獵西海大島, 手射四十鹿.
3년 겨울 10월, 왕이 서해의 큰 섬에서 사냥하여 직접 40마리의 사슴을 쏘아 맞혔다.
○五年, 春正月, 祭天地, 用 {鼓} 吹. 二月, 田於<釜山>, 五旬乃返. 夏四月, 震王宮門柱, 黃龍自其門飛出.
趙炳舜. 『三國史節要』.
5년 봄 정월, 악기를 사용하여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냈다.
2월, 왕이 부산에서 사냥하다가 50일 만에 돌아왔다.
여름 4월, 왕궁의 문기둥에 벼락이 치자 황룡이 그 문에서 날아갔다.
○六年, 春正月, 不雨, 至夏五月, 乃雨.
6년 봄 정월부터 비가 내리지 않다가, 여름 5월이 되어서야 비가 내렸다.
○七年, 遣兵侵<新羅>. 夏四月, 拜<眞忠>爲左將, 委以內外兵馬事. 秋七月, 大閱於<石川>. 雙 起於川上, 王射之, 皆中.
7년, 군사를 보내서 신라를 공격하였다.
여름 4월, 진충을 좌장으로 임명하여 내외의 군사에 관한 직무를 맡겼다.
가을 7월, 석천에서 대대적으로 군대를 사열하였다. 이 때 냇가에서 오리 한 쌍이 날아 가는 것을 왕이 쏘아서 모두 적중시켰다.
○九年, 春二月, 命國人, 開稻田於南澤. 夏四月, 以叔父<質>爲右輔. <質>性忠毅, 謀事無失. 秋七月, 出西門觀射.
9년 봄 2월, 백성들로 하여금 남쪽 소택지에 논을 개간하도록 하였다.
여름 4월, 왕의 숙부인 질을 우보로 삼았다. 질은 성격이 충직하여 실수없이 일을 계획하였다.
가을 7월, 왕이 서문 밖에 나가서 활쏘기를 구경하였다.
○十年, 春正月, 設大壇, 祀天地山川.
10년 봄 정월, 큰 제단을 설치하여 천지와 산천에 제사지냈다.
○十三年, 夏大旱, 無麥. 秋八月, <魏><幽州>刺史< 丘儉>, 與<樂浪>大守{太守} <劉茂>·<朔方{帶方}> 大守{太守} <王遵{弓遵}> , 伐<高句麗>, 王乘虛, 遣左將<眞忠>, 襲取<樂浪>邊民, <茂>聞之怒, 王恐見侵討, 還其民口.
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13년 여름, 크게 가물어 보리가 죽었다.
가을 8월, 위 나라 유주 자사 관구 검이 낙랑 태수 유 무, 삭방 태수 왕 준과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자, 왕은 그 틈을 이용하여 좌장 진충으로 하여금 낙랑의 변방 주민들을 습격하여 잡아오게 하였다. 유무가 이 말을 듣고 분개하였다. 왕이 침공을 받을까 걱정하여 잡아온 사람들을 돌려 보냈다.
○十四年, 春正月, 祭天地於南壇. 二月, 拜<眞忠>爲右輔, <眞勿>爲左將, 委以兵馬事.
14년 봄 정월, 남쪽 제단에서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냈다.
2월, 진충을 우보로 임명하였다. 진물을 좌장으로 임명하여, 군사에 관한 일을 맡겼다.
○十五年, 春, 夏旱. 冬, 民饑, 發倉賑恤, 又復一年租調.
15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었다.
겨울,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풀어 구제하고 또한 1년간의 조세를 면제하였다.
○十六年, 春正月甲午, 大白{太白} 襲月.
趙炳舜. 『三國史節要』.
16년 봄 정월 갑오, 태백성이 달을 덮었다.
○二十二年, 秋九月, 出師侵<新羅>, 與<羅>兵戰於<槐谷>西, 敗之, 殺其將<翊宗>. 冬十月, 遣兵攻<新羅><烽山城>, 不克.
22년 가을 9월,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군과 괴곡 서쪽에서 싸워 승리하였다. 신라 장수 익종을 죽였다.
겨울 10월, 군사를 보내 신라의 봉산성을 쳤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二十四年, 春正月, 大旱, 樹木皆枯.
24년 봄 정월, 크게 가물어 나무가 모두 말랐다.
○二十五年, 春, <靺鞨>長<羅渴>獻良馬十匹, 王優勞使者以還之.
25년 봄, 말갈의 추장 나갈이 좋은 말 열 필을 바쳤다. 왕이 그 사자를 우대하여 돌려보냈다.
○二十六年, 秋九月, 靑紫雲起宮東, 如樓閣.
26년 가을 9월, 푸르고 보랏빛 나는 구름이 마치 누각 모양으로 왕궁 동쪽 하늘에 떠올랐다.
○二十七年, 春正月, 置內臣佐平, 掌宣納事; 內頭佐平, 掌庫藏事; 內法佐平, 掌禮儀事; 衛士佐平, 掌宿衛兵事; 朝廷佐平, 掌刑獄事; 兵官佐平, 掌外兵馬事. 又置達率·恩率·德率· 率·奈率及將德·施德·固德·季德·對德·文督·武督·佐軍·振武·克虞. 六佐平 一品, 達率二品, 恩率三品, 德率四品, 率五品, 奈率六品, 將德七品, 施德八品, 固德九品, 季德十品, 對德十一品, 文督十二品, 武督十三品, 佐軍十四品, 振武十五品, 克虞十六品. 二月, 下令六品已上服紫, 以銀花飾冠, 十一品已上服緋, 十六品已上服靑. 三月, 以王弟<優壽>爲內臣佐平.
27년 봄 정월, 내신 좌평을 두어 왕명의 출납에 대한 일을 맡게 하고, 내두 좌평을 두어 물자와 창고에 대한 일을 맡게 하고, 내법 좌평을 두어 예법과 의식에 대한 일을 맡게 하고, 위사 좌평을 두어 숙위 병사에 대한 일을 맡게 하고, 조정 좌평을 두어 형벌과 송사에 대한 일을 맡게 하고, 병관 좌평을 두어 지방의 군사에 대한 일을 맡게 하였다. 또 달솔·은솔·덕솔·한솔·나솔· 장덕·시덕·고덕·계덕·대덕·문독·무독·좌군·진무·극우 등을 두었다. 6개 좌평은 모두 1품, 달솔은 2품, 은솔은 3품, 덕솔은 4품, 한솔은 5품, 나솔은 6품, 장덕은 7품, 시덕은 8품, 고덕은 9품, 계덕은 10품, 대덕은 11품, 문독은 12품, 무독은 13품, 좌군은 14품, 진무는 15품, 극우는 16품이었다.
2월, 6품 이상은 자주빛 옷을 입고 은꽃으로 관을 장식하고, 11품 이상은 붉은 옷을 입으며, 16품 이상은 푸른 옷을 입게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3월, 왕의 아우 우수를 내신 좌평으로 삼았다.
○二十八年, 春正月初吉, 王服紫大袖袍·靑錦袴·金花飾烏羅冠·素皮帶·烏韋{革} 履, 坐南堂聽事. 二月, 拜<眞可>爲內頭佐平; <優豆>爲內法佐平; <高壽>爲衛士佐平; <昆奴>爲朝廷佐平; <惟巳{惟己}> 爲兵官佐平. 三月, 遣使<新羅>請和, 不從.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28년 봄 정월 초하룻날, 왕이 자주빛으로 된 큰 소매 달린 도포와 푸른 비단 바지를 입고, 금꽃으로 장식한 오라관을 쓰고, 흰 가죽띠를 두르고, 검은 가죽 신을 신고, 남당에 앉아서 정사를 처리하였다.
2월, 진가를 내두 좌평, 우두를 내법 좌평, 고수를 위사 좌평, 곤노를 조정 좌평, 유기를 병관 좌평으로 임명하였다.
3월,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였다. 신라는 이를 거절하였다.
○二十九年, 春正月, 下令: 凡官人受財及盜者, 三倍徵贓, 禁錮終身.
29년 봄 정월, 관리로서 뇌물을 받거나 도적질한 자는 그 세 배를 배상하며, 종신 금고형에 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二{三} 十三年, 秋八月, 遣兵, 攻<新羅><烽山城>. 城主<直宣>率壯士二百人, 出擊敗之.
趙炳舜. 『三國史節要』.
33년 가을 8월, 군사를 보내 신라의 봉산성을 공격하였다. 성주 직선이 장사 2백 명을 거느리고 반격하여 우리 군사가 패배하였다.
○三十六年, 秋九月, 星 于紫宮.
36년 가을 9월, 혜성이 자미궁 성좌에 나타났다.
○三十九年, 冬十一月, 遣兵侵<新羅>.
39년 겨울 11월, 군사를 보내 신라를 침공하였다.
○四十五年, 冬十月, 出兵攻<新羅>, 圍<槐谷城>.
45년 겨울 10월,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를 공격하여 괴곡성을 포위했다.
○五十年, 秋九月, 遣兵侵<新羅>邊境.
50년 가을 9월, 군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침공하였다.
○五十三年, 春正月, 遣使<新羅>請和. 冬十一月, 王薨.
53년 봄 정월,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였다.
겨울 11월, 왕이 사망하였다.
○<責稽王>[或云<靑稽>.], <古 王>子, 身長大, 志氣雄傑, <古 >薨, 卽位. 王徵發丁夫, 葺<慰禮城>. <高句麗>伐<帶方>, <帶方>請救於我. 先是, 王娶<帶方>王女<寶菓>, 爲夫人. 故曰: "<帶方>我舅甥之國, 不可不副其請." 遂出師救之, <高句麗>怨. 王慮其侵寇, 修<阿且城>·<蛇城>, 備之.
책계왕[혹은 청계라고도 한다.]은 고이왕의 아들이다. 체격이 장대하고 의지와 기품이 걸출하였다. 고이왕이 사망하자 그가 왕위에 올랐다.
왕이 장정을 징발하여 위례성을 보수하였다.
고구려가 대방을 치자 대방은 우리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앞서 왕이 대방왕의 딸 보과를 부인으로 맞이하였기 때문에 왕이 "대방은 우리와 장인과 사위 관계의 나라이니, 그들의 요청을 들어 주어야 한다"고 말하고, 마침내 군사를 출동시켜 구원하였다. 고구려에서 이를 원망하였다. 왕은 고구려의 침략을 염려하여 아차성과 사성을 수축하여 방비하게 하였다.
○二年, 春正月, 謁<東明>廟.
2년 봄 정월, 왕이 동명왕의 사당에 배알하였다.
○十三年, 秋九月, <漢>與<貊>人來侵, 王出禦, 爲敵兵所害, 薨.
13년 가을 9월, 한 나라가 맥인들을 이끌고 와서 침략하였다. 왕이 직접 나가서 방어하다가 적병에게 살해되었다.
○<汾西王>, <責稽王>長子. 幼而聰惠, 儀表英挺, 王愛之, 不離左右, 及王薨, 繼而卽位. 冬十月, 大赦.
분서왕은 책계왕의 맏아들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풍채가 걸출하였으므로 왕이 그를 사랑하여 항상 옆에 두었다. 왕이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겨울 10월,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二年, 春正月, 謁<東明>廟.
2년 봄 정월, 왕이 동명왕의 사당에 배알하였다.
○五年, 夏四月, 彗星晝見.
5년 여름 4월, 낮에 혜성이 나타났다.
○七年, 春二月, 潛師襲取<樂浪>西縣. 冬十月, 王爲<樂浪>大守{太守} 所遣刺客賊害, 薨.
趙炳舜. 『三國史節要』.
7년 봄 2월, 낙랑의 서현을 기습하여 빼앗았다.
겨울 10월, 왕이 낙랑 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되었다.
○<比流王>, <仇首王>第二子, 性寬慈愛人, 又强力善射. 久在民間, 令譽流聞. 及<汾西>之終, 雖有子, 皆幼不得立, 是以, 爲臣民推戴卽位.
비류왕은 구수왕의 둘째 아들이다. 성격이 너그럽고 인자하여 사람을 아끼며, 또한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다. 오랫동안 평민으로 살면서 명성을 떨쳤다. 분서왕이 죽었을 때, 비록 여러 명의 아들이 있었으나 모두 어려서 왕으로 세울 수 없었기 때문에, 신하와 백성들의 추대에 의하여 그가 왕위에 올랐다.
○五年, 春正月丙子朔, 日有食之.
5년 봄 정월 초하루 병자일에 일식이 있었다.
○九年, 春二月, 發使巡問百姓疾苦, 其鰥寡孤獨不能自存者, 賜 人三石. 夏四月, 謁<東明>廟. 拜<解仇>爲兵官佐平.
9년 봄 2월, 사신을 파견하여 민간을 순회하면서, 백성들의 어려움을 살피고, 홀아비·과부·고아·자식 없는 늙은이들로서 자력으로 살 수 없는 자들에게 일인당 곡식 3석씩을 주었다.
여름 4월, 왕이 동명왕의 사당에 배알하였다.
해구를 병관 좌평으로 임명하였다.
○十年, 春正月, 祀天地於南郊. 王親割牲.
10년 봄 정월, 남쪽 교외에서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냈다. 왕이 직접 제물에 쓰일 고기를 베었다.
○十三年, 春, 旱, 大星西流. 夏四月, 王都井水溢, 黑龍見其中.
13년 봄, 가뭄이 들었다. 큰 별이 서쪽으로 흘러갔다.
여름 4월, 서울에서 우물이 넘치고, 그 속에서 흑룡이 나타났다.
○十七年, 秋八月, 築射臺於宮西, 每以朔望習射.
17년 가을 8월, 대궐 서쪽에 활 쏘는 누대를 쌓아놓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활쏘기를 연습하였다.
○十八年, 春正月, 以王庶弟<優福>爲內臣佐平. 秋七月, 大白{太白} 晝見. 國南蝗害 .
趙炳舜. 『三國史節要』.
18년 봄 정월, 왕의 이복동생 우복을 내신 좌평으로 삼았다.
가을 7월,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남쪽 지방에 메뚜기 떼가 나타나 곡식을 해쳤다.
○二十二年, 冬十月, 天有聲, 如風浪相激. 十一月, 王獵於<狗原>北, 手射鹿.
22년 겨울 10월,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는데 마치 풍랑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 같았다.
11월, 왕이 구원 북쪽에서 사냥하여 직접 사슴을 쏘았다.
○二十四年, 秋七月, 有雲如赤烏夾日. 九月, 內臣佐平<優福>, 據<北漢城>叛, 王發兵討之.
24년 가을 7월, 적오와 같이 생긴 구름이 양쪽에서 해를 끼고 있었다.
9월, 내신 좌평 우복이 북한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왕이 군사를 출동시켜 토벌하였다.
○二十八年, 春夏大旱, 草木枯, 江水竭, 至秋七月, 乃雨. 年饑人相食.
28년, 봄과 여름에 큰 가뭄이 들어, 풀과 나무와 강물이 말랐다. 가을 7월에 되어서야 비가 내렸다.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 먹었다.
○三十年, 夏五月, 星隕. 王宮火, 連燒民戶. 秋十{七} 月, 修宮室. 拜<眞義>爲內臣佐平. 冬十二月, 雷.
趙炳舜. 『三國史節要』.
30년 여름 5월, 별이 떨어졌다. 대궐에 화재가 났는데 연이어 민가도 불탔다.
가을 7월, 대궐을 수리하였다. 진의를 내신 좌평으로 삼았다.
겨울 12월, 우레가 쳤다.
○三十二年, 冬十月乙未朔, 日有食之.
32년 겨울 10월 초하루 을미일에 일식이 있었다.
○三十三年, 春正月辛巳, 彗星見于奎.
33년 봄 정월 신사에 혜성이 규성 성좌에 나타났다.
○三十四年, 春二月, <新羅>遣使來聘.
34년 봄 2월,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예방하였다.
○四十一年, 冬十月, 王薨.
41년 겨울 10월, 왕이 사망하였다.
○<契王>, <汾西王>之長子也. 天資剛勇, 善騎射. 初<汾西>之薨也, <契王>幼不得立, <比流王>在位四十一年薨, 卽位.
설왕은 분서왕의 맏아들이다. 그는 천성이 강직하고 용맹스러웠으며, 말달리고 활쏘기를 잘하였다. 이전에 분서왕이 죽었을 때는 설왕이 어려서 왕위에 오를 수 없었는데, 비류왕이 재위 41년에 사망하자 그가 즉위하였다.
○三年, 秋九月, 王薨.
3년 가을 9월, 왕이 사망하였다.
○<近肖古王>, <比流王>第二子也, 體貌奇偉, 有遠識, <契王>薨, 繼位.
근초고왕은 비류왕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체격이 크고 용모가 기이하였으며, 원대한 식견이 있었다. 설왕이 사망하자 그가 왕위를 이었다.
○二年, 春正月, 祭天地神祇. 拜<眞淨>爲朝廷佐平. <淨>王后親戚, 性 戾不仁, 臨事苛細, 恃勢自用, 國人疾之.
2년 봄 정월, 천지신명에 제사를 지냈다.
진정을 조정 좌평으로 삼았다. 정은 왕후의 친척으로서 성질이 흉악하고 어질지 못하였다.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도 까다롭고 잔소리가 많았다. 그는 권세를 믿고 함부로 행동하여, 백성들이 그를 미워하였다.
○二十一年, 春三月, 遣使聘<新羅>.
21년 봄 3월, 신라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였다.
○二十三年, 春三月丁巳朔, 日有食之. 遣使<新羅>, 送良馬二匹.
23년 봄 3월 초하루 정사일에 일식이 있었다.
사신을 시켜 신라에 좋은 말 두 필을 보냈다.
○二十四年, 秋九月, <高句麗>王<斯由>帥步騎二萬, 來屯<雉壤>, 分兵侵奪民戶. 王遣太子, 以兵徑至<雉壤>, 急擊破之, 獲五千餘級, 其虜獲分賜將士. 冬十一月, 大閱於<漢水>南, 旗幟皆用黃.
24년 가을 9월, 고구려왕 사유가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치양에 와서 주둔하며 군사를 시켜 민가를 약탈하였다. 왕이 태자에게 군사를 주어, 지름길로 치양에 이르러서 불시에 공격하여 그들을 격파하고, 적병 5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노획한 물품은 장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겨울 11월, 한수 남쪽에서 대대적으로 군사를 사열하였다. 모두 황색의 깃발을 사용하였다.
○二十六年, <高句麗>擧兵來. 王聞之, 伏兵於<浿河>上, 俟其至, 急擊之, <高句麗>兵敗北. 冬, 王與太子帥精兵三萬, 侵<高句麗>, 攻<平壤城>. <麗>王<&斯由{釗}> , 力戰拒之, 中流矢死, 王引軍退. 移都<漢山>.
趙炳舜. 『三國史節要』.
26년, 고구려가 군사를 동원하여 공격해왔다. 왕이 이를 듣고 패하 강가에 복병을 배치하고 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불시에 공격하였다. 고구려 군사가 패배하였다.
겨울, 왕이 태자와 함께 정예군 3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침입하여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고구려왕 사유가 필사적으로 항전하다가 화살에 맞아 사망하자, 왕이 군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도읍을 한산으로 옮겼다.
○二十七年, 春正月, 遣使入<晉>朝貢. 秋七月, 地震.
27년 봄 정월, 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 지진이 났다.
○二十八年, 春二月, 遣使入<晉>朝貢. 秋七月, 築城於<靑木嶺>. <禿山>城主率三百人, 奔<新羅>.
28년 봄 2월, 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 청목령에 성을 쌓았다.
독산 성주가 주민 3백 명을 거느리고 신라로 도망갔다.
○三十年, 秋七月, <高句麗>來攻北鄙<水谷城>, 陷之. 王遣將拒之, 不克. 王又將大擧兵報之, 以年荒不果. 冬十一月, 王薨. 『古記』云: "<百濟>開國已來, 未有以文字記事. 至是, 得博士<高興>, 始有『書記』." 然<高興>未嘗顯於他書, 不知其何許人也.
30년 가을 7월, 고구려가 북쪽 변방의 수곡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왕이 장수를 보내 방어하게 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왕이 다시 군사를 크게 동원하여 보복하려 했으나,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실행하지 않았다.
겨울 11월, 왕이 사망하였다.
고기에는 "백제는 개국 이래 문자로 사적을 기록한 적이 없다가, 이 때에 와서 박사 고 흥이 처음으로 [서기]를 썼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고 흥이라는 이름이 다른 서적에 나타난 적이 없기 때문에,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近仇首王>[一云<諱須>.], <近肖古王>之子. 先是, <高句麗><國岡王><斯由>親來侵, <近肖古王>遣太子拒之. 至<半乞壤>, 將戰. <高句麗>人<斯紀>, 本<百濟>人, 誤傷國馬蹄, 懼罪奔於彼. 至是, 還來, 告太子曰: "彼師雖多, 皆備數疑兵而已. 其驍勇, 唯赤旗, 若先破之, 其餘不攻自潰." 太子從之, 進擊大敗之, 追奔逐北, 至於<水谷城>之西北. 將軍<莫古解>諫曰: "嘗聞道家之言: '知足不辱, 知止不殆.' 今所得多矣, 何必 {求} 多." 太子善之, 止焉. 乃積石爲表, 登其上, 顧左右曰: "今日之後, 疇克再至於此手{乎} ." 其地有巖石, 若馬蹄者, 他人至今, 呼爲<太子馬迹>. <近肖古>在位三十年薨, 卽位.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근구수왕[휘수라고도 한다.]은 근초고왕의 아들이다. 이보다 앞서 고구려 국강왕 사유가 직접 와서 침범하였다. 근초고왕은 태자를 보내 방어하게 하였다. 그는 반걸양에 이르러 전투를 시작하려 하였다. 고구려인 사기는 원래 백제인이었는데, 실수로 왕이 타는 말의 발굽을 상처나게 하였다. 그는 이로 말미암아 벌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고구려로 도망갔었다. 그가 이 때 돌아와서 태자에게 말했다.
"고구려 군사가 비록 수는 많으나 모두 가짜 군사로서 수를 채운 것에 불과합니다. 그 중 제일 강한 부대는 붉은 깃발을 든 부대입니다. 만일 그 부대를 먼저 공략하면, 나머지는 치지 않아도 저절로 허물어질 것입니다."
태자가 이 말에 따라 진격하여 크게 이기고, 달아나는 군사를 계속 추격하여 수곡성 서북에 도착하였다. 이 때 장수 막고해가 간하였다.
"일찌기 도가의 말에 '만족할 줄을 알면 욕을 당하지 않고, 그칠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하였읍니다. 지금 얻은 바도 많은데 어찌 더 많은 것을 바라겠습니까?"
태자가 이 말을 옳게 여겨 추격을 중단하였다. 그는 즉시 그곳에 돌을 쌓아 표적을 만들고, 그 위에 올라가 좌우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오늘 이후로 누가 다시 이곳에 올 수 있는가?"
그곳에는 말발굽 같이 생긴 바윗돌 틈이 있는데,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그것을 태자의 말굽 자국이라고 부른다.
근초고왕이 재위 30년에 사망하자 그가 왕위에 올랐다.
○二年, 以王舅<眞高道>爲內臣佐平, 委以政事. 冬十一月, <高句麗>來侵北鄙.
2년, 왕의 외삼촌 진고도를 내신 좌평으로 삼아 정사를 맡겼다.
겨울 11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三年, 冬十月, 王將兵三萬, 侵<高句麗><平壤城>. 十一月, <高句麗>來侵.
3년 겨울 10월, 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평양성을 침공하였다.
11월, 고구려가 침입하였다.
○五年, 春三月, 遣使朝<晉>, 其使海上遇惡風, 不達而還. 夏四月, 雨土竟日.
5년 봄 3월, 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였으나,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 진 나라에 도착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여름 4월, 흙비가 종일 내렸다.
○六年, 大疫. 夏五月, 地裂, 深五丈, 橫廣三丈, 三日乃合.
6년,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여름 5월, 땅바닥이 깊이가 다섯 길, 넓이가 세 길이나 되게 갈라졌다가 3일만에 다시 붙었다.
○八年, 春不雨, 至六月, 民饑, 至有 子者, 王出官 , 贖之.
8년, 봄부터 6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백성들이 굶주려 자식을 파는 자가 나타나자, 왕이 나라의 곡식을 내어 대신 값을 물어 주었다.
○十年, 春二月, 日有暈三重. 宮中大樹自拔. 夏四月, 王薨.
10년 봄 2월, 햇무리가 세 겹으로 둘러졌다. 대궐 뜰에 있던 큰 나무가 저절로 뽑혔다.
여름 4월, 왕이 사망하였다.
○<枕流王>, <近仇首王>之元子, 母曰<阿 >夫人, 繼父卽位. 秋七月, 遣使入<晉>朝貢. 九月, <胡>僧<摩羅難 >自<晉>至, 王迎之, 致宮內, 禮敬焉. 佛法始於此.
침류왕은 근구수왕의 맏아들이고, 어머니는 아이부인이다.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가을 7월, 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9월, 인도 승려 마라난타가 진 나라에서 오자, 왕이 궁중으로 맞아들여 우대하고 공경하였다. 불교가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二年, 春二月, 創佛寺於<漢山>, 度僧十人. 冬十一月, 王薨.
三國史記卷第二十四.
2년 봄 2월, 한산에 절을 창건하고, 중 10명에게 도첩을 주었다.
겨울 11월, 왕이 사망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 24 끝
三國史記卷第二十五.
삼국사기 권 제 25
百濟本紀第三.
<辰斯王>·<阿莘王>·< 支王>·<父木辛王{久 辛王}> ·<毗有王>·<盖鹵王>.
趙炳舜. 『三國史節要』.
백제본기 제 3
진사왕, 아신왕, 전지왕, 구이신왕, 비유왕, 개로왕.
○<辰斯王>, <近仇首王>之仲子, <枕流>之弟. 爲人强勇, 聰惠多智略. <枕流>之薨也, 太子少, 故叔父<辰斯>卽位.
진사왕은 근구수왕의 둘째 아들이며, 침류왕의 아우이다. 그는 사람됨이 용맹하며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다. 침류왕이 죽었을 때 태자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태자의 숙부 진사가 즉위하였다.
○二年, 春, 發國內人年十五歲已上, 設關防, 自<靑木嶺>, 北距<八坤城>, 西至於海. 秋七月, 隕霜害 . 八月, <高句麗>來侵.
2년 봄, 국내의 15세 이상 되는 사람들을 징발하여 관문의 방어시설을 설치하였다. 그 길이가 청목령에서 시작하여 북으로는 팔곤성, 서로는 바다에 닿았다.
가을 7월, 서리가 내려 곡식을 해쳤다.
8월, 고구려가 침입하였다.
○三年, 春正月, 拜<眞嘉謨>爲達率, <豆知>爲恩率. 秋九月, 與<靺鞨>戰<關彌嶺>, 不捷.
3년 봄 정월, 진 가모를 달솔로 임명하고, 두지를 은솔로 임명하였다.
가을 9월, 관미령에서 말갈과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五年, 秋九月, 王遣兵, 侵掠<高句麗>南鄙.
5년 가을 9월, 왕이 군사를 보내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공격하였다.
○六年, 秋七月, 星 于北河. 九月, 王命達率<眞嘉謨>, 伐<高句麗>, 拔<都坤城>, 虜得二百人. 王拜<嘉謨>爲兵官佐平. 冬十月, 獵於<狗原>, 七日乃返.
6년 가을 7월, 혜성이 북하 성좌에 나타났다.
9월, 왕이 달솔 진 가모로 하여금 고구려를 치게 하여 도곤성을 함락시키고, 포로 2백 명을 사로잡았다. 왕이 가모를 병관 좌평으로 임명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구원에서 사냥하다가 7일만에 돌아왔다.
○七年, 春正月, 重修宮室, 穿池造山, 以養奇禽異卉. 夏四月, <靺鞨>攻陷北鄙<赤峴城>. 秋七月, 獵國西大島, 王親射鹿. 八月, 又獵<橫岳>之西.
7년 봄 정월, 궁실을 중수하면서,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진귀한 새를 기르고 기이한 화초를 가꾸었다.
여름 4월, 말갈이 북쪽 변경의 적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가을 7월, 왕이 서쪽 지방의 큰 섬에서 사냥하다가 직접 사슴을 쏘아 적중시켰다.
8월, 왕이 다시 횡악 서쪽 지역에서 사냥하였다.
○八年, 夏五月丁卯朔, 日有食之. 秋七月, <高句麗>王<談德>, 帥兵四萬, 來攻北鄙, 陷<石峴>等十餘城. 王聞<談德>能用兵, 不得出拒, <漢水>北諸部落, 多沒焉. 冬十月, <高句麗>攻拔<關彌城>. 王田於<狗原>, 經旬不返. 十一月, 薨於<狗原>行宮.
8년 여름 5월 초하루 정묘일에 일식이 있었다.
가을 7월, 고구려왕 담덕이 4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쪽 변경을 침공하여 석현성 등 10여 성을 함락시켰다. 왕은 담덕이 용병에 능통하다는 말을 듣고 대항하기를 회피하였다. 한수 북쪽의 여러 부락을 빼앗겼다.
겨울 10월, 고구려가 관미성을 쳐서 함락시켰다.
왕이 구원에서 사냥하며 열흘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11월, 왕이 구원의 행궁에서 사망하였다.
○<阿莘王>[或云<阿芳>.], <枕流王>之元子. 初, 生於<漢城>別宮, 神光炤夜. 及壯, 志氣豪邁, 好鷹馬. 王薨時, 年少, 故叔父<辰斯>繼位. 八年薨, 卽位.
아신왕[혹은 아방이라고도 한다.]은 침류왕의 맏아들이다. 그가 한성의 별궁에서 태어났을 때 신비로운 광채가 밤을 밝혔다. 그가 장성하자 의지와 기풍이 호방하였으며, 매사냥과 말타기를 좋아하였다. 침류왕이 죽었을 때, 그는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그의 숙부 진사가 왕위를 이었는데 진사왕이 재위 8년에 사망하자 그가 즉위하였다.
○二年, 春正月, 謁<東明>廟, 又祭天地於南壇. 拜<眞武>爲左將, 委以兵馬事. <武>, 王之親舅, 沈毅有大略, 時人服之. 秋八月, 王謂<武>曰: "<關彌城>者, 我北鄙之襟要也. 今爲<高句麗>所有. 此寡人之所痛惜, 而卿之所宜用心而雪 也." 遂謀將兵一萬, 伐<高句麗>南鄙. <武>身先士卒, 以冒矢石, 意復<石峴>等五城, 先圍<關彌城>, <麗>人 城固守. <武>以糧道不繼, 引而歸.
2년 봄 정월, 왕이 동명왕의 사당에 배알하고 또한 남쪽 제단에서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냈다.
진무를 좌장으로 임명하여 군사에 관한 일을 맡겼다. 진무는 왕의 외삼촌으로서 침착하고 굳세며 지략이 많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가을 8월, 왕이 진무에게 "관미성은 우리 나라 북쪽 변경의 요새이다. 그 땅이 지금은 고구려의 소유로 되어 있다. 이것을 과인은 애통해 하니, 그대는 응당 이 점에 마음을 기울여, 이 땅을 빼앗긴 치욕을 갚아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왕은 마침내 1만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칠 것을 계획하였다. 진무는 병졸보다 앞장서서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석현 등의 다섯 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먼저 관미성을 포위했는데, 고구려 사람들이 성을 둘러 싸고 굳게 방어하였다. 진무는 군량의 수송로를 확보하지 못하여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三年, 春二月, 立元子< 支>爲太子. 大赦. 拜庶弟<洪>爲內臣佐平. 秋七月, 與<高句麗>戰於<水谷城>下, 敗績. 大白{太白} 晝見.
趙炳舜. 『三國史節要』.
3년 봄 2월, 왕의 맏아들 전지를 태자로 삼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왕의 이복동생 홍을 내신 좌평으로 임명하였다.
가을 7월, 고구려와 수곡성 아래에서 싸워 패배하였다.
낮에 태백성이 나타났다.
○四年, 春二月, 星 于西北, 二十日而滅. 秋八月, 王命左將<眞武>等, 伐<高句麗>, <麗>王<談德>親帥兵七千, 陣於<浿水>之上, 拒戰. 我軍大敗, 死者八千人. 冬十一月, 王欲報<浿水>之役, 親帥兵七千人, 過<漢水>, 次於<靑木嶺>下. 會, 大雪, 士卒多凍死. 廻軍至<漢山城>, 勞軍士.
4년 봄 2월, 혜성이 서북쪽에 나타났다가 20일만에 사라졌다.
가을 8월, 왕이 좌장 진무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치게 하니, 고구려왕 담덕이 직접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패수에 진을 치고 대항하였다.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으니 사망자가 8천 명이었다.
겨울 11월, 왕이 패수 전투의 패배를 보복하기 위하여, 직접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한수를 건너 청목령 아래에 진을 쳤다. 그 때 마침 큰 눈이 내려 병졸들 가운데 동사자가 많이 발생하자 왕은 회군하여 한산성에 와서 군사들을 위로하였다.
○六年, 夏五月, 王與<倭>國結好, 以太子< 支>爲質. 秋七月, 大閱於<漢水>之南.
6년 여름 5월, 왕이 왜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태자 전지를 인질로 보냈다.
가을 7월, 한수 남쪽에서 대대적으로 군대를 사열하였다.
○七年, 春二月, 以<眞武>爲兵官佐平, <沙豆>爲左將. 三月, 築<雙峴城>. 秋八月, 王將伐<高句麗>, 出帥{師} 至<漢山>北柵. 其夜大星落, 營中有聲. 王深惡之, 乃止. 九月, 集都人, 習射於<西臺>.
趙炳舜. 『三國史節要』.
7년 봄 2월, 진무를 병관 좌평으로 삼고 사두를 좌장으로 삼았다.
3월, 쌍현성을 쌓았다.
가을 8월, 왕은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하여 군사를 출동하여 한산 북쪽 목책에 이르렀다. 그 날 밤에 큰 별이 떨어졌는데 진영에서 소리가 났다. 왕은 이를 매우 불안하게 생각하여 공격을 중지하였다.
9월, 서울 사람들을 모아 서대에서 활쏘기를 연습하게 하였다.
○八年, 秋八月, 王欲侵<高句麗>, 大徵兵馬, 民苦於役, 多奔<新羅>, 戶口襄{衰} 滅{減} .
今西龍.李丙燾.
8년 가을 8월, 왕이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하여 군사와 말을 대대적으로 징발하니, 백성들이 병역을 고통스럽게 생각하여 많은 사람들이 신라로 도망하였고, 이 결과로 호구가 줄었다.
○九年, 春二月, 星 于奎婁. 夏六月庚辰朔, 日有食之.
9년 봄 2월, 혜성이 규성과 누성 성좌에 나타났다.
여름 6월 초하루 경진일에 일식이 있었다.
○十一年, 夏, 大旱, 禾苗焦枯, 王親祭<橫岳>, 乃雨. 五月, 遣使<倭>國求大珠.
11년 여름, 큰 가뭄이 들어 벼가 타들어가자, 왕이 직접 횡악에서 기우제를 지내니 곧 비가 내렸다.
5월, 왜국에 사신을 보내 큰 구슬을 요구하였다.
○十二年, 春二月, <倭>國使者至, 王迎勞之, 特厚. 秋七月, 遣兵侵<新羅>邊境.
12년 봄 2월, 왜국에서 사신이 오자 왕이 이들을 환영하고 위로하였으며, 특별히 후하게 대우하였다.
가을 7월, 군사를 보내 신라 변경을 침공하였다.
○十四年, 春三月, 白氣自王宮西起, 如匹練. 秋九月, 王薨.
14년 봄 3월, 흰 기운이 왕궁 서쪽에서 일어났는데 마치 비단을 펼쳐 놓은 것 같았다.
가을 9월, 왕이 사망하였다.
○< 支王>[或士{云} <直支>.], 『梁書』名<映{暎 / }>, <阿莘>之元子. <阿莘>在位第三年, 立爲太子, 六年出質於<倭>國. 十四年, 王薨, 王仲弟<訓解>攝政, 以待太子還國, 季弟< 禮>殺<訓解>, 自立爲王. < 支>在<倭>聞訃, 哭泣請歸, <倭>王以兵士百人衛送. 旣至國界, <漢城>人<解忠>來告曰: "大王棄世, 王弟< 禮>殺兄自(+立) , 王願太子無輕入." < 支>留<倭>人自衛, 依海島以待之, 國人殺< 禮>, 迎< 支>卽位. 妃<八 >夫人, 生子<久 辛>.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趙炳舜. 『三國史節要』.
전지왕[혹은 직지라고도 한다.]의 이름을 [양서]에서는 영이라고 하였다. 그는 아신왕의 맏아들로서, 아신왕 재위 3년에 태자가 되었고, 6년에 왜국에 인질로 갔다. 14년에 아신왕이 사망하자 왕의 둘째 동생 훈해가 정사를 대리하며 태자의 귀국을 기다렸는데 왕의 막내 동생 첩례가 훈해를 죽이고 자기가 왕이 되었다. 이 때 전지가 왜국에서 부고를 듣고 울면서 귀국을 요청하니 왜왕이 1백 명의 군사로 하여금 그를 보호하여 귀국하게 하였다. 그가 국경에 이르자 한성 사람 해충이 와서 고하기를 "대왕이 죽은 후에, 왕의 동생 첩례가 형을 죽이고 자기가 왕위에 올랐으니, 태자께서는 경솔히 들어오지 마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전지가 왜인을 체류시켜 자기를 호위하게 하면서, 바다 가운데의 섬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백성들이 첩례를 죽이고 전지를 맞이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왕비는 팔수부인이다. 그녀는 아들 구이신을 낳았다.
○二年, 春正月, 王謁<東明>廟. 祭天地於南壇. 大赦. 二月, 遣使入<晉>朝貢. 秋九月, 以<解忠>爲達率, 賜<漢城>租一千石.
2년 봄 정월, 왕이 동명왕의 사당에 배알하고 남쪽 제단에서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내고 죄인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2월, 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9월, 해충을 달솔로 임명하고, 한성의 벼 1천 석을 주었다.
○三年, 春二月, 拜庶弟<餘信>爲內臣佐平, <解 {解須}> 爲內法佐平, <解丘>爲兵官佐平, 皆王戚也.
『북한본』.
3년 봄 2월, 이복동생 여신을 내신 좌평으로 임명하고, 해수를 내법 좌평으로 임명하고, 해구를 병관 좌평으로 임명하니 모두가 왕의 친척이었다.
○四年, 春正月, 拜<餘信>爲上佐平, 委以軍國政事. 上佐平之職, 始於此, 若今之 宰.
4년 봄 정월, 여신을 상좌평으로 임명하여 군사와 정사를 맡겼다. 상좌평이라는 직위가 이 때부터 시작되었으니, 지금의 재상과 같은 것이었다.
○五年, <倭>國遣使, 送夜明珠, 王優禮待之.
5년, 왜국이 사신을 파견하여 야명주를 보내오니 왕이 특별히 예우하였다.
○十一年, 夏五月甲申, 彗星見.
11년 여름 5월 갑신에 혜성이 나타났다.
○十二年, <東晉><安帝>遣使, 冊命王, 爲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將軍<百濟>王.
12년, 동진의 안제가 사신을 보내 왕을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진동장군백제왕으로 책봉하였다.
○十三年, 春正月甲戌朔, 日有食之. 夏四月, 旱, 民饑. 秋七月, 徵東北二部人年十五已上, 築<沙口城>, 使兵官佐平<解丘>監役.
13년 봄 정월 초하루 갑술일에 일식이 있었다.
여름 4월,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렸다.
가을 7월, 동부와 북부 2부의 15세 이상 되는 사람들을 징발하여 사구성을 쌓게 하고 병관 좌평 해구를 시켜 이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十四年, 夏, 遣使<倭>國, 送白綿{錦} 十匹.
趙炳舜. 『三國史節要』.
14년 여름, 왜국에 사신을 파견하여 흰 포목 열 필을 보냈다.
○十五年, 春正月戊戌, 星 于大微{太微}. 冬十(-一) 月丁亥朔, 日有食之.
趙炳舜. 『三國史節要』.
15년 봄 정월 무술에 혜성이 태미 성좌에 나타났다.
겨울 11월 초하루 정해일에 일식이 있었다.
○十六年, 春三月, 王薨.
16년 봄 3월, 왕이 사망하였다.
○<久 辛王>, < 支王>長子. < 支王>薨, 卽位.
구이신왕은 전지왕의 맏아들이다. 전지왕이 사망하자 그가 왕위에 올랐다.
○ {八} 年, 冬十二月, 王薨.
趙炳舜. 『三國史節要』.
8년 겨울 12월, 왕이 사망하였다.
○<毗有王>, <久 辛王>之長子.[或云: < 支王>庶子. 未知孰是.] 美姿貌, 有口辯, 人所推重, <久 辛王>薨, 卽位.
비유왕은 구이신왕의 맏아들이다.[혹은 전지왕의 서자라고도 하니 어느 것이 옳은지는 알 수 없다.] 그는 용모가 훌륭하고 말을 잘 하여 사람들이 따르고 귀중히 여겼다. 구이신왕이 사망하자 그가 즉위하였다.
○二年, 春二月, 王巡撫四部, 賜貧乏 有差. <倭>國使至, 從者五十人.
2년 봄 2월, 왕이 4부를 순행하며 백성들을 위무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정도에 따라 곡식을 주었다.
왜국 사신이 왔는데 수행자가 50명이었다.
○三年, 秋, 遣使入<宋>朝貢. 冬十月, 上佐平<餘信>卒, 以<解 {解須}> 爲上佐平. 十一月, 地震, 大風飛瓦. 十二月, 無氷.
『북한본』.
3년 가을, 송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0월, 상좌평 여신이 사망하자 해수를 상좌평으로 임명하였다.
11월, 지진이 발생하고, 큰 바람이 불어 기와가 날았다.
12월, 물이 얼지 않았다.
○四年, 夏四月, <宋><文皇帝>以王復修職貢, 降使冊授&先王<映>{前王< 支>} 爵號.[< 支王>十二年, <東晋>冊命, 爲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將軍<百濟>王.]
趙炳舜. 『三國史節要』.
4년 여름 4월, 송 나라 문황제는 왕이 다시 조공한다 하여 사신을 보내 선대 임금 영의 작위를 주었다.[전지왕 12년, 동진에서 전지왕을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진동장군백제왕으로 책봉했었다.]
○七年, 春夏不雨. 秋七月, 遣使入<新羅>, 請和.
7년, 봄과 여름에 비가 오지 않았다.
가을 7월,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였다.
○八年, 春二月, 遣使<新羅>, 送良馬二匹. 秋九月, 又送白鷹. 冬十月, <新羅>報聘以良金·明珠.
8년 봄 2월,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좋은 말 두 필을 보냈다.
가을 9월, 다시 흰 매를 보냈다.
겨울 10월, 신라에서 좋은 금과 구슬을 답례로 보내 왔다.
○十四年, 夏四月戊午朔, 日有食之. 冬十月, 遣使入<宋>朝貢.
14년 여름 4월 초하루 무오일에 일식이 있었다.
겨울 10월, 송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二十一年, 夏五月, 宮南池中有火, 焰如車輪, 終夜而滅. 秋七月, 旱, 不熟, 民饑, 流入<新羅>者多.
21년 여름 5월, 대궐 남쪽 연못에서 불길이 일어 났는데, 불꽃이 수레바퀴 같았고, 밤새도록 타다가 사그러졌다.
가을 7월, 가뭄이 들어 곡식이 익지 않았으므로 백성들이 굶주려 신라로 들어간 자가 많았다.
○二十八年, 星隕如雨, 星 于西北, 長二丈許. 秋八月, 蝗害 , 年饑.
28년, 별이 비처럼 떨어지고 혜성이 서북쪽에 나타났는데 길이가 두 발 정도 되었다.
가을 8월, 메뚜기 떼가 발생하여 곡식에 해를 입혀 흉년이 들었다.
○二十九年, 春三月, 王獵于<漢山>. 秋九月, 黑龍見<漢江>, {須} 臾雲霧晦冥飛去. 王薨.
『북한본』.
29년 봄 3월, 왕이 한산에서 사냥하였다.
가을 9월, 검은 용이 한강에 나타났는데, 잠시 구름과 안개가 끼어 어두워지자 날아갔다.
왕이 사망하였다.
○<蓋鹵王>[或云<近蓋婁>.], 諱<慶司>, <毗有王>之長子. <毗有>在位二十九年, 薨, 嗣.
개로왕[혹은 근개루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경사이니 비유왕의 맏아들이다. 비유왕이 재위 29년에 사망하자 왕위를 이었다.
○十四年, 冬十月癸酉朔, 日有食之.
14년 겨울 10월 초하루 계유일에 일식이 있었다.
○十五年, 秋八月, 遣將侵<高句麗>南鄙. 冬十月, 葺<雙峴城>, 設大柵於<靑木嶺>, 分<北漢山城>士卒, 戍之.
15년 가을 8월, 왕이 장수를 파견하여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침공하였다.
겨울 10월, 쌍현성을 수축하고, 청목령에 큰 목책을 설치하고, 북한산성의 병졸들을 나누어 그곳을 수비하게 하였다.
○十八年, 遣使朝<魏>. 上表曰: "臣立國東極, 豺狼隔路, 雖世承靈化, 莫由奉藩. 瞻望雲闕, 馳情罔極, 凉風微應. 伏惟皇帝陛下, {協} 和天休, 不勝係仰之情. 謹遣私署冠軍將軍駙馬都尉弗斯侯長史<餘禮>, 龍 將軍<帶方>太守司馬<張茂>等, 投舫波阻, 搜徑玄津, 託命自然之 {運} , 遣進萬一之誠. 冀神祇垂感, 皇靈洪覆, 克達天庭, 宣暢臣志, 雖旦聞夕沒, 永無餘恨." 又云: "臣與<高句麗>, 源出<扶餘{夫餘}> , 先世之時, 篤崇舊款. 其祖<釗>, 輕廢 好, 親率士衆, 凌踐臣境. 臣祖< {須}> , 整旅電邁, 應機馳擊, 矢石暫交, 梟斬<釗>首. 自爾已來, 莫敢南顧. 自<馮>氏數終, 餘燼奔竄, 醜類漸盛. 遂見凌逼, 構怨連禍, 三十餘載, 財 力竭, 轉自孱 . 若天慈曲矜, 遠及無外, 速遣一將, 來救臣國, 當奉送 {鄙} 女, 執□{ /掃 }後宮, 幷遣子弟, 牧 外廐, 尺壤匹夫, 不敢自有." 又云: "今<璉>有罪, 國自魚肉, 大臣彊族, 戮殺無已, 罪盈惡積, 民庶崩離, 是滅(+亡) 之期, 假手之秋也. 且<馬{馮}> 族士馬, 有鳥畜之戀, <樂浪>諸郡, 懷首丘之心, 天威一擧, 有征無戰, 臣雖不敏, 志 畢力, 當率所統, 承風響應. 且<高句麗>不義, 逆詐非一, 外慕< >藩卑之辭, 內懷凶禍豕突之行. 或南通<劉>氏, 或北約< >, 共相脣鹵{齒} , 謀凌王略. 昔<唐堯>至聖, 致罰<丹水>, <孟嘗>稱仁, 不捨塗 . 涓流之水, 宜早壅塞, 今若不取, 將貽後悔. 去庚辰年後, 臣西界<小石山>北國海中, 見屍十餘, 得衣器鞍勒, 視之, 非<高句麗>之物. 後聞, 乃是王人來降臣國, 長蛇隔路, 以沈于海. 雖未委當, 深懷憤 . 昔<宋>戮<申舟>, <楚><莊>徒跣, 撮放鳩, <信陵>不食. 克敵立名, {美} 隆無已, 夫以區區偏鄙, 猶慕萬代之信, 陛下合氣天地, 勢傾山海, 豈令小 , 跨塞天達{逵} ? 今上所得鞍, 一以實驗." <顯祖>以其僻遠冒險朝獻, 禮遇尤厚. 遣使者<邵安>, 與其使俱還. 詔曰: "得表聞之, 無恙其{甚} 善{喜} . 卿在東隅, 處五服之外, 不遠山海, 歸誠<魏>闕, 欣嘉至意, 用 于懷. 朕承萬世之業, 君臨四海, 統御群生. 今宇內淸一, 八表歸義, 襁負而至者, 不可稱數. 風俗之和, 士馬之盛, 皆<餘禮>等, 親所聞見. 卿與<高句麗>不穆, 屢致凌犯, 苟能順義, 守之以仁, 亦何憂於寇 也? 前所遣使, 浮海以撫荒外之國, 從來積年, 往而不返, 存亡達否, 未能審悉. 卿所送鞍, 比校{較} 舊乘, 非中國之物. 不可以疑似之事, 以生必然之過, 經略權要, 以具別旨." 又詔曰: "知: <高句麗>阻疆, 侵 卿上{土} , 修先君之舊怨, 棄息民之大德. 兵交累載, 難結荒邊, 使兼<申胥>之誠, 國有<楚>·<越>之急. 乃應展義扶微, 乘機電擧. 但以<高句麗>稱藩先朝, 供職日久. 於彼, 雖有自昔之 , 於國, 未有犯令之愆. 卿使命始通, 便求致伐, 尋討事會, 理亦未周. 故往年遣<禮>等至<平壤>, 欲驗其由狀, 然<高句麗>奏請頻煩, 辭理俱詣, 行人不能抑其請, 司法無以成其責, 故聽其所啓, 詔<禮>等還. 若今復違旨, 則過各{咎} 益露, 後雖自陳, 無所逃罪, 然後興師討之, 於義爲得. 九夷之國, 世居海外, 道暢則奉藩, 惠 則保境. 故 著於前典, 貢曠於歲時. 卿備陳彊弱之形, 具列往代之迹, 俗殊事異, 擬 { } 乖衷. 洪規大略, 其致猶在. 今中夏平一, 宇內無虞. 每欲陵威東極, 懸旌域表, 拯荒黎於偏方, 舒皇風於遠服. 良由<高句麗>卽 , 未及卜征. 今若不從詔旨, 則卿之來謀, 載 {協} 朕意, 元戎啓行, 將不云遠. 便可豫率同興, 具以待事, 時遣報使, 速究彼情. 師擧之日, 卿爲鄕導之首, 大捷之後, 又受元功之賞, 不亦善乎? 所獻錦布海物, 雖不悉達, 明卿至心. 今賜雜物如別(+幅) ." 又詔<璉>護送<安>等. <安>等至<高句麗>, <璉>稱昔與<餘慶>有 , 不令東過, <安>等於是皆還, 乃下詔切責之. 後使<安>等, 從<東萊>浮海, 賜<餘慶>璽書, 褒其誠節. <安>等至海濱, 遇風飄蕩, 竟不達而還. 王以<麗>人屢犯邊鄙, 上表乞師於<魏>, 不從. 王怨之, 遂絶朝貢.
『북한본』.趙炳舜은 이를 '運'의 避諱字로 보았다.李丙燾.『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魏書].李丙燾. [魏書].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魏書].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魏書].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魏書].『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
18년,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고 왕이 다음과 같은 표문을 올렸다.
"제가 동쪽 끝에 나라를 세웠으나, 이리와 승냥이 같은 고구려가 길을 막고 있으니, 비록 대대로 중국의 교화를 받았으나 번방 신하의 도리를 다할 수 없었습니다. 멀리 천자의 궁궐을 바라보면서 달려가고 싶은 생각은 끝이 없으나, 북쪽의 서늘한 바람으로 말미암아 대답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생각하건대 폐하께서는 천명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니 존경하는 심정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삼가 본국의 관군장군부마도위불사후장사 여례와 용양장군대방태수사마 장무 등을 보내어 험한 파도에 배를 띄워 아득한 나루를 찾아, 목숨을 자연의 운명에 맡기면서 저의 정성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내고자 하옵니다. 바라건대 천지신명이 감동하고 역대 황제의 신령이 크게 보호하여, 이들이 폐하의 거처에 도달하여 저의 뜻을 전하게 할 수 있다면, 비록 이를 아침에 듣고 저녁에 죽더라도 길이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표문에서 또한 말했다.
"저와 고구려는 조상이 모두 부여 출신이므로 선조 시대에는 고구려가 옛 정을 굳건히 존중하였는데, 그의 조상 소가 경솔하게 우호 관계를 깨뜨리고 직접 군사를 거느려 우리 국경을 침범하여 왔습니다. 우리 조상 수가 군사를 정비하여 번개같이 달려가 기회를 타서 공격하니 잠시 싸우다가 소의 머리를 베어 효시하였습니다. 이로부터 감히 남쪽을 돌아보지 못하다가 풍씨의 운수가 다하자, 그의 잔적들이 고구려로 도망해온 이후로 추악한 무리가 차츰 세력을 쌓아 갔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결국 우리를 무시하고 침략을 하게 되었습니다. 원한을 맺고 전화가 이어진지 30여 년이 되었으니, 재정은 탕진되고 힘은 고갈되어 나라가 점점 쇠약해졌습니다. 만일 폐하의 인자한 생각이 먼 곳까지 빠짐없이 미친다면, 속히 장수를 보내 우리 나라를 구해 주소서. 그렇해준다면 저의 딸을 보내 후궁을 청소하게 하고, 자식과 아우를 보내 외양간에서 말을 기르게 하겠으며, 한 치의 땅, 한 명의 백성이라도 감히 저의 소유로 하지 않겠습니다."
표문에서는 또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연은 죄를 지어 나라가 스스로 남에게 잡아 먹히게 되었고, 대신과 호족들의 살육 행위가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의 죄악은 넘쳐나서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있으니, 지금이야말로 그들이 멸망할 시기로서 폐하의 힘을 빌릴 때입니다. 또한 풍족의 군사와 군마는 집에서 키우는 새나 가축이 주인을 따르는 것 같은 심정을 가지고 있고, 낙랑의 여러 군은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니, 황제의 위엄이 한번 움직여 토벌을 행한다면 전투가 벌어질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저는 비록 명민하지는 않으나 힘을 다하여 우리 군사를 거느리고 위풍을 받들어 호응할 것입니다. 또한 고구려는 의롭지 못하여 반역하고 간계를 꾸미는 일이 많으니, 겉으로는 외효가 스스로 자신을 변방의 나라라고 낮추어 쓰던 말버릇을 본받으면서도, 속으로는 흉악한 화란과 행동을 꿈꾸면서, 남쪽으로는 유씨와 내통하기도 하고, 북쪽으로는 연연과 맹약을 맺어 강하게 결탁하기도 함으로써 폐하의 정책을 배반하려 하고 있습니다. 옛날 요 임금은 지극한 성인이었으나 단수에서 전투를 하여 묘만을 벌 주었으며, 맹상군은 어질다고 소문이 났었으나 길가에서 남을 꾸짖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작게 흐르는 물도 일찍 막아야 하는 것이니, 지금 만약 고구려를 치지 않는다면 앞으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지난 경진년 후에 우리 나라 서쪽 경계의 소석산 북쪽 바다에서 10여 구의 시체를 보았고, 동시에 의복, 기물, 안장, 굴레 등을 얻었는데, 이를 살펴보니 고구려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후에 들으니 이는 바로 황제의 사신이 우리 나라로 오다가 고구려가 길을 막았기에 바다에 빠진 것이라 합니다. 비록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매우 분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옛날 송 나라가 신주를 죽이니 초 장왕이 맨발로 다녔으며, 새매가 풀어준 비둘기를 잡아 요리를 하니 신릉군이 식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적을 이기고 이름을 세우는 것은 대단히 아름답고 훌륭한 일입니다. 작은 변방도 오히려 만대의 신의를 생각하는데 하물며 폐하께서는 천지의 기를 모으고, 세력이 산과 바다를 기울일 수 있는데 어찌 고구려와 같은 애숭이로 하여금 황제의 길을 막게 합니까? 이제, 북쪽 바다에서 얻었던 안장을 바쳐 증거로 삼고자 합니다."
위 나라 현조가 백제의 사신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조공을 바쳤다 하여 융숭하게 예우하고, 사신 소안으로 하여금 그들을 데리고 백제로 가게 하였다. 이 때 조칙을 내려 말했다.
"글을 받고 아무 일 없이 지낸다는 말을 들으니 매우 기쁘다. 그대가 동쪽 한 구석, 5복의 밖에 있으면서 산과 바다를 멀리 여기지 않고 위 나라 조정에 정성을 바치니, 그 지극한 뜻을 가상히 여겨 가슴 속에 기억해 두리라. 내가 만대에 누릴 위업을 계승하여 사해에 군림하면서 모든 백성들을 다스리니, 이제 나라는 깨끗이 통일되고 8방에서 귀순하기 위하여 어린아이를 업고 이 땅에 이르는 자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평화로운 풍속과 성대한 군사는 여례 등이 직접 듣고 보았다. 그대는 고구려와 불화하여 여러 번 침범을 당하였지만 만일 정의를 따르고 어진 마음으로 방어할 수 있다면 원수에 대하여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이전에 사신을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 국경 밖의 먼 나라를 위무하게 하였으나, 그 후 여러 해가 되도록 돌아오지 않으니 그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또는 그곳에 도착했는지 도착하지 못했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대가 보낸 안장을 예전 것과 비교하여 보니 중국의 산물이 아니었다. 의심되는 일을 사실로 단정하는 과오를 범할 수는 없는 일이니, 고구려를 침공할 계획은 별지에 상세히 밝힐 것이다."
이 조서에서 이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도다. 즉, 고구려는 국토의 지세가 험하다는 사실을 믿고 그대의 국토를 침범하였으니, 이는 자기 선대 임금의 오랜 원한을 갚으려고 백성들을 편안케하는 큰 덕을 버린 것이다. 전쟁이 여러 해에 걸쳐 이어지니 변경을 단속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하여 사신은 신포서의 정성을 겸하게 되고 나라는 초, 월과 같이 위급하게 되었구나. 이제 마땅히 정의를 펴고 약자를 구하기 위하여 기회를 보아 번개처럼 공격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는 선대로부터 번방의 신하로 자처하며 오랫동안 조공을 바쳐왔다. 그들 스스로는 비록 이전부터 잘못이 있었으나, 나에게는 명령을 위반한 죄를 지은 일이 없다. 그대가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와 그들을 곧 토벌하기를 요청하였으나, 사리를 검토해보아도 토벌의 이유가 또한 충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지난해에 예 등을 평양에 보내 고구려의 상황을 조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가 여러 번 주청하고 그 말이 사리에 모두 맞으니 우리 사신은 그들의 요청을 막을 수 없었고, 법관은 그들에게 죄명을 줄만하지 못했던 바, 그들이 말하는 바를 들어 주고 예 등을 돌아오게 하였다. 만약 고구려가 이제 다시 명령을 어긴다면, 그들의 과오가 더욱 드러날 것이므로 뒷날 아무리 변명을 하더라도 죄를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니, 그렇게 된 연후에는 군사를 일으켜 그들을 토벌하더라도 이치에 합당할 것이다. 모든 오랑캐 나라들은 대대로 바다 밖에 살면서, 왕도가 창성하면 번방 신하로서의 예절을 다하고, 은혜가 중단되면 자기의 영토를 지켜 왔다. 따라서 중국과 예속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예전의 법전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호시를 바치는 일은 세시에 그쳤다. 그대가 강약에 대한 형세를 말하였으며 지난 시대의 사실들을 모두 열거하였지만, 풍속이 다르고 사정이 변하여 무엇을 주려 하여도 나의 생각과 맞지 않는다. 우리의 너그러운 규범과 관대한 정책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이제 중국은 통일 평정되어 나라 안에 근심이 없다. 이에 따라 매번 동쪽 끝까지 위엄을 떨치고 국경 밖에 깃발을 휘날려 먼 나라의 굶주리는 백성을 구원하며, 먼 지방까지 황제의 위풍을 보이고 싶었다. 그러나 사실은 고구려가 그 때마다 진정을 토로하였기 때문에 미처 토벌을 도모하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 그들이 나의 조칙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대의 계책이 나의 뜻과 맞으니 큰 군사가 토벌의 길을 떠나는 것도 장차 멀다고는 할 수 없다. 그대는 미리 군사를 정돈하여 함께 군사를 일으킬 수 있도록 준비할 것이며, 때에 맞추어 사신을 보내 그들의 실정을 즉시 알 수 있도록 해야할 것이다. 우리 군사가 출동하는 날, 그대가 향도의 선두가 된다면 승리한 후에는 역시 가장 큰 공로로 상을 받게 될 것이니, 이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그대가 바친 포백과 해산물은 비록 모두 도착하지는 않았으나, 그대의 지극한 성의는 잘 알겠도다. 이제 별지와 같이 내가 여러 가지 물품을 보내노라."
또한 고구려왕 연에게 조서를 보내 소안 등을 백제로 보호하여 보내도록 하였다. 소안 등이 고구려에 이르자 연이 예전에 여경과 원수를 진 일이 있다 하여, 그들을 동쪽으로 통과하지 못하게 하므로 소안 등이 모두 돌아가니, 위 나라에서는 곧 고구려왕에게 조서를 내려 엄하게 꾸짖었다. 그 후에 소안 등으로 하여금 동래를 출발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여경에게 조서를 주어 그의 정성과 절조를 표창하게 하였다. 그러나 소안 등이 바닷가에 이르자 바람을 만나 표류하다가 끝내 백제에 도달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왕은 고구려가 자주 변경을 침범한다하여 위 나라에 표문을 올려 군사를 요청하였으나, 위 나라에서는 듣지 않았다. 왕이 이를 원망하여 마침내 조공을 중단하였다.
○二十一年, 秋九月, <麗>王<巨璉>帥兵三萬, 來圍王都<漢城>. 王閉城門不能出戰. <麗>人分兵爲四道, 夾攻, 又乘風縱火, 焚燒城門. 人心危懼, 或有欲出降者. 王窘不知所圖, 領數十騎, 出門西走. <麗>人追而害之. 先是, <高句麗><長壽王>, 陰謀<百濟>, 求可以間諜於彼者. 時, 浮屠<道琳>應募曰: "愚僧旣不能知道, 思有以報國恩. 願大王不以臣不肖, 指使之, 期不辱命." 王悅, 密使譎<百濟>. 於是, <道琳>佯逃罪, 奔入<百濟>. 時, <百濟>王<近蓋婁>好博 . <道琳>詣王門, 告曰: "臣少而學碁, 頗入妙, 願有聞於左右." 王召入對碁, 果國手也. 遂尊之, 爲上客, 甚親 之, 恨相見之晩. <道琳>一日侍坐, 從容曰: "臣異國人也, 上不我疎外, 恩私甚渥, 而惟一技之是效, 未嘗有分毫之益. 今願獻一言, 不知上意如何耳." 王曰: "第言之, 若有利於國, 此所望於師也." <道琳>曰: "大王之國, 四方皆山丘河海, 是天設之險, 非人爲之形也. 是以, 四 之國, 莫敢有 心, 但願奉事之不暇. 則王當以崇高之勢, 富有之業, 人之視聽, 而城郭不葺, 宮室不修. 先王之骸骨, 權 於露地, 百姓之屋廬, 屢壞於河流, 臣竊爲大王不取也." 王曰: "諾! 吾將爲之." 於是, 盡發國人, 烝土築城, 卽於其內, 作宮樓閣臺 , 無不壯麗. 又取大石於<郁里河>, 作槨以葬父骨, 緣河樹堰, 自<蛇城>之東, 至<崇山>之北. 是以, 倉庾虛竭, 人民窮困, 邦之 , 甚於累卵. 於是, <道琳>逃還以告之. <長壽王>喜, 將伐之, 乃授兵於帥臣. <近蓋婁>聞之, 謂子<文周>曰: "予愚而不明, 信用姦人之言, 以至於此. 民殘而兵弱, 雖有危事, 誰肯爲我力戰? 吾當死於社稷, 汝在此俱死, 無益也. 避難以續國系焉?" <文周>乃與<木 滿致>·<祖彌桀取>[<木 >·<祖彌>, 皆複姓, 『隋書』以<木 >爲二姓, 未知孰是.]南行焉. 至是, <高句麗>對盧<齊于>·<再曾桀婁>·<古 萬年>[<再曾>·<古 >, 皆複姓.]等帥兵, 來攻北城, 七日而拔之, 移攻南城, 城中危恐, 王出 {逃} . <麗>將<桀婁>等見王下馬拜己, 向王面三唾之, 乃數其罪, 縛送於<阿且城{阿旦城}> 下 之. <桀婁>·<萬年>, 本國人也, 獲罪逃竄<高句麗>.
論曰: <楚>< 王{昭王}> 之亡也, < 公><辛>之弟<懷>, 將弑王曰: "<平王>殺吾父, 我殺其子, 不亦可乎?" <辛>曰: "君討臣, 誰敢 之? 君命, 天也, 若死天命, 將誰 ?" <桀婁>等, 自以罪不見容於國, 而導敵兵, 縛前君而害之, 其不義也, 甚矣. 曰: "然則<伍子胥>之入< >鞭尸, 何也?" 曰: "<楊子>『法言』評此以爲不由德. 所謂德者, 仁與義而已, 則<子胥>之 , 不如< 公>之仁. 以此論之, <桀婁>等之爲不義也, 明矣."
三國史記卷第二十五.
今西龍.李丙燾.趙炳舜. ' '은 高麗 光宗의 諱인 '昭'의 避諱字.
21년 가을 9월, 고구려왕 거련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수도 한성을 포위했다. 왕이 싸울 수가 없어 성문을 닫고 있었다. 고구려 사람들이 군사를 네 방면으로 나누어 협공하고, 또한 바람을 이용해서 불을 질러 성문을 태웠다. 백성들 중에는 두려워 하여 성 밖으로 나가 항복하려는 자들도 있었다. 상황이 어렵게 되자 왕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기병 수십 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가 서쪽으로 도주하려 하였으나 고구려 군사가 추격하여 왕을 죽였다.
이보다 앞서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를 치기 위하여, 백제에 가서 첩자 노릇을 할만한 자를 구하였다. 이 때, 중 도림이 이에 응하여 말했다.
"소승이 원래 도는 알지 못하지만 나라의 은혜에 보답코자 합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저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마시고 일을 시켜 주신다면 왕명을 욕되게 하지 않을 것을 기약합니다."
왕이 기뻐하여 비밀리에 그를 보내 백제를 속이도록 하였다. 이에 도림은 거짓으로 죄를 지어 도망하는 체하고 백제로 왔다. 당시의 백제왕 근개루는 장기와 바둑을 좋아하였다. 도림이 대궐 문에 이르러 "제가 어려서부터 바둑을 배워 상당한 묘수의 경지를 알고 있으니, 왕께 들려 드리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를 불러 들여 대국을 하여 보니 과연 국수였다. 왕은 마침내 그를 상객으로 대우하고 매우 친하게 여겨 서로 늦게 만난 것을 한탄하였다. 도림이 하루는 왕을 모시고 앉아서 말했다.
"저는 다른 나라 사람인데 왕께서 저를 멀리 여기시지 않고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나, 다만 한 가지 재주로 보답했을 뿐이오, 아직 털끝만한 이익도 드린 적이 없습니다. 이제 한 말씀 올리려 하오나 왕의 뜻이 어떠한지 알 수 없습니다."
왕이 말했다.
"말해 보라. 만일 나라에 이롭다면 이는 선생에게서 바라는 것이로다."
도림이 말했다.
"대왕의 나라는 사방이 모두 산, 언덕, 강, 바다이니 이는 하늘이 만든 요새이지 사람의 힘으로 된 지형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방의 이웃나라들이 감히 엿볼 마음을 갖지 못하고 다만 받들어 섬기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왕께서는 마땅히 숭고한 기세와 부유한 치적으로 남들을 놀라게 해야 할 것인데, 성곽은 수축되지 않았고 궁실은 수리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선왕의 해골은 들판에 가매장되어 있으며, 백성의 가옥은 자주 강물에 허물어지니, 이는 대왕이 취할 바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왕이 말했다.
"좋다! 내가 그리 하겠다."
이에 왕은 백성들을 모조리 징발하여, 흙을 구어 성을 쌓고, 그 안에는 궁실, 누각, 사대를 지으니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한 욱리하에서 큰 돌을 캐다가 관을 만들어 아버지의 해골을 장사하고, 사성 동쪽으로부터 숭산 북쪽까지 강을 따라 둑을 쌓았다. 이로 말미암아 창고가 텅비고 백성들이 곤궁하여져서 나라는 누란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에 도림이 도망해 돌아와서 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장수왕이 기뻐하며 백제를 치기 위하여 장수들에게 군사를 나누어 주었다. 근개루가 이 말을 듣고 아들 문주에게 말했다.
"내가 어리석고 총명하지 못하여, 간사한 사람의 말을 믿다가 이렇게 되었다. 백성들은 쇠잔하고 군대는 약하니, 비록 위급한 일을 당하여도 누가 기꺼이 나를 위하여 힘써 싸우려 하겠는가? 나는 당연히 나라를 위하여 죽어야 하지만 네가 여기에서 함께 죽는 것은 유익할 것이 없으니, 난리를 피하여 있다가 나라의 왕통을 잇도록 하라."
문주가 곧 목협 만치와 조미 걸취[목협, 조미는 모두 복성인데, [수서]에서는 목협을 두 개의 성으로 보았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를 데리고 남쪽으로 떠났다. 이 때 고구려의 대로 제우, 재증 걸루, 고이 만년[재증, 고이는 모두 복성이다.]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쪽 성을 공격한지 7일만에 함락시키고, 남쪽 성으로 옮겨 공격하자 성 안이 위험에 빠지고 왕은 도망하여 나갔다. 고구려 장수 걸루 등이 왕을 보고 말에서 내려 절을 하고, 왕의 낯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고서 죄목을 따진 다음 아차성 밑으로 묶어 보내 죽이게 하였다. 걸루와 만년은 원래 백제 사람으로서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했었다.
저자의 견해 : 초 나라 소왕이 운 땅으로 도망갔을 때, 운공인 신의 아우 회가 소왕을 죽이려 하면서 말했다.
"평왕이 나의 아버지를 죽였으니, 내가 그 아들을 죽이는 것이 또한 옳지 않은가?"
신이 말했다.
"임금이 신하를 치는 것을 누가 감히 원수로 생각하겠는가? 임금의 명령은 하늘 같은 것이니, 하늘의 명령으로 죽었다면 장차 누구를 원수라 하겠는가?"
걸루 등은 자신의 죄 때문에 나라에서 용납되지 않았는데, 도리어 적병을 인도하여 이전의 자기 임금을 묶어 죽였으니, 의롭지 못한 정도가 심하다. 어떤 사람은 "그렇다면 오 자서가 초 나라 서울 영에 들어가, 평왕의 시체에 매질을 한 것은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라고 말할 것이다. 양자 [법언]에는 이를 평하여 "덕에 기반을 둔 행동이 아니다"라고 말하였다. 이른바 덕이란 '인'과 '의'가 있을 뿐이니, 오 자서의 잔인함이 운공의 어진 행위만 못하다. 이렇게 평한다면 걸루 등이 의롭지 못하다는 것이 명백히 드러난다.
삼국사기 권 제 25 끝
三國史記卷第二十六.
삼국사기 권 제 26
百濟本紀第四.
<文周王>·<三斤王>·<東城王>·<武寧王>·<聖王>.
백제본기 제4
문주왕, 삼근왕, 동성왕, 무녕왕, 성왕.
○<文周王>[或作<汶州>.], <蓋鹵王>之子也. 初, <毗有王>薨, <蓋鹵>嗣位, <文周>輔之, 位至上佐平. <蓋鹵>在位二十一年, <高句麗>來侵, 圍<漢城>. <蓋鹵> 城自固, 使<文周>求救於<新羅>, 得兵一萬廻. <麗>兵雖退, 城破王死, 遂卽位. 性柔不斷, 而亦愛民, 百姓愛之. 冬十月, {移} 都於<熊津>.
趙炳舜. 『三國史節要』.
문주왕['文周'를 '汶州'로도 쓴다.]은 개로왕의 아들이다. 처음에 비유왕이 죽고 개로가 왕위를 이었을 때 문주가 그를 보좌하여 직위가 상좌평에 이르렀다. 개로 재위 21년에 고구려가 침입하여 한성을 포위하였다. 개로가 성을 막고 굳게 수비하면서 문주를 신라에 보내 구원을 요청토록 하였다. 그는 구원병 1만 명을 얻어 돌아왔다. 고구려 군사는 비록 물러갔으나 성이 파괴되고 왕이 죽어서 문주가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성격은 우유부단하였으나, 또한 백성을 사랑하였으므로 백성들도 그를 사랑하였다.
겨울 10월, 웅진으로 도읍을 옮겼다.
○二年, 春二月, 修葺<大豆山城>, 移<漢>北民戶. 三月, 遣使朝<宋>, <高句麗>塞路, 不達而還. 夏四月, <耽羅>國獻方物, 王喜, 拜使者爲恩率. 秋八月, 拜<解仇>爲兵官佐平.
2년 봄 2월, 대두산성을 수축하고 이곳으로 한강 이북의 민가를 옮겼다.
3월, 송 나라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려 하였으나 고구려가 길을 막았으므로 되돌아왔다.
여름 4월, 탐라국에서 토산물을 바쳐오자 왕이 기뻐하여 그 사신을 은솔로 임명하였다.
가을 8월, 해구를 병관 좌평으로 임명하였다.
○三年, 春二月, 重修宮室. 夏四月, 拜王弟<昆支>爲內臣佐平, 封長子<三斤>爲太子. 五月, 黑龍見<熊津>. 秋七月, 內臣佐平<昆支>卒.
3년 봄 2월, 궁실을 중수하였다.
여름 4월, 왕의 아우 곤지를 내신 좌평으로 임명하고, 맏아들 삼근을 태자로 책봉하였다.
5월, 검은 용이 웅진에 나타났다.
가을 7월, 내신 좌평 곤지가 사망하였다.
○四年 , 秋八月, 兵官佐平<解仇>, 擅權亂法, 有無君之心, 王不能制. 九月, 王出獵, 宿於外, <解仇>使盜害之, 遂薨.
李丙燾는, 연표에 의하면 文周王은 재위한 것이 3년 뿐이므로, 이 四年의 기사는 모두 잘못 들어간 것으로 본다.
趙炳舜은 [三國史節要]와 [三國史記]의 연표에 근거하여 四年의 이 기사를 모두 3년의 기사로 본다.
4년 가을 8월, 병관 좌평 해구가 마음대로 권력을 행사하여, 법 질서를 문란하게 하며, 임금을 경시하였으나 왕이 이를 제어하지 못하였다.
9월, 왕이 사냥하기 위하여 나갔다가 외부에서 묵었는데, 해구가 도적으로 하여금 그를 해치게 하여, 왕이 마침내 사망하였다.
○<三斤王>[或云<壬乞>.], <文周王>之長子. 王薨, 繼位, 年十三歲, 軍國政事, 一切委於佐平<解仇>.
삼근왕[혹은 임걸이라고도 한다.]은 문주왕의 맏아들이다. 왕이 사망하자 왕위를 이었으니, 나이 13세였다. 군사 임무와 나라 정사에 대한 일체의 권한을 좌평 해구에게 맡겼다.
○二年, 春, 佐平<解仇>與恩率<燕信>聚衆, 據<大豆城>叛. 王命佐平<眞男>以兵二千討之, 不克. 更命德率<眞老>, 帥精兵五百, 擊殺<解仇>. <燕信>奔<高句麗>, 收其妻子, 斬於<熊建{熊津}> 市.
○論曰: 『春秋』之法, 君弑而賊不討, 則深責之, 以爲無臣子也. <解仇>賊害<文周>, 其子<三斤>繼位, 非徒不能誅之, 又委之以國政, 至於據一城以叛, 然後再興大兵以克之. 所謂履霜不戒, 馴致堅氷, 熒熒不滅, 至于炎炎, 其所由來, 漸矣. <唐><憲宗>之弑, 三世後, 僅能殺其賊, 海隅之荒僻, <三斤>之童蒙, 又烏足道哉! 三月己酉朔, 日有食之.
趙炳舜. 『三國史節要』.
2년 봄, 좌평 해구가 은솔 연신과 함께 무리를 모아 대두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왕이 좌평 진남에게 명령하여 군사 2천 명으로 토벌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했다. 다시 덕솔 진로에게 명하여 정예 군사 5백 명을 거느리고 해구를 공격하여 죽이게 했다. 연신이 고구려로 달아나자 그의 처자들을 체포하여 웅진 시장에서 목을 베었다.
저자의 견해 : [춘추]의 논법에서는 임금을 죽였는데도 그 역적의 죄를 다스리지 않으면 이를 엄하게 규탄하여 이는 신하다운 신하가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해구가 문주왕을 시해하였는데 그의 아들 삼근이 왕위를 계승하여 그를 죽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정사를 그에게 맡겼다가 그가 하나의 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키게 된 후에야 두 번이나 대병을 출동시켜 그를 제압하였다. 이는 소위 서리를 밟으면서도 경계하지 않다가 얼음이 얼 때 이르는 격이며, 조그만 불씨를 끄지 않다가 큰 불을 일으키는 격이니,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연유는 모두 점차로 그렇게 변하는 것이다. 당 나라 헌종이 살해되었을 때도 3대 후에야 겨우 그 역적을 죽였으니, 황차 바다 모퉁이에 있는 외진 땅의 삼근과 같은 애숭이에 있어서야 어찌 말할 것이 있으랴!
3월 초하루 기유일에 일식이 있었다.
○三年, 春夏大旱. 秋九月, 移<大豆城>於<斗谷>. 冬十一月, 王薨.
3년, 봄과 여름에 큰 가뭄이 들었다.
가을 9월, 대두성을 두곡으로 옮겼다.
겨울 11월, 왕이 사망하였다.
○<東城王>, 諱<牟大>[或作<摩牟{摩帝}> .], <文周王>弟<昆支>之子. 膽力過人, 善射, 百發百中. <三斤王>薨, 卽位.
李丙燾. [三國遺事].
동성왕의 이름은 모대[혹은 마모라고도 한다.]이니, 문주왕의 아우 곤지의 아들이다. 담력이 대단히 컸으며, 활을 잘 쏘아 백발백중이었다. 삼근왕이 사망하자 왕위에 올랐다.
○四年, 春正月, 拜<眞老>爲兵官佐平, 兼知內外兵馬事. 秋九月, <靺鞨>襲破<漢山城>, 虜三百餘戶以歸. 冬十月, 大雪丈餘.
4년 봄 정월, 진로를 병관 좌평으로 임명하고, 서울과 지방의 군사에 관한 일을 겸하여 맡게 하였다.
가을 9월, 말갈이 한산성을 습격하여 함락시키고 3백여 호를 포로로 잡아 돌아갔다.
겨울 10월, 큰 눈이 한 길 넘게 내렸다.
○五年, 春, 王以獵出至<漢山城>, 撫問軍民, 浹旬乃還. 夏四月, 獵於<熊津>北, 獲神鹿.
5년 봄, 왕이 사냥하기 위하여 한산성에 이르러 군사와 백성들을 위무하고 열흘만에 돌아왔다.
여름 4월, 웅진 북쪽에서 사냥하다가 신기한 사슴을 잡았다.
○六年, 春二月, 王聞<南齊><蕭道成>, 冊<高句麗><巨璉>, 爲驃騎大將軍, 遣使上表, 請內屬, 許之. 秋七月, 遣內法佐平<沙若思>, 如<南齊>朝貢, <若思>至西海中, 遇<高句麗>兵, 不進.
6년 봄 2월, 남제 태조 소도성이 고구려왕 거련을 표기 대장군으로 책봉하였다는 말을 왕이 듣고, 남제에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리고 속국이 되기를 요청하니 태조가 승락하였다.
가을 7월, 내법 좌평 사 약사를 남제에 보내 조공하려 했으나, 약사가 서해에서 고구려 군사와 조우하여 가지 못하였다.
○七年, 夏五月, 遣使聘<新羅>.
7년 여름 5월, 신라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였다.
○八年, 春二月, 拜< 加{芍加}> 爲衛士佐平. 三月, 遣使<南齊>朝貢. 秋七月, 重修宮室, 築<牛頭城>. 冬十月, 大閱於宮南.
趙炳舜. 『三國史節要』. 『東國史略』.
8년 봄 2월, 백가를 위사 좌평으로 임명하였다.
3월, 남제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 궁실을 중수하고 우두성을 쌓았다.
겨울 10월, 대궐 남쪽에서 대대적으로 군대를 사열하였다.
○十年, <魏>遣兵來伐, 爲我所敗.
10년, 위 나라가 우리를 침공하였으나 우리 군사가 그들을 물리쳤다.
○十一年, 秋, 大有年. 國南海村人獻合穎禾. 冬十月, 王設壇祭天地. 十一月, 宴群臣於南堂.
11년 가을, 크게 풍년이 들었다. 남해의 어촌 사람이 두 이삭이 하나로 합쳐진 벼를 바쳤다.
겨울 10월, 왕이 제단을 만들어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냈다.
11월, 왕이 남당에서 군신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十二年, 秋七月, 徵北部人年十五歲已上, 築<沙峴>·<耳山>二城. 九月, 王田於國西<泗 >原. 拜<燕突>爲達率. 冬十一月, 無氷.
12년 가을 7월, 나이가 15세 이상인 북부 사람들을 징발하여 사현과 이산 두 성을 쌓았다.
9월, 왕이 나라 서쪽 사비 벌판에서 사냥하였고 연돌을 달솔로 임명하였다.
겨울 11월, 물이 얼지 않았다.
○十三年, 夏六月, <熊川>水漲, 漂沒王都二百餘家. 秋七月, 民饑, 亡入<新羅>者, 六百餘家.
13년 여름 6월, 웅천물이 불어서 서울에서 2백여 호가 떠내려 가고 물에 잠겼다.
가을 7월, 백성들이 굶주려 신라로 도망간 자가 6백여 호나 되었다.
○十四年, 春三月, 雪. 夏四月, 大風拔木. 冬十月, 王獵<牛鳴谷>, 親射鹿.
14년 봄 3월, 눈이 내렸다. 여름 4월, 큰 바람이 불어와 나무가 뽑혔다.
겨울 10월, 왕이 우명곡에서 사냥하면서 직접 사슴을 쏘아 맞혔다.
○十五年, 春三月, 王遣使<新羅>請婚, <羅>王以伊 <比智>女, 歸之.
15년 봄 3월, 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혼인을 요청하니 신라왕이 이찬 비지의 딸을 시집보냈다.
○十六年, 秋七月, <高句麗>與<新羅>戰<薩水>之原, <新羅>不克, 退保<犬牙城>. <高句麗>圍之, 王遣兵三千救, 解圍.
16년 가을 7월, 고구려와 신라가 살수 벌판에서 싸웠는데 신라가 이기지 못하고 견아성으로 퇴각하여 방어하고 있다가 고구려 군사에게 포위되었다. 왕이 군사 3천 명을 보내 구원하자 포위가 풀렸다.
○十七年, 夏五月甲戌朔, 日有食之. 秋八月, <高句麗>來圍<雉壤城>. 王遣使<新羅>, 請救, <羅>王命將軍<德智>, 帥兵救之, <麗>兵退歸.
17년 여름 5월 초하루 갑술일에 일식이 있었다.
가을 8월, 고구려가 치양성을 포위하자 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 왕이 장군 덕지에게 명령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하니 고구려 군사가 물러갔다.
○十九年, 夏五月, 兵官佐平<眞老>卒, 拜達率<燕突>爲兵官佐平. 夏六月, 大雨, 漂毁民屋.
19년 여름 5월, 병관 좌평 진로가 사망하자 달솔 연돌을 병관 좌평으로 임명하였다.
여름 6월, 큰 비가 내려 백성들의 가옥이 유실되고 무너졌다.
○二十年, 設<熊津橋>. 秋七月, 築<沙井城>, 以 率<毗 >鎭之. 八月, 王以<耽羅>不修貢賦, 親征, 至<武珍州>. <耽羅>聞之, 遣使乞罪, 乃止.[<耽羅>, 卽<耽牟羅>.]
20년, 웅진교를 가설하였다.
가을 7월, 사정성을 쌓고 한솔 비타로 하여금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8월, 왕이 탐라에서 공납과 조세를 바치지 않는다 하여 그를 직접 치려고 무진주에 이르니 탐라에서 이 소문을 듣고 사신을 보내 사죄하므로 중지하였다.[탐라는 곧 탐모라이다.]
○二十一年, 夏大旱, 民饑相食, 盜賊多起. 臣寮請發倉賑救, 王不聽. <漢山>人亡入<高句麗>者二千. 冬十月, 大疫.
21년, 여름에 큰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려서 서로 잡아 먹고, 도적이 많이 생기자 신하들이 창고를 풀어 구제하자고 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한산 사람들 중에 고구려로 도망간 자가 2천 명이나 되었다.
겨울 10월,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二十二年, 春, 起<臨流閣>於宮東, 高五丈, 又穿池養奇禽. 諫臣抗疏不報, 恐有復諫者, 閉宮門.
○論曰: 良藥苦口, 利於病; 忠言逆耳, 利於行. 是以, 古之明君, 虛己問政, 和顔受諫, 猶恐人之不言, 懸敢諫之鼓, 立誹謗之木而不已. 今<牟大王>諫書上而不省, 復閉門以拒之. 『莊子』曰: "見過不更, 聞諫愈甚, 謂之 ." 其<牟大王>之謂乎.
夏四月, 田於<牛頭城>, 遇雨雹, 乃止. 五月, 旱. 王與左右宴<臨流閣>, 終夜極歡.
22년 봄, 대궐 동쪽에 임류각을 세웠는데 높이가 다섯 길이었다. 또한 연못을 파고 기이한 짐승을 길렀다. 간관들이 이에 항의하여 글을 올렸으나 듣지 않고 다시 간하는 자가 있을까 염려하여 대궐 문을 닫아 버렸다.
저자의 견해 : 좋은 약은 입에는 쓰지만 병에는 이롭고, 바른 말은 귀에는 거슬리지만 행동에는 유익하다. 그러므로 옛날의 명철한 임금은 겸허한 자세로 정사를 남에게 물었으며, 얼굴빛을 부드럽게 하여 간하는 말을 수용하면서도, 오히려 사람들이 간하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간하고자 할 때 칠 수 있는 북을 달았으며, 비방하는 말을 기록하게 하는 기둥을 세우는 등, 온갖 조치를 그치지 않았다. 지금 모대왕은 간하는 글이 올라 와도 반성하지 않고, 더욱 문을 닫고 거절하였다. 장자는 "잘못을 보고도 고치지 않으며, 간하는 말을 듣고도 더욱 심해지는 것을 사납다고 한다"라고 말하였으니, 이는 모대왕과 같은 사람을 두고 이른 말일 것이다.
여름 4월, 왕이 우두성에서 사냥하다가 비와 우박을 만나서 중지하였다.
5월, 가물었다. 왕이 측근들과 함께 임류각에서 잔치를 베풀며 밤새도록 실컷 즐겼다.
○二十三年, 春正月, 王都老 , 化狐而去. 二虎鬪於南山, 捕之不得. 三月, 降霜害麥. 夏五月, 不雨至秋. 七月, 設柵於<炭峴>, 以備<新羅>. 八月, 築<加林城>, 以衛士佐平< 加{芍加}> 鎭之. 冬十月, 王獵於<泗 >東原. 十一月, 獵於<熊川>北原, 又田於<泗 >西原, 阻大雪, 宿於<馬浦村>. 初, 王以< 加{芍加}> 鎭<加林城>, <加>不欲往, 辭以疾. 王不許. 是以, 怨王. 至是, 使人刺王, 至十二月乃薨. 諡曰<東城王>.[『冊府元龜』云: <南濟><建元>二年, <百濟>王<牟都>, 遣使貢獻. 詔曰: "寶命惟新, 澤被絶域, <牟都>世蕃東表, 守職遐外, 可卽授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 又<永明>八年, <百濟>王<牟大>遣使上表. 遣謁者僕射<孫副>, 策命<大>襲亡祖父<牟都>, 爲<百濟>王, 曰: "於戱, 惟爾世襲忠勤, 誠著遐表, 海路肅澄, 要貢無替, 式循彛典, 用纂顯命, 往敬哉. 其敬膺休業, 可不愼歟. 行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百濟>王." 而『三韓古記』無<牟都>爲王之事. 又按<牟大>, <盖鹵王>之孫, <盖鹵>第二子<昆支>之子, 不言其祖<牟都>, 則『齊書』所載, 不可不疑.]
趙炳舜. 『三國史節要』. 『東國史略』.趙炳舜. 『三國史節要』. 『東國史略』.
23년 봄 정월, 서울에서 노파가 여우로 둔갑하여 사라졌다. 남산에서 호랑이 두 마리가 싸웠는데 잡지 못하였다.
3월, 서리가 내려 보리를 해쳤다.
여름 5월부터 가을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7월, 탄현에 목책을 세워 신라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8월, 가림성을 쌓고 위사 좌평 백가로 하여금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사비 동쪽 벌판에서 사냥하였다.
11월, 왕이 웅천 북쪽 벌판과 사비 서쪽 벌판에서 사냥하였는데 큰 눈에 길이 막혀 마포촌에서 묵었다.
이전에 왕이 백가로 하여금 가림성을 지키게 하였을 때 백가는 가기를 원하지 않아 병을 핑계로 퇴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왕은 이를 승락하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백가는 왕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이 때에 와서 백가가 사람을 시켜 왕을 칼로 찔러서 12월에 이르러 왕이 죽으니 시호를 동성왕이라 하였다.[[책부 원구]에는 "남제 건원 2년, 백제왕 모도가 사신을 보내 공납을 바쳤다. 이 때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우리 나라가 하늘의 명령을 새로 받드니 은택이 먼 곳까지 미치고 있다. 모도는 대대로 동방의 번신으로 있으면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자기의 직무를 다하고 있으므로,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진동대장군을 제수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또한 영명 8년, 백제왕 모대가 사신을 파견하여 표문을 올리자 알자 복야 손부를 보내 모대에게 그의 죽은 할아버지 모도의 관작을 계승케 하고 백제왕으로 삼는 책명을 내리면서 말하기를 '아아! 그대는 대대로 충성과 근면을 계승하였으니 그 정성이 멀리까지 드러나 보였다. 해로가 고요하고 조공이 변함 없기를 바라며, 법식과 법전을 따를 것이며, 천명을 돌아보며 행동을 삼가하라. 국가의 위업을 잇는 것이니 어찌 조심하지 않을 수 있으랴! 이에 행도독백제제군사진동대장군백제왕으로 임명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삼한 고기]에는 모도가 왕이 되었다는 사실이 없다. 또한 모대는 개로왕의 손자요, 개로왕의 둘째 아들인 곤지의 아들로서, 그의 할아버지가 모도라고는 하지 않았으니, [제서(齊書)]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武寧王>, 諱<斯摩{斯麻}> [或云<(+餘) 隆>.], <牟大王>之第二子也. 身長八尺, 眉目如畵, 仁慈寬厚, 民心歸附, <牟大>在位二十三年薨, 卽位. 春正月, 佐平< 加{芍加} >據<加林城>叛, 王帥兵馬, 至<牛頭城>, 命 率<解明>討之. < 加{芍加}> 出降, 王斬之, 投於<白江>.
○論日{曰} : 『春秋』曰: "人臣無將, 將而必誅." 若< 加>之元惡大 , 則天地所不容, 不卽罪之, 至是自知難免, 謀叛而後誅之, 晩也. 冬十一月, 遣達率<優永>, 帥兵五千, 襲<高句麗><水谷城>.
趙炳舜. 『百濟武寧王墓誌石銘』.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무녕왕의 이름은 사마[혹은 융이라고도 한다.]이니 모대왕의 둘째 아들이다. 신장이 8척이오, 눈매가 그림과 같았으며 인자하고 너그러워서 민심이 그를 따랐다. 모대왕이 재위 23년에 사망하자 그가 왕위에 올랐다.
봄 정월, 좌평 백가가 가림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키니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우두성에 가서 한솔 해명을 시켜 공격하게 하였다. 백가가 나와서 항복하자 왕이 백가의 목을 베어 백강에 던졌다.
저자의 견해 : [춘추]에는 "신하된 자는 장래를 도모해서는 안되나니, 이러한 마음을 가진 자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가와 같은 극악한 역적은 천하에 용납될 수 없는데 즉시 처단하지 않고, 이 때에 와서 그가 스스로 죄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반역을 일으킨 후에야 처단하였으니 늦은 것이다.
겨울 11월, 달솔 우영을 보내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수곡성을 습격하게 하였다.
○二年, 春, 民饑且疫. 冬十一月, 遣兵侵<高句麗>邊境.
2년 봄, 백성들이 굶주렸고 또 전염병이 돌았다.
겨울 11월, 군사를 보내 고구려의 변경을 침공하였다.
○三年, 秋九月, <靺鞨>燒<馬首>柵, 進攻<高木城>. 王遣兵五千, 擊退之. 冬無氷.
3년 가을 9월, 말갈이 마수책을 소각하고 고목성으로 진공하여 오자 왕이 군사 5천 명을 보내 이들을 물리쳤다.
겨울, 물이 얼지 않았다.
○六年, 春大疫. 三月至五月, 不雨, 川澤竭. 民饑, 發倉賑救. 秋七月, <靺鞨>來侵, 破<高木城>, 殺虜六百餘人.
6년, 봄에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3월부터 5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아서 시냇물과 연못물이 말랐다.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열어 구제하였다.
가을 7월, 말갈이 침입하여 고목성을 격파하고 6백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아 갔다.
○七年, 夏五月, 立二柵於<高木城>南, 又築<長嶺城>, 以備<靺鞨>. 冬十月, <高句麗>將<高老>與<靺鞨>謀, 欲攻<漢城>, 進屯於<橫岳>下, 王出師, 戰退之.
7년 여름 5월, 고목성 남쪽에 두 개의 목책을 세우고 또 장령성을 쌓아 말갈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겨울 10월, 고구려 장수 고로가 말갈과 짜고 한성을 치기 위하여 횡악 아래에 와서 진을 치니 왕이 군사를 출동시켜 그들을 물리쳤다.
○十年, 春正月, 下令: 完固 防, 驅內外游食者, 歸農.
10년 봄 정월, 명령을 내려 제방을 튼튼히 하고 서울과 지방의 무직자들에게 농사를 짓게 하였다.
○十二年, 夏四月, 遣使入<梁>朝貢. 秋九月, <高句麗>襲取<加弗城>, 移兵破<圓山城>, 殺掠甚衆. 王帥勇騎三千, 戰於<葦川>之北. <麗>人見王軍小{少} , 易之, 不設陣. 王出奇急擊, 大破之.
趙炳舜. 『三國史節要』.
12년 여름 4월, 양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9월, 고구려가 가불성을 습격하여 빼앗고, 다시 군사를 옮겨 원산성을 격파하니 죽이거나 약탈하여 간 것이 매우 많았다. 왕이 용감한 기병 3천 명을 거느리고 위천 북쪽에 나가 싸우니 고구려 병사들이 왕의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업수이 여겨 진을 치지 않았으므로 왕이 기발한 작전을 써서 기습을 하여 크게 무찔렀다.
○十六年, 春三月戊辰朔, 日有食之.
16년 봄 3월 초하루 무진일에 일식이 있었다.
○二十一年, 夏五月, 大水. 秋八月, 蝗害 . 民饑, 亡入<新羅>者, 九百戶. 冬十一月, 遣使入<梁>朝貢. 先是, 爲<高句麗>所破, 衰弱累年. 至是上表, 稱: "累破<高句麗>, 始與通好, 而更爲强國." 十二月, <高祖>詔冊王, 曰: "行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百濟>王<餘隆>, 守藩海外, 遠修貢職, 誠款到, 朕有嘉焉. 宜率舊章, 授玆榮命, 可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寧東大將軍."
21년 여름 5월, 홍수가 났다.
가을 8월, 메뚜기 떼가 곡식을 해치자 백성들이 굶주려 신라로 도망 간 자가 9백 호였다.
겨울 11월, 양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이에 앞서 고구려에게 격파당하여 나라가 쇠약하여진 지가 여러 해 되었는데 이 때 표문을 올려서 "백제가 여러 번 고구려를 격파하여 그들과 처음으로 우호 관계를 맺었고, 이제 다시 강국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12월, 양 고조가 조서를 보내 왕을 책명하여 말하기를 "행도독백제제군사진동대장군백제왕 여륭은 해외에서 번방을 지키며 멀리 와서 조공을 바치니 그의 정성이 지극하여 나는 이를 가상히 여긴다. 마땅히 옛 법에 따라 이 영광스러운 책명을 보내는 바,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영동대장군으로 봉함이 가하다"라고 하였다.
○二十二年, 秋九月, 王獵于<狐山>之原. 冬十月, 地震.
22년 가을 9월, 왕이 호산 벌판에서 사냥하였다.
겨울 10월, 지진이 났다.
○二十三年, 春二月, 王幸<漢城>, 命佐平<因友{因支}> ·達率<沙烏>等, 徵<漢>北州郡民年十五歲已上, 築<雙峴城>. 三月, 至自<漢城>. 夏五月, 王薨. 諡曰<武寧>.
趙炳舜. 『三國史節要』.
23년 봄 2월, 왕이 한성으로 가서 좌평 인우와 달솔 사오 등에게 명령하여 15세 이상 되는 한수 이북 주, 군의 백성들을 징발하여 쌍현성을 쌓게 하였다.
3월, 왕이 한성에서 돌아왔다.
여름 5월, 왕이 사망하였다. 시호를 무녕이라 하였다.
○<聖王>, 諱<明 >, <武寧王>之子也. 智識英邁, 能斷事. <武寧>薨, 繼位, 國人稱爲<聖王>. 秋八月, <高句麗>兵至<浿水>, 王命左將<志忠>, 帥步騎一萬, 出戰退之.
성왕의 이름은 명농이니 무녕왕의 아들이다. 지혜와 식견이 뛰어나고 일을 처리함에 결단성이 있었다. 무녕왕이 죽고 왕위에 오르자 백성들이 성왕이라고 불렀다.
가을 8월, 고구려 군사가 패수에 이르자 왕이 좌장 지충에게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주어 출전케 하니 그가 적을 물리쳤다.
○二年, <梁><高祖>詔冊王爲持節都督<百濟>諸軍事綏東將軍<百濟>王.
2년, 양 고조가 조서를 내려 왕을 지절도독백제제군사수동장군백제왕으로 책봉하였다.
○三年, 春二月, 與<新羅>交聘.
3년 봄 2월, 신라와 서로 예방하였다.
○四年, 冬十月, 修葺<熊津城>, 立<沙井>柵.
4년 겨울 10월, 웅진성을 수축하고 사정책을 세웠다.
○七年, 冬十月, <高句麗>王<興安>, 躬帥兵馬來侵, 拔北鄙<穴城>. 命佐平<燕謨>, 領步騎三萬, 拒戰於<五谷>之原, 不克. 死者二千餘人.
7년 겨울 10월, 고구려왕 흥안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북쪽 변경 혈성을 함락시켰다. 왕이 좌평 연모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거느리고 오곡 벌판에서 항전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했다. 사망자가 2천여 명이었다.
○十年, 秋七月甲辰, 星隕如雨.
10년 가을 7월 갑진에 별이 비오듯 떨어졌다.
○十二年, 春三月, 遣使入<梁>朝貢. 夏四月丁卯, 熒惑犯南斗.
12년 봄 3월, 양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여름 4월 정묘에 형혹성이 남두 성좌를 범하였다.
○十六年, 春, 移都於<泗 >[一名<所夫里>.], 國號<南扶餘>.
16년 봄, 도읍을 사비[소부리라고도 한다.]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고 하였다.
○十八年, 秋九月, 王命將軍<燕會>, 攻<高句麗><牛山城>, 不克.
18년 가을 9월, 왕이 장군 연회에게 명령하여 고구려의 우산성을 치게 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十九年, 王遣使入<梁>朝貢, 兼表請『毛詩』博士·涅槃等經義, 幷工匠·畵師等, 從之.
19년, 왕이 양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아울러 표문을 올려 [모시(毛詩)] 박사와 열반(涅槃) 등의 의미를 풀이한 책과 기술자, 화가 등을 보내 주기를 요청하니, 양 나라에서 이를 허락하였다.
○二十五年, 春正月己亥朔, 日有食之.
25년 봄 정월 초하루 기해일에 일식이 있었다.
○二十六年, 春正月, <高句麗>王<平成>與<濊>謀, 攻<漢>北<獨山城>. 王遣使請救於<新羅>. <羅>王命將軍<朱珍>, 領甲卒三千, 發之. <朱珍>日夜兼程, 至<獨山城>下, 與<麗>兵一戰, 大破之.
26년 봄 정월, 고구려왕 평성이 예와 공모하여 한수 이북의 독산성을 공격해왔다. 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왕이 장군 주진을 시켜 갑병 3천 명을 거느리고 떠나게 하였다. 주진은 밤낮으로 행군하여 독산성 아래에 이르렀는데, 그곳에서 고구려 군사들과 일전을 벌려 크게 이겼다.
○二十七年, 春正月庚申, 白虹貫日. 冬十月, 王不知<梁>京師有寇賊, 遣使朝貢. 使人旣至, 見城闕荒毁, 號泣於端門外, 行路見者, 莫不灑淚. <侯景>聞之, 大怒, 執囚之. 及<景>平, 方得還國.
27년 봄 정월 경신에 흰 무지개가 해를 가로 질렀다.
겨울 10월, 왕이 양 나라 서울에 반란이 일어났음을 알지 못하고 사신을 보내 조공하게 하였다. 사신이 그곳에 이르러 성과 대궐이 황폐하고 허물어진 것을 보고 모두들 대궐 단문 밖에서 소리내어 울었는데, 행인들이 이를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후경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그들을 투옥하였다. 그후 그들은 후경의 난이 평정된 뒤에야 비로소 귀국하였다.
○二十八年, 春正月, 王遣將軍<達己>, 領兵一萬, 攻取<高句麗><道薩城>. 三月, <高句麗>兵圍<金峴城>.
28년 봄 정월, 왕이 장군 달기를 보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도살성을 공격케 하여 이를 함락시켰다.
3월, 고구려 군사가 금현성을 포위했다.
○三十一年, 秋七月, <新羅>取東北鄙, 置<新州>. 冬十月, 王女歸于<新羅>.
31년 가을 7월, 신라가 동북 변경을 빼앗아 신주를 설치하였다.
겨울 10월, 왕의 딸이 신라에 시집갔다.
○三十二年, 秋七月, 王欲襲<新羅>, 親帥步騎五十, 夜至<狗川>, <新羅>伏兵發與戰, 爲亂兵所害薨. 諡曰<聖>.
三國史記卷第二十六.
32년 가을 7월, 왕이 신라를 습격하기 위하여 직접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에 이르렀는데 신라의 복병이 나타나 그들과 싸우다가 왕이 난병들에게 살해되었다. 시호를 성이라 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 26 끝
三國史記卷第二十七.
삼국사기 권 제 27
百濟本紀第五.
<威德王>·<惠王>·<法王>·<武王>.
백제본기 제 5
위덕왕, 혜왕, 법왕, 무왕.
○<威德王>, 諱<昌>, <聖王>之元子也. <聖王>在位三十二年薨, 繼位.
위덕왕은 이름이 창이니 성왕의 맏아들이다. 성왕이 재위 32년에 사망하자 그가 왕위를 이었다.
○元年, 冬十月, <高句麗>大擧兵來攻<熊川城>, 敗 而歸.
원년, 겨울 10월에 고구려가 대대적으로 군사를 동원하여 웅천성을 침공하였다가 패하고 돌아갔다.
(자료를 공유합시다. - 진갑곤 -)
○六年, 夏五月丙辰朔, 日有食之.
6년, 여름 5월 초하루 병진일에 일식이 있었다.
○八年, 秋七月, 遣兵侵掠<新羅>邊境, <羅>兵出擊敗之, 死者一千餘人.
8년, 가을 7월에 왕이 군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침공하였다가 신라군의 반격으로 패하였다. 사망자가 1천여 명이었다.
○十四年, 秋九月, 遣使入<陳>朝貢.
14년, 가을 9월에 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十七年, <高齊>後主拜王爲使持節侍中車騎大將軍<帶方郡>公<百濟>王.
17년, 고제의 후주가 왕을 사지절시중거기대장군대방군공백제왕을 배수하였다.
○十八年, <高齊>後主, 又以王爲使持節都督<東靑州>諸軍事<東靑州>刺史.
18년, 고제의 후주가 또 왕을 사지절도독동청주제군사동청주자사로 삼았다.
○十九年, 遣使入<齊>朝貢. 秋九月庚子朔, 日有食之.
19년, 제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9월 초하루 경자일에 일식이 있었다.
○二十四年, 秋七月, 遣使入<陳>朝貢. 冬十月, 侵<新羅>西邊州郡, <新羅>伊 <世宗>帥兵, 擊破之. 十一月, 遣使入<宇文周>朝貢.
24년, 가을 7월에 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0월, 신라 서부 변경의 주, 군을 공격하였는데, 신라의 이찬 세종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격파시켰다.
11월, 우문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二十五年, 遣使入<宇文周>朝貢.
25년, 우문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二十六年, 冬十月, 長星竟天, 二十日而滅. 地震.
26년, 겨울 10월, 혜성이 하늘에 뻗었다가 20일만에 사라졌다. 지진이 발생하였다.
○二十八年, 王遣使入<隋>朝貢, <隋><高祖>詔拜王爲上開府儀同三司<帶方>郡公.
28년, 왕이 수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더니 수 나라 고조가 왕을 상개부의동삼사대방군공으로 삼았다.
○二十九年, 春正月, 遣使入<隋>朝貢.
29년, 봄 정월, 수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三十一年, 冬十一月, 遣使入<陳>朝貢.
31년, 겨울 11월, 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三十三年, 遣使入<陳>朝貢.
33년, 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三十六年, <隋>平<陳>. 有一戰船, 漂至<耽牟羅>國, 其船得還, 經于國界, 王資送之甚厚, 幷遣使奉表, 賀平<陳>. <高祖>善之, 下詔曰: "<百濟>王旣聞平<陳>, 遠令奉表. 往復至難, 若逢風浪, 便致傷損. <百濟>王心迹淳至, 朕已委知. 相去雖遠, 事同言面, 何必數遣使, 來相體悉. 自今已後, 不須年別入貢, 朕亦不遣使往, 王宜知之."
36년, 수 나라가 진 나라를 평정하였다. 전함 한 척이 탐모라국으로 표류하여 왔다. 그 배가 돌아가게 되어 국경을 통과할 때, 왕이 물자를 풍성하게 주어 귀국케 하고, 사신을 보내 진 나라를 평정한 것을 축하하는 표문을 올렸다. 수 나라 고조가 이를 훌륭히 여겨 조서를 내려 말했다.
"백제왕이 진 나라를 평정하였다는 말을 듣자 멀리서 사신을 보내 표문을 바쳤다. 왕래가 지극히 어려운 지역이니, 만약 풍랑이라도 만나면 사람이 상하고 재물을 잃게 될 것이다. 백제왕의 마음이 순박하고 지극한 것은 내가 이미 깊이 알고 있다. 거리는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얼굴을 대하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 하필 자주 사신을 보내어 서로 대면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후로는 해마다 조공하지 말 것이며 나도 사신을 보내지 않을 것이니 왕은 그리 알 것이다."
○三十九年, 秋七月壬申晦, 日有食之.
39년, 가을 7월 그믐 임신일에 일식이 있었다.
○四十一年, 冬十一月癸未, 星 于角·亢.
41년, 겨울 11월 계미에 혜성이 각성과 항성 성좌에 나타났다.
○四十五年, 秋九月, 王使長史<王辯那>, 入<隋>朝獻. 王聞<隋>興<遼東>之役, 遣使奉表, 請爲軍{鄕} 道. 帝下詔曰: "往歲, <高句麗>不供職貢, 無人臣禮, 故命將討之. <高元> 君臣, 恐懼畏服, 歸罪, 朕已赦之, 不可致伐." 厚我使者而還之. <高句麗>頗知其事, 以兵侵掠國境. 冬十二月, 王薨. 群臣議諡曰<威德>.
趙炳舜. 『三國史節要』.고구려 영양왕을 말함.
45년, 가을 9월, 왕이 장사 왕변나를 시켜 수 나라에 가서 조공하게 하였다. 왕은 수 나라가 요동 전쟁을 일으킨다는 소문을 듣고 사신을 파견하여 표문을 바치고, 군사의 향도가 되기를 요청하였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왕년에 고구려가 조공을 바치지 않고 신하로서의 예절을 갖추지 않았기에 장군들로 하여금 그들을 토벌케 하였는데, 고원의 신하들이 겁을 내며 잘못을 시인하기에 내가 이미 용서하였으니 그들을 칠 수는 없다"고 말하고, 우리 사신을 후대하여 돌려보냈다. 고구려가 그 일을 모두 알고 군사를 보내 우리 국경을 침략하였다.
겨울 12월, 왕이 사망하였다. 군신들이 의논하여 시호를 위덕이라 하였다.
○<惠王>, 諱<季>, <明王>第二子. <昌王>薨, 卽位.
혜왕의 이름은 계이니 명왕의 둘째 아들이다. 창왕이 사망하자 그가 왕위에 올랐다.
○二年, 王薨. 諡曰<惠>.
2년, 왕이 사망하였다. 시호를 혜라고 하였다.
○<法王>, 諱<宣>[或云<孝順>.], <惠王>之長子. <惠王>薨, 子<宣>, 繼位.[『隋書』以<宣>爲<昌王>之子.]
冬十二月, 下令: 禁殺生, 收民家所養鷹 , 放之, 漁獵之具焚之.
법왕의 이름은 선[혹은 효순이라고도 한다.]이니 혜왕의 맏아들이다. 혜왕이 사망하자 아들 선이 왕위를 이었다.[[수서]에는 선을 창왕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겨울 12월, 살생을 금하고, 민가에서 기르는 매와 새매를 놓아 주고, 고기잡고 사냥하는 도구들을 태워버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二年, 春正月, 創<王興寺>, 度僧三十人. 大旱, 王幸<漆岳寺>, 析雨{祈雨} . 夏五月, 薨. 上諡曰<法>.
趙炳舜. 『三國史節要』.
2년, 봄 정월에 왕흥사를 창립하고 중 30명에게 도첩을 주었다.
큰 가뭄이 들어 왕이 칠악사에 가서 기우제를 지냈다.
여름 5월, 왕이 사망하였다. 시호를 법이라 하였다.
○<武王>, 諱<璋>, <法王>之子. 風儀英偉, 志氣豪傑. <法王>卽位, 翌年薨, 子嗣位.
무왕의 이름은 장이니 법왕의 아들이다. 풍채가 훌륭하고, 뜻이 호방하고 기상이 걸출하였다. 법왕이 왕위에 오른 이듬해에 사망하자 그의 아들이 왕위를 이었다.
○三年, 秋八月, 王出兵, 圍<新羅><阿莫山城>[一名<母山城>]. <羅>王<眞平>遣精騎數千, 拒戰之, 我兵失利而還. <新羅>築<小 >·<畏石>·<泉山>·<甕岑>四城, 侵逼我疆境. 王怒, 令佐平<解 >, 帥步騎四萬, 進攻其四城. <新羅>將軍<乾品>·<武殷>, 帥衆拒戰. <解 >不利, 引軍退於<泉山>西大澤中, 伏兵以待之. <武殷>乘勝, 領甲卒一千, 追至大澤, 伏兵發急擊之. <武殷>墜馬, 士卒驚駭, 不知所爲. <武殷>子<貴山>大言曰: "吾嘗受敎於師, 曰: '士當軍, 無退.' 豈敢奔退, 以墜師敎乎?" 以馬授父, 卽與小將< 項>, 揮戈力鬪以死. 餘兵見此益奮, 我軍敗績, <解 >僅免, 單馬以歸.
3년 가을 8월, 왕이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의 아모산성[모산성이라고도 한다.]을 포위하였다. 신라왕 진평이 정예 기병 수천 명을 보내 항전하자 우리 군사가 불리하여 돌아왔다. 신라가 소타, 외석, 천산, 옹잠 등 네 성을 쌓고, 우리 변경에 침범하였다. 왕이 노하여 좌평 해수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 4만 명을 거느리고, 그 네 성을 공격케 하였다. 신라 장군 건품, 무은이 군사를 거느리고 마주 싸웠다. 해수가 불리해지자 군사를 이끌고 천산 서쪽의 소택지로 퇴각하여 복병을 숨겨 놓고 기다렸다. 무은이 승세를 타고 갑병 1천 명을 거느리고 소택지까지 추격하여 왔을 때, 복병이 달려들어 갑자기 공격하였다. 무은은 말에서 떨어지고 군사들은 놀라고 당황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다. 무은의 아들 귀산이 큰 소리로 말했다.
"내 일찌기 스승에게 들으니 '군사는 적을 만나서는 물러서지 말라'고 하였는데 어찌 감히 도망하여 스승의 가르침을 저버리겠느냐!"
그는 말을 아버지에게 주고 즉시 소장 추항과 함께 창을 휘두르며 힘껏 싸우다가 사망하였다. 나머지 군사들이 이를 보고 더욱 분발하여 우리 군사가 패배하고, 해수는 겨우 위기를 모면하여 단신으로 돌아왔다.
○六年, 春二月, 築<角山城>. 秋八月, <新羅>侵東鄙.
6년 봄 2월, 각산성을 쌓았다.
가을 8월, 신라가 동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七年, 春三月, 王都雨土, 晝暗. 夏四月, 大旱, 年饑.
7년 봄 3월, 서울에 흙비가 내리고 낮에 어두웠다.
여름 4월, 크게 가물어 기근이 들었다.
○八年, 春三月, 遣杵率{ 率} <燕文進>, 入<隋>朝貢. 又遣佐平<王孝隣>入貢, 兼請討<高句麗>. <煬帝>許之, 令 <高句麗>動靜. 夏五月, <高句麗>來攻<松山城>, 不下, 移襲<石頭城>, 虜男女三千而歸.
趙炳舜. 『三國史記』 職官.
8년 봄 3월, 한솔 연문진을 수 나라에 보내 조공하게 하였다. 또한 좌평 왕 효린을 보내 공물을 바치면서 고구려를 치자고 요청하였다. 양제가 이를 허락하고 고구려의 동정을 살피라고 하였다.
여름 5월, 고구려가 송산성을 공격하다가 함락시키지 못하고 다시 석두성을 습격하여 남녀 3천 명을 사로잡아 돌아갔다.
○九年, 春三月, 遣使入<隋>朝貢. <隋>文林郞<裴淸>奉使<倭>國, 經我國南路.
9년 봄 3월, 수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수 나라 문림랑 배 청이 왜국에 사신으로 가면서 우리 나라 남쪽 길을 통과하였다.
○十二年, 春二月, 遣使入<隋>朝貢. <隋><煬帝>將征<高句麗>, 王使<國智牟>入請軍期. 帝悅, 厚加賞錫, 遣尙書起部郞<席律>來, 與王相謀. 秋八月, 築<赤 城>. 冬十月, 圍<新羅>< 岑城>, 殺城主<讚德>, 滅其城.
12년 봄 2월, 수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수 나라 양제가 고구려를 치려 하므로 왕이 국지모를 수 나라에 보내 행군 일정을 물으니 양제가 기뻐하며 후하게 상을 내리고 상서 기부랑 석률을 보내 왕과 상의하게 하였다.
가을 8월, 적암성을 쌓았다.
겨울 10월, 신라의 가잠성을 포위하여 성주 찬덕을 죽이고 그 성을 함락시켰다.
○十三年, <隋>六軍度<遼>, 王嚴兵於境, 聲言助<隋>, 實持兩端. 夏四月, 震宮南門. 五月, 大水, 漂沒人家.
13년, 수 나라 6군이 요수를 건너자, 왕이 국경에서 군비를 엄하게 하여 수 나라에 협조한다고 성명하였으나 실은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다.
여름 4월, 대궐 남문에 벼락이 쳤다.
5월, 홍수가 나서 인가가 유실되었다.
○十七年, 冬十月, 命達率< 奇{芍奇}> 領兵八千, 攻<新羅><母山城>. 十一月, 王都地震.
趙炳舜. 『三國史節要』.
17년 겨울 10월, 달솔 백기에게 명령하여 군사 8천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모산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11월, 서울에 지진이 났다.
○十九年, <新羅>將軍<邊品>等, 來攻< 岑城>, 復之, <奚論>戰死.
19년, 신라의 장군 변품 등이 와서 가잠성을 공격하여 성을 회복하였는데, 해론이 여기에서 전사하였다.
○二十二年, 冬十月, 遣使入<唐>, 獻果下馬.
22년 겨울 10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과하마를 바쳤다.
○二十四年, 秋, 遣兵侵<新羅><勒弩縣>.
24년 가을, 군사를 보내 신라의 늑노현을 침공하였다.
○二十五年, 春正月, 遣大臣入<唐>朝貢. <高祖>嘉其誠款, 遣使就冊爲<帶方郡>王{公} <百濟>王. 秋七月, 遣使入<唐>朝貢. 冬十月, 攻<新羅><速含>·<櫻岑>·< 岑>·<烽岑>·<旗懸>·<冗柵>等六城, 取之.
趙炳舜. 『三國史節要』.
25년 봄 정월, 당 나라에 대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고조가 그의 정성을 가상히 여겨 사신을 보내 왕을 대방군공백제왕으로 책봉하였다.
가을 7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0월, 신라의 속함, 앵잠, 기잠, 봉잠, 기현, 용책 등 6개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二十六年, 冬十一月, 遣使入<唐>朝貢.
26년 겨울 11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二十七年, 遣使入<唐>, 獻明光鎧, 因訟<高句麗>梗道路, 不許來朝上國. <高祖>遣散騎常侍<朱子奢>來, 詔諭我及<高句麗>, 平其怨. 秋八月, 遣兵, 攻<新羅><王在城{主在城}> , 執城主<東所>, 殺之. 冬十二月, 遣使入<唐>朝貢.
李丙燾. [羅紀].
27년,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명광개라는 갑옷을 바치면서 고구려가 길을 가로막고 상국을 입조하지 못하게 한다는 사실을 호소하였다. 고조는 산기상시주자사에게 조서를 우리와 고구려에 보내 서로의 원한을 잊으라고 달랬다.
가을 8월, 군사를 보내 신라의 왕재성을 공격하여 성주 동소를 죽였다.
겨울 12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二十八年, 秋七月, 王命將軍<沙乞>, 拔<新羅>西鄙二城, 虜男女三百餘口. 王欲復<新羅>侵奪地分, 大擧兵, 出屯於<熊津>. <羅>王<眞平>聞之, 遣使告急於<唐>. 王聞之, 乃止. 秋八月, 遣王姪<福信>, 入<唐>朝貢, <太宗>謂與<新羅>世 , 數相侵伐, 賜王璽書曰: "王世爲君長, 撫有東蕃, 海隅遐曠, 風濤艱阻, 忠款之至, 職貢相尋, 尙想嘉猷, 甚以欣慰. 朕祗承寵命, 君臨區宇, 思弘正道, 愛育黎元, 舟車所通, 風雨所及, 期之遂性, 咸使乂安. <新羅>王<金眞平>, 朕之蕃臣, 王之 國, 每聞遣師, 征討不息. 阻兵安忍, 殊乖所望. 朕已對王姪<福信>及<高句麗><新羅>使人, 具 通和, 咸許輯睦. 王必須忘彼前怨, 識朕本懷, 共篤 情, 卽停兵革." 王因遣使, 奉表陳謝. 雖外稱順命, 內實相仇如故.
28년 가을 7월, 왕이 장군 사걸에게 명하여 신라 서부 변경의 두 성을 함락시키고, 남녀 3백여 명을 사로잡았다. 왕이 신라에 빼앗긴 땅을 회복하기 위하여 군사를 대대적으로 동원하여 웅진에 주둔하였다. 신라왕 진평이 이를 듣고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위급한 사태를 말하였다. 왕이 이 사실을 알고 중지하였다.
가을 8월, 왕이 조카 복신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니, 태종이 백제와 신라가 대대로 원수를 맺어 서로 자주 침공한다고 하면서 왕에게 조서를 보내 말했다.
"왕은 대대로 군주가 되어 동쪽 변방을 진무하고 있다. 먼 바다 한 끝에서 바람과 파도가 험한 것을 무릅쓰고 충성이 지극하여 조공이 계속되니, 왕의 아름다운 생각을 높이 평가하며 매우 기쁘게 여긴다. 내가 삼가 영광스러운 대명을 이어받아 천하를 통치하게 되었으니, 정도를 넓히고 백성들을 아껴 양육하며, 배와 수레가 통하는 곳과 바람과 비가 미치는 곳마다 모두 천성에 따르며 모두가 편안하게 살기를 원하고 있다. 신라왕 김 진평은 나의 번신이요, 왕의 이웃이지만 매번 군사를 보내 토벌하는 것이 그치지 않는다고 들었다. 군대의 힘을 믿고 잔인한 행위를 마음대로 하는 것은 나의 기대에 매우 어긋난다. 내가 이미 왕의 조카 복신과 고구려, 신라 사신들에게 서로 화친하도록 타이르고 모두 화목하게 지내게 하였다. 왕은 반드시 전날의 원한을 잊고 나의 본뜻을 헤아려서 모두 이웃의 정을 두터이 하여 즉시 전쟁을 중지하라."
왕이 곧 사신을 보내 표문을 바쳐 사죄하였다. 비록 겉으로는 명령에 순종하겠다고 하였으나 실제적으로는 이전처럼 서로 원수지간이었다.
○二十九年, 春二月, 遣兵攻<新羅>< 峰城{ 岑城}> , 不克而還.
李丙燾. [羅紀].
趙炳舜. [三國史節要].
29년 봄 2월, 군사를 보내 신라의 가잠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三十年, 秋九月, 遣使入<唐>朝貢.
30년 가을 9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三十一年, 春二月, 重修<泗 >之宮. 王幸<熊津城>. 夏旱, 停<泗 >之役. 秋七月, 王至自<熊津>.
31년 봄 2월, 사비의 궁전을 중수하였다. 왕이 웅진성으로 갔다.
여름에 가뭄이 들어 사비의 궁전을 중수하는 일을 중지하였다.
가을 7월, 왕이 웅진에서 돌아왔다.
○三十二年, 秋九月, 遣使入<唐>朝貢.
32년 가을 9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三十三年, 春正月, 封元子<義慈>爲太子. 二月, 改築<馬川城>. 秋七月, 發兵伐<新羅>, 不利. 王田于<生草>之原. 冬十二月, 遣使入<唐>朝貢.
33년 봄 정월, 맏아들 의자를 태자로 책봉하였다.
2월, 마천성을 고쳐 쌓았다.
가을 7월,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불리하였다.
왕이 생초 벌판에서 사냥하였다.
겨울 12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三十四年, 秋八月, 遣將攻<新羅><西谷城>, 十三日拔之.
34년 가을 8월, 장수를 보내 신라의 서곡성을 공격하여 13일 만에 함락시켰다.
○三十五年, 春二月, <王興寺>成. 其寺臨水, 彩飾壯麗. 王每乘舟, 入寺行香. 三月, 穿池於宮南, 引水二十餘里, 四岸植以楊柳, 水中築島嶼, 擬<方丈仙山>.
35년 봄 2월, 왕흥사가 준공되었다. 그 절은 강가에 있었으며 채색장식이 웅장하고 화려하였다. 왕이 매번 배를 타고 절에 들어가서 향을 피웠다.
3월, 대궐 남쪽에 못을 파서 20여 리 밖에서 물을 끌어 들이고, 사면 언덕에 버들을 심고 물 가운데 방장선산을 흉내낸 섬을 쌓았다.
○三十七年, 春二月, 遣使入<唐>朝貢. 三月, 王率左右臣寮, 遊燕於<泗 河>北浦. 兩岸奇巖怪石錯立, 間以奇花異草, 如 圖. 王飮酒極歡, 鼓琴自歌, 從者屢舞. 時人謂其地爲<大王浦>. 夏五月, 王命將軍<于召>, 帥甲士五百, 往襲<新羅><獨山城>. <于召>至<玉門谷>, 日暮, 解鞍休士. <新羅>將軍<閼川>將兵, 掩至 擊之. <于召>登大石上, 彎弓拒戰, 矢盡, 爲所擒. 六月, 旱. 秋八月, 燕群臣於<望海樓>.
37년 봄 2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3월, 왕이 측근 신하들을 데리고 사비하 북쪽 포구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포구의 양쪽 언덕에 기암괴석이 서있고, 그 사이에 진기한 화초가 있어 마치 그림 같았다. 왕이 술을 마시고 몹시 즐거워 하여, 거문고를 켜면서 노래를 부르자 수행한 자들도 여러번 춤을 추었다. 당시 사람들이 그곳을 대왕포라고 불렀다.
여름 5월, 왕이 장군 우소에게 명령하여 갑병 5백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독산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우소가 옥문곡에 이르렀을 때 해가 저물기 시작하였다. 그는 안장을 풀고 군사를 쉬게 하였다. 그 때 신라 장군 알천이 군사를 거느리고 몰래 기습하여 왔다. 우소가 큰 돌 위에 올라서서 활을 쏘면서 대항하여 싸우다가 화살이 모두 떨어지자 그들에게 사로잡혔다.
6월, 가뭄이 들었다.
가을 8월, 왕이 망해루에서 군신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三十八年, 春二月, 王都地震. 三月, 又震. 冬十二月, 遣使入<唐>, 獻鐵甲雕斧. <太宗>優勞之, 賜錦 {袍} 幷彩帛三千段.
趙炳舜. 『三國史節要』.
38년 봄 2월, 서울에서 지진이 났다.
3월, 다시 지진이 났다.
겨울 12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철갑옷과 조각한 도끼를 바치니, 태종이 사신을 우대하여 위로하고 비단 도포와 채색 비단 3천 단을 보냈다.
○三十九年, 春三月, 王與嬪御泛舟大池.
39년 봄 3월, 왕이 궁녀들을 데리고 큰 못에 배를 띄우고 놀았다.
○四十年, 冬十月, 又遣使於<唐>, 獻金甲雕斧.
40년 겨울 10월, 다시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철갑옷과 조각한 도끼를 바쳤다.
○四十一年, 春正月, 星 于西北. 二月, 遣子弟於<唐>, 請入<國學>.
41년 봄 정월, 혜성이 서북쪽에 나타났다.
2월, 자제들을 당 나라에 보내 국학에 입학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四十二年, 春三月, 王薨. 諡曰<武>. 使者入<唐>, 素服奉表曰: "君外臣<扶餘璋>卒." 帝擧哀<玄武門>, 詔曰: "懷遠之道, 莫先於寵命, 飾終之義, 無隔於遐方. 故柱國<帶方郡>王{公} <百濟>王<扶餘璋>, 棧山 {航} 海, 遠 正朔, 獻琛奉牘, 克固始終, 奄致薨殞, 追深 悼. 宜加常數, 式表哀榮, 贈光祿大夫." 賻賜甚厚.
三國史記卷第二十七.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42년 봄 3월, 왕이 사망하였다. 시호를 무라고 하였다. 사신이 당 나라에 가서 소복을 입고 표문을 바쳐 "임금의 번신 부여 장이 죽었습니다"라고 알렸다. 황제는 현무문에서 추도 의식을 거행하고 조서를 보내 이르기를 "먼 나라를 사랑하는 방도는 총명(寵命) 보다 나은 것이 없고, 죽은 자를 표창하는 의리는 먼 곳이라하여 막혀 있는 것이 아니다. 고(故) 주국대방군왕백제왕부여장은 산을 넘고 바다 건너 멀리까지 와서 정삭을 받고, 공물을 바치고 표문을 올리기를 한결같이 하다가 갑자기 죽음을 당하였으니 그를 깊이 추도한다. 마땅히 상례 이상으로 영전을 표하여 광록대부로 추증하노라"라 하고, 부의를 매우 후하게 보냈다.
삼국사기 권 제 27 끝
三國史記卷第二十八.
삼국사기 권 제 28
百濟本紀第六.
<義慈王>.
백제본기 제 6
의자왕
○<義慈王>, <武王>之元子, 雄勇膽決. <武王>在位三十三年, 立爲太子. 事親以孝, 與兄弟以友, 時號<海東曾子>. <武王>薨, 太子嗣位. <太宗>遣祠部郞中<鄭文表>, 冊命爲柱國<帶方郡>王{公} <百濟>王. 秋八月, 遣使入<唐>, 表謝, 兼獻方物.
趙炳舜. 『三國史節要』.
의자왕은 무왕의 맏아들로서 용감하고 대담하며 결단성이 있었다. 무왕 재위 33년에 태자가 되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서 당시에 해동증자라고 불렸다. 무왕이 사망하자 태자가 왕위를 이었다. 당 나라 태종이 사부 랑중 정 문표를 보내 왕을 주국대방국왕백제왕으로 책봉하였다.
가을 8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사의를 표하고 아울러 토산물을 바쳤다.
○二年, 春正月, 遣使入<唐>朝貢. 二月, 王巡撫州郡. 慮囚, 除死罪皆原之. 秋七月, 王親帥兵, 侵<新羅>, 下< >等四十餘城. 八月, 遣將軍<允忠>, 領兵一萬, 攻<新羅><大耶城>. 城主<品釋>與妻子出降. <允忠>盡殺之, 斬其首, 傳之王都, 生獲男女一千餘人, 分居國西州縣, 留兵守其城. 王賞<允忠>功, 馬二十匹·穀一千石.
2년 봄 정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2월, 왕이 주, 군을 순행하면서 백성들을 위무하고 죄수들을 재심사하여 사형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용서하여 주었다.
가을 7월, 왕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침공하여 미후 등 40여 성을 함락시켰다.
8월, 장군 윤충을 보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하였다. 성주 품석이 처자를 데리고 나와 항복하자 윤충이 그들을 모두 죽이고 그의 목을 베어 서울에 보내고 남녀 1천여 명을 사로잡아 서쪽 지방의 주, 현에 나누어 살게 하고 군사를 남겨 그 성을 지키게 하였다. 왕이 윤충의 공로를 표창하여 말 20필과 곡식 1천 석을 주었다.
○三年, 春正月, 遣使入<唐>朝貢. 冬十一月, 王與<高句麗>和親, 謀欲取<新羅>< 項城>, 以塞入朝之路, 遂發兵攻之. <羅>王<德曼>遣使, 請救於<唐>, 王聞之罷兵.
3년 봄 정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1월, 왕이 고구려와 화친을 맺었다. 그 목적은 신라의 당항성을 빼앗아 그들이 당 나라로 조공하러 가는 길을 막는 것이었다. 왕은 마침내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를 공격하였다. 신라왕 덕만이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니 왕이 이 사실을 듣고 군사를 철수시켰다.
○四年, 春正月, 遣使入<唐>朝貢. <太宗>遣司農丞<相里玄奬>, 告諭兩國, 王奉表陳謝. 立王子<隆>爲太子. 大赦. 秋九月, <新羅>將軍<庾信>領兵來侵, 取七城.
4년 봄 정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태종이 사농승 상리현장을 보내 두 나라를 타이르자 왕이 표문을 올려 사죄하였다.
왕의 아들 융을 태자로 삼았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가을 9월, 신라 장군 유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일곱 성을 빼앗았다.
○五年, 夏五月, 王聞<太宗>親征<高句麗>, 徵兵<新羅>. 乘其間, 襲取<新羅>七城. <新羅>遣將軍<庾信>, 來侵.
5년 여름 5월, 왕은 태종이 직접 고구려를 치면서 신라에서 군사를 징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 틈을 타서 신라를 습격하여 7개 성을 빼앗으니, 신라에서 장군 유신을 보내 침공하였다.
○七年, 冬十月, 將軍<義直>, 帥步騎三千, 進屯<新羅><茂山城>下, 分兵攻<甘勿>·<桐岑>二城, <新羅>將軍<庾信>, 親勵士卒, 決死而戰, 大破之. <義直>匹馬而還.
7년 겨울 10월, 장군 의직이 보병과 기병 3천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무산성 아래에 주둔하고, 군사를 나누어 감물과 동잠 두 성을 공격하였다. 신라 장군 유신이 직접 군사들을 격려하며 결사적으로 싸워서 아군을 크게 격파하니 의직이 단신으로 돌아왔다.
○八年, 春三月, <義直>襲取<新羅>西鄙<腰車>等一十餘城. 夏四月, 進軍於<玉門谷>, <新羅>將軍<庾信>逆之, 再戰大敗之.
8년 봄 3월, 의직이 신라 서부 변경의 요차 등 10여 성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여름 4월, 옥문곡으로 진군하니, 신라 장군 유신이 이들과 두 번 전투하여 크게 이겼다.
○九年, 秋八月, 王遣左將<殷相>, 帥精兵七千, 攻取<新羅><石吐>等七城, <新羅>將<庾信>·<陳春>·<天存>·<竹旨>等, 逆擊之, 不利, 收散卒, 屯於<道薩城>下, 再戰, 我軍敗北. 冬十一月, 雷. 無氷.
9년 가을 8월, 왕이 좌장 은상을 보내 정예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석토 등 일곱 성을 공격하여 빼앗게 하였다. 신라 장수 유신, 진춘, 천존, 죽지 등이 이를 맞아 공격하였으나 불리해지자, 흩어진 군사들을 모아 도살성 아래 진을 치고 재차 싸웠는데 우리 군사가 패배하였다.
겨울 11월, 우레가 쳤고 물이 얼지 않았다.
○十一年, 遣使入<唐>朝貢. 使還, <高宗>降璽書, 諭王曰: "海東三國, 開基日久, 列疆界, 地實犬牙. 近代已來, 遂構嫌隙, 戰爭交起, 略無寧歲. 遂令<三韓>之氓, 命懸刀 {俎} , 築戈肆憤, 朝夕相仍. 朕代天理物, 載深矜憫. 去歲, <高句麗>·<新羅>等使, 來入朝, 朕命釋玆 怨, 更敦款睦. <新羅>使<金法敏>奏言: '<高句麗>·<百濟>, 脣齒相依, 竟擧干戈, 侵逼交至, 大城重鎭, 爲<百濟>所倂, 疆宇日蹙, 威力 謝, 乞詔<百濟>, 令歸所侵之城. 若不奉詔, 卽自興兵打取, 但得古地, 卽請交和.' 朕以其言旣順, 不可不許. 昔, <齊><桓>列士{土} 諸侯, 尙存亡國, 朕萬國之主, 豈可不恤危藩! 王所兼<新羅>之城, 宜還其本國, <新羅>所獲<百濟> 虜, 亦遣還王. 然後, 解患釋紛, 韜戈偃革, 百姓獲息肩之願, 三蕃無戰爭之勞. 比夫流血邊亭, 積屍疆 , 耕織 廢, 士女無聊, 豈可同年而語哉? 王若不從進止, 朕已依<法敏>所請, 任其與王決戰, 亦令約束<高句麗>, 不許遠相救恤. <高句麗>若不承命, 卽令<契丹>諸藩, 度<遼>, 深入抄掠. 王可深思朕言, 自求多福, 審圖良策, 無貽後悔."
趙炳舜. 『三國史節要』.今西龍.
11년,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사신이 돌아올 때 고종이 조서를 보내 왕에게 타일러 말했다.
"해동의 세 나라는 개국의 역사가 오래되고 국토가 나란히 붙어 있으니, 국경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상태이다. 근대 이래로 마침내 사이가 벌어져 전쟁이 계속 일어나니 거의 편안한 해가 없었다. 이에 따라 삼한 백성들은 목숨을 도마 위에 올려놓은 상황이 되었으며, 무기를 쌓아 놓고 분노하는 일이 아침 저녁으로 이어졌다. 나는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입장이니 이를 매우 가엾게 여기는 바이다. 지난해에 고구려와 신라의 사신들이 함께 와서 입조하였을 때, 나는 이와 같은 원한을 풀고 다시 화목하게 지내기를 명하였었다. 신라 사신 김 법민이 말하기를 '고구려와 백제는 긴밀히 의지하면서 군사를 일으켜 번갈아 우리를 침략하니, 우리의 큰 성과 중요한 진은 모두 백제에게 빼앗겨서, 국토는 날로 줄어들고 나라의 위엄조차 사라져 갑니다. 원컨대 백제에 조칙을 내려 빼앗아 간 성을 돌려 주게 하소서. 만일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다면 즉시 우리 스스로 군사를 동원하여 잃었던 옛 땅만을 되찾고 즉시 화친을 맺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의 말이 순리에 맞았기 때문에 나는 승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옛날 제 환공은 제후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멸망하는 나라를 구원하였는데, 하물며 나는 만국의 군주로서 어찌 위급하게 된 번방을 구제하지 않으랴! 왕은 빼앗은 신라의 성을 모두 돌려 주어야 하며, 신라도 사로잡은 백제 포로들을 왕에게 돌려 보내야 한다. 그렇게 한 후에야 근심이 풀리고 분규가 해결될 것이니, 전쟁이 끝나면 백성들은 쉬고 싶어하는 소망을 이룰 것이며, 세 번방은 전쟁의 괴로움을 잊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변경에서 피흘리고 국토 전역에 시체가 쌓이며, 농사와 길쌈을 모두 폐한 채, 남녀가 슬퍼하는 것과 어찌 같다고 말할 수 있으랴? 왕이 만일 이 분부를 따르지 않는다면 나는 법민의 요청대로 신라가 왕과 결전하도록 할 것이며, 또한 고구려로 하여금 신라와 약속하여 백제를 구원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고구려가 만일 명령을 거역한다면 즉시 거란과 모든 번방 국가들에게 명령하여 요수를 건너가서 공격케 할 것이니, 왕은 나의 말을 깊이 성찰하여 스스로 많은 복을 얻도록 할 것이며, 좋은 방책을 찾아 후회함이 없도록 하라."
○十二年, 春正月, 遣使入<唐>朝貢.
12년 봄 정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十三年, 春, 大旱. 民饑. 秋八月, 王與<倭>國通好.
13년 봄, 큰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렸다.
가을 8월, 왕이 왜국과 우호 관계를 맺었다.
○十五年, 春二月, 修太子宮, 極侈麗. 立<望海亭>於王宮南. 夏五月, 馬入<北岳><烏含寺>, 鳴 佛宇數日死. 秋七月, 重修<馬川城>. 八月, 王與<高句麗>·<靺鞨>, 攻破<新羅>三十餘城. <新羅>王<金春秋>, 遣使朝<唐>, 表稱: "<百濟>與<高句麗>·<靺鞨>, 侵我北界, 沒三十餘城."
15년 봄 2월, 태자의 궁을 수리하는데 대단히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하였으며, 왕궁 남쪽에 망해정을 건축하였다.
여름 5월, 붉은 말이 북악 오함사에 들어와서 불당을 돌면서 울다가 며칠 후에 죽었다.
가을 7월, 마천성을 중수하였다.
8월, 왕이 고구려, 말갈과 함께 신라의 30여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신라왕 김 춘추가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려 "백제, 고구려, 말갈 등이 우리의 북쪽 국경에 침입하여 30여 성을 함락시켰다"고 하였다.
○十六年, 春三月, 王與宮人, 淫荒耽樂, 飮酒不止. 佐平<成忠>[或云<淨忠>.]極諫, 王怒, 囚之獄中, 由是, 無敢言者. <成忠> 死{不食} . 臨終上書曰: "忠臣死不忘君, 願一言而死. 臣常觀時察變, 必有兵革之事. 凡用兵, 必審擇其地, 處上流以延敵, 然後可以保全. 若異國兵來, 陸路不使過<沈峴(+一云<炭峴>) >, 水軍不使入<伎伐浦(+一云<白江>) >之岸, 擧其險隘以禦之, 然後可也." 王不省焉.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16년 봄 3월, 왕이 궁녀들을 데리고 음란과 향락에 빠져서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좌평 성충[혹은 정충이라고도 한다.]이 적극 말렸더니, 왕이 노하여 그를 옥에 가두었다. 이로 말미암아 감히 간하려는 자가 없었다. 성충은 옥에서 굶주려 죽었다. 그가 죽을 때 왕에게 글을 올려 말했다.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 것이니 한 마디 말만 하고 죽겠습니다. 제가 항상 형세의 변화를 관찰하였는 바, 전쟁은 틀림없이 일어날 것입니다. 무릇 전쟁에는 반드시 지형을 잘 선택해야 하는데 상류에서 적을 맞아야만 군사를 보전할 수 있습니다. 만일 다른 나라 군사가 오거든 육로로는 침현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의 언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십시오. 험준한 곳에 의거하여 방어하여야만 방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왕은 이를 명심하지 않았다.
○十七年, 春正月, 拜王庶子四十一人爲佐平, 各賜食邑. 夏四月, 大早{旱} , 赤地.
趙炳舜. 『三國史節要』.
17년 봄 정월, 왕의 서자 41 명을 좌평으로 임명하고, 그들에게 각각 식읍을 주었다.
여름 4월, 큰 가뭄이 들어 논밭이 붉은 땅이 되었다.
○十九年, 春二月, 衆狐入宮中, 一白狐坐上佐平書案. 夏四月, 太子宮, 雌 與小{黃} 雀交. 遣將侵攻<新羅><獨山>·<桐岑>二城. 五月, 王都西南<泗 河>, 大魚出死, 長三丈. 秋八月, 有女屍浮<生草津>, 長十八尺. 九月, 宮中槐樹鳴, 如人哭聲. 夜, 鬼哭於宮南路.
趙炳舜. 『三國史節要』.
19년 봄 2월, 여우떼가 궁중에 들어 왔는데 흰 여우 한 마리가 상좌평의 책상에 올라 앉았다.
여름 4월, 태자궁에서 암탉이 참새와 교미하였다. 장수를 보내 신라의 독산, 동잠 두 성을 침공하였다.
5월, 서울 서남쪽 사비하에서 큰 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길이가 세 발이었다.
가을 8월, 여자 시체가 생초진에 떠내려 왔는데 길이가 18척이었다.
9월, 대궐 뜰에 있는 홰나무가 사람이 곡하는 소리처럼 울었으며 밤에는 대궐 남쪽 행길에서 귀신의 곡소리가 들렸다.
○二十年, 春二月, 王都井水血色. 西海濱, 小{群} 魚出死, 百姓食之, 不能盡. <泗 河>水, 赤如血色. 夏四月, 蝦 數萬, 集於樹上. 王都市人, 無故驚走, 如有捕提{逐} 者, 而死百餘人, 立{亡} 失財物, 不可數. 五月, 風雨暴至, 震<天王>·<道讓>二寺塔, 又震<白石寺>講堂. 玄雲如龍, 東西相鬪於空中. 六{五} 月, <王興寺>衆僧皆見: 若有船楫, 隨大水, 入寺門. 有一犬狀如野鹿, 自西至<泗 河>岸, 向王宮吠之, 俄而不知所去. 王都群犬集於路上, 或吠或哭, 移時卽散. 有一鬼入宮中, 大呼: "<百濟>亡, <百濟>亡!" 卽入地, 王怪之, 使人掘地, 深三尺許, 有一龜. 其背有文曰: "<百濟>同月輪, <新羅>如月新." 王問之, 巫者曰: "同月輪者滿也, 滿則虧. 如月新者未滿也, 未滿則漸盈." 王怒殺之. 或曰: "同月輪者盛也, 如月新者微也. 意者國家盛, 而<新羅>寢{ } 微者乎." 王喜. <高宗>詔: 左衛大將軍<蘇定方>, 爲<神丘>道行軍大摠管, 率左衛將軍<劉伯英>·右武衛將軍<馮士貴>·左驍衛將軍<龐孝公>, 統兵十三萬, 以來征, 兼以<新羅>王<金春秋>, 爲< 夷>道行軍摠管, 將其國兵, 與之合勢. <蘇定方>引軍, 自<城山>濟海, 至國西<德物島>, <新羅>王遣將軍<金庾信>, 領精兵五萬以赴之. 王聞之, 會群臣, 問戰守之宜. 佐平<義直>進曰: "<唐>兵遠涉溟海, 不習水者, 在船必困. 當其初下陸, 士氣未平, 急擊之, 可以得志. <新羅>人恃大國之援, 故有輕我之心, 若見<唐>人失利, 則必疑懼, 而不敢銳進. 故知先與<唐>人決戰, 可也." 達率<常永>等曰: "不然. <唐>兵遠來, 意欲速戰, 其鋒不可當也. <新羅>前屢見敗於我軍, 今望我兵勢, 不得不恐. 今日之計, 宜塞<唐>人之路, 以待其師老. 先使偏師, 擊<羅>軍, 折其銳氣, 然後, 伺其便而合戰, 則可得以全軍, 而保國矣." 王猶豫, 不知所從. 時, 佐平<興首>得罪, 流竄<古馬彌知>之縣, 遣人問之曰: "事急矣, 如之何而可乎?" <興首>曰: "<唐>兵旣衆, 師律嚴明, 與<新羅>共謀 角. 若對陣於平原廣野, 勝敗未可知也. <白江>[或云<伎伐浦>.]·<炭峴>[或云<沈峴>.], 我國之要路也. 一夫單槍, 萬人莫當, 宜簡勇士, 往守之. 使<唐>兵不得入<白江>, <羅>人未得過<炭峴>. 大王重閉固守, 待其資粮盡, 士卒疲, 然後奮擊之, 破之必矣." 於時, 大臣等不信曰: "<興首>久在 之中, 怨君而不愛國, 其言不可用也. 莫若使<唐>兵入<白江>, 沿流而不得方舟, <羅>軍升<炭峴>, 由徑而不得幷馬. 當此之時, 縱兵擊之, 譬如殺在籠之 ·離網之魚也." 王然之. 又聞<唐><羅>兵已過<白江>·<炭峴>, 遣將軍< 伯>, 帥死士五千, 出<黃山>, 與<羅>兵戰, 四合皆勝之, 兵寡力屈, 竟敗, < 伯>死之. 於是, 合兵禦<熊津>口, 瀕江屯兵. <定方>出左涯, 乘山而陣. 與之戰, 我軍大敗. 王師乘潮, 銜尾進, 鼓而 . <定方>將步·騎, 直 眞都城{其都城} , 一舍止. 我軍悉衆拒之, 又敗, 死者萬餘人. <唐>兵乘勝薄城. 王知不免, 嘆曰: "悔不用<成忠>之言, 以至於此." 遂與太子<孝>, 走北鄙. <定方>圍其城. 王次子<泰>, 自立爲王, 率衆固守. 太子子<文思>, 謂王子<隆>曰: "王與太子出, 而叔擅爲王, 若<唐>兵解去, 我等安得全?" 遂率左右, 而出, 民皆從之, <泰>不能止. <定方>令士超堞, 立<唐>旗幟, <泰>窘迫, 開門請命. 於是, 王及太子<孝>與諸城皆降. <定方>以王及太子<孝>·王子<泰>·<隆>·<演>及大臣·將士八十八人·百姓一萬二千八百七人, 送京師. 國本有五部·三十七郡·二百城·七十六萬戶, 至是, 析置<熊津>·<馬韓>·<東明>·<金漣>·<德安>五都督府, 各統州縣. 擢渠長, 爲都督·刺史·縣令以理之. 命郞將<劉仁願>守都城, 又以左衛郞將<王文度>爲<熊津>都督, 撫其餘衆. <定方>以所 見上, 責而宥之. 王病死, 贈金紫光祿大夫衛尉卿, 許舊臣赴臨. 詔葬<孫皓>·<陳叔寶>墓側, 幷爲竪碑. 授<隆>司稼卿. <文度>濟海卒, 以<劉仁軌>代之. <武王>從子<福信>, 嘗將兵, 乃與浮屠<道琛>, 據<周留城>叛, 迎古王子<扶餘 >, 嘗質於<倭>國者, 立之爲王. 西北部皆應, 引兵圍<仁願>於都城. 詔起<劉仁軌>檢校<帶方州>刺史, 將<
王文度>之衆, 便道發<新羅>兵, 以救<仁願>. <仁軌>喜曰: "天將富貴此翁矣." 請<唐>曆及廟諱而行, 曰: "吾欲掃平東夷, 頒大<唐>正朔於海表." <仁軌>御軍嚴整, 轉鬪而前. <福信>等, 立兩柵於<熊津江>口, 以拒之. <仁軌>與<新羅>兵合擊之, 我軍退走入柵, 阻水橋狹, 墮溺及戰死者萬餘人. <福信>等乃釋都城之圍, 退保<任存城>, <新羅>人以粮盡引還. 時, <龍朔>元年三月也. 於是, <道琛>自稱領車{軍} 將軍, <福信>自稱霜岑將軍, 招集徒衆, 其勢益張. 使告<仁軌>曰: "聞大<唐>與<新羅>約誓, <百濟>無問老少, 一切殺之, 然後, 以國付<新羅>, 與其受死, 豈若戰亡! 所以聚結, 自固守耳." <仁軌>作書, 具陳禍福, 遣使諭之. <道琛>等, 恃衆驕倨, 置<仁軌>之使於外館, 報曰: "使人官小{卑} , 我是一國大將, 不合參." 不答書, 徒遣之. <仁軌>以衆小{少} , 與<仁願>合軍, 休息士卒, 上表, 請合<新羅>圖之. <羅>王<春秋>奉詔, 遣其將<金欽>, 將兵救<仁軌>等, 至<古泗>. <福信>邀擊, 敗之. <欽>自<葛嶺道>遁還, <新羅>不敢復出. 尋而<福信>殺<道琛>, 幷其還{衆} . < >不能制, 但主祭而已. <福信>等, 以<仁願>等孤城無援, 遣使慰之曰: "大使等, 何時西還? 當遣相送." 二年七月, <仁願>·<仁軌>等, 大破<福信>餘衆於<熊津>之東, 拔<支羅城>及<尹城>·<大山>·<沙井>等柵, 殺獲甚衆, 仍令分兵以鎭守之. <福信>等, 以<眞峴城>臨江高 , 當衝要, 加兵守之. <仁軌>夜督<新羅>兵, 薄城板堞, 比明而入城, 斬殺八百人, 遂通<新羅> 道. <仁願>奏請益兵, 詔發<淄>·<靑>·<萊>·<海>之兵七千人, 遣左威衛將軍<孫仁師>, 統衆浮海, 以益<仁願>之衆. 時, <福信>旣專權, 與<扶餘 >, 相猜忌. <福信>稱疾, 臥於窟室, 欲俟< >問疾, 執殺之. < >知之, 帥親信, 掩殺<福信>. 遣使<高句麗>·<倭>國, 乞師以拒<唐>兵. <孫仁師>中路迎擊破之, 遂與<仁願>之衆相合, 士氣大振. 於是, 諸將議所向, 或曰: "<加林城>水陸之衝, 合先擊之." <仁軌>曰: "兵法 '避實擊虛.'<加林> 而固, 攻則傷士, 守則曠日. <周留城>, <百濟>巢穴, 群聚焉, 若克之, 諸城自下." 於是, <仁師>·<仁願>及<羅>王<金法敏>, 帥陸軍進, <劉仁軌>及別帥<杜爽>·<扶餘隆>, 帥水軍及粮船, 自<熊津江>往<白江>, 以會陸軍, 同 <周留城>. 遇<倭>人<白江>口, 四戰皆克, 焚其舟四百 , 煙炎灼天, 海水爲丹. 王<扶餘 >脫身而走, 不知所在, 或云奔<高句麗>, 獲其寶劒. 王子<扶餘忠勝>·<忠志>等, 帥其衆, 與<倭>人 降. 獨<遲受信>據<任存城>, 未下. 初, <黑齒常之>嘯聚亡散, 旬日間, 歸附者三萬餘人. <定方>遣兵攻之. <常之>拒戰敗之, 復取二百餘城, <定方>不能克. <常之>與別部將<沙 相如>據 , 以應<福信>, 至是皆降. <仁軌>以赤心示之, 取<任存>自效, 卽給鎧·仗·粮 . <仁師>曰: "野心難信. 若受甲濟粟, 資寇便也." <仁軌>曰: "吾觀<相如>·<常之>, 忠而謀, 因機立功, 尙何疑?" 二人訖取其城, <遲受信>委妻子, 奔<高句麗>, 餘黨悉平, <仁師>等振旅還. 詔留<仁軌>, 統兵鎭守. 兵火之餘, 比屋凋殘, 屍如莽. <仁軌>始命, 骸骨, 籍戶口, 理村聚, 署官長, 通道塗, 立橋梁, 補堤堰, 復坡塘, 課農桑, 賑貧乏, 養孤老, 立<唐>社稷, 頒正朔及廟諱. 民皆悅, 各安其所. 帝以<扶餘隆>爲<熊津>都督, 歸國, 平<新羅>古憾, 招還遺人. <麟德>二年, 與<新羅>王會<熊津城>, 刑白馬以盟. <仁軌>爲盟辭, 乃作金書鐵契, 藏<新羅>廟中, 盟辭見『新羅紀』中. <仁願>等還, <隆>畏衆携散, 亦歸京師. <儀鳳>中, 以<隆>爲<熊津>都督<帶方郡>王, 遣歸國, 安輯餘衆, 仍移<安東>都護府於<新城>, 以統之. 時, <新羅>强, <隆>不敢入舊國, 寄理{治} <高句麗>死. <武后>又以其孫<敬>襲王, 而其地已爲<新羅>·<渤海>·<靺鞨>所分, 國系遂絶.
○論曰: <新羅>古事云: "天降金 , 故姓<金>氏." 其言可怪而不可信, 臣修史, 以其傳之舊, 不得刪落其辭. 然而又聞: "<新羅>人, 自以<小昊金天>氏之後, 故姓<金>氏[見<新羅>國子博士<薛因宣>撰<金庾信>碑, 及<朴居勿>撰<姚克一>書<三郞寺>碑文.], <高句麗>亦以<高辛>氏之後, 姓<高>氏."[見『晋書』載記.] 古史曰: "<百濟>與<高句麗>, 同出<扶餘>." 又云: "<秦>·<漢>亂離之時, <中國>人多竄海東." 則三國祖先, 豈其古聖人之苗裔耶? 何其享國之長也? 至於<百濟>之季, 所行多非道, 又世仇<新羅>, 與<高句麗>連和, 以侵 之, 因利乘便, 割取<新羅>重城·巨鎭, 不已, 非所謂親仁善 , 國之寶也. 於是, <唐>天子再下詔, 平其怨, 陽從而陰違之, 以獲罪於大國, 其亡也亦宜矣.
三國史記卷第二十八.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資治通鑑].李丙燾.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ぃ 20년 봄 2월, 서울의 우물이 핏빛으로 변했다. 서해에 조그만 물고기들이 나와 죽었는데 백성들이 모두 먹을 수 없이 많았다. 사비하의 물이 핏빛처럼 붉었다.
여름 4월, 두꺼비 수 만 마리가 나무 꼭대기에 모였다. 서울 시민들이 까닭도 없이 놀래 달아나니 누가 잡으러 오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쓰러져 죽은 자가 1백여 명이나 되고 재물을 잃어버린 자는 셀 수도 없었다.
5월, 폭풍우가 몰아치고 천왕사와 도양사의 탑에 벼락이 쳤으며, 또한 백석사 강당에도 벼락이 쳤다. 검은 구름이 용처럼 공중에서 동서로 나뉘어 서로 싸우는 듯하였다.
6월, 왕흥사의 여러 중들이 모두 배의 돛대와 같은 것이 큰 물을 따라 절 문간으로 들어 오는 것을 보았다. 들사슴 같은 개 한 마리가 서쪽으로부터 사비하 언덕에 와서 왕궁을 향하여 짖더니 잠시후에 행방이 묘연해졌다. 서울의 모든 개가 노상에 모여서 짖거나 울어대다가, 얼마 후에 흩어졌다. 귀신이 하나 대궐 안에 들어 와서 "백제가 망한다. 백제가 망한다."고 크게 외치다가 곧 땅 속으로 들어갔다. 왕이 이상하게 생각하여 사람을 시켜 땅을 파게 하였다. 석자 가량 파내려 가니 거북이 한 마리가 발견되었다. 그 등에 "백제는 둥근 달 같고, 신라는 초승달 같다."라는 글이 있었다. 왕이 무당에게 물으니 무당이 말하기를 "둥근 달 같다는 것은 가득 찬 것이니, 가득 차면 기울며, 초승달 같다는 것은 가득 차지 못한 것이니, 가득 차지 못하면 점점 차게 된다."고 하니 왕이 노하여 그를 죽여 버렸다. 어떤 자가 말하기를 "둥근 달 같다는 것은 왕성하다는 것이요, 초승달 같다는 것은 미약한 것입니다. 생각컨대 우리 나라는 왕성하여지고 신라는 차츰 쇠약하여 간다는 것인가 합니다."라고 하니 왕이 기뻐하였다.
당 나라 고종이 조서를 내려 좌위 대장군 소 정방을 신구도 행군 대총관으로 임명하여, 좌위장군 유 백영과 우무위 장군 풍 사귀와 좌효위 장군 방 효공 등과 함께 군사 13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로 와서 공격하게 하였다. 아울러 신라왕 김 춘추를 우이도 행군 총관으로 임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당 나라 군사와 합세하게 하였다. 소 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에서 바다를 건너 나라 서쪽 덕물도에 이르자, 신라왕이 장군 김 유신을 보내 정예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당 나라 군사와 합세하게 하였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군신들을 모아 공격과 수비 중에 어느 것이 마땅한지를 물으니, 좌평 의직이 나서서 말하기를 "당 나라 군사는 멀리서 바다를 건너 왔습니다. 그들은 물에 익숙하지 못하므로 배를 오래 탄 탓에 분명 피곤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상륙하여 사기가 회복되지 못했을 때 급습하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신라 사람들은 큰 나라의 도움을 믿기 때문에 우리를 경시하는 마음이 있을 것이니 만일 당 나라 사람들이 불리해지는 것을 보면 반드시 주저하고 두려워서 감히 빨리 진격해 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선 당 군사와 결전을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달솔 상영 등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당 나라 군사는 멀리서 왔으므로 속전하려 할 것이니 그 서슬을 당할 수 없을 것이며, 신라 군사들은 이전에 여러번 우리 군사에게 패하였기 때문에 우리 군사의 기세를 보면 겁을 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의 계책으로는 당 나라 군사들이 들어 오는 길을 막아서 그들이 피곤하여지기를 기다리면서, 먼저 일부 군사로 하여금 신라 군사를 쳐서 예봉을 꺾은 후에, 형편을 보아 싸우게 하면 군사를 온전히 유지하면서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왕이 주저하면서 어느 말을 따라야할지를 몰랐다. 이 때 좌평 흥수는 죄를 지어 고마미지현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왕이 그에게 사람을 보내 물었다. "사태가 위급하게 되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흥수가 말했다.
"당 나라 군사는 숫자가 많을 뿐 아니라 군율이 엄하고 분명합니다. 더구나 신라와 함께 우리의 앞뒤를 견제하고 있으니 만일 평탄한 벌판과 넓은 들에서 마주하고 진을 친다면 승패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백강[혹은 기벌포라고도 한다.]과 탄현[혹은 침현이라고도 한다.]은 우리 나라의 요충지로서, 한 명의 군사와 한 자루의 창을 가지고도 만 명을 당할 수 있을 것이니, 마땅히 용감한 군사를 선발하여 그곳에 가서 지키게 하여, 당 나라 군사로 하여금 백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 군사로 하여금 탄현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면서, 대왕께서는 성문을 굳게 닫고 든든히 지키면서 그들의 물자와 군량이 떨어지고 군사들이 피곤하여질 때를 기다린 후에 분발하여 갑자기 공격한다면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대신들은 이를 믿지 않고 말했다.
"흥수는 오랫 동안 옥중에 있으면서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니, 그 말을 따를 수 없습니다. 차라리 당 나라 군사로 하여금 백강으로 들어오게 하여 강흐름에 따라 배를 나란히 가지 못하게 하고, 신라 군사로 하여금 탄현에 올라가서 소롯길을 따라 말을 나란히 몰 수 없게 합시다. 이 때가 되어 군사를 풀어 공격하게 하면 마치 닭장에 든 닭이나 그물에 걸린 고기를 잡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왕은 이 말을 따랐다. 왕은 또한 당 나라와 신라 군사들이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소식을 듣고 장군 계백을 시켜 결사대 5천 명을 거느리고 황산으로 가서 신라 군사와 싸우게 하였는데, 네 번 싸워서 모두 이겼으나 군사가 적고 힘이 모자라서 마침내 패하고 계백이 사망하였다. 이에 왕은 군사를 모아 웅진 어귀를 막고 강가에 주둔시켰다. 소 정방이 강 왼쪽 언덕으로 나와 산 위에 진을 치니 그들과 싸워서 아군이 크게 패하였다. 이 때 당 나라 군사는 조수가 밀려 오는 기회를 타고 배를 잇대어 북을 치고 떠들면서 들어 오고, 소 정방은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곧장 진도성 30리 밖까지 와서 멈추었다. 우리 군사들이 모두 나가서 싸웠으나 다시 패배하여, 사망자가 1만여 명에 달하였다. 당 나라 군사는 승세를 타고 성으로 육박하였다. 왕이 패망을 면할 수 없음을 알고 탄식하며 말했다.
"성충의 말을 듣지 않다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 후회스럽구나."
왕은 마침내 태자 효를 데리고 북쪽 변경으로 도주하였다. 소 정방이 성을 포위하자 왕의 둘째 아들 태가 스스로 왕이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굳게 지켰다. 태자의 아들 문사가 왕의 아들 융에게 이르기를 "왕께서는 태자와 함께 나가 버렸고, 숙부는 자기 마음대로 왕노릇을 하고 있으니 만일 당 나라 군사가 포위를 풀고 가버리면 우리들이 어떻게 안전할 수 있겠는가?"라 하고, 마침내 측근들을 데리고 밧줄을 타고 성을 빠져 나가고 백성들도 모두 그를 뒤따르니, 태가 이를 만류하지 못하였다. 소 정방이 군사들을 시켜 성에 뛰어 올라 당 나라 깃발을 세우게 하자, 태는 다급하여 성문을 열고 목숨을 살려 주기를 요청하였다. 이 때 왕과 태자 효가 여러 성과 함께 모두 항복하였다. 소 정방이 왕과 태자 효, 왕자 태, 융, 연 및 대신과 장병 88명과 주민 1만 2천 8백 7명을 당 나라 서울로 호송하였다.
백제는 원래 5부, 37군, 200성, 76만 호로 되어 있었는데, 이 때에 와서 지역을 나누어 웅진, 마한, 동명, 금련, 덕안 등 5개의 도독부를 두어 각각 주, 현들을 통할하게 하고, 우두머리를 뽑아서 도독, 자사, 현령을 삼아 관리하게 하고, 낭장 유 인원에게 명령하여 도성을 지키게 하였다. 또한 좌위 낭장 왕 문도를 웅진 도독으로 삼아 유민들을 무마하게 하였다. 소 정방이 포로들을 임금에게 바치니 임금이 그들을 꾸짖고 용서하여 주었다. 왕이 병으로 사망하자 그를 금자광록대부위위경으로 추증하고 옛 신하들의 문상을 허락하였다. 조서를 내려 손 호, 진 숙보의 무덤 곁에 장사지내고, 그 무덤과 함께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 왕자 융을 사가경으로 임명하였다. 왕 문도가 바다를 건너다가 사망하자 유 인궤로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
무왕의 조카 복신은 일찌기 군사를 거느리는 장수였는데, 이 때 중 도침을 데리고 주류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켜서, 전 임금의 아들로서 왜국에 인질로 가있던 부여 풍을 맞아서 왕으로 추대하였다. 서북부에서 모두 이에 호응하니, 군사를 이끌고 도성에 있는 유 인원을 포위했다. 당 나라에서는 조서를 내려 유 인궤를 검교 대방주 자사로 임명하여, 왕 문도의 군사를 거느리고 지름길로 신라 군사를 보내 유 인원을 구원하게 하였다. 유 인궤가 기뻐하며 "하늘이 장차 이 늙은이를 부귀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당 나라 책력과 묘휘를 요청하여 가지고 떠나면서 "내가 동쪽 오랑캐를 평정하고 대당의 정삭을 해외에 반포하려 한다"고 말하였다. 인궤가 군사를 엄하게 통솔하고 이동하면서 싸우고 전진하니, 복신 등이 웅진강 어귀에 두 개의 목책을 세워 그들을 방어하였다. 인궤가 신라 군사들과 합세하여 공격하니, 우리 군사들이 퇴각하여 목책 안으로 들어와 강을 저지선으로 삼으니, 다리가 좁아서 물에 빠지고 전사한 자가 1만여 명이었다. 복신 등이 이에 도성의 포위를 풀고 물러와서 임존성을 확보하고 있으니, 신라 군사들이 군량이 떨어져서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이 때가 당 나라 용삭 원년 3월이었다. 이 때 도침은 영군 장군으로 자칭하고 복신은 상잠 장군으로 자칭하며 여러 무리들을 불러 모으니 그 세력이 더욱 확장되었다. 그들은 사람을 보내 인궤에게 말했다.
"듣건대, 당 나라가 신라와 약속하기를 백제 사람은 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죽이고, 그후에는 우리 나라를 신라에 넘겨 주기로 하였다고 하니, 죽음을 기다리기 보다는 차라리 싸우다가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여, 이렇게 모여 진지를 고수하고 있을 뿐이다."
인궤는 편지로 화복에 대하여 설명하고, 사람을 보내 타일렀다. 도침 등은 군사가 많은 것을 믿고 교만해져서 인궤의 사자를 바깥 숙소에 재우고 비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사자의 벼슬은 낮고, 나는 일국의 대장이므로 함께 말할 수 없다."
그는 답장을 주지 않고 그냥 돌려 보냈다. 인궤는 군사가 적었으므로, 인원의 군사와 합쳐서 군사들을 휴식시키면서 표문을 올려 신라와 협력하여 공격하기를 요청하였다. 신라왕 춘추가 당 나라의 조서를 받고, 장수 김 흠에게 군사를 주어 인궤 등을 구원하게 하였다. 김 흠이 고사에 이르자 복신이 그와 전투를 벌여 패배시켰다. 김 흠이 갈령도에서 도망하여 돌아간 후 신라는 감히 다시 출동하지 못하였다. 얼마 후에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그의 군사를 합쳤는데, 풍은 이를 제어하지 못하고 제사만 주관하였다.
복신 등은, 인원 등이 성이 고립되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사람을 보내 위로하면서 말했다.
"대사 등은 언제 서쪽으로 돌아가려 하는가? 그 때 우리가 사람을 보내 전송하여 주겠다."
(당 용삭) 2년 7월에 인원, 인궤 등이 웅진 동쪽에서 복신의 남은 군사를 대파하고, 지라성 및 윤성, 대산, 사정 등의 목책을 함락시켰는데, 군사를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으며, 군사들을 나누어 그곳에 계속하여 주둔시키고 수비하게 하였다. 복신 등은 진현성이 강가에 있으며, 높고 험하여 요충지로 적당하다고 판단하여 군사를 증파하여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인궤가 밤에 신라 군사를 거느리고, 성에 가까이 접근하여 새벽에 입성하여 8백 명의 목을 베어 죽이니, 마침내 신라에서 오는 군량 수송로가 소통되었다. 인원이 증원병을 요청하니, 당 나라에서 조서를 내려 치주, 청주, 내주, 해주의 군사 7천 명을 징발하고, 좌위위 장군 손 인사에게 이 군사를 주어 바다를 건너 인원의 군사를 보충하게 하였다. 이 때 복신은 이미 권력을 독차지하여 부여 풍과 서로 질투하고 시기하게 되었다. 복신은 병이 들었다는 구실로 굴속에 누어서 풍이 문병하러 오기를 기다려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풍이 이를 알고 심복들을 거느리고 복신을 급습하여 죽이고 고구려와 왜국에 사람을 보내 군사를 요청하여 당 나라 군사를 막았는데, 손 인사가 중도에서 이들을 맞아 쳐부수고, 마침내 인원의 군사와 합세하니 군사의 사기가 크게 올랐다. 이에 모든 장수들이 공격의 방향을 의논하는데 어떤 자가 "가림성이 수륙의 요충이므로 먼저 쳐버려야 한다"고 말하니, 인궤가 대답하였다.
"병법에는 강한 곳을 피하고 약한 곳을 공격해야 한다고 하였다. 가림성은 험하고 튼튼하므로 공격하면 군사들이 상할 것이요, 밖에서 지키자면 날짜가 오래 걸릴 것이다. 주류성은 백제의 소굴로서 무리들이 모여 있으니, 만일 이곳을 쳐서 이기게 되면 여러 성은 저절로 항복할 것이다."
이에 인사, 인원과 신라왕 김 법민은 육군을 거느리고 나아가고, 유 인궤와 별수 두상과 부여 융은 수군과 군량 실은 배를 거느리고, 웅진강으로부터 백강으로 가서 육군과 합세하여 주류성으로 갔다. 백강 어귀에서 왜국 군사를 만나 네 번 싸워서 모두 이기고, 그들의 배 4백 척을 불사르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로 오르고 바닷물도 붉은 빛을 띄웠다. 이 때 왕 부여 풍은 탈출하여 도주하였으므로 거처를 알지 못하게 되었는데 어떤 사람은 고구려로 달아났다고 말하기도 한다.당 나라 군사들이 그의 보검을 노획하였다. 왕자 부여 충승과 충지 등이 부여 풍의 군사를 거느리고 왜국 군사들과 함께 항복하고, 지 수신이 혼자 남아 임존성에서 버티며 항복하지 않았다.
처음에 흑치 상지가 도망하여 흩어진 무리들을 모으니, 열흘 사이에 따르는 자가 3만여 명이었다. 소 정방이 이들을 공격하니 상지가 이들과 싸워서 승리하고, 다시 2백여 성을 빼앗으니 정방이 이길 수 없었다. 상지는 별부장 사타상여를 데리고 험준한 곳에 웅거하여 복신과 호응하다가, 이 때에 이르러 모두 항복하였다. 인궤가 그들에게 진심을 보이면서, 그들로 하여금 임존성을 빼앗아 그들 자신의 성의를 나타내는 기회를 갖게 하려고 갑옷과 병기, 군량 등을 주었다. 인사가 말하기를 "그들은 야심이 있어 믿기 어렵다. 만일 그들이 무기와 곡식을 얻는다면 이는 그들에게 도적질을 할 방책을 제공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인궤가 말하기를 "내가 상여와 상지를 보니, 그들에게는 충심과 지모가 있다. 그들에게 기회를 주면 공을 세울 것이니 무엇을 의심할 것인가?"라고 하였다. 그들 두 사람이 성을 빼앗으니, 지수신은 처자를 버리고 고구려로 달아났으며 잔당들도 모두 평정되었다. 인사 등이 군사를 정돈하여 돌아가니, 당 나라에서는 조서를 내려 인궤로 하여금 그곳에 주둔하며 수비하게 하였다.
전쟁의 여파로 집집마다 영락하고, 시체가 풀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인궤가 이 때 처음으로 명령을 내려 해골을 묻고, 호구를 등록하며, 촌락을 정리하고, 관리들을 임명하였다. 또한 도로를 개통하고, 교량을 가설하고, 제방을 수축하고, 저수지를 복구하며, 농업을 장려하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고, 고아와 노인을 양육하게 하였으며, 당 나라의 사직을 세우고 정삭과 묘휘를 반포하니, 백성들이 기뻐하여 각각 자기 집에 안주하게 되었다. 당 나라 임금이 부여 융을 웅진 도독으로 삼아 귀국하게 하여 신라와의 오래된 감정을 풀고 나머지 무리들을 불러 오게 하였다.
인덕 2년, 융이 신라왕과 웅진성에서 만나 흰 말을 잡아 맹세하였다. 인궤가 맹세하는 글을 지었으며, 이것을 금으로 새기고, 무쇠로 책을 만들어 신라 종묘 안에 두었는데, 이 맹세의 글은 [신라기]에 보인다.
인원 등이 귀국하니, 융은 군사가 흩어질 것을 염려하여 그 또한 당 나라 서울로 돌아갔다. 당 의봉 년간에 융을 웅진도독대방군왕으로 삼아 귀국하게 하여 남은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곧이어 안동 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겨 통할하게 하였다. 이 때 신라가 강성하여지니 융이 감히 고국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고구려에 가서 의탁하고 있다가 사망하였다. 무후가 또한 그의 손자 경으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케 하려 했으나, 그 지역이 이미 신라, 발해, 말갈에 의하여 분할 통치되고 있었으므로 나라의 계통이 마침내 단절되었다.
저자의 견해 : 신라 고사에는 "하늘이 금궤를 내려 보냈기에 성을 김씨로 삼았다"고 하는데, 그 말이 괴이하여 믿을 수 없으나, 내가 역사를 편찬함에 있어서, 이 말이 전해 내려온지 오래되니, 이를 없앨 수가 없었다. 그러나 또한 듣건대 "신라 사람들은 스스로 소호 금천씨의 후손이라 하여 김씨로 성을 삼았고,[이는 신라 국자박사 설 인선이 지은 김 유신의 비문과 박 거물이 지었고 요 극일이 쓴 삼랑사 비문에 보인다.] 고구려는 또한 고신씨의 후손이라 하여 고씨로 성을 삼았다"고 한다.[[진서]의 기록에 보인다.] 옛 사기에는 "백제와 고구려가 모두 부여에서 나왔다"고 하며, 또한 "진, 한의 난리 때, 중국 사람이 해동으로 많이 도망왔다"고도 한다. 그렇다면 삼국의 조상들은 옛 성인의 후예가 아니겠는가? 어찌하여 그렇게 오래도록 나라를 향유할 수 있었는가? 백제 말기에 와서는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이 많았으며, 또한 대대로 신라와는 원수를 맺고, 고구려와는 화친을 계속하면서 신라를 침공하여, 유리한 조건과 적당한 기회만 있으면 신라의 중요한 성과 큰 진을 빼앗기를 그치지 않았으니, 이른바 어진 사람을 가까이 하고 이웃과 잘 사귀는 것이 나라의 보배라는 말과는 달랐다. 이에 당 나라의 천자가 두 번이나 조서를 내려 백제와 신라 사이의 원한을 풀기 위하여 노력했으나, 겉으로는 순종하는 듯하면서도 안으로는 이를 어겨 대국에 죄를 졌으니, 그들이 패망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삼국사기 권 제 28 끝-
출처:진갑곤의 한자박사
* 퍼온 곳 : http://bluecabin.com.ne.kr/samguksagi/bakje2.htm
[출처] 삼국사기 : 백제본기 (원문 + 한글) (펌)|작성자 민주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