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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확실성과 의미혼돈의 시대
2. ‘우연성(contingency)'과 ’의미(sense)'란 무엇인가? 1) 용어의 이해 2) ‘우연성의 체험’과 ‘의미 부재의 체험’
3. ‘의미 질문’과 ‘의미 체험’의 역사적 해명 1) 출발점 2) 철학적 관점 3) 인간학적 관점
4. 생의 해석학-의미 체험에 대한 신학적 해명 1) 궁극적 의미추구로서의 종교적 체험 2) 의미 체험의 그리스도교적 해명 |
1. 불확실성과 의미 혼돈의 시대
현대인들의 심리적 공황과 혼돈 속에서 ‘생의 의미’를 발견하고자 하는 이른바 ‘로고테라피’(의미 요법)를 소개하고 있는 일군의 심리학자들이 있다. 이들 중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죽음의 수용소에서 인간 실존에 대한 깊은 통찰을 통해 현대인들을 고독과 불안 속에서 참된 자아를 발견하도록 이끌고자 한 미국의 심리학자 롤로 메이(Rollo May)는 그의 저서 [자아를 잃어버린 현대인]에서 T. S. 엘리어트의 싯구를 인용하여 오늘날 불확실성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 바 있다:
“우리는 텅 빈 인간들
우리는 채워진 인간들
서로가 기대어서
아 두뇌조각은 짚으로 채워졌는가,
형태 없는 모습, 색깔 없는 그림자
마비된 생명, 움직임 없는 제스쳐…….”
한마디로 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대 속에서 확실한 그 어떤 것에도 쉽게 자신을 정초하지 못하는 현대인들의 자화상을 그려낸 표현들이다. 인간은 실존적으로 자신이 부딪히는 개별적인 사건들 속에서 내적인 필연성을 발견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 ‘필연성’ 속에서 언제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혹은 “그럴지도 모른다”라는 ‘우연성’이 나타나고, 그 안에서 회의와 절망을 체험한다. 20세기 실존주의(Existentialism)가 인간을 구체적인 시공간 속에 피투된 현존재(Dasein)로 이해하는 한 인간은 역사 속에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내던져진 채 매 순간 발생하는 우연적인 사건들 속에서 필연성을 발견하고, 의미 없이 던져진 많은 사건들을 자신의 생의 목표와의 연관성 속에서, 그리고 삶을 이끌고 있는 전체적인 틀 속에서 납득 가능하고자 노력한다. 한마디로 우연적 현실 속에서 ‘생의 의미(Sinn des Lebens)’를 발견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다.
인류의 역사는 어쩌면 이러한 우연성 속에서 필연성을 발견하거나 필연적이라고 여겨지면서도 동시에 우연적 가능성에로 개방된 실존적 인간 이해를 위한 과정이었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부터 중세의 스콜라 신학을 거쳐 현대의 인문과학에서 다뤄지는 사회학과 종교학 등은 모두가 인간 존재를 둘러싼 우연적 현실과 절대적 필연성 사이의 합리적 해명을 위한 노력들이었다. 이 점은 그리스도교 신학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유한한 인간에 의한 초월적 하느님의 계시 사건의 수용 가능성의 문제로부터 인간과 세상을 둘러싼 악의 존재와 고통의 현실 속에서도 하느님 존재의 필연적 가능성에 대해 묻고, 미래를 향해 개방된 역사적 실존으로서의 인간이 지닌 희망에 대해 정당한 해석을 내리기까지 그리스도교 신학은 우연적 현실 속에서 존재의 필연성을 찾는 이른바 의미(Sinn) 발견의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현대는 흔히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시대라고 불린다. 모더니즘의 합리주의적 이성의 우위가 20세기 초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통해 위기에 봉착하면서 인류는 이른바 기존의 전통적 질서와 권위가 붕괴됨을 체험하고, 가치관의 혼돈과 개별적 사건들의 상관성에 대한 질문 즉, ‘의미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 결과 현대인들은 더 이상 과거에 통용되던 하나의 흔들리지 않는 절대 진리에서 도출된 신과 인간 사이의 위계적 질서로부터 인식과 판단의 확실성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 고도의 과학 기술문명이 약속한 인간 미래를 약속해주는 청사진들은 오늘날 신에게 매여 있던 존재의 뿌리를 흔드는 광범위한 위기에 대한 의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대량 살상 무기를 통한 죽음의 공포와 인류를 재앙으로 몰아넣을 환경 파괴의 현상들, 주관적 가치의 상대화가 몰고 온 가치관의 혼돈과 생의 목적과 이유에 대한 혼란에 이르기까지 현대는 한마디로 의미 부재의 총체 속에 신음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현대 정신과학은 또 다른 의미에서 인간 실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벨테(B. Welte)가 말한 ‘무한과 유한의 겨룸터’에서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과 역사성 안에 내재된 본연의 신비적 근원에로 회귀하려는 실존적 결단을 하고자 한다. 진리의 단일성을 유지해주는 형이상학적 신의 존재보다는 역사적 실존인 인간의 유한성 속에 숨겨 있는 신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통시적으로 파악하고, 이른바 ‘절대 신비’로서의 신의 진리를 인간학적, 자기이해적 방법을 통해 해명하려고 노력했다. 아울러 인간의 정신 능력의 합리성을 관장하는 지성적 오성(Verstand)의 독자적 결단보다는 인간 고유의 감성적 직관과 영적 통찰력에 대한 통전적인 인식 방식을 선호하면서 우연한 현실 질서들 속에서 ‘의미 상관성’을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다수의 학문적 노력들도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그리스도교 신학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쳐왔다. 현대인들은 그리스도교가 과거에 인간의 자기이해를 통합해주던 단일한 진리 체계로 이해되어온 초월적-형이상학적 하느님에 대한 확실성에 정초하기 보다는 무한히 개방되어 있는 역사 안에서 실존하는 인간의 자유 의지와 미래의 자기 기획을 위한 실존적 결단을 신앙 이해에 중요한 기점으로 파악하고 있다. 한마디로 신의 존재의 확실성에 대한 전통적 해명을 벗어나 개방된 미래를 향해 끊임없이 요청되는 인간의 자기 존재의 근원에로의 실존적 결단을 강조하고 있다.
본 소고에서는 인문과학 영역에서 광범위하게 펼쳐지고 있는 우연성(contingency)과 ‘무의미(sinnlos)의 실존적 체험들을 그리스도교 신학이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특별히 주제의 범위를 현대 해석학적 중심 주제인 ‘의미’에 대한 질문과 이 의미의 궁극적 성취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고자 하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필연성을 어떻게 현대인의 ‘의미 체험(Sinnerfahrung)’과의 관련 속에 발견할 수 있는지에 대한 기초 신학적 질문들을 토대로 그 단초를 개괄적으로 제시해보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
2. ‘우연성(contingency)’과 ‘의미(sense)’란 무엇인가?
1) 용어의 이해
① ‘우연성(contingency)’이란 무엇인가?
일상용어를 둘러싼 다양한 표현들과 자연과학의 사고 범주에서 흔히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이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한 것”을 ‘우연(accident/fortuity)’이란 말로 표현하곤 한다. 그러나 철학에서 흔히 일컫는 필연성의 모순 대당 개념으로서 사용되는 ‘우연성’이란 개념은 철학뿐만 아니라 인문과학을 통틀어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과 관련된 개념들 중의 하나이다. 이는 본래 라틴어의 ‘contingere’, ‘발생하다, 일어나다’란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형인 ‘contingentia’에서 유래했으며, “필연적이지 않은 어떤 것이 발생하다”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철학의 고전 논리학에서 유래한 이 개념은 “어떤 것이 필연적이지도,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도 아닌 것”을 일컫는 말이며, 논리적으로 보면 “가능하지만, 그러나 꼭 필연적이지 않은 것”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이는 어떻게든 다르게 발생할 수 있는 개연성을 뜻하기 때문에 우연적 범주에서 발생한 사건들 안에서 어떤 필연적 ‘의미’를 찾아내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여겨진다.
우연성의 개념은 미래에 발생할, 그러나 꼭 필연적이지 않은 사건들의 실재에 관한 진실을 발견하고자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식 논리학에서부터 출발하여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이어지는 스콜라 철학의 ‘조건적 필연성(hypothetische Notwendigkeit)’과 신과 자연의 관계를 새롭게 규정한 근세의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쯔에 이르러 인간의 무지와 의지적 자유의 가능성으로부터 해석되기에 이르렀다.
신학에서도 우연성의 문제는 성경에 나타난 개별 사건들 속에 나타난 우연적 현실과 하느님의 섭리와 계약의 필연성 사이의 관련성을 역사적으로 해명하는 과정에서 제기되었다. 그리고 스콜라 신학에서의 창조에 대한 인과관계의 근원적 제1원인(causa prima)으로서의 신 존재 증명과 신의 존재와 고통의 문제를 해명하는 ‘신정론(theodicy)’ 문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다뤄져왔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오늘날 이 우연성의 개념이 존재의 문제와 연관되었을 경우 존재가 ‘본질적으로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는 일종의 ‘가능성’으로 해석된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우연성이란 “존재가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존재를 근거로 확실성을 얻거나 자신의 활동으로 어떤 것을 일으킬 수가 없으며, 특별히 인간 존재가 자신의 ‘현존재성(Dasein)’을 스스로 근거 지을 수 없다.”는 인간의 실존성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된다.
② 의미(Sinn)란 무엇인가?
일상 언어에서 흔히 “어떤 일이 내게 의미가 있다, 혹은 무의미하다.”란 표현에서 말하는 ‘의미(意味)’란 본래 라틴어의 ‘sensus’ -영어로 sense, 독일어로 Sinn- 에서 유래하여 본래 사물을 인식하는 인간의 ‘지각능력(Wahrnehmungsfähigkeit)’을 나타내는 ‘센스-감각(Sinne)’을 말한다. 그러나 오늘날 인문과학의 발전에 따라 이 개념은 본래의 어원과는 달리 인간의 정신적인 역동성과 관련된 다양한 개념으로 재해석되고 있다. 칼 라너(K. Rahner)가 지적했듯이 오늘날 사람들은 더 이상 ‘진리’에 대해 말하기보다는 ‘의미(Sinn)’를 찾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이 점은 주지하다시피 근대 이후 심화된 ‘주체에로의 회귀’ 즉, ‘객체에서 주체로의 전환’에 근거하여 ‘의미’란 단어가 인간 현존재가 당면하는 사건들 속에서 주체가 맺는 관련성을 정당화하거나 ‘합목적적’으로 이해하려는 내면적, 영적 지각능력으로 해석되고 있다.
어원적으로 보면 ‘의미(Sinn)’란 단어는 라틴어의 ‘sentire’ 즉,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다’, 혹은 ‘길’, ‘여행’이란 단어에서 유래했다. 자우터(G. Sauter)의 연구에 따르면 ‘sensus’란 어원적으로는 “어디서부터 어떤 곳으로 가는(Auf-etwas-Ausgehen)” 혹은 “어떤 곳으로 다가서는(Auf-etwas-Zugehen)” 과정을 말한다. 이는 영적 의식이나 자의식의 범주에서 보면 하나의 ‘방향설정(Orientierung)’을 의미한다. 그래서 ‘sensus’란 본래적 의미로써 우리의 “지각(Wahrnehmung)의 방향성 혹은 정향성(Gerichtetheit)”을 뜻한다. 분명한 점은 이 용어가 인간이 무엇인가를 깨닫는 지각행위의 내적인 움직임의 과정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지각(Wahrnehmung)이란 “봄으로써 깨닫는 것”을 말하며, “감각적 직관의 근원적 형태”로써 그 다양함과 전달의 풍요로움을 무시할 수 없는 인간 인식행위에 있어서 근원적인 성격을 지닌다.
이렇게 지각과 관련된 의미로 사용되던 sensus란 용어는 19세기 정신과학의 발전에 따라서 점차 축소되고, 오히려 개념 연구의 방향은 점차 ‘의미에 대한 질문(Sinnfrage)’이라는 철학적 측면에서 다뤄지기 시작했다. 카우프만(F. X. Kaufmann)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세기 철학에서도 Sinn(감각/의미)란 용어는 감각적 지각으로부터 유추된 범주로 이해되었다. 그래서 Sinn이란 칸트가 말한 ‘대상의 현실을 바라보는 직관의 능력’이라는 점에서 자명하게 주어진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Sinn이란 개념은 점차 정신적인 내용을 표현하는 범주로 분류되었다. ‘뜻’ 혹은 ‘의미(Bedeutung)’가 인간의 자의식에 보다 분명해지면서 의미에 대한 질문은 단순히 철학의 주제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여기서 의미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자명성에 대한 상실’, 동시에 ‘무의미의 가능성’이 나타나기 시작했음을 알려준다.”
이러한 철학적 선회는 의미란 개념의 새로운 규정을 가능하게 했다. ‘지각능력으로써의 감각’이라는 본래의 개념은 이른바 “질서의 재정립(Operation der Zuordnung)”이란 개념을 통해 새롭게 해석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재정립’이란, 개념의 발전사에서 보면 이제까지 규정해오던 의미의 개념을 완전히 다른 형태로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즉, 직접적인 경험세계를 뛰어 넘어 이제는 ‘전체적인 통찰’을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방법을 택했다는 말이다. 여기서 인간의 자발적인 행위가 우선되고, 지각행위는 이제 해석하는 행위로 즉, 의미들과 의미 있는 것들을 해명하는 인간의 자발적인 행위로 축소되고 말았다.
이렇게 지각과는 다르게 감각적 지각내용들을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의미(Sinn)’의 절대화는 점차로 ‘무의미(Sinnlosigkeit)’ 혹은 ‘의미상실(Sinnverlust)’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의미가 “인간의 개입을 통해 목표를 설정하는 것”으로 해석되면서 인간의 자의식과 거기서부터 지각된 내용들의 ‘방향설정’은 다분히 인간 이성이 우연하게 발생한 개별 사건들을 인간 삶의 전체적인 목적과 연관시키려는 노력, 이른바 ‘합목적성(Zweckdienlichkeit)’ 혹은 ‘의미 연관성(Sinnzusammenhang)’의 발견을 위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2) ‘우연성의 체험’과 ‘의미 부재의 체험’
인간은 어떤 특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 개별적이면서도 구체적으로 ‘현존’하기에 다양한 삶의 양태들 속에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일들을 마주한다. 그러나 인간은 대개 자신의 일상적인 반복성이나 필연성 이외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발생하는 여러 형태의 우연적 사건을 부정적 의미로 체험한다. 가령 불치의 병이나 죽음을 앞둔 개인적인 불행으로부터 전쟁이나 흉년, 전염병과 같이 갑자기 일어나는 사건들은 공동체 전체의 불행으로 이해된다.
‘우연성의 체험’이란 ‘세계 내 현존재’로서의 인간의 실존적 처지(conditio humana)를 표현하는 개념이다. 즉, “인간들이 겪는 사건들의 의미를 명료하게 해주는 삶의 맥락들에 대한 인식의 결핍에서 오는 불안과 불확실성의 체험”을 일컫는다. 현대의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현대의 인간들이 지닌 존재의 어둠과 불안을 지적하면서 설명되지 않는, 합리적이지 못한 위협들의 총체 앞에 선 현대인의 고뇌를 그려낸 바 있다. 비록 고도로 문명화된 인류가 사회적 안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제도적 장치들을 고안해내고 있지만, 여전히 인간은 깊은 내적 불안감과 실존 자체에 대한 위기의식을 피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예기치 못한 사건들이나 삶을 위협하는 우연한 현실들을 겪을 때 이제까지 자신의 생각을 결정해온 기존의 맥락에 대한 의심을 갖게 되고, “피할 수 없는 삶의 우연적 사건들을 보다 더 큰 전체적 맥락 속에서 이해되도록, 그리고 그 모순들을 견디어낼 수 있도록 만들고자 한다.” 그래서 생의 우연성을 극복하기 위해서 인간은 자연의 복잡성을 학문적 예측 가능성으로 축소하거나 인간의 행위를 문화적 제도들이나 불변의 내용들에 의존하기도 한다. 특히 종교는 우연성의 문제를 겪는 현존재인 인간들이 이를 극복하기 위한 적절한 해답을 주는 탁월한 기능을 한다. 가령 우연적 사건들을 종교적으로 해석된 신적 섭리로 이해함으로써 인간이 겪는 우연적 현실을 극복하도록 이끌어주거나 인생의 여정에서 발생한 부정적 사건들에게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만들어주고, 더 나아가 그러한 사건들이 ‘의미 있는’ 즉, 삶을 지속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건들이 되도록 이끌어준다. 이런 의미에서 종교는 ‘우연’이란 것을 신의 섭리를 체험하는 자리 즉, “복된 이에게 선물처럼 주어진 뜻밖의 일들”로 강조하기도 한다.
이러한 우연성의 체험은 곧바로 필연성을 얻기 위한 인간의 ‘합목적적(合目的的) 노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의미(sense)’가 오늘날 ‘가치(value)’, ‘목적(purpose)’, ‘의도(intention)’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이유는 의미란 인간이 겪는 우연적 현실들을 납득시키는 이성적 해명의 과정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합목적성(Zweckdienlichkeit)’이란 지각된 현실들을 스스로 납득되게 만드는 명료한 과정을 일컫는다. 이 말은 말 그대로 목표를 정하여 행위 하는 주체가 목표가 된 대상들과 맺는 구성적인 관계를 뜻한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기 전에 ‘의미’에 대해 묻는다는 것은 우선 그 대답이 어떤 경우에도 목적에 부합하는 지 아니면 목적과 무관한지를 묻는 질문이다. 즉, 내 행동이나 경험들이 의미 있는지 아니면 무의미한 지는 이들이 내가 정한 목적에 맞는 지를 확인하는 것과 같은 말이다. 따라서 어떤 대상의 ‘의미, 무의미, 역설적인 의미’를 묻는 것은 목적에 부합하는 행동과 목표로 삼은 대상과의 관계가 서로 잘 맞는지를 묻는 것이다. 이런 합목적성에 대한 강한 확신은 가령 개인이 자신의 체험들과 행위들이 목표로 삼은 일들과 기대 이상으로 부합한다고 생각되는 의미의 맥락들이 발견될 때 이루어진다. 여기서 ‘의미’란 근본적으로 “어떤 방향의 결정이 보다 상위의 체계로 귀속될 때, 또한 개개인이 자신을 관통하는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또는 그 전체에로 향할 때 충만함을 체험하는 것을 일컫는다.
이러한 합목적성이 발견되지 않는 체험을 흔히 ‘무의미(sinnlos)의 체험’, 혹은 ‘의미 부재나 상실(Sinnverlust)의 체험’이라고 한다. 특별히 이 체험이 인간의 실존적 생(生)의 문제와 연관될 때는 더욱 그렇다. 카우프만(F. Kaufmann)은 인간이 의미 부재의 체험을 다음 네 가지 형태로 언급 한다:
1) 고통과 아픔, 불행의 엄습을 통해 의미가 감추어져 보이지 않을 때.
2) 삶의 긴장이나 깊이, 혹은 중심이나 행복 없이 현존재의 지루함 속에서의 의미를 상실할 때.
3) 개인이 무로 돌아갈 수 있다는 죽음의 공포를 체험할 때.
4) 미래의 세상이 의미 없어 보이고 불투명함에도 불구하고 삶을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는 책임이 요청될 때.
그는 이러한 의미 부재의 체험이 주로 개별적인 실존적 불안에서 나타나는 것이지만 인간이 의미 부재 속에 좌초하지 않고 생의 의미에 대해 적극적으로 묻는 가장 큰 이유는 의미 있는 삶을 세상 안에서 정립해야 한다는 실존적, 도덕적 요청 때문이라고 본다. 그에 따르면 의미로 충만한 삶이란 필연적으로 우연하게 발생한 사건들의 ‘뜻’을 이제까지 전승되어 온 기존의 사회적 언어집단과의 통교의 과정에서 ‘가치 있게’ 해명해내는 삶을 말한다. 즉, 의미 발견은 개인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대화와 통교의 과정 속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사회적, 문화적 가치와 기준들을 어떤 방향으로 선택할 것인가 하는 태도에 달려있다고 본다.
이런 관점에서 따라서 우리가 ‘삶의 의미’ 혹은 ‘생의 의미’라고 일컫는 말들은 인간의 삶이 “충만하고 완성된 목표”에 도달했을 때를 말한다. 정반대로 ‘의미 부재의 체험’이란 이러한 의미들이 삶에서 발견되지 않을 때 즉, 의미의 총체성이 발견되기에 너무 많은 “관계들의 복잡성이 증대되고, 그 가능성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며, 이로써 경험의 지평들이 불확실하게 되고, 그 결과 미래에 대한 생각들이 현세적으로 국한되는” 것을 일컫는다. 그래서 삶의 의미란 인간이 어떤 특정한 상황 속에서 스스로를 반성하고, 삶과 관련된 여타의 질문들에 앞서서 삶의 목표와 목적, 한마디로 무엇 때문에 자신이 사는지에 대한 확고한 의지에 대한 질문으로써 등장한다.
3. ‘의미 질문’과 ‘의미 체험’의 역사적 해명
1) 출발점
의미 부재의 체험으로부터 ‘의미에 대한 질문(Sinnfrage)’은 우리가 사는 세상 속에서 무의미에 대한 두려움과 모든 것이 허무로 돌아갈 수 있다는 근본적인 회의와 방향상실의 위기 속에서 발생한다. 모든 것이 우연일 수도 혹은 전체가 의미 없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실존적 불안의 체험은 진보에 대한 믿음을 지닌 현대인들이 마주하는 다양한 삶의 문제들을 보다 분명한 맥락으로 편입시키거나 참아내는 일에 실패하고 있음을 입증한다. 우연성과 무의미를 극복해줄 것이라 믿었던 ‘진보에 대한 신뢰’를 상실한 현대인들은 자신이 두 가지 선택의 가능성 앞에 서 있음을 깨닫게 된다. 타인과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살아가면서 존재의 근원을 되돌아보고 궁극적 존재에 대한 실존적 결단을 내려 자신의 삶의 방향을 이전과는 달리 완전히 새롭게 설정하는 의미 체험을 하거나 아니면 자기존재의 근원적 불안에 매몰되어 버리는 의미 상실에 빠져 버리는 것, 둘 중 하나이다. 의미에 대한 질문과 의미 체험이 철학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학이나 종교학, 심지어 신학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져야 하는 이유는 날로 복잡해지는 현대사회 속에서 목표와 방향을 설정하지 못한 채 어쩔 줄 모르는 현대인들이 다가올 ‘미래에 대한 충격’을 해명해야 하는 과제를 떠맡아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러한 의미 질문이 철학과 인문과학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다뤄지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사회학적 관심 속에서 철학과 종교, 신학에 이르는 다양한 관점들을 해석하고 있는 독일의 종교사회학자 카우프만(F. X. Kaufmann)은 우연성의 체험을 의미 체험의 맥락 속에서 이해하여 오늘날 광범위하게 다뤄지고 있는 ‘의미 질문’을 서구의 정신문화의 발전 과정 속에서 발견하고자 하였다. 그는 고대 철학의 형이상학적 질문에서부터 근대의 칸트와 실존주의 철학자들에 이르는 서양 철학의 흐름 속에서 의미에 대한 질문의 여러 가지 형태를 읽어내었을 뿐만 아니라 현대의 인간학적 발전과 종교 심리학적 관점에서도 파악하고자 하였다. 그의 사상을 통해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의미 체험 신학적 해명의 기초를 시도해 볼 수 있겠다.
2) 철학적 관점
카우프만은 고대 인간 사유의 출발점인 우주론적-본체론적 관점에서 보면 존재의 근거로서 ‘의미’는 고대와 중세의 형이상학적 사유에 걸맞게 그 자체로 질문의 대상이 되지 않음을 지적한다. 의미란 인간 현존재가 그 의미에 대해 물을 수 있는 물음의 근거로 이미 ‘소여된 것’으로 이해되었다. 존재의 궁극적인 근거로 명명된 ‘절대존재 -신’으로부터 인간은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부여받았기에 그리스 철학은 주로 자연(Natur)의 인과관계의 원리와 질서(Ordnung)와 의미(Sinn)로서의 로고스(Logos)에 대한 질문에서 존재의 목적과 원인에 대한 이성적 해답을 찾고자 했다. 여기서 존재하는 모든 것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 그리고 누가, 그리고 무엇이 이들의 목적지향성을 이끌고 있는지 등의 ‘목적론적 질문(Zielfrage)’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고자 하였다. 인간의 행위 속에서 나타나는 자유와 필연성의 문제 역시 같은 맥락에서 다뤄졌다.
이러한 사유의 전환점은 근대 인간학적-초월론적 사유의 전환에서 발생했다. 인간이 자신의 존재 근거를 더 이상 신적 존재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를 ‘세계의 관리자’로 이해하고, 하느님의 흔적을 찾는 세계에 대한 관심 보다는 자신이 만들어낸 세상에서 드러날 자신의 흔적을 찾는 데 깊은 관심을 쏟게 되면서 이제 의미에 대한 질문은 자유롭게 세상을 다루는 인간 자신에 대한 질문으로 전이되기에 이르렀다. 현존재의 의미는 신이 아닌 “자신의 영혼의 깊이에서, 개별적인 인격의 가치 속에서, 양심과 느낌, 그리고 정신과 자유의 초월론적 정향성(Verwiesenheit) 안에서, 또한 개인의 이성적인 행위 안에서” 발견되기에 이르렀다.
형이상학의 위기를 몰고 온 칸트(I. Kant)는 절대적 진리 인식의 확실성을 보증해주지 못하는 존재자체(물자체)에 대한 순수 이성의 접근을 포기하고, 인간의 개별적 행위의 의미를 보편적이고 광범위한 행위의 연관성과 맺는 관계 속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그는 존재의 의미를 인간 행위가 ‘절대적 선한 의지’와 일치하는 데서 찾고자 하여 더 이상 ‘앎’이 아닌 ‘양심’의 요청에 절대적 의무를 다하는 것을 존재의 의미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의미에 대한 질문은 인간이 이 ‘무조건적이고 절대적 선한 의지’를 향하고자 하는 순수한 ‘의도(Intention)’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존재의 의미를 도덕적이고 내면적인 삶의 정당성을 해명하는 것으로 만족하였고, 그 결과 현존재가 현실 세계에서 겪는 구체적인 체험의 의미를 도외시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 현대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칸트의 의미 발견의 실패를 인정하고, 의미전체에 대한 질문을 회의적으로 보는 니체(F. Neizche)의 입장과 유토피아적인 이상으로 보는 막스주의(Maxismus)를 탄생시켰다. ‘신의 죽음’을 선포한 니체는 형이상학의 종말을 고했고, 이상과 현실의 괴리와 이상적 삶에 대한 의지를 포기하고 구체적인 현실을 맞서 싸우는 용기와 과감함을 생의 의미로 강조했다. 신 없는 인간의 창조적 자기완성과 세계의 건설자로서의 인간의 자기이해는 인간이 신으로부터 유래하지 않고, 현실 세계 안에서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피투된(entworfen)’ 존재로 이해되어, 오로지 자신의 자유와 책임 속에서 실존을 위협하는 전체에 맞서 인간 자유를 드러내야 할 것을 요청하였다. 인간의 자유는 한마디로 세계와 인간 실존의 무의미성으로부터 각인되어 결국 무로 돌아갈 인간의 비참한 현실과 마주하는 원리가 되었다.
역사 안에서 인간 소외의 문제를 깊이 파고 든 막스주의 역시 계급화된 사회의 현실 속에서 왜곡된 자연을 극복하는 것을 생의 의미로 파악하였고, “자연의 인간화, 인간의 자연화”를 실현하는 유토피아적인 이상을 의미의 충만으로 파악하였다.
훗설(E. Hussel)에 이르러 의미는 존재를 현상학적 환원의 원리에 의거하여 주어진 실재로 인식하기보다는 존재가 현상으로 드러나는 방식과 현상의 내적 구조로 파악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의미는 인간 내면의 ‘의식’과 동일시되었고, 더 이상 사실적, 경험 가능한 심리적 의미가 아닌 순수한 초월적, 논리적 원리이자 내재적인 것으로 환원되었다. 따라서 존재의 의미에 대한 질문도 형이상학적 관심이 아닌 순전히 인간 의식의 ‘의도’로 축소되었다. 그의 사상은 존재의 궁극적 근원에로 향하는 인간 의식의 초월론적 사상의 뿌리를 형성하여 셀러(M. Scheler)의 ‘인격의 상호 관계성’속에서 의미를 ‘가치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고, 하이데거(M. Heidegger)에 이르러서는 그의 ‘기초존재론’에서 현존재(Dasein)로서 인간이 역사 속에서 ‘현전(Vorhanden-Sein)’하면서도 끊임없이 존재의 의미를 기획하는 주체적 자아임을 밝혀내었다. 동시에 인간 실존은 역사 안에서 현재와 미래를 살아가면서 완성되지 않은, 부분적이고 최종적이지 않은 의미를 안고 미래를 향해 개방된 존재임을 강조하였다.
인간 실존의 의미가 인간의 역사성과 정신성에서 발견된 반면에 현대의 정신과학은 인간을 역사 안에 개방된 존재로 이해하는 동시에 미래를 선취하는 사회적 관계성 안에서 자신을 실현하는 존재로 파악하였다. 이른바 아도르노(T. W. Adorno)와 호르크하이머(M. Horkheimer), 하버마스(J. Harbermas)로 대표되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Kritische Theorie)’에 따르면 인간 생의 궁극적 목적은 ‘실천(Praxis)’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미래에 대한 관심에 있었다. 여기서 인간의 창조적 자유는 ‘희망의 원리’(E. Blochs)와 ‘종말론적 희망’(W. Pannenberg)이라는 관점에서 보편적 역사의 의미를 선취하는 인간학적 전망을 드러내는 원리로 이해되었다.
요약하자면 고대와 중세 형이상학에서는 인간의 우연성을 필연적 원리로 포괄하는 원리를 존재 자체인 신의 존재로 보고, 생의 의미란 이 존재에로 모든 우연적 현실을 귀속시키는 결의론(determination)이 우세했다면 근대의 인간학적 전환은 칸트를 출발점으로 존재의미를 형이상학적 원리로부터가 아닌 인간의 도덕적 원리이자 요청에로 실천적으로 향하는 ‘의도(Intention)’로 이해되었다. 이후 실존주의 철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의미 부재의 체험들은 곧바로 역사 안에서 인간 자유의 내재적 자유 능력과 초월에로의 지향성을 토대로 재해석되어 현대 해석학의 실존 분석 속에서 미래를 향한 개방된 실존으로서의 희망의 원리를 이끄는 실천적 자아인식에 대한 관심으로 생의 의미가 해석되기에 이르렀다.
3) 인간학적 관점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자신을 둘러 싼 주위 환경(Umwelt)에 본능적으로 귀속되지 않고, 주어진 실재들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하면서 이들을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때로는 직접적으로, 때로는 간접적으로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며 다루는 독특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인간의 능력은 문화와 언어를 통해서 점차 발달하여 삶을 외부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결정하는 ‘의지적 행동을 이끄는 자의식(Intentionalität)’을 형성할 수 있게 한다.
인간은 특별히 자신의 주변 세계 안에서 접하는 인격체들과의 접촉을 통해 인식적인 동의와 감성적 공감을 획득하고 반복되는 경험들 속에서 삶에 필요한 가치들을 해석하고 축적한다. 인간학적으로 보면 ‘의미’란 “자신의 생각들을 발전시키고, 이미 주어진 적절한 사회문화적 해석들을 결정해주는 것들에게로 자신을 적응시켜가는 일이 가치 있게(sinnhaft) 만드는 능력”을 일컫는다. 여기서 의미 있는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자신의 행위를 지속적인 자기 정체성과 자기완성을 향한 동기(Motivation)를 의식적으로 이끌어 내는 삶을 말한다. 이 과정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세계에서 이미 주어진 의미들의 총체를 수용하고 그 안에서 자신을 동화(同化)시키는 행위를 통하여 생의 의미를 발견하려 한다.
특별히 20세기 인간학의 발전은 심리학적 연구 성과에 큰 힘을 입었다. 인간의 내면세계에 대한 관심은 인간만이 지닌 독특한 정신세계에 대한 관심으로 발전하여 인간의 합의미(合意味)적 행위를 단순히 심리적 단순기재로 환원했던 프로이드(G. Freud)와는 달리 이른바 ‘휴머니즘적 심리학(humanistische Psychologie)’에서는 인간이 지닌 다양한 정신적 가치들이 자신의 삶의 궁극적 목적을 향해 본능적이면서도 창조적인 자기 헌신을 이끈다는 점을 발견했다. 이들에게는 공통적으로 의미 질문이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 속에서 심화되어 우연성을 뛰어 넘는 필연성의 가치를 이끌어주는 원리로 이해된다. 이들은 인간의 조화와 균형 감각뿐만 아니라 생의 목표로 인간을 초월하는 신적 힘에 대한 헌신을 인가의 총체적 의미 완성(Ganzheit)의 욕구임을 읽어내었다. 이들의 학문적 공헌은 현대인이 빠진 자기중심적 삶에 기인한 소위 ‘하느님 콤플렉스(Gottkomlex)’ 속에서 자신의 고통과 상처, 죽음을 이겨내지 못하는 무능력 속에 있음을 발견하고, 서구 정신문화가 상실해간 상호 인격체 간의 공감과 신뢰의 상실을 회복하는 것이 오늘날의 생의 의미를 되찾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인간학의 발전은 개별적 인간의 내면세계 이외에도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공동의 의미 발견이라는 과제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인간의 사회적 행위가 ‘의미 있기’ 위해서 어떻게 행위를 규정지을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막스 베버 (M. Weber) 이후 이른바 ‘지식사회학(Wissenssoziologie)’에서는 인간사회가 우연적 현실세계 속에서 필연성을 찾기 위해 축적해 놓은 해석의 결실들 즉, 지식이 사회의 소산임을 문제로 삼아 다양한 문화적, 언어적, 종교적 제도들로 표현된 이 지식체계들(이데올로기)이 어떻게 인간의 의미 충족의 욕구와 부응할 수 있는지에 대해 비판적 관심을 가졌다. 이들은 인간이 한 편에서는 상호 주체적으로 나누어진 의미충족에 대한 인간의 의존성과 다른 한 편에서는 각기 다른 집단적이고 개별적인 의미들을 위협하는 것들의 구성적 요소들, 그리고 가변적 성격들을 파악하여 인간사회 안에 내재된 우연성의 위협들로부터 의미 체험을 종교를 통하여 통합되는 형태로 조직적으로 확립하였다. 한마디로 지식사회학에서 ‘의미’란 인간의 상호작용 안에서 발생하는 담론적 체계들에 대한 동화와 비판의 과정 속에서 일상의 현실로써의 우연성을 극복하기 위한 의미 발견의 노력이라고 볼 수 있겠다.
요약하자면 현대의 인간학적 발전 속에서 의미란 동물과는 달리 환경과의 독특한 관계 속에서 자신의 행동을 ‘의미 있게’ 규정하는 인간 내면의 능력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때로는 의식적으로 생의 궁극적 목표이자 의미 자체인 초월적 존재를 향해 지향하는 독특한 의미 충족의 과정을 개인의 내면적 세계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 집단적 행위 안에서도 이루어 나감으로써 현실세계 속에서 마주하는 우연적 현실을 생의 목표와의 연관성 속에서 가치 있게 만들어내는 의미 발견의 삶을 영위한다고 볼 수 있다.
4. 생의 해석학 - 의미 체험에 대한 신학적 해명
1) 궁극적 의미 추구로서의 종교적 체험
오늘날 실존철학에서 제기한 현대인의 회의론이나 무신론, 불가지론 등의 의미 부재의 체험은 현대인들이 “모든 것을 포괄하고, 지탱하는 전체”이자 ‘절대 의미(Unbedingter Sinn)’로서의 신, ‘포괄자’로부터 개별적인 실존의 우연성을 극복하고 삶의 의미를 발견하려는 종교적 삶의 양태를 포기함으로써 얼마나 인류가 빈곤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우리가 처음부터 제기한 ‘의미 질문(Sinnfrage)’은 무엇보다도 인류가 역사의 주어진 환경 속에서 무의미하게 현전(現前)하지 않고, 자신의 생을 의미 있게 방향 지으려는 실존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한 도정(道程)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제기해야 할 질문은 오늘날의 우연성의 체험과 의미 부재의 체험은 과연 종교적 체험의 가능 조건이 될 수 있는가하는 점이다. 만일 의미 부재의 체험에 빠진 인간의 의미 발견 혹은 의미 해석의 노력이 단순히 합목적성이나 행위나 경험의 ‘기능성(Funktionstücktigkeit)’ 혹은 ‘가치(wertigkeit)’로만 국한될 때 인간의 생의 궁극적 의미에 대한 질문은 사라지고 말기 때문이다. 이른바 진보에 대한 신념 속에서 행위의 의미를 인간이 스스로 설정한 목표를 향한 합목적성만으로 해석할 경우 의미에 대한 질문은 궁극적으로 자신이 어디서부터 유래했는지 그 방향성을 상실하여 무의미와 의미상실의 실존적 두려움을 넘어 인간이 삶과 죽음의 문제에까지 큰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
대다수의 종교학자들이나 종교사회학자들은 인간이 본성상 자신의 삶이 지향해야 할 방향을 설정해야할 필요를 느끼는 존재이며, 동시에 내면의 그러한 욕구에 부합하는 직관적인 ‘정향능력’으로서의 독특한 ‘종교적 감각(sense)’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 동의한다. 그래서 종교는 “암호와 같은 ‘우연성’의 모호함 속에서도 의미 부재의 체험을 의미로 충만한 세상으로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의 조건이 될 수 있다.” 그렇다고 우연성과 의미 부재의 체험이 곧바로 종교와 교회의 필요성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인간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지배하기 위하여 종교적 욕구 자체에 의미를 부여를 한다면 이는 마치 종교를 생의 성공이냐 실패를 가늠하는 도구로 전락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점은 무엇이 인간 스스로가 자유롭게 생의 의미를 찾기 위해 종교적 결단을 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하느냐는 점이다. 오늘날의 문제는 종교의 필요성에 대한 타당한 논증이 아니라 자신 안에 종교적 감각을 발견하고 이를 통해 생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찾아 낼 수 없는 통교능력의 부재, 사랑을 실천할 수 없는 무능력의 체험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유한한 역사적 의미 체험의 과정 속에서 궁극적 의미 발견으로서의 종교적 체험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칸트는 “인간이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이성의 모든 물음을 하나로 묶어주는 최후의 물음이자 최초의 물음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이 물음을 위해 그가 먼저 던진 세 가지 질문들 중에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란 질문은 인간의 합목적적 미적 판단을 근거로 하여 절대자에 대한 정서적 의존으로서의 종교의 의미에 대한 질문과 관련되어있다. 현대 실존주의적 해석학은 인간이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 피투된 현존재(Dasein)라는 사실에서 출발하여 역사 안에 실존하는 인간은 자신의 실존적 불안을 극복하기 위하여 매 순간 자신이 접하게 되는 사건들 속에서 자신의 행동이 ‘의미 있는(sinnhaft)’것인지 묻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물음을 던지는 정신적 존재로서 인간은 이 물음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이 스스로 세운 목표와 자신의 현실 체험과 부합하는지를 묻게 되고, 그 물음에 대한 긍정적 해답을 찾기 위해 자기의 모든 경험들을 총체적인 삶의 연관성에 편입시키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이 같은 ‘의미기획(Sinnentwurft)’은 구체적인 현실을 긍정하고 수용할 수 있는 가능 조건이지만, 동시에 이러한 의미기획이 언제나 개별 인간들에게 명증적으로 밝혀지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본성상 인간은 자신의 의미기획이 스스로의 체험적 결단에서가 아니라 이미 결단을 내리기 이전에 자신에게 그러한 결단이 ‘가치 있다’는 것을 긍정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의미지평’에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해석학에서 말하는 전이해의 지평으로서 개별 인간은 자기 이전에 소여된 의미기획의 총체적 맥락 속에 자신의 의미 기획을 수립하고, 이에 맞는 삶의 행동 양식과 지표를 결정한다.
문제는 이렇게 전제된 의미기획의 총체가 과연 개별 인간에게 확고하게 수용될 수 있을 만큼 그 명증성을 소유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특별히 이러한 의미기획이 인간 실존의 최종적 물음 즉, 존재의 상실을 의미하는 죽음 앞에서는 절박한 질문이 될 때 이 죽음이라는 무의미의 한계상황(야스퍼스)을 뛰어 넘는 초월적 의미기획이 과연 개별 인간 실존에게 확고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심어줄 수 있느냐는 피할 수 없는 물음이 발생한다. 분명한 사실은 인간이 철저하게 자기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과정에서 그것이 내재되어 있던, 외적으로 드러나던 간에 현상적인 사실들을 뛰어 넘어 존재의 궁극적 근원에로 자신을 개방하는 절대적 신뢰 행위 없이는 그러한 종교적 결단을 내릴 수 없다는 사실이다.
참된 종교적 체험은 바로 이러한 의미기획이 ‘절대 의미(Absoluter Sinn)’로 인간에게 다가와 무한한 존재 지평을 열어 보이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또한 하느님이 인간에게 절대 의미로 다가올 수 있다는 가능성에 인간이 자유로이 자신을 열어 보이는 것이 이성적으로 타당할 뿐만 아니라 책임을 질 수 있는 일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때로 이러한 기획이 인간의 본능적 욕구에 대한 투사(포이에르바흐)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종교적 체험은 벨테의 말처럼 인간에게 때로는 ‘무(無 Nichts)’처럼 숨겨져 있으나 텅 빈 ‘무’가 아닌 인간 실존에게 의미를 선사하고 보증해주는 절대적 힘으로서의 ‘무’로 나타날 수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칼 라너(K. Rahner) 역시 인간은 형언할 수도 접근할 수도 없는 초월적 절대 타자인 절대 신비인 하느님이 “모든 인간적 인식을 근거지우고 인간 실존의 총체적 지평”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의 초월 신학적 지평에서 보면 인간은 “세계 내 정신(Geist in Welt)”으로서 자유와 책임의 존재로서 주제화되지 않은 하느님 인식 속에서 인식주체인 자신을 의식하고 거룩한 신비를 향해 무한히 개방된 경험을 한다. 라너가 표현한 이 ‘초월론적 경험’은 인간이 존재의 무(無)로 매몰되지 않고, 오히려 절대적 충만한 의미 자체인 신에게로 철저하게 개방된 존재임을 깨닫는 독특한 체험 즉, 종교적 체험에 이르게 된다. 그의 말대로라면 “인간이 물음 그 자체를 묻고, 사유 그 자체를 사유하고 다만 인식의 여러 대상만이 아니라 인식의 자리를 묻고, 다만 초월에서 범주적이고 시공적으로 파악된 사항만이 아니라 초월 그 자체로 눈을 향할 때, 그때 인간은 비로소 ‘종교적인 인간’(homo religiosus)이 되기 시작한다.”
이렇듯 종교적 체험은 인간이 절대적 의미근거(absoluter Sinngrund)인 하느님을 자신의 현존재를 완성해주는 궁극적 절대 타자로 수용하면서 발생한다. 이는 인간이 개별적인 의미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지평이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의미 연관성(Sinnzusammenhang)’ 속에서 나와 함께 역사의 여정을 걸어가는 ‘이웃’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구체화된다. 즉, 한 인간이 개별 역사에서 던지는 의미에 대한 질문은 필연적으로 이 의미 질문과 연관되어 있는 나의 ‘이웃들’과 공동의 지평을 형성하고, 이 둘 사이의 인식과 체험 지평의 융합과 확장 속에서 새로운 의미 체험이 발생하게 된다. 이 새로운 지평 속에서 획득된 의미 체험은 인간이 이제까지 유지해온 의미 해석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고, 절대 타자이자 거룩한 신비로 다가오는 ‘궁극적 의미’인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실존적 우연성들의 극복이 이루어지는 것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2) 의미 체험의 그리스도교적 해명
종교적 체험이 절대 의미에로의 인간의 자기 개방과 참여이자 생의 의미의 궁극적 성취의 체험이라고 한다면 이 체험은 역사적 실존으로서 인간의 진면목이 “통찰될 수 있고, 통찰되어진 것이어야 하는 것인 동시에 명백한 사실이자 우리의 실존적 어두움을 밝히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스도교는 전통적으로 이러한 종교적 체험을 늘 ‘하느님 체험’으로 이해해왔고, 인간은 인격적 절대 타자(他者)로서 하느님과의 만남 속에서 생의 궁극적 원리이자 의미 자체인 하느님을 인식할 수 있다고 가르쳐왔다. 즉, 하느님은 자신을 역사 안에서 인격적으로 계시하시고 인간과 친교를 맺음으로써 인간의 유한적 실존체험에 해당되는 ‘우연성’을 당신의 구원 섭리 안에서 필연적으로 성취시키신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계시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존재이며, 역사 안에서 타자와의 관계를 통하여 의미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이 의미의 궁극적 완성을 하느님과의 인격적 관계 속에서 요청하고 발견한다. 역사적 실존인 인간은 결코 자신의 존재의 충만을 스스로 이루지 못하고, 언제나 타자로부터, 인격적이고 사회적인 통교 안에서 해방된 자유로 체험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해방된 자유’란 다분히 한 인격적 행위가 타자의 자유를 자기모순에서 해방시키고, 이를 충만하게 완성 시켜주는 참된 자유를 일컫는다. 이는 인간을 자유롭게 구속하는 절대 타자로서 하느님과의 인격적 만남에서만 체험 가능한 자유이며, 이를 그리스도교는 ‘구원’이라고 표현해왔다.
그리스도교는 이러한 인간의 의미의 완성, 의미 충만의 해방된 자유가 역사 안에서 실존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 사건 안에서 취소할 수 없이 완전한 형태로 성취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우연적 현실들과 의미 부재의 체험들 속에서 역사의 중심을 관통하는 하느님의 절대적 개입과 의미 완성의 계획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발생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는 의미 부재의 우연성 속에서도 하느님의 심오한 신비가 인간의 생의 의미를 완성시켜주며, 동시에 인간이 스스로를 이 신비에로 초대되었음을 깨닫게 해주는 그리스도교적인 의미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 체험이 하느님 체험의 근간이라 하더라도, 그리스도교 신앙은 단순히 종교적 체험의 한 형태로서 역사 안에 제공된 것은 아니다. 만일 그리스도교가 고백하는 역사 안에서의 하느님의 자기 계시가 단순히 인간의 의미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에 불과하다면 그래서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이 세상의 무의미를 극복하는 ‘대안’이나 ‘지침’정도로 제시된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자기 계시는 개별 인간들이 역사 안에서 우연적으로 체험한 하나의 종교적 체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궁극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인간의 의미 발견의 최종적 응답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교 신학의 역사는 한 인격적 실존이었던 나자렛 예수 안에서 어떻게 인간의 궁극적 의미와 희망이 완성되었는지, 그리고 유한한 인간에게 철저하게 숨겨져 있는, 포괄적이면서도 형언할 수 없는 절대 신비로서의 하느님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셨는지에 대한 진지한 해명의 과정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점은 오늘날 신학이 어떤 점에서 실존적 의미 부재 속에서 생의 의미에 대해 묻는 인간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더 이상 능가할 수 없는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의미의 완성 즉, 구원자이신지를 밝혀내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께 대한 완전한 순종 속에서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를 사신 인간이었다는 사실과 동시에 인간들과 가장 깊이 결합된 삶을 사신 분이심을 해명하는 데 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느님과 인간을 향한 절대적 사랑은 예수가 용서와 자기비허의 하느님의 사랑의 궁극적 완성을 인류의 역사 안에서 완전한 형태로 성취했다는 사실에 있다. 이점은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 안에서 하느님의 세상을 향한 자기 계시가 인류의 죄악과 유한성, 죽음에 이르는 우연적 현실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발생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던 것일까? 예수를 통한 하느님의 ‘자기확약(Selbstzusage)’이 인간 세계의 더 많은 가능성들과 더불어 “다르게 될 수 있다”는 우연적 현실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나자렛 예수 안에서 발생했던 것일까?
생의 의미에 대한 질문은 인식 주체인 인간이 자신의 삶의 정향욕구를 역사 안에서 지각할 수 있는 형태로 발생한 하느님의 절대적 사랑에 대한 인식 안에서 발견하고 이를 향해 자유로운 결단을 내릴 때 그 해답이 찾아진다. 신앙인이란 자신의 삶의 체험 속에서 이 사랑이 악을 이기고 의미를 선사한다는 것을 확신하고, 이로써 삶의 진리를 발견한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은 인간을 구원하는 이 절대적 사랑이 실제로 역사 안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비록 창조주인 하느님과 피조물인 인간 사이의 상실된 생의 질서와 자연과 인간, 영과 육 사이의 와해된 조화가 구원을 간절히 바라는 인류를 비구원적 상황에로 몰아넣었지만, 성경, 특히 복음서들이 증언하는 바와 같이 예수의 제자들은 자신들을 괴롭히는 심한 비구원적 삶의 애환을 예수의 말씀과 행업 속에서 참된 의미의 사건으로 새롭게 이해했고, 절대적 사랑의 예수의 인격 안에서 의미의 충만함을 깨달았다. 예수와의 만남 속에서 즉, 육화의 신비로부터 역사 안에서 예수의 공생활과 구원을 향한 그의 죽음과 부활사건 속에서 인간은 세상의 우연적 현실이 하느님의 절대적 의미로 전환되는 체험을 하였다. 예수는 인간들이 현실세계에서 겪는 우연성의 체험들, 가령 병, 죽음, 고통, 박해, 미움, 좌절 등을 소중하게 여겼고, 많은 이들로 하여금 이 사건들의 참 의미가 비록 현실 속에서는 어둠에 갇혀 있지만, 하느님 나라의 궁극적인 도래와 완성을 통하여 구원과 자유, 치유와 평화라는 생의 의미를 선포함으로써 인간의 실존적 변화를 이끌었다.
예수의 실존적 삶에 동참한다는 것 즉, 모든 것을 수용하고 타인을 위해 자신을 바치며 스스로를 비우는 삶의 지평에 동참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미 체험의 출발점이다. 하느님 안에서 의미의 충만이 현현됨을 신뢰하는 태도는 인간에게 드러난 예수 그리스도의 심오한 사랑이 보편적인 가치와 넓이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을 포함한다. 이는 인간을 삶의 신비의 가장 깊은 내면에로, 더 나아가 하느님의 자비의 심연에로 이끄는 역할을 한다. 이런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특정한 교파적인 신앙의 가르침이나 사상들, 원리나 규범들에 예속되지 않고, 모든 인간사를 포괄하면서도 능가할 수 없는 사랑의 승리에로 우리를 내면 깊이 이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은 그의 절대적인 의미완성이라는 넓은 의미에서 보면 타인의 타자성에 대한 철저한 인정과 아울러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삶을 조건 없이 봉헌한 삶으로 각인된 예수의 자기 봉헌적 사랑의 역사 안에서 그 정당성이 발견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비허적 사랑이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조건 없는 자기비허적 사건임을 고백할 때, 우리는 예수를 영원한 ‘로고스의 육화’ 혹은 ‘하느님과 본질이 같으신 분’으로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이 점이 인간이 유한한 역사 안에서 제기하는 의미 질문에 대한 명료하면서도 신앙적 결단에로 이끄는 대답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의미의 궁극적 완성이 자유로운 결단과 초월에로의 개방성이라는 인간학적 해명에서 본다면 그리스도교는 인간의 생의 의미에 대한 모든 질문을 “예수 그리스도를 따름”이라는 하나의 수렴점에로 집중시킨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의미 체험이란 생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고 자신의 삶의 근거와 의미에 대하여 단지 이성적으로 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철저하게 포용되고 받아들여지며 이끌려지고 있음을 체험하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자신의 판단과 통찰을 뛰어 넘는 예수의 인격에 자신의 삶의 열정과 운명을 내어 맡기고, 예수를 향해 자신을 포기하는 즉, 신뢰에 찬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그 안에서 비로소 능가할 수 없는 의미의 충만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예수를 따름은 또한 인간이 드러내는 온전한 의탁의 태도를 전제한다. 이 온전한 의탁의 태도야말로 의미의 충만을 깨닫는 본래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예수가 하느님에 대한 신실한 열정과 인간에 대한 애끓는 동정심 속에서 드러낸 그의 의미 질문과 발견의 여정에 동참하는 것이다. 이 점은 이성으로 정향된 인식방식이 아닌 예수의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느님의 고통과 고통 받는 이웃들을 향한 공감을 가슴 깊이 간직한 예수의 독특한 이해 지평에로의 창조적 융합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은 인간의 의미 질문에 대한 궁극적 해답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예수가 보여준 사랑의 삶의 형태와 다가올 하느님 나라에 대한 절대적 신뢰에 대한 분명한 확신에 동참한다. 여기서 하느님 나라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의 핵심이기도 한 사랑이 역사의 우연성과 의미 부재의 체험을 넘어 궁극적으로, 다시 말해서 필연적으로 승리할 것이라는 신뢰의 완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리스도 신앙 체험은 본질적으로 역사 안에서 발생한 하느님의 말씀 즉,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업적에 뿌리박고 있으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과의 만남 속에서 본연의 ‘나’를 발견하는 사건으로 경험된다.
오늘날 다원주의의 물결과 세속화의 거센 도전 속에서 교회가 처한 정체성의 위기는 그리스도교의 의미 체험의 설득력이 상실되어가고 있음을 말해주는 표징들이다. 그러나 이 같은 사실이 그리스도교가 다른 종교들이나 신념들과 별 차이 없이 인간 실존의 의미 해석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 신앙은 궁극적 신비로 다가오는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께서 역사 속의 우리와 같은 실존을 사신 나자렛 예수를 통하여 자신을 남김없이 열어 보이셨고, 우리는 바로 그 예수가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 사건을 통하여 철저하게 하느님과 인간을 향한 완전한 자기비허의 실존 안에서 우리의 궁극적 의미 질문의 해답을 찾았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 점은 최소한 거룩한 하느님의 신비에로 인도 되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절대적 확신이며, 철회할 수 없는 전인적 요청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가톨릭교회가 이웃 종교들 안에서 하느님의 절대적 신비가 부분적으로나마 발견될 수 있다고 고백하는 것은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에 대한 확신에 근거한 것이지만 이러한 선언이 그리스도 신앙을 상대화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교회는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1고린 13, 12)”이라는 바오로 사도의 고백처럼 우리에게 감추어진 하느님의 거룩한 신비에 전인적으로 투신할 것을 요청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개별적 의미 체험들의 만남과 융합 속에서 자신을 인식해야만 한다. 즉, 교회는 개별 실존들의 의미 체험들은 상호 주체적인 인격 관계 속에서 마주하는 우연적 현실들과 비구원적 상황들을 공동으로 표현되고 고백하는 자리이며, 신앙 공동체가 생의 의미를 찾는 순례의 여정 속에서 자신을 정체성을 발견해야만 한다. 교회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요한 14, 6)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궁극적 의미 완성으로 고백하고, 이에 대한 절대적 신뢰 속에서 복음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선포할 때 그리스도교 의미 체험의 보편적 의미는 밝혀지게 될 것이다.
첫댓글

역시, 저한테는 인내를 요구하는 글... 단락 단락 블럭을 지정하면서 읽었습니다. ^^
그리스도교 신학은 우연적 현실 속에서 존재의 필연성을 찾는 '의미 발견'이다.
칼 라너는 현대인은 더 이상 '진리'에 대해 말하기 보다는 '의미'를 찾는 일에 몰두한다.
'의미'의 뜻은 영적의식이나 자의식에서 '방향설정' 또는
"지각의 방향성" (지각은 감각적 직관의 근원적 형태)이라는 어원적 의미를 가진다.
칸트는 '의미'를 "대상의 현실을 바라보는 직관의 능력"이라 한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설명되지 않는 합리적이지 못한 총체적 위협(불확실성)앞에 선 현대인의 고뇌'를 다룬다.
종교는 '우연'이 신의 섭리를 체험하는 자리 즉, "복된 이에게 선물처럼 주어진 뜻밖의 일들"로 강조한다.
'삶의 의미', 혹은 '생의 의미'는 인간의 삶이 "충만하고 완성된 목표"에 도달했을 때를 말한다.
라너가 표현한 '초월론적 경험'은 인간이 존재의 무로 매몰되지 않고,
오히려 절대적 충만한 의미 자체인 신에게로 철저하게 개방된 존재임을 깨닫는 독특한 체험,
즉 종교적 체험 (하느님 체험)에 이르게 된다.
'궁극적 의미'인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실존적 우연성들의 극복이 이루어지는 것을 체험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우연적 현실들과 의미부재의 체험들 속에서 역사의 중심을 관통하는
하느님의 절대적 개입과 의미 완성의 계획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발생한다고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최종적이며 궁극적인 의미의 완성 즉 '구원자'이시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